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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제9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주하림 朱夏林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wngkfla@hanmail.net
레드 아이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었습니다
저녁식사 도중 엄마의 남자와 작은 목소리로 다툰 날이었고
결혼을 앞둔 남자가 폭염을 만들어낸 날이었습니다
어둠이 원치 않은 곳에서 서서히 눈 뜨는 동안
싸움을 말리던 아버지가 멜빵차림 어린애로 변하고
친구가 나의 미래를 헐뜯다 떠났죠 마을 뒤 작은 언덕을
끝없이 달리고서야 눈의 통증이 시작됐습니다
동네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습니다
입이 세개인 것보다 낫지 않나요 당신은 치료를 원합니까
눈이 영영 사라지길 비나요 아니면 눈과 무릎이 조화롭게
공생하길 바라나요 이제 막 꿈틀거리는 눈을 붕대로 칭칭 감고
간호사는 그 위에 입술을 그려넣었습니다 세개의 입을 달고,
나는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죠
눈이 처음 건넨 말은 불을 꺼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곧
돌멩이와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일대기를 꺼내놨죠
왜 나의 눈이 세상의 정물을 칭찬하며 우물쭈물 입을 엽니까
한몸이 되려고 울퉁불퉁 시간 위를 견디었다 말하지 못합니까
서로 같은 방향을 보기 위해 멍자국이 새카맣게 쏠린 것이라고
왜 그 결심은 나를 흔들며 무섭게 설득시키지 못합니까
바다 일몰을 보고 싶다는 마지막 청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입술 주변에 삐뚤빼뚤 다리를 그려주었죠
얘야, 이십년 넘게 떨어져 있던 한쪽 눈을 찾아가도 되겠니
내 가슴을 벌려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자궁을 헤치다 천천히 침몰하는 해파리떼, 퉁퉁 붓는 눈꺼풀들
데이지
1
편지봉투를 뜯는다
이것은
체코에서 봉춤을 추는 스트리퍼
네 언니의 이야기이다
2
그때 휴일은 내게 떠날 차비를 주었지 몇개의 태양을 차례로 물어뜯고 한쪽 얼굴로 울던 날, 공원에서 매일 마주치던 조각상에 대한 우울한 소문, 신앙을 갖기 위해 육교를 걸었지만 죽어가던 나무들은 도시를 떠나길 간청했어 분수 위를 날던 참새들이 꼬르륵 가라앉던 밤
국경은 위험하고 아름다운 곳이야 대기실 긴 차양 너머 구겨진 이력이 바람과 함께 불어오지 기차표를 잃어버리고 경찰들에게 쫓기다 몸을 던졌어 선로 끝 난 무엇으로 서 있던 걸까 비가 그치고 곱슬머리 남자 손에 끌려갈 때 가방을 떨어뜨린 곳, 고향으로 새겼지
늘 같은 지적을 받았어 넘버원 동료에게 머리채를 잡힌 일 함께 이층침대를 쓴 적도 있는데, 방관을 알았다면 어젯밤에도 공연을 했을 거야 사랑에 빠진 적도 있지만 잇몸이 흠뻑 젖진 않았어 이 나라 사람들과 목소리가 비슷해지려 해 블라우스를 풀면 여전히 어둑어둑한 계단, 잠깐 올려둔 화분 모두 거인병에 걸렸어 꽃이 보고 싶다
도로에 뛰어든 토끼 살점이 구두에 튀었어 괴기스러운 사건을 닦는 동안 진열대 인형들이 평온을 찾아가 나는 언제부터 양동이에 비누거품을 풀어 당신의 얼굴을 지우기 시작한 걸까 사라지지 않는 것들의 귀에 소리 지르고 싶다 하루치 목숨을 풀어놓고 밤을 기다려 그물망에 걸린 새들을 놓아주지 않을 거야 거인병을 고치기 위해 야간열차들이 무너진 계단을 가로질러가 철컹철컹 밤낮 걸어온 그림자가 변장에 능숙해질 때쯤
카를다리 서쪽에서 누군가 날 찾고 있단 소식을 들었어 운 좋으면 노래하는 분수를 만날 것 같아 자물쇠가 툭 풀리면 해가 지지 않는 동쪽, 먼저 도착한 휘파람 소리가 나를 감을 거야
위험한 고백
프랑스인지 이탈리아인지 그런 영화가 있었어요 지지직 지지직 들려줄게요 잠들지 말아요 먼 나라에 외로운 남자가 살고 있었죠 하루는 혼자 사는 집으로 콜걸을 불렀는데 콜걸이 다음날부터 페이도 받지 않고 매일 찾아오는 거예요 날마다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가슴을 실컷 뛰어다닐 수 있다니 남자는 아주 기뻤어요 전 이쯤에서 핏빛 오줌을 누고 왔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남자는 의심스러웠어요 개연성 없는 서사의 결말이 대개 그렇잖아요 왜 돈을 받지 않는 걸까 왜 나 같은 새끼를 만나는 거지 남자는 추궁했어요 여자 표정이 석고상처럼 딱딱해졌어요 당신밖에 없어요 아냐 너의 숨소리까지 거짓이야 진실을 말해 남자는 다그쳤어요 여자 피부가 붉어졌어요 색깔은 중요치 않아요 살아 숨쉬는 석고상에게 결국 남자는
혼자 살던 방을 나와 여자 손을 끌고 여자네로 갔어요 상냥한 부모님과 동생들, 오리훈제는 부드러웠어요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믿지 못해요 여자의 친구들도 만나고 여자의 방에서 억지로 강요한 적도 있었지만 여자는 끝까지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날
여자가 사라졌어요 잠들지 말아요 자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의 여자들이 자꾸 사라지는 거잖아 남자는 미친 듯이 여자를 찾아다닙니다 여자의 집도 부모도 형제도 사라졌어요 커다란 코르셋밖에 기억나질 않아요 남자는 차를 끌고 오솔길을 달려요 사고가 나고 병원에서 절망에 관한 멋진 대사를 중얼거리죠 그게 생각이 안 나요 누가 이 영화의 제목을 맞춘다면 당신과의 비밀도 털어놓겠어요 펄쩍 뛰지 말아요 결말 없이도 우린 가까워질 수 있잖아요 깨워줄게요 우리에게 아침이 오면, 누가 이 영화의 제목을 알려준다면
그림자극
펄럭이던 검은 새가 눈가에 앉습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소녀는 문신을 합니다
어깨를 두바퀴 헤엄치는 잉어, 발목을 휘감는 장미넝쿨
소녀의 몸은 야행의 습성으로 꿈틀거린답니다
낮에 겪은 너그러운 고통들은 그림자로 피어나지요
추억은 달라요 오른쪽 발목에 그리다가 만 유령거미처럼 살죠
소녀는 이들을 낡은 철제침대에 가두고 그림자극을 합니다
저마다 달콤한 역할을 주었어요 매혹적인 연주가 시작되면
서로의 호흡이 무대에서 뒤엉켜요 이야기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열아홉에 뗀, 스티커 용이 앙상한 허물을 걸치고 찾아왔어요
끊어진 꼬리를 채워주세요 너덜너덜 바람이 불지 않는데
들썩거리는 얇은 막(幕) 그와는 꼬리쯤에서 만나고 헤어졌죠
아직도 지점이라는 말은 소녀 귓가를 천둥처럼 울리고
우리 한번쯤 발자국을 바꿔 신어도 좋았을 텐데
날개 한쌍을 감춘 용이 커다란 화염을 토해요
잉어가 어깨에 고인 구름을 불러와 소품을 끄고
그 틈을 타서 반쪽짜리 유령거미가
장미의 가시를 뽑아 몸의 나머지를 완성하고 있어요
눈가에 앉은 새가 숨겼던 발톱을 세우고 소녀의 몸속을 날아요
모든 역할이 거대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동안
끝내 야생의 습성을 버리나요? 다음 막을 바늘 끝으로 새겨요
질긴 살갗 위에 쭈글쭈글 다시 태어나는 응룡1 한마리
하계훈련
호루라기를 불어요 엄마는 익사 직전, 배영을 배워오랬어요 너는 또래와 달라 다르단 말 속에 피 튀기는 전쟁터가 있는데, 홀수 번호인 짝꿍이 출발했어요 짝수 번호인 그녀가 출발했고 나는 0이에요 고요하게 무릎을 모으고 호루라기를 불어요 첫사랑일지도 모르는 아이가 후발 주자로 달려와 내 숲속을 베며 사라져요 푸른 것은 푸른 것끼리만 어울려야지 다르다는 살갗 속에 검은 피 고이는 전쟁터가 있는데, 나는 주둥이가 좁은 물병에 들어가 스코어를 세요 마음속으로만 나비의 허물을 세요 괴물들도 버린 괴물들의 새끼들이 꼬물꼬물 태어나요 물병 속이 꽉 찼는데 세상을 무겁게 돌아다녀요 입술은 목숨을 걸고 수척해져가요 방금 구운 뜨거운 발자국을 해가 하나씩 집어먹어요 저기 봉긋 솟은 무덤을 수건처럼 덮고, 아는 얼굴들이 지나갈 때까지 나는 굳어가요 시간이 갉아먹은 한쪽 다리와 고무튜브를 던져버립니다 혓바닥도 그곳에 두고 왔어요 호루라기가 나를 자기 뱃속에 집어넣어요 이 콩알만한 게 나는 출발도 안했는데 자꾸 흙먼지에서 구르고 있어요 엄마 대신 저조한 성적을 올릴 거예요 어디서 날아온 만국기가 목에서 흔들리는 금메달을 뒤덮습니다 하늘은 커다란 애드벌룬, 어깨에 생긴 곰보자국을 감춰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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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황제의 신룡(神龍). 용이 천년을 견디면 날개를 얻어 응룡이 된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