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파문(波紋)의 흔적과 궤적
장석남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
최현식 崔賢植
문학평론가, 경상대 국문과 교수. 평론집 『말 속의 침묵』 『시를 넘어가는 시의 즐거움』 등이 있음. chs1223@hanmail.net
파문은 언제나 반쪽이다, 아니 그것을 보는 우리의 눈이 반쪽이다. 누구도 수면 아래에 이는 파문의 궤적과 흔적을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면 장석남(張錫南)의 『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2010)는 수면 아래의 파문을 지향하는 뜻밖의 형식이다. 이른바 ‘신서정’에서 출발, ‘배’를 민 끝에 미당과 수영을 에둘러 종내는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오는 이”(「동지(冬至)」)를 기다리는 장석남의 내면은 일견 안분지족에 다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시어의 고졸한 농담(濃淡)과 리듬은 “한 덩어리의 밥을 찬물에 꺼서 마시고는 어느 절에서 보내는 저녁의 종소리”(「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와 더불어 더할 나위 없는 격조를 형성하니 말이다. 하지만 ‘종소리’에 마음을 뺏겨 세상을 일렁이는 그것의 파문을 채 감각하지 못하는 순간, ‘떨림’의 속 깊숙이에 “집을 한 채 앉히는 (…) 내(=시인—인용자) 평생의 일”(「오막살이 집 한 채」)은 문득 부서지거나 사라지니 각별히 조심할 일이다.
보이지 않는 파문 속으로 잠수하려는 장석남의 의지는 윤리적 감각의 갱신 혹은 회복과 밀접히 관련된다. “윤리의 무늬를 지우고/윤리가 감춘 죄를 생각”하는 “고장난 장에 깃든/사랑”(「변기를 닦다」)은 자기애(哀/愛)의 한 방법이다. ‘고장난 사랑’의 간취(看取)는 무엇보다 시인 자신을 객관화하고 세계에 거리를 두는 것, 이를테면 ‘나’가 ‘얼룩들’과 ‘물그림자’의 ‘술래’였음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얼룩들’과 ‘물그림자’는 “지워지지 않는 분홍의 핏자국”(「술래1」)을 만지게 하고 ‘사물’과 ‘사내’를 비춰주는 원초적 세계의 매개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자기현시의 형식이 아니라 타자로 스며들거나 타자의 상처를 껴안는 자기소멸의 형식이다. ‘술래’이기를 그치지 않는 한 장석남의 시는 치유를 밀어내며 스스로 상처를 덧내는 장으로 끊임없이 환원될 수밖에 없다. 텍스트 표면의 통합적 서정과 달리 그 내부에 차이성의 순간이 일렁인다는 느낌이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곳에서 현실에 대한 방법적 사랑이 싹트고 숙성한다는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가령 “내가 곧 부뚜막 뒤의 침침함에 맡겨진다는 것” “마당 바깥으로 나서는 길에 뜬 초롱한 별들은/모든 서룬 사람의 발등을 지그시 누른다는 것”(「부뚜막」) 같은 표현을 보라.
‘서룬’ 아이러니의 발현은 흔히 소설 특유의 것으로 지칭되는 성숙한 남성의 시각이 장석남식 차이성에도 깊숙이 관류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자기 확인을 위해 탐색의 여정을 밟는 ‘문제적 개인’을 시적 주체로 소환하는 것은 분명 자의적이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이미 철지난 것으로 소문난 총체성의 가족들을 슬쩍 불러보는 까닭은 수면 아래 은폐된 ‘파문(波紋)’과 그것이 몰아옴직한 ‘파문(破門)’의 충격과 고통을 헤아리기 위한 것이니. 그렇다면 『뺨에 서쪽을 빛내다』는 실험의 종결이기는커녕, “문 없어도 시끄러움 하나 없는/들끓는 방”(「방」)이 건축되는 시적 파문(破文/破門)의 장(場)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저 수면 아래 파문(波紋)의 맨살을 “뺨에 서쪽을 빛내”(「서쪽1」)듯 문득 조우할지도 모른다.
‘파문의 맨살’은 물론 함부로 볼 수 없는 어둠의 형식이다. 장석남의 시가 관조와 응시의 형식을 상용하면서도 세계의 핵심에 육박하는 찰나에 청취의 문법을 새롭게 적용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가령 “어둠이 귀에 익”으면서 청취의 주체가 ‘귀’로 옮아가는 희유한 장면(“십리 안팎은 되는 듯 먼 데까지/귀는 나갔다 오고 나갔다 온다”)을 보라. 청취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내면의 영역과 경험은 비근한 일상을 넘어 점차 현실의 저편(‘어둠’)으로 확장된다. 그 순간 ‘어둠’의 지평은 내면 자체로 변이되어 존재를 재구성하게 되는 것인데, 그 경험이 “시린 연못물에 별은 참되고 참되다”(「어둠이 귀에 익어」)는 윤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이 윤리적 감각은 관념의 재생산이 아니라 그것을 혁파하는 미학적 실천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파문(破門)의 잠재적 형식이 아닐 수 없다.
“시의 나라의 국경을 부수고/시의 마을의 약도를 지우고/시를 지우고/시의 자리에 앉아/어라,/아침이 와서/함께 덜덜 떨다”(「시를 다 지우다」). 장석남의 내면풍경이라 해도 좋을 구절이다. 그의 시적 작파는 언어유희의 묘술이 아니라 “무너진 뼈끝마다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나의 하관」)오르는 생사(生死)의 동시적 움켜쥠이다. 채우면서 사라지는, 그래서 찬연한 끝에 더욱 비극적인 “햇빛 아래의 가여운 첫눈”(「11월」)의 현장. 시인은 이것을 수미쌍관법에 기댄 역행의 서술구조를 취함으로써 동일성과 차이성의 기이한 사랑과 동서(同棲)를 보편화한다. 요와 몸과 사랑과 죽음의 대상(對象)적 합일을 그린 「요를 편다」가 그 원리의 표상이라면, 「뺨의 도둑」은 주체와 타자의 진정한 통합적 교환과 전유가 실현되는 장이다. 그러므로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뺨의 도둑」)리는 ‘나’는 벌써 수면 아래 파문의 형식이다.
이 ‘기다림’의 표지는 어쩌면 장석남의 파문(波紋)이 아직은 시적 파문(破門)에 들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서룬’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꽝꽝 언 시 한짐 지고/기다리는 마음”(「동지(冬至)」)을 순순히 부려놓음으로써 장석남 시의 윤리성은 더욱 강화되며, 파문(破門)의 가능성 역시 미구의 기대지평에 진입하는 듯하다. ‘기다림’은 나와 타자의 조응을 염원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세계의 최종심급에 오르고자 하는 그 어떤 것들의 절대성을 상대화하는 힘이기도 하다. “새벽뿐인 자리에 떨고 앉아 공복을 즐기”(「시를 다 지우다」)는 시인의 지혜를 온종일의 미련한 기투로 요청하는 것. 당신과 나는 이 그악스런 욕망 속에서야 비로소 수면 위아래의 파문이 생산하는 “문자로는 기록될 수 없는 서룬 사랑”(「부뚜막」)을 조우하게 될 것이다. 문자 없는 시야말로 가장 이상적이고 완결된 파문(破門)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