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고은 高銀

1933년 군산 출생. 1958년 등단.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 『새벽길』 『조국의 별』 『남과 북』 『두고 온 시』 『백두산』 『만인보』 등이 있음.

신록

황홀 신록

이런 신록에 학살이 있었다

3년 전

아우슈비츠에 가서 토했다 식도가 아팠다

크라카우로 돌아가는 길

더딘 해 뉘엿뉘엿

밀로즈에게는 아픈 고국

나에게는 지난날의 조국이었다

이런 신록에 학살의 기억이 있었다

2년 전

광주 망월동에 가서 설사가 심했다

내내 휘청거렸다

친구를

몰라보았다

1년 전

팔레스티나 소녀가

두 개의 돌멩이를 던졌다

이스라엘 탱크가 불을 뿜기 전이었다

지난 3월

팔레스티나 눈 큰 소년이

허리에 폭탄 차고 달려가 자폭했다

저쪽에서 손짓했다

또 달려오라고

신록은 팔레스티나 자치구 폐허에도

한그루 올리브나무 잎새 몇개에 희뿜히 찾아왔다

오 시온의 탱크들! 미사일들!

팔레스티나 자치구 전지역이 점령당했다

남루한 아라파트가 갇혀버렸다

쏘아버려

쏘아버려

그 말은 아직 샤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백년이나 나무가 없다

풀이 없다

물 한모금 없다

무너진 벽들

죽은 몸 눕혀둘 곳도 없다

누구의 꿈속에서

신록은 또다시 학살의 날들을 예감하고 있다

또다시 학살이 오기 전에

팔레스티나로 가야 한다

가서

목쉰 다르위시를 화상 입은 짐승처럼 만나야 한다

이스라엘 포대 앞

세계의 시인 몇명 모여들어

무서우면

노래해야 한다

노여우면

소리쳐야 한다

가야 한다

텔아비브

워싱턴

유엔총회장에도

가 있어야 한다

아우슈비츠는 과거가 아니라고

제주도와 노근리는 과거가 아니라고

바람 속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신록에는 세상의 썰물 모두

헤매는 게 같은 바쁜 우정이 있어야 한다

돌아오는 제비처럼

돌아오지 않는 제비를 기다리는

척박한 들녘처럼

연애가 있어야 한다

가서

울어야 한다

죽은 시가 살아나야 한다

신록 이후

가꾼 밭곡식 생이파리들 못 견디는

여름 폭염이 오고 있다

부디 폭염만 있어라

폭염에 헐떡이는 개의 혀만 있고

학살은 가라고

애소해야 한다 절규해야 한다

소야곡

또는 질풍노도의 철야

신록이다

평화를 팔레스티나에 주어야 한다

평화를 이스라엘에 주어야 한다

시가 살아서 돌아오고 있다

평화와 시 두 손님이 폭력의 무덤 안에서 솟아나고 있다

✽ 체슬라브 밀로즈(Czeslaw Milosz): 폴란드 시인.

✽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 팔레스타인 시인.

침묵

오대산 상원사 종

묘향산 보현사 종

신새벽 이십팔수

저녁 삼십삼천

울려

밤새워

눈뜨고 매달려 있다

강남의 벗 침묵으로 오라

이 세계 온갖 마이크 앞에서 저주받았다

그대 천고의 침묵 어서 오라

그

그는

1945년 첫가을 일본열도에 성조기를 휘날리다가

다음해까지

중국 장강 유역 내전에 건너갔다

썩은 국민당을 밀어주다가

꼬리 접었다

상해 황포강가 갈보들이

퉤

퉤

침을 뱉었다

그는

1950년 여름부터 3년 동안

한국전쟁에 왔다

가로대 고립의무가 아니라

절대권리였다

그 전쟁에서

어느 쪽도 이기지 못했다

북위 38도선이 지워지고

북위 38도선 언저리

휴전선이 일어섰다

철조망 강산에 눈보라쳤다

그는

1954년

라틴아메리카 과떼말라에 갔다

정글에서도

낡아빠진 도시에서도

그의 공작은 해충의 근면처럼 집요했다

그는

1958년 인도네시아에도 갔다

1959년부터 1년 동안

꾸바를 철벽으로 봉쇄했다

아 카리브 바다

사탕수수밭

불타는 저녁 바다

태풍 직전

1960년

다시 과떼말라에 갔다

지구 위의 모든 주둔지 레이더에

걸려드는

물체란 물체는 모주리 없애야 했다

그는

1964년 아프리카 콩고에도 갔다

1964년 남미 뻬루에도 즉각 갔다

그는

아시아 라오스에도 갔다

10년 동안

라오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그는

1961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 건너갔다

보나빠르뜨 똘마니들이 떠나자

그가 들어갔다

약속한 구정 휴전 위반하며

융단폭격

미라이

고엽제

또 무엇 무엇

늙은 버트런드 러쎌이

세계의 양심은 베트남에 있다고 외쳤다

제인 폰다도 장 주네도 버클리 대학생들도

몸부림을 멈출 줄 몰랐다

한국군 맹호 백마가 거기 갔다

아휴 아오자이

1969년부터 1년 동안

캄보디아에도

크메르에도 그는 예외없이 스며들었다

람보 I

람보 II는 영웅이었다 아 세상은 무지무지하게 천박하였다

다시 1967년부터 1969년까지

그는

과떼말라에 가 있었다

1980년대 그레나다에도 갔다

그는

1989년 파나마에 가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다 가졌다

그는 1991년 이라크 걸프전을 단행했다

최신무기 자랑하라

폭격

포격 적중률

폭발광경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환상이라고

예술이라고 떠들었다

사담 후세인 너는 사탄이었다

그는

1995년

보스니아에도 갔다

발칸반도도

그의 구역이었다

1998년

아프리카 수단에도 갔다

아프가니스탄 빈 라덴을 편들었다

1999년

유고슬라비아에도 갔다

바쁘다

바쁘다

2000년 1월 1일

그의 뉴욕 타임스퀘어는 무도회였다

새로운 천년

새로운 세기

그의 미래는 천년제국이었다

오직 세계는 그 자신만이었다

2001년 9월 어느날

그는

몇천명의 인명을 잃었다

마천루가 무너졌다

펜타곤이 무너졌다

이 무슨 청천벽력의 모독인가

2002년

그는

아프간을 없애버렸다 지구는 초토가 되기 시작했다

아프간 이후

그는 또 어디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어디로 건너가고 있다

바그다드

혹은

어디로

그는

가고 또 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중모리로 그리고 자진모리로 화석이 되어가고 있다

절벽

쌘프란씨스코 골든게이트가 늘 보였다

아늑한 방을 뛰쳐나갔다

또다시 병이 도졌다

행복은 행복의 끝

서귀포 천지연 폭포

그 절벽으로 달려갔다

또다시 병이 도져야 했다

따뜻한 고향 봄날 뒷동산이 싫더라

진달래꽃

바람에 떨고 있더라

첫여름

트인 들녘 싫더라

온갖 초록빛들 허망하더라

제비들 오지 않더라

제비들 실컷 날던

저문 하늘의 박애가 싫더라

절벽이 있어야겠다

절벽 아래

거기 내가 있어야겠다

부동자세

거기에

온몸 부숴버려야겠다

생매장같이

절벽에 부딪쳐 치솟아오르는 성난 바다 물보라

거기 온몸 부서져 어디로 산산조각 흩어져야겠다

보라 내 늙은 안식 사악하여라

자화상

나는 그 전쟁을 노래하였습니다

주린 식민지시대

싱가포르 함락을 노래하였습니다

대일본제국

천황폐하의 군대가 이겼노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소위 대동아전쟁

식민지 백성의 아들은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의 아들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아직도 내 얼굴은 그 시대의 종노릇 뇌경색으로부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린 식민지시대가 가자

주린 분단시대가 강제로 왔습니다

카바이드 막걸리는 쓰고

사카린은 달디달았습니다

전쟁 3년

폐허가 국토였습니다

북쪽에서 해방전쟁을 노래하였습니다

낙동강 유역까지 달려가

왜관전투를 노래하다가

다부동전투

포항전투를 노래하다가 죽어갔습니다

남쪽에서

보병과 더불어 원산까지 가고

평양까지 따라가 노래하였습니다

후방 어느 남쪽 술집에서

버드나무집

요강젖집에서

중부전선 스딸린고지를 노래하였습니다

처량한 겨울밤 피리 부는

중공 오랑캐를 원수로 노래하였습니다

나의 청록파가 노래하였습니다

싱가포르 함락을 노래한 내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 전쟁 뒤

내 얼굴은

저 역력한 분단시대 50년 환관의 얼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저 70년대의 나는

베트남 파견의 국군을 또 미군을 노래해야 하였습니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노래하였습니다

안케 격전을 노래하였습니다

영광은 허망하고

절망은 깊어졌습니다

깊은 우물이여

거기 절망의 내 얼굴 그림자 지울 수 없었습니다

더이상 무엇을 노래하겠습니까

더이상 무엇을 노래하겠습니까

늙어버렸습니다

오늘 나는 우물을 메워버렸습니다

내 자화상과

내 자화상의 그림자를 묻어버렸습니다

마지막 희망으로

다시는 전쟁을 노래하지 않겠습니다

다가올 전쟁을 가슴 가득히 거절할 내일을 소리쳐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니힐은 꿀이고 평화는 벼랑 곧추서 있습니다

적

미풍도 오라

태풍도 오라

서슴지 않고 받으리라

진공도 오라

받으리라

숨 지리라

길가녘 동자꽃 있다

길 막혀

발바닥

진창에 붙을지라도

나 돌아가지 않으리라

옛날의 성현으로

한발짝도

돌아가지 않으리라

나의 적은

천년 동안

네가 아니라

옛날이란다

옛날의 성현 따위 태고 따위

거기 돌아가지 않으리라

나의 일상 찰나찰나들 오직 숭고하리라

미풍도 오라

태풍도 오라

나의 벌거숭이 현재 여기 있어라

큰 이야기

역사의 종언이라고 누구의 트럼펫이 하늘 속으로 울렸다

바람 한자락

촛불이 훅 꺼졌다

세상이 무턱대고 괴괴하였다

또 누구의 나팔이 불어댔다

큰 이야기가 끝났다고

칼날이 그어졌다

공중에서 피 뿜었다

어제는 열렬하고

오늘은 공허하였다

큰 이름들 너도나도 떠돌던 밤 그리워

진리

나는 진리를 열애한다고

누가 말하고 죽었다

인간

자유

자유여 너는 인간 지상의 가치

혁명

순백의 체 게바라

호치민

구원

해방

이념으로

점점 무거워지는 체중

평등은

영원한 꿈

사랑

미움의 측근

자아

절대 또는 상대

존재

존재보다 더 큰 부재

그러나 슬퍼 마라

작은 마을들이 있다

작은 마을들이

커다란 공화국에 흡수통일되지 않기 위하여

돼지들을 기른다

거위를 기른다

하루에도 몇번씩 달걀을 낳는다

아 달걀 속의

몽롱한 작은 목숨

작은 이야기가 있다

아주 작은 아메바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항구에서 짐 푼 배가 떠났다

배가 왔다

친구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있어야 할 유산이 하나도 없었다

이웃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

네 마리 중

한 마리는 며칠 뒤 죽었다

죽은 강아지를

미례 아빠가 묻었다

미례가 울었다

80년대 동지였다

철균이와

그의 아내 초숙이 갈라섰다

하나는 39세

하나는 36세

초등학교 5학년 늦둥이 아이는 아빠가 맡았다

아빠는 라면이고

아들은 식은 피자였다

심야 인터넷은 욕이 난무했다

역사 시시하다

종교 시시하다

정치 매춘이다 언론 공룡이다

1천만원은 시시하다

3억원은 시시하다

작은 이야기들 시시하다 독감이 휩쓸었다

붉은 십자가의 나라

립스틱 짙게 바르고 밤의 욕망 깨어 있다

이제까지 영웅이란 영웅의 허위 처절하여라

아무래도 큰 이야기가 있어야겠다

진지할 것

의고전적일 것

유연한 살갗

자운영 들판 위의 훈풍

지극정성

고행

슬픔 속에 들어 있는 기쁨

어차피 고독할 것

세계화에 대한

반세계화

가장 강한 나라가

가장 약한 나라를 치는 것이 세계화 작전이다

고대 훈족 아틸라는 누구인가 파괴인가 창조인가

나는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은 내 식당이고

내 침실이다

내 놀이터이다

단란주점 또는 유리방이다

곧 큰 이야기가 저벅저벅 온다

늙은 생존자와

어린 신생아 사이로

정보의 공중

정보의 지하에 묻힌 무주고혼들 사이로

태양계의 큰 이야기가 온다

여기는 상해 뒷골목

문제편

해결편

기대하시라

이어도

바닷가에 가서

바다에 왔다고 긴 편지 썼지

바닷가에서

며칠 보내고 나서

바다를 다 알아버렸다고 말했지

뭍에서

한발짝 벗어나지 못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를 내 품에 안았다고 45도 술에 취했지

그렇게

바다는

뭍의 노예였지

뭍의 부속이었지

뭍의 외곽이었지

그 바다 타도하라 바다의 선사(先史) 온다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배래로

난바다로

가자

도저히 뭍에서 바라보던 바다가 아니라

바다에서

바다에 에워싸여

바다를 바라보라

바다에서

비로소 뭍을 바라보라

바다 위에 이어도를 떠오르게 하라

오 신세계 전체주의

스스로

스스로 파도치는 나라 이어도를 열어라

✽ 이어도: 제주도 사람들의 피안, 저승 또는 이상향. 제주도 동남쪽 대륙붕에 수면 위로 나타날 때도 있는 암초로 밝혀졌다.

빈 잔

3차 갈까

이제 그만 꺽

그럼 남은 술이나 다 비우세나

이제 그만 꺽

자네의

포스트는 이후인가 인간 이후 미생물인가

아니

내 포스트는 다시라네 꺽 다시 인간 시작이라네

포스트모던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

포스트……

포스트…… 꺽

이제 그만 일어나세 지금이 몇세기인가

모르겠네 꺽

두 사람 비틀비틀 퇴장하고 빈 잔에 희망 고스란히 남다

개천절

여보게

이제 옛 대륙국가 고구려를 애타게 그리워하지 말게

이제 궁색한 통일신라 강변하지 말게

여보게

이제 3천궁녀 백제의 비탄 반추하지 말게

여보게

오직 한 핏줄 천자천손

환인의 서자 환웅

환웅의 독자 왕검

이들 가풍에

더이상 의탁하지 말게

이제 단군할아버지 유골에

우리들의 연원을 새삼 잔뿌리 내리지 말게

뭇 헛것 가운데 참은 한줌일세

바람 불 만큼 불었네

세월 올 만큼 오고

갈 만큼 갔네

여보게

자네가 자네 시조라네

자네가 자네 국조라네

자네는 자네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네

자네로부터 삼라만상이 시작하는

그 모진 태초 그것이라네

오늘 만방에 천명하는바

우주 삼십삼천 불러들여

나의 나라 시작을 널리 알리노라고

여보게

자네가 앞산에 서 있어야겠네

구름 일어나네 앞산 밑 아침놀 숙연히 깔려 있네

김학철 선생의 죽음

지난해 여든여섯으로 마치셨습니다

김학철 파란만장

보성중학 소년으로

상해에 건너가셨습니다

가자마자

공공조계 항일테러리스트가 되셨습니다

그런 다음

국민당군에 잠시 입대하셨다가

신사군에도

팔로군에도 복무하셨습니다

민족해방에는 오직 군사노선이셨습니다

1941년

태항산전투 최전선 분대장

한쪽 다리 중상으로

일본군에게 생포되셨습니다

북경

천진

신의주

서울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어머니와 누이 열차면회를 하셨습니다

누구도 울지 않으셨습니다

수원

부산

큐우슈우 나가사끼형무소에서

썩어가는 다리 잘라버리셨습니다

4년 비전향 기결수이셨습니다

해방 뒤

서울에 머물다가

평양으로 가셨습니다

평양에서 머물다가

만주 연변으로 가셨습니다

문화혁명 반동분자로 10년을 감옥에서 보내셨습니다

일생 일여

모국어 진지한 낱말 하나하나

카랑카랑하게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 세월

인간 서사 이룩하셨습니다

맑스 엥겔스의 불탄 숯 가슴속에 늘 담으셨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푸나무 산야에서

한 작가로 살아오셨습니다

손자이름 우정

손녀이름 서정이라 지으셨습니다

꽃다운 할아버지이셨습니다

한쪽 다리 없이

홍명희

김소월과 함께

당신은 근대문학 전역의 모국어이셨습니다

만년

작가가 쓰지 못하면 바로 죽어야 한다고

암 전이

병 깊어가는데

생명의 마지막 집착 딱 멈추셨습니다

단식 20일

단수 10일

미라가 되어 세상 마치셨습니다

남의 작가 여러분

북의 작가 여러분

그밖의 재외작가 여러분

오늘밤 당신들도 슬픈 엉터리 뜯어고쳐 다시 한번 작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