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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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陳恩英

1970년 대전 출생.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이 있음. dicht1@hanmail.net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

살인자는 아홉개의 산을 넘고 아홉개의 강을 건너

달아났지 살인자는 달아나며

원한도 떨어뜨리고

사연도 떨어뜨렸지

아홉개의 달이 뜰 때마다 쫓던 이들은

푸른 허리를 구부려 그가 떨어뜨린 조각들을 주웠다지

 

조각들을 모아

새하얀 달에 비추면

빨간 양귀비꽃밭 가운데 주저앉을 듯

모두 쏟아지는 향기에 취해

 

그만 살인자를 잊고서

집으로 돌아갔대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용감한 병정들로 살인의 장소를 지키게 하지 않았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아홉개의 산, 들, 강을 지나

달아났다

흰 밥알처럼 흩어지며 달아났다

 

그건 정말 오래된 이야기

달빛 아래 가슴처럼 부풀어오르며 이어지는 환한 언덕 위로

나라도,

법도, 무너진 집들도 씌어진 적 없었던 옛적에

 

 

 

인식론

 

 

호랑이를 왜 좋아하는지 몰라요

빨간 의자에 어떻게 앉게 되었는지 몰라요

언제부터 불행을 다정히 바라보게 되었는지 몰라요,

정원사가 가꾸지 못할 큰 숲을 바라보듯 말이죠

언제부터 너의 말이 독처럼 풀리는지 몰라요

 

맑은 우물은 여기부터 하나, 둘, 셋

이 낡은 의자에서… 언제쯤 일어나게 될는지

몰라요 둘레를 어슬렁거리는 녹색 호랑이들

대체 나에게 뭘 바라는 거죠?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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