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올해를 평화프로젝트의 원년으로
올해는 유난히 역사적 기념일의 주기가 몰려 있어 역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자주 거론되는 것만 꼽아도 을사조약 100주년, 광복 60주년, 한일협정 40주년, 남북정상회담 5주년 등이 있다. 모두가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 속에서 한반도의 진로를 결정지은 운명의 연대가 아닐 수 없다. 미래를 구상하는 상상력의 자원으로 삼기 위해 이 주기들을 어떻게 기념할지 생각하는 한편, 올해가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념되게 할지 함께 고구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사회 내부의 평화와 동아시아 국가간 평화를 정착시키는 이중 프로젝트가 착수되는 대전환의 원년으로 올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
돌이켜보건대 동아시아 질서는 19세기말 중화제국이 몰락하면서 다중심이 경쟁하는 불안정한 국면에 빠져들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은 거꾸로 중국의 급부상을 맞아 지역질서가 또다시 격변기로 접어들고 있다. 전환기에 각국은 장기적 국가발전전략을 새롭게 짜느라고 바쁘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수용되어 일상생활까지 지배한 바 있던 사회진화론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란 새로운 이름으로 되살아나고, 국가경쟁력이란 구호가 국경을 넘나들며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제도적·비제도적 영역에서 역내 상호의존이 점진적이고 중층적으로 진행되면서 동아시아공동체 구상도 점차 힘을 얻어간다. 아세안+3 체제의 꾸준한 진전과정에서 동아시아 정상회의를 내년에 개최하기로 정부간 합의가 이뤄졌고, 역내 교역의 증가와 연동된 민간차원에서의 다양한 문화교류와 연대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동아시아공동체 논의가 더욱더 활기를 띨 전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일간에 이어 한중간에도 ‘역사전쟁’이 진행중이고, 무엇보다도 북한 핵문제로 인한 갈등이 동아시아공동체 논의의 진전에 장애를 조성한다. 핵무기 보유를 처음으로 공식선언하고, 재개되려는 6자회담 참여를 무기한 거부한 평양 외무성의 최근 발표(2005.2.10)는 벼랑끝외교의 막바지를 보여준다.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필요성이 더욱 절박한 싯점이다. 한반도에 평화가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않으면 동아시아공동체는 무망한 구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직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원칙을 버리지 않은 북한을 끌어들여 6자회담을 조속히 진전시킴과 동시에 1차회담 이후 5년간 열리지 않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이 올해 안에 개최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바로 50년 전, 반둥에 모인 비동맹국들이 한국전쟁으로 강화된 냉전체제를 극복할 대안적 가치로 ‘반둥정신’(평화 10원칙)을 채택한 바 있음을 기억하면서, 동아시아 평화프로젝트의 추진을 구체화할 국내외적 조건의 성숙을 제고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때다.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수립이라는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감당할 내부의 역량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다. 경기는 전반적으로 침체되고 빈부격차는 날로 심해질 뿐만 아니라, 모든 현안에서 사회여론이 양극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사회적 평화가 절실한 때이다. 올해 초 보수와 진보 진영을 아우르는 사회원로와 각계 대표들이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을 통해 새로운 성장패러다임을 짜자는 ‘2005 희망제안’을 선언하고 나서자 비상한 주목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범국민적 사회협약’ 정신을 창출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 조정자로 나서 노·사·정 등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타협이 사회세력간의 이해관계를 일시적으로 절충하는 미봉책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한 집단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참여집단간의 논쟁을 통한 사회적·정치적 타협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제부터 당면한 갈등과 분열의 근원을 깊이있게 논의해 진정한 타협안을 개발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1987년을 다시 생각하고 싶다.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갈등과 교착의 뿌리가 1987년 민주화 이행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체제의 특성, 곧 ‘87년체제의 나쁜 균형상태’에 있지 않은지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87년을 거치면서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라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지 못해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기 어려웠다. 발전은 지체되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데도 이 체제에서 얻은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데만 골몰하여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이제는 87년체제를 넘어서 갈등을 민주적으로 조정해 진정한 사회적 평화를 뿌리내리게 할 프로젝트를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싯점에 이르렀다. 동아시아 국가간 평화와 한국사회의 평화라는 이중 프로젝트는 다양한 주체가 제각기 역할을 수행하되 그 성과가 상호연동할 때 연쇄적인 파급력을 갖게 될 터인데, 본지는 기꺼이 그 연쇄의 주요한 고리가 될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본지는 올해 동아시아 평화 구축과 87년체제 극복이란 두 과제에 대해 연속적으로 논의하려는 기획을 세웠다. 이번호 특집은 그 첫번째로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국사회의 전략을 모색한다. 먼저 좌담은 한해 이어질 논의의 기조인 셈인데, 변화하는 동아시아 질서의 성격을 규명하면서 그에 대응하는 내부개혁의 과제인 87년체제 극복의 가능성을 중점적으로 짚어보았다. 참석자들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고 올해에 87년체제 극복의 방향이 잡히기를 바란다는 점에서는 의견일치를 보이지만, 87년체제의 대안이나 시민운동의 역할 및 국가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씩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때로는 구체적인 정책대안에서 유사한 견해를 보이기도 해 흥미롭고 희망의 정치, 사회적 대타협의 가능성을 엿본 의의가 크다. 이남주는 인문학이 주도한 한국의 동아시아담론과 사회과학자들의 동아시아 협력체에 관한 제도적 논의를 연결시키는 고리를 제공한다. 특히 동아시아 질서 형성은 국가와 시민사회가 모두 개입하는 여러 출발점에서 시작되어 복합적인 질서(정상적인 국제관계와 공동체적 요소의 결합)로 나아가는 다원적 과정이 될 것이란 주장은 시사하는 바 크다. 이일영은 분단체제의 물적 토대인 ‘분단경제’의 대안으로 남북한 및 동북아 협력발전전략, 중소경영체를 중심으로 한 혁신·시장화, 지역거점·특구화의 정책혼합 등을 제시한다. 와다 하루끼는 동북아 국가들이 관련된 다양한 역사적 기념일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역사인식의 분열을 조성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 국민들이 협소한 민족주의를 초월해 상호협력에 나선다면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건축의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특집에서 변화하는 동아시아와 한반도 현실에 내재화된 구조적 변수인 미국문제를 다루지 않은 아쉬움을 논단에 실린 두 편의 글이 적절히 보완해준다. 유재건은 미국 패권이 동요하면서 세계의 정치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지배구조에 균열과 틈새를 만들어내고 있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 같은 지역단위의 창조적 대응이 가능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것이 미국문제에 대한 거시적 접근이라면, 정욱식은 미국의 한반도정책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네 가지 미시적 접근방식을 상호연관시킨 ‘입체전략’을 당면한 북핵문제 해법,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의 핵심과제로 제시한다.
특집과 논단의 문제의식은 시평으로 이어진다.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된 현 싯점에서 환경운동이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다가 극단적으로 반대운동으로 선회하는 양 극단을 오가는 방식을 버리고 건설적 논의와 대안제시 위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필렬의 시의적절한 주장은 87년체제 극복과제가 시민운동에도 적용되어야 함을 예시한다.
그밖에, 경기양극화와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한국경제의 위기는 정부가 나서 산업금융씨스템을 새로 세워야 해결 가능하다고 본 신장섭의 경제시평, 이라크에서 미국이 초래한 참상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독립 언론인 다르 자마일의 현장통신, 일본의 ‘한류’ 열풍이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에 미칠 가능성과 한계를 두루 살핀 황성빈과, 논란이 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풍자와 성찰 기능을 짚어낸 성은애의 문화평, 그리고 열 권의 저서를 다룬 촌평 등은 모두 필자들의 공력이 깃든 소중한 읽을거리다.
이번호 문학란도 독자들의 관심에 호응하기 위해 애썼다. 우선 시란을 보면 원로시인 고은을 비롯, 중견시인 문정희와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이종욱의 반가운 작품을 비롯해 개성있는 시인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소설은 세 편 모두 탄탄한 작품들이다. 이혜경은 아버지의 죽음과 아이 입양을 동시에 맞이하는 불임여성을 통해 가족간 소통과 타자와의 관계를 성찰하고,구효서는 질곡의 세월을 온 존재로 끌어안은 한 여인의 인생유전을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내 남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낯선 도시에서 내면의 길을 따라 ‘남편’을 찾는 과정을 그린 조경란의 단편도 독자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다.
평론에서는 조태일의 시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살핀 손택수가 텍스트와 따듯하게 교감하면서 여전히 강렬한 시적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는 고인의 시의 현재성을 환기시킨다. 이숭원은 시의 서정적 주체와 대상을 깊이 천착하면서 고재종·나희덕·문태준의 작품에 대한 꼼꼼한 읽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장남수·석정남·송효순 등 1980년대초 여성노동자들의 문학세계를 객관적이고도 냉철한 시선으로 분석한 루스 배러클러프의 글이 이채를 발한다. 이번호부터 부활시킨 계간평에서 필자 사정으로 소설평이 빠져 아쉽지만, 하종오·함민복·이문재·김지하의 시를 ‘침묵’과 ‘생명’이라는 독법으로 섬세하면서도 깊이있게 살핀 박형준의 시평은 최근 시단의 진지한 모색들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작년 봄호에 이어 이번호에도 ‘제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별책부록으로 간행한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편집위원진을 강화해온 본지는 올해 초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사인과 시민운동가 하승창 두 분을 편집위원(비상임)으로 모셨다. 내년이면 본지는 창간 40주년을 맞는다. 창비 안팎의 변화를 곰곰이 독해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기틀로 삼고자 한다. 그 준비를 위해 내부쇄신과 역량강화에 더욱 힘쓰는 한해가 될 것을 독자들께 약속드린다.
白永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