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과거가 오늘을 묻는 방식
비로소 시작되는 과거
사북을 말하는 마음
정주아 鄭珠娥
문학평론가,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육체성의 형식과 리얼리티」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탈성장의 용기와 지구생활자의 미래」 등이 있음.
jjua@kangwon.ac.kr
1. 1980년, ‘그해 봄’의 사북
흘러간 시간은 과거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흐르지 못한 시간은 무엇이 될까. 마치 개울의 좁은 길목을 통과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나뭇잎처럼, 최소한의 존재 질서인 시간의 흐름조차 비켜간 자리에 잔류하는 이들의 시간이 있다. 어쩌면 서사란 이렇듯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어둠에 갇힌 존재들을 위한 시간여행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본래 서사는 시간 앞에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해낸 산물이기 때문이다. 지난 일을 현재의 시점으로 소환해서 눈앞에 펼쳐놓고 당시에는 상황에 갇혀 볼 수 없었던 사건의 맥락을 이리저리 곱씹어본다. 그래서 서사가 과거를 다룬다는 것은 무정형의 시간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을 타지 못한 채 고여 있는 응어리를 끌어올려 시간의 출구로 인도해서 현실에 적당히 자리잡게 해주는 일, 그래서 비로소 과거라 불릴 만한 연속선을 만들어내는 일인 것이다.
가령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의 작가 조세희도 그런 응어리를 보았던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1984년 일종의 부채감을 안고 ‘4년 전 그해 봄’에 시간이 멈춘 그곳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곳의 무언가가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면서 기차로 네시간 남짓한 거리를 4년 만에 찾아가는 스스로를 탓했다. 그곳에서 그는 차마 소설적 허구로 덧씌우기 힘든 풍경에 압도되었던 것 같다. 취재를 겸한 여행이었음에도 소설을 써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대신에 그는, 마치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수출 증산의 목표만을 좇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난한 삶을 감내하는 이들, 그래서 그만큼 희망이 필요한 이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훗날 『침묵의 뿌리』(1985)라는 표제로 묶인 이 사진 에세이집의 무대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이다. 사북은 한국 최대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가 운영되던 곳이자, 전두환의 군사반란 직후 최초로 노동쟁의가 일어났던 곳이다. 조세희의 글과 사진은 이러한 사북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두가지 감정을 담는다. 우선은 탄광노동자의 생명을 담보로 수천만 인구와 산업을 살리면서도 탄광지대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을 방치하는 상황에 대한 슬픔이다. 이 슬픔은 두려움을 내포한 것이었다. 조세희에 따르자면 저 약탈적 노동은 이제 더이상 서구 열강이니 수탈자 일본 같은 남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우리가 짓고 우리가 책임져야 할 자명한 죄악이었다.1
동시에 이 텍스트는 작가가 품었던 부채감의 고백이기도 했다. 신군부의 비상계엄령 속 1980년 4월 사북에서 벌어진 노동쟁의는 지역주민들을 향한 공권력의 폭력으로 이어졌다. 현장 채증사진에 찍힌 이들을 일단 연행해서 가혹하게 고문하는 것으로 국가는 절대복종의 본보기를 만들고자 했다. 먼발치에서 사북을 바라보면서도 작가는 그곳에 가볼 수도, 그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정황은 ‘그해 봄’, 즉 80년 오월의 광주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해 오월 광주에 투입되었던 제11공수 특전여단은 한달 앞서 사북광업소의 노동쟁의를 진압할 목적으로 원주에서 대기했었다. 사북의 경우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에서 광주와 같은 참극은 피했을 뿐이다. 물론 그 폭력은 잠시 유예되었을 뿐 공권력의 보복으로 이어졌고, 서서히 그러나 어김없이 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고 삶의 활기를 앗아갔다. 가정을 파괴하고 이웃간의 관계를 파괴했다. 막장의 노동에 걸맞은 임금을 달라는 가난한 이들의 요구가 폭력적 군부통치의 무자비한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해 봄, 광주와 사북은 그 출발은 달랐으나 유사한 국가폭력을 경험했던 셈이다.
2. 사북사건과 고여 있는 시간
최근 박봉남 감독의 다큐멘터리 「1980 사북」(2025)이 개봉되었다. 제목이 보여주듯 그는 1980년 사북의 민간인 무단연행 및 고문 사건을 원점에서부터 풀어나간다. 올해 4월은 사건 발생 46주년이 되는 해였음에도, 다큐는 여전히 사북사건을 맨 처음부터 더듬어나간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점을 맴도는 사북사건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사건을 둘러싼 시각의 편차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침묵의 뿌리』를 비롯하여 사건일지를 담은 자료들이 상당수 존재함에도, 그간 이 사건은 ‘사북폭동’과 ‘사북항쟁’이라는 서로 다른 명명에 담긴 간극을 좁히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사정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광부들이 있고, 어용노조를 이용해서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사측이 있다. 광부들의 기류를 감시하던 경찰이 도망치다 자신을 막아서는 광부에게 상해를 입혔다. 흥분한 광부들이 광업소를 점거하고 사측 관련자를 찾아다닌다. 사라진 어용노조 지부장 대신 그의 아내를 포로로 삼아 집단 린치를 가했다. 경찰 병력이 진압명령을 받고 출동하지만 투석전으로 대응한 광부들에 의해 경찰 측 사망자가 나오면서 일단 후퇴한다. 계엄 시국에서 군부대 투입이 결정된다. 군병력의 투입 직전 도지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노사협의가 성사된다. 상황이 종료되고 주민들은 일상으로 복귀한다. 여기까지가 1980년 4월 21일에서 24일까지 진행된 노동쟁의의 전모이다. 하지만 사북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5월 초 갑작스레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친다. 주민들을 불법연행해 잔혹하게 고문하고 진술을 조작해 ‘빨갱이 무리’를 만들어낸다. 여성들에게는 성추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주민 다수를 군법회의2에 회부한다. 요컨대 사북사건의 본질은 노동쟁의에 대해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민간인에게 보복한 ‘국가폭력’ 사건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사건에는 분노에 찬 군중들에 의해 촉발된 ‘내부 폭력’의 정황이 혼재되어 있다. 계엄령하에서 보도가 통제되었기 때문에, 당시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려진 것은 후자의 정황들이다. 이에 사북사건은 오랜 시간 ‘폭동’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고문 피해자들의 삶과 더불어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한동안 대중에게 잊혔던 사북사건을 수면으로 끌어올린 것은 이미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3였다. 이 다큐는 사북사건의 핵심이 광부들과 그 가족에 대한 국가폭력 및 인권유린에 있으며, 그 실체가 은폐되어왔다는 사실을 조명했다. 신군부정권의 엄혹함 아래에서 사북에 갈 수 없었고 막상 사북에 가서는 열악한 광산노동의 현장 앞에서 서사를 만들어낼 수 없었던 조세희의 부채감을 넘어, 비로소 사북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침묵에 도전했던 첫 사례라고 보아도 좋겠다.
국가폭력의 관점에서 「먼지, 사북을 묻다」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크게 두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피해와 가해 구도에 입각한 질문이다. 왜 희생된 사람은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가. 다큐는 피해를 떠안은 주민들의 삶을 담아내고자 했다. 동원탄좌 간부들이나 당시 진압을 명령한 윗선의 경찰들을 인터뷰했고, 비록 만남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사북주민들의 기억에 공통적으로 남아 있던 고문 경찰을 찾아가기도 했다. 주민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했다. 고문으로 허위혐의가 만들어지고 공범 및 가담자가 계속 생겨났다. 취조 내용이나 고문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고문후유증을 앓는 사람들, 고통에 못 이겨 이웃의 이름을 대고 죄책감을 짊어진 이들, 무고하게 끌려가 고문을 받은 뒤 이웃에게 원한을 품은 이들이 생겼다. 주민들은 사건을 가슴에 묻은 채 침묵하다 병이 들거나 혹은 ‘사북사태’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취직과 해고를 반복하며 타지를 전전해야 했다.
그러므로 두번째 문제는 피해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감독은 당사자들을 찾아 끈질기게 증언을 요청한다. 당초 인터뷰 요청을 기피하고 화를 내던 이들은 다큐 촬영이 마무리될 무렵에야 비로소 굳은 침묵을 깨고 서로 연락을 나누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주민들은 2001년 명예회복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고문 및 학대 정황의 재연에 나섰다. 감독은 일부러 개봉을 미루면서까지 그들의 변화를 카메라에 담았다.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 신청을 시작했고,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에서 국가폭력 사례를 증언했다. 이렇게 시작된 명예회복 절차가 이어져 ‘사북탄좌 시위’의 핵심 관계자인 이원갑 신경 강윤호 등은 군법재판 결과에 재심을 신청하여 무죄판결을 받기에 이른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먼지, 사북을 묻다」의 문제의식은 정치적으로 뚜렷했고 그 때문에 답안 또한 명료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다큐의 후반부에는 어쩌면 우연히 던져진, 그러나 좀처럼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아서 더욱 눈길을 끄는 한가지 질문이 등장한다. 다큐의 기획자이자 감독이며 화자인 이미영은 직접 마이크를 들고 주민들에게 묻는다. ‘사북사건은 민주화운동입니까?’ 머뭇거리며 대답을 내놓는 주민들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는 그 심정의 복잡함을 담아낸다. 그리고 이 질문은 비로소 침묵을 깨고 증언을 시작했으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일종의 응어리가 주민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중에야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 응어리는 훗날 「1980 사북」이 다시 사건의 원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했던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주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응어리란 무엇일까. 우선은 사북광업소를 사수하는 과정에서 전투경찰 한명이 돌에 맞아 사망한 일이다. 사북에 경찰이 투입되던 1980년 4월 22일, 광업소로 진입하는 길목인 안경다리에서 벌어진 투석전에서 70여명의 경찰 측 사상자가 생겼다. 사북사건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몰아가는 당국이나 언론의 정치적 프레임과는 별도로, 이 사태는 주민들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빗발치는 돌멩이들 속에서 경찰들이 느꼈을 죽음의 공포는 물론이고, 그 돌에 맞아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과 의미를 논리적으로 항변할 수는 있었다. 다큐는 당시 사북에 머물렀던 한 성직자의 증언을 담는다. 그는 경찰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으나 자신은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탄광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광부들이 죽어가는데 어째서 경찰 한명의 죽음이 더 조명을 받아야 하느냐는 주민들의 항의, 즉 세상에 더 귀하고 덜 귀한 죽음이 있느냐는 주민들의 반문에 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와 마음은 다르다. 주민들이 던진 돌에 맞아 생명을 잃은 누군가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흥분한 사북주민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 노조지부장의 아내가 있다. 군중들이 한 여성을 횟대에 묶은 채 둘러싼 사진은 당시 일간지 1면에 실리면서 ‘사북폭동’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당대 광산촌의 열악한 작업조건이나 어용노조의 부정부패―예컨대 노조 간부들이 노조활동비를 갹출하고도 회사의 이익만을 대변했다거나, 소비조합을 앞세워 조악한 물품을 비싼 가격에 공급해 중간관리자로서 이익을 착복했다거나 하는 구체적 정황들―를 아무리 말한다고 해도,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여성을 인질로 삼아 구타하고 속살이 드러난 채로 만인 앞에 전시한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야만적 폭력이다.
‘사북사건은 민주화운동입니까?’라는 물음에 주민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아니다, 그 일은 어디까지나 임금분쟁, 임금폭동이었지 ‘대학생들처럼’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민들은 노조와 광부 간의 충돌은 무엇보다도 돈과 생계의 문제, 즉 임금을 인상해달라는 세속적 요구였을 뿐 그 일에 어떤 대의명분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이 지점은 「먼지, 사북을 묻다」에 의해 수면으로 떠오른 사북의 시간에서 가장 어두운 혼돈을 담은 것일 수 있겠다. 그 때문에 고문과 낙인으로 파괴당한 삶을 꾹꾹 참다가 겨우 억울함과 분노를 세상에 털어놓기 시작하던 시점에도 주민들은 ‘그 일’은 임금분쟁이었을 뿐이라 말한다.
당초 감독이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이 질문을 던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응당 노동운동이자 민주화운동이라는 답이 나오리라 기대했을 수 있다. 혹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2001)의 설립이 보여주듯 민주화항쟁의 역사적 명예회복 기류에 사북사건도 포함되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해 봄’의 고여 있는 시간이 현재로 연결되어 흐르면서 엄연한 과거로 정당하게 편입되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질문의 의도야 어떻든 주민들의 대답은 같았다. 그 사건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문제는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적어도 2000년 무렵에는 사북사건 관련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훼손된 몸과 삶을 ‘사북항쟁’ 즉, 민주화운동과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대목엔 그간 민주화운동이라는 명명에 수반되어온 휘황한 아우라가 어른거린다. 민주화운동이란 그 역사 속에서 산화한 순수한 넋들 앞에서 부끄럼이 없도록 윤리적·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해야만 한다는 믿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우라와는 별도로, 현실에서의 민주화운동은 힘겨루기와 인내를 동시에 요하는 투쟁의 양태로 실현된다. 사북사건에서와 같이 민주화운동은 노동과 임금으로 유지되는 일상의 조건을 바꾸어나가는 일과 무관할 수 없다. 더욱이 그 요구의 과정에서 발생한 잔혹한 고문의 결과로 피폐해진 몸과 망가진 삶에 책임을 묻는 것이 민주화가 아니라면 무엇이 민주화인가. ‘운동’은 침묵을 깨는 시점부터 시작되고, 고여 있던 시간 또한 그로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흐름에서 비켜나 아직 원점에 남아 있는 응어리가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사북사건의 피해자로서 이제 비로소 빠져나오려 하는 어두운 자리에, ‘우리들’이 던진 돌에 맞아 유명을 달리한 경찰과 장애를 안게 된 경찰들, 평생을 따라다니는 수치스러운 기억을 떼어내지 못한 여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라면. 그 피해자들의 어두운 시간은 사북사건의 피해자로서 감내했던 어두운 시간과 얼마만큼 같고 얼마만큼 다르다고 계량할 수 있을까. 가해와 피해가 뒤섞인 이 응어리는 실상 사북사건이 사북항쟁으로 나아가기 위해 직면해야만 하는 자기모순의 정점일 수 있다.4 사북의 시간이 자꾸 원점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이유는, 이 혼돈의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은 채 시간의 흐름을 막아서기 때문이다.
3. 모두의 과거를 위한 화해
사정이 이러하다면, 「1980 사북」이 노사의 극한 대치 국면을 정면으로 되짚으면서 공동체적 화해의 문제를 꺼내든 것은 그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라 봐야 한다. 감독은 광부가 던진 돌에 맞아 사망한 경찰과 주민들에 의해 능욕을 당한 노조지부장의 아내를 서사의 중심에 세운다. 물론 이러한 기획은 작중화자로 등장하는 사북사람 황인욱의 전폭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980 사북」은 사북에서 태어나 사북공동체가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황인욱의 시선과 바람을 반영한다. 사건 당시 그의 아버지와 형들은 모두 광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철부지 중3’이어서 사북사건이 어렴풋하게만 기억난다고 회고한다. 성인이 된 그에게 사북사건은 무엇보다도 마을공동체의 철저한 파괴로 실감되는 것이었다. 노조지부장의 큰아들은 그의 형인 황인오의 친구이며, 다큐에선 드러나지 않지만 막내아들은 황인욱 자신의 친구다. 그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원한 관계가 되어 있다. 집단 린치를 당한 노조지부장의 아내는 그에게는 동네 형, 동네 친구의 어머니인 셈이다. 집단 린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경찰에게 성추행에 가까운 고문을 받은 여인도 같은 반 친구의 어머니다. 그 어머니가 석방된 이후에 친구의 가정은 파탄이 나다시피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황인욱이 만든 사북사건 관련자의 관계도는 그 자체로 그의 이웃과 친척들의 관계도가 되기도 한다. 작은 동네에서 일상을 함께 나눴던 이들이, 사건 이후 서로를 등지고 원한을 품거나 죄책감 속에 침묵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 때문에 「1980 사북」을 지배하는 것은, 유년시절의 사북을 기억하고 그 지난한 세월을 지켜본 사북사람 황인욱의 볼멘소리이다. 그는 사건 당시의 어른들을 향해 푸념한다. “대체 왜 우리만 계속 이렇게 살아요. 그 사람들은 잘 먹고 잘사는데 우리끼리만 맨날 지지고 볶고.”
황인욱의 말에는 사북사건뿐 아니라 광산촌에서의 삶 자체를 현실적 과제로 끌어안은 후세대의 고민이 담겨 있다. 대한석탄공사법(1950), 광업법(1951) 등이 제정된 이래 광업은 농업, 어업, 축산업 등과 함께 국가의 집중관리를 받던 주요 일차산업 중 하나였다. 당시의 주요산업들이 이제는 전부 사양산업이 되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광업은 매우 짧은 기간에 집중 육성되었다가 갑작스러운 소멸의 길을 걸었다.
산업의 육성 및 지원, 산업의 구조조정 같은 말들은 정책자료집의 용어들이다. 이 용어들은 그 단어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사람들의 아우성을 담고 있지 않다. 광산업은 그 명확한 물증이다. 석탄산업은 1960년대 연탄이 대중연료로 폭넓게 쓰이며 성장했다. 특히 정부는 석유파동 때마다 ‘생산 극대화’ 방침을 세우며 채굴량 증대를 장려했다.5 광업이 주력 산업이 되면서 태백·삼척·정선 등의 탄광촌은 1950~60년 사이에 인구가 3배 이상 늘어났다. 태백에서 성장한 시인 정연수는 당시 탄광으로 몰려든 이들 중에는 이농한 농부는 물론 산속에 살던 화전민도 많았다고 말한다.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국민학교(초등학교)가 부족해서 2부제 수업을 했다거나, 전교생이 4천명이 넘었던 한 국민학교는 청군·백군·홍군 세 팀으로 나누어 이틀에 걸쳐 운동회를 진행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6 사실 태백은 탄광산업 덕에 시(市)로 승격된 도시다. 1980년대 태백시 인구는 최대 12만명에 달했다.
이러한 기조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80년대 후반, ‘석탄산업 합리화’라는 이름의 구조조정이 시행되면서부터였다. 석탄이 아닌 석유 중심으로 에너지 정책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풍경을 시인 정연수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988년 전국 347개에 이르던 탄광은 1996년 11개로, 6만 2,259명의 탄광노동자는 1996년 말 1만 725명으로 감소할 만큼 폐광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탄광촌은 석탄이 유일 산업이었으니 공황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강원도는 석탄합리화 사업이 시작된 1989년부터 1996년까지 7년 동안 166개의 탄광이 문을 닫았으며 3만여 명의 탄광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 석탄이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산업전사’로 추켜세워지던 광부는 하루아침에 ‘비합리적’인 신세로 전락하고, 산업전사에서 산업쓰레기로 용도 폐기되었다.7
시인이 꾹꾹 눌러쓴 저 광산의 숫자에는 ‘합리화’라는 명분에 의해 일터를 잃은 광부와 그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 있었을 것이다. 이에 ‘한때 산업전사로 불리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산업쓰레기로 용도 폐기’되었다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동시에 배신감이 묻어난다. 생명을 담보한 광부들의 노동을 누릴 대로 누리고 나서, 그 이용가치가 사라지자 급격하게 설 자리를 지워버린 국가를 향한 배신감이다.
앞서 사북의 윗세대를 향하는 황인욱의 한탄, ‘대체 왜 우리만 이렇게 사느냐’는 불만에는 이 글과 공명하는 억울함이 내포되어 있다. 세상은 탄광지대의 어려움 따위에는 무심하고, 광부들의 목숨값으로 자산을 마련한 이들은 호의호식하며 살아간다. 사북을 이루는 시공간은 모두 바뀌었는데, 사건의 관련자들은 상처 속에 갇힌 채 서로 반목하고 갈등한다. 함께 살자고 발버둥을 쳐도 살아갈 출구를 찾기 힘든데 대체 언제까지 가해와 피해의 질곡에 갇혀 있어야 하느냐는 한탄인 것이다.
사건 이후 4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피해자들은 노쇠하고 고문 후유증도 깊어졌다. 「먼지, 사북을 묻다」를 이미 알고 있던 관객이라면 「1980 사북」에 이르러 피할 수 없이 쇠약하고 병든 기색을 띠는 주민들의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는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에 「1980 사북」의 제작진이 사북사건의 원점, 그러니까 서로 뒤섞인 가해와 피해의 응어리를 정면돌파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단지 관련자들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차원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엉켜 있는 죄책감과 원한의 응어리를 풀어서 일상적인 공동체를 다시 세워야만 비로소 평범한 삶을 꿈꿀 수 있게 된다는 이유가 더 크다.
한때 ‘과거사 청산’이라고 불리던 용어는 오늘날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8라 불리는 용어가 되었다. 2008년과 2024년 두차례에 걸쳐 사북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인권유린을 인정하고 국가의 사과 및 손해배상이 따라야 한다고 인정한 진화위의 결정은 이행기 정의가 구현된 사례이다. 이렇듯 피해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법적·제도적 진상규명 및 구제절차는 물론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가령 「1980 사북」에 등장하는 피해자 강윤호는 사북사건 당시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누명을 쓰고 실형을 살았다. 다큐의 한 장면에서 강윤호는 스스로 생을 끝내려 했던 순간이 있었다며, 한스러운 표정으로 노끈 뭉치를 꺼내놓기도 했다. 억울한 누명에 대한 분노, 망가진 몸과 해체된 가족에 대한 비관, 세상에 대한 환멸 등을 떠안고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2022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몇걸음 떼는 것조차 힘겨운 병든 몸이 되었음에도, 무죄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이미 잃어버린 것들이 되돌아오지는 않음에도 그는 아이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피해와 가해가 뒤섞인 상황에서는 애초에 법적·제도적 접근조차 불가능한 지점이 있다. 이에 「1980 사북」의 감독은 그 혼돈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내고 관련자들 간의 사과와 화해의 장을 마련한다. 다큐는 안경다리 전투에서 사망한 경찰과 부상당한 경찰의 이야기를 고문 피해 주민들의 증언만큼이나 비중있게 다룬다. 누가 보아도 부상이 불가피한 지형의 투석전에서 명령에 의해 쏟아지는 돌팔매들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나아가야 했던 경찰들의 곤혹스러움을 조명한다. 당시 투석전에서 머리에 큰 부상을 입어 쓰러졌던 한 경찰은 자신을 병원으로 이송하여 살려낸 인물이 광부였다고 증언했다. 그는 자신 또한 광부의 아들이라며 자신을 구해준 이름 모를 광부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다큐는 집단 린치를 당한 지부장 아내를 포함하여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의 서사에 공을 들였다. 군중 앞에 끌려나와 능욕을 당한 지부장의 아내는 사건 이후 죽고 싶었으나 자식들을 키워야 하기에 ‘살아냈다’고 증언했다. 한편, 집단 린치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여성은 사실 지부장 아내의 흐트러진 옷매무새가 안쓰러워 바지를 올려주었던 사람이다. 그 또한 그 시간을 견뎌낸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성으로서 이들이 견뎌내야 했던 것은 고문의 후유증만은 아니었다. 보수적인 광산촌에서 남성들에게 린치를 당한 여인은 가족 내에서도 외톨이가 되었다. 경찰에 연행된 여성들이 성추행과 다름없는 고문을 당하는 모습은 바로 옆방에서 고문을 당하던 동네 남성들에게 목격되었다. 석방 이후 이들에게는 부부갈등이 생겨났고 가정이 망가졌다. 이에 고문 피해여성들은 자식 때문에 죽지 못해 산 것이라 하나같이 증언하는 것이다.
다큐는 이러한 어머니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아들들의 입장을 나란히 배치한다. 노조지부장의 아들이 그 어머니에게 느꼈던 감정은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고 또다시 남편에게 냉대받는 어머니를 지켜보았던 광부 아들의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다큐의 결말에서 카메라는 노조지부장의 아내에게 사과의 편지를 써내려가는 광부 이원갑의 모습을 담는다. 「1980 사북」 개봉 이후 마련된 공개상영회에서는 당시 부상을 당했던 경찰과 광부들이 만나는 자리가 마련됐다. 45년 만의 만남이자 피해자들이 또다른 피해자와 만나 화해하는 최초의 자리였다.
법적·제도적 진실규명 절차와는 별개로, 사북공동체의 마음은 그간 속 깊이 쌓아두었던 불편한 앙금을 털어내려는 화해 덕분에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다. 45년간 어둠 속에 고여 있던 시간이 비로소 현재를 향한 출구로 빠져나와 진정한 과거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4. 잔류하는 존재의 눈으로 바라보기
뒤늦게, 그러나 우리보다는 너무도 앞서서 사북에 발을 디뎠던 조세희는 ‘미래는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9 미래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그 무엇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현재에 정당하게 소환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북공동체를 응시해야 하는 것은, 결국 그 지난한 노정 속에 그들이 장차 만들어나가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걸려 있기 때문이겠다.
사북사건을 소환하는 관점은 물론 일차적으로 불법연행 및 고문 피해자들의 신원과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일에 맞추어져야 한다. 「1980 사북」의 카메라가 늙고 쇠약해진 모습으로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증언을 반복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오늘날 사북사건은 인간의 생존을 뒷전으로 미룬 채 산업의 전환에만 몰두하는 세태를 향한 경종으로도 읽혀야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볼 때 석탄산업의 소멸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시 탄광의 숫자를 줄인 것은 에너지 효율 때문도, 기후위기의 관점에서 보다 깨끗한 에너지를 추구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석탄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함께 늘어나는 노동자의 규모 때문이었다.10 사북사건 역시 광산촌에서 일어난 노동자 봉기의 한 사례였고, 이에 신군부의 입장에서는 정권 장악 초기에 그 싹을 자르려 했던 것이다.
폐광지대를 배경으로 한 한강의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에는 이 급작스러운 산업의 전환에 공동화(空洞化)된 도시의 풍경을 언급한 대목이 등장한다. 황량해진 도시에 첫발을 디딘 이들이 꺼낼 법한 이야기에 대해, 그곳에 남은 인물은 대답하고 있다.
“쫓겨날 때 막막하기야 했겠지만, 다 문 닫은 게 잘됐어요. 어디서 뭘 해도 막장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사고로 죽고, 사고로 안 죽으면 진폐로 죽고…… 죽고, 죽고, 죽을 바에는.”
“글쎄요.”
전방을 주시하는 장의 옆얼굴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굵은 목소리는 울림의 폭이 컸다. 마치 습기 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당신 같으면, 죽을 만큼 부려먹다가 필요 없게 되었으니 아무런 대책 없이 쫓아내버린다면 어떻겠소.”11
한강은 광산촌의 소멸을 보며, 한 장소가 저렇듯 갑작스레 변화를 겪는다면 그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질문을 소설에 녹여냈다. 한 장소에는 엄연히 그 장소에 삶을 부려놓고 살았던 이들이 존재한다. 어떤 형태의 삶이든, 그들이 살아내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정성이란 그처럼 간단히 ‘청산’될 수는 없다.
이에 사북사건을 되짚는 시선은 단지 고문 피해자의 법적 구명을 마무리 짓는 일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생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다시피 한 지점에서도 어쨌든 삶은 지속되어야만 한다. 「1980 사북」이 엉켜 있는 원한을 풀어내며 응어리졌던 마음이 서로에게 통하도록 애를 쓰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사건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더이상 어둠의 시간에 갇히지 않은 인간으로서 현실에 서고 미래를 꿈꿀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북에 대한 응원은 폭력적인 산업화를 좇는 동안 간과되어온 잔류하는 존재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사북주민들의 고통은 탄광지역의 황폐화, 그로 인한 생계의 위기, 산업재해와 진폐증 등 겹겹이 쌓인 어려움 속에서 더욱 가중되었다. 이에 폐광지대의 지역재생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이나 광산업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피해자들의 법적인 구명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갈등과 상처로 범벅이 된 시간을 딛고 나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한 공동체의 미래를 응원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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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희 『침묵의 뿌리』, 열화당 1985, 39~41면.↩
-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의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사법권이 군법회의로 넘어감에 따라, 1980년 사북사건 관련자 28인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 감독으로서 작중화자로 등장하는 이미영에 따르면 이 다큐는 1997년 대학 시절 우연히 떠났던 탄광촌 여행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촬영은 2000년에 종료되었으나, 일년 후 사북주민들이 명예회복 선언에 나서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해당 과정까지 이어서 촬영을 마친 후 2002년에 개봉되었다. 2026년 5월 현재 기준 유튜브 채널 ‘On Film’에서 시청할 수 있다(youtu.be/5y7HB9C9PFM?si=yygtNZBfaLc9MWzw).↩
- 이는 경찰의 사망이나 노조지부장 아내 린치 사건 등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바뀌는 혼돈에 대해 선택적으로 침묵해온 사북사건의 역사 속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 말 탄광노동이 소설화되기 시작할 무렵 발표된 김종성의 단편소설 「운탄」(『탄』, 미래사 1988)은 선택적 침묵의 사례가 된다. 이 소설은 광부의 아들로 자라난 작가가 체험에 근거해 쓴 소설로, 사북사건을 모델로 광부들의 파업투쟁을 다루지만 어용노조 지부장의 아내에 대한 린치 사건은 빠져 있다. 한편 최은미의 단편소설 「김춘영」(『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은 가해와 피해 구도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작가는 사북지역에서 술집 작부로 일했던 여성 피해자를 등장시켜 ‘광부와 그 가족들’이라는 범주에서 배제된 또다른 피해자의 영역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 김아람 「1960~1970년대 석탄산업 정책과 동원탄좌」, 『역사문제연구』 42호, 2019, 32면.↩
- 정연수 『탄광촌 풍속 이야기』, 북코리아 2010, 26~29면.↩
- 같은 책 351~54면.↩
-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는다는 점에서 ‘과거사 청산’과 같은 의미이지만, ‘이행기 정의’는 공동체의 새로운 시작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단절’이 아닌 ‘연속’에 초점을 둔 개념이다. 사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개 ‘사죄-용서-화해’ 혹은 ‘진실-정의-배상-재발 방지’ 등을 주요개념으로 하여 피해자의 확정과 피해보상 등을 법적으로 제도화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행기 정의’ 개념이 제도적인 경직성이나 협소한 피해자 규정에 갇혀 있다고 보고, 구조적 폭력과 역사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변혁적 정의’로 대체하자는 제안이 제시되기도 한다. 최정기 「5·18 민중항쟁과 역사 만들기」, 214차 창비세교포럼 자료집, 2026.5.8, 4~5면; 최정기 「5·18 민중항쟁의 역사성」, 창비주간논평 2026.5.12 참조.↩
- 『침묵의 뿌리』 13~16면.↩
- 티머시 미첼(Timothy Mitchell)은 석탄산업에서 석유산업으로의 이행을 탄광-철도-운송 노동자들로 이어지는 집단투쟁에 대한 국가 및 기업의 대응으로 읽어낸다. 석탄이 채굴부터 운송·하역에 이르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데 비해 석유는 각 단계에 개입하는 인력이 현저하게 적어진다. 물론 석유기업 노동자들의 파업도 있었지만, 석탄산업처럼 강력한 네트워크를 이루는 정치적 힘을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티머시 미첼 『탄소 민주주의』,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옮김, 생각비행 2017, 42~63면.↩
- 한강 『검은 사슴』, 개정판 문학동네 2017, 230~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