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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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K민주주의의 약진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백낙청 白樂晴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저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합본 개정판) 『백낙청 회화록』(1~8권)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좌담집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세계적 K사상을 위하여』 등이 있음.

paiknc@snu.ac.kr

 

 

연말마다 ‘백낙청TV’와 ‘창비주간논평’에 동시 발표해온 나의 ‘신년칼럼’은 이번따라 극히 유동적인 상황에서 작성되었다. 작년 12월 3일에 윤석열의 계엄선포가 있었는데 집필을 완성했을 때는 국회의 즉각적인 계엄해제 결의와 14일의 탄핵소추안 통과로 사태의 큰 가닥이 잡혔지만 아직도 대통령이 체포영장 집행에 저항하여 관저에서 농성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가 드디어 체포된 것은 새해 1월 15일이었다. 덧글을 보충한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현직 대통령의 구속기소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뒤지만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과 내란 수괴의 형사재판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칼럼의 내용을 크게 바꿀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약간의 설명을 각주로 달았고, 칼럼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문제나 생각지 못했던 일을 ‘중도와 개벽세상’이라는 제목의 덧글로 추가한다.

 

 

1. 신년칼럼(2024.12.30):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백낙청TV 시청자 여러분, 창비주간논평 독자 여러분, 나라의 주인인 시민 여러분,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희망을 가득 안고 다가오는 2025년에 복 많이 받고 많이 지으시기 바랍니다.

 

변칙적 사태의 엽기적 종말

윤석열정권이라는 변칙적 사태가 엽기적인 종말을 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내란의 우두머리가 탄핵으로 직무정지는 되었으나 여전히 대통령 자리에 있습니다. 어떻게든 버티면서 빠져나갈 꼼수를 궁리하고 있지요. 하지만 저는 대세가 바뀌리라는 염려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윤석열의 돌발적 망동에 반대해 궐기한 것만이 아니고, 촛불혁명의 힘찬 재출범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윤석열의 집권은 촛불혁명 이전 87년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정권교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건이었지요. 87년체제가 실질적으로 수명을 다했지만 촛불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할 새로운 체제가 난산을 겪는 와중에 벌어진 일시적 일탈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탈을 국민들이 5년 내내 감수했다면, 촛불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87년체제보다 더 나쁜 체제를 향한 저들의 숙원이 달성되었겠지요.

하지만 우리 국민이 어떤 국민입니까. 깨어 있는 시민들이 다시 들고일어선 이상 저들의 도전은 누구 말처럼 ‘중과부적(衆寡不敵)’1입니다. 게다가 오늘의 시위군중은 숫자만 많은 군중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재명이든 그 누구든 특정인의 지휘를 따르는 건 아니지만, 정치권이 바닥의 외침과 에너지를 차단하던 2016~17년 대항쟁기와 달리 시민들의 외침이 국정운영에 반영될 길이 활짝 열린 상태입니다.

 

‘촛불’의 진화와 전진

‘변칙적 사태’를 겪는 동안에도 촛불혁명은 진행 중이었고 진화하기조차 했음이 바야흐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12·3 이래의 폭발적 시민행동은 2016~17년 대항쟁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단순한 ‘리바이벌’은 결코 아닙니다. 규모와 열기는 그때와 방불하지만 주력부대가 오히려 102030세대로 바뀌었고, K팝 응원봉의 대거 등장이 보여주듯이 시위방식에도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항의집회를 곧 축제의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 2000년대 이래 우리가 발전시켜온 시위문화인데, 이번에는 K팝과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함께 울려퍼졌습니다. 농민들의 트랙터 상경투쟁을 가로막는 경찰의 차벽을 시민들이 달려가 무너뜨린 ‘남태령 대첩’에서는 「농민가」와 아이돌의 노래가 번갈아 불러졌습니다. 노벨상 수상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들고 나온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걱정해온 세대간·계층간 단절이 상당부분 치유됨과 동시에 K팝과 K문학, K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결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윤석열의 기괴함은 제가 여러차례 강조해온 분단체제의 괴물성을 너무나 역력하게 집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괴물스러움이 윤석열 부부 또는 그 일당만의 것은 아닙니다. 분단체제 속에 오래 살아온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크고 작은 괴물 하나씩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그런 폭주가 가능했던 것이지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들의 탐욕과 독단성, 자기중심적 망상이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면 애당초 윤석열이 당선되지 않았을 테고 저들 일당의 완전 퇴치가 이토록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내란 도당에 대한 처벌도 우리 자신을 바꾸는 과정을 겸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인데 누가 감히 먼저 돌을 던지랴’는 가당찮은 둘러대기가 아니라, 사람을 미워함이 없이 그의 불의한 행위를 철저히 다스리는 기술—이라기보다 심법(心法)—을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선생의 언행록인 『대종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으로 세상을 가르치고, 악한 사람은 악으로 세상을 깨우쳐서, 세상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데에는 그 공이 서로 같으나, 선한 사람은 자신이 복을 얻으면서 세상 일을 하게 되고, 악한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으면서 세상 일을 하게 되므로, 악한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하나니라.”(요훈품 34장) 그렇습니다. 미워함과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사람이 아닌 그의 행위를 엄정히 처벌하는 것이야말로 새시대의 공부법입니다. 그것은 또한 상처받은 내 마음을 치유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기도 하지요. 공부가 부실했던 집권자들이 마음공부와 무관한 정치검사들에게 ‘적폐청산’을 맡긴 것이 문재인정부 실패의 시작이자 오늘의 환란을 초래한 원인이었습니다.

 

변혁과 중도를 다시 말할 때

그런데 개인의 심법 훈련을 넘어 우리는 촛불혁명의 놀라운 전진에 부응할 정치를 고민할 일에 직면했습니다. 개인들의 각성을 묶어 새세상을 만들어갈 이념과 사상을 공유할 필요가 절실해진 것입니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시민들의 영웅적 투쟁과 엄연한 역사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6월항쟁 이후 퇴행과 좌절을 거듭 맛보던 끝에 드디어 윤석열 집권이라는 재앙까지 겪은 것이 우리 현대사입니다. 저는 이런 역사에 우리 사회의 사상적 빈곤이 적지 않게 기여했다고 판단합니다.

6월항쟁 직후에 제가 주문한 것도 바로 새로워진 시대에 부응할 새로운 노선의 정립이었습니다. 「통일운동과 문학」이라는 글의 제4절 ‘유월 이후를 보는 시각’(『창작과비평』 1989년 봄호)에서는 항쟁을 이끌어온 세개의 주요노선, 곧 당시 표현으로 ‘부르주아민주주의(BD)’ ‘민족해방(NL)’ ‘민중민주주의(PD)’ 들이 그 어느 것도 새시대의 국정운영을 감당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인식을 피력했습니다. 쉽게 말해, 군사독재 이전의 문민통치를 회복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유민주주의론, 통일열망은 뜨겁지만 분단현실의 실상을 통찰하지 못하는 비현실적 통일론, 그리고 남한사회만의 민중혁명을 꿈꾸는 또 하나의 단순논리가 민주화를 일단 성취한 시대에는 하나같이 안 맞고 각자가 환골탈태하면서 3자의 창조적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당시는 저 자신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개념에 착안하기 전이었습니다. 그걸 정면으로 내건 것은 한참 뒤의 일이지요(졸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4장 ‘덧글: 변혁적 중도주의와 한국 민주주의’). 이후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창비 2009)라는 저서를 냈고 최근에는 이 책을 갖고 백낙청TV에서 토론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창조적인 3결합’이 이루어진 변혁적 중도주의가 아니고서는 시대적 과제를 담당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2 그후 우리의 담론지형이 많이 변하고 다양해졌지만 변혁적 중도에 미달하는 담론들이 여전히 주름잡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변혁적 중도주의는 나름으로 엄격한 개념입니다. 그럴듯한 두 낱말을 그냥 연결시킨 거라면 일종의 자가당착일 수 있지요. 그러나 ‘변혁’은 한반도체제의 변혁이고 ‘중도’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국내의 온갖 단순논리를 넘어서는 중도세력을 확장하자는 것이기에, 변혁과 중도가 상충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대중적인 정치구호가 되기에는 생소한 표현임을 자인하면서 그 대중적 전파나 활용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작심하고 그 문제를 제기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6월항쟁을 이끈 운동권 인사들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87년체제를 더 나은 체제로 신속히 바꿔놓지 못한 것도 변혁적 중도 공부에 무심했던 탓 아닐까요? 예외가 있었다면 오히려 구세대 정치인인 김대중 대통령이었지 싶습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에 사민주의를 일정하게 가미하는 동시에 남북의 화해협력을 통해 일찍이 우리가 못 가본 새 길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변혁적 중도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이행하기에는 당시의 정치지형이 워낙 불리했고 스스로 색깔론 공세에 줄곧 시달리는 처지였습니다.

 

새로워진 대중의 욕구

2016~17년의 촛불대항쟁 때도 변혁적 중도가 별로 논의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드러난 대중의 욕구는 분명히 종전과 달랐지요. 1980년대 이래의 낡은 언어는 촛불군중의 냉대에 마주치기 일쑤였고, 시위현장에서 대중이 내놓은 갖가지 창의적이고 곧잘 익살이 넘치는 구호들은 새로운 감수성의 대두를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 촛불정부를 자임한 대통령이나 주변 인사들은 여전히 변혁적 중도론에 무심했습니다. 저는 문재인정권의 실패가 그 주체세력의 사상적 빈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열의 내란을 진압하고 나선 2024년의 시위에서는 대중의 변화된 정서와 욕구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며 항쟁의 주력부대임을 자처하는 젊은이들의 ‘나라다운 나라’를 향한 열망을 이제 종래의 어떤 고정된 이념으로도 충족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어떤 걸출한 정치지도자나 저보다 성능이 좋은 스피커를 가진 논객이 나서서, ‘그대들이 열어가고 있는 길이 바로 변혁적 중도다, 우리 함께 걸어서 그 길을 넓히자’라고 조리있게 설명해준다면 ‘아 그렇지, 맞아! 그럽시다!’라고 호응할 대중이 도래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종래와 다른 언어는 어느 특정 지도자나 개인이 아니라 학자, 예술가, 언론인, 활동가 들이 일반시민들과 함께 연마할 과제입니다. 이는 각 개인과 집단의 진지한 자기성찰을 요합니다. 저 자신 오랫동안 시민운동에 몸담거나 응원해온 사람으로서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도 반성할 것이 많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각기 맡은 분야에서 이 사회의 온갖 비리와 싸우는 과정에 활동가 나름의 타성에 젖어든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재명 대표가 바꾸어놓은 민주당을 또 하나의 ‘보수정당’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자신의 ‘진보성’을 과시한다거나, 시민단체 회원들보다 민주당의 권리당원이 훨씬 많아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시민사회단체 활동만을 시민운동이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촛불혁명이 그간의 온갖 분파주의를 넘어 ‘변혁적 중도’로 힘을 모으는 판국임에도 자신들만의 의제와 기준에 집착하여 기운을 빼는 사례도 없지 않습니다.

 

촛불혁명에 불리한 주변상황과 세계정세

우리는 촛불혁명이 세계에서 드물게 만나보는 민주혁명이요 평화혁명이라고 자랑합니다. 과연 자랑할 만하지요. 그러나 바꿔 말하면, 이 혁명은 오늘의 세계에서 다분히 고립된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적대적인 세력과 불리한 여건으로 둘러싸였다는 뜻이지요.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태입니다. 변혁적 중도의 ‘변혁’은 한반도 분단체제의 해소이기에 이 핵심적 과업에 진전이 없으면 국내 개혁도 큰 진도를 내기 어렵습니다. 물론 남북관계 개선과 국내의 개혁작업이 맞물려 있다고 해서 양자가 항상 발맞추어 진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부분에서든 가능하고 시급한 문제부터 먼저 풀어나가면서 한반도의 점진적·단계적·창의적 재통합을 추진할 일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처럼 남북대결과 긴장이 극에 달하고 북측 당국이 대한민국을 주적(主敵)으로 간주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분단기득권 세력에 반격의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12·3 내란의 주동자들이 어떻게든 남북간 충돌, 심지어 전쟁을 일으켜보려고 얼마나 치떨리게 노력했습니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당과 인민의 빈틈없는 일치를 신봉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대한민국것들’을 자신들을 그토록 적대시해온 윤석열정권과 동일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쪽 시민들의 분발로 윤석열이 퇴출당하는 역사가 이루어지면 한국민에 대한 적개심이 한결 누그러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평양당국이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 관계로 전환하겠다는 방침이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제가 한평아카데미 강의와 후속 기고문에서 주장했듯이 이는 국가연합을 우선과제로 설정해온 우리 남쪽의 입장에서 오히려 환영할 대목입니다(백낙청TV ‘초청강연 002’ 「분단체제극복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2024.5.; 졸고 「한반도정세의 새 국면과 분단체제」,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남북연합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 대 국가의 연합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더라도 평양당국이 우리의 변혁적 중도 노선에 합류하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 겁니다. 다만 분단체제극복이라는 우리의 노력은 훨씬 안전한 상황에서 한층 유연하고 풍성한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열릴 것입니다.

세계정세로 말하면 그간 미국을 비롯해서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알려진 대다수 국가들에서는 민주적 제도들이 거의 회복불능 상태로 훼손되었고 대중의 정치참여는 ‘우파 포퓰리즘’의 형태를 띠기 일쑤입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 같은 나라도 세계 민중에게 사상적인 지표가 되기 힘든 형국입니다. 경제적 환경 또한 2017년 촛불대항쟁기와 비교하여 몹시 열악합니다. 윤석열정부가 망가뜨린 경제와 민생을 되살리는 것이 누가 집권하든 급선무인데 세계적으로 경기가 8년 전보다 훨씬 저조할뿐더러 미·중 갈등의 격화로 한국의 입지는 날로 좁아지고 있습니다. 촛불혁명의 고립이 실감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립에는 선구자의 고립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정부당국이나 기득권층이 아닌 대중에 대한 촛불혁명의 전염력은 이미 만만찮아서 그 선구적 위상을 인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전염력은 최근의 시위군중이 K팝 응원봉을 들고 나옴으로써 극도에 달했다고 봐야지요. 전세계 한류 팬들의 동류의식을 촉발함과 동시에, ‘잘 놀며 잘 싸우는 게 진짜 잘사는 길이구나’ 하는 각성마저 안겨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할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한국의 촛불시위는 21세기 들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동학의 혁명적 가르침도 본질은 평화주의였고 동학도들이 벌인 교조신원(敎祖伸冤) 운동3은 평화적인 대중항쟁의 선구적 사례였습니다. 3·1혁명 역시 비폭력이 원칙이었음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물론 민중이 아무리 평화혁명을 하려 해도 갑오년의 동학농민전쟁이 그랬고 3·1도 일부 그랬듯이 정권의 야만적 탄압에 뒤따르는 무력충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동학혁명과 3·1운동에서 흘린 피와 이후의 독립운동, 민중운동 들의 값진 희생이 쌓여, 적어도 87년 이후의 한국에서는 평화적 항쟁을 정부가 함부로 짓밟기 힘들어졌고 오늘날 우리의 촛불혁명이 전세계 민중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희망 가득한 2025년은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열려오는 새세상의 온전한 주인이 되십시다.

 

 

2. 중도와 개벽세상(2025.2)

 

원래 ‘변혁적 중도주의’는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남한 내의 실천노선으로서, 불교나 원불교가 말하는 ‘중도’ 또는 유교의 ‘중용’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가 2012년에 발표한 「2013년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에 이르러, 분단체제의 변혁을 위한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실감할수록 정치적 실천이 종교적 의미의 중도에 다시 가까워진다는 인식에 도달했다(졸저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8장 193면 참조). 이어서 2014년의 글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에서는 그 연결성을 한층 강조한 바 있다.

 

끝으로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남한 단위의 실천노선이 불교적 ‘중도’—또는 유교의 ‘중용’—같은 한결 고차원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로써 본고가 동원한 여러 개념 사이에 일종의 순환구조가 성립한다. 곧, 근대 세계체제의 변혁을 위한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한반도 차원에서 실현하는 일이 분단체제극복 작업이고, 한국사회에서의 실천노선이 변혁적 중도주의이며, 이를 위해서는 집단적 실천과 더불어 각 개인의 마음공부·중도공부가 필수적인데4, 중도 자체는 근대의 이중과제보다도 한결 높은 차원의 범인류적 표준이기도 하여 다른 여러 차원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9장 259면)

 

글에서 지적했듯이 이는 무슨 ‘체계적 완결성’을 과시하려는 게 아니고, 우리가 당면한 과제가 여러 차원, 여러 시간대와 공간규모에 걸친 복합적 사안임을 인식하고 과제의 복합성에 걸맞은 실천을 하자는 것이었다. 변혁적 중도의 때가 드디어 도래한 마당에 그때그곳에 알맞은—그야말로 ‘시중(時中)’의—중도가 더욱 절실해졌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변혁적 중도의 ‘변혁’이 한반도 분단체제를 일차적 표적으로 삼고 있지만 분단체제는 곧 세계체제의 일부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실천은 전지구적 시중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시국에 부응하는 노력의 일부로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용어에서 ‘주의’를 떼어냄으로써 대중이 조금이라도 더 친근하게 받아들일 길을 열고자 했다. 하지만 용어가 어찌 되든 개념에 따른 적절한 정세분석과 실행방안이 없으면 개념은 개념일 뿐이다. 이에 칼럼 이후의 정세와 당시의 진단에 대한 부연, 그리고 새로운 상황과 과제에 대한 생각을 덧붙일까 한다.

윤석열의 내란으로 한국정치의 ‘변칙적 사태’가 ‘엽기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는 판단은 남은 변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내란 수괴의 엽기적 행각이 추종세력 응원 속에 지속되는 것을 보며 내란의 성격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곧, 12·3 계엄선포 이전에도 내란 준비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이 하루가 다르게 더 밝혀져왔지만, 그것과 별도로 변칙적 사태가 본질상 내란의 필연성을 상당부분 내장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점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보여주었듯이 87년체제로 정권을 한번 상실해본 기득권세력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87년 이전의 장기집권 체제를 만들고자 끈질기게 시도했다. 이남주(李南周)를 비롯한 창비의 동학들은 이를 ‘점진 쿠데타’ 내지 ‘신종 쿠데타’로 규정했다(이남주 「역사쿠데타가 아니라 신종 쿠데타 국면이다」, 『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책머리에’ 2~5면; 한기욱 「새 50년을 열며」,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책머리에’). 그러나 박근혜정권은 점진 쿠데타만으로도 집권연장이 가능하다고 믿었기에 본격 쿠데타를 시도하지는 않았고, 임기가 끝나기 전에 촛불시민들이 봉기하여 정권교체를 해버렸다. 반면에 박근혜 탄핵의 학습효과마저 겪은 기득권세력은 윤석열이 들어서자마자 온갖 헌정파괴 행위를 강행하는 ‘연성 쿠데타’(이남주 「내란은 처벌되고 우리 민주주의는 비약적 진전을 이룰 것이다」, 창비주간논평 2024.12.10)에 착수했고 국민저항으로 그 기획이 여의치 않자 더욱 무모한 본격 쿠데타 곧 내란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아무튼 그동안 촛불혁명이 계속되면서 진화하기조차 한 것과 마찬가지로 잠재적 내란세력 또한 나름으로 진화해왔음이 윤석열 탄핵소추 이후 일련의 사태에서 실감된다. 윤석열 개인의 망상에 찬 행각과 별도로, 대다수 국힘당(국민의힘) 의원들의 공공연한 내란옹호, 한덕수·최상목 등 고위 공직자들의 내란진압 방해공작, 그리고 대다수 언론과 학계 인사들의 변함없는 개혁혐오 언동들이 그 예다. 이른바 아스팔트 극우 역시 예전처럼 일당 받는 노인부대 중심에서 어엿한 상류층 인사들과 젊은 세대가 동참하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분단체제의 변혁을 꺼리는 세력은 여·야 또는 보수·진보의 경계를 넘어 포진해 있으며 때로 노골적 언행으로, 혹은 음성적 방식으로 새세상의 도래를 막아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 거대한 카르텔을 누르고 촛불혁명(또는 ‘빛의 혁명’)을 재출범시킨 것이 102030 젊은이들이 앞장선 시민직접행동이었다. 동시에 그와는 다른 형태로 개입하고 힘을 더한 시민들도 많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계엄 당시 상당수 군인과 경찰의 소극적 움직임이라든가 일부 지휘관급의 정의로운 행태에서도 우리 사회의 민주시민의식이 꽤 깊이 뿌리내렸음이 확인되었다. 그간 정치권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촛불시민의 정당가입 등 종전과는 다른 시민행동으로 이재명 대표의 당 안팎 리더십이 확고해졌고 많은 의원들이 함께 싸우고 있다. 가령 ‘남태령 대첩’의 경우에도, 전통적 저항세력인 농민운동가들과 K팝 응원봉을 흔드는 젊은 세대의 결합이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야당 의원들이 현장에 출동하여 경찰과 협상한 끝에 일부 트랙터들이 서울시내로 진입하게 절충해준 개입도 있었다.

이같은 정치권의 변화, 특히 다수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정치지도자의 존재가 2016~17년 대항쟁 때와 다른 점 중 하나다. 또 그 점이 탄핵으로 망해본 국힘당 및 그 지지세력의 학습효과를 강화하기도 한다. 사실 수구세력 중 ‘이재명만 아니라면’ 진작에 윤석열을 손절했을 이들이 적지 않은 걸로 안다. 아니, 수구세력으로 분류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도 그런 입장인 경우를 자주 본다. 국민들 대다수의 마음속에 윤석열이냐 이재명이냐라는 선택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탄핵정국이 여기까지 온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이재명은 안 되며 그러니 어쩌자는가 하는 물음을 적어도 같은 당 인사들이라면 툭 깨놓고 솔직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윤석열의 연성 쿠데타가 낳은 ‘사법리스크’를 대통령이 구속기소되고 파면이 눈앞인 지점에 여전히 들먹인다거나 대선 이전의 개헌에 매달리는 것은 수구세력의 논리와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재명을 그토록 기피하는 핵심 원인이 유독 그가 한번도 기득권 카르텔에 속해본 적이 없으며 온갖 압박 가운데도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일 듯하다. 게다가 이재명이 유능한 실용주의자이기조차 하다면 여당뿐 아니라 온갖 기득권세력에는 설상가상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이재명 하나로는 안 된다’는 걱정은 대선보다도 대선 이후, 취임 이후에 적용하는 것이 옳다. 윤석열이 망가뜨린 나라를 추스르는 일도 만만찮으려니와 국내외로 산적한 현안들을 이재명이 아닌 그 누군들 홀로 감당할 수 있을까? 선거승리를 도와줄 캠프 요원과 달리, 승리 이후 적소에 기용할 실력있는 인사들이 그의 주변에 얼마나 모여 있는가는 내가 모르는 영역이고, 여기서 이런저런 주문을 하기에 적당한 지면도 아니다.

아무튼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자세는 ‘변혁적 중도’의 본질과도 통한다. 다만 누구를 위한 실용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민생 위주라는 것도 민중은 먹을 것만 던져주면 조용해지는 개돼지라는 것이 기득권세력의 이념인 반면, 변혁적 중도의 실용주의는 ‘한반도적 시각을 지닌 실용주의’이며 분단체제극복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떠맡은 시민들을 당장 먹고살 걱정으로부터 최대한으로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육신의 의식주 문제를 젖혀두고는 도대체 마음공부가 불가능하지만, 동시에 “위대함의 상시적 비전을 떠나서는 도덕 교육이 불가능하다”(Moral education is impossible without a habitual vision of greatness)라는 화이트헤드의 말대로(Alfred North Whitehead, “The Place of Classics in Education”) 어떤 원대한 목표와 서원은 마음공부의 또다른 필수조건이다.

분단체제가 나쁜 점이 저열한 담론이 공론장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윤석열정권의 폭주와 망동을 이겨내는 과정에서도, 예컨대 헌정질서와 법치주의에 대한 공격이 너무 터무니없다보니 마치 입헌정치와 법치주의가 곧 민주주의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헌정과 법치가 민주사회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논의가 거기서 멈춘다면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열망을 (요즘 말로) ‘저렴’하게 만드는 꼴이다. 이는 깨어 있는 민중이 스스로 다스리며 우애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간단없는 마음공부와 고도의 정치적 실천이 병행되어야 하고 한반도 주민의 경우라면 분단체제를 완화·해소하고 그보다 나은 체제를 이 지역에 건설해야 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과제를 담론장에서 지우는 기득권 정치인·지식인의 논리인 것이다.

변혁적 중도가 국내에서 미완의 과제일 뿐 아니라 국제정세에 비춰도 다분히 고립된 노선임을 신년칼럼에서도 지적했다. 민주주의와 무연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으로 불리한 환경이 더욱 강화된 느낌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특정 상황에 그의 정책이 미칠 영향은 한층 섬세한 분석을 요한다. ‘빛의 혁명’의 고립에 관해서도, 그것이 현존 세계체제를 바꾸지는 못할지언정 더 나빠지는 것을 방지한 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기정(南基正) 교수가 「계엄을 막지 못했다면 닥쳤을 잔혹한 세계사」(창비주간논평 2024.12.24)에서 상세히 분석했듯이, “2024년 12월 3일, 국회 앞에서, 국회 안에서 한국 국민과 국회의원이 막아낸 것은 계엄만이 아니었다. ‘북풍’과 ‘서풍’을 막고, 일본의 개헌의 흐름을 막고, 한일 동맹화의 흐름을 막은 것이었다.”5

트럼프가 세계적 우경화 물결을 탔고 그의 재집권이 기후위기라는 인류적 과제나 미국 내 민주제도를 위해서는 재앙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당장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만을 본다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남북의 군사충돌을 만들어내려던 윤석열의 ‘북풍’ 시도에 일정한 제약이 가해졌으며 남기정 교수의 분석대로 우끄라이나전쟁에 기댄 ‘서풍’ 공작도 한결 힘들어진 형국이다.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과의 친분을 자랑하면서 호언하는 대북관계 개선은 물론 지켜볼 문제다. 2019년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북의 비핵화를 전제한 관계개선은 무망해졌지만, 최근 트럼프가 조선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인정한 데서 출발하여 진지한 핵동결·핵감축 협상을 진행한다면 본인이나 김정은의 의도와 무관하게 분단체제 완화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

하기는 바이든정부의 ‘가치외교’ ‘가치동맹’이야말로 일종의 ‘우파 인터내셔널’에 더 적합한 이념이었다. 미국의 민주적 제도들이 세계 민주시민의 공동유산인 면이 없지 않다 해도, 미국 내에서조차 그것은 극도로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시행되었을뿐더러 외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간섭과 지배의 도구로 복무해오기 일쑤였다. 미국의 민주시민들 스스로 이번 계기에 정착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로 시작한 미국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한국의 선도적 시민혁명에서 배움을 얻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취임하자마자 빠리기후협정에서 다시 탈퇴하고 무한대의 석유 채취를 공언하는 행태는 한층 심각하다. 그러나 그간의 국제적 협약이나 각종 처방이 기후위기 해결에 턱없이 모자란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트럼프 같은 초대형 기후악당의 등장이야말로 과연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인류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지 뿌리부터 다시 생각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한반도는 조선조 말기의 대혼란과 동학혁명의 패배, 국권상실 등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드디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간명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명제를 산출했다. 이는 단순한 표어의 발명이 아니라 새 불교를 표방하는 자생 종교에 동학 이래의 후천개벽사상이 합류하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소태산은 식민지시대에 활동한 분인지라 ‘분단체제의 변혁’은 그의 과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졸고 「변혁적 중도주의와 소태산의 개벽사상」(2008,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15장)에서 밝혔듯이 그는 변혁적 중도론의 실질적 선구자 중 한 사람이라 할 만하며, 이후 나는 식민지체제의 변혁을 위한 중도세력의 형성을 꿈꾼 의암 손병희,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등을 포괄하는 논의를 진행하기도 했다(『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2장; 백낙청TV ‘공부길 149’ 강경석편 1회, 2025.1.7).

우리 시대의 촛불혁명(내지 빛의 혁명)이 동학 이래의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와 평화혁명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면, 시대가 요구하는 변혁적 중도 공부가 곧 개벽세상 만들기와 둘이 아님이 뚜렷해진다. 「기후위기와 근대의 이중과제」라는 졸문을 인용하자면, 이는 “맑스 등이 수행한 자본주의 비판을 외면한 채 후천개벽을 실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인 동시에, “아무리 엄격하고 정밀한 자본주의 분석도 그 자체로 충분하지는 못하고 맑스가 강조한 혁명적 실천의지가 이에 더해지더라도 ‘개벽’에 값하는 개인들의 마음공부를 내포하지 않고서는 문명의 대전환을 이뤄내기 어려움을 뜻한다.”(같은 책 13장 361면) 트럼프 시대의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가라기보다 최강의 약탈자·갈취자로 변신한 것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말기현상이라 볼 수 있다. 월러스틴(I. Wallerstein)이 근대 세계체제의 ‘지구문화’(geo-culture)로 규정한 (레닌주의라는 변종까지 포함하는) 자유주의가 파산상태에 다다른 오늘의 세상에서 한반도에서 시원한 후천개벽의 전통과 그 현대적 발현이 갖는 중요성이 새삼 절실하다.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는 선언이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신년칼럼은 유튜브 ‘백낙청TV’(youtube.com/paiknctv) 접속 및 오른쪽 QR코드 스캔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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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란의 제2인자로 꼽히는 김용현 당시 국방장관이 비상계엄 실패 직후 했다는 말.
  2. “결합다운 결합이 되려면 오히려 3자의 결합이라야 가능하다는 점이 변혁적 중도주의의 독특한 주장이다.”(위의 ‘덧글’ 68면)
  3. 1864년에 처형된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동학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달라는 청원운동으로서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역에서의 모임은 3천명의 규모에 달했다고 하며, 이어서 1893년 2월 경복궁 광화문 앞까지 진출한 교도들이 사흘 밤낮을 엎드려 신원을 호소했다. 고종의 선처 약속으로 해산했는데 정부가 약속을 어기고 탄압을 강화함에 따라 그해 3월 충청도 보은에서 2만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중이 모인 것으로 전해진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이러한 평화적 운동에 대한 탄압의 결과였던 것이다.
  4. 물론 마음공부는 각자가 하지만 집단적 실천 공부가 그 중요한 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5. 이어지는 마지막 두 문장은 이렇다. “그러나 그 흐름은 집요하다. 계엄을 세계사적 사건으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백낙청白樂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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