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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울산 출생. 2003년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 2005년 『카스테라』로 신동엽창작상 수상. kazuyajun@hanmail.net

 

 

 

장편연재4(마지막회)

핑 퐁

 

 

수고하셨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그보다는 보르네오 돼지에 관한 이야기, 내지는 칠리쏘스를 얹은 〈아프리카〉의 오므라이스에 대해 우리는 얘기했다. 식사 메뉴를 개시한 건 잘한 일이라고 봐, 탁구를 치다보면 때로 배가 고팠거든. 무와 마늘즙을 끼얹은 세 조각의 브로콜리가, 늘 오므라이스의 찬으로 곁들여지곤 했다. 한번은 네 조각이었어. 찬에 대해서도 우리는 얘기했다. 세 조각이나 네 조각의 브로콜리처럼, 토막토막 그런 류의 기억들이 잔잔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방송을 본 것은 지난 주말이었다. 신인 여자 탤런트 柳가 보르네오의 돼지에게 질문을 속삭였다. 뭐라고 했나요? 가르쳐줄 수 없어요. 쉿, 절대 비밀. 카메라를 향해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이곳 원주민들은요, 예로부터 신에게 전달할 중요한 물음을 돼지에게 전했다고 해요. 그러면 신은 돼지의 간에 그 답변을 남겨둔다는군요. 그래서 제가, 지금 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두근두근 결과가 궁금하시죠? 자 따라오시죠. 그리고 원주민들의 제례와 의식이 소개되었다. 돼지의 간을 꺼내 본 무당이 신의 답변을 읽어주었다. 뭐라고 한 거죠? 그것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번창할 것이다. 그럼 돼지를 잡은 거군요? 남자 앵커가 물었다. 네,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럴 줄 몰랐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정말 예쁜 돼지였는데… 스튜디오의 柳는 이내 울상이 되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柳를, 함께 출연한 金이 다독여주었다. 진정하시고요, 그런데 어떤 질문을 했던 거죠? 시청자 여러분도 궁금해하실 텐데. 네, 우리 프로의 시청률이 올라갈까요?라고 물었어요. 감정을 추스른 柳가 큰 눈을 더 크게 껌벅이며 얘기했다. 오, 와, 하고 출연자들이 박수를 쳤다. 감사합니다, 이상 보르네오의 오지에서… 수고하셨습니다.

 

柳는 살이 많이 쪘더라. 모아이가 말했다. 그런가? 내가 물었다. 확실히,라고 모아이가 대답한 후 우리는 말이 없었다. 백색의 그 세계는 고요하고 편안했다. 고요하고 편안한 공간에 드러누워, 우리는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아이가 입을 열었다. 알 게 뭐야,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대신 예쁜 돼지는 아니었다고 봐,라고 입을 열었다. 불쌍해 그 돼지… 모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은 눈이 부시도록 환하고 환했다.

 

달보다도, 거대한 크기였다. 그것은 수직으로 하강해왔고, 천천히 스며들듯 지면과 맞닥뜨렸다. 그때까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우리는 머리 위의 탁구공이 점점 커지는 그 광경을- 이윽고 하늘을 덮을 만큼 거대한 구체의 접근을 오래도록 관찰할 수 있었다. 와아, 주상복합단지 전체가 그런 탄성으로 술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명과 같은 것을, 그리고 싸이렌을 우리는 들었다. 도시가, 익히 우리가 살아온 그 세계가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탁구계(卓球界)는 그렇게, 이 세계와 폐합(廢合)되었다.

 

부욱

 

그것이 지면과 맞닥뜨리는 순간, 그런 소리를 들었다. 부욱- 지면보다 먼저, 우리의 두피가, 두개골이, 쇄골이, 따라서 전신이 그 소리와 함께 탁구계에 스며들었다. 눈을 감았으나 눈꺼풀 너머가 환하게 보일 만큼 눈부신 세계였다. 부우욱. 그리고 깊게, 공이 스미는 소음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귀가 퇴화를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고요였다. 라켓을 움켜쥔 채, 더듬 왼손을 뻗어 나는 모아이의 손을 잡았다. 확인할 수 있는 건 라켓과 모아이뿐이었다. 라켓과 모아이는 아주아주 따뜻한 것이었다.

 

눈을 뜬 것은 귀가 퇴화라도 했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니 꽉찬, 어마하게 부신 순백의 공간을 보았고, 그래서 그곳은 작은 우주 하나를 반전(反轉)시킨 느낌이었다. 그 우주의 복판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외롭지 않은 것은 소파와, 탁구대와, 캐비닛이 여전히 같은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그것들을 어루만졌다. 아주아주 따뜻했다.

 

그 외에는 미생물조차 존재하지 않을 듯한 무(無) 자체였다. 그 흰색이 나는 두렵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세끄라탱은 어떻게 된 거지? 글쎄, 하고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곁에 있다면 역시나 따뜻할 세끄라탱이 없어 실망했지만, 곧 마음이 편안해졌다. 순백의 그 공간엔 인간의 감정을 무마시키는 어떤 장치가 있는 듯했다. 몸과 마음이 무덤덤하고, 무위(無爲)로웠다. 보르네오의 돼지 말이야, 그래서 모아이가 돼지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도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송 나도 봤어. 웃겼지? 웃겼어.

 

굿모닝.

 

세끄라탱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돼지와 오므라이스와, 그밖의 토막토막 브로콜리 조각과도 같은 얘기들을 한참이나 나누고 난 후였다.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려보니 벌판의 끝, 정도의 먼 거리에 거대한 생물이 서있었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상한 생김새였고, 그 크기가 주상복합단지 전체와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아마도 머리,와 같은 부분이 우릴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우리도 그 머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성큼성큼, 여러 개의 다리를 움직여 그것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라켓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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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그것은 다가올수록 점점 크기가 줄어들었다. 작은 야산 정도의 크기로, 다시 작은 건물만하게, 다 자란 플라타너스 정도의 크기가 되더니 이윽고 곁에 다다른 순간 우리와 비슷한 키가 되었다. 아, 하고 모아이가 한숨을 쉬었다. 아, 하고 그것 역시 한숨 같은 것을 내뱉었다. 먼 거리를 걸었는지 여러 개의 다리가 잠시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다.

 

나야, 세끄라탱.

 

그것이 나야, 세끄라탱이라고 말했으므로 우리도 잠시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라켓을 꼭 쥔 채 내가 물었다. 놀라지 않아도 돼. 원래의… 내 모습 같은 거니까. 탁구인(卓球人)이란 대략 이런 것이야. 다시 멀리서 세끄라탱과 같은 생물들이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 역시 거대했다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작아져 보르네오의 돼지만한 크기가 되었다. 두 마리는 세끄라탱과 같은 모습이었고, 하나는 몸체가 같을 뿐 유독 인간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백색의 세계에서 더 돋보이는 분홍의 뺨, 전교학생회장이었다. 안녕? 아, 안녕. 우리의 인사에 그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다. 분홍의 국수 같은 것이 부푼 뺨 속에서 몇번을 꿈틀거렸다. 아, 마음에 안 들어. 뭐야… 뭐냐구. 그는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구요, 아빠. 네?

 

그저

 

핑퐁이 시작되었을 뿐이야. 무덤덤하고, 무감(無感)한 머리를 기울이며 세끄라탱이 얘기했다. 핑퐁은, 하고 세끄라탱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로서도 설명이 곤란하구나. 하나하나 차근차근 궁금한 걸 물어주면 좋겠어. 너무 오랜만의 핑퐁이라 간섭자인 나 역시도 망각한 게 많으니까. 일단 앉자꾸나. 소파엔 못과 모아이가 앉도록 해. 어쨌거나 할 일이 많은 건 너희들이니까. 할 일이 많다는 말이 못내 마음에 거슬렸지만, 우리는 일단 소파에 몸을 묻었다. 눈높이에 걸쳐진 탁구대의 수평선이, 그래서 두 눈 가득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 소파에 몸을 묻었을 때처럼, 탁구대는 세계의 집약(集約) 같은 느낌으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핑. 퐁. 핑. 퐁. 핑. 퐁. 핑. 퐁. 이상하리만치 상쾌했던 그 소리가 귓속에서 빠르게 공전(公轉)하는 느낌이었다. 자꾸만 나는 그 공을 주워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거대하고 희고, 눈부신 이 공 속에서.

 

이것은 하나의 프로그램이란다. 세끄라탱이 입을 열었다. 프로그램이라뇨? 말하자면 생태계의 폼(form)에 관한 관리라고 할 수 있지. 지금의 폼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언인스톨할 것인가 그걸 결정짓는 거란다. 결정이라니, 어떻게요? 물론 탁구를 통해서지. 좋든 싫든 이제 너희 둘은 인류의 대표와 시합을 벌여야 해. 인류의 대표라… 그럼 인류와 관련된 건가요? 바로 인류, 때문이지. 인류라는 인스톨을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 결정은 승자의 몫이란다. 왜, 그래야만 하죠?

 

그럴 만하니까

 

그런 거란다. 이 공은 어디서 온 건가요? 어디선가,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구나. 우주는 너무나 광대하니까. 말하자면 어디엔가 있는- 연결된- 생명이 온 곳이란다. 공은 지구의 요청에 의해 온 것일 수도, 그곳의 뜻에 의해 온 것일 수도 있단다. 즉 리시브일 수도, 써브일 수도 있다는 뜻이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숱하게, 숱하게 있는 일이란다. 기록을 보고 싶니? 덜컹덜컹 그리고 캐비닛을 연 세끄라탱이 백색의 커다란 모니터를 꺼내 탁구대에 올려놓았다. 지구의, 가장 가까운 핑퐁의 기록이란다. 우리는 곧 처절한 한 편의 탁구시합을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공룡(恐龍)들의 탁구시합이었다.

 

승자는 두 마리의 이구아노돈이었단다. 두 친구의 이름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무튼 이들이 언인스톨을 선택했고, 한번의 공백기를 거친 다음 지금의 인류가 인스톨된 것이란다. 빙하기… 때문이 아니었나요? 생명이란 건 말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의지하는 거란다. 나는 잠자코 모니터 속의 이구아노돈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몇배 크고 강한 상대들과 싸워 승리한- 쓰러질 듯 거친 숨을 몰아쉬는 복잡한 표정의 생명을 보았다. 묘하게도 라켓을 쥔 이구아노돈의 앞발은 발톱이 거의 빠져 있었다. 힘들었구나. 물끄러미 무릎에 얹은 두 손의 끝을, 나는 말없이 내려보았다. 그럴 만하니까

 

그랬던 거야.

 

나는 물었다. 세상은 어떻게 된 건가요. 내가 있던, 그곳. 근본적으로 아직은 어떤 변화도 없단다. 탁구계는 지구와 충돌한 게 아니라 착상(着床)된 것이니까. 다만 공포를 느끼고 있겠지. 지금쯤 외벽을 탐사하느라 다들 분주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소용은 없겠지만… 보고 싶니? 보고 싶어요. 세끄라탱이 다시 모니터를 작동시켰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이 모니터 가득 포착되었다. 동북아 어귀에 탁구공이 박힌 채로 지구는 여전히 공전하고 있었다. 궤도를 이탈한 건 아닌가요? 모아이가 물었다. 걱정 마렴. 탁구계는… 아주, 아주아주 가벼운 것이란다. 세끄라탱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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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우리죠? 모아이가 물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거란다. 우연이 아닐까? 벌판에서 너희가 탁구대를 발견한 것도, 너희가 탁구를 배우게 된 것도… 두 마리의 이구아노돈이 탁구를 배운 것도… 그런 건 내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서. 나의 역할은 작동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룰에 따른 판정을 하고… 또 언인스톨이 일어난다면 새로운 생태계를 시작하는… 이를테면 그런 거란다. 그럼 결과에 따라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는 거군요. 승자의 의지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 인류가 유지된다면 모든 건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고. 그럼 탁구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탁구공이란 건 말이다, 대답 대신 한숨을 쉬며 세끄라탱은 탁구공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잘 보렴. 촉수 끝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탁구공은 푸른 연기를 내며 이내 연소되기 시작했고 그 자리엔 어떤 물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거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모아이가 물었다. 탁구를 쳐야지. 고개를 숙이며 세끄라탱이 말했다.

 

몇가지 변화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우선 원근감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 즉 멀어질수록 공이 커 보일 거란 얘기야. 물론 짧은 거리에선 큰 변화가 없겠지만 아무튼 그 점을 명심하기 바래. 또 눈으로 공을 캐치하기가 무척 곤란할 거야. 탁구계 전체가 탁구공의 보호색인 셈이니까. 이곳에서의 탁구는 그래서 좀더 너희들의 느낌을 필요로 할 거야. 그 외엔 너희가 배운 그대로야.

 

코끼리 정도로 커 보이는 거리에서 세끄라탱의 쌍둥이들은 느릿느릿 장난을 치고 있었다. 턱을 괸 채 모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고, 부스럭 캐비닛을 뒤져 세끄라탱은 키보드나 휠마우스 따위를 꺼내고 있었다. 라켓을 쥔 채, 나는 탁구계의 이곳저곳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어딜 가도 결국은 백색의 세계일 뿐이지만, 원근의 변화 때문에 모두가 낯설게 느껴졌다. 때문에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이라고 해도 역시나 눈부신 백색이지만- 어쨌거나 그편이 나는 좋았다. 느릿느릿 나는 주변을 배회했다.

 

툭, 하고 몸이 부딪힌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전교학생회장이었다. 아, 하고 사과 같은 걸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핸드폰의 키를 누르고 있었다. 잘, 눌러질 리가 없었다. 촉수의 조절이 힘든지 그는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안간힘 끝에 그가 누른 번호는 112였다. 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촉수라도 움직이듯 땀을 흘린 후에야, 나는 겨우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수고하는구나.

 

 

 

땡큐 땡큐

 

소파로 돌아온 나는 얼굴을 파묻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해두라고 세끄라탱이 말했지만, 휴식 따위를 취할 마음이 아니었다. 잘… 모르겠어, 두려워. 말없이 모아이가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갇힌 잔광(殘光)이 별무리를 이루며 동공의 주위를 잔잔히 맴돌았다. 마흔 한명과, 육백삼십육명과, 천구백십명과, 오만구천이백사명과, 육십억의 얼굴 같은 것이 그래서 떠올랐다. 걱정 마, 우리가 이길 일은 없을 테니까. 모아이의 음성이 이마 속으로 스며들었다. 천천히, 말하자면 어떤 액체처럼- 이마 복판의 못구멍을 통해 흘러드는 느낌이었다. 그럴까? 그럼, 인류의 대표들과 벌이는 시합이야. 아마도 왕 리친(Wang Liqin), 티모 볼(Timo Boll) 정도의 선수들이 아닐까? 우리 정도의 실력으로… 가능하기나 하겠어? 그렇겠지? 아마도.

 

이봐 모아이… 부탁이 있어. 뭔데? 어떤 얘기라도 좋아, 얘기를 들려줘. 글쎄… 존 메이슨의 소설 같은 거라도 괜찮을까? 좋아, 다 좋아. 존의 처녀작인 〈여기, 저기,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얘기가 나와. 아이작 캔들턴은 정말 평범한 시민이야.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시아계 이민자들처럼 말린 오징어를 먹는다는 정도… 하지만 그것도 태국에서 근무할 때 생긴 사소한 습관에 불과했지. 그는 성실했고,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이었어. 고민도 정말 사소한 것들이었지. 가을의 연봉협상에서 사백불이 삭감된 것, 최근 둘째딸에게 집먼지 알러지가 생겼다는 것, 또 부인 린다가 교회의 주부모임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한번씩 호소한다는 정도, 그 정도였지. 아니, 그리고 또 한가지 최근 들어 자주 자신이 〈깜박〉한다는 것이었어. 나도 그래. 동료인 쌤과 쿨가이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어. 쉰을 넘긴 남자란 건 대개 〈깜박〉하거나 전립선이 붓게 마련이니까. 문제의 그날도 그는 사소한 〈깜박〉을 했을 뿐이었어. 말 그대로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었지.

 

우선 아침에 집을 나선 직후였어. 차의 시동을 걸고, 벨트를 매고선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출 때였지. 내가 문을 잠갔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야. 차에서 내린 그는 현관으로 돌아갔지. 문은 잘, 잠겨 있었어. 그는 다시 차로 돌아갔어. 그리고 두 블록 정도를 달렸을 때였지. 잠깐, 아무래도 가스불을 끄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야. 차를 세우고 그는 전화를 걸었어. 그래요, 확인해볼게요. 잠을 깬 린다가 투덜투덜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짜증 섞인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지. 꺼져 있던걸요? 고마워. 그리고 그는 회사에 도착했어. 차의 도어를 잠갔던가 생각이 든 것은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렸을 때였지. 그러나 그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어. 주차장은 비교적 관리가 철저하기도 하고, 문이 열렸다고 자신의 토요따를 훔쳐갈 인간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그는 근무를 시작했어. 잠깐만요 아이작, 미스 헬렌이 찾아온 것은 오전 근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어. 복도에서 이걸 주웠어요. 헬렌이 내민 건 아이작의 아이디카드였지. 고마워… 고마워요.라고는 했지만 아이작은 혼란스러웠어. 이걸 언제 떨어트렸지? 늘 목에 걸고 다니던 카드였으므로 그는 더욱 마음이 복잡했어. 한참 카드를 만지작거린 후에야 그는 복도에서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지. 쿨가이와 마주쳐 2분 정도 대화를 나눌 때였어. 실수로 떨어트린 펜을 줍기 위해- 그러고 보니 몸을 숙였던 적이 있었던 거야. 그는 한숨을 쉬었어. 문제는 쿨가이와 대화를 나눈 사실을 그때까지 〈깜박〉하고 있었다는 거지.

 

그럴 때가 있어. 점심을 먹으며 쿨가이가 얘기했어. 역시나, 나이를 속일 순 없다고 쌤이 거들었지. 벗어진 쌤의 이마를 보며 그래도 아이작은 스스로를 위로했지. 너무 바빠서 그런 거야. 그래그래, 셋은 함께 식당을 나왔어.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였지. 잠깐, 내가 방금 뭘 먹었더라? 갑자기 자신의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어. 쌤이 먹은 건 멕시코식 파스타, 쿨가이는 언제나처럼 구운 감자와 스테이크였지. 그러나 정작 자신의 메뉴는 떠오르지 않았던 거야. 그 사실을, 하지만 그는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았어. 오후에도 여러번 그런 사소한 〈깜박〉이 계속되었지.

 

린다의 전화를 받은 건 퇴근하기 직전이었어. 린다는 쇼핑을 부탁했고, 아이작은 사야 할 물품들을 하나하나 새겨들었어.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중 몇가지가 떠오르지 않는 거야. 전화를 끊은 지 불과 5초도 안된 싯점이었지. 그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어. 그리고 사야 할 물품들을 다시 한번 새겨들었지. 또박또박 그는 메모를 곁들였고, 그것을 접어 자신의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었어. 내일 보자구, 바이.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는 주차장으로 내려갔지. 그때서야 아차 했지만 토요따의 도어는 굳게, 잘 잠겨 있었어. 월마트를 향해 그는 차를 몰았지. 쇼핑을 하고 카트를 몰아 계산대 앞에 섰을 때였어. 혹시 싶어 그는 메모를 확인했지. 우유, 햄, 치즈, 세제, 마카로니, 그린자이언트, 복숭아잼… 방향제와 육류용 칼, 다목적 옷걸이. 그런데 마카로니가 보이지 않았어. 카트를 뒤적였지만 아무래도 보이지 않았지. 젠장, 하고 그는 매장으로 돌아갔어. 이태리계인 린다는 마카로니 선택에 꽤나 까다로운 편이었지. 게다가 그건 따로 떨어진 수입품 코너의 귀퉁이에 진열되어 있었어. 이태리어가 빼곡한 박스를 들고서 그는 카트로 돌아왔지. 그사이 계산대의 줄은 엄청나게 길어져 있었어. 그는 한숨을 쉬었지. 이윽고 그의 차례가 되고 계산을 할 때였어. 구입한 물건을 하나하나 올려놓는데, 웬걸 카트 맨 밑바닥에 마카로니 한 박스가 있었던 거야. 아이작은 다시 기분이 복잡해졌어. 손님? 하는 물음에 그는 정신이 돌아왔지. 잠자코 그는 계산을 해버렸어. 마카로니가 많다고 해서 인생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그날따라 쇼핑백은 유달리 무거운 느낌이었지.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그는 노래를 흥얼거렸어. 카트를 정리해준 안내원에게 평소와 달리 자상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지. 고마워요, 고마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어.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었지. 라디오에선 오래된 음악이, 잘 아는, 오래전 아주아주 좋아했던, 그러나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어. 누구였더라,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는 점점 기분이 우울해졌어. 차를 세우고, 그는 작은 잡화점에 들어가 크래커와 커피, 담배 따위를 사서 돌아왔지. 커피를 곁들여 허겁지겁 크래커를 집어넣은 후,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어. 그때서야 라디오의 자키가 곡명을 읽어주었지. 바로 바로, 플라워스의 〈딸기밭의 싱싱한 소녀들〉이었습니다. 그래, 딸기밭의 싱싱한 소녀들이었지. 그는 길게 연기를 내뿜었어. 이유는 알 수 없고, 그는 쿨가이에게 전화를 걸었어. 식사중이던 쿨가이는 쩝쩝 소리를 내며 아이작의 전화를 받았지. 미안해, 그런데 말이야. 자네 〈딸기밭의 명랑한 잡것들〉이란 노래 기억나나? 뭔 소리야… 우물우물. 이 노래 말이야. 예전에 크게 유행했잖아. 그리고 그는 멜로디를 흥얼거렸어. 뭐야 그건, 하고 쿨가이가 소리쳤지. 그건 〈딸기밭의 싱싱한 소녀들〉이잖아. 그래, 그렇지. 딸기밭의, 싱싱한, 소녀들. 아… 식사중에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고맙다구.

 

우물우물과 함께 내뱉은 쿨가이의 〈고맙기는〉을 들으며 그는 전화를 끊었어. 그리고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지. 아차, 그제야 그는 자신이 17년 전부터 금연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어. 어떻게 된 거지? 담배를 끄지 않고 그는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았어. 너무 바빴던 걸까? 잘, 생각나지 않는 지난 몇주를 떠올리려 애를 썼어. 그리고 역시 너무 바빴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 다시 그는 차를 몰았어. 그래도 나는 전립선이 끄떡없지 않은가, 쌤처럼 머리가 벗어지지도, 쿨가이처럼 난청이 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의외로 위안을 주는 담배연기 속에서 아이작은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그리고 갑자기 와이란 이름이 떠올랐어. 오래전 태국에서 일할 때 사귀던 여자였지. 그리고 줄줄이, 와이와 관련된 일들이 선명하게 떠오른 거야. 이를테면 새 구두를 사줬을 때 우연히 맡게 된 와이의 발냄새 같은 것, 그녀의 남동생 타이가 즐겨 입던 리바이스 같은 것이 한꺼번에 생각난 거지. 겨우 그는 마음이 진정되었어. 피츠타운의 도로를 달리며 그래서 그는 태국을 생각했지. 그리고 다시 배가 고파왔어. 그래, 너무 바빴기 때문이야. 마당에 차를 세우고 그는 현관을 향해 걸어갔지. 늘, 언제나 보던 그대로의 집이었어. 앗차, 그리고 순간 자신이 쇼핑백을 〈깜박〉했다는 걸 알아차렸어. 차로 돌아간 그는 쇼핑백을 들고 다시 현관을 향해 걸어갔지. 그런데 그사이 집의 조명이 전부 꺼져 있는 거야. 캄캄했지.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는 현관 앞에 다다랐어. 아, 그런데 망할- 저 토요따의 문을 또 〈깜빡〉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쇼핑백을 내려놓고 아이작은 다시 차로 돌아갔어. 이번엔 그의 생각이 맞았어. 정말이지 문을 잠그지 않았던 거야. 더듬더듬 키를 꽂고 있자니 하루의 짜증이 다 밀려드는 듯했어. 그래서 더 힘차게 키를 돌려버렸지.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마당 가득 울려퍼졌어. 그제야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는 현관을 향해 돌아섰지. 그런데 없는 거야.

 

뭐가?

 

아무것도. 그 아무것도. 집도, 쇼핑백도, 마당과 토요따도, 세계 그 자체가 사라져버린 거야. 그래서? 그게 소설의 끝이야.

 

이상한 끝이구나. 그럼 그 순간 세계를 <깜빡>해버린 거야? 그럴 수도.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거야. 그 순간 그가 세계를 〈깜빡〉한 게 아니라 세계가 그를 〈깜빡〉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모아이, 그러고 보니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던 듯해. 나 여태 그걸 〈깜빡〉하고 있었어. 잘 들어 못, 여기 온 후로 나는 줄곧 그런 생각을 해왔어. 왜 우리일까? 답 같은 건 찾을 수도 없겠지만, 내 결론은 그거야. 뭐?

 

너와 나는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이야.

 

다른 이유가 있을까? 우리와 맞붙을 인류의 대표란 건, 말하자면 인류가 절대 〈깜박〉하지 않을 성질의 것이겠지. 왕 리친이나, 티모 볼 같은 선수들… 그런 선수들의 이름을 인류가 〈깜박〉할 리 있겠냐고? 즉 핑퐁이란 건, 내 생각에 인류가 깜박해버린 것과 절대 깜박하지 않을 것 간의 전쟁인 셈이야. 생명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를 의지한다는 세끄라탱의 말이 옳다면, 그 의지를 결정할 마지막 기회인 셈이지. 그래서 줄곧 나는 스스로의 의지에 대해 생각해봤어. 인류에 대한 의지, 인류가 <깜박>해버린 것으로서의 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로서의 의지… 그 의지는 무엇일까?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내 말도 그 말이야. 그러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더라구. 어차피 이길 수도 없고… 뭐, 레벨 자체가 말도 안되는 거니까… 왕이나 티모 볼 같은 위대한 선수들이 인류를 멸할 리도 없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이마의 못구멍, 같은 곳으로 순간 페퍼민트 같은 것이 흘러드는 느낌이었다. 가볍고, 좋은 기분이었다. 딸기밭의 싱싱한 소녀들처럼 우리는 탁구계의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설치가 끝났어.

 

한숨을 쉬며 세끄라탱이 다가왔다. 피곤한 듯 몇개의 촉수가 늘어져 있고, 여지없이 땀 같은 걸 얼굴 가득 흘리고 있었다. 설치라뇨? 탁구계의 모니터에 컴퓨터를 연결한 거야. 핑퐁의 프로그램을 너희들도 사용해야 하니까. 우리가요? 그럼, 이것은 너희들의 핑퐁이니까. 아마도 〈랠리〉에 있던 키보드와 마우스인 것 같았다. 본 적은 없지만, 핑퐁이 설치된 본체 역시 마찬가지란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익숙하게 컴퓨터를 부팅했다. 둔탁한 부팅음이 본체의 깊은 곳에서 울려퍼졌다. 이게 뭐야.

 

윈도우 98이잖아요?

 

쓰던 거라서 말이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별다른 어필은 하지 않았다. 〈핑퐁〉이라 씌어진 프로그램을 열면서도 나는 자꾸 집의 책상, 왼쪽 두번째 서랍에 있을 XP 씨디가 생각났다. 우선 너희에겐 인류의 역사를 볼 권리가 있어. 툴은 너희들의 방식이지만 데이터의 전송은 탁구계의 방식이 될 거야. 아마도 한순간에 너희는 인류가 행해온 모든 일들을 보고, 느끼게 될 거야. 듀스 스코어의 역사를- 인류가 창안한 문명과 문화를, 철학과 예술, 과학과 종교를, 지식과 진화를, 또 거의 같은 분량의 전쟁과 학살, 침략과 정복, 지배와 핍박, 편견과 오만, 범죄와 폭력, 무지와 야만을 경험하게 될 거야. 혹시 인류의 설치, 제거를 결정하게 되더라도 그 순간 판단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지.

 

학살(虐殺)이라구요? 그래, 학살. 그럼 인류가 행한 모든 학살의 광경을 보게 된다구요? 판단을 하려면 빛과 그림자를 함께 알아야 하지 않겠니? 그거… 막 죽이는 거잖아요? 찌르고 찢고 찍고 자르고 태우고 뭉개고 터트리고 토막내고 갈고… 그런 거잖아요. 아마도… 하지만 분명히 그런 일을 했으니까, 그래도 인류는 또 그만큼의 빛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잠시 탁구대의 주변을 배회했다. 모아이는 진짜 석상이 된 듯 꼼짝 않고 허공만 보고 있었다. 그거…

 

안하면 안돼요?

 

그런 거… 무섭잖아요. 그건 너희들의 의지야. 싫으면 이 단계를 건너뛰어도 돼. 전 그냥… 음악 같은 거나 한곡 들었음 좋겠어요. 그건 예외지만… 한곡 정도는 들을 기회를 주마. 고민 끝에 나는 검색창에 쿨 앤 더 갱의 쎌러브레이션을 입력했다. 쎌러브레이션을 부를 때의 쿨 앤 더 갱처럼 즐겁게 살 수 있을까? 문득 클럽의 창에 떠 있던 그 문구가 마음을 사로잡아서였다. 핑퐁이 끝나면, 인류는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턱을 괴고 소파에 앉아 나는 쎌러브레이션을 들었다. 정말이지 인류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Everyone around the world

Come on!

 

Yahoo! It’s a celebration

 

전 볼게요. 노래가 끝나자 모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것 역시 너의 의지란다. 모니터를 마주한 모아이는 묵묵히 핑퐁을 진행시켰다. 어떤 장면이 나올지 몰라 나는 얼른 자리를 피해버렸다. 뭐야, 아무것도 안 나오잖아. 전교학생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전달된 거야. 세끄라탱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모아이가 일어서는, 낡은 스프링의 삐걱거림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 말 없이, 모아이는 걷고 있었다. 따라갈까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자리를 지킨 채 서 있었다. 탁구계의 끝까지 걸어갈 생각인지 모아이는 걷고 또 걸었다. 멀어질수록 모아이는 거대해졌고, 결국 우리가 선 위치까지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모아이는 주저앉았다.

 

뭘 본 걸까? 나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몸이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 같았다. 거대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세끄라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주 긴 시간이, 아무 말 없는 강처럼 탁구계의 복판을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이 바다의 어귀에라도 닿았을 즈음, 모아이가 돌아왔다. 슬픈, 강물 같은 표정이었다.

 

울었니?

 

아니.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끄라탱의 안내가 다시 시작되었다. 인류의 대표들과는 달리, 너희에겐 탁구계의 인쎈티브가 주어져. 선택하기에 따라 굉장한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인쎈티브라구요? 물론, 이유는 이 시합이 실은 일방적이기 때문이야. 전력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너희는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너희가 선택한 인물들로 대리전을 치를 수도 있고, 지쳤을 때 서로 교대를 할 수도 있지. 팁(tip)을 가르쳐주자면, 가능한 그들이 먼저 나서게 하는 편이 유리할 거야. 실은 에너지의 형태기 때문에, 탁구계가 부여한 에너지가 떨어지면 소멸하기 때문이지. 건전지 같은 걸 생각하면 아마 이해가 쉬울 거야. 국적 같은 걸 고려할 필요는 없어. 누구라도, 소통엔 문제가 없을 테니까.

 

그럼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거죠? 위대한 인물, 즉 인류의 위인(偉人) 중에서 너희는 한 사람씩을 선택할 수 있어. 다시 모니터 앞에 앉은 우리는 핑퐁에 저장된 위인들의 목록을 열람할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만큼이나 위인의 수는 많았고, 문제는 대다수의 위인을 우리가 전혀 모른다는 데 있었다. 인류도 정말 대단한 거구나… 감탄을 하면서도, 은근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의논이 필요했다.

 

테레사 수녀는 어떨까? 모아이가 말했다. 딱히 부정은 안했지만- 탁구를 치는 테레사 수녀를 떠올리며 우리는 굳게 침묵했다. 에디슨도 아인슈타인도, 그러나 탁구와 연결하는 순간 모든 것이 난감해졌다. 쉽게 이순신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장군이 탁구를 쳐보셨을까?라는 생각에 역시 침묵을 지켜야 했다. 가능한 현대의 인물이 유리하지 않을까? 그래도 가능성이 있잖아. 모아이가 말했다. 자신있는 2차대전사를 중심으로 나는 고민을 시작했다. 처칠과 탁구, 루즈벨트와 탁구… 그러다 결국 간디와 탁구… 석가모니 같은 인물은 어떨까? 말하자면, 신이잖아. 그런데 일어설 수 있을까? 다시 똘스또이와 탁구, 존 레논과 탁구…를 생각하다가 세끄라탱의 자문을 구해버렸다. 혹시 탁구선수 출신의 위인은 없나요? 그건, 내가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야. 아, 하고 다시 고민을 시작하다가

 

왜 위인들은 탁구를 안 친 걸까?

 

화가 나버리고 말았다. 칠 수 없었던 거야. 대답을 한 것은 모아이였다. 인류의 구조는 탁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거든.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위인들의 데이터를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논 끝에 두 사람의 위인을 선택했다. 내가 선택한 위인은 라인홀트 메스너, 모아이는 말콤 X였다. 세계를 등정한 메스너라면 그래도 훌륭한 선택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고, 모아이의 선택에 대해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지? 그냥. 말콤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왠지 로봇 같은 느낌의 그 이름에 나는 신뢰가 갔다. 결정이 끝나자 다시 핑퐁이 진행되었다. 우리는 곧 탁구계의 공간을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말콤 X였다.

 

거대한 위인들은 점점 작아져왔고, 결국 본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이르렀다. 도와줄까? 악수를 건네며 말콤이 물었다. 왠지 가슴이 뭉클했지만, 모아이도 나도 울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같은 대답을 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낮말도 듣지 않는 새, 밤말도 듣지 않는 쥐

 

하는 수 없군. 설명을 듣고 난 두 위인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어필이 있을 법도 했지만, 두 사람은 곧 연습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차분한 눈빛과 골똘한 표정이었지만, 말하자면 기대 이하의 실력이었다. 탁구를 쳐보셨나요? 아니. 메스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콤의 대답은 더 걸작이었다. 지금 치고 있잖아.

 

졌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는 어떤 인물이지? 메스너가 물었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인류의 대표라고 들었어요. 인류의, 대표라. 말콤이 눈을 깜박였다. 묻겠는데, 너희의 의지는 어느 쪽이냐? 그러니까 유지와 제거 둘 중에 말이다. 글쎄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고등학생이냐? 중학생이요. 음… 라켓을 내려놓고 말콤은 잠시 깊은 시름에 빠져들었다. 핑퐁 울리던 공소리가, 그래서 중단되었다.

 

세계도 부조리한 곳이었는데, 탁구계도 부조리한 곳이구나. 왜 중학생이지? 그리고 왜 탁구냐구? 도대체 인간이 왜 탁구를 통해 심판받아야 하는 거지? 이 배후엔 뭐가 있는 거지? 묻겠는데, 인간은 뭐지? 너희들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있냐? 해본 적 있냐구. 그리고 너, 〈진짜〉 흑인을 좋아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진짜〉 백인과 싸울 수 있을까? 너희는 뭐지? 뭐냐구? 저희는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이에요.

 

제 생각으론… 그렇습니다. 말콤의 말을 끊은 것은 모아이였다. 그래서 아마도, 인류의 대표란 세계가 절대 〈깜박〉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추측입니다만, 그렇습니다. 깜박이라… 그거 좋은 말이군. 깜박해버린 건 멸종되기 십상이지. 진짜 흑인도 마찬가지야. 뭐야 여긴, 이 화이트… 그래서 이곳의 화이트가 수상하단 말이야.

 

갈 길이 먼데 시간을 아낍시다.

 

묵직한 메스너의 참견으로 우리는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메스너는 두말할 것도 없었고, 말콤 역시 운동신경이 기막힌 사람이었다. 안정된 폼을 스스로 터득하고, 곧바로 가벼운 스매시를 시도하기도 했다. 잘하시는데요. 이런 건 뭐… 말하자면 쉬운 거 아니냐? 만약 인류를 제거한다면 말이다… 그다음에 대해선 아는 바가 있니? 메스너가 물었다. 새로운 종, 새로운 생태계를 설치한다고 들었어요. 오, 호! 하고 손을 치켜들며 말콤이 소리쳤다.

 

쌤통이다.

 

저기… 연습을 멈추지 말자니까요. 묵묵히 공을 주워오며 메스너가 얘기했다. 핑퐁 핑퐁 꾸준히 이어지는 랠리 속에서, 그리고 메스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저는 인류가 사라져버린 세계에 익숙한 편입니다. 예, 자주 그런 기분이 들었었죠. 아주 먼 어딘 가에, 누가 뭐래도 인류는 존재하고 있겠지. 출근을 하고, 아이들은 학교를 가고… 즉 그런 인류의 일상 말입니다. 하지만 히말라야의 암벽에서, 혹은 눈보라 속에서 그런 건 추측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누구라도, 그걸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결국엔 이 지구가, 실은 인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란 걸 알게 됩니다. 좋든 싫든, 그건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문제예요. 그래서 사실, 저는 인류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은 들지 않습니다. 문제는 왜, 우리가 살아왔으며… 사라진다면 왜, 사라져야 하는 것인가? 핑퐁이 시작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럴 만, 한 것인가?

 

그런 것입니다. 전 사실 사라진- 좀전에 〈깜박〉이라고도 하셨는데- 사라진 생물을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설인(雪人), 혹은 예티라고 알려진 생물이죠. 로체(8,511m)를 등정할 때였는데 한무리, 그래요 한무리의 예티였습니다. 그 순간 그 세계에선 그들이 절대 다수였어요. 물론 머리는- 인류가 어딘가에 있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되새기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추측에 불과한 것입니다. 네, 적어도 그 세계에선 말이죠.

 

그해 시월에 저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에 오르다가 예티를 보았다,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는 10년이 지난 후 밝히겠다. 네, 그때는 그 감정을 어떻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어요. 소수(少數)의 개체로서 예티의 무리와 조우한 기분을 말입니다. 오랜 시간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포기하기로 했어요. 뭐랄까, 그건 결국 인류의 〈유지〉와 관련된 거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이 세계와 그 세계엔, 말하자면 그 정도의 엄격한 구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은 같은 지구인데도 말입니다.

 

약속한 10년이 지난 후, 저는 예티에 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제가 본 것은 〈곰〉이었다고, 말입니다. 곰이라구요? 〈곰〉 말입니다. 곰은 인간계(人間界)의 동물입니다. 인간이 아는 것은, 인간이 확인한 것은- 결국 인간계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래서 인간계는 팽창하고 또 팽창하겠지요. 우주처럼 말입니다. 제 추측은 그렇습니다. 이제 인간계도 하나의 탁구공만한 크기가 된 게 아닌가, 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눈에 보이지 않던 탁구공 하나가 새로이 관측된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주는, 지금

 

그 성질을

 

파악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오래전 티베트에서 만난 현자 한 사람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고, 그땐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말하자면 확실히 이런 느낌의 이야기였죠. 어떤 느낌이요? 바로 이런, 눈부신 세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들, 잘하고 있습니까?

 

그때 세끄라탱이 다가왔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손가락을 세우며 말콤이 대답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긴장의 증거처럼 세끄라탱의 촉수들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동요가 없던 메스너와 말콤도 아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인류의 대표들이 도착했습니다. 이제 곧 시합에 임할 준비를 해주십시오. 탁구계의 저 끝에서 세끄라탱의 두 아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느릿느릿, 쌍둥이의 걸음은 느렸고 등에는 거대한 박스가 하나씩 실려 있었다. 라켓을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드라이브라도 배워둘 걸 그랬어. 모아이의 속삭임이 이마 복판에 균열을 내며 못처럼 박히는 기분이었다. 이럴 줄… 몰랐잖아. 나도 속삭여주었다. 인간의 후회는 왜 늘 이런 식일까.

 

생각보다 아주 작은 박스였다. 다들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말콤과 메스너의 기분은 더욱 그런 것 같았다. 박스에서 나온 것이

 

한 마리의 쥐와

한 마리의 새

 

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하고 세끄라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키너 박스에서 길러진 쥐와 새입니다. 이것 봐… 하고 말콤이 말을 잘랐다. 지금 쥐하고 새하고 탁구를 치라는 건가? 우리더러, 응? 이 말콤에게 말이야. 이들은, 하고 세끄라탱이 다시 말을 이었다. 먹이를 주는 조건반사로 평생을 테스트당하고 길러진 존재들입니다. 삶의 대부분을 먹기 위해 공을 쳤습니다. 그것도 정확히, 원하는 조건을 달성해야만 먹이가 주어져왔습니다. 휴식시간엔 교양과목으로 TV를 시청했습니다. 장담컨대, 힘겨운 승부가 될 것입니다. 저조차도 이들을 탁구로 이기지 못했으니까.

 

뭐야 이게,라고 역정을 내긴 했지만 결국 말콤도 경기에 임할 자세를 갖추었다. 세끄라탱의 조언대로 우선 메스너와 말콤이 나서고 그 뒤를 우리가 잇기로 했다. 세끄라탱이 싸인을 하자 쌍둥이들이 흩어졌다. 미뤄 짐작으로 볼보이의 역할을 맡은 듯했다. 지급된 라켓과 공을 살피고, 오픈 써브나 11점 7쎄트 4선승제와 같은 간단한 룰을 세끄라탱이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곧 시합이 시작되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단 한번의 지체도 없이

 

객관적으로

 

핑퐁은 시작되었다. 모아이와 나는 소파에 앉아 경기를 관전했다. 세끄라탱은 심판과 점수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스코어를 얻은 쪽으로 촉수가 꺾어졌고, 다시 그것이 단계별로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뭉툭한 촉수를 벌벌 떨며, 전교학생회장은 아직도 112를 누르며 소파 뒤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리멸렬하고, 더없이 지루한 랠리였다.

 

경기의 내용은 초보자의 시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쥐와 새가 보내는 써브와 리시브는 그야말로 정직한- 오로지 실점을 하지 않고 보드에 안착하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공의 속도도 말콤과 메스너 쪽이 오히려 빠르다고 할 정도였다. 누구나 쉽게 받아칠 공이 전부였으므로- 우리는 절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녀석들이 어떻게 세끄라탱을 이겼지? 궁금증이 풀린 것은 아마도 두 시간 정도가 지난 무렵이었을 것이다.

 

스코어는 1:0. 두 시간,이라고는 해도 쥐와 새가 겨우 한 점을 리드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어떤 스매시를 해도 마치 기계처럼 리시브를 하는 것이었다. 빠르지도 않은 공이, 그러나 같은 지점에 언제나 어김없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역시 그것은 받아치기 아주 좋은 공이어서 끝없는 랠리가 이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말콤이 실수를 했다. 바닥에 떨어진- 이제 겨우 1:0의 스코어를 낸 그 공이, 그래서 마치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18년을 개근한 괴물처럼 보였다.

 

잠깐, 하고 말콤이 어필을 했다. 어필의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대신 세끄라탱의 대답을 우리는 들을 수 있었다. 로봇이 아닙니다. 뚜껑이 열린 표정으로 말콤이 소리쳤다. 뭔가 규칙에 어긋난 것 아니오? 저들은 절대 룰을 어기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분한 표정의 말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순간 빠득, 하고 쥐와 새가 동시에 모이를 깨물었다. 스코어 획득에 성공하면, 박스의 어떤 장치에 의해 그들 앞에 한 알의 모이가 떨어졌다.

 

오호

 

하고 말콤이 소리쳤다. 이놈들이 아주 교활한 놈들이네. 알겠어, 어떤 놈들인지. 나 이런 놈들과 많이 싸워봤지. 주의를 받긴 했지만, 안경을 벗고 다시 자리에 선 말콤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딴사람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표정은 싸늘하고 냉정했다. 그리고 다시 시합이 속개되었다.

 

1쎄트가 끝난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11:2 쥐와 새의 승리였다. 휴대폰의 날짜가 넘어간 것을 보면서, 나는 그만 침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잠을 향해 번지점프라도 하듯 졸음이 쏟아졌다. 아니, 그런 기분이었다. 탁구계에 와서 배가 고프다거나 잠이 온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으므로, 그것이 육체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아이도 말콤도, 아무도 말이 없었다.

 

8,000미터를 등정한 기분이네.

 

희미한 미소를 띠며 메스너가 입을 열었다. 졸리니? 나는 졸렸지만 졸리지 않다고 대답했다. 말콤과 메스너를 생각하면 도무지 그런 말을 입밖에 꺼낼 수 없었다. 말을 아껴라. 얼음 같은 표정으로 말콤이 속삭였다. 그리고 자, 잘 수 있을 때까지… 너희 차례가 올 때를 대비하란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2쎄트가 시작되어 탁구대 앞으로 나갈 때에도 둘은 최대한 느리게 걸어 자신들의 에너지를 아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시합이 얼마나 격렬한 것인가를 나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힐끗, 말콤이 자라는 고갯짓을 했다. 우리는 자지 않을 수 없었다.

 

잠을 깬 것은 3쎄트가 한창 진행될 무렵이었다. 2쎄트도 쥐와 새의 승리였고, 3쎄트 역시 압도적인 점수차로 쥐와 새가 리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다시 하루가 지나 있었다. 얼마나 많은 랠리를 거쳤는지 말콤과 메스너는 이제 선수가 되어 있었다. 절로 터득한 스핀은 물론, 세계선수권자나 할 수 있는 강스매싱을 연속으로 구사하기도 했다. 공은, 그러나 어김없이- 평범한 속도로 정확하게 넘어왔다. 나는 무서웠다. 18년을 개근한 괴물이, 다시 사회에서 30년을 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3쎄트마저 내주고 나자 거의 자포자기에 이르게 되었다. 말콤과 메스너의 몸에선 금속이 산화할 때의 냄새 같은 것이 강하게 풍겨왔다. 빠득, 다시 모이를 깨무는 소리가 탁구계 전체에 울려퍼졌다. 나는 귀를 막았다. 두려워 말아라. 도리어 메스너의 손이 나의 어깨를 짚어주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다시 탁구대를 향해 걸어가며 말콤이 소리쳤다. 알라의 뜻대로.

 

약간의 변화가 인 것은 그때부터였다. 두 점을 내준 말콤이 갑자기 쥐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너 사실 검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온 거 아냐? 저 비둘기새끼에 비해서 말야. 생각해봐 이 쥐새끼야. 어떤 게 진정 널 위한 삶인지. 쥐는 약간 움찔하더니 실수를 범했다.

 

와아

 

라고 할 만한 실수였다. 그때까지의 근소한 득점은 그나마 운 좋게 에지(공이 탁구대의 모서리를 맞힌 경우)가 생겨 얻은 것이었으므로, 모아이도 나도 두 눈이 확 뜨이는 기분이었다. 세끄라탱의 주의를 받았지만 말콤의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날카로운 음색이었고, 뜨거웠으며, 그러나 서늘한 웅변이었다.

 

너 쥐새끼, 넌 가짜 쥐

새새끼, 너도 가짜 비둘기

너희야말로 전부 검둥이

뭐, 배고프다고? 씨불이지 말고 크게 말해 쥐새꺄

엉아가 밥 한번 줘? 응(그리고 그는 정말로 써브를 뒤로 날려버렸다. 어김없이 박스에서 먹이가 떨어졌다)?

처먹으니 좋으냐? 겨우 그거냐?

 

시합이 중지되었다. 말콤은 퇴장을 당했지만 계속 손가락을 뻗으며 독설을 퍼부었다. 당장이라도 쥐와 새를 향해 달려들 기세였지만, 그런 말콤을 전교학생회장이 있는 힘을 다해 저지했다. 아저씨, 욕하면 나쁜 사람이에요. 규칙을 지키셔야죠. 소파로 끌려오다시피 한 말콤의 몸에서 아까의 냄새가 확 풍겼다. 뜨거운 증기 같은 것이, 그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뿜어져나오는 듯했다. 말콤이 소파에 앉자 메스너가 다가왔다. 매스너의 몸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인 것 같구나. 도움을 못 줘 미안해. 메스너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가로젓기도 전에, 그러나 말콤이 모아이의 손을 움켜쥐었다. 빠르고 침착한 어투였고, 더없이 냉정한 표정이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본 거란다. 그는 속삭였고, 뜨겁게 우리를 포옹하며 또다시 속삭였다.

 

저들은 정말 불쌍한 동물들이다.

 

그것이 끝이었다. 두 사람은 점점 희미해졌고, 연소된 탁구공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모아이와 못! 세끄라탱이 우리를 불렀다. 이제 너희 차례야. 알고 있어요. 고개를 숙여 나는 말없이 라켓을 응시했다. 이 라켓을 만든 이의 의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벌판과, 수북한 각목더미와, 그곳의 생태계와, 더없이 푸르렀던 하늘을- 나는 떠올렸다. 가자. 모아이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탁구대 앞에 섰다.

 

4:1로 뒤진 상태에서 경기가 재개되었다. 말콤의 말이 쥐와 새에게 어떤 충격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는, 그러나 경기에 임한 순간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핑퐁 핑퐁 소름이 끼칠 만큼 단조로운 랠리 속에서, 나는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위인들을 떠올리고 떠올렸다. 내가 만일 테레사 수녀를 선택했다면, 혹은 에디슨이, 헬렌 켈러가, 똘스또이가, 헤밍웨이가, 아인슈타인이, 마호메트가, 예수가 이 자리에 섰다면 그들은 어떤 말을 했을까? 그 말이 저들의 폼을 바꿀 수 있었을까?

 

낮이 가고 밤이 가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것일까? 이미 온몸의 감각은 마비되었고, 오로지 생각만이, 하나의 생각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져선 안된다는 생각을 온몸으로 하고 있었다. 실례지만 이런 의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네트 너머로 공을 넘길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치 기도와 같은 것이었다. 어떤 말도 듣지 않을 쥐와 새를 위해, 내가 전할 수 있는 의견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낮이 가고 밤이 지났을 만큼 랠리가 계속되었다. 점차 몸 자체가 사라지는 기분이었고, 눈앞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빠득, 귀를 울리는 그 소리에 폭설 같은 절망감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는 했다. 푹 푹 끝없이 쌓이는 눈 속으로 나는 점점 두 발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공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고 공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도, 빠득,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애써 신경을 집중했지만 공이 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마치 세계의 마지막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따뜻한 손이, 아주아주 따뜻한 팔이 그때 내 어깨를 휘감았다. 모아이였다. 어떤 얘기도 들리지 않았지만, 시합이 끝났다는 사실을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미안해,라고 나는 속삭였다.

 

 

 

다시 핑, 다시 퐁

 

눈을 떴다.

 

희미하게, 모아이의 큰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언 눈이 녹는 느낌으로 의식이 돌아왔다. 소파였다. 소파의 품속에서 비릿한- 에스키모가 빌려준 부인의 살냄새 같은 것을 나는 맡았다. 그녀의 뱃속에서, 나는 작고 웅크린 태아가 된 기분이었다.

 

괜찮니? 모아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야는 희미했지만, 눈부신 순백의 광원(光源)이 느껴져 탁구계임을 알 수 있었다. 탁구계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나는 몸을 일으켰다.

 

축하해.

 

세끄라탱의 목소리였다. 축하라뇨? 선택권을 얻었으니까. 그런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 말이 지닌 의미를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건가요? 쎄트 스코어는 3:0, 그리고 4쎄트 역시 8:2로 뒤진 시합이었어. 결과는 그래. 언뜻 그 상황에서 모아이가 기권을 표한 게 아닌가 짐작이 들었다. 거기서… 끝이 났나요? 그래, 쥐와 새의 죽음으로… 쥐와 새가 죽었다구요? 죽었어, 그래서 중지된 거지. 왜, 왜 죽은 거죠?

 

과로사(過勞死)였어.

 

아무튼 탁구계는 너희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결정했어. 정확한 규정을 따른 건 아니지만 결국 그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남은 건 결정뿐이야. 앞서 말했듯 인류를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 즉 〈핑퐁〉의 마지막 순서가 남았을 뿐이지. 잠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일어나 희미한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탁구계의 저 끝까지 걷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의논을 해야겠지? 세끄라탱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희미한 시야를 어지럽히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흘렀다. 마흔한명과, 육백삼십육명과, 천구백십명과, 오만구천이백사명과, 육십억의 얼굴 같은 것이 동공을 통해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텅 빈 지구와도 같은 안구(眼球)를 담고 탁구대로 돌아왔다. 울었니? 모아이가 속삭였다. 울지 않았다고,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어떤 의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나는 세끄라탱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거한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우선 인류가 언인스톨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생태계는 다시 무(無)로 돌아갈 거야. 하지만 너희 둘은 여전히 지구에 남게 돼. 성장하고, 마지막 인류로서 수명을 다하는 거지. 兒스는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출산은 불가능하니까. 그럼 도시는요… 문명과… 저 많은 물질들은? 너희가 생존하는 동안은 큰 변화가 없겠지. 그리고 어떻게든 소멸될 거야. 그건 지구가 소화할 문제지. 새로운 생태계를 위해선 어차피 수만년, 혹은 수십만년이 필요한 거니까.

 

그때 가선 쌍둥이들이 새로운 생명의 기원이 될 거야. 저 아이들은 나와 같은- 말하자면 인스톨 프로그램의 집(Zip) 파일과 같은 거니까. 그럼 인간은 오로지 우리 둘만 남는 거군요. 넌 인간이 뭐라고 생각하니? 어떤 의미에선 그렇지만…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어. 너희 각자의 몸속엔 세포 수보다 많은 미생물이 공존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인간이 아닐까? 아님 그들을 <깜박>한 건 아닐까? 하긴, 역시 그래도 너희 둘만 남는다고 대답하는 게 옳겠지? 그럼 제거된 인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디론가

 

이동되겠지. 어떤 정보(情報)의 형태가 되어… 그건 내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 더이상의 대답을 해줄 수가 없구나. 어디론가…라구요? 그래, 어디론가. 물론 육체는 이곳에서 분해될 거야. 어쩔 수 없이, 그 냄새를 너희는 견뎌야겠지. 반대로… 유지한다면요?

 

이대로 계속,

변함없이.

 

그리고 세끄라탱은 입을 다물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모아이와 세끄라탱의 대화가 뭉툭한 몸통을 가진 곤충처럼 등뒤에 따라붙었다.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나는 탁구계의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세계에서의 일상이 떠올랐다. 아니 나는, 세계에서의 일상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어떤 곳이었던가, 그러나 곧- 기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것이 추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랬다. 모든 건 추측이었을 뿐, 나는 인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는데 손끝에 딱딱한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나는 그것을 꺼내들었다. 때묻은 〈가족오락관〉 방청권이었다. 가족오락관… 탁구계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가족오락관의 방청석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수를 치고,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고, 성년이 되고… 어떤 사고나 죽음을 당하지 않는 이상 작고 수수한 하나의 가족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근근이라도 쎌러브레이션한다면, 나도 쎌러브레이션할 수 있다면.

 

저기, 탁구계의 도움으로 바깥의 사람과 통화할 수는 없을까요? 글쎄, 누구든 가능하긴 하겠지. 인류의 데이터는 모두 저장되어 있으니까. 한 통만 쓸게요. 그리고 나는, 세끄라탱의 도움으로 허참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허참입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준 후, 허참씨가 얘기했다. 84년 2월 2일 첫방송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십년 넘게 방송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아마 상상을 못하실 거예요. 우여곡절도 많았구요, 네, 방송에선 밝힐 수 없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이십년이 넘게, 정말이지 스태프 모두가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토요일 저녁 6시구요, 방송을 보는 온 가족이 함께 웃음바다로 갈 수 있도록 언제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 점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치수와 통화를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그와 통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야 못, 너 이 번호 어떻게 알았냐? 안 그래도 궁금했지, 세상이 이 지경인데 넌 어떠냐? 아, 난 지금 운전중인데… 그건 그렇고 뭐 내가 도와줄 일은 없냐? 너한테는 여러모로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말이지. 눈물 같은 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차분히, 나는 치수에게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냐? 무슨 소린지 알 순 없다만… 야 아무튼

 

말로 하자

 

우리,라고 말한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말콤처럼 죽은 사람과도 혹시 통화가 가능할까요? 그건 꽤나 번거로운 일인데… 마리와 통화를 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나야 못. 당연한 일이겠지만, 마리는 나를 기억조차 못하는 듯했다.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이자 아, 하고 뜸을 들이더니 대뜸 그런데?라고 반문했다. 그때 왜… 내가 가방을 전해주러 간 날 말이야… 돌아갈 때 뭐라고 소릴 쳤잖아, 그때 뭐라고 했던 거야? 어, 하고 뜸을 들이더니 글쎄 깜박했는걸… 미안, 하고 전화를 끊었다. 또 통화할 사람이 있니? 세끄라탱이 물었다. 없어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다시 소파로 가 나는 모아이의 곁에 앉았다. 어때, 이제 결정을 하지 않겠니? 세끄라탱이 물었다. 모아이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침묵을 지켰다. 결정이 힘들면 이곳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도 돼. 나이를 먹은 후 결정을 내려도 된다는 거야. 어쩔까? 내가 물었다. 글쎄, 하고 모아이가 대답했다. 고등학생 정도로 부패하면… 지금과 같은 생각은 못할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세끄라탱 앞에 섰다.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던 세끄라탱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보았다.

 

언인스톨?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함께 벌판에서 깨어났다. 여전한, 수북한 각목과 모랫더미, 그리고 저 멀리의 주상복합단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탁구대도 소파도 보이지 않아, 우리는 탁구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없이 고요하고 고요한 세계였다. 잘한 걸까? 벌판의 끝을 바라보면서 내가 물었다. 모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뭘 할 거니?

〈가족오락관〉의 방청권을 찢으며 다시 내가 물었다.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스푼을 구부리며 살아갈 생각이야.

넌? 하고 모아이가 되물었다.

몇번이고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나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학교를 열심히 다녀볼 생각이야.

연락하자.

그래.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벌판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모아이에게 나는 손을 흔들었고, 그 모습이 작아질 때쯤 발길을 돌렸다. 핑, 퐁, 경쾌한 소리가 마음을 울릴 만큼 공기는 상쾌했다. 천천히, 나는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