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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

 

타자의 인식과 공공성의 성찰

전성태와 공선옥의 소설을 중심으로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1. 이방인의 서사가 갖는 의미

 

여행자의 꿈과 기억을 몽환적으로 서술한 배수아(裵琇亞)의 단편소설 「무종」(『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에는 국적과 성별을 초월한 매력적인 이방인 예술가가 등장한다.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셋방”(167면)을 자신의 주거지로 명명하는 주인공은 어떤 집단과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한다. 소설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방인 예술가 뒤에 숨은 또 한명의 이방인의 존재다. 그는 “그 어느 사건도 시작되기 이전”(160면)의 주인공의 기억 속에 잠시 출현했다가 사라진 외국인 택시운전사다.

작품 낭독회가 열리는 ‘무종의 탑’에 가기 위해 택시에 탑승한 주인공과 모형비행기 수집가에게 제대로 길을 안내하지 못해서 온갖 경멸과 무시를 받은 이 외국인 운전사의 정체는 무엇일까. 거울에 비친 운전사의 모습은 주인공이 예전에 낯선 도시의 동물원에서 만났던 외로운 아프리카인을 연상시킨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웅얼거”리며 “바람이 쉭쉭거리는 듯한 이상한 소리”(151면)만 내어 승객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누구나 안다는 ‘무종의 탑’을 알지 못해 ‘구제불능’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운행을 포기하지 않는 외국인을 향해 주인공은 ‘문학’이란 단어를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경멸을 보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생명이 없는 회색”(152면)으로 변해가는 운전사는 일그러진 위협적인 모습으로 글쓰기의 주체 앞에 현현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소설가가 직면한 불투명한 타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강렬하게 번들거리는 눈빛, 이유 없는 웃음, 무례한 질문은 근사할 수 있는 여행길조차 불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는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정작 선명한 실체로서 작품 속에 포착되기 어려운 낯선 타자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의 서사 저편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외국인 운전사는 최근 한국소설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출현하는 ‘소속 없는’ 존재들의 모습을 현시한다. 이들은 여행자의 고독과 자유의 뒤편에 숨어 있던 진정한 이방인이다. 「무종」에서 외국인으로 설정된 이러한 이방인의 모습은 어떤 공동체나 집단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외의 삶이 실체로서 우리 삶에 개입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포함하여 최근의 한국 소설들은 ‘외국인, 난민, 이주민, 탈북자, 혼혈인’ 등의 구체적 명명을 통해 소속과 신분을 보장받지 못하는 다양한 이방인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고통과 박탈의 경험을 표현하는 이방인의 서사는 월경의 상상력과 더불어 2000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소속 없는’ 이방인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평하게 누려야 할 제도적 권리와 인간적 존중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환기한다. 특히 이들이 제기하는 ‘국가 없음’의 문제는 성, 인종, 계급 등의 다양한 층위에서 논의되어온 타자의 문제를 가장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사유의 장으로 불러들인다. 국가의 바깥에서 국가의 질서가 갖는 억압성을 일깨우는 타자적 상상력은 최근의 한국소설이 고민하는 미학적 실천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문학의 영역에서 거론되는 타자의 상상력이 갖는 새로운 의미가 있다면 차별과 배제의 규칙에 대한 논의들을 공공적인 토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데 있을 것이다. 타자의 삶에 대한 인식은 그것을 공동의 몫으로 사유하는 정치적 장을 필요로 한다. 이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공공성(publicness)을 문학적으로 새롭게 검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1임을 알려주는 공공성의 성찰은 타자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사유하는 긴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공적 영역(public realm)에서 ‘타인의 현존’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근거로 복수성(plurality)을 언급한다. 그의 설명에 기대자면 공적 영역에서 실재성(reality)을 보증하는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공통적 본성’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언제나 ‘같은 대상’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공적 영역은 “수많은 측면과 관점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2에 기초함으로써 실재성을 갖는 것이다.

아렌트가 바라본 공공성은 개별 존재의 차이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사물들이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관찰될 수 있을 때, 그래서 그 사물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극도의 다양성 속에서도 동일한 것을 볼 경우에만 세계의 실재성은 진정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나타날 수 있다”라는 아렌트의 발언은 공공성과 타자의 사유를 연결짓는 중요한 맥락을 암시한다.3

최근의 한국소설에 나타난 이방인에 대한 관심과 월경의 서사는 공공성을 통해 타자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사유하려는 문학적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때 공공성의 사유는 합의나 화해를 전제하지 않으며, 소통이나 연대 역시 존재들의 직접적인 행위나 발화로 전부 설명되지 않는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이방인과 타자에 대한 사유는 존재들이 현상하는 공동의 공간에 드리워진 보편적이고 집합적인 가치관의 기준을 돌아보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지닌다. 그 과정은 자기의 외부에 출현하는 타자를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안에 숨은 타자를 발견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기를 요청한다.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살필 전성태(全成太)와 공선옥(孔善玉)의 근작들은 이러한 타자의 인식을 문학적 성찰의 심화과정으로 포함하는 뚜렷한 성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깊다. 그간 사회현실의 문제에 직핍해 소외된 계층의 삶을 주시해온 두 작가는 월경과 이방인의 서사를 통해 작품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 밖으로 시선을 확장한 전성태의 소설은 몽골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방인과 타자의 문제를 다룬다. 빈궁한 모성의 현실을 바탕으로 주변부의 삶에 대한 애정적인 시선을 드러내온 공선옥의 소설에서도 이방인과 타자의 문제는 핵심적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두 작가의 작품에 드러난 월경 서사와 이방인의 문제를 살펴보는 작업은 최근의 한국소설이 모색하는 공공성의 사유에 대한 탐색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2. 경계의 안과 밖에서 만나는 타자-전성태의 소설

 

사라져가는 농촌공동체와 자연의 삶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낸 『매향』(1999)에서 출발한 전성태의 소설세계는 『국경을 넘는 일』(2005)에서부터 국경과 국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근작 『늑대』(2009)에서 월경의 서사는 몽골의 현재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늑대』가 다루는 이방인의 서사는 국가와 국경이라는 사법적이고 제도적인 공간의 탐색을 포함하여 한국의 자본주의적 일상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다.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한 몽골의 현실과 그곳에서 만나는 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분단체제의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의 현재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늑대』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몽골이라는 공간은 이방인의 서사를 심화하는 실질적 배경이다. 근대의 발전논리에 의해 자연이 훼손되고 공동체가 파괴되는 현실은 표제작 「늑대」에서 잘 나타난다. 오랫동안 몽골의 초원을 지켜오던 목자 출신의 늙은 촌장은 훼손당한 자연과 사멸하는 공동체의 운명을 암시하는 인물이다. 반대로 총을 들고 검은 늑대를 쫓는 써커스 단장 출신의 사냥꾼은 “무시무시한 검은 혓바닥”(38면)을 지닌 자본의 마력에 휩싸인 인물이다. “그늘을 덮고 사는 짐승처럼 매혹적인 검은 털빛”(47면)을 가진 늑대를 잡으려는 사냥꾼의 욕망은 촌장과 라마까지 살생의 논리에 휘말리게 만든다. 쫓고 쫓기는 관계가 숨막히게 펼쳐지는 드넓은 몽골의 초원은 “국경이 사라지고 그저 자본의 의지만으로 굴러”(46면)가는 욕망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늑대」에서 사냥꾼을 휩싼 자연지배의 욕망은 금기를 위반하는 치무게와 허와의 사랑이라는 반전의 서사 앞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늑대의 영혼이 바라보는 인간들의 비극적 운명은 광포한 자본의 욕망에 길들여지지 않는 엄숙한 자연의 질서를 환기한다. 「늑대」는 자본 문명에 의해 추격당하고 훼손당하는 전통적 공동체의 삶을 포착하면서도 그것이 간직한 초월적인 힘에 대한 갈망을 감추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타자적 세계의 인식이 자본주의 논리가 침식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생명의 공간에 대한 그리움과 닿아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매향』에서 현시된 바 있는 전통적 세계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표제작 「늑대」에서 타자의 삶은 근대 자본주의와 맞서는 초원의 세계로 신비스럽게 상징화된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남방식물」 「목란식당」 「코리언 쏠저」 등 다수의 작품에서 투시되는 타자의 삶은 이방인의 삶과 연관되어 비극적인 현실의 일면을 드러낸다. 국경을 오가는 탈북자, 이주민, 혼혈인들은 어느 공동체에도 온전히 소속하지 못하는 경계의 삶을 산다. 어두운 공간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검은 늑대의 영혼과 달리, 이들은 죽음 후에도 타인에게 온전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못하는 역사 뒤의 숨은 이방인들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지적했듯이 국가 밖으로 추방되고 배제된 타자들은 단순히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다. 수용소 난민들을 통해 극단적으로 표현된 ‘벌거벗은’ 타자의 삶은 “적극적으로 특정한 지위가 부여되고 이에 따라 그들의 권리박탈과 추방을 준비시키는”4 국가권력의 씨스템에 의해 규정되고 관리된다. 국적을 갖지 못하고 기약없는 유목의 삶을 사는 이방인의 모습은 「두번째 왈츠」의 북한여성의 생애에서 선명하게 예시된다. 북한의 전쟁고아로 몽골에서 성장하여 북으로 귀환했다가 다시 탄광도시로 송출되고 결국은 몽골에 귀화한 어느 북한여성의 고단한 생애는 ‘벌거벗은 삶’의 전형적인 여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국가권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혹은 추방당하는 억압적 타자의 경험은 목숨을 걸고 월경하는 탈북자들의 삶(「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통해 비극적으로 현시된다.

경계에 선 타자의 삶은 국가의 외부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포괄과 배제의 원리는 국가 안에서도 타자를 생산한다. 「이미테이션」의 주인공 게리 워커 존슨은 “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한국인 부모 사이”(272면)에서 태어났지만 ‘다국적’ 외모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놀림과 차별을 받는다. ‘혼혈인, 고아, 귀화인, 탈북자’라는 구체적 항목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외모에서 연상되는 관습적 차별에 의해 고통받는 게리의 삶은 국가 안과 밖에서 동시에 생산되는 깊숙한 차별과 배제의 원칙을 보여준다. 외국인의 이미지를 자신의 삶으로 연기하면서 단종수술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상황은 차별의 상상적인 이미지들이 실제의 삶을 규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전달한다.

국가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생산되는 타자의 삶에 대한 다양한 형상화와 더불어 전성태의 소설에서 가장 흥미롭게 주목할 부분은 관찰자로서의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이들의 내면 갈등은 기구한 사연을 지닌 이방인들에 의해 가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타자의 삶을 자기 삶과 관계짓는 데서 발생하는 심리적 균열의 상황이야말로 『늑대』가 도달한 가장 정직하고 치열한 인식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국경을 떠도는 낯선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회적·제도적 금기를 넘어야 한다. 그것은 타인의 생존을 넘어 나의 생존으로 연결되는 매우 긴박한 문제가 된다. 자신의 삶을 염두에 두지 않은 타자를 향한 무한한 희생이란 이 지점에서 자칫 공소한 이념이 될 수 있다. 전성태 소설의 인물들은 이 물음 앞에서 기만적인 위선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절박한 요청 앞에서 머뭇거리며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남방식물」에서 주인공의 내면에 균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국가적 상황은 ‘분단 이데올로기’를 통해 나타난다. 원만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몽골이라는 타국에서 불안한 삶을 사는 주인공은 목란식당에서 일하는 북한여성이 도움을 청하며 건넨 편지를 앞에 두고 갈등한다. 편지를 읽고 갈등하느니 차라리 읽지 않는 편을 선택한 그는 몽골의 성황당인 어워에 가서 편지를 묻고 온다. 괴로운 마음에 다시 어워에 찾아간 주인공은 편지를 끝까지 읽지 못하고 바람에 날려버린다. 자신의 삶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고국을 떠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압도하는 ‘분단현실’의 실제적 규정력을 보여준다. 「목란식당」의 삼촌 역시 자신의 그림 때문에 고초를 겪은 북한 화가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 자신이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한다. 식당 주인과 주인공도 북한체제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과 적대를 표현하는 한국 여행객들을 보면서 “목란은 그냥 식당인데……”(32면)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몽골에서 인물들이 시달리는 막연한 ‘박탈감’과 ‘무력감’, 그리고 심리적 갈등의 상황은 종종 예기치 못했던 반전이나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악하고 돈을 밝히는 것으로 보였던 몽골 부랑아들의 행동이 죽은 친구를 추모하는 폭죽을 사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반전(「중국산 폭죽」)이라든지, 평양에서 초청했다는 공훈 냉면요리사의 이야기가 거짓이었음이 밝혀지는 결말(「목란식당」)은 웃을 수만은 없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타자의 삶이 나에게 일으키는 동요와 균열을 직시하면서 느끼게 되는 모호하고도 혼란스러운 감정이다. 「코리언 쏠저」에서 이러한 해프닝은 몽골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품었던 주인공에 대한 씨니컬한 풍자로 나타난다. ‘시원(始原)이라는 이미지’로 매혹을 주었던 몽골은 어느새 외국인을 습격하고 돈을 뺏는 부랑자 천국으로 각인된다. 주인공은 분단 이데올로기와 군사문화, 성장주의의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적 상황을 몽골에서 고스란히 체험한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보하고 20년 전의 병영체험을 억지로 환기한다. 몸에 전선을 감고 몽골인들에 의해 ‘코리언 쏠저’로 호명당하는 그 순간 시인의 삶은 ‘영원한 군인’이 되는 희극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 자신의 내면에 각인된 군사주의 문화의 흔적을 먼 타국인 몽골에 와서 되살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소설의 결말은 ‘국경을 넘는 일’이 물리적 이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알려준다.

낯선 나라에서 타자로서 자신을 되비추는 과정은 이방인에 대한 막연한 동정과 연민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를 자각하게 한다. 때때로 이 자각과 고민의 과정은 인물들이 느끼는 공존과 평화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표현하는 데 머무르기도 한다. 「두번째 왈츠」에서 자르갈 시인이 “도대체 우리는 서로에게 비수를 꽂을 만큼 뭐가 달랐던 걸까?”(136~37면)라는 물음을 던지는 장면이라든지, 공동의 관심사를 갖고 있지만 선뜻 경계를 허물지 못하는 냐마와 주인공의 불투명한 관계는 이들을 묶어두는 국경 그 자체의 완강함을 표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이방인을 통한 서사가 근본적으로 가닿아야 할 당대적인 한국의 상황에 대한 성찰과 모색의 문제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기를 넘는 연대, 자기를 넘는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국경을 넘었다 해도 과연 마음으로도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것인가. 국가, 고향, 가족은 낭만적인 유목민의 상상력만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실존적 조건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흐름 속에 국경과 국가의 개인적 구속력은 ‘국가 없음’의 문제를 통해 역설적으로 되살아난다. 『늑대』가 포착한 몽골의 공간과 이방인들의 문제는 이러한 ‘국가 없음’의 상황을 소설적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당대성을 갖는다. 더불어 그것은 한국적 상황에 대한 비유적 설정에서 한걸음 나아가 이방인을 생산하고 규제하는 실제 삶의 조건들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몽골에서 조우하는 이방인의 삶에 대한 사유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삶을 분단현실 속에서 겪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의 문제와 연결될 때 진정한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성태의 소설은 타자를 배제하는 가시적·비가시적 국경의 폭력과 완강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국경 자체가 규정하는 개개인의 일상적 삶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는다. 그 점에서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는 『늑대』가 거둔 중요한 성취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성장소설의 형식을 띤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는 소재 면에서 볼 때 몽골 이야기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사회를 주도한 성장신화에 대한 탁월한 알레고리를 만들어낸 이 작품이야말로 『늑대』가 주시한 ‘국가’와 ‘국경’의 문제를 생활세계의 세목으로 포착해낸 문학적 성과에 해당한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1년, 시골의 한 학교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1교 1운동’의 에피쏘드는 교육현장을 중심으로 주입된 국가 주도의 발전과 성장 이데올로기의 한 측면을 날카롭게 제시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오쟁이’는 이러한 성장신화에 의해 희생된 비극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 깡마른 몸피, 기계총 흔적이 성성한 까까머리”에 “지나치게 헐렁한 붉은 셔츠와 검은 러닝복을 입고 하얀 스파이크 슈즈”(228면)를 신은 ‘오쟁이’는 학교 교장이 강조하는 ‘전라도에서 가장 빠른 놈’의 신화를 내화함으로써 내리막길에서 수레에 깔리는 비극적 사고를 당하게 된다.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압축 성장의 이데올로기는 시골 아이들의 삶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다. 작가는 근대화 과정의 소외된 타자로서 살아가면서도 이에 압도되지만은 않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실감나게 포착한다. 어른들의 세계를 꿰뚫고 있으면서도 천진한 일면을 보여주는 아이들의 씩씩한 세계는 다른 인물 군상과 어우러져 활력있게 묘사된다. 아이들 몰래 오쟁이의 다리통 굵기를 조작하는 교장 선생,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들판을 뛰어다니며 개구리를 잡다 병이 나서 드러눕는 주인공, 일제 청산의 의미로 조성해놓은 학교 포플러나무에 태연히 소를 매어놓는 마을 주민들, 다방에 가고 싶어 애향단 인솔을 어린 학생에게 맡기는 교사의 모습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풍속적 묘사의 힘을 잘 드러낸다. 작품 속 풍속세계를 장악하는 작가의 여유로운 시선은 근대화 이데올로기 뒤편에 숨겨져 있던 역동적인 생활세계를 문학적으로 주조한다. 이처럼 개개인의 감정과 욕망과 기억이 이루는 생활세계를 사회현실의 맥락 속에서 구성하는 작업은 국경의 서사를 현실의 삶과 접속시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늑대』가 제기한 국가와 이방인의 이야기는 먼 길을 지나서 당대적 현실의 소설적 형상화라는 긴요한 과제 앞에 새롭게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4. 존재들의 ‘사이’에서 들려오는 노래-공선옥의 소설

 

『명랑한 밤길』(2007)과 『내가 가장 예뻤을 때』(2009), 그리고 청소년문학을 표방한 작품집 『나는 죽지 않겠다』(2009)에 이르기까지 공선옥의 최근 소설들은 이주노동자와 탈북자, 장애인, 노숙인 등 다양한 계층의 소외된 삶을 소설의 장에서 다루어왔다. 『나는 죽지 않겠다』와 『명랑한 밤길』은 여성인물들의 일상을 중심으로 이러한 타자들의 서사를 세심하게 녹여놓는다. 소설에서 타자적 삶의 성찰은 일상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말미에 이르러야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가령 「도넛과 토마토」에서 외국인 여성과 노숙인의 생활은 글쓰기를 고민하는 문희의 일상 주변부에 얽혀서 이야기 후반에 슬며시 드러나며, 「명랑한 밤길」의 네팔 이주노동자는 도시로 가고 싶은 이십대 처녀의 연애 실패담 저편에서 모습을 나타낸다. 수해로 남편을 잃은 여성 장애인 이야기(「아무도 모르는 가을」), 미혼모와 입양 문제(「79년의 아이」),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엄마의 연애담(「지독한 우정」)도 마찬가지다. 『나는 죽지 않겠다』에서 조선족 이주노동자인 삼촌 이야기(「일가」)와 간첩으로 등장한 작은아버지의 이야기(「보리밭의 여우」)도 서사의 주변부에 놓여 있다가 차츰 이야기의 핵심으로 근접해오는 형식을 취한다.

외국인 이야기를 포함하여 공선옥의 근작들에 등장하는 타자적 삶의 체험은 다양한 소외계층의 삶을 주시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공선옥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다. 『명랑한 밤길』에서도 주목할 것은 가난과 소외를 경험하는 타자적 체험 중의 하나로 모성의 삶을 여전히 중시한다는 점이다. 생계의 책임을 지고 홀로 자식을 건사하는 가난한 어머니의 삶은 공선옥의 전작들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모성은 때때로 핏줄과 운명에 매여 있는 원형적인 세계로 표현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통념에서 벗어나는 자유롭고 개성적인 인간의 본성을 품고 있다. 빠듯하게 생계를 꾸려가지만 연애의 욕망도 있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자식의 속도 썩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명랑한 밤길』에서도 다채롭게 나타난다.

「꽃 진 자리」에서 교사인 주인공은 초등학생 남자아이를 건사하는 동료 교사의 따뜻한 가족 일상이 부러워 그들의 삶을 훔쳐보고 애틋한 연애의 감정을 느낀다. 뇌성마비 장애인 엄마의 연애를 바라보는 딸의 따뜻한 시선을 담은 「지독한 우정」에서도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 나이든 엄마의 욕망이 흥미롭게 드러난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이같은 다양한 시선은 「울 엄마 딸」(『나는 죽지 않겠다』)에서 미혼모였던 엄마를 뒤늦게 이해하는 십대 딸의 애정어린 고백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가끔은 술을 먹고 울기도 하지만, 또 툭툭 일어나 씩씩하게 살아온 엄마”(149면)의 모습은 공선옥 소설이 보여주는 모성의 개성적인 지점이다.

생계를 담당하는 어머니의 고된 삶에 대한 소설적 응시는 삶의 힘겨움을 느끼는 타자들에 대한 관심과 공감으로 연결된다. 『명랑한 밤길』에서 이러한 타자의 삶과 조우하는 순간은 감각적인 체험으로 소설 속에 드러난다. 인물들이 나누는 신체의 온기, 노래, 울음 등의 감각적인 소통행위는 ‘말과 행위의 공유’가 만들어내는 ‘사이’의 세계를 포착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이러한 ‘사이’의 세계는 개인들을 각자의 밀폐된 구획에서 끌어내 다양한 시선 속에서 만나게 하는 공공의 영역을 구성한다. “세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탁자가 그 둘레에 앉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듯이 사물의 세계도 공동으로 그것을 취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이(in-between)가 그러하듯이 세계는 사람들을 맺어주기도 하고 동시에 분리시키기도 한다.”5 사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위의 공유는 “사람들 사이의 공간, 즉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적당한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6는 확신을 준다. 아렌트는 이러한 말과 행위의 공유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사람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한다’고 표현한다.

‘내가 타인에게, 타인이 나에게 현상하는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교감의 순간’은 「영희는 언제 우는가」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통해 표현된다. 울음은 흩어져 있던 주변부의 사람들을 한 공간으로 모으면서 절실한 삶의 의지를 표현한다. 노인의 마른 울음으로 시작하는 장례식장의 곡소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대숲 일렁이는 소리와 어우러져 주인공에게 젊은 시절의 연애담을 떠올리게 한다. 전자공장 여공이었던 영희와 자신을 설레게 했던 대학생들, 계곡에서 복숭아를 깨물어먹고 달콤한 밤을 지새우게 했던 그 아름다운 시절의 연애는 세월 속에 사그라지고 이제 주인공은 남편을 잃은 기막힌 상황에서 소리내어 울지도 않는 친구 영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울고 나서야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영희의 본격적인 울음이 시작된다. 신체적 감각으로 교환되는 몸짓의 언어는 “아이고오 아이고오, 아이고오…… 아아아아아…… 어어어어어……”(56면)라는 절박한 울음소리로 터져나온다. 상복을 벗어놓고 시작되는 영희의 울음소리는 생의 고단함을 넘어서는 실존의 몸짓을 의미한다. 소설에서 아이와 노인과 젊은 여성들은 한 공간에 모여 각자 다른 맥락에서 곡소리를 낸다. 울음은 “온몸 버둥대는 울음” “세상천지 집어삼키고도 남을 울음”으로 퍼져나가며 죽음에서 탄생으로 넘어가는 생명의 순환과정을 암시한다. 인물들이 각자 다른 위치에서 내는 울음소리는 하나의 ‘사이’를 형성하는 공존의 순간을 이루어낸다.

「도넛과 토마토」에서도 울음은 처음 만나는 두 여성을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남편을 잃은 외국인 여성은 두려움을 호소하며 문희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언니, 나 돈 없어. 날 살 없어. 나 한국 몰라, 나 무서워, 나 싸랑해”(75면)라는 도넛의 고백은 문희의 마음을 움직인다. 문희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 것은 도넛이 의미도 잘 모르면서 사용한 ‘사랑’이라는 단어다. 도넛이 말하는 ‘사랑’은 남녀의 사랑을 넘어서 생존을 호소하는 절실한 메씨지를 전달한다. 사랑이라고 발음되지만 사실 단어의 정확한 뜻은 중요하지 않다. 함께 마주보고 있는 타자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몸짓만 읽어낸다면 ‘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도넛에게서 문희가 느끼는 것은 어느 딱한 외국인 여성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그녀의 삶을 통해 들여다보는 자신의 타자화된 삶이다. “낯선 땅에서 남편을 잃고 자신에게 닥친 극심한 삶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한 이국여자”(74~75면)의 삶은 남편과 헤어지고 “어린아이가 딸린, 이 세상에 기댈 데 하나 없는 여자”(65면)로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온 문희 자신의 삶과 겹친다. 이 순간 문희는 도넛을 외국인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여성으로서 공감하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의 순간은 문희가 도넛을 만나고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마주치는 노숙인과의 관계에서도 형성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지저분한 노숙인 때문에 잠시 고민하던 문희가 도넛을 떠올리면서 깜박 잠이 들고 마는 장면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 결말은 문희와 마찬가지로 도넛과 노숙인이 각자 ‘고단한 한 인생’에 불과한 똑같은 사람임을 웅변한다.

여성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내는 울음소리는 절실한 생의 의욕을 담은 공통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혼자 우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함께’ 운다. 그리하여 울음은 같이 부르는 노래가 된다. 이 소설집의 백미에 해당하는 「명랑한 밤길」은 스물한살의 젊은 여성과 네팔 이주노동자의 우연한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순간을 노래의 상징을 통해 섬세하게 포착한 소설이다. 도시로 가고 싶은 열망 하나로 간호학원에 다녔던 주인공은 홀로 치매환자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현실에 처하게 된다. 면소재지의 의원에 겨우 취직한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일 능력이 없는”(107면) 주변의 노동자 남성들을 경멸하며 고향에서 탈출하여 멋진 삶을 살게 될 미래를 꿈꾼다. 그녀의 바람대로 어느날 근사한 남자가 앞에 나타나긴 했지만 그는 달콤한 말로 여자를 꾀어 필요한 것을 구하는 허위적인 지식인에 불과했다. 소설의 중요한 반전은 힘들게 가꾼 무공해 채소를 들고 찾아간 주인공이 남자에게 냉대받고 돌아오는 밤길에 이루어진다. 남자들의 발소리에 무서워져서 정미소 안으로 몸을 숨긴 그녀는 뒤에서 걸어오던 이들이 네팔 이주노동자인 깐쭈와 싸부딘임을 알게 된다. 이들은 그녀가 떨어뜨린 채소를 주워들고 기뻐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남자들의 서투른 한국말 대화를 엿듣고 그들이 부르는 대중가요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 장면은 서사의 반전을 이루면서 감동의 여운을 증폭시킨다. 그것은 이 소설이 그려내는 이방인의 서사가 결국 타자로서 자기를 확인하는 주인공의 내면으로 절실하게 파고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트로트를 따라 부르며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 남자를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주인공은 이제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모르는 이들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생생하게 공유하는 소통의 공간은 한국의 달에서 네팔의 달을 상상하게 하는 기적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소설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이방인에 대한 서사는 연애를 향한 허위의식이 박살나는 순간 중심부로 진입하면서 예기치 않았던 소통의 확장을 이룬다. 그 순간 주인공이 맞닥뜨린 타자적 체험은 자신의 허위의식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로 연결된다. 공선옥의 소설이 포착하는 존재들의 ‘사이’가 형성하는 연대는 그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각자가 겪는 고단한 삶의 현실을 넘어 이루어지는 만남의 순간에서 들려오는 그 노랫소리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뚜벅뚜벅, 명랑하게”(125면) 걸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삶을 우리 앞에 현시하고 있는 것이다.

 

 

5. 타자의 인식과 공공성의 성찰

 

문학 바깥의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타자의 경험에 직면한다. 성과 인종, 계급을 포함한 여러 층위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의 소외와 결핍은 억압이 기원하는 근본구조에 대한 사유의 장을 요구한다. 타자의 인식에서 출발하는 공공성의 영역은 합의나 화해를 섣불리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동적인 특성을 갖는다. 오히려 문학이 꿈꾸는 공공성의 세계는 공통의 대상에 대한 복수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한 긴장과 충돌의 공간일 때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정체성의 위기를 일으키는 미지의 공간이 된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문학적인 공공성의 탐색은 적대와 갈등을 그 필요조건으로 삼는 공존의 영역, 즉 “차이가 존재의 가능성의 조건”7으로 사유되는 급진적인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최근 한국소설에 나타난 이방인의 존재와 월경의 서사는 타자의 삶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문학적 공공성과 소통의 상상력을 확장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전성태의 소설에서 국경과 타자에 대한 성찰은 공동체적 삶을 자본주의적 근대와의 관련 속에서 활력있게 파악하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한다. 공선옥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모성과 연애의 서사는 낯선 타자와의 조우에 의해 비약적인 소통의 순간을 맞는다. 이 비약의 순간이 여성만이 혹은 모성만이 고유하게 지닐 수 있는 보살핌의 덕목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 더 많은 기대를 걸어도 좋을 듯하다. 전성태와 공선옥의 소설에 드러난 이방인의 서사는 연민이나 공감의 시선에서 한걸음 나아가 자기성찰의 심화된 지점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들 소설에서 이방인의 존재는 그가 나와 함께 자리해야 할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공론의 장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의 존재가 나 자신의 삶과 어떻게 관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절실한 물음을 던져준다.

타자의 삶에 대한 각인과 관심은 실제로 타자의 문제가 나의 일상, 나의 고독, 나의 자유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이 지점에서 배수아의 「무종」을 다시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함부로 붙일 수도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완전한 타자, 목적지로 가는 길을 끊임없이 지연시키고 불편하게 만드는 타자의 존재는 소설의 제목 ‘무종’처럼 어느 하나의 실체로 환원되지 않는 모호한 이미지로 현현한다. 그러나 화자가 힘주어 말했던 “그 어느 사건도 시작되기 이전”에 잠시 등장했던 별볼일없는 외국인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그 어느 사건”을 구성하는 핵심이 된다. 무종의 탑을 찾아가는 그 칠흑같은 밤, 주인공과 모형비행기 수집가, 그리고 운전사는 같은 택시를 타고 달리고 있다. 진땀을 흘리면서 길을 찾으려 애쓰고 승객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필사적으로 건네다가 마침내 점점 회색으로 변해가는 외국인의 모습은 이국 땅에 쉽게 발붙이지 못하는 주인공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가 내뱉는 “불명확한 어휘의 묶음”(155면)과 “구멍투성이 언어”(158면)는 주인공 자신이 타국의 사람들을 향해 내뱉을 수 있는 모국어이자 문학은 아니었을까.

주인공은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코즈모폴리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이 땅에서 항상 반뼘 정도 위로 들려 있는”(176면) 기분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안정한 유랑인일 뿐이다. 그리하여 본 적 없는 무종의 탑으로 향하는 그 어두운 밤과 검고 축축한 벽들로 둘러싸인 도시는 주인공이 처한 타자적 상황에 대한 하나의 비유를 획득하는 듯하다. 무종의 탑으로 향하는 몇시간 동안 외국인과 주인공은 어쩌면 같은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원하는 자유와 고독은 외국인이 갈망하던 것일 수 있다. 그들은 같은 목적지인 무종으로 향해가고 있으며, 그 시간 동안은 ‘동시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본 ‘마치 새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환영은 그 자신의 꿈이기도 하고 이방인의 꿈이기도 한 것이다.

안전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이방인의 존재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보편적인 존재로서 꿈꾸고 갈망하는 공동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일깨운다. 그리하여 소설의 세계에서 새롭고 핵심적인 것은 낯선 공간의 설정, 낯선 타자의 출현 그 자체가 아니다. 타자를 바라보는 나 자신이 그 누구보다 낯설고 기이한 타자임을 인지하는 순간, 시선은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수용소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자체에 잠복해 있으며, 나 자신은 스스로가 감지하지 못했던 낯선 이방인인 것이다. 자기보다 더 낯설고 두려운 또다른 자기를 만나는 순간, 공공성의 공간은 새롭게 구성된다. 공공성이 궁극적으로 환기하는 문학적 성찰은 타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서 각 개인들이 자신의 삶에 구현되는 타자적 경험을 응시하는 문제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만들어지는 민주주의”와 “정치적인 영역에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미학적인 표현”8은 그 지점에서 꿈꾸는 문학적 가능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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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2008, 102~105면.
  2. 같은 책 110면.
  3. 같은 책 111면. 여기서 아렌트가 설명한 공공성은 전체주의라는 당시의 사회적 지배체제를 비판하기 위한 정치적 맥락을 갖는다. 아렌트가 공공성을 규명하기 위해 전제하는 공/사 영역의 구별은 별도의 세심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한 예로 주디스 버틀러는 “아렌트가 촉구하는 공적 영역은 공/사 구분 위에서만 가능한 것”(주디스 버틀러·가야트리 스피박 대담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주해연 옮김, 산책자 2008, 29면) 이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악셀 호네트는 아렌트가 논의하는 공공적 정치의 영역이 “고대 폴리스에 대한 이상적 서술”(악셀 호네트 『정의의 타자』, 문성훈 외 옮김, 나남 2009, 66면)을 전제한다고 비판한다. 두 논자는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아렌트의 논의가 정치적 공공성의 붕괴가 이루어지는 현실에 대한 실천적 통찰력을 불러일으킬 중요한 문제제기라는 데 동의한다.
  4. 주디스 버틀러·가야트리 스피박, 앞의 책 24면.
  5. 한나 아렌트, 앞의 책 105면.
  6. 같은 책 261면.
  7. 샹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이행 옮김, 인간사랑 2006, 38면.
  8. 주디스 버틀러·가야트리 스피박, 앞의 책 6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