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특집 │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

 

자력갱생의 시학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동양어문학부 교수. 저서로 『문학의 귀환』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1. 독자의 위기

 

문학의 위기론이 유행처럼 번질 때도 시는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문학의 위기는 영상언어와 힘겨운 경쟁을 벌이는 소설에 더욱 관계되기 때문이다. 귀족적 기원을 가진 시는 일찍이, 천출(賤出)에서 근대문학의 왕자(王者)로 등극한 소설에 그 지위를 양도하였기에 독자 또는 시장과 그만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시가 독자의 집중적 시선 바깥에만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예컨대 목숨을 건 반유신투쟁으로 나라 안팎의 주목을 받았던 김지하(金芝河)는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민주주의의 운명이라는 서사시적 위용과 관계되는 것이지, 시장적(市場的) 요소의 발현은 아니었다. 때로는 시도 최영미(崔英美)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처럼 독자의 총아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역시 단지 시장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전도된 정치성의 표출에 가깝다. 그것은 1990년대라는 회색지대, 그 정치성과 탈정치성의 경계에서 피어난 낙조의 찬란한 스러짐, 다시 말하면 이행단계에 놓인 김지하적인 것의 최종 발현일 터이다. 이 점에서 변함없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각광 속에 화려한 것은 소설 쪽이다. 그런데 시는 근대에 들어서 소설에 지배적 지위를 양보하고 하야한 바로 그 점 때문에 소설이 들쭉날쭉 요철(凹凸)의 행진으로 불안할 때도 오히려 항심(恒心)의 길을 미쁘게 걸어왔던 것이다.

최근의 시적 상황은 뭔가 중대한 변화를 보이는 것 같다. 시 독자가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시의 지속적 성숙을 지지해온 적정한 시 독자층의 급속한 분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인들 사이에서만 고독하게 교신되는 비밀의 상형문자 상태로 우리 시를 끌어갈지도 모를 이 불길한 조짐은 시 쪽에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제는 식상한 이야기지만 영상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소설에서도 독자의 전반적 일탈이 두드러지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소설가 또는 평론가 들이 이미지의 범람에 탓을 돌리는 논의들도 신물나거니와, 시 독자의 격감을 또 문학 일반의 상태로 환원해버리는 것도 무책임하다. 다시 반복컨대 시는 시장적 요소에 덜 연동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귀명창이 명창을 만든다.’ 이는 판소리계의 금언이다. 판소리는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고 평가할 줄 아는 최고의 청중 즉 귀명창들의 존재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시장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를 변함없이 지지해온 그 귀명창들이 시나브로 빠져나가는 오늘의 썰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시 독자의 급감과 함께 눈여겨봐야 할 점은 그럼에도 시인 지망자의 수는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신진시인을 등용하는 온갖 종류의 제도들은 폭주하는 시인 지망자들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 반어적 상황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한국사회의 이 각별한 시열(詩熱)은 시의 소외 속에 본격문학의 쇠퇴를 확인하고 있는 선진자본주의사회를 추종하지 않을 한국문학의 건강한 지표라고 볼 수도 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아직도 한국 시는 상대적으로 양호하지만, 시인 지망자의 양적인 규모가 좋은 시를 알아보고 즐기는 과정에서 한국 시를 부축하는 양질의 독자층의 유지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감소하는 시 독자층에 대한 시인 및 그 지망자의 과잉이라는 이 부조화! 과문한 탓이기를 바라지만, 선후배 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치열하고도 정다운 토론이 거의 적막강산이다. 무성한 뒷공론이 양명(亮明)한 토의로 이행하지 못하는 우리 시단의 행태는 공공선에 대한 충성을 바탕으로 한 대화정신의 부족과 연관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시 독자의 감소와 시인 지망자의 과잉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의 시’를 앞세우는 풍조는 독자의 위기로 전이된다. 좋은 독자가 되기보다는 너도나도 시인이 되려고만 한다. 이 경향성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한국사회는 아직도 계급 또는 계층 이동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양극화의 심화 속에 이랑과 고랑의 고착이 날로 심화되어가는 추세에서 문학은 그 벽을 단숨에 넘을 가능성을 품은 일종의 벤처다. 소설보다는 덜하지만 시 쪽에도 평등주의 확대의 일환으로서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작동한다. 이 점에서 비록 소수지만 정예의 독자층을 거느린 선진자본주의 나라들보다 어쩌면 상황이 더 나쁜지도 모른다.

마침내 한국 시에도 도래한 독자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세태의 경박함에 탓을 돌리는 사이비 귀족주의는 정말 사절이다. 독자란 바람 같은 존재다. 재미있고 유익하면 모이고, 지루하고 무익하면 흩어진다. 이것은 단지 난해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난해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맙다. 골방에서 웅얼거리는 난해시의 아류도 고통이지만, 쉬우면서도 지루한 시는 못내 괴롭다. 공연히 행갈이를 포기하고 김빠진 맥주 같은 산문 한 토막을 시의 이름으로 양산하는 최근 산문시는 더욱 질색이다. 도시의 산문을 전복적으로 모방함으로써 도시의 악령적 성격을 비판하는 일종의 게릴라로 출현한 산문시는 요즘 한국 시에서 그저 나른한 도시의 노스탤지어로 전락하기 일쑤다. 나는 시 독자로서 무엇보다 지금 우리 시가 직면한 독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생산자이자 발신자인 시인들이 먼저 자기 시를 갱신할 새로운 언어, 새로운 리듬을 찾는 모험에 나서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시인사회 내부의 끊어진 대화의 다리를 재건하는 일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유산을 계승하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또한 후배들도 선배들에게 시대를 이월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선후배 시인들 모두, 시대의 호흡에 대한 자기 나름의 긴장을 획득하는 독자적 싸움을 전개하면서 존이구동(存異求同)의 대화를 나눌 때, 다시 말하면 양자 모두 각자의 ‘님’으로 귀환할 때, 한국 시는 미래로 가는 새로운 통로에서 함께 만날 수 있을 터이다.

 

 

2. 시와 평등주의

독자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쏟아지고 시집은 범람하고 산문시가 유행하는 데서 짐작되듯이, 한국 시는 최근 전반적 이완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특히 근대 이후 그런 흐름이 감지되지만, 독자와의 소통을 거의 방기한 채 자기표출에 급급한 최근의 경향은 각별한 것이다. 이는 아마도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더이상 군부독재 또는 유사 군부독재로 회귀할 수 없는 결정적 반환점을 돈 것과 연관될 터이다. 참여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그동안 우리 사회를 무겁게 눌러왔던 무쇠뚜껑이 열리면서 대중의 반란이 처처에서 분출했다. 4월혁명과 5·16쿠데타 직후, 체제와 반체제를 막론하고 사회의 중추로 등장한 새세대가 거의 40년간 한국을 이끌면서 고착된 구조가 보스들의 퇴장을 고비로 급속히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그 힘의 공백지대로 풍요사회의 자식들이 답지하고 있다. 혁명적 지식인들의 자기복제에 가까운 민중도 아닌, 지배엘리뜨에 조종되는 순종적 대중도 아닌, 그럼에도 양자의 특성을 일부분 계승한 이 새로운 다중은 권력의 교체서사 바깥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하위자지만 새로운 정치성으로 단지 하위자에 머무르지 않는 독특한 한국적 집단이 아닐 수 없다. IT로 무장한 몽골 기병단(騎兵團)의 출현 속에서 한국사회의 엘리뜨주의는 민주화의 전진과 더불어 급속히 평등주의로 이행중이다. 또끄빌(1805~59)은 민주주의의 확대로 귀결된 유럽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의 긴 투쟁의 와중에서 문학이 “약한 자와 가난한 자가 그로부터 매일 무기를 끌어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열린 병기고”1가 되었다고 지적한바, 그것은 4월혁명의 자식들과 쿠데타세력 사이의 기나긴, 그럼으로써 더욱 복잡한 싸움의 양상으로 전개된 20세기 후반 한국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의 반대자 또한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2 절차적 민주화과정이 일단락된 이후 닥쳐온 문학의 위기는 무엇인가? 이미 그때도 예감되었지만 문학이라는 병기고에서 무기를 제공받던 시민들이 이제는 스스로 무기를 제조하게 되었다. 문학의 위기란 실상 문학의 민주화 또는 대중화의 다른 이름이었으니, 그 최후단계로 드디어 시의 위기 즉 시의 대중화 현상이 재래하였던 것이다. 이 평등주의의 거센 바람 속에서 시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평등주의를 선도한 민중시에서조차 숨은 표적으로 간직된 시의 귀족적 낙인이 해체될 때, 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위대한 문학을 “의미로 충전된 언어”(language charged withmeaning)로 정의한 파운드는 그중에서도 “언어표현의 가장 응축된 형식”(the mostconcentrated form of verbal expression)인 시를 충전도 최고로 간주했다.3 그의 교과서적 정의야 새삼스러울 게 없는 것이지만,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시에 대한 이 오래된 사유를 지금 한번쯤 상기할 필요가 없지 않다. 파운드는 특히 파노포이아(phanopoeia, 시각적 상상) 측면에서 최고의 시로 한시(漢詩)를 드는데,4 당시(唐詩)야말로 시가 고도로 충전된 언어조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시 「유십구에게 묻노라(問劉十九5)」를 읽어보자.

 

綠螘新醅酒 녹의신배주

紅泥小火爐 홍니소화로

晩來天欲雪 만래천욕설

能飮一杯無 능음일배무6

 

녹색의 개미들, 진국의 새 술

붉은 진흙, 작은 화로

해 저물자 하늘은 눈이 오려는데

한잔 술을 마시지 않겠나?

 

녹의(綠螘)는 술항아리 위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거품이 마치 푸른 개미떼 같다는 비유다. 거르지도 않은 진국이니 그 향기는 또 얼마나 복욱(馥郁)할 것인가? 뛰어난 시인답게 백거이는 느낌의 현재에서 문득 시작한다. 이 생생한 즉물성은 다음행으로 연결된다. 붉은 진흙으로 구운 작은 화로. 술을 데우는 화로의 배치를 통해 시인은 겨울 속에 봄을 마련한다. 그런데 1행의 녹의처럼 2행에서는 홍니(紅泥)를 앞세운다. 녹색과 홍색의 선명한 대비가 눈부시다. 그래서 나는 이 두 행을 통사적으로 불완전한 그대로 명사형 이미지들의 병치로 번역했다.7 시인은 3, 4행에서는 앞의 행들과 달리 통사적으로 완결된 문장을 배치한다. 이 변화 속에서도 저물녘의 눈을 머금은 하늘의 이미지는 앞의 밝은 이미지를 타고 가면서 뒤집는다.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눈 내리기 직전의 하늘, 눈의 예감으로 침침한 하늘의 오묘한 그늘에서 오는 긴장은 1행에서 환기된 술에 대한 행동을 지정하는 4행의 엇물림을 통해 근사하게 해소된다. 이미지가 이미지를 어떻게 타고 넘어가는가8를 그대로 보여준 시가 아닐 수 없다. 이미지의 계단이 안에서 밖으로, 사물에서 인간으로, 불완전한 통사에서 완결된 통사로 이행하는 견고한 논리적 구축을 보여주는 이 멋진 초청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순간이 천지자연의 운행과 어떻게 협동하여 시적 스파크를 일으키는지를 그대로 현현함으로써 이 지극히 사적인 순간을 신화적 아우라로 축복한다.

그러나 이 시가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 한국인 또는 외국인은 이 시의 온전한 향수자가 되기 어렵다. 시는 운명적으로 언어의 경계에 속박되기 때문이다. 오언절구(五言絶句)라는 고도의 정형시에 장치된 소리와 이미지와 통사의 정교한 조직을 한국식으로 읽어서는 온전히 접수하기 어렵다. 파운드는 한시를 파노포이아 측면에서 최고라고 평가했지만,9 멜로포이아(melopoeia, 음악성)로서도 최고다. 중국어를 모르는 파운드는 당시(唐詩)에서 울리는 불멸의 음악에 둔감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 한국 시가 당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 시는 우리 시대로 우리의 방언에 즉하여 불멸의 음악을 탄주(彈奏)해왔다. 그리고 최고의 시들은 불멸의 음악으로 우리가 그것과 관계하지 아니하고는 우리 존재 전체가 무로 환원되는 ‘님’ 앞에 우리를 끊임없이 불러세웠다. 그런데 최근 한국 시는 님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잊었다. 아니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렇다고 내가 만해(卍海)의 ‘믿습니다’로 복귀하자는 것도 물론 아니다. 소월(素月)을 다시 생각한다. 미치도록 믿고 싶었지만 님과 ‘나’ 사이의 무한거리에 아득하여 그 끊어진 다리의 이음새를 불멸의 음악으로 노래한 소월은 단순한 낭만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한국근대시의 건설자인 소월은 이미, 시를 집어삼킬지도 모를 대중화의 위험을 알아차린 천재적 예견자일까. 요즘 한국 시는 대중화의 물결에 함몰하였다. 대중은 시로부터 시의 오랜 고향인 과거를 박탈한다. 과거를 잃은 자는 미래도 잃는다. 이 황당한 사태 앞에서 민중시는 거의 멸종했다. 판소리에서는 뜻이 세면 소리가 죽는다고 한다. 민중도 잃고 시도 잃은 민중시가 그 짝이다. 그 와중에 새 뜻이 높이 들렸다. 생태시와 여성시의 깃발이 대유행이다. 민중시의 무덤에서 태어난 이들 또한 뜻이 센 시들이 되기 십상이다. 시는 뜻에 의지하는 게 아니다. 뜻에 의지한다는 것은 현재에 대한 부적응의 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현재에 대한 긴장을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현재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아닌, 현재에 압도되는 것도 아닌, ‘현재의 시’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할 문제다.

 

 

3. 비평의 자리

 

최근, 문학지들이 앞다퉈 시 특집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 시가 어떤 고비에 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정작 비평의 자기점검은 소홀하다. 과연 평론가들은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가? 나 자신을 돌아봐도 그렇지만, 한국의 시 비평은 위기적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처럼 시인이 많은 나라도 드문 터인데, 얼핏 엿보아도 자기 규모대로 단단한 시세계를 갖춘 시인 또한 적지 않다. 그런데 우리 비평은 소설 쪽에 편중되어 시를 전문으로 다루는 평론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사실 비평을 시와 소설로 구분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 관행 또한 완강해서 시 비평을 더욱 제약한다. 시의 방대한 영토에 대한 비평의 양적 불균형이 급기야 시 비평을 전반적 평면화로 이끌고 있는 형국이다.

비평의 핵은 평가다.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한눈에 알아보는 안목이야말로 종요롭다. 해석은 그 눈을 논리화한다는 점에서 부차적이다. 물론 해석과 평가는 일종의 대화적 관계이기에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상호수정되게 마련이지만 안목이야말로 이 대화를 끌어나가는 축이다. 그런데 최근 시 비평에서 평가가 실종되기 일쑤다. 주문배수(注文拜受)의 해설이 비평을 대체하고 있다. 해설이 그 시인 또는 그 시집에 대한 성실한 탐사라면 의의가 없지 않지만 외부, 대체로 서양에서 빌려온 준거에 입각하여 그 시인 또는 그 시집을 부적절하게 단수화(單數化)할 때 독자의 시읽기를 오히려 방해한다. 어느 틈에 한국비평은, 서구문학을 오로지 부정함으로써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로 떨어진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전면적 반동 속에 한국문학을 서구문학의 식민지로 타자화하는 낡은 비교문학론으로 복귀했다. 작품의 실상에 즉해서 우리 시 비평의 고투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난 감각으로 그 시인 또는 그 시집(들)의 본질로 귀환하는 시론이 아쉽다. 남의 눈 뒤에 눈치꾸러기로 숨는 타력신앙에서 벗어나 작품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혼의 모험’ 도정에서 훈련된 직관에 기초한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길을 찾을 일이다. 낡은 시학은 사라지고 새로운 시학은 도래하지 않은 이 회색의 때에 누군들 자신있게 자력을 말할 수 있을까만, 촉수(觸手)를 예민히하여 자력의 빛을 강잉(强仍)히라도 밝힐 수밖에 없을 터. 남무아미타불을 아무리 외워도 이미 부처는 응감하지 않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발 허공으로 내딛는 자력신앙이 유일한 구원이다.

그렇다고 자력신앙이 자력주의에 갇히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다본다.’ 지적(知的) 거인들에 대한 학습은 자력의 기초다. 그런데 해석의 두터운 전통을 자기 안에 섭수하는 학습과정에 기초한 서구의 해석학이 성경학에서 연유했다10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해석학의 일종인 비평 역시 님 앞에 우리를 소환하는 경전 연구의 세속적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유교와 불교 경전을 둘러싼 아시아의 그 치열한 해석의 역사를 상기할 때 학습의 핵을 이루는 해석학 훈련이란 지식정보의 충정없는 섭렵이 결코 아니다. 물론 경전암송은 더욱 아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 배움이 공허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그 생각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論語』 爲政篇).” ‘학(學)’을 타력으로 ‘사(思)’를 자력으로 바꾸면, 학과 사의 균형, 즉 타력을 바탕으로 한 자력의 구축이야말로 종요롭다. 시를 자기 눈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자력을 키우는 비평적 훈련이란 그러므로 평생학습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비평가란 스스로 자력을 밝힘으로써 일반독자의 자력을 북돋우는 것을 돕는 전문적 독자이다.

비평의 위기는 독자의 위기의 한 표현이다. 시와 독자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맡아야 할 비평이 단지 순종적 소비자로 시종할 때 비평의 위기는 발생한다. 시인에 대해 감독자 행세를 하는 비평도 우습지만 이 과공(過恭)도 문제다. 과공의 소비자나 으스대는 감독자나 모두 비평적 ‘나’가 부실한 데서 온다는 점에서 양자는 어쩌면 쌍생아일지도 모른다. 나의 해체를 열반으로 삼는 불교가 나를 세우는 데 공력을 들이는 역설을 상기하자. 나 없이 나를 넘을 수 없다. ‘일고수 이명창(一鼓手二名唱).’ 판소리 공연에서 고수는 단지 반주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소리광대가 자기 기량을 최대한 나툴 수 있도록 그 역량에 맞춰 공연을 이끄는 지휘자요 연출가이면서 전문적 청중 즉 귀명창으로 공연에 동참한다. 바로 소리광대와 청중 사이에 자리한 고수가 비평의 자리가 아닐까? 천대에 대한 울화로 북채를 던지고 소리광대로 일어선 고수들의 옛 일화들처럼 시의 대중화 경향 속에서 고수들이 자꾸 자리를 뜬다. 생산자 시인과 소비자 독자가 비평이라는 사제를 거치지 않은 채 직거래하면서, 또는 시인과 독자가 자유롭게 자리를 이동하면서, 일종의 종교개혁으로 사제들이 노숙자 신세로 떨어진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요즘의 그 많은 시 특집에서 주목할 글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시 비평이야말로 위기다. 시로부터 잠재적 독자들을 못 쫓아서 안달이 난 듯한 우리 시교육의 빈곤도 바로 이런 탈과 연동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더욱 아득해진다.

여기에는 시인비평가(poet-critic)의 대두도 걸려 있다. 이론구성력이 뛰어난 젊은 시인들이 적지 않다. 비평의 힘을 빌리지 않고 시인이 작품 바깥에서 직접 말한다. 예컨대 김행숙(金杏淑). 『시와사람』(2005년 봄호)이 마련한 특집 ‘한국 현대시와 판타지’에서 비평가들의 글보다 시인 김행숙의 「환상의 힘」이 자기 세대의 시론을 천명한 평론으로 주목된다. 그녀는 먼저 우리 근대시의 모태인 1920년대 낭만주의 시를 ‘계몽의 유토피아’와 ‘미적 유토피아’의 ‘첫번째 균열’(132면)로 적극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그에서 병적인 데까당이란 부정적 낙인을 제거한다. 나아가 상상력을 환상의 우위에 배치한 코울리지(S. T. Coleridge)의 위계제를 전복하는 해체전술을 통해 “근대를 관리해온 동일성의 이데올로기가 그 균열을 은폐하고 봉쇄”(142면)해왔음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동일성의 시학’과 날카롭게 구분되는 ‘균열의 시학’을 지향하는 자기 세대의 시를 ‘환상의 두번째 도전’으로 선언한다. “‘균열’을 드러내고 과시하고 즐기는 것, 그 자체가 미적인 성취 이전에 ‘해방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같은 곳) 균열을 즐긴다고, 균열의 표면을 미끄러지겠다고 다소 위악적으로 발언함으로써 미리, 통합이란 말 자체를 괄호쳐버린 이 균열의 탈근대시론은 최근 시의 뜻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찬찬히 살피면 김행숙의 문제설정 방식은 뜻밖에 단순하다. 물론 이 글이 자신의 시적 기획을 점검하고 다짐하는 창작노트적 성격을 다분히 지닌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기 세대 이전의 시들을 동일성의 시학으로 일괄 규정한 것은 지나치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근대시 자체가 님이 부재하는 시대 또는 님이 침묵하는 시대, 그 균열의 언어가 아닌가? 1920년대 낭만주의 시조차도 최량의 작품에서는 균열을 충실히 살았다. 균열에 충실할 때 님에 대한 갈애(渴愛)도 적적성성(寂寂醒醒)한 것이매, 김행숙이 첫번째 균열의 조짐으로 지적한 「나의 침실로」(1923)의 시인 이상화(李尙火)가 곧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로 이행한 것은 전형적이다. 이런 일은 우리 시사에서 자주 반복되곤 했다. 균열의 경험이 더욱 심화된 시대에 즉하여 출현한 1930년대 모더니즘이 곧 침통한 자기모색 속에 어떻게 변화해갔는지는 주지하는 터다. 균열과 통합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아니,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不二不一), 기실 함께 움직이는 그 무엇이다. 때로는 전자가 또 때로는 후자가 전경화하지만 저 깊은 곳에서 희망과 절망이 손잡듯 호응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충정없이 님의 품으로 가벼이 초월하는 가짜 통합의 전도사요, 님이 죽었다고 그 사망을 호들갑떠는 가짜 균열의 부흥사다. 김행숙 세대는 앞의 세대가 부딪혔던 균열보다 훨씬 강화된 조건에 갇혀 있다. 균열의 운명에 충실하지 않은 채 쉽게 다른 시대로 가는 새 통로를 찾았다고 외치는 자들을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가짜 전도사들에 지레 질려서 의제설정을 단수화하는 것은 오히려 ‘반(反)동일성의 동일성’에 포획될 우려가 없지 않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어떠한 경향이든 최량의 시는 자기동일성으로 닫혀 있지 않고 복수의 층위를 이루고 있다. 나는 비운의 천재 작곡가 김순남(金順男, 1917~1986)의 가곡 「진달래꽃」(1947)을 듣고 소월의 이 시를 해석할 새 단서를 보았다. 김순남의 곡에서 놀라운 것은 화자의 무겁지 않은 풍자적 어조다. 그러고 보면 오월에 서릿발 치는 여인의 한맺힌 노래로 푸는 통상적 해석이 거의 오독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 시는 부재하는 님에 대한 타는 듯한 갈애를 노래한 소월 시의 일반적 정황과 달리 님과 함께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에서 확연히 나타나듯이, 이 시에서 이별은 상상이지 아직 현실이 아니다. 이 기본적인 상황설정을 우리가 깜빡했던 것이다. 꽃 피는 봄날 님과 함께하는 이 기적 같은 행복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오는 가벼운 풍자적 어조로 화자는 님에게 일종의 투정을 부리는 시적 설정으로 보아도 좋겠다. 이때 「진달래꽃」(1922)은 지겨운 한(恨)의 시에서 벗어나 우리 앞에 새 모습을 드러낸다. 만남은 항상 헤어짐으로 마감된다는 점에 대한 아처로움에서 기원한 깊은 슬픔을 그 안에 머금어서 더욱 따듯한 한편의 아름다운 사랑노래를 우리는 김순남 덕분에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복수성은 최량의 시·시집·시인의 특성이다. 닫힌 동일성은 2류시의 특징이 아닐까?

모든 시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비연속이다. 이 비연속성 또는 균열의 텍스트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틈을 메우며 통합적으로 읽는 독자의 몫이다. 우리는 왜 시를 읽는가? 산문적으로 분해된 일상 속에서 뛰어난 시를 읽을 때 발생하는 집중의 경험은 생활선(禪)에 가까울 것인데, 고도로 충전된 언어조직을 곰곰이 살펴 읽어내는 기쁜 긴장을 통해 독자들은 세상살이에서 좀체 맛볼 수 없는 상상의 자기동일성을 실현한다. 이 드문 틈의 시간은 일상 속에 문득 구현된 유토피아의 꿈, 즉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에 대한 묵상의 거룩한 찰나다. 사무사(思無邪)란 이 오묘한 순간을 지칭할 터인데, 이 경지를 독자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전문적 읽기, 비평의 장소다.

 

 

4. 토론을 위하여

 

최근에 발표된 평론 가운데 민중시와 생태시를 논쟁적으로 토론한 황종연(黃鍾淵)의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과 김수이(金壽伊)의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파라21』 2004년 겨울호)는 비판 없는 해설 또는 죽은 평화가 넘치는 요즘 시평단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다.

먼저 김수이를 보자. 『파라21』의 특집 ‘한국시의 현재’는 여러모로 유익한데, 그중에서도 김수이의 글은 각별하다. 서양에서 유행하는 핵심어를 성경구절 인용하듯 모셔놓고 우리 시를 그 제단에 봉헌한다든가, 자신의 유사담론(類似談論) 구성을 위한 장식으로 시를 적당히 동원한다든가, 맥빠진 개괄에 시종하든가, 그 반대로 답답한 편집(偏執)에 빠지든가 하는 최근 시 비평의 경향에서 그녀의 글은 일단 자유롭다. 그녀는 단기필마로 오늘의 한국문학을 향해 돌진하여, 역사로 망명한 소설, 자연에 귀의한 시라는 경향성을 단칼에 짚는다. ‘역사의 매트릭스’와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최근 문학의 흐름은 1980년대 문학의 이데올로기 과잉에 대한 반동으로 1990년대에 주류화한 디테일에 대한 집착과 연속성을 이룬다고 그녀는 판단한다. 그런데 80년대식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90년대식 탈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이 또한 이데올로기 비판의 이데올로기라고 못박는 점이 흥미롭다. 그녀에 의하면 거대담론을 해체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창궐 속에 90년대 문학은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소설에서는 서사가 실종되고, 시에서는 서정이 빈곤해졌다. 바로 이 난관의 타개책으로 소설에서는 역사, 시에서는 자연이 호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경향이 탈주의 욕망이라는 하나의 뿌리에 기원하고 있음을 통찰한 그녀는 이 돌파구들을 다시 비판한다. “역사가 아닌, 역사의 매트릭스 속에서 씌어진 소설은 현실세계의 질문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진다. 애초에 그 질문에 맞섰던 적이 없는 까닭이다.”(62면) 자연을 순수의 유토피아로 상정한 생태시 역시 마찬가지다. “이 투명하고 거대한 ‘자연의 매트릭스’는 시인들이 배제한 현실의 모순과 상처를 정반대의 영상으로 보여주”는(같은 곳) 허구의 정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문학에 대한 이런 전망 아래 그녀는 역사의 주박(呪縛)에서 해방된 90년대라는 문맥에서 생태시의 대두와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변화를 주도했던 것은 민중시의 선두에 섰던 시인들”(같은 곳)이다. 민중시가 거의 멸종된 현실을 감안하면 뼈아픈 대목이다. 80년대식 민중시의 해체는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것이거니와 그렇다고 민중시를 하나의 역사적 추억으로 돌려도 좋을까? 새로운 상황에 즉해 새로운 민중시를 시의 이름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책임을 자각할 필요가 절실하다. 민중시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경향 속에 안팎의 시어미가 사라진 90년대에 생태시가 일종의 패션이 되었다. 바로 이 한계 속에서 생태시가 “현실인식의 결핍과 미학의 단순성”(66면)으로 이데올로기적 왜곡에 자발적으로 투항했다고 그녀는 비판한다(73면). 그리하여 생태시인들에게 자연의 매트릭스를 해체하기 위해 “따뜻하고 순정한 시선이 아니라, ‘교묘하고 삐딱한 시선’”(같은 곳)으로 질문하라고 요구한다. “자연을 노래할 때 시인들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있는가? 그곳에는 시인의 현실도 함께 있는가? 무엇보다 ‘그 아름다운 곳’은 자연의 매트릭스가 아닌, 현실의 온갖 문제와 욕망이 교차하는 실제의 ‘자연’인가? 이 질문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다시 시인들의 몫이다.”(74면)

의제를 설정하는 능력이 뛰어난 글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생태시를 단수화한 것이다. 물론 나희덕(羅喜德)과 하종오(河鍾五)의 시에 보이는 생태시의 균열에 주목한 논의가 없지 않지만, 생태시가 복수로 존재한다는 인식이 깊지 않다. 생태시들의 현재태를 고구함으로써 생태시에서 버릴 것과 이을 것을 분별하는 구체적 분석이 요구된다. 비연속의 텍스트인 시 또는 시집을 마치 연속적인 서사로 취급하는 관습을 넘어 시 비평의 독자성을 방법적으로 자각하는 일이 절실하다. “시는 음성적, 즉 육체적 예술이다. 시의 매체는 사람의 몸, 바로 후두(喉頭)와 혀에서 뜻을 지닌 소리로 꼴을 갖추는, 가슴 속의 공기기둥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무용처럼 형이하적 또는 육체적 예술이다. (…) 그 매체는 발레처럼 전문가의 몸이 아니다. 시에서 그 매체는 청중의 몸이다. (…) 독자의 호흡과 듣기가 시인의 단어들을 구현한다. 이것이 시예술을 신체적이고 친밀하고 음성적이고 그리고 개인적인 것으로 만든다.”11 시는 무엇보다도 소리의 조직이라는 것, 그리고 시인의 발화가 독자의 몸을 통해 구현된다는 것을 섬세하게 분별하면서 시를 대하는 일이야말로 시읽기의 출발이다. 공들인 분석에 기초하지 않은 시 비평의 횡행이 오늘의 위기를 불러오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함께 기억하자.

더욱이 생태적인 것은 무조건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제 생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지구시민의 실천적 기본덕목이다. 생태주의로 날아가지 않으면서 생태를 오늘의 우리 문학담론 안에 어떻게 포옹(抱擁)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김수이의 날카로운 비판이 또하나의 해체주의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생태시로 전향(?)한 민중시에 대해 암시만 하고 넘어간 게 걸린다. 그 양상에 주목하면서 지난 시대의 민중시, 나아가 민족문학운동을 오늘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그녀의 대담한 비평기획을 보완하는 한 핵심이 될 것이다.

고은(高銀)의 『만인보(萬人譜)』(1986~ )를 비판함으로써 살아있는 민중시의 전통에 본격적으로 접근한 황종연은 이 방대한 시집을 “7,80년대를 통해 (…) 정립된 민중상의 자유로운 종합”(395면)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시집의 이분법에 주목한다. “『만인보』는 한국의 역대 상층계급 엘리뜨들에게서 외세를 주인으로 섬긴 노예의 행적을 읽어내는 반면, 하층계급 민중에서는 자주적인 민족의식의 요새와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을 발견한다. 80년대를 풍미한 민족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관념에 투철한 셈이다.”(396면) 요컨대 민중에 기초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주의에 방점이 찍힌 이 시집에 민주주의의 바탕인 “개인의 문화가 누락”(400면)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은이 “정치적으로는 서정주와 대극적인 위치에 섰지만 민족을 일체화하는 (…) 경향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정주와 다르지 않다”(407면)고 비판한다.

하정일(河晸一)에 대한 반론에서 더 명료하게 충정을 토로하고 있듯이, 황종연은 “다원적 민주주의에 걸맞은 새로운 민중이해를 위한 그 80년대적 민중상의 탈물신화(脫物神化)”(『교수신문』 2004년 12월 16일)를 겨냥하고 있다. 왕년에 횡행한 마녀사냥식 민중시 비판과는 차원이 다른 이 글은 경청할 만한 대목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판단에 근본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우선 이 방대한 시집이 이처럼 정연하게 요약될 단일 텍스트가 아니라는 점이다. 6월항쟁(1987) 이후 우리 사회가 통과한 그 드라마들의 흔적이 생생한 현재로서 맥맥한 이 시집에는 민주화 이후, 그리고 지구화 이후, 민족문학인들이 부딪힌 고민과 모색이 배면에 깔려 있다. 고은은 결코 순진한 민중주의자 또는 단순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사실 이 시집의 기획 자체가 기존 민중상의 탈구축적 재구축이라는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시집은 일견 종합이지만 한편 해체다. 추상적 민중을 살아있는 개별적 인물들 속으로 놓아버린 이 시집의 기획은 『전원시편』(『신동아』 1984~1985)에서 싹튼 자기비판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안성으로 낙향한 후 그곳 농민들과의 속깊은 친교 속에서 이루어진 농촌체험”12을 바탕으로 한 『전원시편』은 일종의 하방(下放)이다. 유신체제의 붕괴가 광주항쟁을 압살한 신군부의 집권으로 귀결된 1980년의 배신은 한편 70년대 민족문학운동의 패배였다. 80년대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 민족문학은 슬픔을 먹이로 70년대의 어떤 추상으로부터 살아있는 민중 속으로 귀향하였다. 이 귀환은 80년대를 풍미한 탈중심화와 병렬을 이루고 있다. 새세대의 급진적 전위주의로 훗날 이데올로기의 화신으로 조롱받기에 이르지만, 80년대가 오로지 이념으로만 규정되는 시대는 아니다. 경제적 호황을 바탕으로 생활세계의 혁명적 재편이 진전되면서 대중 또는 대중문화가 새로운 차원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소장파의 급진주의조차도 대중현상의 일환으로 볼 소지가 없지 않은 것이다.13 『만인보』가 70년대를 자기비판하면서 80년대에 새로이 즉응하는 『전원시편』의 지향을 더욱 구상화하는 지점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가령 1권(창작사 1986)만 일별해도 우리는 황종연의 요약과 충돌하는 시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구두쇠 영감과 과부의 불륜을 다룬 「장복이」(33면), 늙은 주모 옥선이의 삶을 점묘한 「삼거리 주막」(38면), 군산형무소에서 만난 아비와 아들을 그린 「소도둑」(144면) 등등, 생활의 문맥 속에 생동하는 민중을 실상에서 파악하는 탈신화화가 이 시집을 끌어가는 또하나의 축이다. 물론 이는 재구축을 위한 방법적 해체에 가깝지만, 그 또한 센 뜻에 얽매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민주화와 지구화의 심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의 시적 사유가 지금도 변화하는 중이 아닌가? 요컨대 이 시집은 민중주의와 탈민중주의,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사이에서 균열하는 복합텍스트인 것이다.

나는 이 시집이 긴 도정 끝에 결국 어떻게 이 균열을 수습할 것인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거니와, 이 점에서 서정주(徐廷柱)와 고은을 그대로 등치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두 시인이 어떤 점에서 다르지 않은지 설득력있는 구체적 분석이 없기 때문이다. 고은을 민족주의로 단수화할 수 없듯이 미당(未堂) 역시 ‘신라정신’ 하나로 정렬할 수 없다. 황종연의 글도 어떤 예단 아래 그 시인 또는 그 시집을 단일 텍스트로 묶는 최근 시 비평의 통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황종연이 제기한 핵심적 쟁점, 즉 고은을 비롯한 민중시에 민족주의는 과잉인 반면, 개인의 문화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부족하다는 점, 즉 근대성(모더니티)의 결여문제는 집중적 토론감이다. 그런데 그가 주장한 “더욱 철저한 민주화”(387면) 또는 “다원적 민주주의의 모색”(388면)은 과연 근본적 해결책일까? 나 역시 우리가 이룩한 민주화가 더욱 내실있게 진전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개인의 탄생을 내세운 구미 자본주의사회가 개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엘리뜨지배로 귀결된 사정을 상기하면 착잡해진다. 공공선에 충성하는 계급연합적 공화(共和)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전진은 제국의 출현 또는 국가의 붕괴를 오히려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시장의 자유가 환상이듯이 자율적 개인의 탄생 역시 공상에 가깝다. 개인을 세우면서 동시에 개인을 넘어서는 도덕의 계보를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문제다. 그 점에서 이 문제도 한국 또는 한반도라는 텍스트 안에서 재문맥화해야 하지 않을까? 분단 한반도의 남쪽에서 살아가는 민중/시민이라는 자각 없이 이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서구주의의 매트릭스에 갇히기 쉽다. 민족주의는 근본에서 극복되어야 할 낡은 이념이지만 민족 또는 민족적인 것에 대한 궁리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동세상이 도래하기 전까지, 아니 그 실현을 위하여 우리가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선차적 고려사항의 하나다. 민족문학은 아직도 부득이 유효하다. 남의 한국문학과 북의 조선문학을 아우를 용어로서 민족문학 이외의 선택지가 없다는 차원만이 아니다. 분단체제의 요동과 깊이 연동된 한반도 주변 4강의 움직임이 전에 없이 활동적인 작금의 정세를 살피건대, 이 난해한 매듭을 어떻게 풀어 통일시대로 평화적으로 이행할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다. 고르디아스(Gordias)의 매듭을 칼로 쳐 풀어낸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대왕의 해법은 해법이 아니다. 민족주의도, 20세기형 사회주의도, 구미형 민주주의도 이미 낡아버리고, 그 모든 포스트주의도 패션으로 전락한 우리들의 시대에 모든 것을 의심하되 긍정의 용기를 갈무리하는 비평적 성찰은 더욱 절실한 것이다. 이 의문에 독자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육박해가는 모색이 우리 비평을 구원하고 우리 시를 살리는 자력갱생의 길을 여는 단초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슬그머니 솟는다.

 

 

__

  1. Alexis de Tocqueville, Democracy in America, tr. Arthur Goldhammer, New York: The Library of America 2004, 5면.
  2. 같은 책 6면.
  3. Ezra Pound, ABC of Reading, New York: New Directions Paperbook 1987, 36면.
  4. 같은 책 42면.
  5. 유십구는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 십구는 항렬을 나타낸다. 이 허물없는 호칭에서도 둘 사이의 자별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6. 邱燮友 譯註 『新譯唐詩三百首』, 臺北: 三民書局 1976, 338면.
  7. 고립된 명사형 이미지들의 병치로 이루어진 행들을 통사적으로 완결된 문장으로 푸는 번역의 관행이 당시의 이해를 가로막는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은 Yu-Kung Kao(高友工)&Tsu-Lin Mei(梅祖麟), “Syntax, Diction, and Imagery in T’ang Poetry,” Harvard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31 (1971)을 읽은 덕이다. 텍스트는 이장우(李章佑) 교수가 영남대 중문과 교재로 편집한 영인본이다(영남서원 1979).
  8. 김지하는 최근 우리 젊은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재능있는 이들은 많지만 이미지 범벅입니다. 행갈이가 안돼요. 행갈이는 침묵이 언어 속에 개입하는 것이고, 동양산수의 여백, 무(無)이지요. 소리를 이어가다가 뚝 끊고 놓아버리는 ‘묵(默)’, 그 순간의 미학에 미숙하다는 겁니다. 시란 이미지를 타고 가는 것이지만 이미지 범벅이 되면 안됩니다.”(『한국일보』 2004년 12월 1일자)
  9. E. Pound, 앞의 책 42면.
  10. Martin Heidegger, “A Dialogue on Language,” On the Way to Language, tr. Peter D. Hertz, Harper & Row 1982, 10면.
  11. Robert Pinsky, The Sounds of Poetry: A Brief Guide,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1998, 8면.
  12. 졸고 「일이 결코 기쁨인 나라」, 고은 『전원시편』, 민음사 1986, 262면.
  13. 졸고 「프로문학과 프로문학 이후」, 『민족문학사연구』 제21호, 민족문학사연구소 2002, 15~16면.

최원식

저자의 다른 계간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