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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도상 鄭道相
1960년 경남 함양 출생. 1987년 단편 「십오방 이야기」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친구는 멀리 갔어도』 『모란시장 여자』, 장편 『그대여 다시 만날 때까지』 『누망』 등이 있음. oksknk@hanmail.net
소소, 눈사람이 되다
오후 세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충심은 한성안마의 이층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탑(西塔) 연변가의 낡고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거리와 좁다란 골목을 하얗게 감싸며 눈은 소곤소곤 이야기하듯이 내렸다. 지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하얗게 뒤덮으며 가벼운 바람에 몸을 섞어 흩날리는 눈 속에서 어린 거지아이가 불쑥 고사리손을 내밀었다. 한창 재롱을 피울 네살쯤 된 여자아이의 손바닥은 까마귀 발처럼 검었다. 눈은 그 자그마한 손 위에도 내렸고, 어린 꼬맹이의 빈손을 응시하는 거지 어머니의 슬픈 눈동자에도 내렸다. 충심의 망막 깊은 곳에서 눈 내리는 연변가의 풍경과 고향의 남루한 거리가 슬며시 교차했다. 거지 모녀는 어느새 함흥역 앞 광장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누렇게 마른 솔잎처럼 가녀린 거지아이의 앙상한 뼈마디가 충심의 가슴을 가시처럼 찔렀다. 주춤, 뒤로 한걸음 물러난 충심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다 뒤늦게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 속에는 남루와 슬픔뿐이어서 그 작은 손 위에 아무것도 놓아줄 수가 없었다. 가슴이 서늘해졌고, 그만 울고 싶어졌다.
“또 울어?”
언제 옆에 왔는지 호룡이 걱정스럽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충심은 대답 대신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으며 가만히 눈물을 닦아냈다. 충심의 귀로 거칠게 떨리는 호룡의 숨결이 생생하고 노골적으로 흘러들었다. 팔뚝에 굵은 소름이 돋아났다.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돌아서서 안마를 하는 작은 침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침대들이 몹시도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차라리 안마라도 하고 있으면 마음이 이토록 스산하진 않을 터였다. 호룡도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충심은 껑충한 키의 떠꺼머리 총각이 겁석겁석 몸을 흔들며 다가오는 게 싫어 다시 창가로 갔다.
그래도 호룡은 눈치없이 주변을 맴돌았다. 충심은 호룡과 둘만 있는 게 아무래도 부담스러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니 스물셋 총각의 마음에 연정이 뭉클 솟구치는 모양이었지만 충심은 애써 모른 척 싸늘하게 외면했다. 지난 초가을, 고향이 하얼삔인 호룡은 충심을 좋아한다고 한성안마의 모든 복무원들에게 선언해버렸다. 호리호리한 키에 갸름한 얼굴의 호룡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선족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한족이라면 혹시라도 좋아할 수 있겠지만 조선족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충심은 다른 복무원들과 연속극 「대장금」 흉내를 내면서 수다를 떨었다.
잠시 후, 호룡이 위층에서 털레털레 내려왔다. 입이 한 자나 나와 있었다. 충심은 애써 모른 척했다. 그때, 눈을 하얗게 덮어쓴 설매(雪梅)가 양고기 뀀을 흔들며 들어왔다. 수다를 떨고 있던 복무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설매의 손에서 뀀을 뽑아들었다. 설매가 머리며 어깨에서 눈을 털어내는 동안 충심도 뀀을 하나 뽑아들었다. 그런데 호룡은 담배만 뻑뻑 피워댈 뿐 양고기 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충심은 뀀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시 이층 창가에 섰다. 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양고기 뀀을 창틀에 내려놓고 충심은 하얗게 변해가는 창밖 풍경에 눈길을 던졌다. ‘정씨구두’라고 손수건만한 입간판을 내세운 신기료장수 정씨가 궤짝에다 구두굽, 구두약, 구두솔 등을 챙겨넣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눈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옆 손수레 위의 과일도 눈에 파묻혀 있었다. 정씨는 눈을 뭉쳐 통통한 눈사람을 만든 뒤 그 머리 위에 망가진 구두솔을 거꾸로 올려놓았다. 구두솔은 눈사람을 까까머리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정씨는 구두약으로 눈과 코와 입을 그려놓은 뒤 궤짝을 메고 총총히 떠났다. 정씨의 눈사람을 보니 괜히 마음이 포근해졌다. 충심은 눈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눈사람은 눈을 맞으며 그 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충심은 한성안마에서 나와 눈사람에게로 갔다. 맨손으로 눈을 길게 뭉쳐 눈사람의 다리를 만들었다. 이어서 발도 만들어 다리에 붙인 뒤 그 위에 눈사람을 두 팔로 껴안아 올려놓았다. 아주 짧은 다리였지만 보기가 참 좋았다. 다리를 만들어줬으니 녹아 사라지지 말고 어디로든 갔으면 싶었다. 더구나 그곳이 진정 원하는 곳이기를 짧게 기도했다. 충심은 시린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돌아섰다.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한성안마로 들어섰다.
그때,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전화가 부르르 떨었다. 연분 이모였다. 모레 몽골 국경으로 안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는데 부탁한 돈이 되었냐며 물었다.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제 밤에도, 공동숙소로 찾아가 겨울의 몽골 초원은 영하 사십도까지 내려간다며 제발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설득했다. 그래도 연분 이모는 안내와 일행이 있을 때 가야겠다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중국에 있는 것보다는 아무리 고생을 해도 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다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충심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국경초소를 피해 몽골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댓가로 이만 위안1을 마련해야 한다고 징징거렸다. 한국에 도착하면 정착금을 받아 꼭 돌려줄 테니 제발 부탁한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애원했다. 그게 지겨워서 빌려준 돈을 받으면 주겠다고 했더니 한시가 멀다 하고 전화를 쳐댔다. 충심은 곧장 희래등(喜來登) 안마소의 김화동 로반2한테 전화를 걸었다. 빌려간 돈을 달라고 전화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한테 외상값을 받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저어, 한성안마의 미나(美娜)인데요.”
‘아, 메이나? 잘 있었어?’
김화동은 호들갑을 떨며 반갑고 다정하게 안부를 물었다.
“그럭저럭요.”
‘그럭저럭 지내면 되나, 잘 지내야지.’
“저어, 그러니까……”
돈 얘기를 꺼내자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구질구질하고 냄새나는 한성안마에 있지 말고 희래등으로 와. 오면 계약금으로 우선 천 위안 줄 테니.’
전화를 걸 때마다 하는 똑같은 말을 김화동은 오늘도 어김없이 되풀이했다.
“그, 그것보단, 이, 이만 위안이 지금 꼭 필요하거든요. 돌려준다는 날짜도 여, 여섯달이나 지, 지났고.”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말을 더듬는 스스로가 싫고 짜증났다.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늘 주눅이 들었다. 돈을 빌려주는 짓 따윈 어떤 일이 있어도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연분 이모한테는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기로 했다. 연분 이모는 중국말을 몇마디밖에 하지 못해 여기선 돈을 벌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충심은 읽고 쓰고 말할 줄 알았다.
‘아, 그거? 줘야지. 희래등으로 와!’
돈을 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돈을 받으면 연분 이모한테 줘야겠지만 선뜻 내주긴 싫었다. 어쨌든 다시 한번 설득해볼 작정이었다. 겨울의 몽골은 너무 위험했다. 차라리 베트남으로 간다면, 그것은 고려해볼 수도 있었다.
‘줄 테니 희래등으로 오라고!’
김화동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왜 희래등으로? 빌려갈 때의 장소는 한성안마였는데, 돌려줄 때는 희래등이라니? 이자도 한푼 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부당했다. 심지어 눈까지 이렇게 내리는데……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8위안이지만 그것도 아까웠다.
“한성안마로 오시면 안될까요?”
충심은 조심스레 물었다.
‘오케이!’
의외로 대답이 선선했다. 돈을 되갚기로 약속한 날이 지난 뒤로 김화동이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대답한 적이 없었다.
처음 한성안마로 왔을 때, 충심을 지극히 돌봐준 조선족 최옥화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의 애인이 김화동이었다. 눈이 크고 맑아 도무지 거짓말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첫인상의 서른한살 노총각이었다. 법 없이도 살 만큼 착한 두 연인의 가난한 사랑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사랑을 나눌 방 한칸이 없어 손님이 없는 아침 무렵에야 안마용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자주 들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충심은 다른 복무원들의 접근을 막아주었다.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다가 마침내 축복 속에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결혼하면서 자그마한 발안마집이라도 차리겠다며 사방팔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녔다. 옥화 언니가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것을 보면서 만 위안을 빌려줬더니 보름쯤 지난 뒤에 김화동이 직접 와서 만 위안을 더 빌려달라고 했다.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부모님이 돈을 송금해주면 즉시 갚겠다며 간이라도 빼줄 듯이 굴었다. 그 돈 이만 위안은 충심이 지난 2년 동안 몸 파는 것을 빼놓고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악착같이 모은 전재산이었다. 충심은 두 사람을 믿었다. 그러나 돈을 빌려주고 약속한 날짜가 되자 그때부터 김화동과 옥화 언니는 슬슬 충심을 피했다. 충심은 옥화 언니를 최옥화라고 바꿔 불렀다. 그게 벌써 여섯달이 넘었다. 희래등에 손님이 제법 든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 돈을 갚을 여유는 충분하리라 생각되었다.
곧 온다던 김화동은 오지 않고 대신 어둠이 눈처럼 내렸고 밤이 깊었다. 밤이 깊어지자 손님이 많아졌다. 전신안마와 발안마를 끝내고 세번째 손님을 보내자마자 호룡이 또다른 손님 셋을 모시고 이층으로 올라왔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호룡은 남모르게 충심의 손을 슬쩍 잡았다가 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셋 중에서 충심이 맡은 손님은 겉보기에는 멀쩡한 신사였다. 그런데 내뱉는 말마다 음담패설이었다. 입이 아니라 음담패설을 담아놓은 항아리 구멍 같았다. 듣고 있기가 민망해서 충심은 중국말로 옆의 복무원에게 ‘왕빠딴(자라대가리)’이라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한참 안마를 하는데 문득 그 남자가 온다고 한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게 떠올랐다. 심양(瀋陽)에 도착했으면 반드시 전화해서 충심을 찾았을 텐데, 그동안 약속을 어긴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라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겼는가 싶어 은근히 마음에 걸렸다. 그런저런 생각에 충심은 설렁설렁 안마를 하고 있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호룡이 헐레벌떡 뛰어올라왔다.
“미나, 희래등 김로반이 공안을 데리고 와서 너를 찾아!”
공안을 데리고 왔다는 호룡의 말에 충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사방이 막힌 곳이라 아래층 현관 출입구 외에는 달아날 길이 없었다. 앞이 캄캄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릎에서 맥이 빠져나가 휘청거렸다. 옆에서 호룡이 붙잡지 않았으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느닷없이 안마를 중단하자 손님이 화를 버럭 냈다. 남자가 일어나 화를 내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이토록 허무하게, 지난 오년의 피땀어린 고생이 막을 내리다니, 억울했다.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더러운 왕빠딴, 자라대가리보다 못한 자식! 빌려간 돈을 갚기 싫다고 고발을 하다니…… 충심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 잘난 얼굴에 침을 뱉어줄 작정이었다.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몰랐다. 어찌되었든 함흥의 부모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아래층에서 공안과 김화동이 쿵쾅거리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치솟는 분노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충심은 입술을 꽉 깨물고 김화동을 기다렸다.
“이리 와!”
순간, 호룡이 충심의 손을 잡고 재빨리 좁은 복도를 돌아 복무원 숙소로 들어갔다. 충심을 숙소 안에 밀어넣은 뒤 호룡은 문을 닫고 고리를 걸었다. 곧 김화동이 공안과 함께 충심을 내놓으라고 다른 안마원들을 닦달하는 고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공안이 미나는 조선사람에다 비법월경자(非法越境者)라면서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라고 복무원들을 다그쳤다. 떠들썩한 중국말이 왱가당쟁가당 뒤섞이고 있었다. 충심은 밖으로 뛰어나가 김화동의 머리채를 붙잡고 흔들어주고 싶었다. 그사이 호룡은 유리창을 열고 밖을 살폈다. 충심은 팔짱을 끼고 서서 문을 노려보았다. 호룡은 유리창을 떼어낸 뒤 철창을 붙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밖에서 문을 두들겼다. 김화동이 빨리 문을 열라며 소리를 질렀고, 발로 문을 찼다. 공안은 열쇠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분노로 흥분이 극에 달한 충심은 김화동의 눈이라도 찌를 만한 게 뭐 없나 싶어 숙소 안을 두리번거렸다. 쇠젓가락이 있다면 딱 적당할 텐데, 하다가 눈에 띈 것은 칭따오 맥주병이었다. 충심은 맥주병을 손에 들었다. 문을 열고 김화동이 들어오면 그대로 머리를 찍어버리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잡혀갈 때 잡혀가더라도 이만 위안어치는 복수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문짝이 곧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밖에서 문을 한번씩 찰 때마다 문짝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충심은 맥주병을 손에 쥐고 문을 노려보았다.
“아 씨발, 정말!”
호룡은 여전히 철창을 붙잡고 흔들고 있었다. 철창을 뜯어낸다고 해도 이층에서 뛰어내릴 자신은 없었다. 공안에 끌려갈 각오를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김화동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식식거리며 들어왔다. 뒤에는 제복을 입은 젊은 공안과 복무원들이 호기심에 찬 눈길로 몰려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저년이야! 체포해!”
김화동이 뒤따라 들어서는 공안에게 충심을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충심은 맥주병을 쳐들었다. 김화동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려는 찰나, 호룡이 가로채더니 번개처럼 맥주병을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으악, 하는 비명이 터졌다. 김화동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호룡은 깨진 맥주병을 들고 공안을 협박했다. 공안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자 호룡은 충심을 밖으로 내보냈다. 충심이 나가자 복무원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충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층으로 뛰어갔다.
“저년 잡아!”
김화동이 손바닥으로 피에 흥건하게 젖은 머리를 감싸고 소리를 지르자 공안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호룡이 공안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정신없이 한성안마 밖으로 나온 충심은 경광등이 달린 공안차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마원 안에서는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충심은 뛰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르네쌍스 호텔 앞으로 뛰어가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망설였더니 운전사가 짜증난 말투로 목적지를 물었다.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고민하는데 한성안마에서 공안이 호룡의 멱살을 붙잡고 튀어나왔다. 충심은 고개를 푹 숙이고 샹그릴라 호텔로 가자고 했다. 택시는 눈길 속을 천천히 달렸다.
보석싸우나를 지나 도로를 가로질러 녕대(寧大)호텔 앞으로 가기도 전에 택시 앞유리창에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와이퍼가 힘겹게 눈을 밀어내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눈이 도로를 하얗게 포장해버린 탓에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자가용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간간이 택시만 지붕에 눈을 한껏 이고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충심은 뒤를 돌아보았다. 공안차의 반짝이는 경광등 빛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운전사한테 속도를 내라고 하고 싶었지만 길이 워낙 미끄러워 보였다.
택시가 마오 쩌뚱 동상이 있는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자 충심은 세워달라고 말했다. 운전사가 투덜거리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택시가 썰매처럼 미끄러지다가 간신히 섰다. 10위안을 주고는 거스름을 받지 않고 내렸다. 충심은 좁다란 골목 안으로 뛰어갔다. 잡화점과 담뱃가게에서 사람들이 나와 인도에 쌓인 눈을 도로로 밀어내고 있었다. 천천히 걷는데 눈 녹은 물이 질척질척 발가락 사이로 올라왔고 곧 아프도록 발이 시렸다. 그제야 내려다보니 업소용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눈은 펑펑 쏟아졌고, 돌아갈 집이 없다는 사실에 뼈가 저렸다.
차라리…… 아까 잡힐 걸 그랬나?
가야 할 방향을 정하지 못하자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어디로든 가야만 했다. 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지만 충심의 길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루에 3위안짜리 공동숙소에 묵고 있는 연분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열 명이 넘는 손님이 몰려와 잘 곳이 없다 하더니 돈은 어찌되었냐고 물었다. 절망스러웠다. 돈을 받기는커녕 김화동한테 쫓기고 있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연분 이모의 긴 한숨이 귀로 흘러들자 충심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눈은 고요하게 내려 충심의 어깨며 머리 위에 쌓였다. 젊은 연인이 눈싸움을 하며 지나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세상은 고적했고, 충심은 눈 내리는 밤의 고요한 풍경 속에서 오직 혼자였다. 발가락이 어는 듯 시렸다.
충심은 길 없는 길 위를 걷고 걸었다. 밤은 점점 깊어갔고 가로등 불빛에 함박눈이 처연하게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주머니 속의 전화가 부르르 떨었다. 발신자번호를 확인해보니 연분 이모였다. 충심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충심의 가슴 깊은 곳에도 함박눈은 하염없이 쌓여만 갔고, 김화동에 대한 분노 때문에 몸은 열병을 앓듯이 뜨겁기만 했다.
한참을 걷다보니 서탑의 중심가였다.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충심을 이 거리로 데려온 것이었다. 다행히 한성안마는 중심가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다. 밤의 서탑 중심가는 온갖 네온싸인들로 휘황찬란했다. 경회루 한정식집, 설운도KTV,3 서울KTV, 황실룸쌀롱, 전주 콩나물국밥집, 오아시스 커피숍, 녹색지대KTV 등등 한글 간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의 요란한 불빛을 받아 총천연색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밑으로 술취한 남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비틀거리면서 지나갔다. 충심은 문득 세상을 저주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세상을 향해 똥바가지를 퍼부으며 고래고래 악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충심에게 허락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충심은 서탑 중심가를 지나 하염없이 걸었다. 걷다가 낯익은 아파트단지에 들어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그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뜬금없이 사로잡혔다. 충심은 낡고 오래된 아파트단지 사이의 길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만일 그가 아파트에 와 있다면, 그래서 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충심을 기다리고 있다면, 여태껏 주지 않았던 마음도 아낌없이 내주고 싶었다. 충심은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그를 생각했다.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도 성도 몰랐다. 아는 것은 오직 전화번호뿐이었다. 전화번호도 충심의 손전화에 발신자표시로 찍힌 것을 저장해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번호로 먼저 전화를 걸어본 적도 없었다. 그것을 충심은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스물아홉번을 만나는 동안에 충심은 인간의 위신을 지키려 무척 애를 썼다. 만약에, 오늘 만나게 된다면 서른번째였다. 선물로 마음의 빗장도 열어줄 참이었다. 한국엔 가지 않아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했고, 아주 잠깐이라도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파트단지로 들어선 충심은 걸음을 멈추고 불 켜진 창문들을 올려보았다. 3층의 어느 창문으로 한 남자가 가스레인지에 파란 불꽃을 활활 피워놓고 요리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옆으로 헐렁한 잠옷을 입은 여자와 네댓살로 보이는 꼬마가 가끔씩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주차된 자동차도 거의 없는 낡고 허름한 아파트단지의 가난한 창문마다에 눈이 내렸고, 그 틈으로 잠깐씩 사람의 모습이 그림자극처럼 떠올랐다 스러졌다. 충심은 눈 내리는 밤의 어두운 풍경 속으로 스미듯 걸어들어갔다.
그의 아파트 앞에 섰다.
한성안마의 복무원 숙소에서 부대끼지 말라며 그가 마련해준, 한달에 천삼백 위안짜리 좁고 허름한 아파트였다. 한성안마의 숙소에 비하면 궁궐이었지만 충심은 그 없는 아파트에서는 단 하루도 홀로 자본 적이 없었다. 몸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비밀번호를 눌러 아파트 문을 열었다. 막막한 어둠이 맨 먼저 충심을 맞이했다.
아무도 없다.
………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충심은 아파트에 가득 차 있는 냉기 속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빙상(氷箱, 냉장고)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건만 그는 없었다. 어둠속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충심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 꾹 눌렀다. 형광등은 차가운 빛을 내뿜으며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서걱서걱 언 양말을 벗으며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깔린 전기요의 전원을 켰다.
충심은 침대 위로 올라가 쪼그리고 앉아 언 발가락을 주물렀다. 발가락에 온기가 돌아오자 대신 몸이 와들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다닥다닥 소리를 내며 이까지 저절로 떨렸다. 온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옆으로 누워 떨리는 몸을 막막하게 지켜보았다. 살아오는 동안, 속수무책일 때가 많았다. 길의 끝이 낭떠러지가 분명한데도 그냥 가야만 했던, 돌아서고 싶었지만 인간의 의지를 비웃으며 저절로 걸음이 옮겨지던 속수무책의 순간들. 왜 다른 길로 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다른 길로 가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 바닥이 따뜻해지자 몸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는가 싶었는데 슬그머니 설움이 땅거미처럼 몰려왔다. 충심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끅끅 울음을 참았다. 삼년 전, 목단강을 떠나올 때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무리 힘들고 서러워도 울음과 눈물을 참아내야만 인간의 위신을 지킬 수 있다고 다짐했건만, 맹세는 번번이 깨졌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막아냈더니, 스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충심은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둔 채 눈을 감았다.
소소(小小), 잘 있었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깊은 어둠속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어디에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꿈이 아니기를, 제발 꿈이 아니기를……
충심아, 충심아.
함흥역인가? 아니면 김책역? 기차가 막 떠나고 있는 텅 빈 플랫폼의 뿌연 신기루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어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서 내리라는 것인지, 잘 가라는 것인지 알아보기 힘든 손짓이었다.
오마니!
충심은 점점 뒤로 멀어져가는 어머니를 불렀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목소리가 터지기만 하면 멀어져가는 어머니를 붙잡을 것만 같은데, 충심은 목청이 터져라 어머니를 부르고 싶어도 벙어리처럼 아무 소리도 내질 못했다.
구불구불 흐르는 목단강이 멀리 보이는 어느 농가의 아래층 곳간에서 충심은 농기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닦으려고 몸을 일으켰더니 아지랑이 속에서 공안이 불쑥 나타났다. 지난번처럼 옥수수밭으로 달아나 숨을 작정으로 뒷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뒷문은 사라져 없고 그냥 벌건 흙벽돌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충심은 문을 찾으려고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문은 없었고, 아지랑이 속에서 공안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철사로 코뚜레를 꿰어 끌고 간다고 했는데…… 공안이 끝이 바늘처럼 뾰족한 철사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코를 꿰여 잡혀가느니 차라리 벽돌이 되고 싶었다. 공안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공안의 얼굴은 두만강에서 처음 만났던 조선족 인신매매단으로 바뀌었다. 충심은 몸을 돌려 벽을 향해 뛰어들었다. 벽 속으로 빨려들었는가 싶었는데 한성안마 이층이었다.
메이나!
안마를 받던 사람이 충심의 중국식 가명을 불렀다. 대답을 하며 얼굴을 보니, 김화동이었다. 기겁을 하고 돌아서는데 김화동이 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았다. 김화동의 손에서 철사가 반짝 빛을 냈다. 가까이 다가온 김화동의 얼굴이 목단강 촌마을에 왔던 그 공안의 얼굴로, 다시 조선족 인신매매단의 얼굴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 모든 얼굴이 한 사람의 얼굴에 번갈아 나타나는 것은 끔찍한 공포였다.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꿈일 거야, 일어나야지.
문득 현실이 아니고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 안에서 공포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마음이 편해지며 몸의 긴장도 풀렸다. 충심은 눈을 떴다. 뒤죽박죽인데다 밑도 끝도 없는 나쁜 꿈이었다. 후유, 충심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꿈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갓 꺼낸 개의 간처럼 생생했다. 중국 공안에 잡히면 철사로 코뀀을 당해 끌려간다는 것은 인신매매단 중의 한 사람이 해준 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너무 강렬해서 그후로도 오랫동안 진실로 느껴지곤 했었다.
바람이 유리창을 흔들고 지나갔다.
유리창이 흔들리는 소리는 아주 먼 곳의 벌판에서 기차가 덜커덕덜커덕 달려가는 것처럼 까마득하고 아득했다. 깊고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설핏 다시 잠이 들었다. 여전히 꿈은 어지러웠다. 조금 전의 꿈을 연속극처럼 이어서 꾸기도 했다.
불안한 잠과 불길한 꿈에 시달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막 청소를 끝낸 방처럼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충심은 눈을 뜨지 않고 가만히 누워 그 느낌을 음미했다. 그의 아파트, 그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새삼스러운 느낌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심양에 왔을까? 아니면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지 못한 것일까?
‘소소.’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속으로는 그를 간절히 기다린 모양이었다.
‘너는 그게 뭐냐 대체? 엉덩이는 작고, 젖가슴은 인민광장에 붙은 껌이네. 그래서 시집이나 제대로 가고 애는 쑹쑹 낳겠냐? 심히 걱정이다야.’
‘………’
‘하하하! 니 이름은 앞으로 소소다 소소. 작을 소 두 개를 붙여 소소.’
중국식으로 ‘샤오샤오’나 ‘쌰오쌰오’라고 해야 하지만 그는 편하다며 소소를 고집했다. 충심은 미나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그는 재미있다며 만나기만 하면 ‘소소’라고 불렀다. 갈증에 목이 탔다. 충심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가서 빙상 문을 열었다. 오렌지주스와 박카스가 눈에 띄었다. 충심은 박카스를 집었다가 도로 놓고 주스를 꺼내 병째로 들이켜며 침실로 갔다. 불을 켰다. 불빛이 너무 환해 충심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암천(岩泉) 정수기, 빈 박카스병, 옷걸이에 걸려 있는 그가 입던 티셔츠, 꽁초가 든 재떨이, 중고로 산 20인치 텔레비전, 의자 등받이에 뱀허물처럼 걸쳐 있는 잠옷 대용의 운동복 바지가 불빛 속에 드러났다. ‘소소!’라고 부르면서 그가 장난처럼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를 사랑했던가? 우등불이 올라붙은 듯 두 뺨이 화들짝 달아올랐다. 충심은 얼른 두 손으로 뺨을 덮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랑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사랑이라니? 그런 어마어마한 사치를 꿈꾸진 않았다.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신분증이었다. 중국 공안에 끌려가지 않을 신분증만 있다면 평생 사랑 없이 살아도 좋았다. 신분증만 있다면 굳이 한국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 가야만 합법적으로 신분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불행히도 아주 늦게서야 알았다. 그동안 한국으로 갈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회가 왔을 때는 스스로 포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회를 잡고 놓지 않는 것인데,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왔다. 그 후과로 지금, 그를 기다리게 되었다.
충심은 유리창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찬바람이 얼굴을 와락 덮쳤다. 새파랗게 언 손이 옷섶을 헤치고 가슴으로 쑥 들어온 듯, 머리가 찌잉 울렸다. 날씨는 아주 맵짰다. 가지마다 하얗게 눈서리꽃이 핀 나무 아래로는 새벽일을 나가는 사람들이 솜옷을 입고 목도리로 입을 가린 채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지난밤에 펑펑 쏟아지던 눈은 새벽 무렵에야 겨우 그친 모양이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내며 웃던 고향의 동무들이 그리웠다.
바람이 창밖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었다. 거무튀튀하고 음울한 서탑 연변가 아파트단지의 나무들이 눈꽃바람의 방향에 따라 메마른 가지를 이리저리 흔들며 춤을 추었다. 마가을이 훌쩍 지나고 겨울이 와버렸을 고향, 꿈에서조차 모습을 숨겨버린 그 거리가 이랬던가? 함흥역 광장 옆 작은 공원에서 몰래 미신쟁이를 만나 운명을 점쳤던 도리암직한 은실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립고 그리웠다. 겨울이 오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옷 속에 눈뭉치를 집어넣으며 장난치던 그 시절은 너무 아득하기만 했다. 이제 한국으로 간다면 다시는 만나기 어려울 터였다. 은실이뿐만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큰언니, 작은언니, 막내동생까지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충심은 젖어드는 눈굽을 엄지와 검지로 한참 동안 꾹 눌렀다.
유리창을 닫고 돌아선 충심은 침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벽에 붙인 중국지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접힌 자국마다 종이보풀이 일어난 닳고닳은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심장을 감싼 갈비뼈에 눈서리꽃이 피어나는 듯 가슴이 서늘해졌다. 지도로 다가가 오른손 검지로 우루무치로 가는 철길을 짚어보았다. 심양에서 우루무치까지 한 뼘도 되지 않았지만 기차를 타면 사흘이 걸린다고 했다. 심양에서 서울까지는 손가락 하나 정도의 짧은 거리였다. 그 짧은 거리를 가기 위해 충심은 두 해가 넘게 중국을 떠돈 셈이었다.
충심은 울란바토르에서 서울로 간 이종사촌 미향이를 통해, 몽골초원을 거쳐 한국으로 가는 지옥여정의 고통에 대해 들었다. 몽골로 가겠다는 연분 이모 때문에 한국 통일부의 하나원에서 교양을 받고 안산이라는 작은 도시에 방 하나를 얻고 살게 되었다는 미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펄펄 뛰며 가지 못하게 막으라며 고생담을 풀어놓았다.
‘우루무치를 지나 국경으로 접근해서 안내원이 일러준 길을 따라 큰 산을 넘으면 몽골이야. 그 산을 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산을 넘자마자 끝없는 초원이 펼쳐지는데, 그 지옥을 건너면 고비사막이라는 모래지옥이 또 앞을 가로막는 거야. 사막이라고 해서 처음엔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데 다행히 하루 만에 건널 수 있었어. 사막을 건너면 또다시 초원이야. 초원이 얼마나 지겨운 줄 알아? 죽은 낙타를 뜯어먹는 늑대를 봤는데 이젠 죽었다 싶더라. 천신만고 끝에 유목민들을 만나도 겨우 양고기나 얻어먹을 수 있는데, 그걸 먹으면 하루종일 설사를 죽죽 해대는 거야. 말이 다르기 때문에 길을 알려달라고 하지도 못해. 초원에서 두 사람이나 얼어죽었어. 나중엔 배가 고파서 양을 한 마리 잡아먹었어. 양떼의 주인이 말을 타고 나타나 채찍을 휘두르는데, 살이 쩍쩍 갈라지더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초원을 헤쳐나왔는지 모르겠어. 꿈만 같아. 절도죄로 몽골의 경찰한테 데려다주면 좋겠는데 실컷 때리고는 그냥 가버렸어. 열흘 넘게 헤맸는데, 밤이 되면 너무 추워서 잘 수가 없어 마냥 걸었어. 해뜨는 쪽으로만 죽자사자 걸었는데, 가다보니 정말 작은 마을이 나오는 거야. 송아지만한 몽골 개들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몰려오는데 눈앞이 캄캄해지더라. 그 도시에서 양고기 칼국수를 먹고 돈을 모아 트럭을 빌려 타고 울란바토르로 갔어. 하늘이 도운 거라고 하더라.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한국대사관으로 쳐들어갔어. 그렇게 겨우겨우 한국에 도착했더니 정착금에서 이만 위안을 또 뜯어가는 거야. 나쁜 새끼들. 언니야, 연분 이모라는 사람 몽골로 절대로 보내면 안돼. 나는 발가락을 두 개나 잘랐어. 그것 때문에 잘 걷지도 못하고 절룩거려.’
절룩거리며 걷는 미향의 모습이 상상 속에서 떠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올라왔다. 게다가 비용은 얼마나 많이 드는지? 도합 사만 위안이었다. 겨우 국경을 넘는 길까지만 안내해주는 댓가치고는 너무 많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탈출구라고는 한국행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 돈을 마련해야만 했다. 연분 이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충심은 지도에서 함흥과 두만강을 찾았다. 지도에 표시된 작은 점이 함흥이었고, 가느다란 선이 두만강이었다. 충심은 속으로 두만강처럼 울었다.
사람답게, 나이에 어울리게 살고 싶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저녁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곱게 화장하고, 동무들과 밤마실을 다니며 수다 떨고 남의 흉도 보면서, 어린시절부터 꿈꾸었던 것들을 위해 열심히 살며, 무엇보다도 신분증 없이 떠돌지 않으며, 아무리 늦어도 돌아갈 집이 있는 삶을 충심은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충심의 그 작은 소망은 모조리 금기에 속했다.
금기를 풀기 위해 충심은 그를 선택했다. 물론 우연이었지만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받아들였다.
그는 사업하는 사람이었다. 한달에 일주일은 심양의 사무소로 출장을 나온다는 그는 한성안마의 단골이었다. 서울에서 사업을 크게 하다가 망한 뒤에 이혼까지 하고 심양을 오가며 작은 무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백제원 식당 옆의 오피스텔 건물에 사무소가 있어서 심양에 오면 주로 서탑 중심가에서 생활했다. 그는 한성안마에 오면 꼭 미나를 찾았다.
사실 충심의 안마 솜씨는 젬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주씨안마에서 경리를 할 때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라 손이 맵질 않았다. 중국사람이나 조선족 같았으면 불만이 대단했겠지만 한국사람들은 대충 넘기며 따지질 않았다. 그는 미나가 언제나 명랑해서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단골이 되었다며 안마가 끝나면 반드시 팁을 듬뿍 주었다. 그는 늘 외롭고 지친 표정으로 안마를 받으러 왔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안마를 받기보다는 주로 대화를 하려고 했다. 음담패설이 아니라면 충심도 다정하게 말을 받아주었다.
그날은 안마를 시작하자마자 조선족들은 어찌하여 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달아나는 것이냐며 그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지루했다. 어깨를 풀어놓고 장(腸)안마를 시작했다. 충심은 그의 배를 손바닥으로 허리에서 감아올려 배꼽 주위로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배가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나이가 몇살인데, 똥배 좀 봐? 임신 팔개월은 되었겠다. 배 좀 빼세요!”
배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일부러 아프게 주무르면서 말했다.
“내 배가 어때서? 김정일 국방위원장만큼은 근사하지 않냐?”
그의 농담을 듣는 순간, 파르라니 독기가 서렸다. 충심은 자신도 모르게 안마를 중단하고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얘가 왜 이래?”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군님하고 함부로 비교하지 말라우요. 어디르 감히?”
충심은 양손을 허리에 척 걸치고 따지듯 대들었다.
“뭐! 장군님?”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너, 탈북자지? 그렇지?”
매가 병아리를 채가듯 그는 충심의 팔을 잡았다. 충심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엉뚱한 곳에서 실수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야, 감쪽같이 속았네.”
그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충심은 돌아섰다.
“야, 미나! 어딜 가? 얘기 좀 하자. 내가 너를 잡아먹냐?”
충심은 걸음을 멈췄다. 잠깐이지만 짧은 침묵이 흘렀고 충심은 되돌아섰다. 그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을 터였다. 적어도 한국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며 이만 위안이나 삼만 위안을 챙겨 달아나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한국으로 들어간 탈북자 중에서 어떤 이들은 같은 처지의 사람들한테 경로를 알려주겠다며 삼만 위안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국에 들어가면 주겠다고 하자 먼저 입금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 도착하면 삼만 위안 외에 다시 오만 위안을 더 내라는 조건까지 덧붙였다. 녹색지대KTV에서 몸을 팔며 돈을 모았던 은주는 그 방식대로 먼저 입금을 했는데 한국에서 전화번호를 바꿔버리는 통에 고스란히 돈을 날리기도 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북경에 있는 외국대사관을 필사적으로 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너무 비참하고 안쓰러웠다.
담배를 피운 후에 그는 옷을 입었다. 출장안마비를 줄 테니 밖에 나가 이야기하자고 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충심은 그를 따라 나섰다. 그는 충심을 데리고 백제원 식당으로 갔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심양에서 만난 대개의 한국사람들은 탈북자라면 곧 지독히 굶주린 것으로 오해했다. 물론 너무 굶주리다 못해 강을 건넌 사람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떠돌다가 만난 여자들 중 상당수는 충심과 마찬가지로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의 오지 농촌으로 팔려간 사람들이었다.
“너 정말 한국에 가고 싶지 않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가고 싶어요.”
충심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했다. 어린시절 거짓말을 하다가 현장에서 어머니에게 들킨 느낌이랄까 아니면 환한 조명 아래 발가벗고 서 있는 느낌이랄까, 뭐 그랬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무엇을 잘못했는가 싶은 마음도 꿈틀거렸다. 그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충심도 맥주를 들이켰다.
“그런데 왜 안 갔어?”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으며 그가 물었다.
“사실 나는, 어리석어서 그렇지 일부러 조국을 배신한 것은 아니거든요. 바보처럼 속아서 강을 건넜다가 그대로 인신매매단한테 끌려가 목단강 근처 깊은 농촌으로 팔려가 강제결혼을 당했고, 남편이라고 해야 되나? 뭐, 그 사람은 조선족이었는데 착하고 성실했으면 운명이려니 하고 그냥 살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남자는 정말 개새끼였어요. 약담배(아편)에 빠져 도무지 일을 안하니까, 농사라곤 지어본 적이 없는 내가 간신히 일을 했는데, 일이 뭐 잘되나요? 남의 집에 품이라도 팔러 가면, 혹시라도 바람 쐴까봐4 졸졸 따라다니며 감시를 하는데, 그거 아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어요. 한번은 품 팔러 갔다가 그 집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약담배에 취한 남편이란 작자가 죽이겠다고 도끼를 들고 달려와 그 집을 마구 때려부수며 난동을 부리는데 난리가 아니었어요. 일하던 사람들이 합세해서 남편을 두들겨패고는 공안에 신고해버렸어요. 어찌하나요? 공안이 나타나면 코뀀을 당해 잡혀가야 하는데? 그길로 그 마을을 떠났어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이었어요. 그게 벌써 삼년 전 얘기네요. 목단강 시내로 나왔더니 주머니에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한국에서 온 선교사들인가 무슨 북한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사람인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들 시키는 대로 서울에 가서 김정일 장군님 욕을 하고 내 고향 욕을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면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진짜로 나는 고향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왜 내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하나요? 근데 지난번에 한국에 들어간 동무들과 전화를 했는데 장군님과 공화국 욕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들어가도 되겠구나 생각하고……”
충심의 한마디 한마디에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무척 놀란 눈치였다. 중국에서 떠돌게 된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마음이 더 아파왔다.
“그거야 참, 구구절절 기구하네. 그때 그 사람들 따라서 한국으로 들어갔어야 하는데, 그랬으면 고생이라도 덜 하지. 그리고 말이야. 야, 그게 무슨 배신이냐? 몇마디만 하고 들어가면 되는 것을? 하하하, 너 참 특이하다.”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충심은 이유도 모른 채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런데 말이야, 정 그렇게 배신하기 싫으면 도로 북한으로 들어가지 그랬어?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어?”
충심은 말이 막혔다. 서탑에서 몸을 팔고 있는 은주나 청도에서 노래방에 나가고 있는 언니는 목단강에서 잡혀 단동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갔었다. 조선으로 돌아가 두달 정도 교양을 받고 본래의 직장으로 재배치되었는데, 직장 사람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배신자 취급을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고난의 행군을 함께하지 않고 조국을 배신했다는 따가운 눈초리와 따돌림 때문에 인간의 위신을 지킬 수가 없어 다시 강을 건너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국에 데려다주세요.”
이 말을 하는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만 울고 싶어졌다. 차라리 죽는다 하더라도 몽골을 통해서 기어이 한국에 가겠다는 연분 이모와 청도에서 노래방에 나가는 또다른 조선 언니의 얼굴이 겹쳐져 떠올랐다가 스러졌다. 한국에 가게 되면 부모님의 얼굴을 영영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콱 막혀왔다. 가능하다면 도문으로 가서 인편으로 편지라도 한통 보내고 싶었다.
“한달만 나랑 살면, 반드시 데려다줄게.”
그가 자신있게 말했다.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가 그토록 치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처지를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인간들이 어찌 이리도 많은지……
“싫어요.”
단호하게 도리질을 치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울지 마, 니가 울면 내가 아주 나쁜 놈이 되잖냐? 미안하다.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방법을 찾아볼게. 그리고 말이야, 내가 비록 나쁜 놈이지만 아주 나쁜 놈은 아니거든.”
맨 마지막 말이 충심의 마음을 슬쩍 건드렸다. 스스로를 나쁜 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나쁜 놈이 아니라고, 양심적이라고 주장했던 많은 사람들이 충심의 등에 가차없이 비수를 꽂곤 했었다.
“이런 말 하면 내가 도둑놈인데,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만, 솔직히 너를 좋아한다. 또 혼자 사니까 적적하고 외롭기도 하고.”
외롭다는 말의 의미를 충심은 절절히 동감하고 있었다. 그를 비록 사랑하진 않았지만 딱 삼십일만 함께 살기로 했다. 한국에 들어가면 서로의 일을 깨끗하게 잊기로 약속까지 해두었다. 그래서 이름도 성도 알 필요가 없었다.
전화를 해볼까?
충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먼저 전화를 했는데 귀찮아한다면 그것만큼 속상한 일도 없을 터였다. 어쩌면 심양에 없을 수도 있었다. 여태까지 온다는 날에 오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아니야. 이 무슨 방정맞은 생각이람. 나쁜 생각을 머리에서 얼른 지웠다.
배가 고팠다. 혼자 무언가를 먹고 있으면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싫었다. 그가 없는 아파트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것도 참 못할 짓이었다. 충심은 연분 이모가 묵고 있는 공동숙소로 가서 아침을 얻어먹을까 하다가 참았다. 그들은 벌써 새벽인력시장에 나갔을 시간이었다. 오늘은 아파트에서 지내기로 했다. 어쩌면 그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화동의 기세가 한풀 꺾인 다음 내일이나 모레쯤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 뒤에 공동숙소에서 머물며 새로운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김화동 때문에 서탑에서 안마 일을 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서탑을 떠날 수는 없었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가 심양에 왔는데 충심이 서탑에 없다면, 지난 시간들이 모두 헛되이 소멸되고 말 터였다.
충심은 하루종일 텔레비전을 보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오후 늦게 설매에게 전화를 걸어 호룡의 안부를 물었다. 호룡은 어젯밤 공안에게 잡혀갔다고 했다. 진심으로 호룡한테 미안했다. 점심 무렵에 김화동이 와서 난리를 치고 갔다며 한성안마 쪽으로는 발길도 돌리지 말라고 설매가 신신당부했다. 밤이 되자 속이 쓰리고 아렸다. 온종일 물만 먹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하는 수 없이 충심은 아파트를 나왔다.
충심은 공동숙소로 가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택해 걸었다. 늘 다니던 길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김화동이 숨어 있을까봐 두려웠다. 연변가로 나오자 옆을 지나가는 공안차만 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슴을 졸이며 공동숙소에 도착한 충심은 연분 이모가 자는 방으로 들어갔다. 연분 이모는 충심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충심은 주인여자에게 1위안을 내고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밥을 먹자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연분 이모가 어제의 일을 두고 혀를 차며 걱정하는 말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충심은 연분 이모 곁에 픽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눈을 떠보니 연분 이모의 다리가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다리를 내려놓고 몸을 돌리려는데 아홉 명의 여자들이 칼잠을 자는 좁은 방이라 몸을 뒤척이기도 쉽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뒤집어 옆으로 누웠는데 연분 이모가 다리를 다시 척 걸쳤다. 충심은 조심스레 연분 이모의 다리를 밀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옆에서 자는 여자가 이를 갈기 시작했는데, 빠드득 빠드득 마치 식칼로 뼈를 갉아내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끊임없이 신경을 건드렸다. 충심은 누워 있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아 새벽을 기다렸다.
새벽인력시장에 나가기 위해 충심은 ‘설거지, 청소’라고 적은 팻말을 목에 걸고 숙소에서 나왔다. 연분 이모는 ‘요리’ 팻말을 목에 걸었다. 숙소 옆의, 파란 바탕에 ‘화평구서탑지역소수민족외래인원(재취직)복무중심’이라고 붉은 글씨로 큼직하게 적힌 간판 아래가 바로 새벽인력시장이었다. 주로 ‘청소’ ‘요리’ ‘안마’라고 적힌 팻말을 목에 건 백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팔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거렸다. 영하 이십도의 맵짠 바람이 코를 빨갛게 얼렸다. 눈이 그치니 포근했던 날씨가 사납게 변해 있었다. 골목을 돌아나온 칼바람이 옷자락을 헤쳤다. 입마개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충심은 옷깃을 여몄다. 바람은 거리의 쓰레기를 흩날리며 방향 없이 떠돌다가 충심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어왔다.
무릎이 얼얼하게 아파올 쯤이 되자 동묘향산 식당 앞에 택시 하나가 멈추더니 털옷으로 몸을 감싼 여자가 내렸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충심은 파랗게 질렸다. 김화동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최옥화였다. 비싼 털옷으로 몸을 감싸고 진하게 화장한 최옥화는 곧장 팻말을 매달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달아나야 하는데 마음뿐이었고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느낌이었다. 최옥화는 ‘안마’ 팻말을 걸고 있는 여자들에게 가서 모자와 입마개를 벗어보라고 말했다. 충심은 눈사람처럼 서서 최옥화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최옥화가 안마원을 구하기 위해 얼굴을 보는 사이 눈치를 챈 연분 이모가 입마개를 벗어 충심의 입에 씌워주었다. 최옥화는 거만한 태도로 천천히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마침내 충심 앞에서 최옥화는 발길을 멈췄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연분 이모가 은근슬쩍 최옥화와 충심 사이로 끼여들었다. 최옥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섰다.
최옥화가 안마 팻말을 걸고 있는 젊은 아가씨를 택시에 태우고 떠났다. 오래지 않아 충심은 서탑 명동칼국수집에서 설거지할 사람을 구하러 나온 주방 여자의 선택을 받았다. 충심이 뽑히자 연분 이모는 부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충심이 명동칼국수집으로 가는 것을 신호로 인력시장에 모인 사람들이 바람 속의 쓰레기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연분 이모도 힘없이 돌아섰다. 연분 이모는 늙은 할아버지의 병든 얼굴처럼 오래되고 낡아서 겉보기에도 지독한 악취가 풍길 것 같은 아파트 삼층의 공동숙소를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한달에 사백 위안을 받기로 하고 충심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설거지는 점심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래도 주방 구석에서 하는 일이라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 좋았다. 설거지를 하면서 그 남자를 생각했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이나 모레쯤 반드시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때도 손님이 많아 하염없이 설거지를 해야만 했다. 밤 아홉시가 넘자 겨우 한숨 돌릴 틈이 났다. 주방 뒷문으로 나와 기지개를 켜며 아픈 허리를 달래는데 전화가 왔다. 얼른 봤더니 연분 이모였다.
“나야, 이모.”
‘충심아, 어드메 있니?’
연분 이모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명동칼국수. 무스그 일임메?”
자신도 모르게 사투리가 섞여나왔다.
‘충심아, 잘 들어. 아까 저녁 무렵에 숙소로 김화동이 공안을 데리고 들이닥쳤단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얼굴에도 반창고를 붙였더라마. 너를 찾느라고 방마다 샅샅이 뒤짐을 하더만, 니가 없으니까 호구조사를 하지 않겠니. 나야 다행히 가짜 호구라도 있었지만, 목단강에서 왔다는, 거 왜 순희라는 여자 말이야. 이를 심하게 가는 여자. 그 여자 사실은 조선사람이더라. 우리도 몰랐잲니, 재수없게 딱 걸려서 공안이 끌고 가버렸다. 너도 숙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 알았지?’
후유,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화는 면했지만 김화동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참으로 막막했다.
“이모는 어드메 있음둥?”
‘나는 주씨안마 로반한테 말해서 거기에 있어. 갠찮아.’
다행이었다. 연분 이모는 김화동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충심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하늘을 보았다. 튀밥처럼 굵은 눈이 천천히 휘날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탑지역은 위험했다.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더는 달아날 재간이 없었다. 충심은 주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찾아 입고 거리로 나와 택시를 탔다.
눈송이들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고 거리는 고요했다. 몇대의 택시만이 눈 내리는 심양의 밤거리를 천천히 미끄러지듯 다니고 있었다. 충심은 택시 뒷좌석에 앉아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덮는 눈송이를 막막하게 바라보았다. 새로운 한 해를 축하하는 화려한 네온싸인이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서도 빛을 뿜어냈다. 목이 말랐고 입이 타들어갔다. 한떼의 젊은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혹은 눈싸움을 하면서 걸어갔다. 그들은 밤하늘 어딘가에서 쏟아지고 있는 눈을 향해 두 팔을 쭉 뻗고 손바닥을 내밀며 춤을 추었다.
눈 내리는 밤, 충심은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문득 다시는 그 남자와 만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아 전화가 오거나 만나게 되면 약속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길을 찾고 싶었다. 그 순간 끼이익, 택시가 미끄러지더니 빙글 돌며 가로수에 부딪쳤다. 속도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운전사나 충심이 다치진 않았지만 택시는 많이 망가지고 말았다. 충심은 택시에서 내려 심양역을 향해 걸었다. 쏟아지는 눈이 충심의 발자국을 재빠르게 지워버렸다. 눈발에 가려 가물가물 흐릿해진 역을 향해 느리게 걸어가는 충심의 머리와 어깨 위로 큼직한 눈송이가 소리없이 쌓였다.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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