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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소설가 특집

 

5001

박솔뫼

1985년 광주 출생. 200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을』이 있음. songbook1123@gmail.com

 

 

 

해만

 

 

누군가 해만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친구의 친척동생이었나. 전화기 너머로 해만에 대해 알려달라는 목소리를 듣고 아 해만이요? 하고 말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는 계속되고 나는 질문에 뭐라 대답해야 했지만 순간 모든 것이 멀어지고 그저 해만, 해만이라…… 생각만 했다.

해만에 가게 된 것은 어느날 회사를 그만둔 후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손에 쥔 것은 큰돈이었나. 어쨌거나 해만에서 서너달 머무르는 데는 문제가 없게 되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남쪽에서 출발한 배는 다섯시간이 지나 해만에 닿았다. 나는 미리 예약한 숙소로 향했는데 배에서 내려 숙소로 향하는 길은 편의점과 까페가 있다는 것 빼고는 남쪽의 어촌마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등 뒤에서 바다냄새가 났지. 짠 냄새가 났다. 숙소 옆 건물은 술집이었고 열려 있는 문으로 생선구이 냄새가 났다. 연기가 났다. 끈적한 공기와 연기, 생선을 굽는 냄새가 기억난다. 연기를 지나 숙소 계단을 올랐다. 한 남자가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우리는 눈으로 인사를 했고 나는 한층을 더 올라가 접수대로 향했다. 두달간 머무를 건데요. 돈을 내고 이름과 주민번호를 적고 들어온 날짜 나갈 날짜를 적고 열쇠를 받았다. 32호실에서 빈자리 아무데나 쓰세요. 여름옷으로 채워진 트렁크는 그리 무겁지 않았고 나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설레는 것도 아니었지만 힘들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다. 방에는 이층침대가 두개 놓여 있었고 나는 오른쪽 침대의 아래칸에 짐을 놓았다. 누군가의 벗어놓은 옷과 어지러운 짐들이 보였고 나는 짐을 풀어 침대 옆의 선반에 놓고 샤워할 준비를 했다.

방은 조용했고 창에서 바람이 불어와 걸려 있는 수건을 흔들었다. 잘 왔다고 생각한 것도 같고 조용하다고 생각한 것도 같다. 해만을 알게 된 것은 신문을 통해서였다. 존속살인을 한 범죄자가 해만에 숨어들어 한참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본 거였다. 그 남자는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다니다 해만까지 흘러들었고, 굳이 말하자면 관광지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유명하지도 볼거리도 없는 해만까지 수사를 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해만이라. 직장을 그만둔 후 어디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보고 싶은 것도 푹 쉬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의 시간에서 변하는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뿐이었다. 해만의 숙소들은 수도에서의 월세보다 가격이 쌌고 날씨는 대체로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다. 해만에 대한 정보가 없지는 않았지만 보통 다이빙이나 써핑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고 바다가 아름답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해만에 가기 직전까지 모든 것이 막연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대학생 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어디서 언제 언제까지 같은 것을 묻고 대답했다. 몇살쯤 되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아직 학교 다닌다고 웃으며 말했다. 숙소 안의 라운지에는 아까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얼음에 술을 부어 마시고 있었다. 여섯시가 넘었을까.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4월말.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아까 접수를 받던 사람은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자기 자리처럼 보이는 곳에 앉아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하나 잠시 머뭇거렸다. 텔레비전은 켜져 있었으나 아무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책을 보던 남자는 가끔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을 흘끗 쳐다보았고 술을 마시는 남자는 술잔을 내려다보다 한번씩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곁에 앉아 있기가 뭐해 뭔가 먹어야겠는데 잡지라도 사와야겠는데 생각하며 숙소를 나와 걸었다. 아직 여름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공기는 무거웠고 온 섬이 늘어진 기분이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슬리퍼나 쌘들을 신고 있었다. 커다란 배낭을 멘 여행객이 지나가고 자전거를 탄 소년들이 지나갔다. 그렇게 숙소를 나와 항구와 반대 방향으로 걷다보니 돔 형태의 교회 같은 것이 나왔다. 원그리스도교정이라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주변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짙은 갈색의 원형 건물이 붉은 꽃이 핀 정원과 함께 있었다. 교회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할머니 몇명이 교회로 들어왔고 그러고는 더는 없었다. 모든 것이 느리고 늘어져 있고 고여 있다. 내가 그랬다. 처음 온 이곳도, 그러니까 해만도. 나도 해만도 천천히 어디로도 가지 않고 여기에 있기만 했다.

길에는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을 구워 파는 술집이 대부분이었고 그밖에는 밥 먹을 만한 곳이 없었다. 술집의 연기도 어딘가로 흘러가지 않고 거리를 메우다 사라지기만 했다. 땀은 나지 않았지만 더운 기분이었다. 할머니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가사는 들리지 않고 합쳐진 음으로 웅웅웅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를 따라가다보니 시장이 나오기는 했는데 그 작은 시장에서 파는 것의 절반은 생선이었다. 생선이 늘어놓인 좁은 길과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생선 굽는 연기. 나는 뭔가 별 수 없어진 기분이 들어 시장 한켠에서 구운 생선을 파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생선을 먹었다. 아무런 기대 없이 들어갔지만 막상 먹다 보니 맛있어서 속으로 맛있네 맛있잖아 하며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시킨 음식을 다 먹고서야 포장마차 안을 둘러보았는데 생선을 갖다준 아주머니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그 뒤로 기름이 잔뜩 낀 원그리스도교정 달력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일기예보가 나왔고 오늘은 구름이 낀 그런 날씨고 내일도 흐린 날씨고 주말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두달쯤 머무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늘의 날씨도 내일의 날씨도 다음날 그 다음날의 날씨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오늘은 구름이 낀 흐린 날씨 내일도 흐린 날씨 주말에는 비가 오는구나. 아줌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또 보고 왜인지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력 옆에는 현상수배전단이 붙어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아는 얼굴을 발견했고 아줌마가 나를 본 것처럼 그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니 아줌마는 왜인지 다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떠밀리는 기분으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시장 밖에는 낡고 허름한 집들, 갈라진 틈으로 이끼가 낀 집들이 보였다. 아무것도 더는 나올 것 같지 않아 걸음을 돌려 항구 쪽으로 향했다. 팔이 조금 끈적였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편의점에서 캔커피와 주간 영화잡지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우니 어쩐지 샤워를 또 해야 할 것 같았다. 입에서 생선냄새가 났다. 해만을 유명하게 한 그 사람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가 엄청났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체구가 왜소하고 회사에서 오래도록 승진하지 못했고 총체적으로 콤플렉스가 심한 사람인데 비해 아들은 그럭저럭 성실하고 평범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조금만 수틀리면 아들을 때려서 고막이 터진 적도 있다고 누군가 증언했다. 그게 어머니였던가 동네사람이었던가 아들 본인이었던가. 아버지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가족에게 풀었다는데 일찍부터 나와 살던 큰아들은 별로 때리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작은아들은 무섭게 팼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해만’이라고 치면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와 다이빙이나 써핑 아니면 차를 빌려 달리는 해안도로 설명뿐이어서 내가 읽은 것은 그 사람에 관한 것이 전부였다. 다이빙이나 써핑보다는 적어도 그 이야기가 더 흥미있었다. 그 사람이 여기에 있었던 거구나. 여기 어딘가에. 무엇을 하며 밥을 먹었을까. 구운 생선을 먹었을까 생각하다 눈을 감고 누웠다.

“아까 수도에서 왔다고 그랬지요?”

잠결에 놀라 고개를 드니 같은 방을 쓰는 대학생이었다.

“네. 뭐 그렇지요.”

“저도 수도에서 학교 다녔거든요. 그리고 아까 그 왜 술 마시던 분도 수도에서 일하다 왔어요.”

“아, 그래요. 신기하네요. 뭐 다들 그렇구나.” 어색하게 웃다 아까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단추를 잠그지 않은 남색 셔츠와 붉어진 얼굴만이 기억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캔커피를 들고 대학생과 함께 라운지로 갔다. 술을 마시던 사람은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고 책을 보던 사람은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대학생이 말했다.

“이분도 수도에서 왔다는데요?”

남자는 몰랐다는 듯이, 어 그래? 하고 웃고는 어디서 살았는지를 묻고 대답했다.

“근데 무슨 일 했어요?”

“회사 다니다 지금은 쉬고 있어요.”

“아. 좋겠네.”

“무슨 일 했는데요?”

“뭐 이것저것 하다가 호텔에서도 일했고.”

“아. 호텔이면 좋았겠네요.”

“안 좋아요.”

남자는 해만에 온 지 6개월쯤 되었다고 했다. 이전에도 몇번 왔는데 이번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여기서 계속 살고 싶네요, 요즘은.

어디가 좋아요? 그러니까 여기 뭐가 좋아요? 나는 정말로 궁금해져 묻는다. 뭐 바다가 좋지요. 남자는 컵에 술을 부으며 대답한다. 그러고보니 아직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낮은 길고 해는 천천히 진다. 바다가 좋구나. 그렇지 여기는 바닷가였지. 아직 실감할 수는 없지만 이곳은 섬이었다. 모두가 아무 말이 없다. 캔커피를 따서 마시는데 커피가 목을 넘어가는 소리, 테이블에 캔을 놓는 소리가 났다. 캔커피를 마시는 소리와 남자가 마시는 술잔의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났다.

“그런데 그 사람 있잖아요. 아버지 죽인 사람. 본 적 있어요?”

“네?”

“그…… 뉴스에 자주 나왔는데. 아버지를 죽였다는데요. 아버지를 죽이고 이리로 도망을 쳤대요. 그래가지고 여기까지 찾을 생각을 잘 안하니까 잡는 데 어려웠다고 그러던데.”

“아 그래요? 들어본 것도 같고.”

“좀더 말해봐요. 왜 아버지를 죽인 건데요?”

“그게, 저도 잘은 몰라요. 아버지가 아들을 학대했다는데…… 아들이 그러다가, 어머니를 때리는 모습을 보고 죽인 거라고 들었어요.”

“응?”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과 어머니를 둘 다 괴롭혔는데요. 어느날 부인을 심하게 때린 거예요. 그걸 말리다가, 아닌가. 그걸 보고 죽인 거였나. 아무튼 그렇대요.”

책을 읽는 사람은 우리 대화를 듣고 한참을 생각하다 주인은 동네사람이니까 알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네. 알지도 모르죠. 동네사람이니까. 그런데 언제 여기 온 거예요? 1년 전이요. 1년 전에요? 네. 1년 전에. 나는 또 한모금 넘기고 대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운 생선을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숙소 안에서도 구운 생선 냄새가 약하게 나고 다시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캔커피만 마셨다. 방에 들어가 잡지나 볼까 생각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해만에 간다고 했을 때 여주는 해만? 해만이라. 도시에 가는 게 어때? 거기는 좀 그렇잖아. 하와이도 어디도 절대로 못 가는 사람들이 써핑하러 가는 그런 느낌인데. 해만에 뭐가 있니. 백년 전에 있었다는 화산에 대한 박물관, 뭐 그런 거? 모르겠네. 그때나 지금이나 아니 언제나 여주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그게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나도 옳은 것이 모든 것을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나부터가 해만에 와버렸다. 해만에는 아무런 특별한 것도 없는 게 맞는 것 같고 결국 여주의 말은 옳은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해만에 왔다. 오랜만에 여주의 말을 떠올렸는데 순식간에 많은 것들이 생각나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해만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와본 적도 없잖아. 결국에는 모두 사실로 수긍하게 되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니라고 할 거야. 그럴 것이다. 나는 갑자기 생각난 여주의 말에 점점 화가 나기만 해서 원래 여주가 했던 말이 어떤 것인지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제대로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질 뿐이었다.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책을 읽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왜 해만에 온 거예요?”

“따뜻하니까요.”

주저없는 대답이었다. 남자는 중간에 한달은 고향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때 빼고는 늘 여기 있었네요. 테이블 유리 밑에는 육지로 향하는 배의 시간표가 붙어 있고 관광안내지도는 뒤쪽에 있었다. 자연동굴 깊은 곳은 기온이 여름에도 20도씨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던 남자는 아무도 얼음을 얼려놓지 않았다고 말하고 잠시 후 얼음을 사러 편의점으로 향한다. 대학생은 생선구이에 밥을 다 먹었고 나는 책을 읽는 남자에게 어디에 가보았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책을 테이블 위에 놓고 고개를 돌려 관광안내지도를 가리키며 자전거로 해만을 돌았던 적이 있는데 지나가면서 다 보기는 했다고 말했다. 아, 자전거로요. 네, 뭐 가을이라 아주 덥지는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창 쪽으로 향하니 해는 붉고 낮은 건물들이 석양에 젖고 있다. 나는 남은 날들을 생각했는데 잠시 아주 기쁘다가 말았다. 그러고는 해가 낮은 건물을 적시는 것처럼 쓸쓸함이 천천히 마음을 적셨다.

 

비슷한 날들이 지나고 며칠 뒤에는 해만의 북쪽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항구도 숙소도 남쪽이라 해만을 한번 가로질러보고 싶었다. 가로지른다기보다는 어쨌거나 한번은 둘러보고 싶었다. 해만에서는 줄곧 아무런 할 일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이곳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버스 안에는 할머니 한명과 초등학교 육상부 애들 다섯이 있었다. 버스는 조금만 달려도 바다가 보였고 그러다 마을이 펼쳐지기도 했지만 곧 다시 바다가 나타났다. 몇몇은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차 몇대가 지나기도 했지만 대개 도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출발한 지 삼십분이 못되어 북쪽에 닿았다. 어제 본 관광안내지도에서는 암석박물관이 이곳에 있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달리다 박물관 마을 정류장에서 내리시오. 정류장에서 내려서 안내 화살표를 따라 15분은 걸어야 뭔가 박물관 같은 게 나왔다. 걷다보니 무릎까지 닿는 풀이 쭉 이어진 길이 나오지를 않나, 줄곧 박물관이 있기는 한 건가 싶었다. 박물관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5층 정도의 회색 시멘트 건물이었는데 그 형태가 반원이라 금색으로 암석박물관이라고 씌어 있는 간판을 못 봤다면 여기가 뭐하는 델까 농업연구소 같네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물관 입구 자판기에서 생수를 뽑아 그 앞 벤치에 앉아 마셨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방금 지나온 풀길이 보였다. 쳐다보고 있으니 다리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여주는 해만에 가지 말라고 했지만 아니 가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해만은 조금… 왜 그런 데엘… 차 마실 곳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인데’ 그렇게 말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해만에 온 건 여주 때문이 아닐까 싶어졌다. 여주는 어느날 마음먹고 나에게 그 애인과 헤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뭔가 그런 관계는 좋지 않은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 하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그런가? 하고 내뱉었지만 이내 그렇다고 수긍했다. 뭔가 나 역시도 더 진행되기 힘들다고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말이 되면 또 만나고, 만나면 역시 사랑하는 게 아닐까 아니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익숙한 다정함 같은 것이 느껴지면 좋았지. 그러다 혼자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슬퍼지고 왠지 끝을 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두달 전의 일이지.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할까. 언제나처럼 월요일에 쉬고 토요일에 회사를 가나. 의외로 이제 슬프지 않았다. 시간이 지났다는 것만 실감이 났다. 그게 변한 것이라면 변한 것이겠지만. 그 사람과 헤어지고 회사는 그만두고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재충전, 재충전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곧 부끄러워지지만 어쨌거나 전환점, 재충전 같은 어쩐지 간지러운 단어들을 말하고 떠났다. 박물관 안에는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젊은 부부뿐이었다. 부부는 암석에 정말 관심이 있었던 건지 어 이거 봐, 아 진짜네 하며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다. 박물관을 한바퀴 돈 후 다시 풀이 이어진 길들을 빠져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두대의 버스가 남쪽으로 향하고 그중 한대는 20분이 지나자 정류장에 도착했고 나는 아까와는 조금 달라졌으나 마찬가지로 바다가 나오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삼십분도 채 걸리지 않아 박물관에 다녀온 게 다지만 왠지 피로해져 씻고 바로 잠을 잤다. 다음날 새벽에 눈이 떠졌다. 새벽의 해만은 공기가 끈적하지 않고 상쾌했다. 침대에 앉아 잠들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모두들 잠들어 있구나 하고.

일주일이 지나고 술을 마시던 남자가 수도로 돌아갔다. 두달쯤 일하고 돈을 마련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수도는 정말 싫지요?”

“싫지.”

대학생은 혼잣말로 싫다 싫다 했다. 술을 마시던 남자는 다시 돌아오면 여기서 아예 살길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이전까지는 돈을 벌다 해만에 오고 다시 돈을 벌러 수도에 가는 생활의 반복이었다고 했다. 그런 방법이 있을까요? 나도 수도로 돌아가기 싫거든요. 대학생은 컵라면을 먹으며 싫다 싫다 했다.

“왜 수도가 싫은데요?”

나는 술을 마시는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술을 따르다 나를 한번 보고는 아무 말이 없다가, 글쎄 그냥 싫어요 대답했다. 그러고는 책을 읽는 사람에게, 너도 돌아가고 싶지 않지? 하고 묻는다. 그 사람은 고개도 들지 않고, 어 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네.”

“전혀?”

“전혀.”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 집에서 기르는 개는 조금 보고 싶다고 했다.

“개요?”

“아. 보여드릴까요?”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남자와 머리를 맞댄 채 한쪽 발을 들고 있는 갈색 푸들을 보았다. 귀엽네요. 귀여워요. 대학생은 돈이 떨어져간다고 하고 학교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고 갑자기 일어나더니 안 가요 학교로 안 가 선언하듯 말하고 담배를 꺼내 피웠다. 담배를 피우며 대학에서는 안 좋은 일뿐이었다고 했다. 뭔가 자신의 이야기를 좀더 하려고 하는데 술을 마시던 남자가 대학생에게도 술을 따라주며, 가는 건 난데 왜 네가 더 열을 내는 거지 하고 말했다. 대학생은, 나도 나를 아니 내가 내가 더 싫거든요 아저씨가 간다고 하니까 나도 가야 될지도 모르겠고 여기는 돈을 벌 데도 마땅치 않잖아요. 이대로 가면 정말 그냥 돌아가야 하고 그게 진짜 슬프고 싫어요 하더니 울기 시작했다. 대학생은 일어선 채로 소리내어 울었다. 우리 모두는 조금 웃다가 말았다. 술을 마시던 남자는 늘 표정이 복잡했는데 이때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크게 웃다 다시 슬픈 표정이었다.

“수도에 가면 어디서 지낼 건데요?”

울음을 멈춘 대학생이 물었고 술을 마시던 남자는 친구 집에서 지낼 거라고 했다. 집에는 나도 안 가. 가족이랑 연락 안하거든. 무슨 일 할 건데요? 남자는 한숨을 푹 쉬더니, 그만 좀 물어 했고 우리는 또 조금 웃었다.

다음날 새벽 남자는 숙소를 떠났다. 웬일인지 그날은 며칠 전처럼 일찍 눈이 떠졌는데 5월의 하늘은 선명했고 구름이 빠르게 속도를 내며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떠난 이후 대학생은 11시가 넘어서야 일어나 라면을 먹거나 텔레비전을 보다 다시 잠이 들었다. 오후가 되면 일어나 다시 텔레비전을 보며 웃기지도 않은 부분에서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러다 곧 가라앉아 울기 시작했다. 대학생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혹은 너무 의식하여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원래도 불안한 면이 있었지만 술을 마시던 남자가 수도로 돌아간 후부터 감정의 기복이 더 심해졌다. 가끔씩은 심하게 위태로워 보여서 집에 연락이라도 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숙소의 주인을 보게 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보통은 책을 읽는 남자가 숙소를 관리했고 주인은 곧 돌아온다는 이야기만 몇번 들었다. 주인은 회색 셔츠에 좀더 진한 회색의 마바지를 입고 짚으로 된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는데 주인은 활짝 웃으며 쉬라고 말했다. 쉬는 게 무엇인지 점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뭔가 피곤해야 쉴 텐데 피곤하지 않아 쉴 일도 없었다. 멀뚱히 서 있는데 화장기 없는 커트머리의 주인은 또 활짝 웃으며 기도회에 다녀왔다고 했다. 무슨 기도회인데요? 물었더니 동네 교회에서 열리는 기도회라고 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접수대 옆에 걸린 원그리스도교정의 달력을 보니 어제까지 기도회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정말 동네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는 거네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원그리스도교정은 생각보다 큰 교회였다. 섬에 도착한 첫날 벤치에 앉아 찬송가를 들을 때만 해도 잘 몰랐지. 언젠가 예배가 없는 시간에 들어가 보았는데 지하 1층을 포함하여 5층 건물에 예배당은 꽤 커서 삼백명도 넘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배당은 신자들이 앉는 자리에 비해 단상이 상당히 넓었는데 건물이 원형이라 그런지 그게 딱히 위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예배당의 정면에는 커다란 금색 원이 벽에 붙어 있었는데 그 모습만 보면 여기가 원불교당인지 교회인지 헷갈렸다. 원그리스도교정 교회는 전반적으로 교회나 성당 같기도, 기도원이나 요양원 같기도, 다른 어떤 데 같기도 했다. 숙소 주인이 다녀온 기도회는 아마 지하에서 열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바로 기도실1, 기도실2라는 현판이 보였다. 기도실 앞에 서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게 왠지 숙소 주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긴장된 마음으로 다시 일층으로 올라와 교정을 나왔다. 생각해보면 숙소 주인이라고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기도하려고 하는데요, 그냥 궁금해서 와봤는데요, 산책 삼아 들렀는데요, 아무래도 좋을 것이었는데 어쩐지 긴장이 되어 급히 나왔다.

 

해만에 있는 동안 가끔 집에 연락하고 그럭저럭 지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게 뭐였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라든가 나 자신이라든가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잘 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 그리고 나는 어느 자리에 있게 될까 생각해보려고 해도 의외로 앞일에 대한 생각은 잘 되지 않아 관두었다. 그보다는 지난 일들 사람들 그때 그건 어떤 것이었더라 어떤 것이 되어버린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애써 생각한 것도 노력한 것도 아니고 문득 떠오른 거였다. 그럴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잠시 생각하다 슬퍼하거나 기뻐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들에 대한 생각도 점점 더 흐릿해지고 닿을 수 없이 멀리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해만에 있고 사람들은 멀리, 원래 멀었다면 더욱 멀리 있다. 그렇게 있다가 가끔 흔들리고 그 사이에는 해만이 있고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사람들과 천천히 멀어져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것같이 보였으므로 결국엔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해만에 가야겠다고 결정한 후 여주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게 해만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의 관계가 거기까지였는지, 아니 그보다는 내가 여주가 결국 우리가 그게 끝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만에서 헤어진 애인보다 여주 생각을 더 많이 했는데, 여주와 연락하지 않게 된 것이 연인과의 결별 같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에는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이곳에 있었고 다른 모두는 저편에 있었다. 결국 나는 이곳에 있기 위해, 모두를 저편으로 보내버리기 위해 해만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를 멀리 바라보기 위해 모든 것이 고여 있고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는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닌가. 그걸 알아채는 데 한달의 시간이 걸렸으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내가 덮어두고 지냈던 세계 쪽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면 달라진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숙소에는 또다시 대학생이 찾아왔다. 새로 온 사람은 원래 있던 학생보다 열살이 많았는데 졸업을 하지 않았으니 어쨌거나 대학생이라고 했다. 두명의 대학생은 매일 늦게 일어나 컵라면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인터넷을 하다 다시 자고 또 일어나 인터넷을 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깨어 있는 나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저 깨어 있을 뿐, 잠시 걷거나 책을 볼 뿐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 온 대학생은 6개월간 백화점 지하 특설판매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수도는 집값이 너무 비싸니까 여기 온 거예요. 돈이 떨어질 때까지 있으려고요. 수도는 정말 집값이 비싸, 그렇지? 그렇지 뭐. 대학생 둘은 고개를 끄덕인다. 아저씨는 언제 오시려나. 어린 대학생은 멍하게 눈앞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리고 운다.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버시려나. 보고 싶다. 눈물을 닦고 물을 마신다. 너는 그 사람을 무슨 돈 벌러 나간 아버지처럼 그리워하는구나? 네? 아버지가 왜 그립나요? 아버지는 하나도 안 그립고 입에 담기도 싫은데요. 생각하기도 싫어요. 어린 대학생은 정색하며 말했다. 나는 예전처럼 웃음이 났다. 그러고는 술을 마시던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붉은 얼굴과 복잡한 표정, 단추를 채우지 않은 셔츠만이 선명했다.

유월이 가까워오자 해만에는 밀짚모자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예전보다는 자주 눈에 띄었다. 그중 몇몇은 내가 묵는 숙소에 짐을 풀었고 조용하던 숙소도 가끔 시끄러워졌다. 그때부터 대학생들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며칠 묵는 사람들, 들뜬 분위기, 해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 자기들은 가보지 못한 바닷가와 박물관과 동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대학생들은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걸 보면 나 역시 말은 안했지만 들뜬 분위기가 마땅치 않았던 듯하다. 이유야 어떻든 교회를 나갔다. 그러니까 주인이 다니는 원그리스도교정에 다니기 시작했다. 무엇을 믿어보려던 건 아닌데 예배에 참석해보니 생각보다 재밌었다. 누군가 말을 걸면 어쩌나 긴장했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고 나는 생전 처음 듣는 구약성서를 옛날이야기 듣듯이 들었다. 신학적으로는 어떻게 해석되는지 알 수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원그리스도교정이라는, 듣고 또 들어도 생소한 이름의 교회였으니까. 오늘 예배가 특이한 것인지 그럭저럭 무난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말이 어렵나요? 이게 의외로 영어로 하면 쉽습니다. 인 더 비기닝 갓 크리에이티드 블라블라 이거거든요.”

어느날의 예배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짧은 머리의 남자가 할머니들 앞에서 영어를 섞어 쓰며 진행을 했다. 전에 한두번 교회에 가본 적은 있지만 그게 다였다. 그러니 교회라든가 예배라든가 나보다 어려 보이는 목사로 추정되는 사람이라든가 찬송가나 기도 등등 원그리스도교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평범한지 특이한지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산책하듯 교회에 나가 어떨 때는 정말 산책만 하다 돌아오기도 했고 기분이 내키면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를 보든 안 보든 교회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숙소에 돌아오면 다시 아무도 없는 조용한 오후시간이었다.

숙소 주인은 달이 바뀌자 또다시 기도회에 참석한다고 자리를 비웠다. 어린 대학생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어느날 들이닥친 부모님 손에 질질 끌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학생이 입에 담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다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고 대학생의 어머니만이 소리를 질렀다. 학교도 휴학시킬 거고 당분간 집밖으로 나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다. 대학생은 마트에서 장난감 사달라고 뻗대는 아이처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안 가겠다며 목이 터져라 울었다. 대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았고 어머니는 그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어머니는 대학생의 등짝을 때리며 밖으로 끌어냈다. 나이든 대학생은 며칠째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책을 보던 사람은 난감한 표정이었고 나는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물이나 마셨다. 대학생의 어머니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대학생이 등짝을 맞는 소리, 목메어 우는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을 때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와 책을 읽는 사람은 마주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쟤가 병원에 먼저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불안해서?”

“저 정도면 많이 불안한 거 아니에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집에서는 어떤지 모르니까.”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져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에어컨은 돌아가고 있지만 손에 잡히는 공기는 여전히 끈끈했다.

“사람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때요?”

나는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다. 책을 읽는 남자는 여전히 책을 읽고 나의 질문은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 다시 물이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일어나 냉장고로 가서 병을 꺼내고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남자는 나를 보며 물었다.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남자는 웃고 있었다.

“조금 쓸쓸할 것 같긴 한데. 그런데 곧 잊어버릴 것도 같아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다시 물을 마셨다. 컵에 물을 채워 테이블로 가져갔다.

“매일 할 일이 생기니까 곧 잊어버리기도 하겠네요 정말.”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런데 잘 잊어버리게 돼요. 다들 비슷하니까. 그러다 다시 생각나기도 하는데……”

나는 다시 바닥에 드러눕고 책 읽는 사람은 테이블에 엎드린다. 그 아래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는 가라앉기만 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한 거예요?”

“다시 기억나는데요. 사람들이 다시 기억나기도 해요. 그런데 그게 꼭 그 사람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비슷한 사람들이 섞여서 떠오르더라도 그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남자의 대답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멀리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누운 채로 고개를 드니 나이든 대학생이 며칠 만에 방에서 나왔다. 땀냄새가 났다.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리고 머리는 감지 않은 채였다. 나는 손을 들어 인사를 했고 나이든 대학생은 그애는 간 거냐고 물었다. 응, 끌려갔어요. 나이든 대학생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며 텔레비전을 켰고 나는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다섯시쯤이었나 늦은 오후였는데 숙소의 유일한 대학생이 된 그는 정규방송이 끝날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날 나는 편의점에서 우유와 빵을 사먹었고 책을 읽는 남자는 아마 뭔가를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친구의 친척동생이었나, 해만에 간다고 한 사람은? 그 사람은 자기 말만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제 생각에 해만은 나른하게 지내기 좋은 곳 같거든요. 저는 사실 너무 지쳐 있고요. 이곳이 아니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해만이 그런 사람들에게 좋을 것 같아요. 뭐랄까, 느리게 호흡하는 가운데 중요한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그런가? 하고 생각하다 다른 건 모르겠고 생선이 싸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아무 말이 없고 나는 하던 일이 있다고,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묵었던 숙소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만히 서 있었다. 전화기를 손에 쥔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숙소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과 마주하자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숙소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 자리에 있겠지. 해만도 여전히 남쪽에서 배를 타면 갈 수 있을 것이고 숙소 역시 그곳에 있을 것이며 원그리스도교정과 암석박물관도 그곳에 있을 것이고 언제나 끈끈하고 무거운 공기가 그곳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까. 숙소로 전화를 걸어 그 책을 읽던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나요 아직 그 자리에 있나요,라고 물으면 알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여전히 이곳에 있어요,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어째서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지 않을까. 모든 것이 그곳에 있더라도 그 사람은 꼭 다른 어딘가로 서서히 자리를 옮겼을 것만 같다. 그 사람은 해만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곳에 그대로 있을 것 같지 않다. 떠난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정말 그런가. 해만도 숙소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책을 읽던 그 사람도 모두 그곳에 있는 것인가. 정말 그럴까. 나도 이렇게 와버렸는데 모두 제자리에 있는 걸까.

대학생이 떠난 다음날 밤 어두운 라운지에 앉아 물었다. 나와 책을 읽는 남자는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에어컨을 끄고 열어둔 창문으로는 커다란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시원하지도 않고 크게 크게 불어오고만 있었다. 나와 남자는 맥주를 마시며 대학생 이야기를 하다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지나온 곳들을 이야기했다. 남자는 수도에 대해 물었고 나는 남자의 고향에 대해 물었다. 남자는 서쪽 도시가 고향이라고 했고 나는 그곳에 대해 물었다.

“사람들이 안 가는 곳 중에서, 그러니까 잘 모르는 데, 그런 데 자주 갔던 곳 있어요?”

“음. 집 근처가 그렇지 않나?”

“뭐 그러니까. 그런 데.”

남자는 한참을 생각하다 자주 가던 극장 앞의 천변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래된 극장을 빠져나와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걷다보면 물이 흐르는 곳이 있다고 했다.

“물을 보는 걸 좋아하는데, 시간이 잘 가잖아요.”

나는 계속 말해달라고 했고 남자는 천변과 천변 끝에 있는 공원과 공원에 날아오는 비둘기와 비둘기를 쫓는 노인들과 그것들을 다 지나면 왼쪽에 펼쳐진 몇년째 철거 예정인 대단지 아파트를 이야기했다. 그 모든 것은 전혀 구체적이지도 생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극장을 나오면 천변을 볼 수 있는지 흐르는 물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시간이 잘 가는지 노인들은 매일같이 비둘기를 쫓고 몇년째 삭아가고 있는 시멘트 덩어리가 어떻게 사람을 매몰시키는지. 실제로 가보아야 모든 것이 구체적인 그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

“뭐 다 그대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사실 모르니까요.”

그리고 나와 남자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다 마신 맥주 캔을 구겨서 던졌다. 커다란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고 바람이 들어오는 만큼 내가 가진 것들은 스르르 빠져나가 나는 천천히 사라져가고 가벼워졌다.

 

여름이 끝나고 나는 수도로 돌아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책을 읽던 남자가 말했던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해하고 나자 그 말은 당연하게 여겨져 어째서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는지 오히려 의아했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지? 어느 때고 그렇지? 여전히 나는 가볍고 바람이 통과하고 흔들거리고 텅 비어 있고, 질문들은 빈 공간을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돌아가고 싶어지는 때도 없다. 언제나 그랬지만 다시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게 어떻지는 않았다. 사라지는 것을 계속 지켜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해만에서 우리는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그러다 말이 없고 흔들흔들거리고 떠나고 돌아가고 그리고 생각한다, 그처럼 해만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천천히 모든 것이 멀어지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나요? 사라진 곳에 대고 묻는다. 결국 텅 비어버린 자신이 강렬해질 뿐이지. 아, 정말 그렇지? 질문들도 빠져나간 텅 빈 곳에 대고 대답했다. 아, 그렇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