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역사의 갈림길에 패배주의는 없다
본지는 선거의 해를 맞은 올해초, “이번 대선이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이끄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봄호 「책머리에」)고 약속한 바 있다. 이어서 여름호에서는 우리의 제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평화-개혁-진보세력의 유기적 연대에 기반한 재결집’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제 17대 대통령선거가 코앞에 닥친 시점에서 우리는 이번 대선이 그 어느 선거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재삼 강조하고자 한다.
일부에서는 ‘민주 대 반민주’ 또는 ‘평화 대 전쟁’의 구도는 더이상 성립하지 않으며 대선은 단지 정권연장이냐 정권교체냐의 선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옛날의 대립구도가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해당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심화와 한반도 평화번영의 과제가 산적해 있는 현실에서 민주정부 10년을 ‘잃어버린 세월’로 못박고 심지어 민주화 20년의 성과에도 앙앙불락(怏怏不樂)하는 세력이 정권을 다시 잡는다고 할 때, 우리의 역사가 크게 후퇴하고 ‘한반도 선진사회’로의 이행에 심각한 차질이 일어날 것은 명확하다. 정권탈환에 앞장서겠다는 후보들이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을 지녔고 이미 법적으로 판정된 사실들만 봐도 구시대의 부패 관행에 깊숙이 연루된 상태라면 더욱이나 그렇다.
2007년의 한반도에서는 평화와 공생을 촉진하는 파동이 크게 일고 있다. 영변 핵시설 불능화작업이 착수되는 등 북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이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다. 6자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북미관계 개선이 이뤄질 경우 이는 미국 역사상 외국의 특정 정권과의 가장 긴 대결상태에 평화적 종지부를 찍는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 된다. 나아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본격화됨은 물론 동북아시아에 상생의 틀을 만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희망과 안심의 나라’를 만들겠다며 아시아에 무게를 둔 일본 후꾸다(福田康夫) 내각의 등장이나 제17차 공산당대회에서 부분적 세대교체를 이뤄 동북아의 안정 속에서 ‘화평발전(和平發展)’ 노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 중국 지도부도 이런 흐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정세에 부응해 남북한 정부는 ‘2007 남북정상선언’에 합의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평화와 군사적 신뢰구축에서의 진전을 바탕으로 경제협력을 비롯한 남북관계를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스스로 마련한 셈이다.
이러한 전환기를 맞아 한국에서 수구적 보수세력이 (재)집권한다면 이는 한반도의 진운(進運)을 거스르는 일이 될 것이다. 시장만능주의적 세계화에 순응하여 대결과 경쟁만을 추구하는 보수세력은 한국 내부에서 북돋워야 할 평화와 공생의 기운을 소진시킬 가능성도 크다. 그런데도 선거일을 목전에 둔 지금 보수세력의 승리가 대세인 듯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참여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작용한 탓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진보개혁세력 자신의 패배주의에 기인하는 바 크다. 시대의 큰 흐름 속에 이번 대선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기보다 패배라고 체념한 채 현실성이 결여된 각자의 의제를 현안으로 부각시킨다든가 심지어는 다가올 총선을 계산한 이기적 실리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정작 정국은 그 어느 선거 때보다 요동치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대선판도 자체가 대세론은 없음을 웅변한다. 냉전기와 개발독재시대의 단순논리를 구사하는 정치세력에 앞으로의 5년을 맡기고 진보개혁세력의 체질개선을 도모하자고 자위할 한가로운 때가 결코 아니다. 17대 대선은 단순히 5년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한반도의 장래에 대한 선택임을 직시해야 한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남북 화해와 통합을 이룩해온 우리 국민의 저력을 믿고 패배주의를 청산할 엄중한 순간이다. 한국이 남북 화해를 자주적으로 주도하여 “한반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북아의 국제정치 생태(生態)를 개혁하고 있다”는 이웃나라 언론매체의 평가도 있듯이, 우리는 감동의 시대를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이다.
분열되어 있는 여러 세력이 다시 한번 ‘한반도 선진사회’ 건설을 앞당기는 역사적 과제 수행에 동참해, 루쉰(魯迅)의 말처럼 ‘있는 힘을 다해 고투’(蒟紮)해야 한다. 민주정권이 실패하였으니 정권교체는 당연하다는 식의 패배주의적 마음가짐으로 대선을 치르다가는 대선 이후-승리하든 패배하든-진보개혁세력의 발전적 재편과 갱신을 위한 추동력을 갖기도 어려울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2007년 12월 19일 우리의 결정은 한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 미래사의 방향을 가름하는 종요로운 일이다.
이번호 특집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대선정국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주제이나, 이 역시 우리의 치열한 현실의식의 산물이다. 정치가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관건적 역할을 하듯이 문학 또한 우리 문화의 창조적 활력을 끌어올리는 핵심 영역이니 종합지인 본지가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우리가 지향하는 세계문학은 해외문학·외국문학이나 세계명작도 아니고 세계적 베스트쎌러도 아니며, 다른 지역문학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도 발전시키고 세계문학도 형성하자는, 말하자면 ‘이념으로서의 세계문학’이다. 따라서 세계화에 올바로 대응하는 길을 찾는 우리에게 시의적절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특집은 대담, 평론 및 해외작가의 발언으로 꾸몄다. 총론격인 윤지관과 임홍배의 대담은 지금 왜 우리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를 논의해야 하는지를 다각도로 짚고 있다. 노벨문학상 열망에 깔려 있는 의식구조 분석에서 시작하여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동서양 여러 나라 및 한국의 작품세계를 점검한 뒤, 세계화시대 한국문학의 과제를 제시한다. 우리의 창조적인 작품들을 제대로 해외에 내보내서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바꿔나가는 것이 우선적인 일감으로 떠오른다.
이어서 정홍수는 한국문학사에서 세계문학 도입의 궤적을 훑어보면서 4·19 이후, 특히 민족문학론과 제3세계문학론이 제기된 1970년대를 주체적 수용기로서 주목하고, 세계화가 한창인 오늘날 세계화의 부정적 양상에 저항하는 한국문학의 보편성을 창조적으로 열어갈 길을 탐구한다. 이현우는 우선 세계문학을 세계명작에 한정하여 그 수용사를 추적한 뒤, 우리 시대 외국문학 수용의 핵심과제를 번역과 보편성의 문제로 압축한다. 그런데 이 두 과제는 세계문학에서 하나의 문제가 된다. 민족문학간의 교통공간인 번역공간을 넓혀나감으로써 서로의 경계와 장벽을 뛰어넘는 것이 곧 이념(또는 운동)으로서의 세계문학이기 때문이다. 정여울 역시 한국문학의 번역문제를 중시하면서 한국문학의 ‘분열적이고 다성적이며 축제적인’ 세계화를 위해서는 주요 언어권과 한국인 유명작가 중심의 번역에서 탈피할 것을 요구한다. 이욱연은 한창 세계문학의 총아가 되고 있는 중국 소설가들의 작품세계로 시야를 넓혀 그 비결을 규명한다. 이를테면 위화(余華)의 문학은 중국문학으로서의 개성을 한층 심화하는 고유한 방식으로 세계와 만나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원로 재일소설가 김석범을 비롯한 저명 해외작가 다섯분의 옥고를 실었는데, 모두 세계문학과 소통하는 자국문학의 길을 성찰하는 예지로 빛난다.
논단과 현장 그리고 도전인터뷰는 서로 어우러져 사실상 ‘작은 특집’을 이룬 셈이다. 특별수행원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현장에서 지켜본 김근식의 생생하고 종합적인 보고문도 유익한 읽을거리이지만, 나머지 세편도 대선국면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분석하고 그후를 전망한 공통점을 지닌 알찬 글이다.
먼저 한때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된 박원순의 시민운동 그리고 노무현정권과 대선후보를 포함한 정치권에 대한 날카롭고 상상력 풍부한 논평은 대선 이후 진보개혁세력의 대안적 의제 개발에 의미있는 암시를 제공한다. 상상력 넘치는 대안 제시로는 김석철의 ‘수도권 도시회랑과 남북한 대운하’ 구상이 단연 압권이다. 천년 넘게 한반도의 중심이던 한반도 수도권을 재조직하고 백년 넘게 한반도를 흔들어온 주변 네 나라를 소통케 하려는 그의 도시설계는 남북관계의 가히 혁명적 변화가 예견되는 상황에 걸맞은 혁신적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수행하는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가 여러 영역에서 확산될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대선 쟁점인 경부대운하 구상의 폐해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읽기 방식일 것이다. 최태욱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한국형 조정시장경제체제를 제시하면서, 그것이 구현되려면 비례성과 지역대표성을 함께 보장하는 독일식 연동제와 내각제를 도입해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들 모두 우리 논의를 대선 이후로 이어주는 값진 읽을거리이다.
여기서 길게 소개하지 못해 아쉽지만, 한국문학이 지닌 힘찬 생명력의 산 증거가 될 신경숙 장편소설 첫회분을 비롯한 다섯편의 소설과 시인 열한분의 시가 창작란을 풍요롭게 한다. 수록된 소설작품 가운데 한편과 평론 한편은 올해 창비신인문학상 당선작들인데, 수상자 임세화, 박창범 두 분에게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의 왕성한 활동을 기대한다. 예리한 촌평으로 이번호에 기여해주신 필자분들께도 감사드린다.
한국현대사의 분기점이 될 정해년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독자 여러분의 한결같은 따뜻한 성원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창비’는 불혹의 나이를 넘긴 잡지답게 언제나 시대의 한복판에 서서 미래를 가리키는 믿음직한 나침반이 될 것을 다짐한다.
白永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