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친미사대주의자들이여, 후세를 두려워하라
미 대통령의 동아시아 방문에 즈음하여 한반도에 이상기류가 엄습하고 있다. 부시가 연두교서에서 이라크·이란과 함께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 군사적 선제공격도 불사한다는 강한 암시를 묻어둠으로써 한반도 주변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보도에 의하면 이 험상궂은 용어가 2차대전 당시 독일·이딸리아·일본을 지칭했던 ‘추축국’과 역사적 맥락이 닿는다는 것인데, 참으로 황당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3차대전을 꿈꾸는 것인가? 적대적 의존관계를 이루던 소련이란 파트너를 상실한 탈냉전시대 미국의 외교정책이 9·11테러를 기화로 반(反)테러 전쟁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로되, 이라크는 차치하고라도 혁명 이후 개혁·개방의 길을 조심스럽게 모색하는 이란과 아직도 식량위기가 지속되는 북을 ‘추축국’으로 지목하는 것은 대국답지 않게 졸렬하다. 테러를 댓가로 ‘무제한의 사냥허가증’을 딴 양, 일방통행으로만 나가니 ‘곧 통제력을 상실할 폭주기관차’로 조롱받을 만하다. 그러고 보면 ‘악의 축’이 80년대 레이건이 소련을 지칭했던 ‘악의 제국’과 닮았다. 부시는 탈냉전시대에 냉전시대의 레이건 시간표로 회귀하고 싶은 것인가? 시대의 변화를 읽지 않는 헛되고 헛된 망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당사국들을 비롯하여 전세계가 부시에 대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과의 불편했던 관계가 테러 이후 약간 호전된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미국과 긴밀한 유럽에서조차 확전(擴戰)에 골몰하는 미국에 유럽이 끌려다니는 데 대한 우려 속에 반미감정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안에서도 비판이 살아난다. 그 가운데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처지가 다른만큼 세 나라를 함께 묶어 보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특히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북한문제에 관한 한 후임자에게 커다란 외교적 승리의 기회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잇따른 강경발언으로 기회를 망가뜨렸다고 부시의 반북정책을 힐난했던 것이다.
부시정권보다 더욱 한심한 것은 국내의 일부 친미보수세력이다. 시간표를 거꾸로 돌리려는 나라 밖의 기도에 내응하고 있는 이들은 부시의 발언들에 환호작약, 일종의 충성경쟁에 몰두하면서 김대중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맹렬히 질타한다. 나는 현정부에 대한 비판이 자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북정책뿐만 아니라 주변 4강외교를 높은 경륜과 지혜로운 협상력으로 일관되게 추진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최근에 더욱 불거진 정치적 난맥상이 안팎의 공격에 더 쉽게 노출되게 만든 점은 엄정히 지적되어야 한다. 외환(外患)은 내우(內憂)가 불러오는 것이다. 북에 대한 비판을 삼가자는 것도 물론 아니다. 주변국들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남북대화 또는 남북협력에 북이 더 대범했더라면 쉽사리 이런 사태가 나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쉽기 짝이 없다. 9·11테러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것이 한국경제라고 한다. 세계경제가 추락하는 와중에서도 희귀하게 보호된 한국경제의 ‘기적’이 그만큼의 남북화해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남 내부의 개혁을 전진시키면서 남북관계의 안정성을 착실히 높여나가는 작업이 외환을 막는 지름길의 단초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남과 북의 상호의존적 적대관계를 호혜평등적 평화관계로 바꾸는 것은 우리 시대 최고의 민족사적 과제다. 바야흐로 부시는 반북동맹의 출현을 촉구하며 한반도의 안정과 번영을 흔드는 위험한 주사위를 던지려 하고 있다. 이런 차에 부시에 맞장구치는 국내의 친미사대주의자들은, 이번에도 부시비판 대열에서 유일하게 빠진 일본정부의 전철을 밟으려 하는가? 경제침체와 정치적 리더십의 파탄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코이즈미정권이 그럼에도 여전히 낡은 미일동맹에 근거한 냉전적 구도로 ‘새 세상’에 대처하다가 ‘코이즈미개혁’ 자체가 위기에 빠진 일본을 보라. 탈냉전시대에 능동적으로 댓거리하면서 그에 걸맞은 한미동맹의 탈구축/재구축을 모색하기는커녕 냉전적 한미동맹에 대한 향수 속에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로 몰아가는 부시에 호응하는 친미사대주의자들은 정녕 민족의 죄인이 되려 하는가? 조상들의 사대주의는 소리높여 비판하는 인사들이 정작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 친미사대주의자들이여, 진실로 후세를 두려워하라!
올해는 21세기 한반도의 운명을 가름할 대형행사들(지자제선거와 대선, 한일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이 접종(接踵)하는 중대한 분기점이다. 테러 이후 새로운 질서를 향해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넓은 시야에서 한반도의 시간표를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진정한 도덕적 용기로 냉철히 점검할 필요가 절실하다. 우리는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특집 ‘테러 이후의 세계와 한반도’를 마련했다.
백낙청은 「한반도의 2002년」에서 불굴의 낙관주의라는 큰 시야로 올해를 조망하고 있다. 테러의 여파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전지구적 동일시간대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안전지대로 떠오른 한반도의 현재를 궁구함으로써 테러 이후 한반도에 색다른 시간표의 가능성을 분석한 이 글에서 그는 부시의 위협이 오히려 “분단체제의 근원적 비자주성과 반민주성을 극복하는 차원으로 성숙할 호기”라고 판단한다. 부시는 반면교사(反面敎師)다. 한반도의 시간표를 뒤로 돌리려는 안팎의 기도들을 진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한국시민사회의 활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올해의 행사들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집권층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평화세력들마저 미국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자발적으로 투항하고 있는 테러 이후 미국사회의 암울한 지적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해주는 캇찌아피카스의 「9·11과 미국인의 양심」과, 90년대에 ‘경제기적’의 나라로 칭송되다가 갑자기 추락한 아르헨띠나 사태의 본질을 양극화한 사회구조의 개혁 대신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무자비한 이행에서 비롯된 필연적 파탄으로 파악하면서, 그 뒤를 좇는 러시아의 현실을 함께 보여주는 까갈리쯔끼의 「아르헨띠나인은 거리로, 러시아인은 TV 앞으로」는 한반도가 처한 엄중한 상황을 타개하는 모색에서 유익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된다. 이일영의 「개방화 속의 국민경제·민족경제·지역경제」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새로운 상황에 즉하여 수정하고 있다. 세계시장과 능동적으로 교통하면서 국가의 경제개입을 좀더 규율화하는 국민경제모델을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경제와 지방분권의 진전으로서의 지역사회라는 축을 토대로 보완함으로써 종래의 동아시아모델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모델 중간을 탐색하는 문제제기가 흥미롭다. 세계화의 원심력과 지역화의 구심력이 함께 강화되는 현재, 21세기 분단한국의 향방을 모색하는 윤영관의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의 국제정치와 한국」은 특히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고조된 동아시아 경제협력을 둘러싼 중·일의 경쟁 속에 포위된 한국의 활로를 ‘철의 씰크로드’에 대한 흥미진진한 분석과 함께 남북경협에서 찾음으로써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일각의 비판이 증진되고 있는 현싯점에서 더욱 절실한 울림을 전해준다.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이 얽힌 ‘증오의 삼각관계’를 역사적 시각에서 조망함으로써 코이즈미 등장 이후 비틀거리는 한일관계의 너머를 간절히 내다본 와다 하루끼의 「동북아시아의 화해와 일본」도 그렇거니와, 한국과 일본이 함께 승리하는 중도의 길을 낙관하는 지명관의 「동아시아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자」는 원로의 경륜과 지혜가 종요롭다. 이번 특집에서 주요하게 제기된 동아시아라는 화두는 다음호 특집의 밑그림이 될 것이다.
특집의 문제의식은 논단으로 보강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깨우치는 이옥순, 일본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국가주의에 포획된 한국의 교과서를 비롯하여 교과서제도 자체를 재검토한 김유경, 특히 전지구적 차원의 회통을 내다본 혜강(惠岡)의 일통사상을 오늘의 현실에서 호명한 임형택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경지다.
이미 약속드린 대로 쟁점점검도 강화하였다. 농촌문제를 긴급진단한 현장통신과 함께, 한국사회의 뇌관의 하나인 학벌을 토론한 좌담 「학벌사회와 서울대 개혁」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짧지 않은 준비 끝에 내보낸 이 진지한 좌담이 최근 언론을 통해 부각된 이 문제에 관한 중요한 토론의 자료로서 학벌사회의 개혁을 위한 든든한 첫걸음이 되리라고 믿는다.
문학지로서 본령에 충실을 기하려고 애썼다. 다행히 모든 부문에서 작지 않은 수확을 거두었음을 문학을 아끼는 독자와 함께 기뻐한다. 시에서는 중진 이성부에서 신예 전성호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단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김영무 시인의 유고시를 수습한 것도 고맙다. 작단에는 송기원 김하기 이현수 김진초가 참여하였다. 송기원 김하기, 낯익은 두 작가의 ‘복귀’를 경하하며, 탄탄한 작품세계를 지닌 여성작가 이현수 김진초의 출현도 미덥다. 뜻밖의 기세(棄世)로 우리를 숙연하게 한 원로 김학철의 파란만장한 작품세계를 성실히 리포트하면서 오늘의 현실 속에서 탈영토화/재영토화한 김명인과, 지난호 임규찬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다시 문제삼음으로써 모처럼 문학적 토론의 활기를 진전시킨 윤지관의 평론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최근 시집들을 점검한 최현식과 최근 소설집들의 성과를 짚은 백지연의 서평, 고은 시집을 다룬 김주연의 촌평과 말썽많은 이문열 문제를 영광독서토론회를 통해 예각적으로 드러낸 김용규의 문화평, 이 모두가 우리 평론의 현장이다.
서평(공연평)문화의 정착을 위해 고심하는 창비 편집진의 까다로운 요구에 기꺼이 응답해주신 촌평·문화평 필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독자의 목소리’에 참여해주신 분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 또한 커다랗다. 이번호에는 특히, 지난호 최병헌의 촌평에 대한 저자 서정록과, 하정일의 평론에 대한 당사자 김명환의 반론을 실었다. 이 실험적 난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자유로운 동참을 대망하는 바이다.
[崔元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