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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탈근대적’ 사랑의 연대 가능성

크리티카 동인 『크리티카』 1호, 이가서 2005

 

 

송승철 宋承哲

한림대 교수, 영문학 scsong@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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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질이 비슷하고 친한 사이인 무명의 젊은 작가와 비평가 몇사람이 누추한 하숙방에 모인다. 기성문단의 관행을 비판하는 인식을 담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자신들의 글로 이를 입증하려 한다. 그러다 일정한 명성을 얻게 되고 사회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때쯤 되면 독자적 활동의 토대가 놓이고 각자 제 갈 길로 가버린다. ‘동인’하면 흔히 생각하는 공식이다. 그런데 ‘비평의 새로운 공간’을 열겠다며 비평전문지 『크리티카』를 상재한 동인들은 이런 일반공식에 잘 맞지 않는다. 취지문을 보더라도 이슈가 선명하지 않다. 취지문이 문제삼는 것은 현재 문단에서 비평의 위상이 거대매체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비평과 아카데미즘이 갈수록 분리되고 있는 경향이다. 두 지적 다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창립취지로는 근사해 보이지 않는다. 참가한 면면을 보더라도 ‘동인’으로 굳이 호칭할 만한 끈끈한 연대를 연상하기 어렵다.

『크리티카』의 참여자들을 굳이 동인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활동을 하는 동인들이다. 무엇보다, 특정한 이슈를 의식적으로 만들어내고 기성문단의 약점을 과장하면서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기왕의 전투적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를 쓴다면 현존보다 부재가 더 도드라지게 보이고 적절한 용어는 아니지만 근대와 굳이 변별한다는 의미에서 ‘탈근대적’애정에 기초하고 있고, 자신의 고유성을 지니면서 소통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정체성의 정치학보다는 연대의 정치학을 지향한다. 개별적 기획을 중시하면서도 ‘비평계의 공론장’을 추구하겠다는 취지문의 발언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고, 창간호에 흔히 따르는 ‘기획물’이 없는 것도 이런 연고일 것이다.

『크리티카』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탈근대’라는 용어는 편리하다. 기존의 자유주의 미학을 군중의 미학으로 비판하는 조현일, 영웅이란 말에 묻어 있는 폭력적 숭상을 해체하려는 올리버 스톤의 영화를 재평가하는 성은애, 근대미학의 인식론적 사유를 비판하면서 존재미학의 대안에 동의하는 오길영, 민족문학에서 세계문학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청하는 신승엽, 게임의 서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려는 이용욱 등 비평분야의 필자는 물론이고, 데리다와 바흐찐의 이론을 통해 침묵하는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강우성과 변현태 등 ‘탈근대’는 여기에 실린 대다수 글을 관통하는 비평적 기율을 하나로 묶어주는 편익이 있다. 김성호의 경우도 모더니즘을 다루고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과 묶어서 이전의 리얼리즘과 변별하는 입장이고, 근대적 인식론의 한 표본이라고 할 루카치를 다루는 김경식도 토대—상부구조의 관계를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헐렁하게 만들고 싶어한다는 의미에서 탈근대적이다.

하지만 ‘탈근대’라는 용어는 대상을 규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포괄적이다. 그러니 『크리티카』를 읽고 평가하는 방식도 특정한 주제와 이념의 구도 아래 게재된 글을 읽어내려는 것보다는 하나하나 글의 됨됨이를 살리면서 남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만큼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글을 중심으로 소개할 수밖에 없겠다. 권두에 실린 조현일의 글은 최근 논란이 된 작가 배수아를 옹호한다. 필자는 87년체제 이후 한국사회를 동일성의 윤리로 차이를 매몰시키는 자유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비판한다. 자유주의의 이념은 사적 행복의 추구를 위해 최소한의 공적 자유를 자유의 전부로 착각하는 천박한 이념인데, 배수아 문학의 힘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자유를 추구하는 불온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논지가 분명하고, 무엇보다 비판할 때조차 작가와 대화를 추구하는 대화적 스타일이 이 글의 매력인데, 공론장을 지향하는 동인지의 취지와도 걸맞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체제가 이룩한 성과를 너무 쉽게 비판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자유주의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자유주의를 껴안으면서 넘어서기보다 질타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데서 그치고 있어 나로서는 글의 논지에 찬성하기 힘들다는 점도 밝혀야겠다.

김성호의 모더니즘 재평가도 흥미로운 글이다. 우리 문단에서도 최근까지 논쟁이 이어졌지만 정작 모더니즘의 본고장에서도 평가는 아직까지 두 갈래로 나뉜다. 즉, 모더니즘은 루카치의 주장처럼 사물화의 증상으로 폄하되거나, 아니면 사회의 총체적 해체 속에서 새로운 통합의 가능성을 추구한 혁명적 실험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글은 모더니즘을 비판한 루카치의 사물화이론이 정작 사물 자체에 대한 온전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면을 지적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분 자체가 결국은 우리 인간에게 효용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물건의 가치를 따지는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인 데 반해 하이데거 이론은 사물이 그 자체 고유한 존재로 지속하면서 동시에 인간과 관계를 맺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런 인식론적 변별하에서, 필자는 모더니즘의 의도는 인간의 시선에서 독립된 사물 자체의 개체성을 느끼려는 노력이라고 평가한다. 이 글의 미덕은 루카치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하이데거와의 비교를 통해 루카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모더니즘 작가들의 문학적 의도를 살리려 한 점이다. 다만 루카치와 하이데거의 비교를 통한 필자의 의견 개진에 동의하면서도, 모더니즘의 의도가 ‘물체와 인간의 대상화의 덫에서 벗어난 새로운 리얼리즘의 가능성’이었다는 주장은 또다른 검토를 요한다. 이것은 문학 자체의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고, 모더니즘의 의도는 이보다 훨씬 좁은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두 글만 택해서 언급했는데, 임의로 뽑은 것은 아니다. 이 책에 실린 상당수의 글은 두 글이 보여주는 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예컨대 알뛰쎄르의 영향 아래 문학을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일반적인 데 반해, 『크리티카』의 필자들은 전반적으로 창작과 독서를 일회적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즉 문학텍스트를 이미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의 범주 속으로 집어넣으려 하기보다는, 한 필자의 말대로 ‘이질적인 것과의 불편한 동거’를 기껍게 받아들이고, 타자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 독자도 있겠지만, 이 입장이 ‘탈근대적’사랑의 연대 속에서 어떤 식으로 여물어갈지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