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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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인간의 시간』 『거대한 일상』 등이 있음. imagine49@hanmail.net

 

 

 

수수꽃다리 다섯그루

 

 

아이들 부축을 받으며 노인이 계단을 밟고 암자로 올라왔다 손자의 손엔 할머니 영정이 들려 있었다 마당가에 아름드리 오동나무를 보고 상기된 얼굴로 올려다보다가 두팔로 껴안아보다가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목을 쑥 빼고 담장 너머 뒷산을 바라보다가 산 너머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뻐꾸기 우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생각에 잠기다가

 

으스름 뒷산에서 총성이 울린 건 노인의 젊은 시절이었다 다급하게 청년이 숨어든 곳은 산마을 외딴집 눈이 먼 애기무당이 홀로 법당을 지키고 사는 집이었다 애기무당은 그를 숨겨주었다

 

밤엔 산으로 갔다가 첫닭이 울기 전에 돌아오고 낮엔 숨어 지내다 어느날 그 청년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갔다 동짓달에 애기무당은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 아이 다섯살 무렵 남자가 돌아왔다 청년은 애기무당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그 법당 자리에는 새 법당이 지어졌고 곁방이 있었다 노인은 그 곁방을 들여다보고 문지방에 앉아도 보았다 가죽나무 그늘 고샅길을 돌아가면서 몇번이고 뒤돌아보았다

 

그때 그 곁방에 숨어 지내던 나도 암자를 떠난 지 십년이 넘었다 그 시절 내가 심어둔 수수꽃다리 다섯그루는 얼마나 자랐을까

 

 

 

내가 계절이다

 

 

계절이 바뀌면

뱀도 개구리도 숲에 사는 것들은 모두 몸을 바꾼다

보호색으로 변색을 한다

흙빛으로 또는 가랑잎 색깔로

 

나도 머리가 희어진다 천천히 묽어진다

먼지에도 숨을 수 있도록 나이도 묽어진다

 

흙에 몸을 감출 수 있도록

가랑잎에 숨어 잠들 수 있도록

몸을 바꾸고 자신을 숨기지만

 

그러나 긴 고요에 들면 더이상 숨는 것이 아니다

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나는 계절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내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