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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한국학의 역정과 동아시아 문명론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명예교수. 동아시아학술원장 역임. 저서로 『실사구시의 한국학』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문명의식과 실학』 등이 있음.

 

한기형 韓基亨

성균관대 교수, 국문학. 저서로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 『근대를 다시 읽는다』(공저) 『근대어·근대매체·근대문학』(공저) 등이 있음.

 

홍석률 洪錫律

성신여대 교수, 사학. 저서로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공저), 『박정희시대 연구』(공저) 등이 있음.

 

ⓒ이영균

 

 

한기형 지금을 문명적 전환의 와중이라고 본다면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인문학의 지혜와 경세학의 통찰을 두루 겸비한 원로들의 견해를 경청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근 40년간 국학연구의 중심에서 활동하셨고 또 최근에는 동아시아 문명의 흐름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보여주신 임형택 선생님과 함께하는 이 좌담은 그런 의미에서 뜻깊습니다. 대담자 두 사람 모두 근현대 연구자로 임선생님의 주된 관심 분야인 고전과 전통에 대한 식견이 충분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창비 측에서 저희 둘을 선택한 것에는 임선생님의 학술역정에 담긴 현재적 시무성(時務性)을 발견해달라는 각별한 뜻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선생님은 올해 2월 정년을 맞아 과거에 비해 자유로운 처지가 되셨는데요. 간단한 소회를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면 어떨까요?

임형택 생애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기간을 학교에 몸담고 있다가 정년을 맞으니까 우선 해방감이 들었어요. 『교수신문』에서 신년초가 되면 금년의 사자성어를 뽑아 제시하잖아요. 정년을 맞으면서 떠올린 사자성어가 하나 있는데 ‘소통지원(疏通知遠)’이에요. 본디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인데, 소통을 해서 멀리까지 알 수 있다는 의미이고, 소통을 해야 지식이 멀리까지 갈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요. 어느 쪽이건 다 긴요하다고 생각됩니다만, 후자의 뜻에 비중을 두고 싶어요. 연구자로서 소통을 한다고 할 때 우선 시대와 소통하고, 사람들 즉 독서대중과 소통하고, 또 지식의 경계를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이걸 ‘삼통(三通)’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나로서는 소통을 한답시고 설치고 나설 입장은 아니고, 조용히 소통의 자세를 지키겠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4·19의 시대적 분위기와 대학생활

 

홍석률 선생님은 60년대초 대학에 들어가 국문학에 입문하셨는데, 그때 대학가의 분위기는 아마 1960년에 발생한 4·19 민주항쟁의 파장 속에 놓여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최근 1919년 3·1운동을 한국과 동아시아 근대문화 형성의 진정한 기원으로 재평가하는 글을 발표하셨는데, 그렇다면 4·19는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보시나요? 선생님께서 학문연구, 그중에서도 국학연구에 입문하신 것은 4·19 이후의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겠지요?

임형택 나는 1919년 3·1운동이 5·4운동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진정한 의미의 근대의 출발선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를 편의상 현대라고 부른다면, 1945년이 현대의 시작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현대는 1960년의 4·19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3·1운동이 식민지배를 종식시키지 못했듯이 4·19도 바로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반전되고 말지요. 하지만 4·19로 타오른 해방과 민주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내연(內燃)해서 마치 활화산처럼 억압을 뚫고 밖으로 분출했어요.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에 하나의 분자로서 시위대열에 끼었을 뿐인데, 자신이 참여한 운동이 이승만 독재의 철벽같은 아성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굉장히 놀라웠고, 벅찬 감격이었습니다. 그때 막연하지만 마음속으로 어떤 민족의 대서사시 같은 것을 그려봤고, 그래서 그런 의식이 국문학과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 아니었나 해요. 그런데 국문학과에 들어가서는 전공분야를 한문학 쪽으로 돌렸고, 처음에 꾸었던 꿈은 접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형식을 달리해서 표현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기형 소설가가 되려다가 학자가 되신 건가요? 소설가가 되셨다면 한국문학사의 획기적인 작품을 쓰시지 않았을까요?(웃음)

임형택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공부 안하고 소설을 썼거든요. 그런 게 말하자면-

한기형 제목이 뭐였나요?

임형택 ‘빈터에 서다’였어요. 이 제목은, 염상섭이 『만세전』에서 3·1운동 당시의 조선 현실을 묘지로 생각했던 것처럼-물론 당시 내가 『만세전』의 원제인 ‘묘지’와 관련해서 제목을 잡았던 건 아니지만요-4·19 시점의 황량한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려고 했지요. 작가 황석영이 나하고 동갑내긴데 속으로 내가 만약 소설을 썼다면 황석영과 비교해서 어땠을까, 아무래도 내가 못 따라갔겠죠.(웃음)

한기형 그럼 황석영 선생을 적수로 생각하고 작가의 꿈을 접으신 겁니까?(웃음)

임형택 그런 건 아니고, 그때는 황석영이란 존재를 알 수 없었으니까(웃음). 이쪽 한문학의 자장이 강력해서 끌려간 셈이지요.

홍석률 선생님은 하여튼 4·19를 원체험하신 거지요. 고등학교 때 직접 시위에 참여했으니까요. 그러면 대학 때 발생한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어땠나요? 당시 이 운동은 한국의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과 이와 관련된 민족주의를 자극했을 거라고 봅니다만, 젊은 국학연구자들의 동향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임형택 1964년의 6·3운동은 대학교 3학년 때지요. 내가 대학에 들어간 첫해 봄에 한미관계에 대한 개선을 촉구하는 데모가 있었어요. 그땐 5·16 직후라 삼엄한 계엄령하였지요. 이후로 개학이 되고 대학가에 개나리가 피면 데모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해가 없었습니다. 나는 데모의 정치적 이슈에 동의해서 참여하는 편이었지만, 앞장서서 주도한다든지 직접 정치운동에 나선다든지 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1960년대는 대학 캠퍼스가 일종의 해방구 같은 분위기였어요. 70년대 중반부터는 경찰이나 기관원들이 대학에 들어와 있었고 상황이 발생하면 즉각 체포하고 그랬지만 그때는 아무리 가두시위를 벌이고 투석전을 하다가도 캠퍼스 안으로 들어오면 안전했거든요.

나는 통상적인 구분으로는 6·3세대지만 6·3은 역시 4·19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나 자신을 4·19세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4·19로 해방된 자유와 창조의 정신이 적어도 캠퍼스 안에서는 충만했어요. 요즘은 ‘신세대’라고 하지만 그땐 ‘새세대’라는 말이 유행했어요. 저는 60년대에 일어난 상황을 ‘새세대 문화운동’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민중문화의 범주에 속하는 가면극(탈춤), 판소리, 민요 등 여러가지 민속적인 연희형태를 새롭게 발견하는 작업이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계승이란 주제가 제기됐습니다. 조동일(趙東一) 선생 주도로 ‘우리문화연구회’라는 단체가 결성됐고, 좀더 학문적인 결사체로 젊은 한국사학도들이 주축이 된 ‘연사회(硏史會)’라는 것도 있었어요. 기성세대의 역사연구에 반기를 들고 좀더 주체적이고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입장에서 우리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 연사회에는 영남대 계시다가 돌아가신 정석종(鄭奭鍾) 선생이 권유해서 저도 뒤늦게 참여했는데, 70년대로 와서는 내부 갈등이 있어서 연사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진 못했지요. 송찬식(宋贊植), 정창렬(鄭昌烈), 이성무(李成茂), 한영우(韓永愚) 이런 분들이 중심 멤버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새세대 문화운동’으로 포괄할 수 있는 범위가 여러 분야에 걸쳐 넓은데, 한국 근대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봅니다. 그 지향점은 반권위주의적, 반서구중심적인 민족문화운동 정도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기형 1960년대 중반의 선도적 지식인들이 민중문화에 접근하면서 구비전통과 국문전통에 주력하는 문화적 경향성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데, 선생님은 그 반대편인 한문학에 공부의 주안을 두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당시의 새로운 지식문화의 일반적인 흐름과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한문학 입문과 잊지 못할 스승들

 

임형택 그건 아마 내 개인적인 것하고 관련이 있을 텐데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고향엘 갔어요. 우리 종가는 6·25전쟁에 화를 당해서 거의 폐가처럼 되어 있었어요. 그 집에서 선조부터 내려온 서롱(書籠)에 담긴 책과 고문서를 꺼내보니까 쥐가 쏠고 좀이 먹어서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어요. 그래서 쥐똥을 떨어내고 거풍(擧風)이라도 시키면서 고서만이라도 최소한 어떻게 정리해서 목록을 만들자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대로 대충 작성한 목록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수하고 있습니다. 그 산적한 고문적의 더미가 당시 내 눈에는 까만 건 글자고 하얀 건 종이였죠. 그래도 이렇게 방치해도 되느냐, 얼마 전까지 우리 조상님들이 소중하게 보고 또 직접 남긴 글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던 국문과의 ‘국문학개설’ 과목에는 국문학의 개념 규정상 한문학은 국문학의 범위 밖이라고, 그러니 한문학은 우리 문학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겁니다. 학문적으로 접근이 되지 않는 자료가 아무리 쌓여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지요. 그래서 이걸 누구라도 연구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비교적 일찍 갖게 됐어요.

홍석률 한문학을 하시게 된 데에는 남다른 가정적 배경 외에도 특수한 사사 혹은 사숙의 경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거의 사라진 전통이지만요. 대학에서 가르침을 주신 분도 있겠고, 신호열 성낙훈 이우성 선생님들을 사사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당시의 분위기와 재미있는 일화들을 말씀해주시죠.

임형택 저는 스승 복을 타고난 사람인 것 같아요. 선생님이 여러 분인데다 많은 사랑을 받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제도권의 사제관계와 제도권 밖의 사제관계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겠는데요. 대학의 국문과에서 고전문학 전공의 정병욱(鄭炳昱) 선생님, 장덕순(張德順) 선생님을 통해서 국문학에 입문했는데, 이 분들이 제게 베푼 관심과 사랑은 각별해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교수가 되어서 제자들에게 내가 받았던 만큼의 관심과 사랑을 베풀지 못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국어학 선생님들께도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근대학문이 요구하는 엄정성과 객관성을 이해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당시의 대학제도에서 한문학은 완전히 배제된 상태였습니다. 한문학을 연구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는데 한문을 배울 곳도 없고, 전인미답(前人未踏)의 한문학을 어떻게 개척할지 막막했습니다. 독학으로 한문 독해를 공부해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어려움을 느껴서 먼저 찾아간 분이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선생님입니다. 그때 전통적인 한학자들은 아무리 대가라도 자기 지식으로 먹고살 길이 거의 없었지요. 우전 선생님만 해도 처음 찾아가 뵈니까 집 한칸도 없이 하숙을 하고 계셨어요. 대학원 시절에는 방은(放隱) 성낙훈(成樂熏)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역시나 그때로선 변두리인 답십리에 살고 계셨습니다. 역사학 전공의 몇분과 함께 공부했는데, 사람이 다섯만 되어도 하나는 문 밖으로 나가야 했어요.(웃음) 이 두 선생님을 통해서 한문 원전을 독해하는 역량을 길렀고 더불어 전통적인 학문자세를 접하면서 근대 학문의 문제점을 많이 느끼게 됐습니다.

그리고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선생님을 들어야겠어요. 벽사 선생님은 성균관대 교수로 계셨으니까 제도권이지만 내가 대학 4학년 때 개별적으로 찾아가서 학연을 맺었으니 굳이 나누자면 제도권 밖입니다. 누가 그래요. 성대에 이우성이란 분이 있는데 한문학에 정통하고 역사학자로서도 대단한 존재라고. 벽사 선생의 고려사 관련 논문을 읽어보니까 놀라웠어요. 제가 그분 연구실로 처음 찾아갔을 때 연세가 만으로 마흔이셨어요. 그래도 얼마나 근엄해 보이는지 두렵기도 했지요. 그런데 나는 어른 앞에서 주눅이 잘 들지 않아 나쁘게 보면 버르장머리가 없고 좋게 보면 용기가 있다거나 학구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웃음) 벽사 선생은 불쑥 찾아온 타교의 학생에게 정말 열정적으로 학문의 길과 민족·역사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그야말로 도도한 강론을 듣다보니 꽤 시간이 흘렀는데 퇴근하시는 길에 버스를 탈 때까지 그 준론이 이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진작에 돌아가셨고 지금 오직 벽사 선생 한분이 건재하십니다. 조만간 선생님의 전집이 바로 창비에서 나오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민족문학론과 내재적 발전론 비판에 대하여

 

한기형 어디 가서 듣지 못할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화제를 조금 구체화하겠습니다. 선생님의 학술인생을 점검할 때 역시 내재적 발전론에 근거한 민족문학론의 창도, 이것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요. 탈근대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민족문화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이 제기되어왔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학문적 고민들이 시간이 지난 후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당초의 문제의식이 도외시되고 곁가지가 부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각의 비판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임형택 일반적으로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사관에 반발해서 시작되었다고 하고, 그것이 사실이죠. 그렇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는데, 50~60년대를 거치면서 생겨난 민족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어요. ‘엽전의 비애’라는 자기모멸적인 말이 당연한 듯이 쓰였고 또 ‘조선놈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따위의 생각이 팽배했거든요. 그래서 자기 역사나 문학을 해석하는 데서도 자조적이거나 체념적인 것이 유행했고, 이런 태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였습니다. 나쁘고 싹수없는 건 우리의 문화적 체질이고 민족성임에 반해서 서양 것은 본원적으로 우수하고 진취적이라는 자기비하, 서구편향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긴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자생적이고 자주적인 역량을 우리 문화와 역사에서 발견한다, 우리의 문학을 좀더 역동적인 방향으로 해석한다, 이런 점이 절실히 요망되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실증적인 차원에서 허점이 없지 않고 과장된 면도 있고, ‘근대’를 이상적 좌표로 삼았던 점도 문제점입니다. 그렇다고 연구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것은 아니겠고, 그 진정성을 잘 이해하고 살려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홍석률 60, 70년대 지식인들이 제기했던 식민사학 극복론, 내재적 발전론을 보면 그 안에 상당한 편차가 존재했던 것 같아요. 내재적 발전론에는 근대화론의 관점에서 전근대사회에서 싹트는 근대적 요소를 강조하는 흐름이 있고, 반면 변혁과 역사발전의 내적인 계기를 찾는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역사의 발전법칙 속에서 우리 역사를 체계화하는 것에 중점을 둔 흐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처음 발표한 「흥부전의 역사적 현실성」이라는 논문을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문학연구지만 당시 소장 역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흥부전과 긴밀하게 연결시키면서 놀부를 바라보는 근대화론적 시각을 비판하셨죠.

임형택 「흥부전의 역사적 현실성」은 1969년에 『문화비평』 지면에 발표했어요. 아까 말한 ‘새세대 문화운동’에서 나중에까지 괄목할 성과를 남긴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계간지 출범이라고 봐요. 『문화비평』은 당시 송재소(宋載쌌) 선생이 20대 청년시절에 주재한 계간지인데 거기에 발표한 것이 꼭 40년이 되네요. 역사학에서 제기된 내재적 발전론의 논리를 문학작품 분석에 적용한 첫 사례가 아닌가 해요. 그때 학계의 관심을 끈 김용섭(金容燮) 선생의 ‘경영형 부농’ 이론을 받아들여서 놀부를 신흥부자, 경영형 부농의 한 유형으로 파악하고, 이런 신흥부자가 등장함에 따라 몰락하게 된 것으로 흥부의 가난을 설명한 것입니다. 놀부 같은 부자의 등장으로 농촌사회에 새로운 양상의 모순 갈등관계가 조성된 점을 주목했고 거기서 놀부보다는 흥부 쪽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 점이 나의 독자적인 관점이라면 관점이겠습니다. 생산수단을 상실한 흥부로서는 살아갈 길이 막연할밖에 없겠지요. 신흥부자 때문에 그늘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한 존재, 그 삶의 진실을 부각하려고 했어요. 나는 흥부가 가난을 타개하려고 무한히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정직하게 살려고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흥부의 가난을 무능력해서다, 생활자세가 적극적이지 못한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당시에 제기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가난을 자기 못난 탓으로 돌리는 가진 자의 편견인데, 이게 곧 자본주의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박정희시대의 발전논리가 투영되어 있기도 하고요. 이런 사회풍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의 「흥부전」 해석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홍석률 저도 그런 점에서 근대화론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요. 60, 70년대는 조국근대화론, 경제개발론이 압도해가는 분위기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이러한 현실에 비판적인 학자들이 존재했고, 게다가 아까 말씀하셨듯이 ‘우리문화연구회’ 같은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셨습니다. 『문화비평』을 만든 송재소 선생 같은 분도 계셨고요. 어떤 정형화된 학회나 학술단체를 결성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담론을 주도하는 힘은 지금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임형택 그땐 어떤 통합된 운동체가 결성된 것은 아니고, 학생운동이나 진보적 사상경향에 대한 탄압이 부단히 계속되는 가운데 거기에 대한 저항으로, 진취적인 지향으로 학술문화의 새로운 움직임이 활발했습니다. 아까 계간지 말을 꺼냈지만, 맨 먼저 우리 앞에 선을 보인 것이 『창작과비평』이고, 다음이 『문학과지성』입니다. 조금 뒤에 『문화비평』이 나왔는데 다른 계간지처럼 명이 길지 못했지만 학술운동에 중점을 뒀다는 특징이 있었지요.

한기형 『창작과비평』과는 초기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나요?

임형택 내가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창작과비평』 창간호가 나왔거든요. 『창작과비평』을 처음 대하고 뭐랄까 새로이 눈이 떠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마도 당초에는 사회 일반의 인지도는 낮았겠지만 변혁을 꿈꾸는 지식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졌고 기대도 대단히 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군대를 가는데 전방으로 짊어지고 가는 더플백 속에 창간호가 들어 있었고, 그후로 계절 따라 되도록 구입해서 읽었지요. 최전방의 삭막한 분위기에서 위안도 되고 머리를 다소간 덜 굳어지게 했지 싶습니다. 지면으로 창비와 관련을 맺기는 1970년에 「황매천의 시인의식과 시」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죠. 원래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리포트로 제출한 건데, 어찌어찌해서 염무웅(廉武雄) 선생이 알고 실었던 겁니다. 나로서는 한문학의 첫 논문인 셈인데 나름으로 우리 근대문학사의 구도를 재편하려는 문제의식을 담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오늘에까지 창비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지적 각성제이고 또 제한된 전공영역을 배회하는 학문작업이 대중 내지 사회와 소통을 가능케 한 창구이기도 했지요.

 

비판적 국학연구의 기원과 현황

 

한기형 논의를 조금 바꾸어보겠습니다. 1960년대 이후 집중하신 현실비판적 국학연구의 학술사적 연원에 대해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그러한 학문경향은 6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시작된 것인가요, 아니면 근대 초기의 계몽운동이나 1930년대의 조선학운동, 해방 직후 분출한 학술문화운동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던 것인가요?

임형택 우리 근대학술사 역시 1945년을 분기점 삼아 얘기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은데요. 1945년 이전은 1900년대 애국계몽운동시기와 1930년대 조선학운동시기로 단계를 구분할 수 있어요. 계몽주의시기에는 신문물·신사상의 수용이 주요과제였지만 동시에 자국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때 국학의 싹이 돋아났는데 미처 자랄 겨를도 없이 주권상실로 된서리를 맞은 것이지요. 다음 1930년대의 조선학운동은 일제가 군국주의로 급진하면서 일체의 정치운동이 봉쇄되고 민족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상황에서 우리의 언어,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학을 연구하고 제대로 알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국학(한국학)의 틀이 잡힌 것이지요. 그리고 1945년에서 1950년, 엄밀히 말하면 1948년까지가 그야말로 해방을 맞아 일제하에서 억눌렸던 창조적 열정이 폭발한 시기이고, 억눌림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지적 축적이 발양한 시기이기도 했지요. 당시 홍수처럼 쏟아진 출판물이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국학을 포함해서 우리 근대학문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이 시기로 잡아야 할 겁니다. 그런데 이미 그 기간에 남북분단이 획정된 상태였다가 내전으로 발전했고, 그런데다가 냉전체제로 싸늘한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해방기의 활발한 움직임과 볼 만한 성과들은 숙청을 당하든가 기가 팍 꺾이든가 심히 왜곡되는 양상이 빚어졌어요. 1960년대 ‘새세대 문화운동’의 민족자아 각성, 민중적 예술형식 발견, 반권위주의적이고 비판적인 학술활동 등은 해방기의 역동성·활발성이 되살아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지요.

홍석률 한국사회가 민주화 이행기에 접어들면서 현실비판적 학자들이 기성 학계와는 차별화되는 학회나 연구소를 정식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지요. 문학사 분야에서는 1990년에 ‘민족문학사연구소’가 만들어지고, 선생님은 주도적 역할을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민족문학사연구소 창립은 한국문학 연구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으로 이야기되는데, 그때 연구소를 만들게 된 계기라든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임형택 민족문학사연구소는 정식 출범하기에 앞서 몇년 동안 준비작업을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80년대 운동의 열기 속에서 국문학도 무언가 쇄신의 방향을 찾아나서자, 한국문학 연구의 신학풍을 불러일으키자, 말하자면 진보적인 학술운동의 기치를 들자는 것이었지요. 나보다 훨씬 후배들이 주창했고 나는 따라가는 편이었습니다. 예비모임을 몇번 가졌는데 그 모임을 ‘야간 국문학과 동창회’라고 부르기도 했죠. 주류 학계에 끼지 못한 비주류의 모임이고, 제도권의 권위와 타성에 저항하고 대결하겠다는 뜻도 담긴 말이지요.

민족문학연구소는 반년간(半年刊) 기관지를 꾸준히 발간하고 있고, 기획을 세워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학술발표회를 갖거나 책으로 간행해왔습니다. 이런 성과를 평가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념적 방향성, 뚜렷한 이론을 기반으로 한국문학 연구자가 결집했다는 점을 의의로 들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한국문학 내에서 고전과 현대, 한문학으로 분화되어 장벽이 생기고 학교 간에도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점을 극복하고 하나의 한국문학, 민족문학사의 통일적 인식을 지표로 한데 어울릴 공부의 장을 만들자는 뜻도 있습니다. 그 성과를 과연 얼마나 거뒀는지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방향성은 분명합니다.

 

한문학 연구, 전통과 현대

 

홍석률 선생님은 국문학 중에서도 한문학을 연구하셨지요. 선생님이 저술한 책에 보면 대학에서 배울 때 국문학과 정식 교과과정 중에 한문학 관련 과목이 하나도 없었다는 회고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문학 연구에 중심을 두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흥미로운 게 1975년에 한국한문학회를 창립하셨는데 그때 모인 학자가 12명밖에 안되었다고 하더군요. 한문학 연구를 이어가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기형 덧붙여 질문드리면, 선생님의 한문학 연구가 국문 중심의 경직된 내셔널리즘을 보완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한문학이 학계의 시민권을 얻게 되면서 전통에 대한 개념과 인식도 크게 변했다고 생각되는데 그 점도 함께 정리해주시죠.

임형택 전통이란 것은 원래 근대가 자기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거든요. 한국 근대가 세운 전통, 그것의 하나로서 국문학, 그리고 한국문학사가 성립된 것이지요. 그런데 국문학이 등장하면서 과거에 문학의 중심에 놓여 있었던 한문학이 완전히 제외돼버렸어요. 그것은 엄청난 사태지요. 말하자면 지식의 지각변동 또는 전도현상이랄까요. 종전까지 모든 글을 한문으로 썼고 그래서 역사와 문학이 다 담겨 있던 것을 울타리 밖으로 쫓아낸, 그야말로 근대가 폭력적으로 작동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기형 지식이 위축되어버렸죠.

임형택 위축뿐 아니라 실제로 한문학을 제외하고 국문문학만으로 우리 문학사가 성립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국문문학 유산이란 통틀어봤자 얼마 되지 않으니 그 빈곤함은 말할 것 없고 문학사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부터 어렵습니다. 조상이 남겨주신 풍부한 유산을 스스로 버리고 빈곤을 탄식하다니 말이 안되지요.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가정적인 배경도 있었고, 그래서 남이 않더라도 나라도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문학을 해서 대학에 일자리가 주어질까, 이런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빨리 전임이 돼서 계명대 한문교육과에서 강의를 하다가 1975년에 성균관대로 옮겼지요. 그리고 한문학이 근대학문의 하나로 자리잡으려면 학회라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이우성 선생님께 상의를 드렸지요. 그분도 좋다 동의하셔서, 당시 대학에 있는 분 중에서 최고 원로인 이가원(李家源) 선생님을 회장으로 모셨어요. 그리고 회원은 규정을 좀 엄격히 해서 한국 한문학 전공자, 그리고 대학에서 한문학 관련 학과에서 강의하는 사람으로 한정했더니 모두 12명이었어요. 그게 한문학이 한국의 근대학문의 한 분야로서 당당히 서게 된 출발이었지요. 한문학이 근대학문의 한 분과로 성립함으로써 우리 문학사가 풍부하게 복원됨은 물론, 근대의 폭력성을 치유하는 데 구체적으로 기여했다고 보겠습니다.

홍석률 말씀하신 대로, 전통이 현대적으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현대가 전통을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단순화하고, 나아가 폭력적으로 재단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선생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지난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김흥규(金興圭) 교수는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근대 식민사학에 의해 만들어진 담론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해 실증적 측면과 연구시각 면에서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러한 경향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또한 선생님은 항상 전통문학과 한국문학, 한문학과 국문학의 통합적 인식을 강조했고, 나아가 계급문학과 민족문학도 통합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점들에 관해서도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임형택 제기하신 문제가 여러가지네요. 먼저 김흥규 선생의 논문에 대한 소감을 간단히 언급하지요. 시의적절했고 명쾌하게 읽히는 글이었습니다. 최근 범람하는 경박한 전통부정론 내지 탈근대담론에 일침을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한국 근대가 세운 전통의 문제점, 더욱이 근래 지방자치단체가 앞다투어 벌이는 축제 등에서 전통문화의 표상들을 보면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폐해들이 많습니다. 전통이 아무리 근대라는 시대의 요구에 의해서, 근대인의 취향에 편승해서 편집되고 연출되는 것이라지만, 너무나 황당하고 왜곡된 사례가 비일비재하지요. 나는 이런 문제들이 다른 어디가 아니라 바로 우리 근대에서, 근대 한국인의 의식형태에서 발생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그 해법은 결코 간단치 않지만 이 자리에서 길게 논할 형편은 못되네요.

또 지금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단층, 한문문학과 국문문학의 괴리, 그리고 남한문학과 북한문학의 단절, 이건 하나같이 심각한 문제지요. 우리는 고전과 현대의 연계를 누누이 강조해왔고, 한문문학과 국문문학을 하나의 한국문학으로 통일적으로 인식하자고 거듭 주장했습니다. 아울러 남한문학과 북한문학의 이질감을 해소하려는 노력과 함께 문학사적 통일을 항시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과 시도의 성과는 아직 뚜렷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이론적인 과제와 현실적 난관이 붙어 있어요. 단층, 괴리, 단절을 극복하고 문학사를 통일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설득력을 가진 이론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이론적 정립이 아직 선명치 못해요. 물론 이론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면도 있지요. 통합을 방해하는 제도와 인간현실이 엄연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근본적으로 통합과 통일을 어렵게 만드는 오늘의 현실, 남북의 분단현실, 대미의존의 현실이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한기형 선생님이 청장년기를 보낸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문학연구에서 서구이론의 영향이 압도적인 시대였습니다. 한국문학사의 기술이나 작품 해석에서도 서구문학 전공자들이 공공연히 주도권을 행사하거나 국문학자들도 이른바 ‘본토’ 이론에 심각하게 경도되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국학 중심의 자료학을 깊이 천착했던 선생님의 입장에서 그러한 현상에 대해 분명 어떤 생각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최근 국문학 등 인문학계에서 일고 있는 일본 이론 수입의 풍미현상에 대해서도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임형택 이 문제는 정말 신물이 나요. 누차 지적을 하고 비판을 가했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이론의 대외의존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지요. 국학 분야는 자료는 자국의 것이고 이론은 수입을 하게 되니 ‘기술제휴’인 셈입니다. 박정희시대에 기술제휴의 산업으로 경제면에서 성과를 본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한국경제가 그런 단계를 벌써 지났으니 학문에서도 ‘기술제휴’의 수준은 넘어서야 하지 않겠어요? 국학 이외의 인문학 일반이나 사회과학에서도 이론적 고민을 수입으로 해결하려는 대외의존적 자세는 당연히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론적 고민은 지금, 이곳에 입각해서 해야 할 것이고, 자료의 실상에서 논리가 도출되어야 함은 학문 일반의 기본 원칙입니다. 일본 이론의 수용을 굳이 특화시켜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일본의 학술서가 우리에게 쉽게 읽히고 그들이 제시한 이론이 우리가 소화하기에 적합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좋은 이론이라면 잘 활용하는 것도 해롭지 않겠지요. 문제는 우리의 주체성인데, ‘나’는 어디로 가버리고 바깥의 바람만 쫓아다니는 꼴이 되면 곤란하지요.

 

동아시아 문명론과 우리 역사에서의 문명 전환

 

홍석률 선생님께서는 개인, 민족, 동아시아, 세계의 통합적인 인식을 강조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간행하신 『문명의식과 실학』(돌베개 2009)을 비롯해서 요즘 저작에서는 서구의 근대문명과 다른 동아시아 문명 개념을 많이 강조하시는데, 이렇게 동아시아 문명 개념을 강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임형택 내가 한문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동양적인 문명 개념의 중심은 문(文)에 있거든요. 문이 고도로 발현된 상태, 그것이 곧 ‘문장’이고 문학이며, 그렇기 때문에 문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늘 생각을 가져왔지요. 또한 근대 이전과 이후를 어떻게 연계해서 통일적으로 인식하고 사고할 수 있을까, 이 문제가 늘 머릿속에 걸려 있었습니다. 문명은 역시 서구의 번역어다, 그리고 전통적인 문명과는 말은 같지만 전혀 무관한 거다, 대개 이런 식으로 일본 연구자들이 얘기하고 있고, 한국 연구자들은 이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지요. 과연 그것을 그렇게 보아야 하겠는가, 동양 전래의 문명과 서구 근대문명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기형 ‘civilization’과 ‘문명’은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임형택 개념 자체가 전혀 다른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물론 동서의 역사가 다르니까 문명 개념도 차이가 있겠지요. 서구적인 문명 개념은 과학과 기술발전에 기반을 두고 있고 또 그런 사고의 논리를 낳은 연원이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사유의 원천이 다르고 논리의 맥락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히 인정해야죠. 그런데 문(文)에서 발원한 동양의 문명 개념은, 단순히 문자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명의 기원은 인류가 자연을 극복, 이용하고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에 문명의 발전과정 자체가 역사였습니다. 문자도 이 과정에서 자연을 읽는 방식으로 창제된 것이고요. 그러니 각기 시대에 따라 문명의 성격이 다르게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동양사회는 숭문(崇文)적 전통이 강했고 도덕주의가 우선시되어왔지요. 그렇지만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하는 사상경향도 있었거든요.

홍석률 『문명의식과 실학』에서 한국은 14세기와 19세기말~20세기초, 두차례의 중요한 문명사적 전환을 맞이했다고 분석하셨습니다. 그런데 14세기에 이루어진 전환은 동아시아의 보편문명을 완전히 소화 흡수해서 완성되는 단계,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지만 『동문선(東文選)』 『훈민정음(訓民正音)』 같은 것이 만들어지는 데서 나타나듯 동아시아 보편문명을 단순히 소화 흡수하는 단계를 넘어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의 것을 정리하고 창조하는 단계까지 이른 것 같거든요. 하지만 19세기말 20세기초의 문명전환은 근대 서구문명으로 막 진입하는 과정이지 이러한 단계까지 간 것은 아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임형택 우리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변화의 시점이 언제냐면, 저는 19세기말 20세기초라고 봅니다. 우리 민족이 유사 이래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통적인 제도와 문화가 전면적으로 뒤바뀌는 분기점이었기 때문에, 이 시점을 문명 전환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4세기에는 고려로부터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일어납니다.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긴 하지만 그것을 문명 전환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동양적 전통의 제도와 문화에서 일어난 변혁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14세기의 역사 전환은 같은 시기 중국의 원·명(元明) 교체와 맞물린 역사운동이고, 시야를 더 확대해보면 서유럽에서 일어났던 르네쌍스운동과도 연계해볼 수 있습니다. 즉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세계사적 운동의 한 부분입니다. 14세기 한반도의 역사변화를 주도했던 지식인들이 고려말의 신진사대부인데, 이들이 세계사적 움직임에 주체적으로 대응했던 점을 평가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종래의 통념과는 달리 조선왕조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한강의 문명’이라고 의미 부여를 했던 것이죠. ‘한강의 문명’은 세종의 치세에서 나온 말이지만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조선왕조의 융흥기를 지칭할 수 있겠고, 구체적으로 『훈민정음』과 『동문선』을 들어서 ‘한강의 문명’의 특색을 드러내고자 했지요.

14세기의 전환은 성공한 역사지만, 거기에 비해서 19세기부터 20세기초는 성공한 역사로 보기는 어렵지요. 물론 우리 자체의 역량 문제, 그리고 당시 국제상황의 문제, 두가지를 같이 고려해야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엄청난 역사변화에 대응하는 주체적 역량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습니다. 그다음에 거대한 물결로 밀려든 서구문명, 서구제국주의에 대응할 실력과 수용할 그릇이 아직 부족했다는 말입니다. 당시로서는 실패라면 실패고 좌절이라면 좌절인데, 그러나 그때 전개된 실천적 노력, 그 과정에서의 고뇌는 근대로 진입하기 위한 지적 자산이며, 그래서 나는 그후부터 오늘까지를 큰 눈으로 본다면 한국 근대는 실패라기보다 성공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미완의 과제가 많지만, 우리가 경제건설도 이만큼 하고 민주화도 이만큼 한 시발점을 찾아가면 20세기 전후 격변의 시대, 그 험악한 시대변화에 대응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20세기 전환기, 적응과 극복의 가능성

 

홍석률 선생님께서는 20세기초 문명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서양 근대문명에 대응하는 사상적 흐름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보셨습니다. 서구문명으로의 개조를 주장하는 급진개화론, 동도서기 등 문명의 비교우위를 주장하는 온건개화론, 성리학적 질서의 고수를 주장하는 위정척사론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도 동학농민전쟁으로 대표되는 민중세력의 사상적 대응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민중운동과 그 사상적 지향이 서구의 근대문명과 어떠한 관련을 갖는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질적으로 18, 19세기 조선사회에서 발생한 여러 사회경제적인 변화는 당대인들이 의식했든 못했든 간에 16세기 지리상의 대발견 이후 발생한 세계사적 변화와 접목되는 바가 있거든요.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원했던 변화의 방향은 서구가 겪었던 근대사회로의 변화와 상당부분 일치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 어긋나는 부분도 있지요. 동학농민전쟁의 경우에는 인간의 평등, 신분제 타파 같은 면에서 서구적 근대와 일치하는 면이 있지만, 상공업 발달에 부정적이었으니 자본주의 사회를 추구했다고 보기는 어렵거든요. 한편 위정척사론 같은 것은 당시 현실에서 괴리된 수구적 논리였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유인석(柳麟錫)의 『우주문답(宇宙問答)』 같은 것을 보면 근대 서구사회의 문제점, 근대문명의 어떤 한계 같은 것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19세기말 20세기초 문명 전환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사상적 흐름들이 있는데,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결과를 너무 절대적인 것으로 소급적용해서 서구적 근대와 합치되는 부분을 일방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여기서 벗어난 것들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근대화와 식민지화가 동시에 진행됐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할 때 식민지로 전락한 곳에서는 밀려들어오는 서구적 근대문명에 한편으로 적응하면서도 식민지적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전복할 수밖에 없는 이중적 상황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당시의 다양한 운동적·사상적 지향들 중에 서구적 근대문명에 비판적이고 이와는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거나 제시한 측면도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임형택 나 자신 평소에 우리 역사를 끌고 가는 데서 농민의 역할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그런데 『문명의식과 실학』이란 책의 논리구도에는 동학농민전쟁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동향과 민중적 사상을 포함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주제는 기회가 닿으면 따로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근대란 무엇이냐, 지금 우리를 포획하고 있는 서구문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것은 지금 우리로서는 더없이 중대한 주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세동점을 주목한 것이지요. 나 역시 서구 근대를 이상적인 좌표로 상정하고 거기에 얼마나 접근했느냐 미달했느냐는 식으로 자기 역사나 문화를 재단하려 드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16세기 이후 전개된 서세동점은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전역이 피할 수 없었던 세계사적 진행과정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조류에 어떻게 대응했고 그래서 어떤 문화적·사상적 변화가 일어났는가입니다. 동서의 만남을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과정이 아닌 상호적인 것으로 전제한 다음, 역동적으로 오히려 창조적인 계기로 그려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19세기말 20세기초는 참으로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홍교수의 말씀처럼 근대화와 식민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속에서, 근대와 등치된 서구를 악마로 인지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면이 있었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상과 행동이 강력히 대두한 것도 역시 당연시되는 면이 있었지요. 나는 그 시기를 문명담론의 시대로 부각시키려 했고, 서구〓근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입장에서부터 완강히 부정·거부하는 입장에까지 다양하게 제기되어 서로 갈등한 것은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창조적 혼돈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가령 서구문명을 야만으로 취급한 척사위정론을 두고 말하더라도 흔히들 시대착오적이라고 하지만 그런 사상의 논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과 시대 현실이 있고, 거기서도 본원적인 의미에서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성찰의 논리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근대문명의 병폐를 치유할 묘방이 거기에 다 들어 있다는 식으로 사고해서는 곤란하겠지요.

 

분단체제 극복의 문제의식과 동아시아론의 제기

 

한기형 선생님을 포함해서 창비와 긴밀히 연관된 연구자들이 제기한 동아시아 담론, 혹은 동아시아 문명론은 한국 학술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가지 비판에 직면해 있기도 합니다. 비판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되는데요. 첫째는 동아시아론이 이전의 현실비판적 학술계가 추구했던 담론의 현실성을 추상적인 차원으로 비약시킨 것은 아닌가, 말하자면 담론의 긴장감을 약화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둘째는 선생님의 개인적인 학문 이력과도 연계되는 문제지만,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으로 표상되는 1980년대까지의 비판학술계의 경향에서 동아시아 담론으로 전이되는 과정에 놓여 있는 담론의 단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입니다. 셋째는 동아시아 담론이 문명사적 차원의 접근을 시도하면서 실제로는 중국중심주의를 강화하는 쪽으로 기여하지 않았나 하는 판단입니다. 이 세가지 관점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을 말씀해주시죠.

임형택 어려운 내용인데요. 내 입장에서 왜 동아시아를 주목하게 되었고 동아시아론에서 어떤 점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느냐 정도로 이야기하지요. 개인적으로는 동아시아를 학문적인 관심권으로 끌고 들어온 것은 시기적으로 이른 편입니다. 1985년에 『전환기의 동아시아문학』이라는 책을 창비에서 최원식(崔元植) 교수와 함께 편찬했거든요. 나를 두고 말하자면, 태어난 것은 일제말이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분단상황에서 살았지요.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한반도의 북쪽과 불구대천의 원수로 대립하면서 지내고, 결국 그것이 남한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에서 질곡을 낳았지요. 이것을 돌파하기 위해 동아시아 담론을 제기하게 된 것입니다. 『전환기의 동아시아문학』을 엮게 된 중요한 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북한은 누가 뭐래도 우리의 국토의 한 부분이고 북한의 주민은 우리와 피를 나눈 민족이니 역사공동체 아니겠어요. 그곳이 절대로 갈 수 없는 땅이 됐을 뿐 아니라, 우리가 역사적으로 그렇게나 친근한 관계에 있었던 중국 역시 ‘죽의 장막’이라는 표현처럼 음험한,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빈번하게 내왕하게 된 지금과는 사정이 판이했죠. 문제는 한반도에 그어진 분단선입니다. 동아시아론을 제기했지만 통일의 의지를 그 속에 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몇년 지나지 않아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냉전체제의 해체, 그다음에 바로 중국과의 수교로 이어져서 지금 동아시아가 우리의 일상 속에 놓이게 된 것이죠. 어느덧 동아시아담론이 유행처럼 되었습니다만,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동아시아론을 제기했을 당시의 문제의식의 원천, 분단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태이니까요.

동아시아론이 등장하자 두가지 반발이 있었어요. 하나는 일제시대의 대동아경영권 논리의 재판(再版)이 아니냐, 또 하나는 방금 한교수 지적대로 중국중심의 중화주의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현실적으로 동아시아론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서구중심주의의 극복과 맞물려 있거든요. 이젠 미국중심주의라고 해야 적절하지 싶기도 합니다만. 우리로서는 서구중심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어떻게 이론적으로 넘어서느냐가 문제인데, 현재 불쑥불쑥 나타나는 중국중심주의, 중화주의, 대국주의도 따지고 보면 서구중심주의의 역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동아시아론을 제기함으로써 오히려 중국중심주의를 이론적으로 성찰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중국 사람들 눈에는 동아시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국가로서의 중국, 역사적 과정 속에서의 중국을 반성적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중국중심주의, 중화주의가 사실은 중국 역사에서도 순기능을 한 것이 아니거든요. 서세동점의 역사 속에서, 어쩌면 중국이 중화주의의 미망에서 빨리 깨어났더라면 지난 역사에서 경험한 식으로 형편없이 깨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자꾸 그 논리로 변화된 세계에 대응하려 했기 때문에 19세기에 아편전쟁을 불러들였고 20세기로 와서는 거대 제국이 해체되는 상태로까지 간 것이지요. 정말로 중국이 제대로 서려면 ‘동아시아 속에서의 중국’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뿐 아니라 중국에도 필요하다는 점을 각성시키는 의미가 동아시아론 속에 담겨 있고 또 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기형 실제 효과도 있었다고 보십니까? 구체적으로 효과를 느끼셨던 경험적 사례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임형택 3년쯤 전인가인데, 동북아역사재단이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내가 기조발제를 맡았어요. 동아시아는 중화주의〓중국중심주의를 역사적으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정신적 잔재가 드라큘라 백작의 망령처럼 종종 출현했고 앞으로도 그럴 우려가 없지 않다, 이것은 중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일본이나 한국에도 그 변종이 출현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중국측에서 참석한 어떤 노학자가 핏대를 올리면서 지금 중국에 중국중심주의가 어디 있느냐고 항의를 했는데, 다른 참석자들은 중국 학자들까지도 대개는 내가 한 말에 동의하는 듯 보였습니다.

홍석률 말씀 중에 동아시아 담론이 제기된 이유를 분단체제의 극복, 그 고민 속에서 나온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분단체제의 극복과 동아시아 담론이 연결되는 지점은, 분단체제라는 것이 서구중심의 불균등한 세계체제의 하위로서 존재하는 것이니까 결국 동아시아 담론은 서구중심의 세계질서를 깨고 다른 대안의 가능성을 모색해본다는 데 있는 것인가요?

임형택 그렇지요. 서구중심의 세계구도, 미국편향의 의식구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적 인식, 동아시아의 연대가 요망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갈 길은 멀고 험하지요. 동아시아 공동체를 두고 말하더라도 거대 중국과 선진 일본을 조율하는 문제, 그리고 늘 장애요인이 되고 있는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는 문제가 난제를 푸는 열쇠라고 봅니다.

 

근대극복의 매개로서의 동아시아 문명론

 

한기형 앞의 논의들과 연관되기도 하고 좀 어긋나기도 하는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문명사적으로 접근하면 그 내용은 일반적으로 전통사회를 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동아시아의 현대성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현대성, 혹은 동아시아 현대문명을 논하면서 피할 수 없는 초점이 사회주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동일하지만 북한과 중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동아시아 각 지역 사회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그 현실은 굉장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질성을 포함해 사회주의의 근대문명사적 역할과 위상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최근에 나온 『새 민족문학사 강좌』(창비 2009) 총론에서 사회주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화두를 제시하셨는데 그것과도 연관되겠습니다만……

임형택 우선 21세기 상황에서의 사회주의 문제와, 20세기 전반기 사회주의가 동아시아에 도입되는 단계를 나눠서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약간의 시차가 있지만, 일본에 조금 먼저 들어오고, 중국과 한국에는 1920년대에 거의 동시에 사회주의가 도입되는데, 동아시아, 중국과 한국에서 사회주의는 그 원산지에서와 달리 근대를 넘어서기 위한 사상이 아니고 근대 수용과정의 논리였다고 봅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별 시차가 없이 동시적으로 수용된 것이 사실이거든요. 당시 한국사회의 과제는 봉건성의 탈피, 피식민지상태의 극복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주의는 전근대적·봉건적인 제반 제도, 사상, 문화를 비판하고 청산하는 데 예리한 논리를 제공한 한편으로, 제국주의적 식민지배의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르쳤던 겁니다. 나는 지금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보다 인식론으로서의 사회주의에 착목하는 것이지요.

그런만큼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학문방법을 열어주는 데 사회주의, 변증법의 논리는 매우 긴요했지요. 하나의 사례로 문체 문제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의 문학사·지성사에서 근대 산문, 특히 논설문이 언제 성립했는가를 따져보면 3·1운동 직후입니다. 물론 1900년대 계몽주의 단계에서 논설이 매우 중요시되었지만 아직 한문체의 구투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한문체였으며 내용 역시 구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3·1운동 이후 확연히 달라지게 되는데 3·1운동의 영향으로 비판정신이 살아나기도 했지만 사회주의의 수용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근대적인 논설문이 성립된 것이지요. 지금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논설이나 잡지의 평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홍석률 사회주의가 이상적으로는 근대사회, 자본주의사회의 극복을 이야기했지만, 현실에서는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내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지적이신가요? 특히 지식인층에서 근대사회를 이해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논리적 틀로 기능했다는 것이지요?

임형택 맞아요. 근대를 표피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내면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비판적으로 말할 수 있게 한 것이 당시의 사회주의였지요.

홍석률 그런데 현실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90년대 들어 대부분 해체되었고, 근대사회 극복이라는 이상적인 차원의 표방 그 자체도 흔들렸습니다. 사회현실을 현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심층 분석할 도구로서 기능했던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이를 대체할 사상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는 탈현실화·탈구조화·탈논리화의 사조가 만연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임형택 사회주의가 후퇴하고 냉전체제가 해체된 상황에서 세계화 물결에 우리가 그저 휩쓸려가다시피 하는데, 현실을 꿰뚫어보고 방향성을 회복할 논리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 물론 먼 이상으로 보면 사회주의에서 그러한 방향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지금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고 타개할지는 지식인이 당면한 고민거리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문명론의 재구성은 매개적 사고를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도입니다.

한기형 21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문제로 돌아와 생각해볼 때, 20세기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와 가능성 모두를 포함하여 과연 어떤 사회, 어떤 변화들이 동아시아라고 하는 기치 혹은 슬로건 속에 들어와야 하겠습니까?

임형택 그건 나의 역량 밖의 문제입니다만, 중국의 국가 방향은 현재 ‘소강사회(小康社會)’라고 하거든요. 앞으로의 지향으로서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이야기하면서도 상당히 구체적인 시간표를 제시하고 있더군요. 소강사회를 거쳐서 대동사회로 갈 때 중국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물론 시간표대로 실현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어쨌건 장차 거대 중국이 우리 앞에 어떤 모습으로 군림할 것인가? 거기서 포인트는 미래의 중국이 대국주의 혹은 중화주의를 과연 청산할 것인가에 있다고 봅니다. 오랜 역사의 도정에서 거대 중국의 주변에 위치해 있던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 점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지금도 중국의 동북공정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부터 문제입니다. 현재 정부 입장이나 언론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적절치 않아 보여요. 오히려 대국주의를 부추기는 면이 있어요. 중국이 저렇게 나오는데, 우리도 이렇게 맞서 나가야 하지 않는가라는 식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남북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전체적인 구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특히 중요한 대목이 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북한 문제를 늘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여요. 그런데 현정부의 대북정책은 되레 대북공정을 도와주는 꼴이 아닌지 걱정이에요. 북한에 대해 압박정책을 구사하다 보면 북한이 중국의 품속으로 자꾸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민족적인 입장에서 볼 때 북한 압박정책은 ‘자살골’을 만드는 격입니다.

한기형 중국의 대국주의를 오히려 한국에서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홍석률 동북공정에 대해 민족감정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동아시아 공통의 역사상을 만들어가고, 그러한 과정에서 남북도 화해와 협력을 통해 조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지요.

임형택 그래요. 중국이 고구려는 우리 거다, 발해도 우리 거다 하니까 우리도 중국에 대해 헛소리 말라, 그렇게 나가지 말고 동북아지역의 역사를 좀더 큰 틀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근대에 만들어진 국가의 경계에 집착하지 말고 일국사적 관점을 넘어서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역할이겠지요. 지역적 인식의 논리를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론이겠습니다.

 

역사 속의 실학, 현실 속의 실사구시

 

한기형 저는 선생님 평생의 학문적 화두가 실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학의 역사적 맥락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건가요? 실학을 주자학의 한 지류로 해석하는 경향 때문에 개념상의 혼란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저서 『실사구시의 한국학』(창비 2000)에서처럼 ‘실사구시’ 혹은 ‘실학’을 하나의 이론적 방법론으로 사용할 때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도 말씀해주시죠.

임형택 실학의 의미를 역사적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으면 굉장한 혼란에 빠져요.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학문이 실학 아닌 것이 있겠어요. 지금은 경제학이나 공학이 가장 실학에 방불하죠. 그런데 그런 식으로 언제 어디서나 있는 실학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의 실학을 말한다면 17세기에서 19세기의 신학풍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한기형 주자학과는 별개의 학문으로 보는 건가요?

임형택 주자학(성리학)과 실학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고 봐요. 성리학과 실학을 완전히 별개로 여기는, 즉 성리학은 보수적이고 좋지 않은 것인 반면 실학은 좋은 것이라는 식의 단순 구분이 있었지요. 그런데 성리학과 실학은 계승과 극복의 이중적 관계에 있었다고 봅니다. 성리학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 유산이고, 그것이 있었기에 학문과 사상의 높은 수준이 가능했지요. 실학은 성리학의 높은 수준에서 배태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실학은 성리학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실학이 그 논리와 학문 연구의 심화과정에서 이론적으로 성리학을 극복한 거예요. 성리학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 그 안에서 한층 높은 수준으로 수행되었고요. 그러니까 실학은 그 자체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성리학과 구분해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지 않고 성리학의 연장 내지 한 갈래 정도로 규정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실학의 역사적 의미를 무화시키려는 동시에 실학의 역동성과 창조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으려는 것이에요. 보수적인 역사관의 투영이겠지요.

그리고 실학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관계를 봅시다. 실학이 역사의 시간 속에서 존재했던 것이라면 실사구시는 실학의 방법론 또는 실학의 별칭이면서도 실학의 시간대를 넘어서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봅니다. 20세기 후반의 중국이나 한국에서 여러가지 변화와 사상적 반성 속에서 다시 실사구시를 강조하는 정신현상이 나타나거든요. 이처럼 실사구시는 실학과 합치되는 면과 함께, 방법론 또는 사고의 태도로서 현재적인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실사구시에서 시(是)는 진리 혹은 실천의 옳은 길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 ‘구시(求是)’에 궁극적인 의미가 있지만 ‘실사(實事)’에 일차적 뜻이 있는 것이지요. 실사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때그때의 입장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고증학에서의 실사는 구체적인 사실과 증거, 그러니까 금석학(金石學) 같은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서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실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떤 입장에서 실사를 끌어오느냐가 관건입니다. 나 자신은 실사구시가 학문적 자세로 긴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 제목으로도 단 것인데, 우리 학문에 있어서 실사구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치열하게 파고들어야 할 실사가 무엇인가는 그냥 추상적인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냉철한 현실인식, 굳건한 이성을 견지하며

 

홍석률 서서히 대화를 정리해야 될 때가 되었는데, 실사가 무엇인가를 고민해보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일생동안 쌓아오신 학문의 내용과 성격을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항상 현실을, 그것도 표면이 아니라 그 내면의 구조를 꿰뚫어보는 것을 강조하셨고, 이를 통합적으로 인식할 것을 주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민족, 동아시아, 세계의 통합적 인식, 전통과 현대의 통합적 이해지요. 오늘 말씀을 들어보니 역시 현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현상과 부분에 매몰되기보다는 그 구조와 본질을 탐구하고, 이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에서 미진한 것이 있으면 마지막으로 추가해주시겠습니까?

임형택 근대라는 것은 지금까지 나의 삶의 환경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 주체로서의 내가 한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부터 근대에 대한 저항적 의미를 지녔던 것 같습니다. 나를 둘러싼 근대에 대결한다는 학문의식으로 출발한 셈이지만, 실은 근대를 부정했다기보다는 그것을 바로 세우겠다는, 제대로 된 근대를 원망(願望)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근대가, 한국 근대가 심히 왜곡되었고 아직 제대로 된 근대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이지요. 물론 근대는 역사적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지만 이 근대극복의 과제도 우물쩍 뛰어넘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탈근대의 현상이 이미 가시적으로 나타났고 최근에 들어서는 가속화되는 실정입니다. 이성의 시대는 지나고 감성의 시대가 왔다고들 주장하는가 하면, 지식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의 정신이 혼란스럽게 되고 있습니다. 감성에만 매달리고 파편적 정보의 범람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서 그 해법을 이런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떠들기도 해요. 인문학 위기의 근본원인이 다름아닌 그것인데 말이지요.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할 텐데,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현실을 내 눈으로 보고, 내 사고 속에서 명철하게 판단하는 것이 역시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문의 주체성은 확실히 챙겨야 하구요. 아까 감성의 문제를 거론했는데, 모름지기 학자는 이성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감성, 즐거움, 엔터테인먼트에 온통 빠져드는 모양인데, 저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물론 인간은 원천적으로 정감의 측면이 중요하고 정감에 닿지 않는 문화는 존립하기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오늘의 현상을 보고 있으면 감성으로 인간을 포획해서 탈주체의 인간, 박제된 인간으로 제조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혹이 문득 일어나기도 합니다. 거기에 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작동되고 관철되는지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끝으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홍석률 장시간에 걸쳐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대화를 마치겠습니다. (2009년 10월 14일,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