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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 『유럽적 보편주의』 창비 2008

진정 보편적인 보편주의 2.0 버전을 찾아서

 

 

조효제 趙孝濟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hyohecho@skhu.ac.kr

 

 

유럽적보편주의이매뉴얼 월러스틴(I. Wallerstein)의 『유럽적 보편주의-권력의 레토릭』(European Universalism: The Rhetoric of Power, 김재오 옮김)은 여러 차원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근대세계의 사상적 궤적을 단숨에 일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은 짧지만 무거운 역사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유럽식 보편주의가 현재를 포함한 근대세계에 끼친 악영향을 근원적인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은 신랄한 사회과학 비판서이다. 또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유럽식 보편주의의 지적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방향의 모색에 나서야 할지를 분명히 제시해준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은 거시적인 행동전략을 예시하는 정치서이다.

이는 근대세계를 탁월하게 해설해온 저자가 무척 흥미로운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유럽적 보편주의』에서 월러스틴은 스스로 주장한 바와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정확하게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지식인은 반드시 세가지 차원, 즉 분석가로서, 윤리적 개인으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활동한다고 한다.(139면) 월러스틴은 이 책에서 역사적 분석, 윤리적 입장, 정치적 전략을 총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인상적으로 실천한 셈이 되었다. 글쓰기를 통해 지식인의 지행합일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유럽적 보편주의』는, 모든 진지한 책이 그러듯이, 집필된 시점의 문제의식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 시점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후의 암울한 상황이다. 월러스틴은 강대국이 강대국으로 존립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약자를 무릎 꿇리는 적나라한 힘? 물리적인 힘은 지배를 위해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필요하다. 왜 정당화 논리가 그토록 중요한가? 인간은‘호모 싸피엔스’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인간에게 권력관계가 장기적으로 유지되려면 힘에 의한 지배-종속을 넘어 어떤 인지적 측면에 반드시 의존해야 한다. 그것은 법규범, 설득과 내면화 그리고 소위‘대세론’에 근거한 현실 추세 등을 모두 포함한다.

월러스틴의 정교한 분석에 따르면 서구에서 지배의 논리는 바로 윤리적 정당화에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에는 자연법과 기독교, 19세기에는 문명화 사명,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각각 유럽식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다.(55면) 그리고 그 정당화 논리는‘보편성’의 이름으로 치장되었다. 서구의 시도는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난 5백여년의 세계사는‘보편성’이라는‘특수한’개념이 전세계 모든 전통들과 어떤 방식으로 조우했는지에 관한 참담한 기록과도 같다. 그러므로 유럽의 아메리카 지배에 사용된 쎄뿔베다(Juan Gines de Sepúlveda)류의 보편성 논리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해 끌어다 붙인 네오콘류의 보편성 논리 사이에는 내적인 일관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유럽식 보편주의를 비판적으로 다룬 유사한 책들은 이미 적지 않게 나와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세계체제’라는 저자의 독특한 사상이 제공해준다.‘세계체제론’의 핵심은 근대세계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의해 팽창되어온 하나의 전일적인 체제라는 것이다. 이 체제의 확장과‘보편성’의 확산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그러므로 세계체제가 흥할 때엔‘보편성’주장도 기세등등하고, 세계체제가 쇠하면‘보편성’주장도 기가 꺾이기 마련이다. 세계체제도 보편성 주장도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월러스틴의 진단이다.

『유럽적 보편주의』는 해체의 담론과 미시적 인식이 유행처럼 전세계를 휩쓰는 오늘날에도 거대서사가 가능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통쾌한 지적 모험이다. 그러나 모든 거대서사에 따르기 쉬운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한두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저자가 1장에서부터 공격하는‘인권’만 하더라도 서구의‘개입할 권리’라는 식으로 단순히 환원되기는 어려운 개념이다. 꼬쏘보사태 때 소수의 개인이나 몇몇 단체들이 인권의 이름으로‘개입할 권리’를 주장하기는 했으나, 세계 인권운동의 절대 다수는 그런 식의 직접 개입을 맹렬히 반대했다. 또한 흔히 3세대 인권이라고 불리는‘민족자결권’이나‘발전권’은 식민주의에 맞선 제3세계 해방투쟁의 강력한 이론적 근거가 되어왔다. 개도국들의 민주주의 투쟁은 또 어떠한가. 하지만 『유럽적 보편주의』에서는 이런 점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서구 보편주의 외에 어떤 해법이 가능한가? 수많은‘특수주의’들로 되돌아가는 것이 능사인가? 월러스틴은 고개를 젓는다.‘보편적 보편주의’(universal universalism)로 가야 정답이라고 한다. 보편적 보편주의는 시쳇말로‘보편주의 2.0’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본질주의적 성격 부여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모두를 역사화하며 (…) 약자에 대한 강자의‘개입’을 위한 모든 정당화 근거들을 고도로 객관적이고 지극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관점이다.(138면) 다시 말해 보편적 보편주의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가 주고 모두가 받는 그런 세계”이고,(139면) 새로운 상생의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지극히 달성하기 어려운 경지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는 이상이다. 『유럽적 보편주의』는 작은 보석과도 같은 책이다. 근대세계를 천착해온 노대가의‘보편적 보편주의’호소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편의적이고 손쉬운 모든 해법을 거부하면서‘현실적 유토피아’를 향한 새로운 등반로를 개척할 의무를 져야 마땅할 것이다.

조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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