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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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 삶을 돌본 것 ①

 

‘수무드’가 가르쳐준 희망

 

 

조효제 趙孝濟

성공회대 명예교수, 사회학자. 저서 『하룻밤에 한강을 열 번 건너다』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탄소 사회의 종말』 『인권의 지평』, 역서 『거대한 역설』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세계인권사상사』 등이 있음.

hyojecho7@gmail.com

 

 

 

“아이구, 고생 많이 하네. 나도 한번 나갈게. 말 나온 김에 해 가기 전에 하지 뭐.”

“교수님, 감사해요. 그런데 연말까지는 순서가 다 찼어요.”

“그럼 연초에 제일 빠른 날이 언제쯤일까?”

결국 약속은 대부분 직장에서 새해 시무식을 하는 날로 잡혔다. 작년까지 매년 1월 2일이면 꼭 학교에 출근해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겨울방학 중이라 텅 빈 캠퍼스를 내려다보며 연구실 정리를 하고 한해 계획을 짜면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퇴직하면 이날을 어떻게 보낼까 궁금하던 차에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에서 활동하는 제자와 대화를 나누다 은퇴 후 새해 첫 ‘업무’를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개시하기로 한 것이다.

오전 11시 40분부터 딱 90분만 서 있으면 된다고 했다. 별로 어려울 게 없어 보였다. 제자가 따뜻하게 입고 나오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우둔하게도 한 귀로 흘려듣고 얇은 외투에 목도리도 없이 나갔다. 길가에서 만난 제자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제노사이드를 중단하라, 가자학살 453일차, 1인시위 294일차”라고 적힌 커다란 홍보판을 건네주었다. 그걸 들고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는 빌딩 입구에 섰다. 아뿔싸, 그늘진 자리인데다 청계천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바로 앞에 주차한 경찰버스에서 뿜어져나오는 매연까지, 결코 만만한 조건이 아니었다. 반시간쯤 지났나, 귀가 떨어질 것같이 추워서 시계를 보니 겨우 5분이 흘렀을 뿐이다.

지나는 행인들이 피켓을 보고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있었다. “여기가 이스라엘 대사관이야?” 유아차에 탄 갓난아이가 나를 보고 생글거렸다. 근처를 지나던 지인을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중동 출신으로 보이는 남자가 ‘엄지 척’을 하면서 사진을 찍고 갔다. 건너편 큰길 쪽에서 열리는 탄핵반대집회에 참석하러 가는 (것으로 짐작되는) 어르신이 피켓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집회에 성조기와 이스라엘기가 등장한다는 소문을 들은지라 시비를 걸면 어쩌나, 임팩트 있게 대꾸할 수 있는 문장을 궁리했다. 그러나 노인은 ‘어찌 이런 일이……’ 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고맙게도 제자들이 피케팅을 같이 하고 따뜻한 커피도 갖다주었다. 정말 길었던 1시간 반, 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폐허 속에서 헤매고 있을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생각하니 춥다고 발을 동동 굴렀던 내 몸짓이 부끄러워졌다.

가자에서 2023년 10월 전쟁이 터진 후, 나는 몇해 전부터 세상일을 고민해왔던 것보다도 더 우울해졌다. 세상일이라기보다 행성적 차원의 고민이었다.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니 솔직히 말할 수밖에. 기후위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가 실존적 위협이라는 점에서도 충격을 받았지만, ‘인간이 자연과 비인간을 지배해온 것이 오늘의 위기를 낳았다’는 비판이 뼈아팠다. 인간의 권리는 인간‘만’의 권리이니 결국 인간중심적 인권이 위기의 기원이 되었다는 주장이 나를 비수처럼 찔렀다.

물론 이런 해석에는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있다. 인권은 전통적으로 국가의 탄압에 저항하는 자유권, 시장의 횡포에 대항하는 사회권, 환경파괴와 서구의 세계경제 주도에 반대하는 연대권으로 이루어진다. 고의적으로 자연과 비인간을 지배하겠다는 구도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기후위기로 인해 취약계층과 저개발국이 큰 피해를 보는 문제를 인권 개념으로 다루면 설득력이 커진다. 그리고 기후·환경·동물권 운동도 운동가들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난 10년 사이 전세계적으로 2천명 가까운 환경운동가들이 살해된 것만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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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필자 제공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간중심주의 또는 인간우월주의의 폐단이 남는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주의의 양면적 권리 개념에 문제의 뿌리가 있다. 자유주의의 ‘자율권’이 민주주의와 결합하면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인권이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소유권’이 자본주의와 결합하면 무한 경제성장이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한지배를 정당화하게 된다. 소유권은 법적 권리이긴 하나 인권의 주류 담론에서는 빗겨나 있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런 차이와 별개로 인권이 인간중심주의적이어서 환경파괴와 기후위기에 연루되었다고 단정하는 시각이 생긴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평생 인권을 공부한 내게 심각한 이론적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기후생태 위기를 연구한 지 십년이 넘었다.

뒤늦게 이 분야에 뛰어든 관찰자의 눈에 유독 걸리는 점이 있다. 기후위기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크게 갈리는 것이었다. 어느 분야든 그런 경향이 있지만 특히 기후 분야에서는 양극화된 에토스랄까 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우선 한쪽에는 기후낙관론이 있다. “위기가 심각하긴 해도 대비를 잘하면 되지 않을까. 기술이 계속 발전할 것이다. 가령 소형원전이 개발되면 단번에 싹 정리가 될 것이다.” 다른 한쪽에선 기후비관론이 있다. 내가 직접 들었던 질문들이다. “파국을 돌이키기엔 늦지 않았는가. 인간은 멸종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이제 생존이냐 종말이냐의 양자택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양극단의 중간에 여러 결의 생각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기후문제를 비관하는 사람 중에는 기후감수성·생태감수성이 높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많다. 국제아동권리 NGO인 세이브더칠드런의 2024년 기후위기 인식조사에 따르면 한국 아동·청소년과 성인 두 그룹의 평균 92.8퍼센트가 기후위기를 걱정한다. 전세계 16~25세 젊은이 중 56퍼센트가 ‘인류가 망하게 됐다’는 인식을 보였다는 조사도 있다. 한국 성인을 대상으로 기후불안을 측정해보니 젊을수록 점수가 높았다고 한다. 19~34세의 한국 청년 5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기후변화에 관해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비율, 그리고 기후변화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비율이 높게 나왔다.

겉으로 표현을 하든 안 하든, 마음 한구석에서 이른바 종말적 상상을 하는 이들이 늘었다. 벙커를 파고, 뉴질랜드에 땅을 사고, 화성으로 이주하려는 사람을 직접 만나보진 못했다. 하지만 시골에 땅을 마련해 여차하면 농사짓고 살 태세를 갖춘 사람은 만난 적이 있다. 예상된 파국의 시점이 지난 현실, 또는 종말이 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되는 현실을 ‘포스트종말’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 대비하는 움직임도 있다. 평소에 비상식량과 응급약품 배낭을 챙겨놓는 준비파들이 생겼고, “지진, 화산, 태풍, 화재, 이상기후 등 긴급재난 상황에서 생명줄 역할을 한다”는 특수 라디오도 팔리고 있다.

언론에서 기후생태 위기를 ‘종말적’ 사건으로 보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구종말 온 듯 참혹” “세상의 종말인 줄” “종말론의 홍수”와 같은 기사 제목이나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다. 2024년 연말, 초대형 사이클론 치도가 아프리카 인도양의 마요트섬을 강타했다. 수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이 사건을 두고 언론은 “종말과 같은 풍경”이었다고 증언한 주민들의 반응을 보도했다. “LA 산불, 폼페이의 종말 보는 듯”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기후비관에 빠지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단순히 심리적 차원이 아니라 온난화 때문에 뇌신경계가 임상적으로 나빠지는 문제를 다루는 ‘기후 신경역학’ 분야가 생겼을 정도다. 낮아지는 출생률에 대한 진단이나 의견이 분분한데, 기후위기가 초래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은연중에 한몫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일반적으로 기후비관론을 대놓고 얘기하진 않는다. 듣기 싫어하거나, 상상조차 하지 않는(하기 싫어하는 또는 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덮어둘 수도 없다. 우리 사회의 미래 전망에 있어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공론의 장에서 한번 솔직하게 거론해볼 만한 이슈다.

나는 이 문제를 잘 다루려면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명제를 융합하여 새로운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기후생태 위기가 추세적으로 보아 계속 나빠질 개연성이 대단히 크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건 객관적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가 추세적으로 악화된다고 해서 그것이 단기간에 전면적인 파국, 붕괴, 종말로 이어질 것이라 속단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추세적 하락을 곧장 추락적 파국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역사의 영구적 진보 관념에서 비롯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1972년 환경문제 연구 그룹인 로마클럽에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를 냈을 때에도 종말론을 퍼뜨린다는 비판을 받았다. 계속 더 좋아지고 성장하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대의 직선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이것을 ‘논리의 선형성’ 대 ‘현실의 복잡성’으로 설명해보자. 논리의 선형성에 따르면 기후위기가 이미 우리 손을 떠난 문제처럼 보인다. 누적된 온실가스가 아주 오랫동안 기후를 악화시킬 것이다, 빠리협정 미준수, 개도국 지원 미비, 플라스틱협약 무산, 생물다양성협약 부진, 트럼프의 재등장 등 전세계 상황을 보면 더 좋아질 가능성이 희박하다, 지금 당장 탄소중립을 달성한다 해도 적어도 수십년 내에 기온이 떨어질 가능성이 없으므로 아무리 애써본들 소용없다 등 선형적 논리로만 따지면 파국적 결말이 예정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는 ‘현실의 복잡성’이 작동한다. 특히 기후생태 위기는 급격한 기상재난과 티핑포인트의 위험을 감안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장기지속적 현상이다. 브뤼노 라뚜르(Bruno Latour)는 위기가 계속되면 일종의 생활양식이 된다고 했다.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일상이 되어버린 위기 속에서는 인간이 행위성—능동적으로 선택하고 대응할 수 있는—을 발휘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적응적 대처’를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후생태 위기가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거대 현상인 점도 기억하자.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이 ‘하이퍼객체’라고 부른 문제는 그 규모, 시간성, 공간성이 너무나 광활하고 분절되어 있어서 인간의 통상적인 인식 방법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더더구나 예측은 불가능하다. 하이퍼객체는 인간 ‘주체’와 사물 ‘객체’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무효화시키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선형적 논리로 깔끔하게 재단할 수는 없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기후생태 위기가 심각하지 않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우리의 일반적 인식의 회로로 간단하게 파국이 온다거나 종말이 닥친다 등으로 정리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라는 뜻이다.

세계 역사상 기후생태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가 붕괴된 사례 169건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예측할 수 있는 구조적 압박요인 세가지가 확인되었다. 인구집단의 삶의 질 악화, 권력과 지위를 둘러싼 엘리트들의 경쟁, 국가의 재정 압박과 기능 상실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환경 재난과 같은] 외생적 촉발요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영향은 재난이 기존의 사회구조와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사회구조에 의해 조절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1

2024년 늦가을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에서 하루 8시간 동안 1년치 비가 쏟아져 237명 이상이 사망한 대참사가 발생했다. 한국 뉴스에 “종말 그 자체, 시신 떠 다녀”라는 제목이 달렸던 초대형 재난이다. 겉으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피해를 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거주지역과 거주양식, 동원할 수 있었던 자산과 자원, 보험 가입 여부 등에 따라 재난 이후의 복구와 회복력에서 큰 차이가 났다. 재난 와중에도 근무해야 했던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 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그후 스페인 정부는 노동자 안전 예방수칙과 기후 유급휴가 제도를 도입했다. ‘종말’과 같은 재난조차 싹쓸이식 선형적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사회구조와 권력의 필터를 거쳐 불평등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희망은 긍정하기에도 부정하기에도 조심스러운 말이다. 희망이 주는 좋은 점이 있지만, ‘자꾸 희망을 강조하는 걸 보니 외려 이상하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객관적인 상황을 도외시하는 공허한 입발림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안심시키기 위한 수사적 표현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기후붕괴 시대에 희망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희망 아편’(hopium)이라는 냉소도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희망을 거부하면서 어두운 시대일수록 행동만이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렌트는 나치 정권을 탈출하여 망명생활을 하던 중에도 희망에 매달리기보다 행동의 기회를 찾았다. 그런데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 즉 ‘탄생성’(natality)에 뿌리를 둔다. 탄생성이란 어떤 생명이 태어날 때마다 피어오르는 새로운 시작이고, 인간이 지속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이며,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초 자극이다. 즉 행동은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증명이라 할 수 있으므로, 행동과 인간존재가 합쳐질 때 역설적으로 ‘익명의’ 희망이 도출되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희망에 대한 많은 연구들 중 정신적 낙관, 소망적 기대 또는 종교적 신조와 구분되는 사회(심리)학적 희망을 알아보자. 이에 따르면 희망은 낙관과 구분되며, 현재와 미래, 현실과 이상의 경계선상에 있는, 변혁적 잠재력을 지닌 어떤 심적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으로 희망은 능동적 시민성이나 집단적 사회변화를 위한 정치적 실천의 전제가 되는 선행조건이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행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나는 행동과 희망이 ‘양의 되먹임’ 관계를 이룰 때 희망의 사회적 의미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집단적 감정과 집단적 행동이 특히 중요하다. 집단적 감정은 개개인이 집합체의 일원임을 서로 알아가는 상호작용적 의례를 통해 창조된다.

‘함께하는 행동’이 희망의 원천이라면, 그러한 행동을 여일하게 밀고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뒷심은 무엇일까?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토록 악독한 박해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인간의 존엄과 집단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다. 그러한 불굴의 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알고 보니 그 바탕에 ‘수무드’(sumud)라는 개념이 있었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의지를 굳게 지킨다’는 말이다. ‘존재는 저항이다’라는 표어로 상징되는 수무드는 하루하루 삶 속의 고난을 영웅적인 인내심으로 견뎌내는 태도다. 나는 수무드를 ‘의연(毅然)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1967년의 6일전쟁 이후 등장한 수무드는 다양한 강조점을 지닌 폭넓은 개념이지만 굳건한 끈기와 시민적 불복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이스라엘군이 뽑아버려도 계속 나무를 심는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부모가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정착촌과 관련된 기업을 보이콧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등등. 그들은 그렇게 수무드를 통해 자신들의 삶과 공동체를 돌본다. 수무드는 흔히 올리브나무와 임신한 여성농민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공간적으로는 대지에 뿌리내린 올리브나무처럼 땅을 지키겠다는 의지, 시간적으로는 앞으로 태어날 미래세대를 위해 오늘의 간난신고를 극복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수무드는 기후생태 위기에 있어서도 큰 영감을 줄 수 있다. 이스라엘군에 석유와 천연가스를 공급하지 말라는 기후운동의 요구와 연결되는 점이기도 하다.

나는 ‘꿋꿋한 의연함’에다 ‘유쾌한 의연함’의 차원을 덧붙여 이 개념을 이해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얼마 전, 모 생협에서 주문한 사과 상자가 도착했다. 농부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유난히 힘든 나날을 견뎌내고, 온전히 결실을 맺은 사과들을 여러분께 보내드립니다. 기후위기를 이겨낸 사과를 드시면서, 사과 속에 담긴 강인한 생명력과 에너지가 여러분께도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꿋꿋한 의연함’의 산증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쾌한 의연함’의 사례를 발견한 적도 있다. 에코페미니즘 연구센터 달과나무에서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창비 2023)라는 책을 펴냈다. 김현미는 에코페미니즘을 ‘바로 여기에서의 정치’라고 규정하면서, 그리고 우주로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지구를 다시 살 만한, 그리고 살 수 있는 시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도피 욕구와 기술환상주의에서 벗어나 즉각적인 행동주의를 채택할 것을 촉구한다.”(15면)

사과 농부 그리고 에코페미니스트들의 행동 의지는 우리에게 신선한 상상력을 허용한다. 비관과 낙관을 넘어, 함께 행동하면서 의연하게 희망을 만들어가는 길,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후위기 대처법이다. 이런 희망이란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시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수무드의 의연함을 깨치고 나니 앞으로 나 스스로를 돌볼 방향키를 찾았다는 정신이 든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처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 풍진 세상을 헤쳐나가기에 꼭 필요한 자세를 전수해주다니.

 

 

  1. Daniel Hoyer et al., “Navigating polycrisis: long-run socio-cultural factors shape response to changing climate,” Philosophical Transactions B, vol. 378, 2023, 5면.

조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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