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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형수

김형수 金炯洙

1959년 전남 함평 출생. 1985년 『민중시 2』로 시 등단, 1996년 『문학동네』로 소설 등단.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등이 있음. millemi@hanmail.net

 

 

 

맘 켕기는 날

 

 

1

 

어린 시절, 모교에 아주 우람한 노인네가 살았다. 내가 입학할 때 환갑을 맞은 느티나무. 혈통이 좋은지 거대한 장사의 골격을 하고 있어서 여섯명이 팔을 이어도 허리를 잴 수 없었다. 몸통에서 분수를 뿜듯이 솟구쳐 올린 수천개의 가지들에는 저마다 만국기 같은 이파리들을 매달아서 여름이면 하늘이 한점도 보이지 않았다. 땡볕이 나면 그 밑에서 애향단(愛鄕團) 조회를 하고 비가 오면 전교생이 모여 운동회를 할 정도. 가을 어떤 때는 사나흘 내리 낙엽을 퍼부어서 그 아래 서 있으면 하늘이 쌓는 무덤에 묻히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시골학교 운동장이 그렇듯이 평소에는 텅 비는 날이 많았다. 언제나 그곳에 옷을 벗어두고 맨손체조를 한 후 어디론가 달리고는 했던 퇴역 마라톤 선수와 그 풍만한 젖가슴에 둥지를 튼 잿빛 왜가리만 이따금 부스럭거릴 뿐. 느티나무는 동네 조무래기들이 노는 것을 반겼을 것이다. 고요한 중생 두마리만 데리고 살기에는 너무 심심했을 테니까. 우리는 그렇게 믿었고, 퇴역 마라톤 선수도 우리가 싸우는 소리를 듣느라 잎사귀들이 쫑긋쫑긋 푸르다고 했다. 한번은 세상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일로 말싸움이 났는데,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의 끝이 있다는 데는 다들 동의해서, 이후 그에 대한 상상으로 또다른 다툼이 꼬리를 잇고는 했다. 너무나 멀어서 살아생전에는 닿지 못할 곳. 아득하고 낯설고 무서워서 사랑도 희망도 연민도 미치지 못하는 곳. 거기에 죽어서라도 가보고 싶다고 우기는 녀석도 있었지만, 나는 아니다. 오히려, 살아서 못 가는 곳을 죽어서 왜 가? 해서 분위기를 역전시킨 기억이 생생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의 한때에 그런 게 있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오랫동안 잊고 살았을까? 그걸 유실한 건 언제쯤일까? 서른살을 기념하는 동창회 때 가보니 느티나무는 사지가 잘린 불구가 되고, 운동장이며 화단 언덕들은 난쟁이 나라의 그것처럼 조막만했다. 소인국에서 품었던 광활한 세계가 거인이 되면 사라진다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나는 그렇게 바보처럼, 세상 어딘가에 끝이 있으리라 믿었던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었다가 김대중인지 노무현인지, 에라 모르겠다만, 그런 누가 대통령을 하던 어느 때, 아주 우연한 곳에서 퍼뜩 그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당시에 모처럼 시집을 내서 반응이 제법 좋았던 탓에 출판사라는 직장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굳이 둘러대자면 배고플 때 받아준 직장에 대한 의리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여튼 나는 사장님의 지시로 출장을 갔고, 거기서 맞은 첫 만찬 석상에 앉았을 때 누가 나를 발견한 인사를 이렇게 했다.

젊은 선생, 볼에 색시가 사는 걸 보니 시 좀 쓰겠습네다.

그러고는 위아래를 훑어서 명찰 하단의 생년월일을 보았던지,

하긴, 스물 넘어서 쓴 것도 시겠습네까?

놀라라. 오래전에 부서진 순정과도 같은 아련한 문학적 신파가 풍기는 사투리를 들어본 게 얼마만이던가? 나는 불의의 일격을 맞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순간에, 저 목소리는 아주 오래전에 내가 떠나온 곳에서 들리는 것이고, 그곳은 어린 시절의 느티나무 밑에서 상상했던 세상의 끝이라는 사실이 바람처럼 안겨왔다. 흔쾌히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옳아요. 세상의 끝을 잃어버린 사람도 시인인가요?

 

2

 

노파심에서 한가지 밝혀둬야겠다.

그 무렵이면 나도 신체 여기저기에 적잖은 연륜을 내장하고 있었다. 아랫배가 튀어나오거나 하체가 가늘어지는 따위. 허나 얼굴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는 붉은 볼을 가진 사내가 없지 않지만, 나는 유독 심했다. 어려서부터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방귀냄새만 풍겨도 혐의를 도맡아 썼다. 날 때부터 사교성이 부족한 유전자를 가졌든지, 아니면 타인의 눈길을 견디지 못할 만큼 면역성이 떨어지는 원인이 따로 있었든지……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진화론을 쓴 찰스 다윈은 인간의 얼굴이 붉어지는 이유를 수줍음의 감정에서 찾았다. 버제스도 『얼굴이 붉어지는 메커니즘과 생리학』에서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감정을 양볼에 표현하는 능력은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고, 나도 가끔 ‘타인에 대한 경배의 흔적’이라고 항변한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사람의 얼굴을 붉게 하는 것은 ‘켕기는 맘’이랄까? 정의하자면, 탈이 날까 마음이 불안한 상태? 아니, 가슴을 졸이게 하는 내면의 빛 한덩어리가 심장 근처에서 생명의 바깥으로 굴러떨어지려는 상태,쯤이라 해야 좋겠다.

어쨌든 나는 그 때문에 난처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인도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입원해 계셔서 곧장 병문안을 갔던 일이 있었다. 참 유별난 장소였다. 사내에게 산부인과란 이교도의 사원처럼 생경한 곳. 문을 열자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콕콕콕 쪼아대는데 내 몸이 리트머스 용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볼이 붉어지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더니, 나중에는 신열이 끓었다. 인도에서 한달 이상을 빈민굴에서 뒹굴었으니 몰골도 흉측할 텐데 거듭 콜록거리기까지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나를 끌어다가 의사 앞에 앉혔다. 그때 청진기를 든 의사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흥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쯥, 괴질이에요. 말라리아는 법정 전염병인데 어떡하나?

그건 발견된 병원에서 즉각 격리수용해야 하는 중대 보균자라 했다. 그 길로 나는 여자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도 어그러뜨린 채 무려 엿새하고도 꼬박 한나절을 산부인과에 억류되었다.

이제부터 전하려는 이야기도 그에 못지않은 가십거리에 속한다.

 

3

 

그해 초여름에서 이듬해 봄까지, 나는 도합 다섯차례를 북쪽에 다녀왔다. 출장치고는 독특해서 술좌석에서 내일 떠난다, 혹은 오늘 다녀왔다, 하면 깜짝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나 멀리? 나는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그냥 얼버무릴 뿐이다. 명색은 해주인쇄단지 실무단 간사였지만, 남북협상단이 몇번째 만날 때 내가 합류했는지, 실무단을 그만둔 후에도 회담이 더 있었으며 향후에라도 사업이 성사될 여지가 있는지 그런 것은 모른다. 근자에 남북 왕래가 완전히 끊겼다고 들었지만 조국을 근심하거나 민족을 위할 만한 사명감도 내게는 없다. 오히려 그런 모자람 때문에 소소한 촌극들이 생기지 않았겠는지. 하지만 지금도 알 수 없는 것은, 나의 어디에 그렇게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있었던가 하는 점이다. 나는 끼자마자 남북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초여름

 

북쪽을 연상할 때 남쪽 사람들이 갖는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는 그곳을 지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출발하는 날, 개성까지 가려면 고생스럽겠구나, 하면서 마포대교에서 형과 헤어졌는데, 북쪽으로 건너기 위해 휴대전화를 맡길 때 통화해보니 형은 겨우 잠실을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지척에서 남과 북이 매일같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너무나 달랐다. 한쪽은 씨네마스코프에 한쪽은 흑백영화라, 비무장지대를 넘을 때 경계가 어디인지 새들도 금방 알아볼 만큼 표시가 난다. 북쪽은 나뭇가지 하나 성한 게 없었다. 산천초목까지 영양실조를 겪는 지독한 가난이라니.

넉넉히 3킬로면 족할 진공지대를 지나면 곧 북쪽이 시작되는데, 이는 문화충격을 해소할 만한 거리가 되지 못했다. 남북이 하는 일은 작은 사안에도 까다로운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110볼트의 가전제품을 220볼트에 연결했을 때처럼 망가지고 만다. 까닭에 실무단을 이끄는 대북전문가 이승재 선생도 거듭 강조하고는 했다.

내가 2년 전에 안내했던 단체에서 말요, 기적처럼 협상이 완료되는 순간 한놈이 외친 거야. 너무 기쁜 나머지, 대한민국 만세! 북쪽에서 뭐란 줄 알아요? 뭐, 어드래? 우리 민족끼리 잘하자 해놓구선 기껏 흡수통일이라 이거디? 순식간에 합의서가 휴지가 됐어요.

사정이 이러한 때문인지 이선생은 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식당 복무원(종업원)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얼마든지 수긍이 가는 일이다. 북측 CIQ(출입사무소)에서 검색대를 통과하고 십분도 안되는 거리에 개성공단 현대막사가 있다. 남쪽 차는 그곳에서 멈추고 북쪽 차로 옮겨서 느긋이 오분을 더 가면 선죽관이라는 식당이 나온다. 그 짧은 시간을 견디는 것은 그러나 얼마나 어색하고 긴장되는지. 이선생은 숱한 경험 끝에 그 시간을 여자 얘기로 때우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쪽 처녀들? 훈련된 언어로 주체사상이나 쪼르르 외우는 그런 이미지는 번지수가 한참 달라요. 우리와 접촉하는 게 대개 대졸들인데, 남쪽보다 북쪽이 학사 동거가 많단 말예요. 군복무가 칠년씩이라 동급생이란 게 다 오빠들이거든. 쉬운 말로 취업 전 가난뱅이가 결혼을 어떻게 해. 사회 진출할 때까지 예비부부로 버티는 거지. 물론 그러다 헤어지는 일도 부지기수고.

이렇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곳에 대해 내가 유일하게 생명감을 느낄 만한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예쁘다는 서순아하고 김연정 이야기가 나오면 실무단은 모두 두 패로 나뉘었다. 나도 서순아 이름을 그렇게 해서 외웠다. 실물을 보니 과연.

첫날, 문 앞에서 여종업원 하나가 반갑게 맞는데, 나는 이름표를 보지 않고도 그녀가 김연정임을 알았다. 이선생이 묘사한 대로 긴 머리를 가진 조선여인, 그녀가 신사임당이나 황진이의 후손임에 반해 서순아는 고구려 여자였다. 얼굴은 희고 갸름하지만 성격이 사통팔달해서 가슴에 광활한 만주벌판이 펼쳐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도 우리 일행이 우루루 밀고 들어갈 때 여러 아가씨들이 다투어 인사를 하는데, 난데없이 하나가 달려와서는 남쪽 인사들을 덥석덥석 부둥켜안더니, 짓궂은 농담을 던진다는 게 하필 나를 지목했다.

더운 날 떱네까? 제가 그케 예쁩네까?

이럴 때 내가 유난히 허둥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선생이 나시인, 저게 순아요, 귀띔을 하더니 성큼 처녀에게 가서 다짜고짜 내 얘기를 했다.

북쪽도 시인은 금방 알데. 나중에 통일되면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딱지를 저이한테만 선물했지 뭐요.

무슨 말인가 하면, 그날 운전대를 내가 잡았는데, 공단 확장사업이 한창인지라 황량한 벌판에 임시로 닦은 길이 권태롭기만 했다. 그래서 중장비가 깔아뭉갠 지 며칠 안된 신작로를 잔뜩 먼지를 일으키며 가로지르는데 뜬금없는 호각소리가 들렸다. 앞뒤를 휘둘러보고서야 나는 뻔히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풍경이 있었던 걸 깨달았다. 행인도, 비켜설 차량도 없는 허허벌판에 파란 제복을 입은 교통보안원이 비닐로 된 공중전화부스 같은 검문소를 설치해두고, 막대기를 흔들면서 정지 요청을 한 것이다.

남쪽선생동무, 여긴 왼쪽 지시등을 켜고 도는 곳이란 말입네다. 남쪽에선 그케 안합네까?

남쪽에, 선생에, 동무를 조합한 단어들을 이성으로 새겨듣자면 못 알아들을 것도 없건만 고막에 닿는 건 영화에서나 듣던 사투리 억양뿐이었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이선생이 내려서 속닥속닥하더니 이내 배를 쥐고 우스워 죽는 시늉을 했다. 깔깔깔.

당신 면허증 달래.

주섬주섬 꺼내주자 교통보안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들여다보더니 누런 종이쪼가리를 디밀었다.

여게다 사는 곳 적고서리 수표하기요.

수표가 뭔데요?

이선생이 다시 귓속말로, 싸인하란 소리여, 했다. 교통위반 딱지를 뗀 것이다.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로서는 첫 대면, 첫 순간부터 웃고 떠드는 것을 접한 덕에 하마터면 남북의 만남이 언제나 유쾌하고 화통한 것으로 오해할 뻔했다. 언어가 같으니 통역이 필요 없고, 정서가 통하니 농담도 자유롭긴 했다. 무엇보다도 강사장이 시종 넉살을 떠는 통에 남녀상열지사가 공용어가 되었다.

단장님, 서울 사람들은 통일되면 그간의 결혼을 무효로 돌리기로 했어요. 어떠세요? 제한된 조건에서 짝을 골랐으니 전체를 풀어놓고 다시 정해야지요.

나는 이같은 농담이 과한 게 아닌지 여간 조마조마하지 않았는데, 북쪽 단장은 한술 더 떴다.

거, 말씀만 그러디 마시라요. 남쪽 실무단에 여성대표가 없는 건 누구 심술입네까?

더욱 신나는 것은 북쪽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그러는지, 선죽관 복무원만 그러는지, 아니면 서순아가 유별나서 그러는 건지 사내의 입담 씨름에 스스럼없이 섞이는데 그게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도 음식 주문을 받다가 천연덕스럽게 추임새를 넣는데,

단장 동지는 자유주의 왕초라요.

내가 알기에, 잘생긴 여성이 하는 말을 강사장이 놓치고 가는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자유주의 왕초가 뭐예요?

이선생 왈,

강사장님이 남쪽에서 잘하는 겁니다.

이런 장소에서 바람둥이라는 말은 수컷의 자부심에 얼마나 빛나는 명예를 안기는 표현인지, 강사장이 곧장 절하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단장형님, 북에서는 애인이 몇쯤 되어야 자유주의 왕초 소리를 듣나요?

북쪽 단장도 그런 이야기에 관한 한 빠지기 어려운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여자란 고조 하나는 모잘르고 둘은 남는 거 같디.

구구절절이 호기심 자극인지라,

서울은 모텔, 여관, 여인숙 기타 바람피울 곳이 많은데 북에서는 어디에서 그런 일을 하는데요?

어떻게 물어도 답은 청산유수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조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디요.

 

겪은 사람은 알겠지만, 실무회담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당일 해거름에 처음으로 협상 풍경을 보았는데, 삼십분쯤 지나자 머리가 지끈거려 어서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업단 출범식 장소를 놓고도 이선생이,

평양에서 할 경우 주체탑, 만경대 이런 방문지들이 남쪽 정서에 불편한 건 사실이지요.

하는 순간 곧 반격이 왔다.

아니 이선생, 서울 가면 워커힐호텔인가 뭔가에 재우곤 하는데, 거 전쟁 때 공 세웠다는 미국 장군 이름 밑에 우리가 머리 숙이고 들어가게 하는 건 뭐라 답하겠소?

사사건건 충돌. 민족에 대한 애착들이 진정한 것이려면 딴지를 걸어서는 안되는 사안까지도 상습적으로 다투었다. 그 일도 마찬가지로, 그무렵 우리 인쇄업자들은 줄줄이 망하고 중국이 세계시장을 거의 삼켜가고 있었다. 홍콩의 기술과 대륙의 노동력이 뭉치자 인건비가 비싼 나라들은 아예 경쟁이 되지 않았으니, 우리 출판업계도 살아남으려면 안정된 제작처를 확보하는 것이 큰 숙제가 되었다. 중국의 독점이 완료되면 단가를 올릴까 걱정, 배달사고가 날까 걱정, 물량을 제때 대지 못할까 걱정. 내가 다니던 출판사도 모처럼 터진 베스트쎌러를 그런 문제로 수명 단축시킬까 염려하고 있었다. 때맞춰 개성공단이 열리자 돌파구를 찾으려는 업계 사장들이 실무단을 구성하고, 북쪽도 국책사업이 될 수 있다는 제안에 솔깃해서 받아들였다. 그랬으면 남쪽은 기술을, 북쪽은 인력을 보태서 인쇄단지를 만들고, 북쪽은 생산을, 남쪽은 영업을 잘해 유럽 물량까지 끌어오도록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뿌리가 다른 두개의 정부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좀처럼 의기투합이 어려웠다. 그날도 부지 물색을 위해 중고 승합차 두대를 보내느니 마느니, 금강산에서 수령할 수 있느니 없느니 옥신각신하다가 전년도의 합의가 이행되지 못한 문제를 건드려 끝내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단장님, 전 자본가예요. 장사꾼의 미덕이 뭔지 아세요? 자, 담배가게 주인은 손님이 돈을 내면 어떤 일이 있어도 담배를 건네요. 전쟁이 나도 줘요. 비가 갤 때까지 기다려달라, 눈이 오니까 미루자 이런 게 없어요. 이걸 보장해야 사업이 되지요.

어허, 선생 아직 꿈꾸시누만. 개성공단 열어주니 남쪽 신문에서 뭐라 썼는지 아오? 피 한방울 안 흘리고 백오십 키로를 진주했다, 이런 보도 못 봤다 안디요? 자본가님 말씀 좀 들어봅세. 이거 어드러케 생각하오? 정치를 이렇게 눈 감는대서야, 어데.

싸우는 소리는 회의록에 담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열전이 시작되면 위생실(화장실)에 가는 척 회의장을 빠져나와 딴청을 부리고는 했다. 그날도 슬그머니 새서 아래층 현관에 있는 선물 판매대를 구경하는데, 들쭉술, 송이버섯, 도라지 들 틈에 생뚱맞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네오 비아그라. 순 조선산(産) 정력 강장제.

이상한 일이다. 남쪽이라면 실망할 이런 물건들, 윤리 혹은 도덕심 같은 걸 방해하는 사물이나 현상을 그곳에서 발견하면 왜 그리 반갑고 구원받는 느낌까지 드는지. 해서, 북쪽 이미지와 도대체 연결되지 않는 물건을 신기해하다가 먼발치에서 훔쳐본 서순아에게 된통 퉁바리를 먹었다.

어! 시인선생께서 뭘 봅네? 너무 엉큼하디 않습네까?

얼른 물러섰지만 서순아는 눈 하나 까딱 않고 다그쳤다.

선생께서는 얼굴에 시를 씁네까? 어째 제 눈길만 닿으면 양 볼에 빨갛게 저녁노을이 차례진단 말입네다.

아, 그때 그 분위기. 뒤쪽 창에 흘러든 저녁빛으로 실내가 온통 물들어 있었다. 내 얼굴도, 서순아의 봉긋한 가슴패기도, 뒷짐을 진 채 거들먹대는 보장성원(진행요원) 정철 선생의 뒷모습도 모두 붉은 덩어리가 되었다. 그 속에서 너무도 쉽게 공통된 정서를 나눌 수 있었던 일은 내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옛 마을을 되찾은 것 같은 감동을 주었다. 역시 먼저 건드린 것은 서순아였다.

선생께서는 어떤 시인을 좋아합네까?

김소월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잊었노라,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이런 거. 영영 잊지야 못하지만, 그래도 서운하여, 나중에 찾아오면 그날부로 잊었노라 하잖아요.

와, 동감입네다. 전 「실버들」이 젤이야요. 봄에 놓치면 꼭 가을에 외롭게 되디 않아요?

이때 정철 선생도 끼어들었다.

서동무는 실버들을 천만 사(絲)나 늘여놨다는 거, 그러고도 가는 봄을 못 잡는다는 거이가 뭔 줄 압네?

기러는 참사동지는 압네까?

고럼, 연 날리는 실 있디? 고게 세 겹을 꼬아 만든 삼합사(三合絲)디. 외가닥 실 줄기가 천만 사가 되자나면 얼마나 많갔어? 옛날 대동강변에서네 장정 떠나는 사내한테 여인네들이 버들개비를 꺾어줬디. 기리타문 한그루마다 천만명씩은 이별해도 정표를 줄 수 있다 말이디. 기런데 고게 아무리 많아도 가는 봄만은 붙잡지 못하드란 뜻 아니가서?

여기서 그 설명을 어떻게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지 모르겠다. 김소월 이야기가 그렇게 꿈속처럼 지나가고 한참 뜸이 든 후 둘만 남았을 때 내가 뭔가 전해주고 싶어 속에서 안달이 일었다. 말을 꺼내려 해도 입이 안 떼이고 몸에 지닌 것도 내놓을 게 없었다. 떠오르는 거라곤 회의자료를 꺼낸 가방에 남은 새우깡 한봉지가 다였다. 밤에 먹을 캔맥주 안주로 산 거라 초라하긴 하지만,

이거 드실래요?

전 과자를 먹을 만큼 착한 나이가 아닙네다. 한데, 나선생은 인민학교 운동장을 안 떠나고 어른 됐습네까?

그래도 봉지를 열다가 안 뜯어지자 바람을 터뜨렸는데 뻥튀기하듯 터진 부스러기가 그만 그녀의 온몸을 덮고 말았다. 아이구, 어쩌지? 황급히 달려들어 털어댔지만 가루가 옷속 깊이 배어서 털수록 보푸라기만 일었다. 나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얼굴이 하도 달아서 정신을 일시 놓았을 때, 서순아가 내게 아주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무 기습적이어서 붙들 새 없이 증발했지만, 그건 분명 도발이었다.

사내가 둘러붙이지도 못하고 어찌 바보같이 교통보안원에게 걸린단 말입네까? 그케서야 가족들 배 안 곯리겠습네까?

네?

 

늦가을

 

인간이 언제 구원을 경험하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세상의 끝에 닿았을 때 그 문턱이 보이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저 옛날 느티나무 밑에서 싸우던 우리 조무래기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로 싸웠던 게 틀림없다. 삶의 시간에서 언제나 난처하고 존재가 구차스러우며 이승이 거북할 때마다 나는 볼을 붉혔다. 내게서 떼어 없애고 싶은 그 부끄러운 내면의 배설물을 사랑받은 경험은 얼마나 강렬한 환희를 주었는가? 나는 북에 다녀온 후, 내색은 않지만 눈을 감으나 뜨나 서순아의 짙은 향기가 코를 찔러서 수많은 날을 혼자 벌처럼 웅웅거리고 나비처럼 흐느적댔다. 그로 인해 그해 가을은 그렇게도 빨리 왔다가 알은체할 틈도 안 주고 가버렸는지 모른다. 여름내 곁에 머물던 대기의 열기, 습도, 푸른 이파리, 이런 것들이 우수수 빠져나갈 때, 나도 어디론가 가고 싶고, 무엇인가 그리워지며, 자꾸만 설레던 기억이 새롭다. 서순아 얘기를 김새하지 않고 들을 만한 친구가 내게 있는지, 어떤 날은 휴대전화에 등록된 이름들을 하루에 다섯번이나 점검한 적도 있었다. 아, 기억한다, 그날밤.

만찬중에 술이 돌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식당에서 일하던 복무원들이 차례로 노래를 부르고 기타 연주를 하더니 흥이 오르자 남쪽 손님들을 끌어다가 춤을 추었다. 영락없는 탁아소 풍경이었다. 나는 붙들릴까 두려워 뒤쪽 테이블로 피해 앉았는데, 서순아가, 오~데로 숨습네까? 하면서 다짜고짜 팔짱을 끼었다. 나가면서 쩔쩔맸더니 잡도리를 할 듯이 눈을 흘겼다.

남쪽에서는 춤도 안 배웁네까? 저고리가 춤추자는데 피한대문 남쪽 동무들은 잘했다고 찬양합네까?

그러면서 내 어깨를 붙들어 세우자 젊은 남녀가 블루스를 추는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남쪽 손님들이 일제히 와, 하는 함성을 터뜨리고, 북쪽 실무단에서도 박수들을 쳤다. 단장선생이 보내는 감칠맛나는 응원이 귓전에 닿았다.

늙은 사자가 갈기를 뽐낸들 어데 쓰네. 고조 젊은 게 보배디. 와, 그림 예뻐 울고 싶다야.

나는 두 뺨이 달아올라서 떨어져나갈 지경인데 서순아는 아랑곳없었다. 18세기 창법 같은 소리로 노래도 했다. 휘휘휘 호호호 휘휘 호호 휘파람- 북쪽 가요에 맞춘 탁아소 무용이지만 어디서 추었던 춤보다도 성적 긴장감이 크게 일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최대한 가까웠을 때 내가 슬쩍 물었다.

괜찮아요?

서순아가 실눈을 만들며 뾰루퉁하더니 귓속말로 답했다.

내가 좋아 추는 걸 누가 막습네까?

아, 그 낮고 빠른 속삭임.

 

하지만 나는 이내 자중해야 했다. 북쪽 처녀들과 그렇게 노는 것은 남쪽에서 국가적으로 꽤 큰 잘못에 속했다. 언론이 그것을 실감나게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다녀온 지 얼마 안되어 정치인들이 공단 시찰을 갔던가? 식당에 들러 유명 국회의원이 복무원과 춤추는 것을 남쪽 기자가 포착했단다. 곧 그에 대한 여론이 일어서 온 나라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무려 오십수년 전에 월북자가 있었다는 가족 비사까지 까발려졌다. 이때 나는 두가지로 절망감에 싸였다. 하나는, 정치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였다. 매번 느끼는 바지만 정치 이야기는 항상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맥락들로 가득해서 전후좌우가 파악되지 않는다. 그때도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그 사진, 장관까지 지냈다는 국회의원의 팔을 잡고 예의 탁아소 무용의 한 장면을 만들어낸 복무원은 옆모습만으로도 달아날 데 없는 김연정이었다. 저 처녀가 붙들면 못 빼지, 나도 몰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다. 그런데 그걸 두고 다른편 정치인들이 마치 전쟁이라도 터진 듯이 성토를 하고, 반공연맹 노인들이 가스통 시위를 했다. 또 하나는 바로 그 점, 사람들은 왜 그토록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가 하는 것인데, 내가 알 일인가? 북쪽 문제만 나오면 사람들의 뇌가 오십년씩은 퇴행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하여튼 나도 그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서순아와 춤춘 댓가를 치렀다. 그날 합의된, 중고 승합차 두대를 제공하기로 한 실무가 내게 떨어졌는데, 우잉? 눈 좀 맞은 걸로 그렇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다니! 이러는 걸 엄살이라 해도 좋다. 아시다시피 중고차를 사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으니까. 나는 거의 새것에 가까운 승합차 두대를 반값에 골라 곧장 금강산으로 가고자 했다. 한데, 휴전선을 넘으려면 차적이 말소되어야 했다. 이선생이 시키는 대로 통일부로, 법무부로 뛰어다닌 결과 그 업무가 구청 소관이라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게 알았다. 그러나 담당 계장이 정부부처 어디에선가 협조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처리할 수 없다고 버티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민원을 들어주고 싶지만,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어야잖아요?

다시 이선생을 앞세워 문화부, 행자부, 국정원까지 찾아가 하소연했지만 다들 말로만 괜찮다 할 뿐, 공문 발송은 할 수 없다고 잘랐다. 결국 해당 구청장을 면담하여 막무가내로 농성을 하다시피 해서 해결을 보았다. 그러고는 대리기사 둘을 사서 금강산으로 보내는데, 휴전선은 북쪽과 유엔군의 공동 관할이므로 하루에 두번, 신고된 시간이 아니면 아무도 통과할 수 없었다. 겨우 서류를 갖춰서 승합차가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는 것을 보고 돌아온 지 두시간 만에 연락이 오기를, 한대가 비무장지대 안에 멈춰 섰다는 것이었다. 맙소사, 연료가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을 계산하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 이선생에게 알렸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친구들 고장난 차량을 보냈다고 길길이 뛸 게 뻔한데 이 난국을 어찌 타개하지?

북쪽을 상대하는 일은 그렇게도 숨이 막혔다. 남쪽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북쪽에 적용하면 엉뚱한 순간에 지뢰를 밟는다. 가령, 첫날 점심 때 다들 냉면을 먹기로 했는데, 강사장이 전날의 과음으로 속이 쓰렸던지 혹시 소머리국밥 같은 건 없나요? 묻자, 신참내기 복무원이 기겁을 하여 토할 듯한 반응을 보였다. 마침 가벼운 농담들을 하던 참이라 보장성원이 깔깔 놀렸다.

점잖은 분께서 소머리가 뭡네까? 머리라 할라문 인격이 담겨야디, 가醉 같은 건 대가리라 안합네까? 그럼 소대가리국밥이라 해야 맞디요. 이거 언어생활에 주체가 안 서서리 생겨난 현상이란 말입네.

이런 불통은 시인에게도 있었다.

나선생, 최근 시집이 뭐랬디요?

내 워크맨 속의 메콩강,요.

워크맨이 무시깁네?

녹음기요, 들고 다니는 거.

거게 메콩강이 흐르는 건 무신 조화입네까?

뜻 같은 거 없어요. 다다를 수 없지만 그리운 곳, 아니, 언젠가 흘러간 어떤 것.

압록강은 어데가 모자라서 외국 강입네까? 거 민족형식에서 너무 멀리 간 거 아닙네까?

이렇게 전제가 다른 이들에게 결백을 보이기 위해서는 도리 없이 새 차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되돌아온 중고차는 어떻게 처리한다? 차적이 말소되어서 서울에서도 탈 수 없었다. 고물을 보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할 겸 그 차도 되돌려 보내는 게 상수였다. 결국 새 차 한대를 덤으로 주고 나서 이선생이 했던 말이다.

나시인, 힘들지? 저치들하고 씨름하다 보면 민족이 다 뭐야. 울화통이 터져서 엎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또 달라진다고. 서로 참고 꼬드겨서 이 악순환을 끝내야지. 민족을 이렇게 놔두는 건 자식들에게 죄가 되지 않겠어?

하지만 나는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그저 경쾌하게 일갈하기 좋아하는 우리 사장님과 얘기할 때도 나는 북을 감싸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논리 부족으로 졌다.

북쪽을 위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어. 타락한 시장주의로 오염시키는 거. 안 그러면 그 사람들 겨울 몇개 못 나고 얼어죽어. 얼마나 추운 나라니? 일단 살고 봐야지.

그렇긴 했다. 가을이 저물어가면서 머잖은 날에 나는 핏방울까지 시리게 하는 찬바람의 나라를 목격하게 되었다.

 

한겨울

 

마른 수숫잎이 스러지는 자리에서 여우 울음소리가 흘러나와 매섭게 차창을 흔드는 초겨울의 미명 속에는 새들도 고구려 장수처럼 투구를 쓴 듯이 난다. 인간이라고 다른 별에서 사는 생물인가? 세한의 복판을 향해 손을 호호 불며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벌써 남쪽에서 석탄을 실어 보내는 화물차량이 즐비했다. 군데군데 눈이 걷힌 지역에는 검은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멀리서 보니 그 뒤편에서 노루 두마리가 데이트를 하는지 이마를 맞대고 놀고 있어서 나는 여러차례 속도를 늦추었다. 한참 만에, 그게 동절기 배급을 타러 나온 인민학생 형제가 바람을 피하느라 논둑 아래 앉아 있는 장면임을 알아차렸는데, 누더기 같은 옷이 너풀거리는데다 등짝에 붙들어맨 책보자기도 짧아서 누런 살갗을 가리지 못하는 통에 노루처럼 보였던 것이다. 탐나는 것은 토끼털로 보이는 귀마개밖에 없었다. 저렇게 살면서도 누굴 위해 찻길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잔뜩 숙이는 건지, 아주 가까운 거리를 지나갈 때야 모든 게 확인되었다. 어린 형제는 석탄배급을 마치고 난 자리의 검은 흙에 묻은 찌꺼기를 떼어내느라 땅바닥을 뜩뜩 긁고 있는데, 나도 몰래 눈물이 쪼르르 볼따구니를 타내려갔다. 원, 세상에. 십분도 안되는 거리에 음식물쓰레기와 비만과 겨울에도 뜨거운 실내온도와 싸우는 아이들이 있다는 걸 어찌 생각해야 하는지, 그러고도 인간은 존엄하며 세상은 무사할 수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저러는 손가락은 대체 얼마나 시릴까?

연말이라 다들 술에 절어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풍경을 놓친 사람은 없었다. 특히 해주가 고향이라는 황재하 사장이, 평소에도 심심치 않게 드러내던 애향심에 자극을 받아서 저녁식사 자리를 곡예처럼 아슬아슬하게 만들었다. 그는 속상한 마음이 내내 안 풀리는지 식당에 닿자 들쭉술을 돌리느라 법석이더니 거나해지자 폭발해버렸다. 서울 심야의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정이지만, 하필 보장성원들만 골라서 멱살을 쥐고 드잡이를 했는데, 그중에서도 보위부에서 왔다는 정철 선생에게 많이 엉긴다 싶더라니 기어이 문제를 삼는 지점까지 가고 말았다.

저 사람 왜 저러는 거디? 남쪽선생들, 저거 정치적 의도가 있는 행패 아닙네까?

이선생이 아니었더라면 큰 사단이 났을 것이다.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게 아니라 ‘원래’ 저래요. 북에는 그런 사람 안 살아요? 술과 애정관계가 깊은 사람.

이게 통일운동 십팔년차 선수의 개인기였다.

물론 남쪽에서도 주정이야 하갔디. 거렇다고 아무데나 물어제끼면 누가 참갔어?

위기 때마다 터지는 이선생의 임기응변은 아무리 봐도 감탄스러웠다.

저 사람 주정하는 거 많이 봤는데, 저러다 맞는 건 봤어도 때리는 건 못 봤어요.

이같은 정황을 황사장은 아는지 모르는지.

야, 평양 아새끼들, 안도현 알어?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희는 남을 위해 뜨거워본 적 있느냐, 알어? 오늘밤에 불 쬐는 놈 있으면 안 참을 거야.

이선생이 내게 긴급히 청했다.

당신이 몰래 끌어다가 운구 좀 하면 안될까? 장지까지 가려면 고생이 되긴 하겠는데.

결국 내가 숙소까지 옮겨야 했다. 다음날 중대협약을 맺을 시점이라 분위기가 경색되지 않도록 다들 어우러질 필요가 있어서 나만 혼자, 마치 저들의 조국 바깥에서 사는 사람처럼 조용히 빠져나간 것이다. 그래도 자칭 배달민족의 아저씨이신 황사장은 내게 얹힌 채 숙소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또 가서도 고래고래 소리쳤다.

야, 내 휴대폰 어디 갔어? 일산에 전화해서 맥주하고 통닭 가져오라 해. 오토바이로 십분이면 되잖어.

내가 그 고생을 하는 동안 선죽관에서는 노래하고 춤추고 난리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들 속으로 어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새우깡 사건 이후, 서순아에게 뭔가를 꼭 선사하고 싶은 마음에 경계를 넘을 때 소지품 검사에서 들키지 않을 것, 단둘이 있는 기회를 잡을 때까지 간수하기 쉬운 것을 고르고 고른 것이 립스틱이었다. 튀지도 모나지도 않는 익살이 쉼없이 터져나오는 그녀의 입술 색깔에 맞추어 연분홍을 골랐는데, 전달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날 밤에도 애먼 김연정에게 붙들려 한참 춤을 추고 있을 때, 종일 보이지 않던 서순아가 나타났다.

아니, 나선생, 오데서 다른 여자 손을 잡습네까?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단 말입네다이. 그케 하면 이제 밥도 굶기갔시오.

그로 인한 웃음소리가 가시기도 전에 서순아는 다시 어디로 샜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죽관의 선임복무원으로서 손님들이 올 때 마중인사, 갈 때 송별인사를 꼭꼭 했는데, 만찬을 끝내고 숙소로 향할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순아가 자주 모습을 감춘 이유를 안 것은 다음날 점심녘이 되어서였다. 전날 과음으로 숙취가 심했지만, 공단 식당을 이용하려면 꼭두새벽같이 일어나서 노동자들과 함께 움직여야 했다. 두 사람을 빼고는 다들 그 시각에 꿈속에 있었기 때문에 쓰린 배를 안고 선죽관에 닿았다. 황사장은 간밤의 기억이 살아나는지 몇배로 얌전해졌다. 이제 어지간하면 분위기가 매끄러워야 했는데 웬걸,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나를 대하는 북쪽 단장의 표정도 아리송했다.

시인은 인민의 망루대에 선 보초병이 아니가서.

곧 정철 선생이 나를 불러 뒷방으로 안내했다. 복무원들의 방이라 여자 냄새가 심한데, 한 여성이 아픈지 누워서 낑낑대고 있었다.

동무는 매달 그래서 어찌 견디오?

곁눈질로 흘낏 보니 얼굴 윤곽이 서순아였다. 직감에, 생리통이 심해서 녹초가 된 느낌이라 방안 공기도 무겁고 숨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거기에 정철 선생이 내게 등짐을 지우듯이 무거운 음성으로 압박해왔다.

단도직입적으루 묻겠시다. 시인선생, 어제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한 줄 압네까?

심장 근처에서 생명 바깥쪽으로 굴러가던 빛 덩어리가 마침내 철렁 하고 떨어져 발등에 닿는 기분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안 좋은 느낌이 와서 망설이지 않고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이가 죄송합네까?

전날, 그러니까 황재하 사장을 재우고 왔을 때, 북쪽의 박수길 시인이 아주 점잖게 농담을 걸어왔다.

나시인도 나중에 ‘철의 객뎜 북두성’이 그립겠습네다레.

마침 김연정이 ‘찔레꽃’ 2절을 부르는데 뜻을 모르겠어서 내가 묻자,

철의 객뎜은 철 따라 음식을 파는 식당이고, 북두성은 거기서 일하는 부엌데기디요. 어때, 서순아 동무레 잘생겠디요?

당장에 노래를 하는 사람은 김연정이건만 나를 보면 다들 이렇게 서순아 얘기를 했다. 그것은 나를 얼마나 안타깝게 했는지. 한 자석의 S극과 N극처럼 서로 끌어당기는 본성을 감춘 채, 남녀가 감쪽같이 수평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그러나 아무 전망이 없는 관계에서 마음만으로도 인간은 사랑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는 내 마음을 박수길 시인은 알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가기에 따라갔더니 어두운 벌판을 향해 소변을 누었다. 나도 나란히 따라하고 나서 돌아서는 소매를 붙들었다.

박선생님, 이거.

백달러짜리 지폐 두장이었다. 기념품이나 살까 하고 챙겨온 것을 오후에 박수길 시인이 판매대에 있는 상품을 몇번이나 들었다 놓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주려던 거였다.

남쪽 시인들이 드리는 겁니다. 책 사시라고요.

해놓고는 호주머니에 찔러주고, 등을 떠밀고 들어와버렸다.

정철 선생이 지폐 두장을 꺼내들고 다시 물었다.

시인선생, 이게 뭡네까? 우리 공화국 시인들은 순결하단 말입네다. 하마터면 돌아가서 자아비판할 뻔했디. 양식있고 존경받는 시인들까지도 남쪽에서는 이케 공화국 사람들을 망가뜨리랴고 물량공세합네까?

아마도 그 문제이리라 짐작은 했지만 딱히 변명거리가 없는 입장이라 그냥 앉아서 장광설을 기다리는데, 정철 선생이 갑자기 자객처럼 푹 찌르는 말을 했다.

한가지 묻겠시다. 여게 국정원 자격으로 온 겁네까? 내레 눈빛 좀 봅니다레. 감추는 기 뭐디요? 기레 그 눈빛, 남성의 야심입네까 사업적 야심입네까 정치적 야심입네까? 오해라문 어데 풀어보기요.

분위기가 꽤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전화 받으라는 전갈이 와서 정철 선생이 나간 후 이내 거친 말투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 야, 전화는 왜 치네? …… 새끼, 무턱대고 전화 치고 지랄이네. 기럼 난 어케 하갔어? ……

그 틈에 죽은 듯 누워 있던 서순아가 담요를 제치고 빼꼼 얼굴을 내밀어서 시인선생! 하더니, 감추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해서 푸시라요, 하고는 다시 얼굴을 쏙 묻어버렸다. 정철 선생이 돌아오자 나는 하는 수 없이 이실직고를 하였다.

첫날 박수길 시인 모친상 얘기를 들었고, 같은 시인으로서 부조라도 하고 싶어서, 남쪽에서 딱 시인들끼리 하는 만큼만 드렸어요. 그리고 제가 따로 가진 용건이 하나 있긴 한데, 그게 뭐냐면……

 

가는 봄

 

그때는 내가 출판사를 옮긴 지 삼년째였다. 그사이에 유럽 어린이소설 『매직 박스』가 출간되어 전년도에 200만부를 돌파했다. 경이적인 판매 실적을 기록한 대형 베스트쎌러가 나온 건데, 전체 20권 중 12권이 출간된 상태라 얼마가 더 팔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해적판이 돌기 시작하여 갖은 방비책을 써도 근절되지 않으니 사장님이 복안을 내놓길, 책의 제작을 북쪽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종이질이나 인쇄상태는 안 좋겠지만 첫째, 화제를 일으켜 광고비를 절감시킬 테고, 둘째, 북쪽 종이에 북쪽 활자를 쓰지 않는 이상 해적판을 만들 수 없을 것이며, 셋째, 저자가 운영하는 ‘지구어린이돕기재단’에 기여한 공으로 판권 계약을 독점할 수 있는데다, 넷째, 장사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민족을 위하는 회사라는 이미지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래서 남쪽 실무단 선생들도 눈치 안 채게 이 사람 저 사람 간을 보았단 말입네까?

네.

기렇다문 보장성원을 만나야디, 대체 누구하고 기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네까?

민간교류로 분류되면 실패한다고 경제일꾼을 만날 수 있는가를 먼저 알아오라 했거든요.

기게 다입매? 좋시다. 솔직했으니 덮고 갑세.

정철 선생이 악수를 청하며 유감을 남기지 말자고 해서 나도 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정보요원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읽었던 사실이며, 개인에 대한 통제의 강도, 또 남의 눈빛을 포착하는 투시력에 소름이 끼쳤던 경험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후 북쪽 사람을 만나는 일에 급격히 흥미를 잃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서순아도 성격이 그럴 뿐 나를 대수롭게 여겼던 것 같지 않고, 북쪽도 언젠가 그렇게 믿었듯이 내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어서 애정이 식어버렸다. 안주머니에 내내 담고 살던 립스틱을 회사 여직원에게 줬던 날이 최종적으로 미련을 접은 날이었을 것이다. 해서 빠른 속도로 나는 그곳에서 멀어지고 그곳은 내게서 멀어져 그 겨울을 끝으로 선죽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잊혀져갔다. 그리고 다시 맞은 봄에 이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어이 나시인, 뒤가 켕기는 시절, 그게 뭐야? 서순아는 당신이 그 시를 안다는데.

모르겠는데요, 했더니,

대관절 서순아를 어떻게 했기에 당신 안 온다고 난리야. 담주 수요일에 책임지고 데려가기로 했으니 시간 맞춰서 나오셔.

나는 이를 귓등으로 넘기려 했다. 출판사도 그만두었는데, 별 말을 다해서 데려가려 하는구나,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 여느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우선 방북자가 둘이고, 준비물이며 회의 의제 따위도 없었다.

우리뿐이야. 밤에 순아하고 연정이 노래나 실컷 듣자.

과연, 그때의 회합에는 북에서도 보장성원 둘만 오고, 남쪽도 일이 틀어질까 조바심치는 사장단이 송두리째 빠졌다. 오후 내내 한가해서 고려 성균관과 관음사, 선죽교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는 선죽관에서 푸짐한 술상을 차렸다.

한데 그날따라 무엇 때문인지 식당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서 술을 마셔도 노래하는 사람도 없이 맨숭맨숭했다. 뒷방에 공단 사람들이 회식을 하는지 서순아는 주로 그곳에 붙어 있고, 김연정만 우리 좌석을 오가며 조용한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서 공단 벌판 앞에 섰다. 저 멀리서 초봄의 이슥한 땅거미 속으로 저녁기운이 야물야물 몰려드는데, 뱀 꼬리 같은 어둠이 뭉쳤다 풀렸다 하더니 점점 사람 소리로 바뀌었다. 기러기떼가 날아가며 울음소리를 떨어뜨리듯이 군데군데 -까 -다 -여, 이런 끝발음을 하나씩 떨어뜨리면서 밀려가는 사람들. 집단이 움직일 때 샘솟는 기쁨에 도취된 소리랄까? 야근을 마친 노동자들의 음성에 한없는 신명이 실려 있었다. 어려서 장터에 유랑극단이 들어올 때 마을사람들과 함께 우루루 몰려가며 떠들던 생각이 났다. 그 속에 잠기면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 흐르던 맑은 강에 온 몸과 마음이 다 씻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어두운 곳에 파묻히는 발자국들은 행복할 것이다.

한참 그러고 있을 때 등 뒤에 몰켜선 바람이 교체되면서 여자 음성이 들렸다.

나선생은 왜 제 자리를 훔쳐 서 있습네까?

돌아보니 서순아였다. 그녀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이다가 얼른 억양을 바꾸어,

내가 여기서 「맘 켕기는 날」을 얼마나 읊어댔는지 알긴 하갔습네까?

저번 때 김소월 이야기를 나눈 후로 시집을 다시 읽었나 보았다. 두어 소절을 입 안에 담고 오물거리더니 제 풀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이, 사위가 깜깜한데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밤하늘에서 별빛이 거미줄을 타고 내려오다 급히 멈추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끝. 더는 아무 말도 못 듣고 돌아서 왔다. 왜 오라 한 건지, 그냥 해본 말이었는지, 다른 용건이 있었는지 그런 건 알 수 없었다. 그저 허망하게 남측 CIQ까지 통과해버린 뒤에야 이선생이 불쑥 그런 말을 했다.

그냥 잊어. 서순아 평양 가면 좋은 데서 일하게 될걸.

괜한 말을 침도 안 바르고 또 하는 것 같아서,

계속 놀리시깁니까?

했더니, 펄쩍 뛰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어, 서순아가 얘기 안해줬어? 다음주에 평양으로 돌아간다고 당신 얼굴을 한번만 보여달라고 하도 졸라대서 우리가 억지 회담을 하나 만든 거라구. 정철도 눈감아준 거고. 야, 이거 감동 좀 오네.

해놓고는, 한참 뜸을 들였다가 정색해서 말했다.

내가 물었어. 시인이 그리 좋아요? 아니래. 세상의 끝을 잃어버린 사람도 시인인가요? 이거라는 거야. 남쪽 사람은 죄다 미제 청바지를 입은 놀새들뿐인 줄 알았다가 당신 얼굴 빨개지는 거 보고 마음이 뒤집어졌나 봐. 깊이 빠져들까 한사코 비켜다녔다는구만.

머릿속에 흐르던 전류가 갑자기 거기서 뚝, 끊기는 것 같았다. 아!

그날밤, 집에 와서 헌책더미를 얼마나 뒤져서 김소월 시집을 찾아냈는지 모른다. 정신없이 펼쳐보니 매우 짧은 시였다.

 

오실 날

아니 오시는 사람!

오시는 것 같게도

맘 켕기는 날!

어느덧 해도 지고 날이 저무네!

 

4

 

인생의 어떤 순간을 우리는 언제 왜 떠나서 다시는 그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는지 모른다.

두해쯤 지나서 이선생과 마주쳤는데, 서순아가 평양으로 돌아간 후 선죽관 아가씨들도 행실이 변했다고 한다. 노래는 하지만 춤은 추지 않으며, 음식도 조금 깔끔해졌을뿐더러 장사 수완도 늘었다는 것이다. 머잖아 막사가 헐리면 그마저 철수할 거라 했다.

이선생은 그 모든 것을 아쉬워했다.

다시 만날 수 없겠지. 평양에 수없이 가봤지만 그렇게 헤어졌다 마주쳤던 예가 없어. 서순아는 이제 아가씨가 아닐지도 모르고. 인간에게 세계는 한번 사용하면 끝이라는 걸 왜들 모르고 사는지.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세상의 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득히 먼 곳,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서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금 마음이 켕겨오는 것을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