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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손병걸 孫 秉 杰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푸른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등이 있음.
thsqudrjf@hanmail.net
복직
동동주를 들이켠다 사발에 뜬 밥알들과
오랫동안 삭혀온 아우의 속엣말이
자꾸만 내 목구멍에서 쿨럭인다
목을 겨누며 왔다 서슬 퍼런 해고였다 때마다 소리쳤다
정확한 구호였다 상식을 말했다 그래서 더 길어진 것일까
그사이 아내는 자주 웅크렸다 결과는 암이었다 유년의 아이들은 성장했다
총을 들었다 철조망에 긁히고 찔렸다 무수한 달빛을 무사히 삼킨 뒤
이력서에 기록할 군필자가 되었다
무슨 힘으로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나? 이제는 어디를 향해
어떤 구호를 내걸어야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지난날의 상흔들이
주저흔이 되었다 승리가 시큰한 열매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잠깐 다녀갈 위로임을 알았다면 장딴지의 실핏줄을
그토록 팽팽하게 당길 수 있었을까
큰 소리로 외친 구호가 동지들 앞에서 유머가 될 때까지 농성은 길고
햇볕은 따가웠다 이슬은 차가웠다 단식은 매우 잦았다
이건 선술집 무용담이 아니다 아우는 늘 끝이 출발이었다
그래서 다시 잔을 든다 단숨에 쭉 들이켠다 나도 얼른 잔을 비운다
식탁 위에 탁, 소리 따라 내 잔 내려놓는 소리! 아우는 벌써 계산서 집어 들고
카운터의 맨 앞이다 스무해 이전부터 아우는 정정당당 맨 앞이다
심층취재
그런 곳이 있었어 온갖 쓰레기들이 쌓여서 산이 된 곳 말이야
사람들은 그곳을 난지도라 불렀어 썩은 물이 쿨럭쿨럭 솟구치는
거기, 한가운데 한 여자가 버려졌어
휘두른 게 쇠파이프인지 몽둥이인지
그 여자 머리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어
신발도 한짝이 벗겨져 있었어
여자를 버린 승합차 안에서는 용역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노조폭력이 일상인 공장으로 돌아갔어
몸을 일으킨 여자는 출구를 찾아 한나절을 절룩였어
쓰레기산은 넓고도 넓었어 눈꺼풀엔 피딱지가 앉았어
갈 길이 캄캄해졌어 앞을 밝혀주는 카메라는 없었어
이후에도 “공장 내 성폭행을 멈춰라!” 피켓을 들 때마다
그 여자의 팔다리가 부러지고 온몸에 멍이 들었어
까무룩 잠이 든 전신마취 횟수가 두자리를 넘길 즈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그 넓은 쓰레기산이
그러니까 섬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졌어
거기, 분기탱천할 방송사들의 건물과
초고속 송출시스템과 고성능 카메라들이 켜졌어
환호와 기대는 성급했어 쇠파이프인가 몽둥이인가
혹은, 머리가 깨질 만큼 강도가 높은 재질이었는가
그 소재와 기술은 어떤 경제적 가치가 있는가
고화질 평면 스크린은 진종일 우아했어
한번도 치유받지 못한 여자의 트라우마는
스물네시간 플래시가 터지는 마이크와 스피커들이
건물 밑 땅속에 가둬두었다가 아예 묻어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