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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여진 韓汝眞
2019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가 있음.
hotdolsotbob@naver.com
사운드트랙
지금 강원도에는 눈이 내리고요
다음 곡 듣겠습니다
*
쌍둥이 자매를 둔 어머니가 보내온 사연입니다
*
거기에도 눈이 내린다지요
제 목소리 들리시나요
……노래 하나 듣겠습니다
*
오늘 같은 날에는 유독 잊어버린 것들이 떠오릅니다
예를 들면…… 집으로 가는 길
*
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연을 듣다 잠시
졸았나
엄마, 엄마
언니, 언니
불러도 집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없는 집은 왠지 낯설어서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다 문지방을 밟았다
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더라
나쁜 것들을 잊기 위해
꿈속에서 모은 사연들로 밥을 지어 먹었다
비릿한 풋콩의 맛
배부르니 또 잠 쏟아진다
어디선가 베틀 소리 들리고
빈집에는 길쌈하는 이 없는데
저절로 돌아가는 베틀과
하얀 천에는 하얀 자수 화려하다
낙산사의 해당화
금강산의 금강야차
창도군의 꿩과 사슴
손바닥으로 쓸어보며
이게 다 언제 적 이야기일까
모든 아이는 죄와 함께 태어난다고 했다
장독대 깨서 까만 간장 국물로 흰 눈밭을 어지럽힌 일
하도 울어서 소매 끝이 다 닳아버린 일
계란 껍데기를 잘못 삼켜 잠시 숨이 멎은 일
뜨거운 바닷물에 들어가 차가운 몸으로 나온 일
대관령을 달리던 자동차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 일
그 모든 것이 다 나의 일이었음을,
그래서 아이는 죄와 함께 멀리,
엄마랑 언니랑 나
우리는 셋 이 집의 방은 다섯
남은 것들로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누군가 알려주면 좋을 텐데
누군가 집까지 바래다주면 좋을 텐데
(주파수 조정하는 소리)
여기는 엄마의 꿈이에요 언니의 꿈이에요
꿈에서 문지방 밟거들랑 그 꿈 나에게 팔아요
하얀 자수 수놓은 하얀 옷 완성되면
나 얼른 입고 집으로 돌아갈게요
(다시 주파수 조정하는 소리)
베틀 기계가 멈춘다
식탁 위에 올려둔 하얀 호빵 하나
사라진 일
누군가 눈치채길 바라며
*
이제야 오셨군요
오래 기다렸어요
노래 한소절 들려드릴까요?
*
(라디오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 뉴스속보, 인터뷰, 심층토론, 폭설주의보, 보험광고, 영화광고, ‘다들 안전한 귀갓길 되세요’라는 디제이의 목소리.)
환대
이름을 알려달라 했는데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어서
마당 한가운데로 돌을 던졌다
괜스레 심통을 부렸다
한번 이름을 들어버리면
그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지요
돌아보니 어릴 적 나를 받았다는 산파였다
그러고 보면 그건 몇번째 생이었더라
과연, 이름은 가장 강력한 예언이었다
끝날 때까지 벗어던질 수 없던 생
할머니는 내 이름 기억나?
내가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
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남의 집 애들 크는 속도 좀 봐요. 어르신 오래 사셔야 합니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또 올게 엄마. 접이식 테이블은 창고에 있어요. 바로 이곳에서 부인께서는 남편분에게 목 졸라 살해당하셨습니다. 거 그만 좀 뛰래도. 전통과 혁신 사이의 균형이란 말이죠. 선물 포장이 아직 덜 되었는데요. 저 오살할 놈, 염병할 놈. 정말 유감입니다. 난 골덴 바지 입기 싫다니까. 자기야, 사씨 아저씨네 집에 이것 좀 가져다줘.
소란이 끝났을 때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두 잠시 쉬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