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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송정원 宋靜媛
1979년 서울 출생. 2020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sjw8542@gmail.com
여름, 여름 아이
기억이 목구멍에 걸릴 때가 있다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을 때
연필을 깎는다
흑연 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선풍기를 등지고 앉아
나무 냄새는 칼날 위로 올라타 춤을 추고
칼날은 나 대신 검게 그어진다
깎을수록 깎이는 것은 칼의 예리함이어서
무뎌진 칼은 어느 순간
내가 쥔 것에 파고들지 못한다
흙에는 지금까지 죽은 모든 여자가 있고
연필의 몸은 그들의 품에서 자랐지
그러니 연필을 꼭 쥐는 것은
그들과 한꺼번에 포옹하는 방법
겹겹의 체온에 기대
끈끈한 체액을 흘리며
침묵의 소리를 받아 적는다
이름의 뒷면을 옮겨 적는다
내가 가두었던 검은 머리 아이가
사각사각 나타날 때까지
나를 닮은 아이의 눈에는
나에 대한 원망이나 복수심이 없고
아래 앞니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
아이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내 앞에 차가운 물 한잔을 둔다
검지와 엄지에 힘을 줄 때마다
아이가 움직인다
오른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민소매 끈을
자꾸 추어올리는 아이의 손
그래도의 마음
거리는 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사람들
사계절의 모든 옷을 몸에 수납하고 혼잣말을 크게 하는 여자
여자는 돌고 있는 전자레인지 같습니다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집니다
안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데워지지도 종료되지도 않는 상태는 조금 위험합니다
아, 이건 내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깜깜해지기 위해 극장에 갑니다
깜깜한 곳은 마음껏 깜깜해지기 좋아요
아이 몸에 선크림을 발라주는 남자
깁스한 다리로 달리는 학생
폐버스 안에서 웃는 아이들
자신의 해부를 지켜보는 여자
그들의 눈물이 내 눈에서 흐르게 둡니다
극장에 몰래 나를 버리고 나옵니다
저기 쪼그리고 앉아 튀밥 기계를 돌리는 남자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튄 튀밥을 쪼아 먹는 비둘기들
튀밥을 기다리는 아이와 엄마
뒷짐 지고 구경하는 백발의 여자
누구도 새들을 위협하거나 쫓아내지 않습니다
물에 떨어진 잉크 한방울처럼
이름 없는 마음이 퍼집니다
보도블록 사이의 풀은 잡초가 아니라고
다 이름이 있다고 말하던 여자가 떠오릅니다
무명의 마음에 그래도,라는 이름을 지어주려고요
그래도, 어때?
비둘기들이 고갯짓으로 찬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