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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지연 祉娟
1971년 전북 임실 출생. 2013년 시산맥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건너와 빈칸으로』 『내일은 어떻게 생겼을까』 등이 있음.
kiki2174@hanmail.net
음계(陰界)
마라도에 혼자 사는 사내는 가끔 상어를 만난답니다 한번 만나면 피하고 두번 만나면 상어 코를 만진답니다 상어는 코를 만지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대요 나는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콩밭에서 뱀하고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서로 물려던 게 아니어서 등 돌리고 뛰었습니다 아마 뱀도 나처럼 혼비백산 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뛰다보니 풀이 우거져 있고 큰길은 멀고 자갈 무덤이 쌓여 있습니다 이쯤 되면 갔겠지 다시 돌아서서 콩밭 옆 고구마 고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뱀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마라도 사내처럼 뱀 코를 만질까 그건 정말이지 내가 의도치 않은 생각이었습니다 뱀이 놀라서 눈이 커진 사이에 나는 귀신처럼 웃으며 얼어붙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귀신에게 홀려 하루 종일 돌았다는 붉은대기 밭이었습니다 뱀은 바위에 돌나물이 돋아나듯 몸을 스르르 풀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초초하게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 같았습니다 나는 내 안의 서러운 짐승 껍질을 모두 벗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뱀이 나에게 홀려서 밭을 돌다가 내 껍질을 코부터 벗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콩꽃이 필 때 뱀과 나는 서로의 발소리를 음계(陰界)로 들었습니다
담기다
겨울이 되면 물건도 사람도 사라지지 한닢 눈발처럼 고구마는 할아버지 방 윗목 뒤주에 담겼다가 함지박으로 사라지고 무는 지푸라기 움집에 담겼다가 밤마다 놋쇠 숟가락으로 긁히며 사라지고 먹감은 돼지막 위에서 지푸라기를 깔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뒤꼍 툇마루에 있던 생강 호박물은 텔레비전 보면서 사라지고 할머니는 길쭉한 베틀에 앉았다가 삼베옷을 입고 사라지고 내 어린 날은 김 새지 말라고 하얗게 돌린 시룻번처럼 사라졌지
그래 한닢 눈발처럼 흰 눈발은 떡시루처럼 밑에 구멍이 있어서 어둠이 익어가다가 끝내 흰빛도 없이 발자국도 없이 사라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