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통일시대의 개혁모델을 찾아서
남북정상회담과 그 후속조치들에 이어 급기야 미 국무장관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첫 대면하기에 이른 한반도의 정세 격변으로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가운데, 김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졌다. 그러나 아직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들이 곳곳에 걸려 있는데 언론매체는 경제위기, 아니 총체적 국정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민정부’의 정당성이 개혁에 있을 터인데 그 효과를 느끼기는커녕 3년 만에 제2의 IMF사태가 엄습할지도 모른다는 분위기이다.
최근 사태를 두고, 국민정부가 남북문제에는 성과를 올렸으나 내정은 보수세력의 방해로 진전을 보지 못한다든가, 아니면 노벨상을 받기 위해 소홀히해온 내정에 전념하라는 소리처럼 내부개혁이 잘 안될수록 남북문제에 매달린 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모두 위기의 실체를 안이하게 파악하는 것 아닐까. 크게 보면 혼란은 전보다 더 나빠진 게 많아서라기보다 전과 같은 방식으로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발전하고 남북관계가 변한 데서 연유한 것 같다. 경제위기도 정부의 개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전지구적 규모의 시장논리에 밀접히 연관된 것이고, 각종 민원이 집단행동으로 표출되는 사회혼란도 예전처럼 공권력의 강제로 쉽게 대처할 형편이 아니다. 어떤 정권이든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임이 분명하다.
이것을 우리는 세계체제의 변화와 맞물린 분단체제의 해체과정에서 초래되는 사태로 보고, 그에 대응할 새로운 발전모델 창출을 강조해왔다. 이제 더이상 끌 시간이 없는 국민정부가 정권·정파적 이해에 얽매이지 말고 서둘러 개혁을 위한 광범한 사회적 동의를 형성하여 총체적 개혁연대를 꾸리는 데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재벌·금융·공공·노사 4대 부문의 12개 개혁과제들의 우선순위를 적시에 정하고 절차의 공정성을 유지하는 일은 마땅히 필요하겠지만, 이런 개별 정책이 사회 전체의 발전모델에 비춰 그 정당성이 명료하게 인정되어야 개혁연대가 가능하고 심각하게 분열된 국민의 통합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제를 제대로 감당하겠다는 작정이야말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과 그를 선출한 국민)다운 자축의 방법이 아닐까. 한반도 남쪽의 순조로운 개혁이 바로 ‘과정으로서의 통일’의 일부란 인식이 절실한 요즈음이다.
이런 인식은 이번호에 실린 ‘의료대란’을 다룬 세 편의 글에도 적용될 수 있다. 모두 의약분업으로 인한 의료대란을 단순히 ‘집단이기주의’의 소산으로 규정하지 않고 좀더 넓게 의료개혁의 관점에서 본다. 대안으로 사적 의료체계와 공적 의료체계의 양 날개를 제안하는 박형욱의 의료다원주의적 시각과 보건의료체계의 사회화를 역설하는 채만수의 노동자·민중의 시각의 대비도 눈여겨볼 만하지만, 의료개혁이 최고 목표라면 시민단체와 노동조합들과의 차이를 넘어서 연대가 가능한 투쟁이어야 한다고 소신있게 말하면서 의사파업을 의료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발전이란 관점에서 조명하자는 황상익의 제안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의료영역에서 기존의 어떤 것보다 나은 새 모델을 창안하는 일은 바로 통일시대 개혁모델 형성의 동력이 된다.
올 가을 200번째 창비시선 출간을 기념해 잔치를 벌였다. ‘문학의 위기’를 들먹이는 분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열띤 청중의 반응은 뒤풀이로도 이어져 문학의 활기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잔치 성격의 모임이었지만 알찬 결실도 있었으니, 이번호 특집을 구성하는 고은 황석영 김병익 정남영 나희덕의 발제문과 종합토론의 내용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변화하는 현실을 끌어안으면서도 전환기 우리 문학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작가들의 당당한 육성을 들은 것도 반갑지만, 위기의 문학 속에서 ‘시적인 것’의 의미를 끌어올려 리얼리즘, 여성성 및 생태의 시각과 연관시켜 세밀하게 토론한 뜻깊은 자리가 아닐 수 없다.
특집과 더불어 이번호에는 작단 또한 풍성하다. 이산(離散)의 아픔을 쓰다듬으면서 내일을 향해 한발 내딛는 원로 김규동 시인으로부터, 허만하 정희성 노향림 도종환 최영철 허혜정 이대흠 박해석 조정 등 중견에서 신인에 이르기까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내성의 소리를 간직하면서도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보여준다. 거기에 우리 사회의 불모성과 그 속에서의 절규와 탐색을 깔끔한 서사와 유려한 문체로 그려낸 최인석, 상처받고 소외된 채 ‘절벽’에 이른 두 남녀가 서로를 보듬어내는 따스한 풍경을 그린 신경숙, 캄보디아 두 젊은이의 욕망과 배반의 활극을 통해 제3세계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유재현의 소설 역시 알찬 수확을 자랑한다. 또한 능란한 남도 사투리로 밑바닥 인생들의 고단한 삶을 풀어낸 김지우와 탄탄한 문장과 견고한 논리로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치밀하게 분석해낸 서영인의 신인소설상 및 신인평론상 수상을 축하하면서 그들의 힘찬 발걸음을 기대한다.
지난호에 이어 현장통신은 계속 교육현실을 다룰 예정이다.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되어온 전문·실업교육의 암담한 여건을 고발하는 한편 그로부터 소중하게 싹튼 개혁의 몸짓에 촛점을 맞추었다. 그밖에 테크놀로지와 우리의 세계 경험의 관계를 근대성의 상징인 기차를 통해 날렵하게 포착한 김종엽의 프로이트에 관한 논문과 북한영화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이향진의 글은,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의 현황을 듣고 한·중 연대의 거리감과 가능성을 동시에 확인한 왕후이·이욱연의 대담과 더불어 알찬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본지가 늘 공들이는 촌평란에는 화제의 책은 물론이고 중국의 한국문화 열풍 등 문화현장의 다양한 소재가 다뤄져 있다.
이미 19세기 말에도 그랬듯이 새로운 세기의 시작 연도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2001년을 21세기의 출발로 본다면 내년 봄호야말로 21세기 첫 호가 된다. 본지는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다음호에 여러가지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혁신적으로 바뀔 본지를 가일층 성원해주길 바란다.
〔白永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