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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은봉 李殷鳳
1953년 충남 공주 출생. 1984년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좋은 세상』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등이 있음. silverstick535@hanmail.net
폐타이어
버려진 폐타이어는 검다
검게 저무는 지장보살이다
반쯤 땅속에 묻힌 채
세상의 질병 온몸으로 앓고 있는
지장보살은 둥글다
둥근 마음으로 시방 그는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만든
피고름 삭히고 있다
지장보살이 아프니
땅도 아프다 검게
저무는 것은 다 아프다
아픈 몸으로도 그는
거름 만들고 있다 사루비아 몇송이
빨갛게 꽃피울 꿈 꾸고 있다.
덜컥, 염소 이야기
오랜 시련 끝에 민주화가 이룩되자 염소는 이번 세상도 그런대로 살 만해지리라 덜컥, 믿어버렸다 지금껏 풀이나 종이만 뜯어먹으며 살아온 것이 그였다 이젠 다리를 쭉 뻗고 말년을 보낼 수 있으리라 덜컥, 그는 믿고 만 것이었다 한때는 염소 저도 이번 세상을 덜컥, 털어버리려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군부독재가 끝났으니 염소는 조금만 더 먹이를 찾아 전국을 떠돌다가 덜컥, 유목의 날들을 청산할 생각이었다 파뿌리가 되기 전 고향으로 돌아가 텃밭이나 가꾸며 남은 생을 보내려 덜컥, 작정을 한 것이었다 논과 밭과 집이 아직 고향에 남아 있으니 염소에게는 덜컥, 가능한 꿈이기도 했다
온갖 일에 부딪쳐 상처투성이가 되면서도 꿈이 있어 염소는 이 험난한 세상을 그런대로 잘살 수 있었다 얼마 전 그런데 염소의 꿈은 도시의 시멘트 빌딩 위로 떨어져 덜컥, 깨어지고 말았다 고향 들판 가득 덜컥,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덜컥, 꿈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이때껏 풀과 종이만 먹으며 살아온 염소에게 덜컥, 행정중심복합도시라니! 시멘트 빌딩으로 가득한 도시에서는 풀과 종이가 자라지 않을 것이 뻔했다 너무 어지러워 염소는 덜컥, 제자리만 맴돌 뿐이었다 풀도 종이도 없는 시멘트 빌딩 숲속에서 무엇을 먹고 산다는 말인가
민주화가 이룩되었어도 염소에게는 덜컥, 세상이 살 만해지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되면서 염소는 저 혼자 우울했다 아무도 염소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도 덜컥, 제자리만 맴돌 뿐이었다 돈돈돈, 염소는 이번 세상을 그만 덜컥, 털어버리지 않을까 저 자신이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