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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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黃東奎

1938년 서울 출생.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어떤 개인 날』 『비가』 『삼남에 내리는 눈』 『풍장』 『외계인』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등이 있음.

 

 

 

십이월 산책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서 주워든 

얼어 죽은 참새의 별난 가벼움,

빈 뜰에서 싸락눈 맞고 있던

철없이 핀 장미의 전신 추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자의 살짝 들린 둔부

를 내리누르던 흑바위 같던 얼굴의 어둠,

이들 때문에 하루를 흐리게 한 죄 없느냐 묻는다면,

물으시는 분과 함께 골목길을 오르겠습니다.

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물건만 잔뜩 문밖에 내논 쓸쓸한 가게들을 지나

힘없이 싸우고 있는 두 여자를 지나

줄기는 말랐어도 늙은 호박 하나 늠름히 앉아 있던 

지금은 비어 있는 슬래브 대문지붕을 지나

시든 줄기 두셋 꽂고 잠든 꽃자리들을 지나

쥐똥나무 울타리까지 가겠습니다.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있는 것이 설레게 하는군요. 

쥐똥나무에는 여태 까만 열매를 달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상포진(帶狀疱疹)

 

 

병 이름 제때 모르는 채 아픈 왼팔 접지도 못하고, 

십년 전 가출했다 탕자(蕩子)로 돌아온 오십견이군!

할 수 없이 다시 데리고 살 준비를 하는데,

잠자다 아파 깨어 울음 참고 눈물 쏟는 사이

가구들이 뒤로 물러나고

개나리 지고 벚꽃 지고 

라일락이 가쁜 숨을 내쉴 때

불현듯 대상포진이라는 옛 진법(陣法) 같은 이름이 나타났다. 

병원에 다니며 다시 사흘 잠을 설친다.

아파트 영산홍이 피고

산책길 뙈기밭 가에 꽂혀 녹슬던 가시투성이 막대들이 

연초록 두릅 순을 피우고 있었다.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를 찢으며 피우고 있었다.

아 또 한번의 삶!

 

온몸의 피가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의 틈새를 찾아헤매는 꿈을 꾼 아침,

가구들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방에서 새로 천천히 대면하는 햇빛, 아 새로운 틈새!

몸이 괴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