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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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명박 이후’를 내다보며

 

더 나은 체제를 향해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연대와 열광』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등, 편서로 『87년체제론』(창비담론총서 2) 등이 있음.

jykim@hs.ac.kr

 

 

1. 물화 또는 주체의 위기

 

지난 몇년 사이에 우리에게 익숙해진 말로 ‘스펙’(spec)이 있다. 본래 공업제품의 사양(仕樣)을 뜻하는 영어 specification의 줄임말인데, 언제부터인가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세대가 갖춘 인증된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학 수시입학 전형에 지원하는 고등학생을 비롯해 자기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바를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이렇게 스펙이라는 말이 두루 쓰임에 따라 이제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비치던 당혹감과 개탄의 분위기마저 사라진 듯이 보인다.

공업제품의 사양과 인간의 개성을 동일시하는 풍조 앞에서 우리는 거의 한세기 전 루카치(G. Lukács)가 제기한 ‘물화’(物化, Verdinglichung)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상품형식이 모든 생의 표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식, 즉 지배적 형식으로 화한 사회”1)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제기했다. 우리 사회 성원들이 자신을 서술하는 데 거리낌없이 스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태는 루카치가 제기한 자아의 물화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루카치는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 자체로 물화를 유발한다고 보지만, 물화가 실제로 어느 정도 일어나는지는 경험적인 조건에 달려 있다. 여기서 그런 경험적 조건을 상세히 가다듬을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스펙이라는 말이 일반화된 경위 정도는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저성장사회로 진입하고 양질의 일자리 수가 정체함에 따라 대학생들에게 괜찮은 직장 얻기란 너무 힘겨운 일이 되었다. 그들은 취업을 위해 여러 자격증을 획득하고,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며, 지원한 직장에 맞춘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면접장에 나가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결국 타자가 원하리라 예상되는 형태로 경력을 쌓고 서술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인데, 이는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의 자기관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준다. 주어진 상황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과도하게 유연한 존재로 파악하고 뜻대로 조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자기관계 방식은 자기경영의 기법으로 체계화되어 실용적 처세서로 유포되고 있으며, 그만큼 사람들은 그런 식의 자기경영에 나서도록 부추겨지고 있다.

하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주재해보려 한 사람은 누구나 자아가 그렇게 쉽게 자기통제에 굴복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주관적 세계를 건축하고 인성을 도야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마찰 없는 과정은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어떤 어두운 부분, 자신에게 맞서기조차 하는 충동과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충동과 성향은 때로는 우리 의지에 큰 장애가 되지만 때로는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에 대한 배려란 충동 통제와 해방이라는 균형잡기 어려운 이중적 기획선상에 있다.

그러나 청년세대의 구직 노력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듯이, 능력 표준, 외모 표준, 심지어 감정적 태도 표준마저 포함하는 여러 스펙을 충족하기 위해 계속 자신을 재구성하고 제시해야 하는 개인은 자아를 사물인 양 조작하고 통제하려 들게 된다. 그는 자신과 스펙 사이의 거리를 불안하게 응시하게 되며, 그에 따라 자기관계도 내적 궁핍을 초래하는 과정으로 변해버린다. 요컨대 스펙이라는 말이 자기서술의 핵심어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압력이 주체의 위기에 이를 정도로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하에서는 이렇게 심화된 위기를 극복할 희망의 자원과 전망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주체의 내면까지 파고든 위기의 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런 위기의 원인을 재생산 위기로 소급해 가보려고 한다(제2절). 그리고 그런 재생산 위기를 일으킴으로써 지속 불가능해진 현 체제의 특징을 분단체제론과 87년체제론의 관점에서 검토해볼 것이다(제3절). 더불어 이런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백낙청의 ‘2013년체제’론과 관련해 검토하고(제4절), 그것을 현실화할 방안을 모색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과 관련해 연합정치와 ‘희망버스’에 대해 살필 것이다(제5절).

 

 

2. 위기에 처한 사회적 재생산

 

주체의 위기를 일으키는 사회적 압력은 청년세대의 구직난을 넘어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제기해 널리 공감을 얻은 일자리, 보육과 교육, 주거, 노후, 건강 불안이라는 ‘5대 민생불안’은 그런 사회적 강압의 출처가 어딘지 잘 요약하고 있다.2) 5대 불안의 현황은 사실 많이 알려져 있다.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들이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어디서 끈을 잡아당기든 모든 문제가 넝쿨처럼 이끌려나오는 실정이다.

일자리문제에서 시작해보자. 잘 알려져 있듯이 품위있는 일자리 수가 줄고 있다. 청년세대 다수가 꿈꾸는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 혹은 각종 공사(公社)의 정규직은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고작 5% 정도밖에 안된다.3) 그런데도 이런 직장을 향한 경쟁이 나날이 격화되는 이유는 여기와 나머지 사이에 임금, 고용안전성, 사회보험, 연금 등 모든 수준에서 심각한 격차가 존재하며, 입직(入職)시기에 좋은 직장을 갖지 못하면 이후 좋은 직장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자리 불안은 교육에 대한 과잉투자와 연계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이나 막대한 사교육비 지출 등은 이미 오래 묵은 문제다. 이런 교육투자 증대는 그 수익률을 지속적으로 감소시켜왔는데, 사람들은 그에 대해 자녀 수를 줄여 투자를 집중하는 동시에 투자의 절대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전자는 출산력의 급격한 저하와 인구의 고령화를 불러왔고, 후자는 그 자체로 경제적 한계에 도달했다.4)

이런 문제들은 주거문제와도 연계되어 있다. 건설 중심의 경제체제와 부동산 투기의 결과 주택 가격이 너무 높아졌고, 젊은 세대는 주택 마련이 어려워 혼인을 미루고 있다. 더불어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인데다 그중에서도 노인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 성원들이 얼마나 대책없이 노후와 질병을 맞이하는지 말해준다.5)

5대 불안 가운데 일자리문제가 사회적 생산과 발전방식이 개인의 삶과 접맥되는 지점이라면, 그 나머지는 사회적 재생산과 연관된다. 이때 사회적 재생산은 의식주와 생로병사 그리고 기초적 사회화와 관련된 과정 전반을 의미한다. 이런 재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상을 운영할 수 있고, 사회적 노동세계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런 삶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할 수 있다. 따라서 5대 불안이란 사회적 재생산 그리고 그런 재생산영역과 사회적 생산체제의 연결고리가 모두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재생산이 위기에 처한 경위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국가, 시민사회, 가족(개인)의 관계를 우리 사회의 발전패턴과 관련해 살필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잘 알다시피 전쟁과 분단을 통해서 기본형태가 갖추어졌다. 전쟁과 분단이 그후 우리 사회에 미친 많은 영향 가운데 지금 논의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전쟁이 초래한 국가기구의 과잉성장과 사회적 연대의 심각한 약화다.

전쟁국가는 이후 ‘준전시상태’ 속의 권위주의적 발전국가로 전환되면서 사회 성원을 통제하는 동시에 경제성장을 매개로 그들을 동원해나갔다. 다른 한편 사회적 연대가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에 개인들은 민주적 법치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안정성, 시민사회 성원으로서의 사회적 유대감, 직장 성원 및 가족 성원이라는 중층적 보호 네트워크를 갖지 못한 채 오직 가족이라는 고치 속에 웅크린 존재가 되었다.

이 때문에 개인이 가족 속에 깊이 감싸인 상태가 지속되며, 가족이 사회적 행위의 중심단위이자 가장 핵심적인 복지 공급기관이 되었다. 또한 이런 가족은 사회적 유대와 절연되어 일종의 무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라고 부를 만한 성향을 발전시켜나갔다. 가족은 개인이 원자단위로 해체되지 않게 하는 마지막 분자단위가 됨에 따라, 사회적 원자화의 부정적 속성을 짊어졌다. 가족은 부도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둔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기적인 것을 넘어 부도덕해질 수도 있는 무도덕성을 특징으로 지니게 된 것이다. 무도덕적 가족이 실제로 어느 정도 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지는 전체 사회의 발전패턴 및 가족의 계급적 지위와 함수관계에 있다. 고도성장기에 가족은 자신에게 맡겨진 기능을 상당정도 수행할 수 있었지만 그 능력은 계층적 지위와 연동되어 있었다. 그래서 고도성장기에도 빈곤층 가족은 개인을 보호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6)

재생산의 기본토대인 주택, 의료, 교육 등이 사적 소유의 원리에 지배되고, 공적 복지가 극히 취약한 우리 사회가 저성장 국면으로 이행하자, 그 속에서 가족은 곧장 과부하상태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족이 보호기능을 상실하고 무방비상태의 개인을 사회로 방출하는 일이 빈곤층에서 하층을 거쳐 중간계급에까지 밀려들어가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족의 계급적 실추를 방어하려는 노력은 ‘상속의 열정’이라고 할 만한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확실히 전통적 가족의 핵심가치인 봉양(奉養)은 이제 방향을 바꾸어 자녀에게 향하고 있다. 거의 전도된 효(孝)라고 부를 수 있는 상속의 노력은 재벌가, 중산층, 심지어 중하층에 이르기까지 두루 나타나며, 진보와 보수 또한 가로지른다. 우리 사회 성원들이 재벌가의 후안무치한 불법상속이나 다수 고위공직자는 물론 현직 대통령마저 저지른(자녀교육을 위한) 주민등록법 위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둔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런 모습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과 다르지 않은 상속의 열정을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과정의 반복과 증폭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일자리, 교육과 보육, 주거, 건강, 노후에 대한 불안이라는, 어느 면에서는 매우 오래된 문제들을 재생산 위기로 다시 파악하려고 하는 이유는 재생산문제를 처리해온 가족에 가해진 압력이 임계점을 넘어선 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올해 우리 사회의 중심의제 가운데 하나였던 ‘반값 등록금’을 생각해보자. 이 문제의 핵심에는 비싸지만 수익률은 엄청나게 떨어진 대학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그런 대학 등록금이 중간계급에까지 더이상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 되었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재생산의 부하는 이제 중하층을 넘어 사회 중심부까지 깊게 침투했으며, 가족의 상속전략은 교육과 주거 그리고 노후와 질병 문제 전반에서 실효성을 잃고 있다. 이 때문에 가족이 짊어졌던 부담을 그 바깥의 시민사회와 국가의 영역으로 사회화하려는 담론이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복지담론이 그토록 빠르게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며 중심의제로 부상한 것은, 재생산 위기에 대처하려면 성장과 가족을 연계하는 기존 모델과는 다른 방향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점이 널리 자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으로 복지담론 또한 해결책이라기보다 재생산 위기로부터 발원하는 징후로 봐야 함을 말해준다. 이제 재생산 위기를 일으키는 체제의 논리를 검토해보자.

 

 

3. 현 체제의 지속 불가능성

 

자아가 물화되는 현상의 뿌리가 재생산 위기에 있다면, 재생산 위기는 현 체제의 위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 체제의 특성과 현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 한번 분단체제와 87년체제 그리고 87년체제가 해체/재구성하고자 했던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체제(박정희체제)를 열쇳말로 소환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개념들을 통해 조명해본다면, 우리 사회의 기본틀은 1953년 휴전으로 확립된 분단체제의 영향 아래 형성된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체제 속에서 조형되었고, 그것을 해체/재구성하려는 87년체제의 성과가 복잡하게 조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87년체제는 구 권위주의체제와의 타협으로 형성됐기에 그것에 의한 구체제 해체작업은 충분치 못했으며,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작업도 사회집단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조정되지 않은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구체제를 해체하는 그만큼 구 권위주의체제와 상호안정화 관계에 있던 분단체제를 흔들고 침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7)

이런 체제의 구성이 앞서 논의한 재생산 위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분단체제에 안착했던 구 권위주의체제 아래서 만들어진 제도와 행위패턴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 의료, 주거 영역이 다분히 사적 소유 원리를 따라 제도화되어 있으며, 소유권 지상주의가 상식인 양 통용되고 있다.8) 교육을 통한 지위상승 경쟁이 급격한 교육 팽창을 일으켜 교육과 노동시장 간의 괴리가 커진 것도 구체제적 제도에 적응하는 행위가 증폭되어온 데서 비롯된 것이며, 주거형태가 ‘아파트 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획일화되고 아파트 재테크가 중산층 형성의 중심 메커니즘인 것도 그렇다.

그럼에도 구체제의 핵심인 민중 부문의 권위주의적 배제와 국가-은행-재벌의 삼자동맹에 근거한 발전체제는 붕괴했고,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에서 벗어난 자본과 민중 부문은 각각의 체제개혁 프로그램인 신자유주의화와 민주화를 작동시켰다. 지난 20여년의 과정을 요약하자면, 보수파와 재벌은 발전국가체제의 유산과 신자유주의화 모두를 자신의 계급적 이익의 관점에서 조합해나갔고, 그 결과 경제적 영역에서 강한 헤게모니를 구축했다. 하지만 민주파는 시민사회를 발전시키고 사회운동을 확장하고 문화적 가치관을 심층적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그런 성과를 법적으로 제도화하고 안정화하는 데까지 이끌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 결과 재생산문제가 가족을 중심으로 충족되던 구체제의 행위패턴은 유지되지만, 그것과 기능적으로 연결되었던 이전의 발전체제는 형해화되었다. 그리고 이 부정합상태가 계속해서 재생산영역에 대한 압력을 강화해온 것이다.9)

따라서 발전체제와 사회적 재생산체제 모두의 혁신이 요구되었지만, 그 방향을 규정할 핵심집단인 재벌과 노동운동은 갈수록 퇴영적으로 변해갔다. 재벌의 경우, 경제독점이 지나쳐 이제 문어발 경영이 아니라 지네발 경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10) 하지만 재벌 중심 성장의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는 현저히 사라졌다. 재벌은 글로벌한 기업이 되었지만, 다수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바는 거의 없어진 셈이다. 더구나 최근 재벌이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어 10조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는 보도는 재벌이 국민경제의 약탈자가 되었음을 보여준다.11) 실제로 그런 사업들은 단지 재벌가 자녀를 위한 상속전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당수 공정거래를 해치며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층에까지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12)

하지만 이런 식의 경제체제를 견제하고 대안적 발전방안을 모색해야 할 노동운동 또한 1996년 노동법투쟁에서의 승리 이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회적 신뢰를 잃고 퇴행하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전부터 정체했던 노동조합 조직률은 최근 들어 감소하는 중이며, 산별노조체제도 닥쳐오는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또한, 비정규직과의 연대운동은 정규직에 의해서 거부될 때도 많았으며, 날이 갈수록 연대투쟁이나 총파업 같은 구호는 공허해졌다. 대기업 노조와 그런 노조에 기반을 둔 민주노총은 사회의 일반적 이해를 대변하는 집단에서 특수이익 추구자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13)

강한 노조를 피해 사내하청과 불법파견 그리고 비정규직 채용을 늘리거나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자본. 그리고 고용 불안정 속에서 임금을 챙길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챙기기 위해 주야 2교대를 마다하지 않고, 비정규직을 자신의 임금과 고용안정을 위한 완충장치 정도로 생각하는 대기업 노조. 이 양자가 시장에서의 약자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서로에 대한 불신과 대립을 해결하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이렇게 퇴영적 행태를 보이는 두 집단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문제를 사회화하고 공적 씨스템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실효성있는 사회적 안전망과 재교육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노조가 정리해고에 대해 더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고, 자본도 정리해고가 불러올 갈등 부담에서 벗어나 고용에 적극적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더불어 자본이 해고 회피를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하는 법적·제도적 유인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재생산에서도 그렇지만, 발전체제 측면에서도 기업과 가족(개인) 사이의 문제를 공적 영역을 매개로 해결하는 것이 요청된다.

분명한 것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재생산영역에서는 구체제에서 형성된 제도와 행위패턴이 어느정도 유지되고 있지만, 구 발전국가체제는 이미 상당부분 해체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대체할 발전체제 그리고 그것에 조응하는 재생산영역 전반의 재구성은 아직도 사회적 갈등과 투쟁의 대상일 뿐 그 윤곽이 명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부정합과 잠정성과 교착의 지속이 체제를 점차 지속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구체제를 불완전하게 해체했고 재구성의 방향을 향한 투쟁이 이어져온 87년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인 동시에, 87년체제가 끊임없이 동요시켜온 분단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이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복고적 환상이 생겨날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 대중은 이명박정부를 통해 이전의 발전국가체제를 되살려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이끌렸다. 확실히 이명박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발전주의의 합금 형태로 존재하는 현재의 경제체제하에서 이전의 발전주의적 측면을 더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이미 낡은 모델에 새로운 불을 지필 수는 없었고, 오히려 박정희식 발전주의체제와 짝을 이루던 부패와 권위주의적 통치 그리고 분단체제의 정치적 악용을 되살릴 뿐이었다. 이명박정부는 87년체제를 극복하는 ‘선진화’를 내세웠지만, 그것은 87년체제 이전으로의 퇴행이었음이 드러났다. 대중은 곧장 촛불항쟁, 지방선거, 각종 사회적 연대투쟁과 퍼포먼스, 온라인상의 저항을 통해 그런 시도에 맞섰다. 그리고 대중 사이에서 희망은 뒷걸음질이 아니라 오직 앞으로 나아감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 87년체제가 이룩한 압제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이라는 성과를 궁핍과 착취로부터의 사회적 해방으로 확산하는 데 희망이 있다는 인식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4. 더 나은 체제를 위한 구상: ‘2013년체제’론

 

어떤 체제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체제가 경험적으로 어떤 시점에 종료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정당한 분노를 터뜨리기보다 자신의 감내능력을 키우며 낡은 관행에 매달릴 수 있다. 또한 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이 곧장 더 나은 체제를 마련해주는 것도 아니다. 종종 어떤 체제는 더 나쁜 체제로 이행할 수도 있다. 그 경우 더 나쁜 체제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 고통을 정당화하는 능력을 더 높인 체제일 것이다. 따라서 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은 우리에게 그런 체제의 연명, 더 나쁜 체제로의 재편 혹은 더 나은 체제의 수립이라는 세가지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더 나은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추진할 세력의 형성 또는 결집이 필요한데,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대상이 현재의 야당들과 그 지지세력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운동으로 구성된 세칭 진보진영과 개혁진영의 연합정치다. 연합정치는 이명박정부 아래 치러진 여러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서 잠정적 형태로 출발했지만, 그 이상의 중장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진보개혁진영의 연합정치는 수평적 정권교체를 위해 DJP연합이 필요했던 시기를 생각하면 87년체제를 극복하고 재편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중심이 형성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 연합정치를 한단계 높은 수준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더 나은 체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구상과 담론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논증 및 논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런 점에서 최근 백낙청(白樂晴)이 제기한 ‘2013년체제’론은 검토할 가치가 있다.14)

그가 2013년체제론을 제기하는 이유는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을 새로운 체제 건설을 위한 계기로 삼지만, 2012년 선거 승리를 위한 논의에 매몰되지 말고 선거정치를 견인하는 체제 구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으며, 이런 구상을 형성하는 과정이 오히려 2012년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논의의 지평을 연합정치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연합정치인지로 밀고가 연합정치를 미래지향적으로 만들고 그것의 규범적 토대를 다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백낙청은 2013년체제가 두가지 핵심적인 전환을 이룩해야 한다고 보는데, 하나는 그것이 남북이 함께하는 체제여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체제 구성의 핵심원리가 평화, 복지, 공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현 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의 한축이 분단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명박정부가 보여준 것은, 분단체제의 해체가 우리 사회의 민주역량을 모아 힘겹게 이루어지는 과정인 데 비해, 분단체제를 정치적 이익을 위해 동원함으로써 사회를 퇴행적 국면으로 몰아가는 일은 손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남한사회에서 더 나은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6·15공동선언이 지향한 바를 남북한 공히 통용되는 법적·제도적 형태로 발전시키고 안정화할 필요가 있다. 즉 남한사회가 남북연합을 위한 철로 부설자 역할을 자임하며 그것에 이르기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북한사회도 체제가 위협받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획득할 수 있고, 그만큼 더 민주적이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체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주장은 대체로 동의할 만하지만, 논의를 좀더 심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평화, 복지, 공정이 새로운 체제운영의 원리여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평화가 복지 및 공정과 내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쉽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복지와 공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현재 우리 사회의 논쟁구도에 비추어 세가지 정도 더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첫째는 현재 대립적인 것인 듯 논의되는 복지와 공정이 정말 대립적인가이다. 둘째는—편의상 그렇게 명명한다면—복지론자와 공정론자 사이의 논쟁뿐 아니라 복지를 둘러싼 논의 전반이 정책에 지나치게 경사된 것은 아닌가이다. 마지막은 복지와 공정의 논쟁이 좀더 규범적인 문제를 깊이 천착해야 하지 않는가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논의구도에서 복지와 공정은 대립적인 것으로 부상해 있다. 한쪽에 정승일(鄭勝日)과 홍헌호가 있다면 다른 쪽에는 김대호(金大鎬)가 있다.15) 이 논쟁은 우리 사회의 개혁과제의 중심에 있는 것이—김대호 식으로 표현하면—1차 분배구조(시장)와 2차 분배구조(복지와 소득 이전) 가운데 어느 것인가 그리고 분배구조 왜곡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두고 이루어지고 있다. 김대호는 1차 분배구조의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정승일은 2차 분배구조의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홍헌호는 1차 분배구조 왜곡의 주범이 신자유주의라는 점에서 공정사회론이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쟁점을 앞서 논의한 체제 및 재생산 위기와 관련짓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재생산 위기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복지 확충이 요구되지만, 그럴 수 있으려면 새로운 발전체제가 그것과 연계되어 구상되어야 하며, 그런 체제 구성에서 공정은 매우 중요한 재구성 원리일 것이다. 또한 복지를 위한 부담은 사회적으로 공정하게 배분될 때 저항없이 수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복지와 공정은 서로를 부양하고 지원하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복지론자와 공정론자의 논쟁에는 김대중·노무현정부에 대한 평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판단, 그리고 진보진영과 개혁진영 사이의 묵은 불신이 흐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의 텍스트가 합리적이라고 가정하고 최적의 해석을 시도하려는 ‘자비의 원칙’이 관철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복지정책과 복지정치의 연관에 대해 살펴보자. 최근 복지담론의 급속한 확산의 뿌리는 대중이 처한 재생산 위기다. 앞서 지적했듯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제기한 5대 불안은 이런 위기를 잘 지적하고 있으며, 각 세대는 아마도 그와 관련해 자기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20대는 일자리와 등록금에서, 30대는 보육과 교육에서, 40대는 교육과 건강에서, 50대 이상은 노후와 건강에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 해법으로 복지를 확대하겠다는 제안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증세가 필요하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그리고 증세가 공정한지 물을 것이며, 기여와 수혜 사이의 관계를 냉정하게 따질 것이다.

당연히 복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계급과 그렇지 않은 계급 또는 세금을 주로 낼 계급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며, 여러 계급에 두루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길고 복잡한 우회로와 시간적 지연을 경유할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계몽된 자기 이익 속에서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복지동맹을 형성하는 세대동맹과 계급동맹의 정치가 어떤 의미에서 복지정책보다 훨씬 중요하며, 이 점은 최근 서울시의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 발의가 잘 보여준다. 그리 큰 예산이 필요하지 않은 무상급식조차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현상은 복지정책의 실현이 간단치 않은 정치적 투쟁을 경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책적 합리성 추구가 정치적 차원에 대한 일정한 둔감함을 낳는 현상은 공정론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최근 희망버스에 대한 김대호와 김기원(金基元)의 논의는 매우 충정어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희망버스의 슬로건을 너무 정책의 관점에서 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16) 희망버스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내건 슬로건은 정책적 요구가 아니라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세계에 대한 불만, 그런 세계를 더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의지, 도래하기를 열망하는 유토피아적 상에 대한 표현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정확한 정책적 요구가 슬로건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정치에는 언제나 정책을 넘어서는 과잉의 측면이 있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비제도적인 거리의 정치는 산재한 불만을 특정한 구호와 상징으로 응집하기 때문에 정책적 합리성을 도외시할 때가 많다. 하지만 정치는 언제나 정책의 지평을 변경하고 제약하거나 확장하는 힘이 된다. 따라서 정치와 정책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정치가 정책의 합리성에 귀 기울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의 정치가 발신하는 메씨지를 정책이 신중하게 청취하는 것이라 생각된다.17)

마지막으로 정책보다 정치가 관건이라면 그 정치를 향도할 규범적 차원에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지속 불가능한 현 체제를 극복하는 것이라면 공정이든 복지든 그것은 체제이행이라는 과제를 짊어진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체제에서 다른 체제로의 재편은 이른바 이행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한다. 현재의 교착을 넘어 더 나은 체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하는 개연성은 상당하다. 일보후퇴는 개인적 수준에서도 견디기 쉽지 않으며, 복합적 사회에서 일보후퇴는 수용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행을 규율할 수 있는 규범적 신념이 없다면 사람들은 쉽게 뒷걸음치거니와, 이미 우리는 그런 뒷걸음질로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적이 있다. 백낙청은 ‘2013년체제’를 제안하며 원(願)을 크게 세우자고 했는데, 그 홍원(弘願)이란 다름아니라 더 나은 체제를 향한 이행의 길을 일희일비하지 않고 견실하게 걸을 수 있는 규범적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규범과 관련해서 보면, 복지는 그 자체로 규범적인 것이 아니다. 복지가 규범적 의미를 갖는 것은 보편주의적 복지에 이르러서다. 종종 혼동되듯이 보편적 복지는 선별적 복지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복지는 수혜자의 특성에 따라 선별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경우가 많으며, 그것이 더 효율적이고 규범적으로도 정당하다. 복지의 전면적 시행이나 단계적 시행도 전혀 쟁점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예산 제약 여부의 문제일 뿐이다. 보편주의적 복지는 정책형태일 수도 있지만, 그 핵심은 복지가 취약자 보호를 위한 잔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성원의 일반적 권리임을 주장하는 데 있다. 즉 보편적 복지하에서 시민은 복지 수혜자일 권리를 가지며, 그런 사실을 도덕적 수치가 아니라 성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법적·제도적 인정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주의적 복지는 구체적 정책이라기보다 복지정책을 향도하는 도덕적 원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의 성패는 실제로 어떤 정책이 보편적인 형태로 실행되느냐보다는 구체적 정책이 아직 보편적으로 시행되지 않을 때도 그것을 사회 성원들이 보편주의적 원칙을 충족해가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끈기있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이에 비해 공정은 확실히 이행을 규율할 수 있는 규범의 측면을 지닌다. 정의 규범(justice norm)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범 자체가 계산대상이 되기도 하는 세속화된 세계에서 공정은 왜 공정해야 하는가에 답하기 어렵다. 동생이나 친구가 나에게 공정을 요구한다면, 나는 공정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낯선 사람이 나에게 공정을 요구하면 나는 잠시 머뭇거린 후 그 요구를 무시할 수도 있다. 공정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그/그녀’가 아니라 ‘너’로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정은 존재하는 사회적 연대감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지만 사회적 연대감이 없는 곳에서 자라나기는 어렵다.

되짚어보면 평화, 복지, 공정이라는 세 열쇳말은 모두 사회적 연대와 연계된다. 평화가 단지 전쟁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분단극복과 남북연합의 길을 함축한다면, 그것을 위해서는 북한주민에 대한 소원함을 극복하고 공감과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복지 또한 잔여주의가 아니라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한, 성원권(membership)이 사회적 연대감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정도 연대감 위에 있을 때 행위동기의 수준에서 규범적 강제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체제를 구상하기 위해 연대 개념을 좀더 천착하는 동시에 연대 형성적 활동을 발전시킬 길을 모색해야 한다.

 

 

5. 연합정치와 ‘희망버스’

 

앞에서 우리는 더 나은 체제 구상과 관련해 제기된 ‘2013년체제’론 그리고 그런 논의를 심화하기 위해 현재 진행중인 논쟁에서 우선 다뤄야 한다고 생각되는 점 몇가지를 살폈다.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2013체제’론과 같은 입장에 서든 그렇지 않든 더 많은 담론과 정책이 개발되어 논증의 무대 위에 올라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새로운 체제를 구성할 사회세력을 결집하고 확장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세력의 결집과 리더십의 창출 그리고 여러 정치세력 간의 연합은 좀더 복잡한 문제를 수반한다. 또한 단순히 정치집단이나 조직된 사회운동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의 내부에서 형성되는 연대의 형성 또한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다. 이와 관련해 현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연합정치와 ‘희망버스’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이 문제를 둘러싼 여러 논의를 모두 포괄할 수는 없고, 필자가 보기에 짚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되는 점 몇가지를 제기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더 나은 체제를 향한 혁신의 출처는 진보개혁진영이 될 수밖에 없다.18) 그리고 진보개혁진영이 실제로 그럴 역량을 발휘할지를 시험하는 무대는 연합정치를 통해 드러나는 진보개혁진영의 내부협상이라 생각된다. 대중은 이를 통해 진보개혁진영이 더 나은 체제를 만들어낼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고 있다. 이미 몇번의 지방선거를 통해 대중이 연합정치의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서의 원만함과 합리성까지 신중하게 평가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새로운 체제 수립의 관건은 보수파의 혁신 여부가 아니라 연합정치 자체의 성과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연합정치에서 제기된 여러가지 방안과 움직임들, 예컨대 대통합 논의, 야당간 연대 주장, 진보정당들 사이의 통합 노력의 지지부진, 국민참여당의 모호한 행보 등이 대중의 눈에는 교착과 답보로 비치고 있다. 대체로 협상은 자신과 상대가 가진 모든 권력자원을 인정하고 이루어진다. 그래서 협상에서는 협박조차 중요한 전략의 일환이다. 하지만 연합정치는 전적으로 협상의 정치만은 아니고, 더 나은 논거와 통찰만 다투는 논증의 정치이기도 하다.

연합정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각 국면과 상황이 협상과 논증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지 분별하는 동시에 협상의 교착을 논증의 정치로 타개하고 협상을 통해 논증의 대립을 중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최근 연합정치에서 드러난 바, 협상 중단 같은 비협동전략을 공론영역에서 은연중에 내비치거나 ‘연애’ ‘이혼’ ‘재결합’ 같은, 협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유를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가치와 정책을 중심으로 한 논증의 정치 또한 이전의 정책이나 입장에 대한 반성이 충분하다 않다는 식의 과거지향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연합정치가 협상 못지않게 더 나은 체제에 대한 논의와 깊게 접맥되어야 한다.

연합정치가 깊게 접맥되어야 할 또 하나의 대상은 희망버스다. 이때 접맥은 단지 연합정치의 주요 인물들이 희망버스에 몸을 싣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희망버스에 나타난 새로운 연대의 형식에 착목해 그 가능성을 일구는 것 그리고 희망버스가 전하는 메씨지를 깊이 읽어내는 것이다.

희망버스는 연대의 형식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스마트폰과 태양열 배터리 그리고 트위터에 의존한 소통으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연대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19) 그것은 형식 면에서 탈전통적이고 탈인습적이며 비조직적·자발적 연대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 유대형식에 제약되지 않고 자유롭게 확산되고 뻗어나갈 수 있다. 이런 식의 새로운 연대방식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사회운동적 역량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 희망버스의 메씨지가 무엇인지는 다양하게 읽힐 수 있지만 적어도 주요 언론매체에서 많이 논의되듯이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와 조남호 회장 문제로 한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필자에게 희망버스는 비록 희미할지라도 현재 우리 사회의 경제체제의 운용방식 전반이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희망버스 참여자들이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선 김진숙 민노총 지도위원의 모습에서 정리해고에 저항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통상적인 외침과는 다른 메씨지를 읽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다. 예컨대 김진숙은 이렇게 말한다. “낮은 곳에서 피었다고 꽃이 아니기야 하겠습니까. 발길에 차인다고 꽃이 아닐 수야 있겠습니까. 소나무는 선 채로 늙어가지만 민들레는 봄마다 새롭게 피어납니다. 부드러운 땅에 자리잡은 소나무는 길게 자랄 수 있지만 꽁꽁 언 땅을 저 혼자 힘으로 헤집고 나와야 하는 민들레는 그만큼만 자라는데도 힘에 겹습니다. (…)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넓어집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만으로는 봄을 알 수 없습니다. 민들레가 피어야 봄이 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생애 처음 민들레를 기다리는 봄. 이 설렘을 동지들과 나누고 싶습니다.”20) 그녀가 표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연대의식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를 아우르는 따뜻한 공감이 사람들을 그녀를 초점으로 한 연대행위로 묶어내고 있는 것이며, 그런 만큼 거기엔 폭넓은 사회개혁의 메씨지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21)

2013년체제’론을 비롯한 더 나은 사회체제에 대한 구상들(지적 담론), 연합정치(리더십과 조직적 대안의 형성), 희망버스(새로운 연대와 대중운동)는 각각 떨어져 있어서는 그것이 지향하는 바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체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세가지가 함축하는 긍정적 힘들이 서로 모이고 접맥되며 서로를 상승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더 나은 한반도 사회를 향해 성큼 다가갈 수 있으며, 사람들이 자신이나 서로를 묘사할 때 ‘스펙’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도덕적 모욕으로 여기는 사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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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오르크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조만영 옮김, 거름 1992, 155면.

2) 이상이 엮음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 밈 2010 참조. 이 책의 한가지 유감스러운 점은 논의를 5대 불안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주거문제에 대해서는 정책적 해결책을 찾는 접근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3)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상황에 대해서는 본 특집의 김대호 글 참조.

4) 등록금 마련을 위해 5만여명의 대학생이 고금리 대부업체에서 빌린 부채의 총잔액이 800억원이라거나 알바를 하던 대학생이 산재로 사망했다는 보도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이런 문제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본 특집의 김현미 글 참조.

5) 70대 이상의 노인의 경우, 우리 사회에서는 OECD 대다수 국가보다 적게는 10배, 많게는 15배가 넘는 자살이 벌어지고 있으며, 노후와 건강에 대한 불안은 노년층에서 집중적으로 표출된다. 우리에 이어 자살률 2위를 기록한 헝가리의 70대 이상 노인 자살률에 비해서도 2배 이상이다. 김대호는 이런 현황에 대해 ‘노인자살대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김대호, 앞의 글 참조.

6) 우리 사회 가족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외에도 근대화의 문화적 귀결을 고려해야 한다. 근대화는 개인화를 강화하는 동시에 가족 형성원리로 사랑에 핵심적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가족은 복지 공급체로서의 사회경제적 기능, 애정에 근거한 감정 공동체, 개인화라는 세가지 측면이 갈등하는 장이 된다. 우리 사회의 가족문제에 대한 포괄적이고 상세한 논의는 장경섭 『가족・생애・정치경제: 압축적 근대성의 미시적 기초』, 창비 2009를 참조.

7) 87년체제에 대해서는 졸편 『87년체제론』, 창비 2009 참조.

8) 이런 점은 공익법인인 학교법인의 재산조차 사적 소유인 것처럼 다루거나 심지어 교회를 사고팔기도 하는 천민적 행태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9)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가 마련하고 참여정부가 확대해온 사회적 안전망은 기여에 기초한 보장씨스템이어서 보험료를 낼 수 없는 방대한 인구를 흡수하지 못했으며, 주거문제나 교육문제 등에서는 이전 체제를 혁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생산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하면 오너가 있는 10대 재벌의 계열사는 2008년 395개에서 2011년 581개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자산총액은 GDP 대비 2008년 50.3%에서 2010년 59.1%로 상승했다.

11) 김재섭 「재벌 ‘일감 몰아주기’로 10조 챙겼다」, 『한겨레』 2011.6.29.

12) MBC <PD수첩> ‘밀어주고 몰아주고—재벌의 일가친척 챙기기’(2011.7.19)는 재벌이 SSM을 통해 동네상점을 침탈하는 수준을 넘어서, 사무용품 같은 소모성 자재(MRO), 광고, 트럭 유통, 김밥, 팝콘, 커피 등 중소상공업자나 자영업자의 사업영역에까지 파고들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상속의 전략이 사회의 전 영역에 대한 침탈과 착취 형태를 취하는 양상으로 발전한 것은 자본이 사회적 생산력을 흡수하여 글로벌한 행위자가 되는 과정의 이면에 극히 후진적인 생산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맑스가 말했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만큼 우리 사회의 재벌을 서술하는 데 적합한 경우가 별로 없을 것이다.

13) 이런 노동운동의 퇴영은 그 주체들에게도 심각한 심리적 댓가를 요구하고 있다. 몇해 전이기는 하지만 『레디앙』에 실린 기사(「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우울하다」, 2006.10.11,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3206)에 의하면 금속연맹 상근자들의 약 50%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한 상근자는 “흥에 겨워 신이 나서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관성적으로 하는 것 같”고, “노동조합도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오늘날 노동운동의 병리성의 핵심은 운동주체가 자신의 활동에 자존감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14) ‘2013년체제’론에 대해서는 왜 하필 2013년이냐는 질문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백낙청은 그 경위를 이렇게 말한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한국사회가 일대 전환을 이룬 것을 ‘87년체제’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하듯이, 2013년 이후의 세상 또한 별개의 ‘체제’라 일컬을 정도로 또 한번 크게 바꿔보자는 것이다. (…) ‘2013년체제’라는 호칭 자체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지 모른다. 예컨대 그러한 전환을 가능케 한 2012년의 양대 선거를 중시하여 ‘2012년체제’라 부를 수도 있고, 2013년 이후의 변화가 단시일 내에 더욱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어낼 경우 그 사건을 위주로 이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제목의 ‘2013년체제’에 따옴표를 붙인 것은 그런 가변성을 염두에 둔 탓이다.”(백낙청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실천문학』 2011년 여름호, 363면)

15) 정승일 「집권하고 싶다면, ‘노무현 시대정신’을 버려라!」, 『프레시안』 2010.11.12; 김대호 「노무현은 알았다… 장하준·정승일의 착각 또는 헛발질」, 『프레시안』 2010.11.19; 홍헌호 「김대호식 얼렁뚱땅 공정사회론, 노무현에게 독이었다: 노무현정부 실패에서 뭘 배웠나」, 『프레시안』 2011.4.11 참조.

16) 김대호 「희망버스 안에서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 나는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 사회디자인연구소 블로그(http://kimdaeho.egloos.com/5009978) 2011.7.30; 김기원 「한진중공업 사태의 올바른 해법은」, 『창비주간논평』(http://weekly.changbi.com/557) 2011.8.3 참조. 이들의 논의는 매우 신중한 것이었지만 필자가 보기에 『중앙일보』는 전자를, 『조선일보』는 후자를 희망버스에 대한 반대를 선동하는 데 이용했다. 김대호와 김기원 모두 보수언론의 보도를 비롯한 글의 파장에 대한 소회를 겸한 후속 글을 인터넷을 통해 발표했는데 일독을 권한다. (김대호, http://www.socialdesign.kr/news/articleView.html?idxno=6411; 김기원, http://blog.daum.net/kkkwkim)

17) 여기서는 다룰 수 없지만, 정책적인 수준에서도 우리 사회 복지 논의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국가 중심적이고 사회보험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복지정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국가를 경유하는 재분배나 사회보험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협동조합이나 지역적 상호부조조직 또는 최근 활발히 논의된 사회적 기업 같은 것이다. 이런 시민사회적 복지기구가 활발하게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복지국가일 뿐 아니라 복지사회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때 남북연합 문제를 복지와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본 특집의 유시주의 글 또한 참조할 만하다.

18) 분단체제에 의존해온 우리 사회 보수파의 혁신능력의 제약에 대해서는 졸고 「보수파의 오프싸이드 전략과 분단체제」, 『창비주간논평』 2011.5.25(http://weekly.changbi.com/537) 참조.

19) 김진숙의 트위터 ‘@JINSUK_85’의 팔로워는 만명 정도 된다. 그들이 주고받는 ‘재잘거림’은 일상적이고 따뜻하다. 유튜브를 통해서 그녀가 부르는 노래 「직녀에게」도 들을 수 있다. 정권에 장악된 공영방송이나 보수언론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소통의 길을 열어내고 있는 것이다. 6월 30일 인권위는 김진숙의 긴급구제요청에 대해 음식과 의류, 의약품, 랜턴 건전지 등의 필수품을 공급하기로 회사와 합의했는데, 전기와 스마트폰 배터리는 회사의 반대로 제외했다. 그녀는 태양열전지로 트윗을 계속하고 있다. 그녀는 6월 29일자 트윗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데 어쩌나 트윗을 막으려면 태양을 없애야 하는데 ㅋ.”

20) 김진숙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2011, 162~63면.

21) 여러 면에서 희망버스는 2008년 촛불항쟁과 비교해볼 점이 있다. 연대의 형식면에서 희망버스는 촛불항쟁과 깊은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정부정책의 특정 정책들과 정면으로 대립했던 촛불항쟁과 달리 희망버스의 중심에는 폭넓은 사회경제적 의제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촛불항쟁이 이후 지방선거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준 것처럼 희망버스도 연합정치의 흐름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촛불항쟁이 스스로 정치적 수로를 찾아나가며 연합정치의 흐름을 형성하는 동인이 되었던 데 비해, 희망버스의 경우에는 연합정치가 그 메씨지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기획을 제출하는 것이 더 필요해 보인다.

김종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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