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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이시영의 시와 활력의 정치학

 

정남영 鄭男泳

문학평론가. 경원대 영문과 교수. 저서로 『리얼리즘과 그 너머』, 역서로 『혁명의 시간』 『문학이론입문』(공역) 등이 있음. nychung58@naver.com

 

 

예술은 더이상 결론이 아니야. 반대로 예술은 하나의 전제조건이야. 기쁨 없이, 시 없이 혁명은 더이상 있을 수 없겠지. 되풀이하지만, 예술은 혁명을 앞질러 구현한 것이니까.

-안또니오 네그리

 

 

1. 머리말

 

좋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사유의 촉발을 받는다는 것과 동일하다. 사유가 촉발되면 새로운 깨달음을 낳기도 하고 또 묻혀 있던 기존의 깨달음들에 새 빛을 던져주기도 한다. 『滿月』(1976)에서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2007)까지 이시영(李時英)의 시집 11권에 실린, 아마도 1000편에 육박할 시들을 읽으면서 나에게 촉발된 생각들은 실로 하나의 그럴듯한 시론 체계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다양했다. 나는 이것을 몇개의 주제-‘시와 그림’‘시와 시간’‘운문시와 산문시’‘시와 정치’‘시적 사유의 특성’ 등-로 나누어보았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에게 주어진 지면이 이것을 다 다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해야 했는데, 비교적 최근에 ‘김수영(金洙暎)의 탈근대적 정치사상’이라는 주제로 글을 한편 쓴 것을 단초로 하여 ‘시와 정치’를 선택했다.

김수영을 다룰 때에도 그랬지만, 내가 여기서 하려는 일은 시와 정치라는 별개의 두 사물을 연결시켜보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시영의 시가 가진 힘 그 자체를 일종의 정치적 힘으로서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이 힘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치’가 가진 힘, 즉 권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이 힘은 이 세상의 모든 권력에 맞서서 창조적인 삶을 지속시키는 노력의 바탕이 된다. 권력에 맞서기 때문에 정치적이지만 권력으로서 맞서는 것은 아니기에 전통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이지는 않다. 더군다나 군사독재 시절에 맹위를 떨치던 주권적 국가권력과는 다른 유형의 권력이 우리의 삶에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시 혹은 예술이 구현하는 종류의 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 주제의 선택에 작용했다. 이 힘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특히 스피노자를 크게 원용하였다. 만일 이 글을 이시영의 시들 중 몇편을 골라서 세밀하게 분석하는 식으로 썼더라면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분석의 결과를 ‘시와 정치’라는 주제로 말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의 도움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시는 읽는 이마다 특이하게 읽혀지기 때문에, 그 해석과 논의하는 방법 또한 독자의 수만큼 많을 것이다. 나의 것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2. 정동과 활력

 

시의 정치성을 시의 외부에서 찾지 않으려면 우선 시의 고유한 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이 힘은 스피노자가 ‘정동(情動)’이라고 부른 것의 구현에서 찾아질 수 있다.1 다음의 시가 정동을 설명하는 데 (동시에 이시영의 정동 구현능력을 일별하는 데) 적절할 것 같다.

 

대숲마을에 연기 오른다

참새떼 도르르 날아간다

하늘 매섭게 푸르다

-「명주 목도리 두르고 학교 가는 날」(『사이』) 전문

 

시의 본문만으로는 그냥 매우 간결한 그림인 듯하다.2 그러나 제목과 연관시키는 순간 갑자기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이 그림이 명주 목도리를 두르고 학교에 가는 화자의 기분으로 순식간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기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직접적인 진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기분이 독자에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 가득 차 있는 이 기분 혹은 기운, 이것이 정동이다.

일반적으로 정서 혹은 감정(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주체-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에 귀속된다. 이런 경우 정서 혹은 감정은 그 주체의 상태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동은 이러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이다. 이러한 상태변화를 몸의 활력의 증가와 감소의 측면에서 본 것이 바로 정동이다.3 활력이 증가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정동들은 ‘기쁨’에 속하고 활력이 감소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정동들은 ‘슬픔’에 속한다.4 위의 시의 정동은 당연히 기쁨의 정동에 속한다.

화자에 대한 진술이 하나도 없이 어떤 기운을 전달하는 위의 시가 입증하듯이, 정동이 정서나 감정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주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이 주체에서 저 주체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체가 정동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정동이 주체에 깃드는 것이다. 정동의 옮겨감 혹은 전염이 흥미롭게 드러난 사례-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를 하나 들어보자.

 

먼 남쪽에서 아카시아꽃을 따라왔다가 하루아침에 벌농사를 망친 양봉업자 최씨가 곰들의 배설물을 증거로 들고 나와 내 이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TV 속에서 마구 핏대를 올리는데 글쎄 절도죄가 성립될지 모르겠다며 ‘뉴스 24’의 여자 앵커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고 시청자들이 웃고 무엇보다 발밑을 묵묵히 흘러가던 지리산 개울물이 큭큭 웃는다.

-「유쾌한 뉴스」(『은빛 호각』) 부분

 

“무엇보다 발밑을 묵묵히 흘러가던 지리산 개울물이 큭큭 웃는다”라는 대목에서, 그 이전에 불러일으켜진 웃음은 하나의 기쁨의 정동으로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지리산 개울물로” 옮겨가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주인공이라는 것이 있다면 전반부는 “벌통 40개를 작살”낸 지리산 반달가슴곰들일 테고, 후반부는 바로 이 웃음의 정동 자체일 것이다.

시인들은 단어들을 특이하게 배열하고 조합함으로써 단어들에 잠재적으로 들어 있는 정동들5을 결합하여 하나의 특이한 총체적 혹은 복합적 정동이 발생하도록 한다. 처음 인용한 시에서 총체적 정동은 “연기 오르는 대숲마을” “도르르 날아가는 참새떼” “매섭게 푸른 하늘”의 세 부분이 불러일으키는 정동의 복합으로서 나타난다.6 (특히 “매섭게”가 주는 저 기묘한 느낌이란!) 정동들은 이동적이기 때문에 마치 화학물질처럼 서로 섞여서 하나의 특이한 정동복합을 만들어낸다. ‘신나다’라는 일반화된 단어 하나로는 이 정동복합의 특이성을 감당할 수 없다. 이 단어는 그것으로 포괄할 수 있는 많은 특이한 정동들에서 그 특이성을 제거해내고 다 똑같이 만든 다음 그것을 모두 지칭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상 위의 시에 구현된 정동복합은 다른 무엇으로도 재현될 수 없다. 오직 이 시 안에서만 고유하기 때문이다.

정동의 이러한 전염성과 이동성 혹은 혼합가능성은 정동이 비재현적임을 말해준다. 주체든 객체든 어떤 대상과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단어들은 재현적 측면(대상과의 연관)과 비재현적 측면(정동을 불러일으킴)을 잠재적으로 다 가지고 있다. 이 두 측면은 별개의 사유양태를 나타내지만-재현적 사유양태를 스피노자는 ‘생각’(idea)7이라고 부르는데, 지각, 인식 혹은 지식이 이에 해당한다-실제로는 단어에서처럼 늘 서로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의 고유한 힘이 발휘되는 영역은 바로 비재현적 측면인 정동의 구현이다.8 이는 시에서 ‘생각’의 측면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9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분야들-과학, 철학 등-이 정동의 구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동의 배제를 그 우수성의 척도로 삼고 있는 반면에 시에서만 정동의 구현이 집중적인 노력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정동의 실제 사례들은 몸(사물)과 몸(사물)이 만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에 몸들(사물들)이 무한한 만큼 무한하다. 그리고 그것들이 혼합되어 만드는 정동복합 또한 무한하다. 세상에 같은 정동이란 없다. 그렇기에 이시영이, 그리고 다른 시인들이 산, 강, 들, 새, 나무, 하늘과 같은 소재를 반복해서 다루더라도 모두 다른 정동의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정동의 시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인이 상투형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시영은 이런 위험을 잘 알고 있다.

 

시를 쓰려면

온몸에 저를 실어

산 같은 무게로 바위 같은 몸짓으로 활활 타오르는

넋의 푸른 숨결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느 날 만년필 끝에서 쉽게 풀어지고 씌어지는 나의 시여

너에게는 피의 냄새가 없다

말의 탐욕만이 있을 뿐

관념의 허상만이 있을 뿐

살아있는 사람의 노여움 긴 긴 입맞춤이 없다

그 몰아치는 폭풍 속의 서늘한 눈빛이 없다

-「詩를 쓰려면」(『길은 멀다 친구여』) 전문

 

여기서 이시영이 “온몸에 저를 실어” 한탄하는 것은 바로 정동의 구현이라는 차원의 결여가 아니고 무엇인가! “관념의 허상”이란 정동의 구현이 동반되지 않은 ‘생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실 이시영에게도 별다른 변화 없이 단순히 반복된 느낌을 주는 시들이 없지는 않다.10 그러나 이시영의 시창작의 행로에서 우리는 계속 출현하는 새로운 표현들과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정동복합들의 행진을 볼 수 있다.

“돌짐승처럼 입 벌리고 선 사람아”(「면회」), “첩첩의 눈이 뚫릴 때까지/돌에 눌린 가슴을 찾아”(「引火」), “돌덩이 같은 달 파랗게 박힌 하늘로”(「갈 길」), “어쩌자고 앞산에 숯불 같은 아들은 숨겨놓고”(「각설이」), “숨은 눈들이 툭툭 튀어 얼어붙은 나라”(「사할린에서 돌아온 어느 동포」), “허리 부러진 자유”(「採炭」), “피 팔아 밝은 달아”(「어머님의 손을 놓고」), “갱엿 같은 말들”(「신록 앞에서」), “강한 힘줄의 산이 아기처럼 풀릴 때가 있다”(「雉岳을 보며」), “이제 막 무릎을 털고 일어서는/늙은 산의 먹물 같은 외로움”(「역사에 대하여」), “재처럼 뜨거웠던 얼굴들이여”(「달밤에」), “저녁이 오면 뒤꼍에 웅크렸던 산 그림자 파랗게 날이 서는 집”(「늙은 집」), “두 눈만 내놓고 캄캄한 마을”(「태풍 전야」), “터질 듯한 네 까만 눈이 꽉 차도록”(「첫 눈」), “아랫배까지 시원한 웃음소리”(「자랑스런 날」), “쨍그랑 하고 돌멩이 하나 깨어지는 소리”(「신새벽」), “아침 햇살에 톡톡톡 빛나는/비둘기의 날랜 입이여!”(「탁마」 전문), “꼬막들이 반찬가게에 와서까지 입을 꼬옥 다물고/푸른 바다를 토해내고 있다”(「바다의 시위」 전문) 등등.

이러한 행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는 정동이란 활력의 증가와 감소를 말한다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정동이란 활력의 발휘이다. 발휘된 활력은 시에 고스란히 담긴다. 바로 이 점이 다음 절에서 말할 이시영 시의 정치성에서 중요한 핵심이 될 것이다.

 

 

3. 활력 대 권력

 

이시영의 시들 중에는 소재상으로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와 연관된 시들이 꽤 많다. 이른바 ‘좌우갈등’과 연관된 시인의 개인사를 소재로 한 시들, 시인의 감옥경험을 비롯한 민주화운동과 연관된 소재를 다룬 시들, 그리고 국내 혹은 국외의 빈자들 및 투사들의 삶을 공감어린 시선으로 노래한 시들 등. 이런 시들의 존재는 그가 매우 ‘정치적’이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데 시의 정치성이 이렇게 소재상의 정치성에 국한되는 것일까? 아니, ‘정치적’이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 혹은 근대적 의미의 정치란 권력의 인정을 전제로 한다. 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는 모든 제도권 정당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국가권력의 소멸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레닌의 경우에도 “정치적 사유 전체는 실상 기존의 권력 및 그 주권적 정의와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11 이시영의 시들에는 권력에의 지향이 보이지 않는다. 국가에 대해서 그가 비판적임은 「국가」(『이슬 맺힌 노래』)에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래서 권력 대 권력의 구도는 이시영 자신의 것으로서 제시되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구도가 존재한다.

 

아침 산길의 눈밭 위에는 머리가 상한 참새 두 마리가 서로의 날갯죽지에 핏빛 새근대는 부리를 묻은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 새들의 영혼까지도 앗아가버리는

무서운 계엄군이 진입하던 날

-「새」(『길은 멀다 친구여』) 전문

 

미약하기 짝이 없는 죽은 참새가 군사적 형태의 권력인 계엄군과 대조됨으로써 권력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새들의 영혼까지도 앗아가버리는”이라는 구절보다도 “잠들어 있었습니다”라는 구절이 더 힘있게 느껴진다. 단순히 상대의 무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언젠가는 깨어날 것 같은 정동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삶의 활력(생명의 힘)의 영원한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권력의 존재가 시의 시야에 직접 들어와 있지는 않은 시를 한번 보기로 하자.

 

나는 차라리 기운이 다한 뭇 생명 가진 것들의

찬란한 해방을 꿈꾸어본다

지는 꽃은 지게 하라

지금 죽어가는 나무는 스스로 죽게 하라

꽃이 지고 나무가 죽는 자리에서

죽은 땅도 자신을 도려내고 새 흙을 품는다

-「終焉」(『길은 멀다 친구여』) 부분

 

여기서 “찬란한 해방”이라는 구절은 늘 새로 생성되는 삶의 활력에 확연하게 정치적 색조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이란 삶에 종속된 죽음이다. 이에 반해서 권력은 삶을 종속시키는 죽음이다.) 물론 “찬란한 해방” 같은 어구의 존재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어구가 없는 시를 하나 더 보자.

 

어느 햇빛 좋은 가을날

나는 강가로 나가 굽이치며 흐르는

맑은 물의 한 자락을 억세게 움켜잡았다

아, 손아귀를 빠져 나가려고 아우성치는

맑은 물 무늬의 칼날 같은 파닥임

-「斷面」(『길은 멀다 친구여』) 전문

 

여기서 시인이 탁월하게 구현하고 있는 정동의 실체는 무엇인가? 물의 활력이다. “아우성치”고 “칼날 같”이 “파닥”이는 물의 활력! 만물에 들어 있는 이 삶의 활력에 입각하는 것, 이것이 이시영 시의 정치성의 핵심이다.

삶의 활력을 핵심으로 하는 이러한 정치(성)를 일단 ‘활력의 정치(성)’라고 부르기로 하자. 정치철학에서 이것에 가장 가까운 것은 ‘삶정치’(bio-politics)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20세기 후반에 푸꼬(M. Foucault)에 의해 창안되고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에 의해 변형되어 다듬어진 것이지만, 그 내용상의 핵심은 스피노자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피노자에게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은 무력한 자들, 즉 활력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활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슬픔(활력의 감소)을 바탕으로 힘을 구축한다. 스피노자에게 정치는 특이한 몸(활력)들이 모여서 더 큰 몸(더 큰 활력)을 구축하는 문제이며, 따라서 기쁨(활력의 증가)의 정치이다. 그렇기에 스피노자적인 ‘더 큰 하나됨’은 ‘국민’으로 통합되는 것(주권적 권력에 의한 통합)12도 아니고 심지어는 일반적인 의미의 계급으로 통합되는 것(이해관계의 일치)도 아니다. 그 반대로 ‘자유주의적으로’ 그냥 뿔뿔이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13 이시영의 시들이 함축하는 정치는 바로 이러한 기쁨의 정치이다.

 

 

4. 성장

 

이시영이 초기부터 기쁨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단계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滿月』에 들어 있는 시들 중에 몸의 해체(절단)가 슬픔의 정동으로 제시되는 시들-「삼밭」 「침묵 귀신」 「강냉이」 「고추밭에서」 등-은 그 이미지의 강렬함이 돋보이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서는 스피노자가 말한 첫째 종류의 인식, 즉 혼란스러우며 부적실한 인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14 몸의 해체를 낳는 파괴적인 원인-삶에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파괴적 힘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인식은 가시화되지 않고 그 원인이 몸에 남긴 부정적인 결과(몸의 해체)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시영의 초기 시들에는 다른 측면도 있다. 예컨대 첫 시집의 대표시 「滿月」을 보면 몸의 해체에 해당하는 구절들(“몰매 맞아 죽은” “썩은 덕석에 내다버린 아이들과 선지피”)과 함께 몸의 기쁜 섞임에 해당하는 구절들(“송기를 벗기는 손톱은 즐겁고/즐거워라” “바람처럼 푸르게 내 살 속을 흐른다”)이 공존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첫째 단계의 앎에서는 이렇듯 기쁨과 슬픔의 정동이 모두 동반된다. 다만,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몸에 남긴 결과로만 이해된, 우연한 것이다. 이 중에서 기쁨의 정동이 도약판이 되어 다음 단계인 적실한 인식으로 나아간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15 ‘어머니’가 이시영의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말(염무웅, 『바람 속으로』 해설)은 과거에 속했으나 시인에게는 오직 기쁨의 정동을 낳는 ‘어머니’가 시적 사유의 도약판으로서 늘 작용했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어쨌든 이시영의 시인으로서의 성장은 첫 단계의 앎에서 다음 단계의 앎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첫 시집에 이미 이러한 움직임이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예컨대 「여름 속에서」 같은 시에서는 몸의 해체가 죽음의 암울함이 아니라 기쁜 몸의 섞임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활력이 생성되는 방식으로 상상되기 시작한다(“묵은 귀 잘라버리고/햇볕에 잘 울리고/빗속에서 싱싱한/귀가 돋았으면” “썩은 눈 빼어버리고/나뭇잎에 닿으면 고요히 오므리고/쇠를 보면 한 자는 뛰쳐나올/커다란 눈을 가졌으면”). 이후에 몸의 ‘슬픈’ 해체에 해당하는 시들은 자취를 감추며, 과거에 속하는 또다른 요소였던 기쁜 몸의 섞임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하나됨을 재창조한 「섬뜸」(『은빛 호각』), 「풀꾼」(『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같은 시로 발전한다. 특히 「풀꾼」에서는 자연과의 하나됨이 몸의 해체를 치유하고 활력을 증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음이 인상적으로 제시된다.

 

어렸을 적 방아다리에 꼴 베러 나갔다가 꼴은 못 베고 손가락만 베어 선혈이 뚝뚝 듣는 왼손 검지손가락을 콩잎으로 감싸쥐고 뛰어오는데 아버지처럼 젊은 들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다가서며 말했다. “괜찮다 아가 우지 마라! 괜찮다 아가 우지 마라!” 그 뒤로 나는 들에서 제일 훌륭한 풀꾼이 되었다.

-「풀꾼」 전문

 

마치 이상향을 그린 듯한 이러한 시들을 과거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기보다는 현재의 삶에 결여되어 있는, 혹은 잠재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권력에 의해 억눌려 있는 것(기쁨의 큰 하나됨)에 대한 모색-이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다-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것을 모색으로 보는 이유는 시인이 과거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미래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추출하는 능동적 선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新綠을 보며」(『滿月』)는 이 선택 중에는 창조적 망각-새로운 생성의 조건으로서의 망각- 또한 작용함을 보여준다.

 

봄바람에 잘린 머리를 흔들며

생각난 듯 또 깜빡, 시작의 잎을 피워놓고는

이내 시작을 잊고 생각을 잊고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新綠을 보며」 부분

 

또한 「바람아」(『滿月』) 같은 시가 보여주듯이 그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곳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음 땅”)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장하면서 이시영 시인의 기본적인 어조는 더 차분해진다.16 이는 시인 자신이 해로운 정동으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차분함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기쁨의 정동에 해당한다. 이는 슬픔의 정동이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그것의 해로움에 영향받지 않게 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곳도 집이라고 호송버스가 인덕원 사거리에 이르면 마음이 턱 놓이고 가슴은 뛰는 불빛들로 따스해지는 것이었다.

-「집」(『바다 호수』) 부분

 

이러한 성장의 연장선상에서 마침내 이시영은 슬픔의 정동이 아무리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삶의 활력을 찾아내어 기쁨의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시인으로서 자신을 당당하게 세우게 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인식의 세번째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둘 다 인생을 마감하는 큰 행사의 하나인 죽음 앞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이 위엄스럽고 또 유쾌해 보여 좋았다.

-「아주 특별한 죽음의 의식」(『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부분

 

“육체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영혼의 기쁨이 말할 수 없이 커지는 게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지요.”

-「행복」(같은 책) 부분

 

존 디 스콧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형집행 5시간 전이다.

-「다섯 시간 전」(같은 책) 부분

 

이제 이시영은 만물에서 활력을 포착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다. 그가 말하는 “우주의 새벽 열림의 순간”(『사이』 후기)의 포착에 바쳐진 단형 서정시들도, 인물들을 노래한 서사적 성격의 시들도 그 핵심은 결국 활력의 포착이다. 예컨대 70~80년대 민주화투쟁의 과정에서 일어난 에피쏘드들을 인물 중심으로 다룬 그의 시들에서 부각되는 것은 권력과의 물리적 힘 대결에서의 비대칭성(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주체들이 보여주는 여러 양태의 활력이다.17 소설가 이문구의 유치장에서의 입담이 “아침에 구류 만기로 출소한 실업자 청년”이 “저녁에 파자마바람으로 다시 들어”오게 할 정도였음을 이야기해주는 「구류」(『은빛 호각』), 계엄법 위반으로 구금된 세 시인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함으로써-“오리처럼 심하게 뒤뚱거렸다고 한다”-오히려 그 인간적 힘을 부각시킨 「1980년 여름 종로경찰서」(『은빛 호각』), “만약 안 물러가면 안 물러가는 걸로 간주하겠다!”는 말로 시위대와 경찰 모두를 웃긴 미래의 소리꾼 이야기를 담은 「경찰은 물러가라!」(『바다 호수』), 구치소 안에서 설날에 제사지내던 이야기를 담은 「K 이야기」(『바다 호수』) 등등.

이렇듯 그의 눈은 활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된다. 아주 조그만 것에도 존재하는 이 활력이 이시영에게는 신의 존재를 나타낸다.

 

잎새들이 바람에 온몸이 뒤집힐 듯 흔들리는 건

신의 뜨거운 숨결이 거기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까

-「예감」(『무늬』) 부분

 

스피노자에게도 이시영에게도 신이란 사물의 활력 외부에 있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사물에 내재한다.18 따라서 모든 사물은 활력의 담지자라는 점에서 신의 부분적 양태, 즉 신의 일부이다. 그리고 신의 일부로서 모든 사물들은 서로 통한다. 몸들(사물들)의 기쁜 섞임이 갖는 궁극적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19 인간의 몸과 자연 사물의 기쁜 섞임을 노래한 시를 하나 예로 들어보자.

 

저 나무에 바람 인다

잎새여 나부껴라

너 진 뒤 거센 바람 고요 뒤에 그 얼마 뒤에

우리 아기 연초록빛 발가락이 물든다

-「바람」(『이슬 맺힌 노래』) 전문

 

첫 두 행은 이 시가 발표된 시점에서 이시영 시인으로서는 약간은 상투화된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이 조그만 사물들에 들어 있는 활력을 구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3, 4행에 들어와서 이 활력은 무언가 꽉 찬 고요함의 분위기 속에서 “아기”의 몸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운동에서 고요로, 그리고 시각화된 스며듦으로의 정동의 변화도 잘 구현되어 있지만, 이러한 섞임은 이제 “아기”의 몸에 해체를 가져오지 않으며 파괴된 몸인 스러진 “잎새”에게서도 슬픔의 정동은 없다. 활력의 영원함에서 오는 기쁨만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시영 시들의 정치성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스피노자적이다.

 

 

5. 빈자와 활력

 

가난하고 세상에 제일 낮은 데 위치한 사람들에의 공명, 미약한 모든 존재들에의 공명은 이시영에게서 계속적으로 변함없이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무한한 영감의 원천”인 어머니가 빈자이다.

 

어머니는 30년대 이 땅의 가난한 방직여공이셨다

-「꿈」(『은빛 호각』) 부분

 

이에 따라서인지 시쓰기가 가난에 속한 것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시 한편을 써서 좋아라며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건들건들 가로수 길을 걸으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로 서러운 가난뱅이 같더라.

-「가난」(『아르갈의 향기』) 전문

 

그런데 만일 이러한 가난과의 동일시가 단순히 약자를 대상화한 것이거나 혹은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는 내재적인 것으로 파악된 활력의 정치와는 무관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의 시가 보여주듯이 초기에는 이런 요소가 없지 않았던 듯하다.

 

어떤 별들과 인간의 꿈은 깊이 상통한다.

밤이 오면 쓰라린 땅을 매맞아 버림받은 사람들이 지키고

그 위의 하늘을 별이 지킨다.

인간의 눈이 되고 싶은 어떤 별들은 지상에 내려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사람들의 상처에 살아 뛰며

자기 피를 주고, 오래 말없는 상처를

자기처럼 껴안고 자기 눈이 껌뻑일 때까지 반짝이다가

새벽이 동터오면 또 불 꺼진 영혼들을 찾아

아무도 없는 길로 내뺀다.

-「반짝이는 것은 무엇인가」(『滿月』) 전문

 

이 시에서는 가난을 단순한 가난 이상의 것으로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려는 듯하다. 마치 ‘별’에 이미 부여된 초월적인 것이 기독교의 ‘카리타스’(caritas)처럼 위(외부)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작은 것 속에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들어 있는 힘-권력의 힘과는 다른 힘-을 발견하게 됨에 따라 이런 인위성은 말끔히 사라진다.

 

벌레들이 밤새도록 울면서

거대한 시멘트 담의 몇만분의 일쯤을 기어이 뚫어놓는다

어디서 모여 왔는지

아침이면 연두빛 코끝의 새끼벌레들이

그 구멍 속을 열심히 들락거리며

새 먹이를 물어 나르고 있다

 

햇빛 아래 시멘트 담을 뒤덮는

키작은 잔디들의 행렬이 파랗다

-「행렬」(『이슬 맺힌 노래』) 전문

 

여기서 시멘트 담을 뚫고 뒤덮는 힘은 결코 시인이 인위적으로 부여한 것이 아니다. 시멘트 담은 벌레들과 잔디들에게는 실제적 권력이며, 바로 그 점을 시인이 포착한 것이다. 이 시에서 제시된 것은 활력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설명이 된다. 시멘트 담은 그 자체로는 권력이 아니다. 돌 같은 단단함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제시되는 시도 있다.(“가서 새 힘으로 돌같이 뭉쳐야지,” 「사람들의 마을」 『滿月』) 그러나 시멘트 담은 벌레들과 잔디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활력에 장애가 되거나 한계를 부과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권력이 된다. 이러한 한계나 장애는 이 시에서 보듯이 오로지 활력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극복될 수 있다.

그런데 빈자 혹은 작은 것들의 힘이 활력과의 관계에서 왜 이렇게 특별한 의미를 띨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다른 것들이 활력을 가리고 있음을 잘 안다. 무엇보다도 ‘재산’이 그렇고 그 이외에도 지역감정, 성적(性的) 우위, 학력의 우위, 사회적 지위의 우위, 나이의 우위 등등 수많은 것들이 활력을 가리고 ‘힘’으로서 행세하고 있다. ‘가난’이란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활력만이 투명하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빈자란 결핍의 상태로서가 아니라 (따라서 동정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활력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존재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앞에서 인용한 시 「반짝이는 것은 무엇인가」의 ‘별’은 이 투명함의 상징일까? 또한 「引火」(『滿月』)의 “가난한 마음이 켜고 있는 불을 보아라” 같은 구절도 이 투명함을 나타낸 것일까? 논의의 이 시점에서는 그렇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의 빈자란 사회적인 계층으로서의 빈민층을 포함하지만 거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핵심이 활력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를 파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20 이렇듯 이시영의 정치성은 활력의 정치성인 동시에 빈자의 정치성이다.

 

 

6. 맺는말

 

한국은 언제부턴가 ‘사장님들’과 ‘부자들’이 풍성한 나라가 되었다. 이들은 ‘부자’를 대통령으로 세우기까지 했다. ‘사장님들’과 ‘부자들’의 헛된 풍성함이 만들어내는 두터운 소음과 자욱한 연기는 “가난하게 엎드린 사람들”(「사람들의 마을」)을 가리고 동시에 가난이 투명하게 나타내는 활력의 관점을 가리려 한다. 이러한 상황은 군사독재 같은 근대적 형태의 권력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권력이 우리의 삶에 깊이 침투했음을 의미한다. 근대적 형태의 권력이 삶의 활력을 밖으로부터 파괴하여 오히려 그 활력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했던 반면, 이 새로운 유형의 권력은 삶의 활력을 바이러스처럼 안으로부터 갉아먹어 무력화하고자 한다. 앞으로 이러한 권력과의 싸움이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싸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시영의 시들은 이러한 싸움에 나선 이들에게 큰 정신적 자원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어떤 힘에 입각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더 큰 몸의 창조를 통한 모든 몸들의 활력의 증가’)을 일깨워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시영의 시들은 우리를 활력으로 채우면서 우리의 가슴을 ‘가난한 가슴’으로 만들어준다. ‘가난한 가슴’을 가진다는 것은 결핍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활력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의 입김’을 보는 눈과 생명의 소리를 듣는 귀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萬象에는 쭉 찢어진 귀가 있어

시인의 산 눈빛이 거기 닿으면

어느 푸른 하늘에서도 생명의 은은한 종소리 쏟아지겠다

-「喝-어느 문학대담을 읽으며」(『길은 멀다 친구여』) 부분

 

우리 모두가 이런 의미에서 가난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시영의 시들에 담긴 정치학이 가리키는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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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은 스피노자가 라틴어로 ‘affectus’라 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영어나 프랑스어로는 보통 ‘affect’라 옮긴다.
  2. 이시영의 시들 중에는 이렇게 그림처럼 느껴지는 시들이 많다.
  3. 활력(活力)은 사실 ‘능동적 행동의 힘’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4. 기쁨과 슬픔은 정동의 두 사례가 아니다. 이 둘은 정동의 모든 사례들이 속하는 두 음조와 같은 것이다. 정동의 모든 실제 사례들은 이 둘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5. 단어에서 정동을 느끼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6. 이 부분들은 다시 세분될 수도 있다.
  7. 라틴어와 영어 모두 철자가 ‘idea’이다. 생각은 항상 어떤 몸(대상)에 대한 생각이다. 그래서 재현적이다.
  8. 재현적 요소는 언어보다 시각예술에서 덜하고, 청각예술에서는 거의 사라진다.
  9. 물론 시들마다 재현적 측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르다. 이시영의 시들 중에서도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산문시에서 재현적 측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다.
  10. 상투형에 빠지지 않는 시인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막 인용된 시처럼 상투형과의 싸움을 얼마나 치열하게 벌여 결국 새로운 표현을 얻어내느냐일 것이다. 또한 시인의 발전과정에서는 다소 반복일지라도 그것이 곧바로 일반적인 의미의 상투어-대중에게까지 퍼져서 이제는 거의 그 의미에 대한 별다른 각성 없이 자동적으로 쓰이는 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인이 쓰기 좋아하는 표현, 혹은 시인 고유의 표현으로 다가올 수 있다.
  11. Antonio Negri, The Porcelain Workshop: For a New Grammar of Politic, tr. Noura Wedell, Los Angeles: Semiotext(e) 2008, 13면.
  12. 이는 홉스의 주권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오늘날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현실정치는 모두 이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13. 삶이 자본주의적 제도들에 의하여 철저하게 구조화된 사회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적(‘자유주의적’) 자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자유란 삶을 구속하는 구조들과 싸우는 활력으로서만 가능하다.
  14. 이는 모든 인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회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15. 이 단계에서 앎은 항상 기쁨의 정동을 동반한다.
  16. 이는 두번째 시집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염무웅은 “관조하게 된 자세” 혹은 “여유랄까 쓸쓸함”이라고 표현했다.
  17. 활력은 특이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경우마다 그 양태가 다 다르다. 이는 권력이 어느 경우에나 거의 동일한 양태를 띠는 것과 정반대이다.
  18. 이런 점에서 시집 『무늬』의 해설에서 이시영의 신을 마치 기독교에서처럼 초월적인 존재로 본 김주연의 견해는 빗나간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이시영이 기독교도이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19.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에 대한 강의에서 “세번째 종류의 지식의 수준에서는 모든 본질들이 서로에 내적이고 신의 활력이라 불리는 활력에 내적이다”라고 말한다. 이 강의록은 www.webdeleuze. com/php/sommaire.html에서 볼 수 있다.
  20. D.H. 로런스는 휘트먼을 다루면서 “위대한 영혼들이 유일한 부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로런스에게서 ‘영혼’이란 바로 살(육신) 속에 머무는 활력으로서 이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