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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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C. 더글러스 러미스 『래디컬 데모크라시』, 한티재 2024

민주주의를 말할 때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jhwang6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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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폐허가 된 미래를 그리는 SF에도 이따금은 문명이라 할 만한 것이 용케 살아남는다. 물론 그때의 문명은 오늘날과는 판이한 성격이다.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특징 하나는 자연의 소거인데, 모종의 사건으로 자연환경 대부분이 황폐해졌거나 모든 것이 인공화된 세계가 되어 있는 식이다. 간신히 이어지거나 완전히 달라진 미래문명에서 자연만큼 자주 소거되어 있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꼽을 수 있다. 기술적으로 전진했든 후퇴했든, 위기를 극복했든 아니든, 어쨌든 민주주의적이지는 않은 세상이 되어 있기가 십상인 것이다. SF 속 잔존한 문명을 지금과는 전혀 다르다고 느끼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 (자연과 함께) 민주주의의 소거라면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것인가가 미래의 운명을 좌우하리라는 뜻도 된다.

‘소거’까지는 아니어도 소거를 예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위기상태라는 이야기를 오늘의 민주주의를 두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위기이기에 더 주목받는가 아니면 더는 주목받지 못한다는 위기마저 더해지는가는 중대한 차이인데,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 민주주의는 위기이며 동시에 뜨겁게 주목받는다. 민주주의적 제도의 오용과 훼손이 자행되는 한편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대다수의 열망이 끓어오르는 이런 사정은, 이를테면 민주적 제도를 큰 무리 없이 운영하지만 민주주의를 ‘열망’까지 하는 사람이 극히 드문 경우에 비해 더 민주주의적일까 아니면 덜 민주주의적일까? 제도의 세부를 따지지 않고는 불합리한 비교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에서 무엇이 근원적인지 되짚어보게 해줄 이 질문에 『래디컬 데모크라시』(Radical Democracy, 1996, 이승렬·하승우 옮김)는 ‘더 민주주의적’이라 답할 것 같다. “평화가 평화협정이고 정의가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고 말하지는 않는”(39면) 것처럼 제도가 곧 민주주의는 아니며 따라서 그 제도의 여하한 운행은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대체 뭐란 말인가 하는 근본적인(‘래디컬’한) 질문이 뒤따라 나온다면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준비가 된 셈이다.

제도가 곧 민주주의는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미국 출신 사회운동가인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Douglas Lummis)는 ‘민주주의 상태’라는 표현을 도입한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필리핀(저자가 초고를 쓸 때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의 ‘피플파워’ 혁명은 이내 “자유주의 정치를 복구하느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 버”(37면)렸고 ‘피플파워 헌법’ 역시 “발전이 민주주의를 잠정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고”(124면) 명시하는 등 제도적 한계가 뚜렷했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 상태’의 탁월한 사례라는 위상을 잃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민중이 다스리는 것”(60면), 곧 민중의 손으로 권력이 발휘되는 상태라는 간명한 명제가 이 책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주의는 어떤 존재일 수 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일 뿐”(367면)이라는 또다른 설명과 부합한다. 민주주의가 제도뿐 아니라 개인, 자유, 참여, 공정 같은 것들과는 쉽게 연결되면서도 문자 그대로 민(民)의 자기통치, 곧 ‘민중권력’의 차원은 곧잘 망각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책이 어째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정명(rectification of names)에 대한 요청”(48면)이라 했으며 또 어떤 의미로 ‘래디컬’함을 내세웠는지 이해하게 된다.

짐작건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여길 테지만 ‘민중’과 ‘권력’이라는 두 키워드는 거의 기피된다고 할 만큼 드물게 거론된다. 권력이란 으레 억압하거나 부패하는 (대개 둘 다인) 것이고 민중이든 뭐든 ‘집단’이란 대개 권력을 추종하거나 그에 굴복하는 존재라는 인상이 일반화된 탓이다. 이 책은 그런 통념을 겨냥하며 민주주의가 실행되려면 “원칙적으로 민중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집단을 구성해야만 한다. (…) 민주 공동체의 상식은, 우연이 아니라면 서로에게 도덕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었을’ 사람들 사이에 우연찮게도 이해관계가 하나로 합치되는 것, 그런 것이 아니다”(60면)라고 잘라 말한다. 민주주의에 무슨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건 없고, 권력에 맞선 ‘단독적’ 개인(들)을 무한히 긍정한들 민중의 집단적 권력행사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자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나키즘을 택하겠고 아나키즘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이라 말할 사람들에게 이 책은 민주주의가 아나키즘보다 더 ‘래디컬’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보통 아나키즘은 민중을 해방시키는 동시에 권력을 아예 없애 버려서 민중이 자유를 누리더라도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한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정치 영역이 폐지되어 민중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지배를 받거나 급진적인 개인주의로 분리되어 더 이상 하나의 민중으로 구성되지 못하는 사회를 구상한다. 그러나 근원적 민주주의는 민중이 공적 영역에서 다 함께하는 것을 상상한다.”(75면)

이 책이 내건 ‘래디컬’이란 민주주의야말로 다른 어떤 ‘주의’보다 더 급진적이라는 뜻과 함께 민주주의를 그 본뜻에서, 즉 근원적 차원에서 논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에 더해 역자 서문은 민주주의가 “세계의 근원적(radical) 상태”(11면)임을 함축하는 표현이라 설명하는데, 이 풀이가 설득력있게 뒷받침되려면 책의 또다른 강조점인 ‘민주주의의 덕목’으로 향해야 하리라 본다. 러미스는 필리핀의 사례가 그렇듯 민주주의 상태가 단명할 가능성을 의식하지만 이를 내재적 한계나 모순으로 말하지 않으며 빛나는 한 순간의 치명적 매력 같은 것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민주주의 상태를 단명하지 않게 하는 문제는 마치 “어떻게 핵융합반응을 지속시키면서 통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처럼 난감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민주적인 핵융합반응을 파괴하지 않고도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정치적인 덕목이라 불리는 강력한 자기장”(269면)이라 답하는 것은 이 책 자체의 분명한 덕목이다.

민주주의의 덕목 가운데 하나인 ‘약속’은 “인류가, 벌을 내리는 신이나 처형하는 리바이어던, 양심의 가책, 또는 착취 노동 질서가 가하는 처벌 등에 구속받지 않으면서도 질서를 잡는 방식이다.”(334~35면) 집단으로서의 민중에 대한 오랜 ‘공포’를 반복하는 대신 민중에게 ‘민주주의 질서’를 만들 역량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인데, 여기서 ‘민주주의의 질서’는 무슨 특이한 상황이 아니라 “억압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상태”, 곧 상식적인 상태의 “일의 질서”(327면)이다. “노동자들이 자기 일을 통제하는 곳에서도 그들이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일하는 건 아니”(323면)듯, 노동에서 자연을 억압하거나 자연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로 조절되고 누그러진 자연에게 복종하”(220면)듯, 또 이를테면 더 숙련된 장인에게 항구적으로 종속되지는 않은 채 순순히 따르듯, 일이 되게 하는 자연스러운 경로를 찾아가는 것이 그와 같은 ‘일의 질서’이다. 민중의 역량인 ‘약속’의 덕목은 그 역량에 대한 ‘신뢰’와 곧바로 이어져 있다. 저자가 “민주주의 신앙”(347면)으로 부르는 이 신뢰 역시 자연스러운 덕목이다. 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아들 이삭을 죽이는 터무니없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을 죽이지 않는 것이 진짜 신의 뜻임을 단박에 아는 상식적인 “실제 인간에 대한 신앙”(같은 면)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상식”(58면)이라는 주장이 여기서 비롯되며 ‘래디컬’이 ‘근원적 상태’라는 주장도 그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1996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은 이토록 뒤늦게 도착했다는 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한국 민주화의 역사, 그리고 그 혁명이 아직 진행 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과 공명한다. 너무 희귀하기에 한층 더 반가운 이 공명을 충분히 음미하거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관계 등 현재성이 큰 이 책의 주요 통찰들을 여기서 길게 다룰 수는 없다. 다만 민중권력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경제발전과 달리 (필리핀어 pag-unlad 가 그렇듯) 상황이 진짜 나아진다는 의미의 ‘번영’을 어떤 방식으로 이룰 수 있는가, 정당화 따위 무시한 채로도 여전히 득세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어떻게 스스로의 번영을 도모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아 있음을 밝혀둔다.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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