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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용접하는 오르페우스, 노 젓는 오디쎄우스
표성배 시집 『기찬 날』
류신 柳信
문학평론가, 중앙대 독문과 교수. 저서로 『다성의 시학』 『이카로스, 다이달로스, 시시포스』 『통일독일의 문화변동』(공저) 등이 있음. pons@cau.ac.kr
“망치를 잡았던 손에 연필을 쥔다”(「부치지 못한 편지」). 열다섯살부터 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시인 표성배(表成倍)의 다섯번째 시집 『기찬 날』(애지 2009)에 사금파리처럼 박혀 있는 이 싯구를 곱씹으니, 옛 동독의‘비터펠트 운동’(Bitterfelder Bewegung)이 헌걸차게 내걸었던 표어가 떠올랐다. “펜을 잡아라, 광부여!” 1959년 4월 동독의 화학공업도시 비터펠트에서 글을 쓰는 노동자들이 작가들과 의기투합해 발의한 이 운동의 목표는 예술과 노동의 분리를 지양하고 생산노동과 문학창작의 분업을 극복함으로써 사회주의 문화혁명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시장의 논리가 인간의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까지도 과점(寡占)한 이른바 노동의‘초소외시대’에, 구동독의 비터펠트 노선은 실현 불가능한 사회주의 유토피아 프로젝트로 비침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과 삶과 예술의 조화로운 합일을 추구했던 이‘예술적 노동운동’의 정신은 여전히 올곧고 감동적이며 아름답다. 표성배의 『기찬 날』은 이 해묵은 비터펠트 운동의 강령을 경남 마산의 한 노동현장에서 견실하게 실천한 귀중한 성과다. 이 시집은 육체노동과 두뇌노동의 부단한 변증법적 교호(交互)의 씩씩한 산물인 것이다. 노동이 다른 모든 상품처럼 생산수단의 소유자에 의해 사용되는 불우한 현실 속에서도 시인은 노동을 유쾌한 박동에 근거를 둔 생물학적 기본활동이자 생계의 근거이며 시쓰기의 영토라 확신한다. 요컨대 그에게 공장은 노동과 삶과 예술이 공생하는 장소의 혼(genius loci)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편에서 기름때에 찌든 공장은 목가적 풍경의 중심으로 승격된다. 공장 화단에 핀 벚꽃은 시인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이때만 해도」) 작업장 내 야외 쉼터는 “여름날 정자나무 그늘”(「농사일 공장일」)처럼 넉넉하고 시원하다.
차가운 공장에서 인간의 온기를 포착하는 시인의 촉수는 공장 안에서도 여전히 예민하다. 시인은 자신 못지않게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기계의 처지를 가엾게 생각한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엉엉 울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는지 모른다”(「컴프레서 울음소리」). 시인은 컴프레서가 작동하며 내는 소음에서 기계의 존재론적 비애를 엿듣는다. 이처럼 그의 시편에서 기계는 인간을 억압하는 기제가 아니라 오히려 애틋한 연민의 대상이자 든든한 연대의 동지이다. “쌩쌩 불을 뿜으며 돌아가던/그라인더가 멈추어 섰다//가만히 그의 등을 쓰다듬어 보았다//한 생이 어둠처럼 왈칵 밀려왔다”(「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기계를 동정할까? 무엇보다도 기계는 노동자의 땀과 고통을 묵묵히 채록하는 동반자이자, 척박한 노동환경의 역사를 낱낱이 온축(蘊蓄)한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기계는 노동자의 다른 자아(alter ego), 즉‘노동자 연대기’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같은 기계의 인간화 현상은 이 시집 도처에서 발견된다. 기계는 “갓 제대한 사내처럼”“단정히 앉아 있”(「점호」)고, 육중한 쇳덩이들은 호흡을 한다. 시인이 애지중지하는 공구는 “낫이나 호미처럼 늘 붙어 다니는 수족”(「농사일 공장일」)으로 육화되고, 공구통에 가지런히 정렬된 뾰쪽한 드릴의 끝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가지런한 아름다운」)에 비유된다.
나아가 시인에게 공장은 산업화시대 뮤즈가 기거하는 파르나쏘스(parnasos)산이다. “땅 땅 땅땅/따아앙 따아앙 따아아앙” 망치소리에서 자신의 시혼을 일깨우는 예술의 선율인 “나의 바이올린 소리”(「망치의 노래」)를 듣는다. 비유하자면 쇠와 쇠의 마찰음에서 시인의 시조(始祖) 오르페우스가 타는 칠현금 연주를 감청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에서 예술은 곧 노동이고, 공작(工作)은 시작(詩作)의 연장이다.「막장」의 결구는 노동과 예술의 경계가 가뭇없어지는 순간을 보여준다. 기계와 자연, 기술과 예술, 노동과 시심, 집중과 여유의 아름다운 동고동락. 신화의 시대 악공(樂工)으로 살다가 21세기 숙련된 용접공으로 전업한 오르페우스의 노동요를 들어보라. “기계를 돌리고 용접봉을 녹이는 일 외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고개 들어 하늘 볼 생각도 안했는데//하늘이 푸르고요/별이 반짝이고요/내 가슴은 뛰고요”.
공장이라는 비정한 강철세계에 임리(淋냥)한 뜨거운 서정을 발견하고, 기계의 철저한 논리적 메커니즘 속에 암약(暗躍)하는 시상을 곰곰이 가다듬는 시인에게‘노동의 땀’은‘삶(예술)의 즐거움’과 등가이다. 그래서일까. 퇴근길 시인의 모습에서 노동에 찌든 피곤함을 볼 수 없다. “햇볕 따뜻한 봄날 토요일 오전 일 마치고 퇴근하는 길 낡은 아반떼 승용차 한대 마산 봉암공단 해안 길을 씽씽 달리는데, 숭어떼가 은빛 비늘 반짝거리며 장단 맞추듯 숭숭 치솟는다”.(「기찬 날」) 시인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기계(승용차)와 자연(숭어떼)에도 생기가 넘쳐난다. 여기서 “씽씽”과 “숭숭”이란 두 부사가 대변하는 이‘(활)기찬 날’의 풍경은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가 말한‘노동민주주의’가 구현된 참세상, 즉 노동이 곧 삶의 즐거움과 직결되는 세계에 대한 시적 알레고리로 읽힌다. “노동에서 얻는 삶의 즐거움은 인간이 노동의 노예에서 생산의 주인공으로 재구조화되는 데 본질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이렇게 읽어보니, 그가 공장을-지난 시대의 노동시가 그랬듯이-노동운동의 전위, 계급투쟁의 보루로 그리기보다는 노동과 일상, 기계와 인간, 경제와 미학이 상생하는 르네쌍스적 즐거움의 터(locus amoenus)로 이해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는 자본에 나포된 노동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노동생산의 당당한 주체로 자립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물론 시인은 일상의 노동에서 삶의 행복을 발견하고 이를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킨다는 명목으로 노동을 신성화하고 노동현장을 낭만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인간의 얼굴을 한 공장’을 만들기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가 하나둘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인이 추구하는 노동의 유희란 결코 노동현장의 고단함과 노동구조의 모순을 외면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는 우선 노동생산과정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실에 대한 뼈저린 각성의 역설적 소산이다. “날마다 공장에 출근하면서도 나는 공장에 없다”(「그림자」). 또한 이는 시인이 산업재해 문제, 급증하는 이주노동자 문제, 비정규직의 양산, 구조조정의 폐단, 그리고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노동운동의〕 외침”(「빗방울이 떨어진다」) 등 신자본주의시대가 초래한 문제를 냉철히 직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요컨대 시인이 부르는‘공장 목가’는 비인간적인 조건에 묶여 있는 노동자들의 소외와 고뇌, 땀과 눈물, 분노와 저항을 성숙한 시정신으로 극복한‘공장 이야기’, 달리 말하자면‘공장을 팔아 쓴 시’인 것이다.
표성배에게 공장은 노동의 현장이자 생계의 일터이며 예술의 공방이다. 80년대 박노해의 전투적 노동시가 공장을 계급적 불평등이 창궐하는 부정의 공간으로 그렸다면, 90년대 박영근의 실존적 노동시가 공장을 병든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진아(眞我)를 찾는 성찰의 공간으로 이해했다면, 2000년대 이기인의 도발적인 노동시가 공장을 인간의 욕망이 자본의 논리에 길들여지는 신자유주의 훈육학교로 파악했다면, 표성배는 공장을, 싫든 좋든 자기 삶의 전부가 뿌리박은 존재의 터로 인식한다. 시인이 공장을 기계가 지배하는 삭막한 강철감옥이 아니라 생명의 숲으로 상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화의 숲에서 기계의 숲으로 이주해와 이곳의 “정령들과 속삭이는 법”(「숲」)을 익히는 용접공 오르페우스.
삼상(參商)처럼 분리된 예술창작과 노동생산을 “한점 〔희망의〕 불빛”(「불빛」)으로 용접하고자 애면글면하는 표성배의 『기찬 날』을 재차 읽으니, 신화의 시대 오디쎄우스의 배 위에서 쎄이렌과 대면하면서 연출된 장면이 홀연 떠올랐다. 돛대에 꽁꽁 묶인 무력한 상태에서 쎄이렌의 노래(예술)를 즐기는 오디쎄우스의 술책과 귀를 밀랍으로 봉하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노를 젓는 선원들의 근육. 아도르노는 이 계급적 대립구조에서 예술과 노동의 분리, 즉 예술이 실천적 삶으로부터 절연된 채 단순히 감각적 명상의 대상으로 중화되는 인류 최초의 순간을 읽어낸 바 있다. “선사시대와 작별한 후 이런 식으로 예술향유와 노동은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계몽의 변증법』)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접점을 지향하는 표성배 시인은 자신을 포박한 사슬을 풀고 손수 배질하며 쎄이렌의 노랫소리를 듣는 해방된 오디쎄우스가 아닐까. 아니면 오디쎄우스의 명령에 의해 틀어막은 방음 귀마개를 과감히 빼내버리고 “나도 몰래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나도 몰래 다리를 흔들게 하고/나도 몰래 온몸에 활기를 넘치게 하는”(「망치의 노래」) 쎄이렌의 선율에 장단을 맞춰 신명나게 노젓는 뱃사공이 아닐까.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다. “나의 꿈은 봄처럼 오리라”(「꿈은 봄처럼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