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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천운영 千雲寧

1971년 서울 출생.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 『엄마도 아시다시피』,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 『생강』이 있음. hangomm@hanmail.net

 

 

 

다른 얼굴

 

 

줄이 길었다. 그녀 앞으로 여섯명.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이후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계피와 생강을 어느 상점에서 살지. 어느 화원에서 달리아 구근(球根)을 더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을지. 아리랑을 지우자 은행에서 집까지 동선이 깔끔해졌다. 시급한 것은 수정과가 아니라 달리아였다. 구근을 심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지만 색의 조화를 생각한다면 울타리 쪽에는 역시나 달리아였다. 새 모이통을 채울 혼합곡식도 사야 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바우하우스가 나았다. 동선 조정을 마쳤을 때, 마침맞게 차례가 왔다.

“좋은 아침. 오늘 날씨, 정말 좋지?”

그녀는 데스크로 한발짝 다가서며 상냥하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좋은 점심 좋은 저녁. 그 말은 삼십년 전 이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상냥함을 더하면 인사말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삼십년이 지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 지금, 목소리에 숨겨져 있던 초조한 기운이 말끔히 사라지자 상냥함만이 남았다. 저절로 풍겨 나오는 기분 좋은 향기처럼. 방심하고 짓는 표정에도, 가만히 움직이는 발걸음에도. 상냥함은 그녀를 설명하는 거의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저절로 나온 상냥한 인사말에는 힘이 있었다. 적어도 은행원의 은색 넥타이를 느슨하고 만들고, 이 도시 사람들의 전형적인 표정인 근엄한 얼굴을 누그러뜨릴 만큼의 은밀한 힘.

“좋은 아침. 뭘 도와드릴까요?”

데스크의 남자는 사무적이지만 친절한 목소리로 그녀를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갑자기 얼어붙었다. 시간을 거슬러 삼십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는 외국인처럼, 눈만 깜빡이며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아니면 삼십년이 훌쩍 지나 늙은이가 되어버린 것도 같았다. 방향을 잃고 기억을 잃어 어리둥절해하는 치매노인.

“음……”

그녀는 가방에 손을 넣은 채 멍하니 서서 남자와 눈을 맞췄다. 남자의 눈은 따뜻한 회색이었다.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아크릴 명찰로 시선을 옮겼다. 글자가 작아 이름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불새 모양의 은행심벌은 선명했다.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줄을 선 것을 그녀가 잊을 리는 없었다. 그녀는 치매환자가 아니었다. 닷새치 매상을 모아온 탓에 평소보다 많은 돈이 지갑에 들어 있었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지갑은 가방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손을 넣으면 바로 닿는 주머니 안에. 언제나 어김이 없는 그 위치에.

“음…… 그러니까 내가……”

그녀는 가방을 데스크에 올려놓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들여다보고 뒤져봐도 반드시 있어야 할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지갑이 없네요?”

남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한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여태 이런 일은 없었다. 그녀는 뭔가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지품이 손을 타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손을 빼내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빈손이 공손하게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내 상황파악을 끝낸 듯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해한다고, 더러 그런 실수들을 한다고, 안됐지만 자신이 도와줄 것은 없다고. 너그럽지만 조소 섞인 미소였다.

“그럼 준비가 되면 다시 오시겠습니까?”

준비가 되면……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지갑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혹시 집에 두고 온 것은 아닐까. 아니다. 스시집 열쇠를 찾느라 가방을 뒤질 때만 해도 분명히 있었다. 지갑 자석에 열쇠고리가 붙어 있는 걸 떼어냈으니까. 스시집을 나와서는 피트니스센터에 들러 한시간가량 운동을 했고, 내친김에 시간을 조정해서 마사지를 받았다. 그사이 지갑을 꺼낸 적은 없었다. 지갑은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게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었다.

“부인? 다시 오시겠습니까?”

남자가 재차 물었다. 그녀는 줄서서 기다린 자신의 순번을 남자가 끝내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황급히 말했다.

“아니요, 다시 올 게 아니라, 잃어버렸어요. 지갑을요. 어쩌지요?”

“분실신고를 해드릴까요? 신분증 가지고 계세요?”

“지갑에 같이 들어 있을 텐데.”

“그럼 사회보장번호를 불러주세요.”

그녀는 일단 번호를 불러준 다음 생각했다. 오는 길에 누군가 그녀의 몸이나 가방을 스치고 지나간 적이 있었는지. 그녀가 기억하는 한은 없었다. 마사지샵이나 피트니스센터 탈의실에서 손을 탈 수도 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곳은 흘린 머리핀 하나라도 잘 보관했다가 주인을 찾아주던 곳이었다. 회원카드를 꺼내지 않아도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회원관리 시스템이 철저한 곳. 그럼 어디였을까.

“일단 분실신고 먼저 한 다음에 사용내역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저희 은행에 한장의 신용카드와 네개의 계좌가 있는데, 모두 정지시킬까요?”

그렇지. 지갑 안에 현금만 있었던 게 아니지. 신용카드가 석장에 현금카드가 석장…… 은행 두군데를 더 들러야 했다. 그밖에 백화점카드가 있고, 각종 회원카드를 일일이 다시 발급받으려면…… 그녀는 무엇보다 교통카드가 아쉬웠다. 이제 겨우 닷새를 썼을 뿐이었다. 재발급도 안되고, 달이 바뀌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동전을 준비해 다녀야 했다. 꽤 번거로울 것이었다. 동전 없이 기차를 탔다가 낭패를 겪었던 때가 떠올랐다. 하필이면 기차 내 동전교환기는 고장이 나 있었고, 다른 칸으로 가보려는데 검표원이 나타났다. 서른배에 달하는 벌금을 내지는 않았지만, 의도된 무임승차가 아님을 설명해야만 했다.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표정관리를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일단 정지시켰고요. 신용카드 최종사용일은 21438분. 에서 75.40유로. 본인이 사용한 것 맞습니까?”

사흘전 오후 두시면, 성훈네와 점심을 먹었고, 그녀가 계산을 했다.

“맞아요.”

351로 시작되는 계좌는 한시간 전에 마지막 인출이 있었네요. 2천유로. 본인이 사용한 것 맞습니까?”

“언제요?”

1140분. 한시간 전에요.”

“아닌데…… 그때 난 마사지샵에…… 나 아니에요.”

새 계좌. 비밀번호. 그녀는 오늘 새 현금카드를 등록할 예정이었다. 지갑에는 은행에서 발급받은 비밀번호 안내장과 새로 받은 카드가 함께 들어 있었다. 개인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비로소 카드를 쓸 수 있었는데. 그녀가 아니라 지갑을 가져간 사람이 등록과 개시를 대신한 셈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피해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현금은 물론이고 통장에 든 돈까지. 동전의 번거로움과는 비할 바 아닌 것이었다.

“지갑을 언제 잃어버리셨는데요?”

“글쎄요…… 그게……”

“오늘 총 3회에 걸쳐 출금이 있어요. 모두 6천유로. 모두 이 지점 현금인출기에서 인출됐네요?”

도대체 누가, 언제 어디서. 그래, 그 남자. ‘토토스시’에 왔던 그 아랍남자. 입구 카운터 옆에 서 있었지. 그녀는 가게에 들어가면 항상 가방부터 카운터에 올려놓은 다음 주방으로 들어간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 위치에 바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아랍남자가 지갑을 훔쳐갔다. 지갑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도난당한 것이었다. 분실이 아니라 절도.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아마…… 세시간 전일 거예요. 맞아요. 세시간.”

토토스시에 도착한 것이 9시 무렵. 머문 시간은 채 이십분이 넘지 않았다. 그때 스시집을 나와 곧장 은행으로 왔더라면. 피트니스센터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예약시간을 바꿔가면서까지 마사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더라면. 그래서 남자가 나간 다음 곧바로 가방을 확인해봤더라면. 그런데 정말 그 남자가 지갑을 훔쳐갔을까?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인사까지 하고 나갔다. 그렇게 선량한 눈을 가진 남자가 정말 지갑을 훔쳐 갔을까? 하지만 그 남자가 아니고서는,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CCTV, 그거, 확인해볼 수 있어요?”

“개인에게는 공개가 안되고, 경찰이 요청하면 보여줄 수 있어요. 일단 경찰서에 가서 도난신고를 하십시오. 그래야 보험이나 다른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그런데 이상하네요. 어떻게 비밀번호를 알았을까요? 세번 만에 비밀번호를 알아내기는 어려울 텐데. 세번 오류가 나면 자동으로 출금금지가 됩니다만.”

“그건……”

 

*

 

“아랍계 남자였어. 터키식품점 카림처럼. 턱수염이 이렇게 넓게 나 있었는데, 길지는 않고 그냥 면도한 자국만 보이는 정도 있지? 거뭇거뭇. 눈썹도 진하고 머리숱도 많고. 아무튼 전형적인 아랍사람 얼굴이었어. 스물다섯에서 서른 사이? 젊었어. 키는 당신보다 좀더 큰 것 같고. 약간 마른 체형인데 그렇다고 아주 마른 건 아니고.”

그녀는 경찰에 말한 그대로 남편에게 말했다. 경찰은 그녀가 설명한 절도범의 인상착의를 보통체격의 평범한 외모를 가진 이십대 후반의 남자로 정리했다. 그녀는 더 자세히 설명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주방에서 재료 확인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야. 그래서 돌아봤더니 웬 남자가 서 있지 않겠어? 카운터 옆에. 가게에 나 혼자 있는데 당연히 놀라지. 그래도 아주 차분하게 물어봤어. 무슨 일이야? 그랬더니, 사람 안 구하니? 하고 물어봐. 그래서 아니, 그런 계획 없는데? 했지. 그러니까 씨익, 웃는 거야, 참 순한 웃음이었어. 그러고 안녕, 인사를 하고 나가데? 그래서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그랬지 뭐. 아침부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는 것도 이상하고. 우리가 어디 구인광고를 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찾아왔나, 그것도 이상하고. 다 이상했지.”

“구인광고를 냈다고 해도 스시집에서 아랍인을 구하겠어? 말도 안되는 소리지. 그래서 그냥 그러고 보냈어?”

“응. 한치도 의심 안했어. 도둑처럼 안 생겼단 말야.”

“도둑이 어디 도둑이라고 써놓고 다니나?”

“웃는 게 선했다고. 아주 맑았어.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웃는 사람을, 어떻게 의심해.”

“잘했어. 지갑을 잘 잃어버렸다는 게 아니라. 그때 알아차렸으면 또 어쩔 건데? 몸이라도 뒤져보자 할 거야? 또 그랬다가 해코지라도 하면.”

“해코지할 사람처럼 안 보였다니까? 그런데 그 조그만 스시집에 무슨 돈이 있을 거라고 도둑질을 하러 와? 아이참, 오늘따라 현금은 왜 그렇게 많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닷새치나 밀려서. 다른 때는 이틀에 한번은 가는데. 하필이면 또 비밀번호 안내장이 보일 게 뭐야. 탁자에 있기에 그냥 지갑에다 쑥 넣어가지고 나왔단 말이야.”

“일이 그리되려니까 그런 거지. 가게는 작아도 이 도시에서 제일 오래된 스시집이잖어. 줄도 서서 먹고 가고 그러니까, 뭐 훔쳐갈 거 없나 작정하고 찾아온 거지. 그냥 사람 안 다치고, 더 나쁜 일 안 생기고,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 돈 없다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그는 잃어버린 돈에 대해 쩨쩨하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잘못을 탓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유학생활 이년 만에 학업을 포기하고 결혼을 결심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 그대로. 지금은 머리숱이 조금 줄고 입가에 주름이 앉았지만 여전히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확실히 나이 든 티가 나긴 했다. 나이 든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자서전처럼 씌어 있기 마련이라는데, 그녀는 그가 그렇게 쓴 책이 마음에 들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봐? 아직도 지갑 생각하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어쩐지 모든 걸 일러바친 아이처럼 후련했다. 그가 고맙기는 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왜 이렇게 순진한 걸까. 이 나이 먹도록 그거 하나 못 알아보고. 왜 의심을 못하지? 누가 그렇다면 그런가보다, 사람 좋게 생겼으면 좋은가보다. 나 정말 바본가봐. 맨날 이렇게.”

“아이고, 여사님 잘못이 아니네요. 사람 의심 안하고 사는 게 뭐가 잘못입니까?”

“그런데 여보, 어떻게 그렇게 웃으면서 도둑질을 할 수가 있냐고. 안 들키려고 웃었나? 안 들켜서 웃었나? 어머나 여보!”

“왜, 왜 또 무슨 일이야.”

“그 사람이 내 지갑 가져가는 거, 그거 난 못 봤어.”

“뭐야, 그 사람 아니야?”

“아니, 그러니까 지갑은 내가 돌아보기 전에 벌써, 벌써벌써 가져간 거지. 그래놓고, 내가 보니까 웃은 거지. 웃으면서 도둑질한 게 아니라. 안 들킨 게 좋아서 웃었나? 내가 깜빡 속아넘어간 게 재밌어서 웃었나? 뭐야.”

“맞아, 당신은 깜빡 잘 속지.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잊자 잊어. 아는 사람한테 속은 것도 아니고. 그래. 걔 누구야, 당신 그렇게 고생시켰던. 아이고 그 이름이 생각 안 나네? 당신 싸인 위조범 될 뻔했던.”

“호준이? 걔도 참 사람 좋게 생겼는데. 난 절대 안 잊어버리지 그 이름. 우리가 얼마나 잘해줬어.”

“그래 맞어, 호준이. 아내가 시골 사람이라 도통 뭘 못 먹고 그래서, 당신이 김치랑 해다 주고.”

“김치뿐이야? 구두랑 외투랑 옷장 뒤져서 입을 만한 거 다 찾아서 갖다주고. 나랑 싸이즈가 비슷했거든. 아이, 지금은 이렇게 웃네. 그땐 얼마나 무섭고 떨렸어. 엄마 감옥 가는 거야? 우리 별이가 그러면서 눈물을 뚝뚝 흘려.”

“하늘이는 지 누나 손만 꼭 붙들고 있고.”

“나야 뭐 그냥 하라는 대로 싸인한 거밖에 없는데. 당신하고 얘기가 다 된 거라니까, 남편 대신 싸인하는 게 뭐가 문제냐 싶었지. 그런데 싸인 위조범이라니.”

“옛날엔 다 그러고 살았잖아. 아예 작정하고 덤벼든 사람을 어떻게 당해내. 집 구하는 데 보증인 세우는 게 여기서 오죽 어려워?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진데. 임대계약서에 내 이름 올려놓고. 신고하자니 당신은 공범 되는 거고. 신고를 안하자니 나갈 생각을 안하고. 참 머리도 좋아. 완전 계획적으로 말이야. 그때 그 집에서 얼마를 더 버텼더라?”

“일년 계약 끝나고 반년 더.”

“난 걔 와이프가 더 무섭더라. 눈 똑바로 치켜뜨고서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당신이 싸인해준 거 아니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그냥 굽신거리면서 고맙다 할 땐 언제고.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얼굴을 싹 바꾸는지.”

“그랬어? 어머, 난 왜 기억이 안 나지?”

“어떻게 기억이 안 나? 얼마나 악을 쓰고 덤볐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나. 느물느물 웃던 호준이 얼굴만 기억나네.”

“아무튼지 간에, 돈이 속 썩이나? 사람이 속을 썩이지. 속 썩은 걸로 치면 2호점 매니저 했던 그 여자애. 걔 누구야. 별이가 언니언니 하며 잘 따르고.”

이번엔 그가 먼저 이름을 기억해냈다. 이름을 기억해내자 그 얼굴이 따라왔다. 이름들, 얼굴들, 사연들, 다시 이름들. 그들은 함께 겪어온 기억들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황망한 기억들. 조금씩 시간을 거슬러 그들이 처음 스시집을 시작했을 무렵까지 올라갔다. 그가 아직 시립 오페라단의 첫 한국인 단원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그녀가 이십대에 아이 둘을 연이어 낳고 난 다음 일종의 향수병에 걸려 있었을 때. 그런 그녀에게 자그마한 스시집을 해보자고 한 것이 그였다. 무턱대고 시작한 터라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그는 연습을 마치고 와 밤늦도록 스시를 쥐고 쪽잠을 잔 다음 새벽시장을 보고 다시 연습을 가고,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며 홀과 카운터를 보았다. 자그마하게 시작한 스시집이었지만 그녀가 재미를 붙인 결과로 지금은 시내에 3호점까지 두고 있었다.

“그땐 그걸 어떻게 다 해냈나 몰라.”

“그러게. 어떻게 그걸 다 했지?”

그들은 소회에 젖어 입을 다물었다. 기억의 반추가 끝나는 지점은 바로 거기였다. 고난해서 행복했던 시절. 그곳에 다녀오면 언제나 다시 힘을 얻었다. 그들도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는 것.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는 것. 그들은 언제나 베풀며 살아왔다는 것. 그들이 가진 그 단단한 자부심이 그들을 위안했다.

그녀는 낮게 숨을 쉬었다. 긴장이 풀어지며 몸이 노곤해졌다. 은행과 경찰서를 오가며 종종거린 탓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혼자 그 일을 다 해낸 것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했다. 허둥거리지도 우왕좌왕하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그 일을 모두 해냈다. 지금 당장 그녀가 할 일은 더 없었다. 내일 담당수사관이 정해지면 연락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때 가서 수사에 협조하면 되었다. 그것은 이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의 의무이기도 했다.

“오페라하우스는 도대체 언제 완공된대? 언제까지 이런 데서 연습을 해야 해?”

“모금이 생각보다 잘 안되나봐. 시예산은 한정된 거고.”

“벌써 몇년째야? 한국 같았으면 세번은 지었을 거야.”

“지금 오년 되어가지? 앞으로 오년이 더 걸릴지도 모를 일이고. 내달에는 모금 공연이 있을 거야. 시에서는 거기에 기대를 걸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순전히 시민의 돈으로 완공하겠다는 건 좀 무리 아니야?”

“무모하니까 더 의미있지.”

“그래, 이 나라니까 가능한 일이지. 한국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야, 그치 여보? 아 참, 바우하우스 몇시에 문 닫지?”

뒤늦게 달리아가 생각났다. 수정과를 위한 생강과 계피도. 서둘러 가면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차를 타고 바우하우스로 향했다. 차안에서 그들은 튤립을 대신할 꽃이 뭐가 좋을지 의논했다. 꽃은 파티가 끝나고 심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그가 물었지만, 그녀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후식보다 중요한 게 정원이었다.

그녀의 정원은 완벽해야 했다. 주말에 사람들이 다 모일 텐데. 시든 튤립으로 손님을 맞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작은 새들을 위한 혼합곡식도 모이통에 채워놓아야 했다. 몸집이 작은 새들은 땅콩보다는 곡식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수정과는 질항아리를 꺼내 담으면 될 듯했다. 장식으로 걸어뒀던 조롱박을 국자 대신 사용하고 뚜껑은 조각보로. 꽤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

 

수사과는 3층이었다. 도난접수를 받던 1층의 경찰과는 달리 담당수사관은 사복 차림이었다. 그녀는 6인용 회의테이블이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테이블에는 컴퓨터 한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조금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컴퓨터를 사이에 두고 수사관과 마주 앉아 얘기를 시작하자 그 기분은 금세 사라졌다.

“키가 몇 센티쯤 되는지 기억할 수 있어요?”

“숫자로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게 몇 센티나 되려나?”

“그럼 나랑 비교해서 어떤가요?”

“작아요.”

“얼만큼, 이만큼? 이만큼?”

이마를 가리켰던 수사관의 손이 눈썹으로 코로 조금씩 내려갔다. 그녀는 손바닥을 활짝 펴서 머리 위로 올렸다.

“나보다 한뼘 정도 컸어요. 이만큼.”

“부인 키가……”

156이에요.”

“그럼 175정도 될 거 같은데. 어때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략 그럴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후로 같은 방식으로 질문과 답변이 계속되었다. 몸집 얼굴 모양 피부색깔…… 조금 더 크거나 작거나. 조금 더 길거나 짧거나. 그녀는 편안하게, 놀이를 하듯 문답을 마쳤다.

“지금까지 당신이 말한 대로 인상착의를 정리했어요. 맞는지 확인해보세요.”

“맞는 거 같아요.”

“그럼 이제 여기에 그대로 쓰시면 됩니다. 당신이 직접, 당신 필체로 써야 해요. 다 쓰시면 밑에 싸인하세요.”

그녀는 두장의 종이를 건네받았다. 하나는 수사관이 그녀의 말을 받아 적은 종이였고, 또 하나는 그녀가 직접 적어야 할 빈 종이였다. 수사관의 글씨체는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길쭉하게 쭉쭉 뻗은데다 움라우트는 저만치 떨어져 찍혀 있었다. 그녀는 받아쓰기 시험을 보는 학생처럼 또박또박 적어나갔다. 눈동자 색깔에서 잠시 멈추었다. 검은색이라고 생각했으나 쓰려고 보니 갈색이었던 것도 같았다.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검은색이라고 적었다. 그녀는 어쩐지 남이 해온 숙제를 베끼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 만에 옮겨쓰기를 마치고 싸인까지 끝냈다.

“당신이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요. 지금부터 사진을 몇장 보여드릴 거예요. 이전에 비슷한 전과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추린 사진인데. 물론 당신이 말한 인상착의를 근거로요. 그러니까 총 백, 정확히 백아홉이군요. 이 중에 그 사람이 있는지 봐주시겠어요? 비공식적인 겁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안해도 됩니다. 하지만 수사에 도움이 될 겁니다. 하시겠습니까?”

그녀는 기꺼이 하겠다고 말했다. 수사관이 종이 하나를 더 내밀었다.

“서약서예요. 나가는 순간 여기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으세요.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어떤 사진을 봤는지. 그 사진 속에 누가 있었는지. 혹시 그 사진 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전과자였다는 사실을, 알은척해서도 안됩니다.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이라도 인권이 있으니까요. 무슨 얘긴지 이해하시겠어요?”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그녀가 알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모두 다 도둑들이라는데. 게다가 아랍도둑일 텐데. 그녀는 잠깐 터키식품점 카림을 떠올렸지만, 카림처럼 친절한 사람이 범죄자일 리는 없었다.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말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남자를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있게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머리모양이나 수염은 변하기도 하니까 염두에 두지 마시고요.”

수사관이 컴퓨터 화면을 그녀 쪽으로 돌려주었다. 사진이 나타났다. 인물의 정면과 좌우 측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얼굴에 집중했다. 곱슬머리에 구레나룻. 토토스시에 온 남자는 구레나룻이 없었다. 아니라고 말하자 두번째 얼굴이 나타났다. 이마 모양이 비슷했지만 눈크기가 딴판이었다. 그 남자는 눈이 컸다. 이렇게 사납게 빛나는 눈이 아니었다. 순진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눈이었다.

“아니에요. 이 사람 눈이 너무 작네요.”

“이 사람은 어때요?”

“음…… 아닌 것 같아요.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이 사람은요?”

“이렇게 안 생겼어요. 아주 순한 얼굴이었다니까요.”

그 남자와 있었던 시간은 길어야 이삼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 안 구하니? 하고 물으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떴을 때, 길고 진한 속눈썹이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눈주름을 접으며 순진하게 웃었지. 그런데 그 전에는 어땠지? 그녀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돌아봤던 바로 그 순간. 그때도 그렇게 똑같이 웃고 있었나?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 진짜 그 남자의 얼굴인지.

어느 순간 틀림없다고 믿었던 기억이 혼돈 속에 들어갔다. 사진 속의 얼굴들은 실재감이 없었다. 사진 속의 얼굴들은 모두가 잡혀온 자들의 얼굴이었다. 범죄를 저지른 자의 얼굴이 아니라 잡힌 자의 얼굴. 범죄를 들켜버린 자의 얼굴. 벌을 받기 위해 절차를 받고 있는 자의 얼굴. 들키지 않고 잡히지 않았다면 찍히지 않았을 사진. 사진 속의 얼굴에는 분노와 억울함과 불안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무수한 얼굴들이 지나갔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지만 같은 얼굴들의 연속이었다. 짓눌리고 초조하고 화나고 불안하고 억울한, 얼굴. 누군가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갈 때처럼, 그녀의 안면근육들이 범죄자의 얼굴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꼬리가 억울하게 처지고, 입매가 분노로 흔들리고, 이마가 분노로 찡그러지고…… 그녀는 그만 보고 싶었다. 아무나 지목하고 끝내버리고 싶었다. 손가락질 한번이면 끝날 일인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만 가로저으며 아니,라는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없어. 아니야. 다음. 아니야. 아니야.

지옥에 있는 것만 같았다. 범죄자의 일그러진 얼굴들로 꽉 채워진 지옥. 눈을 감을 수도 뜰 수도 없었다. 생각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었다. 숨이 가빠지고 팔다리가 떨렸다. 새로운 사진이 나타날 때마다 몸의 다른 부분에서 통증이 왔다. 눈에서 귀로, 손목에서 등으로. 그녀는 토토스시에 왔던 남자의 얼굴이 애타게 보고 싶었다. 웃으면서 도둑질한 그 얼굴이 차라리, 천사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백아홉명의 사진을 다 보고 난 후에야 그 지옥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왜 중간에 그만두고 뛰쳐나오지 않았는지는 그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경찰서 입구기둥을 붙들고 서 있었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녀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두 다리가 꼼짝을 하질 않았다. 뭔가 아름다운 걸 봐야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옥의 살풍경을 이겨낼 만한, 그 어떤 것이라도.

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 번호를 누르는 손이 자꾸 엇나갔다. 그녀는 가까스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숨 쉬기가 점점 더 곤란해졌다. 속이 메스껍고 어질머리가 일었다. 토할 것 같았다. 신호가 이어질 때마다 하늘이 노래졌다.

“엄마?”

천상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작은 천사. 딸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제야 숨통이 트이고 숨이 쉬어졌다. 귓속의 웅웅거림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래도 그녀는 다른 어떤 소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휴대폰을 귀에 딱 붙였다. 눈에 막이 걷히면서 하늘이 제 색을 찾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응 별아, 엄마야.”

“응 엄마, 웬일이야 이 시간에? 목소리가 이상해. 무슨 일 있어?”

“아무 일 없어. 그냥 갑자기 별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그런데 금방 끊어야겠어. 엄마가 다시 할게. 사랑해.”

 

*

 

시끌벅적 명절 분위기가 났다. 남자들은 숯을 피워 고기를 구웠다. 여자들은 상을 차리고 아이들을 먹였다. 큰 애들은 음식을 담아 구석진 방으로 숨어들어갔다. 작은 애들은 얼른 음식을 받아 먹고 새들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일년에 두번, 아이들까지 다 모여 점심부터 저녁까지 노는 날이니, 명절이라면 명절이었다. 모두 시립 오페라단원. 총 스물두명의 정식단원 중 일곱이 한국인이었다. 그가 발판을 마련해놓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자들은 그녀를 형수님이라고 불렀고 여자들은 형님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에게 그녀는 큰엄마였다.

파티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구름 한점 없는 쾌청한 하늘에, 바람은 기분 좋게 선선했다. 정원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별이 생일파티 때 썼던 청사초롱까지 꺼내 걸었다. 삼년 만에 꽃을 피운 백동백을 못 보여주나 싶었는데, 아직 지지 않은 꽃이 세송이나 매달려 있었다. 말똥을 얻어다 톱밥을 섞어 손수 만든 비료를 꾸준히 준 덕분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렇게 화창한 날씨는 이 도시에서 얼마 안되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빠뜨린 것도 없고 기분 상할 일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시큰둥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이 그녀에게 안겨들며 새살거려도, 가까이 지내는 성훈네가 새로 연 마사지샵에 대한 정보를 알려줘도, 아무런 흥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괜히 두리번거리며 아이들이 꽃을 함부로 꺾지는 않는지, 장식으로 걸어놓은 조롱박과 복조리가 비뚤어지지 않는지만 자꾸 확인하고 있었다.

바비큐 숯이 사그라질 즈음 그녀는 후식으로 수정과를 질항아리에 담아 내놓았다. 사람들이 테이블로 모두 모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조롱박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을 알았다. 성훈네가 국자를 찾아 나오는 것을 만류하고 매달린 조롱박을 하나 떼어내 깨끗이 씻어왔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사람들에게 도난사건 얘기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도난사건은 확실히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는 그녀보다 그가 더 실감나게 잘했다. 그에게 마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굳이 들려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거들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범죄는 다 거기서 나와요. 걔네 동네 가봐요. 아주 살벌해요. 정부에서도 골머리를 앓잖아요? 세금은 제일 적게 내는 사람들이 무상교육 혜택은 다 받아가고. 애들 학교 가보면 터키쉬가 반이에요. 왜 우리 세금으로 걔네들을 교육시켜요?”

“그래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잖아요. 걔들 없으면 여기 노동시장 완전히 붕괴되는데. 진짜 문제는 걔들이 지네 문화를 포기 안한다는 거지. 도무지 융합할 생각이 없어.”

“그건 그렇고, 그래서요, 통장에 있는 돈을 다 가져갔어요? 그냥 모르겠다고 하시지. 어차피 개인비밀번호도 입력 안한 상태였다면서. 그럼 은행 잘못이 되는 건데?”

“은행 직원도 똑같이 얘기했대. 웃으면서. 그냥 모른다고 하지 그랬느냐고. 저 사람더러 순수하다고, ‘정직하다’라는 단어를 썼다고 했나? 그랬어? 암튼 어이없으니까 웃은 거지.”

“본인이 비밀번호 관리를 못한 거면 보상 못 받는 거죠?”

“당연히 못 받지.”

“그래서 얼마나 가져간 거예요?”

“좀도둑이 횡재한 거지 뭐.”

“그래서 얼마나 되는데요?”

“뭘 자꾸 물어. 속상하게.”

“그걸 어디다 기부를 했으면, 인사라도 받을 거 아냐. 우리 오페라하우스 모금에 냈어봐요. 이름도 새기고. 아니면 막말로, 길거리 거지들한테 나눠줬어봐. 얼마나 고마워하며 받을 거야.”

“아, 맞다, 맞다. 중앙역에 철학자거지 알죠?”

“그 책 읽는 거지? 늙은 개랑 같이 있는. 그런데 왜?”

“죽었나봐요. 어제 지나가면서 봤는데, 꽃이랑 초랑 초콜릿이랑 잔뜩 놓여 있더라고요.”

“어머나, 정말? 나 휴대폰에 그 사람 찍어놓은 거 있어.”

얼른 휴대폰을 꺼내 앨범을 뒤졌다. 사람들이 머리를 모았다.

“여기. 이 사람 맞지?”

“맞아요. 와, 사진 잘 찍으셨네요. 분위기 좋다.”

“이게 지난가을일걸? 그림이 너무 좋아서. 그럼 그 개는 어떻게 됐어? 불쌍해서 어떻게 하니?”

“없던데요? 시에서 어떻게든 했겠죠. 개 함부로 안하잖아요. 그런데 형님 폰 바꾸셨네요?”

“으응. 지난번 한국 들어갔을 때.”

“진짜 화면 크고 좋네요. 볼 만하다. 진짜 잘 만들어요, 그쵸? 지난번 연초에 수상 연설할 때 한국 따라잡겠다고 한 거 들으셨죠? 아 정말 짜릿하더라구요. 좋기는 한데, 사람들이 부쩍 경계를 하는 거 같아요. 단원들 중에도. 한국인 비중이 너무 크다고. 지난번에 막내 들어올 때 은근히 보이콧하더라구요.”

그녀는 사람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앨범을 들여다보았다. 미동도 없이 책을 읽던 비쩍 마른 남자. 무슨 책을 읽나 슬그머니 엿보기도 했었는데. 그 옆에 그림처럼 앉아 있던 그레이하운드 종의 늘씬한 개. 그 개는 어떻게 됐을까? 돌봐줄 사람을 잃었으니. 사료라도 한포대 사다줄걸 그랬다. 그게 얼마나 한다고. 사진은 찍었으면서 왜 그런 생각은 못했을까. 늘 거기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그 길의 벤치나 소화관, 아니면 조금 튀는 설치작품처럼.

“경계할 만도 하지. 진짜 많이 성장했다 우리나라. 내가 처음 왔을 때는 거기가 어디냐고 지도 들고 묻는 애들도 있었어. 필리핀 옆에 있는 나라 아니냐고. 안다고 해도 한국사람이라면 다 광부나 간호사로 온 줄 알고. 성악전공은 나 하나밖에 없었잖아. 성악이 뭐야, 유학생도 별로 없었는걸.”

“여기 한인회가 거의 다 광부로 오셨던 분들이죠? 저번에 한인회 가셨다면서요. 거긴 뭐 하러 가셨어요?”

“회장이란 분이 하도 와보라고 해서. 자꾸 거절하기도 민망하고. 왠지 피하는 느낌 주는 것 같고.”

“거기 좀 이상하죠?”

“한인회장이 무슨 대단한 감투라고, 회장선거 중이었나봐. 서로 싸우고 욕하고 헐뜯고. 보기 안 좋더라고. 그래서 나도 부른 거구. 한표라도 더 얻으려고. 아휴, 다신 안 갔어.”

“어차피 패 갈라서 싸울 걸 뭐하러 뭉쳐 지내나 몰라요. 민족성인가? 한인회란 게 어디 가나 그 모양이더라구요”

“돈도 꽤 벌었을 텐데, 이상하게 피해의식이 있어.”

“자존감이 없어서 그래요. 노동자로 온 사람들이라. 우리랑 좀 다르잖아요?”

“다르지. 지금은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서 모여 산다던데? 아무래도 여기서 힘들게 버텼을 테니까. 문화라는 것도 모르고. 고국 가서는 행세깨나 하는 모양이던데.”

“행세가 될까요? 그분들 아직도 70년대 생각만 하고 있잖아요. 저번에 보니까 한국 가져간다면서 소시지랑 커피랑 뭐 잔뜩 사가더라고요. 치약까지. 그런 거 한국에 있겠냐면서.”

그녀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등나무 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는데, 꼬마애들이 폴짝폴짝 뛰며 내기를 하듯 등나무 꽃을 잡아뜯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아이들을 향해 주의를 줄 수도 있었지만, 괜히 소리를 높여 대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다가가자 아이들이 손을 위로 쭉 뻗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얘들아, 큰엄마 꽃을 그렇게 때리면 안되지. 꽃이 아프잖니. 안 그래?”

그녀의 말에 아이들은 순순히 팔을 접었다. 그중 가장 큰 계집애가 아이들을 몰고 나무그네 쪽으로 갔다. 한꺼번에 그네에 올라타면 안된다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녀는 일어선 김에 사람들을 피해 거실로 들어갔다. 통유리창은 반쯤만 열어두었다. 그녀가 할 일은 이제 없었다. 저녁에는 미리 준비해놓은 만두소로 함께 만두를 빚어 먹을 것이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넣었다. 볕을 받은 가죽소파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그녀는 느긋하게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튤립 자리에 금어초를 심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색과 모양으로 치자면 튤립이 더 화려하지만, 금어초도 제법 청초하니 화사한 맛이 있었다. 그녀는 우주비행사가 지구를 내려다보듯 자신의 정원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나하나 심고 가꾸고 배치한 완벽한 행성. 고국에서 가져온 백동백과 북쪽의 히아신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행성. 국경도 없고 인종도 없고 사악함도 없는 푸르른 행성. 포근하고 평화로운 기운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톡톡. 유리창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모이통을 쪼는 새부리처럼 작고 경쾌한 울림. 계집애였다. 자기보다 더 작은 꼬마들을 데리고 대장노릇을 하더니, 부하들은 어디다 버리고 혼자 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큰엄마, 큰일 났어요.”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계집애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달팽이가 꽃을 먹으려고 해요.” 조그만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연못 쪽을 가리켰다.

“두마리예요. 어떻게 해요, 큰엄마?” 계집애는 사태의 심각함을 재우쳐 알렸다.

계집애의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계집애는 그녀가 심판관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아이는 꽃의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팽이 편도 들어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아이의 표정이 여간 사랑스러운 게 아니었다.

“큰엄마 꽃을 다 먹어버리겠어요. 저랑 같이 가서 혼내줘요, 네?”

때마침 밖에서 한꺼번에 터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은 고개를 뒤로 꺾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여보, 이리 좀 나와봐.” 웃음소리를 비집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집애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시큰둥한 기분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무도 그녀의 정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백동백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말똥비료 덕분에 동백꽃이 더 환한 것을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얼마나 도둑맞았는지 돈은 헤아리면서 지지 않은 동백꽃은 헤아리지 않았다. 정원 가꾸기를 즐기는 이 나라 사람들 같았으면 오자마자 꽃 이름을 묻고 칭찬하고 비결을 물었을 텐데. 아직 때를 못 벗어서. 똑같이 시에서 월급 받는 오페라단원이라도 삼십년을 산 그녀와 같을 수는 없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내일은 꽃을 꺾어야지. 그 꽃을 들고 철학자거지를 찾아야지. 그녀가 직접 키운 꽃을 가져다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 시큰둥한 기분이 좀 누그러졌다. 계집애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귓속말로 말해주었다.

“가서 조금만 먹으라고 말해줘. 알겠지?”

계집애는 득달같이 연못 쪽으로 뛰어갔다. 꽃을 지키는 어린 파수꾼 같았다. 그녀는 그의 등 뒤에 서서 어깨 위에 다정히 손을 얹었다.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와. 봉구 얘기 하고 있었어.”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사람들이 그를 재촉했다.

“어떻게 되긴. 이 사람이 주방에서 가만히 지켜보니까. 손님이 연어초밥을 가리켜도 스시. 마구로를 가리켜도 스시. 우나기도 스시. 뭐냐고 묻는 것마다 스시, 스시, 스시. 누가 스신지 몰라서 물어? 손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 맞지, 여보?”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봉구 얘기가 나오면 그녀도 함께 거들며 흉내를 내곤 했는데, 오늘은 역시나 흥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백동백나무에 꽃이 두송이밖에 남지 않은 걸 확인했다. 그러곤 연못 쪽을 보았다. 계집애는 치마를 모으고 연못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손나발을 하고 뭔가 소곤거리는 시늉도 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야. 그 정도 했으면 그냥 얼른 들어와야 하는데 당당하게 서 있는 거야. 그래서 어쩌나 보자 하고 손님이 또 물은 거지. 스시는 얼마나 배우면 만들 수 있냐고.”

“얼마나 배우면 만들 수 있는데요?”

“일주일.”

“진짜예요?”

그녀는 계집애가 달팽이에게 들려줬을 얘기를 생각해보았다. 달팽아 조금만 먹어라, 아니면 달팽아 이제 그만 먹어라?

“지가 들어온 지 일주일 됐거든. 일주일이면 다 만든다고. 너도 만들 수 있어, 그랬다는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걔 이름이 봉구스시가 됐어. 내가 붙여줬지. 나중에 잘 배워서 그 이름 걸고 스시집 차리면 되겠다고. 이름도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봉구. 딱 봉구 짓 하는 애를 이년이나 데리고 있었잖아. 일 끝나면 일본유학생 붙여서 일어도 따로 가르쳐주고. 그때부터 홀에는 일본애들 하나씩 꼭 써.”

“와, 일본어도 가르쳐주시고 훌륭하시다. 그런 사장님이 어딨어요. 그런데 한국애들 안 쓰고요?”

“아무래도 스시집이잖아. 중국애들이 하는 스시집하고 구별이 가야 하니까. 요즘엔 월남애들까지 스시집을 해요. 우리가 보면 흉내만 겨우 낸 건데, 간장도 이상한 거 쓰고. 우린 키꼬망만 쓰거든. 여기 애들이 간장 맛을 구분하나 어디. 동양인 얼굴도 구분 못하는데.”

봉구 얘기의 끝은 언제나 거기였다. 더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덩달아 한바탕 웃은 다음, 연못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계집애는 그녀가 다가가는 것도 모른 채 뭔가에 골몰해 있었다.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계집애 등 뒤로 가 조용히 앉았다.

“달팽이한테 잘 말해줬니?”

계집애가 후딱 일어났다. 깜짝 놀랐다는 시늉을 하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러곤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잘 말했어요. 큰엄마 꽃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된다고.”

“그러니까 달팽이가 뭐래?”

계집애는 한참 골똘히 생각했다.

“알겠대요. 이제 다 먹고 집에 간대요.”

그러곤 환하게 웃었다. 볼의 솜털이 햇빛을 받아 발랄하게 빛났다. 아이는 달팽이에게 그만 흥미를 잃었는지 손을 탈탈 털고는 자리를 떴다. 어른들이 있는 방향으로 앙감질로 뛰어갔다.

그녀는 계집애처럼 치마를 감아쥐고 연못 앞에 쭈그려 앉았다. 계집애가 골몰했던 것을 상상하며 연못 주변을 살폈다. 원래 정원의 일들은 순수한 사람들의 시선을 붙드는 법이었다. 연못 주변에서는 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작은 벌레들과 물고기들과 물풀들의 일.

무릎에 손을 얹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토라져 혼자 떨어져 나온 어린 계집애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 낯선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진짜로 토라진 사람처럼 입술을 내밀고 손가락으로 괜히 흙을 헤쳐보았다. 흙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촉촉하고 차가웠다. 올해는 연못에 가시연을 띄워도 좋겠다.

뭔가 딱딱하고 뾰족한 것이 손끝을 찔렀다. 그녀는 냉큼 손을 거뒀다가 다시 만져보았다. 이번엔 물컹하고 끈적한 것이 만져졌다. 달팽이. 무언가에 쿡 눌려 등껍데기가 부서진 달팽이. 뾰족하게 깨진 껍데기가 살을 뚫고 들어간, 그래서 살이 뭉개지고 끈적한 진액으로 범벅이 된, 달팽이.

고개를 돌려 계집애를 찾았다. 아이는 제 엄마 옆에 앉아 수정과에 든 곶감을 뒤늦게 받아 먹는 중이었다. 볼을 쪽 오므려 곶감을 빨아대는 표정이 다디달았다. 엄마 품에 숨은 아이의 그 뽀얀 얼굴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 손에 품은 달팽이는 뭉개진 살이 꿈틀 살아,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탈탈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살에 눈이 부셨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계집애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계집애가 웃으며 돌아봤다.

“웃어?”

계집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맞추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계집애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계집애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계집애가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는 걸 더 세게 쥐었다. 팔을 쭉 들어올려 계집애를 일으켜 세웠다. 의자가 나동그라지면서 계집애는 땅바닥에 철푸덕 무릎을 찧으며 엎어졌다. 그녀는 그대로 연못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자, 가서 보자. 네가 뭘 했는지, 가서 보자고, 엉?”

계집애는 엉덩이를 뒤로 빼며 안간힘을 썼다. 발부리로 잔디를 파올리며 기를 쓰고 버텼다. 누군가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그녀는 거칠게 뿌리쳤다. 거친 몸부림에 누군가의 턱을 팔꿈치로 올려쳤다. 남편이었다.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 순간 계집애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자리에 멈춰 서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여보, 왜 이러는 거야?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형님, 일단 그 손 좀 놓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계집애가 더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계집애의 손목을 움켜쥔 채 잡아당겼다가 밀치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흔드는 대로 아이의 몸이 이리저리 춤을 췄다. 계집애는 한쪽 팔을 버둥거리며 발악하듯 울어댔다. 벌건 잇몸을 드러내고 침을 질질 흘리며 울고 또 울었다.

찡그린 얼굴이 흉측했다. 벌건 잇몸이 벌레 같았다. 콧물이 거품을 뿜으며 흘러내리고 눈물이 그 위를 덮었다. 목젖이 부풀었다 쪼그라들기를 반복하며 침을 끌어올렸다. 벌레 먹어 시커먼 충치 사이로 곶감 찌꺼기가 너덜너덜 붙어 있었다. 더이상 사악할 수 없을 정도로 추했다. 그런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왜 울어?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그녀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애가 무슨 짓을 했다고. 아니 잘못을 해도 그렇지. 이게 도대체. 미쳤어요?”

아이를 떼어내려고 애엄마가 그녀의 팔을 꼬집어댔다. 그녀는 그럴수록 더 세게 쥐고 더 세게 흔들어댔다. 누군가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 뗐다. 어느 순간 그녀의 손아귀에서 계집애가 맥없이 빠져나갔다. 제 엄마가 얼른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다시 아이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가 더 빨리 그녀를 잡아안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울지 말라고! 누가 울래? 울지 말고 웃어! 웃으라니까? 어디 아까처럼 웃어봐아!”

그녀가 내지른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계집애의 울음소리를 덮쳤다.

“웃어보라고옷! 울지 말라고옷!”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듯, 죽을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사방이 조용했다. 계집애의 울음소리도 끊어졌다. 원망에 찬 두 눈초리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어린애의 딸꾹질 소리만 딸꾹딸꾹 끊어질 듯 이어졌다. 아이는 제 엄마 품에 안겨, 그녀는 남편의 품에 각각 안겨,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악마를 목격했다는 듯 입을 헤벌린 채.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계집애였다. 아이는 제 엄마 겨드랑이 사이에 머리를 박았다. 그는 미심쩍은 속도로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뒤편 창고로 들어갔다. 연장함에서 호미를 찾아 들고 나와 다시 정원을 가로질렀다. 연못 그늘진 곳에 잡초가 웃자란 것을 여태 보지 못하고 있었다니. 그녀는 속으로 자신의 상냥하지 못한 손길을 탓했다. 그러곤 연못의 가장 구석부터 호미질을 하기 시작했다. 구석진 곳일수록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연못가의 잡초를 다 뽑은 다음, 새로 심은 금어초밭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꽃무더기 속에 몸을 감추고 계속해서 호미질만 했다.

파티는 끝났다. 사람들은 만두도 먹지 않고 하나둘 가방을 챙겨 떠났다. 등 뒤로 그녀의 집을 떠나는 사람들의 작별인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큰소리로 “형수님, 안녕히 계세요” 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잘 가라고 웃으며 인사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누군가를 배웅하지 않은 일은 처음이었다. 어둠이 깔리고 청사초롱에 불빛이 비로소 선명히 빛날 때까지 그녀는 호미질을 멈추지 않았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이른 새벽에 일어나 꽃을 돌볼 것이고, 새벽안개의 냄새로 하루의 날씨를 점칠 것이다. 매일 토토스시에 들러 가게를 살피고, 잊지 말고 매일 은행업무를 보아야지. 은행에 가면 언제나 그랬듯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녀는 상냥한 여자니까. 상냥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세상이 이렇게 조화롭고 아름다운데. 그리고 그녀는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