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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법치의 길

 

 

김두식 金斗植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로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불편해도 괜찮아』 등이 있음.

 
 

백승헌 白承憲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희망과 대안’ 공동운영위원장, ‘새정치비전위원회’ 위원장 역임.

 

전수안 田秀安

사단법인 선 고문.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광주지방법원장, 대법관(2006~2012) 역임.

 

ⓒ 이영균

ⓒ 이영균

 

김두식(사회) 이명박·박근혜정부를 이어오면서 검찰의 무리한 기소와 그에 따른 무죄판결이 반복되고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까지 터지면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번호 대화에서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아보려 합니다. 백승헌 변호사와 전수안 전 대법관 두분을 모시고 말씀 나눌 텐데요, 창비 독자들을 위해 제가 잠깐 소개를 드리고 근황을 여쭙겠습니다. 백승헌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을 역임하시고 양심수 변론뿐 아니라 총선시민연대나 연합정치 운동 등 시민운동에 적극 관여해오셨습니다. 전수안 전 대법관은 1978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된 후 2012년 퇴임하기까지 34년간 법관으로 재직하셨고 퇴임 후 자유인을 꿈꾸며 ‘자발적 백수’를 표방하시다가 최근 공익법인에서 사회공헌활동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백변호사님은 근래 새정치비전위원회와 관련해 언론에 종종 나오셨는데 전선생님은 뭐하고 계신지 통 알 수가 없더군요.

 

전수안 요즘은 주로 여행 중입니다. 남편과 다니는 은퇴여행인데, 시작해놓고 보니 이렇게 남편하고 함께하는 것이 난생처음이더라고요. 전에는 집에 같이 있어도 딴생각 하고 남편 말도 건성으로 듣고 그랬는데 이제 비로소 서로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그동안 참 미안했다, 이제라도 잘됐다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김두식 부럽습니다. 백변호사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새정치비전위원회 활동으로 바쁘셨죠.

 

白承憲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 호사모임 회장, ‘희망과 대안’ 공동운영위원장, ‘새정치비전위원회’ 위원장 역임.

白承憲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희망과 대안’ 공동운영위원장, ‘새정치비전위원회’ 위원장 역임.

백승헌 요즈음은 좀 그랬습니다만, 그건 잠시 맡은 일이어서 항상 그 일 때문에 바쁜 것은 아닙니다. 외부에서는 제가 이런저런 사회활동으로 매스컴에 비칠 때는 바쁘게 사는 걸로 알다가, 잘 보이지 않으면 좀 여유로운가보다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제 일상은 변호사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대체로 균질했던 것 같아요. 삼십년 가까운 변호사 생활 동안 길게 쉰 것은 한달씩 두번 쉰 게 전부여서 그런지 전선생님이 퇴임 후 여유로운 생활을 하시는 것이 특히 부럽군요.(웃음)

 

김두식 두분 모시고 말씀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주제를 논하기 위해 우선 현실진단부터 해볼까 합니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하고 1년 반쯤 지났는데,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을 지내고 보수정부 6년 반쯤 지난 이 시점에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는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

 

백승헌 오늘 좌담 주제를 받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현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이 민주주의 안에 법치주의나 법에 의한 지배가 포함되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데, 과연 그럴까요. 민주주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의 사회나 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에서도 가령 법가(法家)라든지 하는 법에 의한 통치는 있어오지 않았습니까. 법치주의가 법에 의한 지배만을 말한다면 꼭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붙어 있어야 되는가, 그건 아니라고 봐요.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법에 의한 지배뿐 아니라 법의 평등,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이 법치주의의 필수요소로 인정되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지금의 법치주의가 가능해진 것 아닌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대화가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가 안녕한가를 묻는 거라면 그것은 단지 법치주의가 확립되었는지를 묻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취약성이나 불안전성에 대한 문제도 같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법치주의가 안정되지 않았다면, 민주주의도 착근(着根)되지 못했거나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겠죠. 역으로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金 斗植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로 『헌법의 풍경』 『평화 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불편해도 괜찮아』 등이 있음.

金 斗植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로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불편해도 괜찮아』 등이 있음.

김두식 단순히 법치주의의 위기라기보다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는 말씀이군요. 사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끝도 없겠죠. 법의 지배라는 것은 왕의 지배가 아닌 안정적인 법과 제도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구로서의 의미도 지니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전 민주정부 아래에서 법치주의가 완전히 자리잡고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걸 미리 밝힐 필요가 있겠네요.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개인적으로는 이런 의문이 있습니다. 현재 이 정부의 정통성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되는가 하는 겁니다.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겠지만 어쨌거나 국정원이 인터넷을 통해서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잖아요. 지금의 민주주의에서 정부의 정당성이란 표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고, 결국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이 가장 많은 권력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죠.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선거 때만 반짝 공론의 장이 형성됐다가 금방 사라지다시피 하고 다시 다음 선거 때 살아나는 식으로 지금 민주주의가 겨우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나마 유지됐던 민주주의와 공론의 장이 지난 대선에서 근본적으로 훼손됐습니다. 인터넷에 댓글 몇개 단 것이, 사실 몇개는 아니고 엄청나게 많다고 밝혀졌지만, 선거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보다도 공론의 장 자체가 훼손된 게 더 큰 문제잖아요. 저도 지난 선거 때 트위터를 했는데 정말 이상한 글과 계정을 많이 봤거든요. 어느새 잊혀져서 그렇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나 싶은 글이 계속 올라왔어요. 그러다가 적발되고 문제가 되자 일시에 사라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었죠. 이건 어쩌면 진보적인 분들이 아니라 보수적인 분들이 더 분노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보수적인 의견을 달면 향후 10년쯤은 ‘너 국정원 알바지?’라는 반문에 부딪히게 될 테니까요. 공론의 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대통령도 그렇고 다들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보자 하는데, 저는 국가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일에 대해 재판을 통해서만 진실을 규명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대통령이 자기 아래에 두고 있는 기관의 잘못에 대해 진실을 밝힐 의지가 있으면 법원의 판결을 기다릴 게 아니라 먼저 나서서 진상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면서 지난 정부에서 행해진 일이니 이 정부는 과거를 씻고 깨끗하게 출발하겠다고 선언해야죠. 그런 시기를 놓친 채 1년 반이 지나간 상황에서 이 정부의 정당성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따라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인 민주주의 위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고 그게 밝혀지고 있는데도 시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죠. 늘 같은 사람들만 모여서 시청 앞 광장에서 소리를 몇번 질러보지만 대통령은 반응하지 않고 시민들도 곧 잊어버립니다. 지방선거가 눈앞에 있는데도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아예 이슈가 안되고 있어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이 몇년 사이에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게 민주주의 또는 법치주의의 가장 큰 위기가 아닌가 싶어요.

 

백승헌 1987년에 만들어진 현행 헌법 전후에 무엇이 가장 다른가를 생각해보면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이 도전받느냐 아니냐인 것 같아요. 87년 연말의 대선과정에 많은 문제가 있었고 실제 군사쿠데타의 주역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그 선거를 포함해서 그 이후에도 선거의 정당성은 여간해서는 문제되지 않았죠. 공안정국,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광우병 촛불 등 정부마다 상당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무리 심각해도 선거 자체를 무효화하는 데는 이르지 않았어요. 반면 87년 이전의 권력은 아무리 압도적 다수에 의해 선출됐다 하더라도 독재정권이라는 지적을 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거의 정당성 위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집권자가 모든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죠. 선거 자체도 그렇지만 민주주의가 유동적이고 발전적인 개념이라고 본다면, 선거 외의 시기에도 집권자는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성찰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을 강화할수록 그것이 축적되어 권력의 정당성도 확보되고 우리 사회의 안정적인 발전이 담보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지난 대선과 그후 상황을 보면,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것이나 이를 조사해 처리하는 과정 모두에서 정당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법치주의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보면요, 일단 법치주의란 어떤 세력이 권력을 잡든, 어떤 검찰이 있든, 어떤 사법부 판사가 사건을 담당하든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건을 놓고 검찰이 현재의 집권자 아래서 수사를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국민에게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이것은 법 앞에서의 평등이 전혀 관철되지 않는 상황이지요. 게다가 수사과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채동욱(蔡東旭) 검찰총장을 이른바 ‘찍어내기’ 했던 행태를 보면 이 정권이 결과적으로 정당성을 강요할 뿐이지,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설득하는 사회적 과정은 무시한다는 생각이에요. 아직 사건들이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이와 관련해서 유일하게 1심 판결이 난 게 김용판(金用判) 전 경찰청장 건인데, 과연 이 사건에서 검찰이 최선을 다했는가 또는 검찰총장이 사임하고 수사팀장이 강제로 자리를 떠야 되는 상황에서 공소유지를 제대로 한 것인가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용판 재판의 문제점과 대통령의 책임

 

전수안 원론적으로 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나 다수결에 의한 원칙을 요체로 한다고 보면 법치주의와 반드시 조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선진적인 자유민주주의와 실질적 법치주의 사이에는 충돌이 있을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선진적이지 않거나 법치주의가 실질적이지 않을 때만 충돌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를 견제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충돌 내지 민주주의의 우위를 과장했다는 견해도 있고요. 우리도 대통령 탄핵사건과 수도이전법 논란 등을 통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긴장을 체험하지 않았나요. 대의민주주의가 선출된 권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라면 법치주의는 권력이 솟아오르는 순간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밖에요.

자연스럽게 헌법재판 문제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미국과 달리 헌법에 명문의 규정을 두고 있는 우리 위헌법률심사제도는 대의민주주의가 법치주의 통제 아래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법치주의가 민주주의의 하위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접점에 위치한 헌법재판소의 위상과 역할을 무겁게 보는 이유고요. 자유민주주의가 위축된 시기일수록 헌법재판소는, 재산권 보호에는 적극적이고 자유권 보장에는 소극적이라는 지적과, 정치상황에 민감하기보다는 둔감한 것이 낫다는 우려에 귀 기울이고,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노동권과 정치활동 보장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여러 문제에 관해 유엔과 국제인권 기준에 부합하는 보편타당한 결정을 유보하지 않음으로써 시대적 소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로 돌아오면, 국정원 댓글사건은 국가권력의 창출에 민의가 아닌 국가기관이 개입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를 왜곡한 것 아닙니까.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중대한 사안이니까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재발방지를 위해 필수적이죠. 국정원의 행위 자체는 현 정부출범 전에 있었으니까 일단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현직 대통령이 책임질 일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런 일련의 행위가 알려진 후에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가리는 것은 대통령의 현재 직무입니다. 재발방지 또한 임기말에 차기 선거를 관장해야 할 현직 대통령의 곧 다가올 임무이고요. 그렇게 볼 때, 정권 출범 전의 일이라고 해서 대통령이 국정원 댓글사건의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명분으로나 실리로나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다. 대통령의 소극적 태도는 당연히 직간접적으로 검찰의 수사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고 실제로도 그랬지 않습니까. 채동욱 총장 사건도 그런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고요. 요컨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대의민주주의를 왜곡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할뿐더러 왜곡의 정도에 있어서도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아까 김용판 전 경찰청장 사건에 대한 백변호사의 말씀 중에 재판부에 대한 비판은 없고 검찰이 수사나 기소유지 과정에서 잘못했을 거라고 하셔서 전직 법관으로서 다행이다 싶네요.(웃음)

 

백승헌 일반론이기는 합니다만 해당 재판부의 개별 판단에 대해 지금 아무리 관심을 갖고 자세히 보더라도 기록이 가진 디테일함이나 엄격한 증명의 원칙에 비추어서 함부로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 대해 제가 재판부의 논리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요. 재판부에 대한 비판에 앞서 검찰을 문제 삼은 것은 검찰이 수사단계부터 공소유지까지 그 책무를 다했는가, 다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는가가 먼저 비판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田秀安 사단법인 선 고문. 서울고등법 원 수석부장판사, 광주지방법 원장, 대법관(2006~2012) 역임.

田秀安 사단법인 선 고문.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광주지방법원장, 대법관(2006~2012) 역임.

전수안 저도 보도를 보고 권은희(權垠希, 국정원 댓글사건 당시 서울수서경찰서 수사과장)라는 사람이 공무원일 뿐 아니라 변호사 자격도 있는 분인데, 그분에게 특별한 동기나 의도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말 그분 혼자서 그런 허위진술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진실을 말했다는 것인가 하는 소박한 의문은 들었습니다.

 

김두식 누구를 믿느냐는 것은 결국 증명력 판단 문제인데, 한쪽은 조직에서 살아남아야 되는 사람들이고 다른 쪽은 조직에서 살아남는 걸 포기한 채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혼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누구를 믿어야 할지가 자명한데 이상한 결과가 나왔죠.

 

백승헌 이번 판결에서 가장 지적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증인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거짓 진술의 동기가 있느냐 없느냐이죠. 이 사건은 공무원 신분을 가진 사람이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하여 불리한 진술을 한 경우인데 그 사람에게 거짓 진술의 동기를 발견할 수 없다면 신빙성을 쉽게 배척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진실이 다수결로 판가름되는 것은 아니지요.

 

 

시민의 좌절과 자포자기, 보수정부의 관리법?

 

김두식 역시 법률가들이라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기록을 못 본 상태에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네요. 학교에서 형법이나 형사소송법을 가르치는 교수 입장에서는 지난 6년 반만큼 ‘좋은 시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쉬운 사건이 계속 쏟아져나왔기 때문이죠. 어떤 면에서는 법학교수도 잘 모르는 내용을 그때그때 찾아보도록 공부를 계속 시켜주는 정부기도 했어요. 예를 들면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도 공소장 변경에 있어서의 공소사실 동일성 여부, 포괄일죄(包括一罪, 수개의 행위가 포괄적으로 1개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여 일죄를 구성하는 경우)에 있어서의 공소사실 동일성 여부라든지 공소시효 문제 같은 게 다 걸려 있잖아요. 제가 최근 수업하면서 이게 포괄일죄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지난 이후 나중에 공소장 변경을 통해 추가된 범죄사실도 동일성이 인정될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아시겠지만 이게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에도 자주 출제되는 형사소송법상의 난제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보니 일반 국민에게 이 복잡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게 얼마나 이상한 수사였는지 알리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법정에서 다투는 문제가 되고 나서는 갈수록 너무 전문적인 법리 지식을 필요로 해서 시민들의 저항을 오히려 막고 있는 거 아닌가 싶고요.

 

백승헌 수사와 재판이라는 사법 영역에 들어서면서 문제가 전문가에게만 맡겨지는 점을 지적하셨는데, 동감입니다. 이러한 괴리가 중요 사건에 대한 시민 자체적인 판단을 지연케 하고, 그런 체험이 반복되면서 시민 스스로 사회나 제도에 대한 기대수준을 많이 낮추게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의 한 예이기도 한 것 같고요. 요즘 보면 이렇듯 고착된 현실에 대해 어쩔 수 없는 것인가보다, 일반 시민의 힘으로는 이 정도밖에는 안되나보다, 검찰이란 저럴 수밖에 없나보다라는, 반쯤은 포기하는 정서가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시민들이 그 이상의 민주주의를 상상하지 않고, 더 나아가지 않고 자기위로에 빠져 있다면 이는 비단 정치권이나 사법부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김두식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청계천에 모여서 집회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더 진전되지 않는 걸 보면, 보수정부가 시민의 저항을 관리하는 방법을 완전히 체득한 것 같아요. 차벽을 쳐서 바깥에서 안 보이게 하고, 그 소수의 사람들을 묶어놓은 다음에는 무반응으로 일관하면 어느 시점부터는 결국 잦아진다는 관리기법을 알게 된 것 아닌지…… 저는 그게 민주주의의 위기인 것 같거든요.

 

백승헌 아테네가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이다가 스스로 타락하고 몰락하는 길을 걸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쭉 발전해왔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역행할 수도 있음을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너무 낙관한 나머지 그걸 지키고 계속 발전케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고민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수안 여기에서 언론의 역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의 언론 현실이 말씀하신 그런 사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라고 봐요. 언론이 순기능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때는 시민들로 하여금 처음에는 언론에 투영된 현실에 반발하거나 회의하다가 마침내 좌절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워요.

 

백승헌 국정원 댓글사건은 대의민주주의를 훼손한 동시에, 대안언론의 장으로서 그동안 나름대로 성장해왔던 온라인에서의 담론의 장을 파괴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공간의 자율성이나 그 안에서의 토론과정이 손상되면서 기성 제도언론만이 여론에 압도적으로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집권자 등 기득권이 민의를 쉽게 조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만, 제도언론의 균형이 깨지고 역기능이 큰 현실에서, 인터넷 공간에서마저 시민자율의 힘이 발휘될 수 없다면 실제 민심이 제대로 모아질 수 없는 상태가 되지요.

 

전수안 민주주의뿐 아니라 법치주의를 이야기하려면 최근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혐의 사건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것이라면 이 사건은 법치주의의 기본을 흔든 것인데요. 수사의 시점과 대상에 비추어 지방선거 전 특정 후보를 겨냥한 선거개입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민주주의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울시 공무원 중에 간첩혐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요. 누구든 어느날 갑자기 범죄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가 위조된 증거에 의해 수사를 받고 어쩌면 유죄판결을 받을지도 모르는 사회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요. 수사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없는 사회는 법치사회도 민주사회도 아닙니다. 보도된 내용만을 보면 증거위조의 주체인 국정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검찰도 그 선의를 믿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검찰이 그렇게까지 무성의하거나 무능력하다고 해도 문제고, 그렇지 않고 증거조작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더욱 문제여서 참담하지요. 백주대낮에 불행한 과거사의 그림자를 다시 보는 것 같아서요.

 

김두식 지금까지 우리 사회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상황에 대해 몇가지 사건사례를 놓고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이념을 현실에서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지 한말씀씩 정리하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전수안 사회가 정상적이지 않거나 위기국면에 처하게 되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어느 순간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고 그럴 경우 법보다 다수의 뜻이 우선한다는 믿음이 힘을 얻기 쉬운데요. 저는 그런 경우에도 법치주의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기댈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바로 법치주의 아닌가 싶고, 그런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민주주의가 조정·발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백승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해보자면,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 사이의 관계이기도 한 것 같아요. 직접민주주의라면 그런 문제가 없을 텐데 대의제 민주국가에서는 선출된 권력에 모든 걸 맡기죠. 따라서 선출된 권력과, 전문가 등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제도화된 비선출 권력 사이에 견제와 균형, 분립이 작동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법원에 가져가서 해결하자는 사법만능주의는 정치영역을 왜소하게 만들 수 있어요. 행정수도 이전 위헌판결(2004.10.21)은 그런 점에서 비판할 측면이 있죠. 반면 선출된 권력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권력행사가 정당하다는 순환논리에 빠진다면 법치주의는 설 길이 없습니다. 양자 사이의 긴장관계는 대의민주주의가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어느 한쪽의 과잉과 다른 한쪽의 축소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둘 다를 제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는 현재 민주주의도 법치주의도 상당히 왜소해져 있지 않나 걱정입니다. 시장권력을 비롯해 다른 여러 문제가 양쪽의 선순환적인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전수안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사회 각 분야에서 정치인과 공무원, 기업인 등 사회주도 계층이 헌법과 법률로 정한 사회계약의 내용을 준수하거나 최소한 위반하지 않고, 나아가 그 취지와 목적까지를 살피는 의식과 노력이 법치주의 실현의 기초지요. 동시에 그러한 사회주도층의 행위를 감시하고 고발하고 그에 저항하는 시민의식과 그 표출이 법치주의 실현의 담보고요. 그런데 그러한 구조가 어느 하나라도 정상작동하지 못하면 법치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결국 법원으로 흘러들어 사법부의 판단으로 끝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법치라고 할 때 어느 사회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운용되고 유지되는 것을 바랄 뿐 재판에 의한 통치를 원하지 않음은 물론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사법제도의 수준이 곧 그 사회 법치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 마련인 이유입니다.

 

김두식 입법부나 행정부는 표의 숫자에서 권력의 정당성이 나오는데 사법부의 정당성은, 반쯤은 농담입니다만, 공부 잘해서 고시 붙은 사람들이라는 데서 나온 측면이 있잖아요.(웃음) 그래서 김영란(金英蘭) 전 대법관 같은 분은 사법부의 권위와 정당성이 소수자의 권익보호에서 나온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다수결에 맞서서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게 사법부의 존재 이유라는 거지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양자의 조화를 설명하는 훌륭한 논거라고 생각해요. 자연스럽게 사법부에 대한 논의로 넘어왔는데요, 다소 가벼운 질문으로 지금의 사법부를 어떻게 보시는지 얘기를 시작해보면 좋겠습니다. 좋은 판결과 나쁜 판결, 이렇게 가르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최근에 나온 판결 가운데 특별히 좋게 보신 게 있나요?

 

 

법원의 상대적 진전과 여전히 남는 아쉬움

 

백승헌 기본적으로 검찰은 동일한 단위·권력으로 이해되는 반면에 법원은 어떤 사건을 개개 판사가 판단하는 개별화된 과정을 지닌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판결이 좋다 나쁘다고 하는 것이 곧 사법부의 건강함이라든지, 전체 흐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지요. 특히 현재의 사건은 평가가 쉽지 않습니다. 사법부의 기능 자체가 사건이 벌어진 뒤 상당한 시간을 가지고 판단하는 거고, 또 사법부의 판단이 옳았느냐 틀렸느냐 하는 역사적 평가는 그로부터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가능하니까 동시대적인 판단은 대단히 어렵고 섣부를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년간 검찰의 부당한 횡포라고 느낄 만한 사건 중 상당 부분이 법원에 의해 걸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도 이상한 기소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죠. 지금까지의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토양이 없이 사법부가 그러한 판단을 계속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한다면 사법부 역시 우리 사회 민주발전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법원이 양심에 의한 독립적 판단이 계속 가능하도록, 또 사회적 소수자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칭찬입니다.(웃음)

비판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찌 보면 별개의 사건이지만 최근에 나온 대법원의 통상임금에 대한 판결(2013.12.18)과 과거사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2013.12.12)을 읽어보면서 의아함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잠시 소개하자면, 통상임금에 관한 판결에서 대법원은 기업들이 종전 관행에 비추어 예측 가능성이 없었다고 보아 대법원 판결 이전에 지급된 임금에 통상임금의 법리를 적용하는 것, 즉 소급효(遡及效)를 부인했어요. 반면 과거사 사건에 있어서는 재심에 의한 무죄확정판결 또는 과거사진실화해위의 결정 후 6개월이 지나서 제기된 손해배상소송을 상당한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했습니다. 그전에는 법률상 명시된 3년의 시효를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데다, 그 ‘6개월’이라는 게 법전에 명시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판단한 선례가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 이전에 제기되어 있던 과거사 소송들에 대해서 어떤 예외도 없이 모두 이 6개월 법리를 적용해서 기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물적·인적 기능을 보유한 기업은 예측 가능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과거 임금의 지급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는 반면에, 과거에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법원이 인정한 피해자에 대해서는 그들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던 단기간을 설정해서 소급적용함으로써 가해자인 국가의 책임을 그 국가의 일부인 사법부가 면제한 겁니다. 강자에 대해 엄격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사법부가 아니라, 강자는 강자의 논리로 배려받고 약자는 수십년 만에 겨우 명예회복을 해서는 사법부의 최후 구제수단에 기대려다가 다시 한번 피해를 받게 되는 이중기준이 아닌가요.

 

김두식 두가지를 비교해보면 법원이 결국 강자의 편을 들거나 심지어 국가 자신의 편을 든 게 아니냐는 지적이 가능하겠습니다.

 

백승헌 일전에 사법부가 과거사 사건, 즉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에 대해 사과를 한 바 있습니다(2008년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이 긴급조치 위반사건 관련 재판 등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고 재심절차의 중요상을 강조함편집자). 그후 작년에는 고()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긴급조치 1호 위반사건 재심판결을 담당한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2013.1.24)하면서 유족에게 사과하기도 하는 등 개별재판에서도 그러한 예가 있었습니다. 그에 비춘다면 앞서 말씀드린 과거사 사건에서의 시효적용 문제는 지극히 모순되는 태도지요. 사법부 전체를 판단할 때는 보수적이다 진보적이다 하는 논리에 앞서 옳고 그름이라는 상식의 잣대가 우선하는데,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들게 한 판결입니다.

 

전수안 최근의 통상임금 판결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신의칙(信義則, 신의성실의 원칙)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법대로’의 결론이 부당하거나 문제가 있어서 정의감에 비추어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경우에 결론을 수정하기 위해, 말이 수정이지 결론을 뒤집기 위해 적용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임금사건에서 근로자에게 법대로 임금을 다 주라는 결론이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에 과연 그 정도로 부당한 건가요. 그에 관해서는 이미 법이론상으로나 사회경제학적으로 많은 지적과 논의가 있었고 저도 의문을 갖는 쪽에 속합니다. 그보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판결을 내린 다수 대법관의 판단이 지금 우리 사회 다수의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인데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생각은 항상 타당한가 새삼 성찰해보게 됩니다.

 

김두식 두분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다만 예전에 보기 어렵던 괜찮은 판결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부부 사이에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3.5.16)처럼 너무 이상했던 과거 판결이나 법이론을 바로잡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죠. 과거에는 아내를 때린 건 처벌할 수 있지만 아내를 때리고 성관계를 맺으면 처벌을 못한다는 기이한 결론이 도출되곤 했거든요. 하급심이기는 하지만 서울남부지방법원의 MBC 노조원 해고무효 확인소송 판결(2014.1.17)도 좋았습니다. 과거에는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파업만 적법하다고 하면서 그 근로조건의 범위를 매우 좁게 해석했잖아요. 이번 판결에서는 공정방송과 공정보도가 방송법에도 보장된 중요한 과제기 때문에 그걸 훼손한 사장에 맞서 싸운 파업이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기존의 법이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 훌륭한 판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군복무 중에 자살한 경우에도 교육훈련,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으면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 된다는 판결(2012.6.18)도 기억에 남습니다. 바로 전수안 전 대법관께서 주심(主審)이셨지요. 저는 우리나라에서도 사람 냄새 나는 판결을 무척 보고 싶었거든요. 우리 판결은 너무 기계적이라 사람이 보이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 판결을 보면 “군대 내 자살에 대하여도, 일반 사회에서의 자살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자살자 개인의 의지박약이나 나약함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며, 유가족에 대한 적절한 위로와 보상 또한 국가의 책무다”(전수안 대법관 보충의견) 같은 ‘살아 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전에 비해 큰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조문과 통념에 얽매이지 않은 판결을

 

백승헌 저도 그 판결을 보면서, 사법부가 사회적 통념을 최소한만 수용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묵혀 있던 문제에 도전하는 면이 있음을 확인했어요. 피해자를 의지박약자 취급하거나 개인의 문제로 돌림으로써 전체가 책임을 면하는 방식에 대해, 그렇지 않다, 같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다 하면서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퍼져 있는 통념에 일침을 놓았죠. 이런 점에서 좋은 판결이란 우리 사회를 좀더 정상으로 이끄는 선도적 기능도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김두식 저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저를 포함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법실증주의적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라면 법규정에 자해나 자상이 국가유공자로 인정 안된다고 적혀 있는 걸 보는 순간 자살한 이들이 가혹행위를 겪었건 어쨌건 불쌍하긴 하지만 법규정의 해석상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기 쉬워요. 누가 물어보면 보나마나 저도 그렇게 대답했을 겁니다. 그런 통념에 도전한 변호사들이 있어서 다행이고요, 대법원이 통념의 벽을 넘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있는 판결이었다고 생각해요.

 

전수안 김교수께서 인용하신 판결의 마지막 부분, 즉 군대 내 자살을 자살자 개인의 의지박약이나 나약함으로 돌릴 수 없다는 표현의 행간에는, 군대에 가서 잘 적응하고 무사히 제대하는 사람만이 진정 정상인인가 하는 의문도 숨어 있습니다. 이건 인문학적 관점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웃음)

 

김두식 그렇군요. 혹시 아드님들을 군대 보내면서 하시게 된 생각 아니에요?(웃음)

 

전수안 그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우리 사회 각 분야의 희망이 여성 구성원이 많아지는 데 있다고 보는데요. 그 이유는 여성이 원래 사회 구성원의 절반이라는 점 말고도 우리 사회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남성의 경우 20대 초반 가장 감수성 예민하고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군대에 가지 않습니까. 그 이삼년 동안 군대의 조직과 문화를 접하고 결국은 거기 순응하게 된단 말이죠. 잘 적응한 사람은 사회로 돌아오게 되지만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정상적으로 복귀하지 못하죠. 결국 군사문화에 적응된 남성들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군사문화에 감염되지 않았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요,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 ‘알겠습니다, 그대로(시키는 대로) 실시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문화에 순응되어 있지는 않은지 말이죠. 그런데 실은 여성이라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간접흡연처럼 문화도 2차감염이 되거든요.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고 직장에는 남성 상사가 있잖아요. 그래도 상대적으로 덜 오염되었다는 점에서 여성이 희망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특히 검찰이야말로 여성 검사가 많아지면 지금과 상당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두식 검찰에서 용기있는 도전을 하는 분들이 여성 검사인 경우가 많습니다. 검찰조직은 군대조직과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윗사람과의 충돌을 피하거든요.

 

전수안 기왕이면 좋은 판결에 대한 얘기를 더 해도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공정방송을 관철하기 위한 MBC 노조의 파업이 궁극적으로는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 파업의 정당성을 인정한 법리는 새로운 것입니다. 쌍용차 해고무효 판결(2014.2.7)도 그렇습니다. 두 판결 모두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이후로도 상소심에서 법리공방은 있을 것으로 봅니다만. 쌍용차 문제만 해도 정리해고의 요건인 불가피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는지 다투어졌지만, 기업의 경영이 어렵다고 해도 그보다 더 절박한 것이 근로자가 처한 사정이 아니겠는가라는 상식의 선에서, 재판부가 좋은 결론을 도출했다고 생각합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서 재판부가 공소장 변경을 허가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검찰이 처음에는 26천여개 댓글에 대해 공소제기했다가 트윗 등의 다른 행위까지 포함해서 55천여건으로 공소장을 변경하고 다시 121만여건으로 추가했다가 올해초 78만여건으로 정리됐지요. 그 과정에서 추가기소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공직선거법 위반을 포함할 것인지 등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고요. 공소장 변경에 따라 추가로 기소된 행위는 처음 기소된 행위와 태양(態樣)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동일한 목적, 의도 아래 추진된 일련의 행위라는 것이 검찰의 공소사실이니까, 그런 사실이 인정되는지 여부는 별개의 논의로 하고, 재판부가 공소장 변경을 허가한 것은 적절한 재판진행이라고 봅니다. 불허했더라면 많은 행위들이 공소시효 만료로 묻혀버릴 수도 있었겠죠.

 

김두식 국정원의 정치개입 금지 규정은 선거개입처럼 시효가 짧지 않기 때문에 공소장 변경 없이 정치개입 금지의무 위반으로 추가기소해 처벌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겠죠. 물론 이번 사건의 본질을 비껴나지 않으려면 선거개입으로 처벌하는 것이 옳았고요.

 

백승헌 각론입니다만 선거법 공소장 변경에 대해서 말하자면, 선거법의 공소시효는 예외적으로 단기죠. 임기가 한참 지난 뒤에 기소되거나 기소 후에 길게 끄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공소시효도 단축하고 재판도 신속하게 하는 건데, 역으로 6개월만 지나면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돼서 제도의 선의와 결과의 공정성이 배반되는 경우가 되었습니다.

 

김두식 네, 그래서 선거 때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은 선거 끝나고 6개월이 지나기만을 기다리잖아요.

 

 

사법 독립과 엘리트주의 문제

 

백승헌 말이 나온 김에 과연 법원의 독립적 지위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느냐 하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의 변호사 초기 시절만 해도 이른바 시국사건에서는 모든 판결이 피고인에게 불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정치권력이나 인권과 관련한 사건에서 나쁜 판결은 반복되고, 인권기준을 바로 세우는 판결은 극히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전수안 별로 승소를 못해보셨군요.(웃음)

 

백승헌 그 시절의 시국사건이 그랬습니다. 선배들 얘기를 들으면 유신시절 등 그전은 더 심했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과거와 달리 사법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조금씩 늘어나는 지금의 상황이 계속될 것인가에 대해 저는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사법권력 시스템의 문제나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가 작용하는 것인데 두가지 측면에서 사법부 구성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하나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이는 독립적 판결이 어렵다는 것이고요. 둘째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가령 기업이 어려워지면 안된다는 시각이나 국가주의적 관점 같은 것들이 판결과정에 알게 모르게 녹아들어가는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서 거론된 좋은 판결들을 감안하면 저는 현재의 사법부에 대해 우려 섞인 기대 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수안 사회적 통념의 문제는 말씀하셨듯이 어려운 문제지요. 백변호사께서는 기업이나 국가에 우호적인 관점이 은연중에 무비판적으로 판결에 수용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셨지만, 한편에서는 그와 반대의 관점에서 나온 판결을 ‘튀는 판결’ ‘법관의 편향된 시각’ ‘주관적 양심에 따른 판결’이라고 공격하는 목소리가 더 크지 않습니까. 사회적 통념이 누구의 것인지, 국민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같은 문제는 사실 간단치가 않습니다. 정치인도 기업인도 좌도 우도 보수도 진보도 모두 국민의 이름으로 요구하고 비난하고 때로는 칭송하잖아요. 우선은 수적으로 다수를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수의 의견이 어떻게 수렴되는가,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도되어왔는가 묻지 않을 수 없고요, 그렇다면 다수가 아닌 중간인 또는 평균인이 기준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 선량한 보통사람이라면 우리가 가해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실은 경찰이나 검찰 어쩌면 국정원으로부터 범인으로 지목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수긍할까요? 그래서 모두가 흉악범에 대한 엄벌을 외칠 때 법관은 피고인이 과연 범인인지를 의심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양해할까요? 사회통념이나 국민과 같은 개념은 법관생활 내내 제 고민의 원천이자 화두였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첫째 문제, 즉 적어도 법관의 형식적 독립에 관해서라면 법원에서는 특정 법관의 소양이나 가치관 때문에 이러저러한 판결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 법관이 법원 내부의 다른 요인과 싸워야 한다거나 그것을 의식해서 자기 생각대로 판결하는 것에 주저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김두식 외압에 의해서 흔들리는 건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그 사람의 개인적인 양심에 따른 판결이지……

 

전수안 네. 그래서 사실은 신영철(申暎澈) 대법관 사건(서울중앙지법원장 재직 당시인 200811월 ‘광우병 촛불집회 사건’을 담당한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야간집회 금지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 심리를 기다리지 말고 판결을 내리도록 독촉한 사실이 드러나며 외압 논란을 부름편집자) 때도 이분이 왜 쓸데없이 이런 일을 하셨을까,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어요. 결국 판사들이 가만히 안 있지 않았습니까. 그게 법원에서는 그냥 넘어가서 덮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김두식 법원이 보이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에 대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지금 법원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는 부장판사, 중견판사가 대체로 80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냈잖아요. 남들이 민주화운동 할 때 고시공부했던 사람들이 갖는 약간의 부채의식 같은 게 일종의 사회적 책임으로 작동해서 법원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다른 면으로는, 뭐든지 극단에 이르게 되면 그 극단이 갖는 장점도 있는데, 우리 법원이 어쨌든 가장 극단적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데잖아요. 거기에서 파생되는 단점도 있지만 어느 쪽이 맞는 방향이라고 정해졌을 때 빠르게 변화하는 장점도 있는 것 같아요. 법원이 구속 중심의 재판에서 불구속 중심의 재판으로, 서류 중심에서 공판 중심으로 드라마틱하게 이행한 게 그런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백승헌 엘리트 지식인에 대한 굉장히 높은 평가인데요.(웃음)

 

김두식 걱정되는 점은 사회 전체 분위기와 관련한 겁니다. 제가 자랄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었던 저희 집에 세배 오는 친척 중에는 택시운전 하고 막일 하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제 아이는 친척 중에 그런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어요. 양극화가 심화되다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거나 고생하는 사람들을 거의 못 보고 자란 세대가 앞으로 법원 엘리트층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제가 긍정적이라고 보는 분위기가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이 돼요.

 

백승헌 엘리트가 많은 것이 사법부로서는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균등한 발전을 위해서 과연 좋은 일인가, 또 그 개인들이 다른 영역에 가서 더 잘될 수 있는 건데 사법 영역에 너무 몰리진 않았나 하는 점에서 폐해가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문가법관제가, 일부 배심제 도입 등으로 완화되는 측면이 있지만, 적어도 예측 가능한 미래에는 계속 유지될 것 같은데 전문가가 전문성을 올바르게 쓰기 위해서는 항상 전문 영역 바깥과 소통하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일종의 압박과 도전을 받아야 한다는 거죠. 80년대 세대가 꼭 민주화운동 세대라서가 아니라 일정부분 그런 고민을 강요받았던 시절이라 그게 가능했다고 생각하는데 이후 세대에도 이어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숙제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도 지금의 엘리트주의 교육시스템은 좋지 않습니다.

 

전수안 아닌게아니라 후대 법관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장학금이 있다고 하지만 경제적 여건이 좋아야 갈 수 있다고 알려진 법학전문대학원 출신들은 또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법원이 엘리트 집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으나(웃음) 말씀의 진정한 의도가 칭찬보다 우려에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러한 우려는 앞으로 법조일원화(판사·검사·변호사 간 장벽을 허물어 다양한 경험과 경력을 쌓은 법조인을 필요에 맞게 선출하는 제도)가 시행되면 상당부분 해소될 것으로 봅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법학전문대학원 출신 법조인의 실력에 대한 불신이 있고, 법원에서는 장차 전면적 법조일원화 시대의 법관 자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으나, 극단적 엘리트 법관에 대한 우려보다 더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나 검사로서 성공한 사람이 구태여 법관으로 오겠는가라는 전제하에, 한 직역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직역에서도 잘하지 못할 거라는 예단은 다분히 엘리트 집단의 눈높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와는 좀 모순되는 이야기 같지만, 요즘에는 법원이 다른 정부기관이나 심지어 일반 기업보다도 언론이나 국민에 대한 대응과 홍보를 더 잘하고 있다, 굉장히 많이 변했다라는 얘기를 종종 듣게 되는데요, 이런 부분은 정예 엘리트로 조직된 법원행정처와 그 정점에 있는 역대 대법원장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합니다. 순기능과 역기능을 다 함축하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이긴 합니다만. 우선 양형기준 정립, 불구속 재판이나 참여재판의 확대 같은 것만 해도 전체적 분위기를 주도해온 것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공이고, 이런 것은 순기능의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개별 법관의 재판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넘쳐나는 지침과 기준은 법관으로 하여금 자신의 법정에서 의연하고 담대하기보다 소심하고 위축되게 하는 면이 있어요. 어느 경우에나 과잉이 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승헌 엘리트 비중은 지금의 사법제도보다도 일제시대 때 훨씬 더 높았죠.(웃음) 하지만 그때 사법시스템이 잘 작동했다고는 누구도 말하지 않지요. 어찌 보면 추첨 등 비경쟁적인 방법에 의해 임명되는 공직자가 선출이나 시험에 의한 공직자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능력을 보이고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우수한 사회가 아닐까요.

 

김두식 맞습니다. 이런 얘기를 꺼낸 데 대한 변명을 좀 하자면 제가 법원행정처 비판을 많이 해왔는데 하도 그러다보니까 최근에는 오히려 극단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보게 됐어요.(일동 웃음) 저 그룹이 어떤 아름다움도 있구나 하는 일종의 재발견을 했죠.

 

 

검찰개혁은 검찰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

 

김두식 사법부에 대한 논의가 길게 이어졌는데 이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기관인 검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그동안 검찰과 관련한 사회적 이슈가 많이 있었습니다. 최근만 봐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를 맡았던 윤석열(尹錫悅) 여주지청장이 특별수사팀장에서 경질되었고,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의 개인사 논란 및 사직 등에 대해 이른바 ‘찍어내기’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밖에 각종 수사과정에서 무리하게 공소권을 남용하거나 반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불기소 처분이 남발되는 모습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비롯해서 우리 검찰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두분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백승헌 검찰이 과거사에 대해 반성한 적이 있는가부터 거론할까 합니다. 우리 현대사의 굴곡 때문에 국가권력조차 과거에 대해 스스로 반성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 있어왔는데 거의 유일한 예외가 검찰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시기에 적용되는 검사동일체 원칙(한명의 검사가 독립적으로 직무를 처리해 ‘단독관청’의 성격을 갖는 검찰의 특성상 개인의 독단을 방지하고 전국적으로 통일된 검찰권을 행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을 위해 정립된 원칙으로, 2004년 ‘검찰사무에 관한 지휘·감독’으로 용어가 바뀌었으나 본질적 내용은 유지됨편집자)이 확장되어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최근에 있었던 강기훈(姜基勳)씨 유서대필 사건 재심에 변호인으로 참여했는데 90년대 초반의 법정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검찰이 다시 한번 1991년 당시의 기소가 정당하고, 새롭게 드러난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검찰은 어떤 곳인가 고민을 또 하게 됐습니다.

전문가 영역은 대체하기 힘들어서 그 개혁이 외부의 힘만으로 될 수 없는데, 전문가 스스로의 자기개혁 동력이 없어 훨씬 어렵다고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우리 검찰만큼 많은 기능을 오로지 한 기관이 그것도 사법기관의 형태로 가지는 곳이 있을까요. 소추・공소유지・수사지휘 기능에, 수사를 직접 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공안 기능에다 상당기간 범죄정보 수집 기능까지 있습니다. 견제와 균형을 위한 검찰의 내부 시스템도 별로 없기 때문에, 저는 검찰 기능과 권력이 분산되어야 하며 이것은 검찰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검찰이 내부의 부당한 사태에 얼마나 용기있게 대응하고 있는가에 대해 갈수록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개혁하기 힘들다면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의 좁은 틀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 제도개혁을 통해서 검찰권을 분산해줘야 하는 시기가 됐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어느 시기에 잠시 나아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지속성을 결코 담보하지 못하겠죠.

 

김두식 예컨대 상설특검 같은 경쟁기관의 존재를 염두에 두시는 건가요?

 

백승헌 어떤 부분에서 시작한다는 맥을 찾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저는 전면적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비스를 받는 주권자인 국민 입장에서 가장 바람직한 수사・사법시스템을 재구성해보아야 합니다. 가령 권한을 분산한다 할 때 검찰의 수사권을 일부 이양받게 될 경찰권력을 지금 이대로 둔 채로 진행한다면 개혁의 효과가 긍정적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경찰을 어떻게 더 공정·청렴하고 능력있게 만드느냐, 이런 게 동시에 논의되지 않으면 핑퐁이 되는 거죠. 권한을 나눠줄 데가 없어서 한쪽이 계속 가지게 되고, 다른 한쪽은 나눠줘야 개혁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계속 요구만 하는 과정 속에서는 결국 국민이 지속적으로 나쁜 서비스를 받게 될 뿐입니다.

 

전수안 특검의 경우만 해도 이상적으로야 상설특검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고, 검찰로서는 반대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간의 불행한 경험에서 나온 고육지책이긴 하나 그동안 시행되었던 몇번의 특검도 제도보다 운용이 문제였다는 점에서 큰 기대는 없었는데, 그나마도 이것저것 다 축소된 모습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다고 하니 앞으로 지켜볼 일입니다. 검찰과 관련하여 근래에 문제된 사건으로는 국정원 댓글사건이나 증거조작 사건같이 논란의 와중에 있는 사건 외에도 주진우(朱眞旴) 기자나 안도현(安度眩) 시인 사건, 좀더 이전에는 정연주(鄭淵珠)KBS 사장의 배임사건,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명예훼손사건까지 사회적으로 논의가 이어진 무죄판결이 있습니다. 과거에 유죄판결이 확정되었음에도 억울한 사례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죄판결이 선고되었다고 해서 피고인에게 죄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므로 무리한 기소라고 일괄 매도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무죄판결이 선고되었다는 것은 증거가 충분치 않거나 혹은 증거가 있더라도 무리하게 수집된 것이므로 어느 쪽이든 검찰의 책임입니다. 과잉수사나 무리한 기소는 정의감의 과잉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은데, 범인을 모두 기소하겠다는 정의감도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기소하지 않겠다는 정의감도 소중하다는 것을 더욱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범인이라는 확신이 너무 강한 것이 문제인데, 사실 상식적인 얘기지만 누군들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검사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죠. 그런 겸허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 법원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검찰이 공판절차에서 재판부를 향해 ‘증명’했어야 할 일들을 재판이 끝난 후에 언론이나 여론을 향해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방금 말했듯이 공소사실을 증명하지 못한 것은 능력과 의지 둘 중 하나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추론할 수 있지요. 통상적인 사건에서 제대로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적법절차를 경시해온 수사관행에서 비롯한 것이고,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서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무리한 기소 의지나 의도, 즉 공정성에 문제가 있지 않나 추론하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검찰을 비판하거나 개혁을 이야기할 때 간과하지 말았으면 하는 점은 검찰 인사권자와 수뇌부로 대표되는 검찰이라는 기관 자체와, 나름의 용기를 발휘하고자 분투하는 구성원 검사들을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검찰개혁은 이론상으로야 검찰권을 행사하는 검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전환과 개혁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검사 개인의 선의를 기대하는 것은 검찰조직의 특성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동안 충분히 밝혀졌거든요. 그리고 검찰 인사의 공정성이 확보되지 않는 한 검사 개인에게 모두 조직 내 투사가 되기를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결국 검찰의 개혁은 검찰 인사의 객관성과 투명성 확보 없이는 어렵다고 봅니다. 공정하고 정의감 넘치는 개별 검사들을 인사권자의 부당한 지시와 압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장치가 필요하다는 거죠. 검찰 인사가 법원 인사와 다른 점은 예측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에요. 법원은 이 사람이 다음에 어느 지역으로 갈 것인지를 누구나 대강 예측할 수 있고 그에 어긋나는 인사는 즉시 문제가 되지만 검찰은 인사권자의 의중에 달려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김두식 농담입니다만 지금도 예측 가능성은 있지 않나요. 무죄판결을 자꾸 받은 검사일수록 좋은 곳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웃음)

 

백승헌 기소된 것 자체로 이미 그 사람이 반쯤은 범죄를 저지른 듯이 인식되기 때문에 사법부의 무죄판결만으로 온전하게 명예회복이 되었다고 할 순 없어요. 무죄가 난 사람 중에 진범이 있다는 가능성은 실제로는 존재해도 사법절차 내에서 검사가 할 말은 절대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 ‘아니면 말고’라는 태도는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만일 김교수님 말씀처럼 정말 대법원의 판결에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기소를 하느냐 마느냐로 인사고과가 이루어진다면 이건 스스로 인사원칙을 포기하는 거죠. 무죄판결이 난 다른 사건을 가지고는 인사고과에 부정적으로 반영하는 반면 몇몇 정치적 케이스에 대해서는 기소 이후 결과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스스로 공정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봐야죠.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엄정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데 비춰보면 지금 검찰의 기소행위는 거꾸로 된 경우가 많다는 생각입니다. 가령 두 사람이 교통신호를 위반했는데 교통경찰이 한 사람만 잡고 나서 ‘나는 너만 봤으니 저 사람은 관계없다, 너만 처벌하면 된다’는 태도를 보인다면 정의의 관점, 공정성의 관점에 반하는 거잖아요. 심지어 어떤 때는 기소를 하지 않거나 매우 부실한 상태에서 기소를 하고, 또 어떤 때는 법을 위반했는지조차 불분명한 사건임에도 모든 걸 뒤지다시피 해서 기소를 했다가 무죄가 나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에 대해서 과연 검찰에 자신이 지켜야 하는 잣대가 있는지 회의가 들 때가 많습니다. 개개의 검사가 얼마든지 훌륭할 수 있다는 데 충분히 동의하지만, 검찰이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고민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조직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검찰 내부에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직문화 속에서는 계속해서 눈을 가린 사람만이 살아남는 구조일 수 있지 않습니까. 개별 검사의 문제가 아니라 넓은 시야를 통한 자기성찰과 숙고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김두식 배임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정연주 전 KBS 사장 사건이나 피디수첩 사건 등에서 보듯이 사실 범죄에서 제일 중요한 건 고의입니다. 고의입증이 안된 상태에서 기소를 하면 나중에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무리한 기소를 함으로써 정치적인 흐름에서 맥을 끊거나 불을 끄는 소방수 역할을 검찰이 해온 것 같습니다. 국정원 사건 또한 수사의 일반 원칙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어요. 댓글을 직접 단 사람들을 일단 구속한 상태에서 위에 누가 있는지를 추궁해 들어가는 게 수사의 ABC인데 손발은 다 놔둔 채로, 심지어 기소유예를 해서 풀어주고 위의 사람만 기소를 하는 방식이었죠. 나중에 터진 윤석열 검사 사건을 보니 수사팀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잘못된 기소뿐 아니라 이렇듯 초보적인 원칙에서도 어긋나는 수사를 계속한 것은 지적돼야 합니다.

그러면 검찰이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얘기돼야 할 텐데요. 제가 보기에는 검사가 판사보다 더 일찍 승진하고 일찍 물러나야 하는 구조지 않습니까. 어느정도 위치에 올라간 상태에서는 현 정부 5년 안에 더 높은 자리로 가는 게 아주 중요해집니다. 그러지 못하면 몇년 안에 지금 자리에서 옷을 벗고 나와야 하니까요. 검찰 상층부는 인사권을 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결국 자꾸 무리한 기소를 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영전을 하고요. 젊은 검사들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두분이 말씀하신 인사의 중요성이나 정말 검찰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이 내부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백승헌 저는 검찰과 법원 양쪽을 너무 대비시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입장입니다. 일제 때부터 검찰권력이 법원과 쌍둥이 같은 자리에 있었지요. 심지어 건물구조라든지 임용시스템 같은 것까지도요. 그런 사고방식이 지금도 상당부분 이어지는 것 같은데 사실 양쪽의 기능이 다르잖아요. 서로 너무 사이가 좋은 게 문제입니다. 가장 긴밀했을 때가 권위주의 시절이었죠. 법원이 변호사와의 거리 이상으로 검찰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임용시스템이나 조직도 그렇고요. 그렇게 됨으로써 사법부는 사법부대로 독립하고, 검찰은 검찰대로 제 기능을 찾을 것이라는 차원에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제도개혁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민적 소통의 중요성

 

김두식 아까 사법부를 평가하면서 나온 얘기와 같은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입니다만, 옛날에는 사법연수원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법원에 갔잖아요. 요즘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에서는 1등들이 검찰을 지망하고 있습니다. 법원에서 재판연구관을 뽑기는 하지만 이게 정식 판사는 아니라서 우수한 학생들이 검찰을 선택하는 거죠.

 

전수안 빨리 뽑으니까요. 우스갯소리로 입도선매(立稻先賣)라고 하지요.

 

김두식 그런데 신임 검사를 데리고 있는 부장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검사는 원래 들이받을 때 들이받으면서 자기주장도 펼치는 ‘똘끼’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전교 1등’들이 오기 시작하면서 이런 기질이 사라지고 있다는 거예요. 순화되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 부장한테 물어보기만 한답니다. 애초에 자기가 결정하고 부장의 결재를 받는 구조인 건데 마치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찾는 것처럼 계속 부장한테 와서 묻는 검사들이 나오는 거죠.

 

백승헌 로스쿨 제도는 사법시험제도하에서처럼 전일화된 사람들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충원하려는 목적에서 도입된 건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김두식 저는 로스쿨 도입을 통해 앞서 백변호사님이 말씀하신 법원과 검찰의 쌍생아적인 면모를 없애는 문제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지 않나 싶은데요.

 

백승헌 로스쿨제도 도입으로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바람직한 우리식의 전형을 창출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김두식 그럼 이쯤에서 전체적으로 사법개혁의 성과와 한계,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사법개혁으로는 로스쿨 제도나 국민참여재판, 법조일원화(판사·검사·변호사 간 장벽을 허물어 다양한 경험과 경력을 쌓은 법조인을 필요에 맞게 선출하는 제도) 같은 것들이 있죠. 특검에 대한 논의도 그렇고요. 다만 지면의 한계상 제도상의 상세한 논의는 피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본 대화의 주제에 맞춰 종합적으로 평가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백승헌 법조 내부의 개혁에 대해서는 평가할 대목도 많고 앞으로 남은 과제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좀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법조계가 앞서 말한 대로 전문가 고유의 영역인 만큼 로스쿨이든 사법시험이든 양성시스템을 완전히 개방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긴 하지만, 그럴수록 시민과 소통하는 구조,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는 문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두식 국민참여재판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신가요?

 

백승헌 꼭 그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함정에 빠져 국민일반과 괴리되지 않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전수안 얼마 전에 우연히 법학전문대학원, 국민참여재판,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 양형기준 이런 걸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보게 되었는데, 2006년에 발간된 책인 거예요. 지금은 다 시행 중인 제도잖아요. 생각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죠. 저는 개인적으로 그중 상당부분이 긍정적으로 잘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참여재판의 경우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나 우려를 내려놓을 단계에는 와 있다고 보고요. 진행해본 법관들도 가중된 업무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평가가 많았습니다. 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주진우 기자의 무죄판결 선고 시에 재판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되었더군요. ‘검사와 변호인 양측이 모든 역량을 다해 최대·최고의 변론을 한 상황에서 재판부도 배심원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라고요. 법학전문대학원의 역할에 대해서도 찬반 양쪽에서 다 목소리가 높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이것도 우리 법조문화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낙관적으로 보는 편이에요. 늘어난 법조인을 통해 주민센터마다 보건소 수준의 법률지원을 한다면, 다들 우려하시는 것만큼 정말로 그렇게 큰일 나는 걸까요?

 

백승헌 변호사 수가 통계적으로 어느 정도 선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로스쿨 도입 당시만큼이나 진지한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로스쿨 도입 당시에도 진선진미(盡善盡美)한 제도는 없지 않느냐, 즉 어떤 제도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고 어떤 제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게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로스쿨이 미국식 제도를 들여온 건데 문화와 제반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자칫 귤이 회수(淮水)를 넘어오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이식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도 좀 걱정이 됐고요. 사법특권을 해소하는 문제는 사법시험 합격자 수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교육의 정상화에 방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의 로스쿨 모습은 그 당시의 우려가 상당부분 현실화됐다고 보여요. 모든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열려 있는 교육기회가 되는 게 아니라 학교서열화 현상을 그대로 확대재생산하고 있잖아요. 당초 기대했던 다양한 법률교육기회의 보장 같은 면에서 큰 문제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진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김두식 사실 로스쿨을 도입할 때 학교교육의 정상화라는 측면에서 주장한 분도 있겠지만 변호사 정원을 제한하는 장벽이 워낙 굳건하다보니 로스쿨을 통해 그걸 피해 돌아가자는 분들도 없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로스쿨 도입 이후에도 변호사 수 제한은 여전하다보니 그에 따른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어요. 지금 로스쿨은 예전 법대 시절보다 더 심각한 고시학원이 되고 있거든요. 변호사시험이 판례 암기 위주로 가다보니 학생들이 이론을 가르치면 싫어해요. 왜 시험에 도움이 안되는 걸 가르치느냐 하죠. 이런 식으로 가면 과거보다 더 획일적인 법조인이 나올 수도 있어요. 저도 백변호사님 의견처럼 로스쿨 도입을 주장한 쪽과 반대한 쪽이 이제는 서로 좀 터놓고 얘기해보면 좋겠어요. 그래서 문제는 뭐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찾아봤으면 해요. 과거 로스쿨 도입 국면에서 변호사자격증 가진 법대 교수들은 발언권이 절반뿐이라고 자조적인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무슨 얘기만 하면, ‘너 고시 붙었다고 그런 소리 하느냐’는 반응이 나왔으니까요. 이제는 이런저런 것들 다 털어놓고 얘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마무리로 한말씀 드리자면 저를 포함해서 기성 법조인의 경우는 그동안 정말 나쁜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에 지금 이 정도면 좋아진 거다 안이하게 생각하기 쉬워요. 제가 정말 그런 걸 느끼거든요. 옛날 쌍팔년도에는 어땠는지 아니, 뭐 이런 얘기 하면서 정작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나아갈 미래를 보지 못하는 문제가 기성 법조인에게 있지 않나 돌아보게 됩니다.

 

백승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이상적인 관계는 아마도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토대를 만들고, 법치주의는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것이겠죠.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대의제를 통한 민주주의가 온전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특히 법치주의가 민주주의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민주주의의 역진방지 혹은 안전판 기능을 잘하기 위한 좋은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법률가들의 책무가 더 무거워지기도 했고요.

 

전수안 오늘 이 대화도 그런 우려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민주화시대가 어느날 도래하자 앞으로는 단절 없이 역사의 진보만 있을 것처럼 안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반성해봅니다. 역사는 어느 한쪽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어서 급진적으로 앞으로 가기도 하고 잠시 머뭇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되돌아가기도 하는 듯이 보이네요. 시민사회가 침잠하고 시민이 가라앉아 있는 지금 우리가 서로 끌어주고 목소리를 내서 민주주의가 좌초하지 않게 큰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법치주의라는 뗏목을 놓치지 말아야겠고요. 법치주의의 가치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더 빛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김두식 그럼 이것으로 오늘 대화를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2014.4.10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