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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외국어로 말 걸기
조해진과 백수린의 소설을 중심으로
이경진 李京眞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속물들의 윤리학」 「앨리스씨를 위한 동정론」 등이 있음. snowbonbon@hanmail.net
최근의 한국소설은 근대문학이 표상하던 국가적·문화적·언어적 지도의 경계를 지우는 데 열중해 있는 듯하다. 예컨대 조해진(趙海珍)의 소설집 『목요일에 만나요』(문학동네 2014)의 「북쪽 도시에 갔었어」를 보자. 이 소설의 공간은 지도상으로는 서울이지만, 그곳은 이방인의 서울, 한국사회에서 성적 소수자로서 ‘추방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서울이며, 토론토에서 만난 교포 칼 박을 잊지 못해 머무는 캐나다인 어쳐의 서울이다. 여기에서 이 소설의 지도를 서울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확정짓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백수린(白秀麟)의 소설집 『폴링 인 폴』(문학동네 2014)의 「까마귀들이 있는 나무」는 또 어떤가. 이 소설은 아프리카에서 사귄 연상의 프랑스(‘프랑스’라고 명시되지는 않지만) 여인에 대한 한국(이 또한 명시되지는 않는다) 남자 ‘리’의 애증을 이야기한다. 이야기 속에서 ‘리’가 있는 곳은 한국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곳일 고궁이지만, 이곳은 서구와 한국, 또 한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식민지적 욕망이 교차하는 더없이 다국적인 공간으로 나타난다. 명백히 ‘Lee’의 번역인 남자의 이름조차 타자화의 산물이다. ‘리’는 아마도 그의 전 프랑스 애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한국어 이름 대신 불렀을 호칭일 것이다.
이천년대 초반 소설에서만 해도 이국의 장소는 한국인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낯선’ 시적 분위기나 ‘이방성’을 불어넣기 위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는 ‘저기’를 보여주면서 ‘여기’를 말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인물들이 낯선 풍광 속으로 떠나지만 그들은 ‘여기’의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국’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장식적인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작품의 주제가 되는 소설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다. 즉 ‘저기’를 보여주면서 ‘저기’와 ‘여기’를 동시에 말하는 문학, 또는 ‘여기’가 더이상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케 하는 문학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레띠(F. Moretti) 식으로 소설의 공간을 지도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아니, 그런 그릴 수 없는 지도가 최근 소설의 초국적이며 혼종적이고 간(間)문화적이며 탈경계적인 공간성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줄지도 모르겠다.
또 한가지 최근 소설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이천년대 초반 소설에서만 해도 뚜렷하던 ‘한국인’과 ‘세계’ 사이의 긴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2004년에 발표된 전성태(全成太)의 「국경을 넘는 일」을 보자. 거기에는 한국인, 특히 한국남성이 ‘국경’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경직성과 긴장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소설이 포착한 한국남성은 홀로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배낭여행족임에도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어딘가 뻣뻣하고 강박적인 데가 있다. “국경의 다리 앞에서 섰을 때 박에게 특별한 감회 같은 것은 없었다”라고 하지만 막상 박은 캄보디아와 태국 사이의 국경을 넘어가는 순간 탄흔(彈痕)이 보이고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자 자신도 모르게 질주하기 시작한다.1) 또한 그는 여행에서 만난 일본여성 나오꼬를 성적으로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빠지고 그녀가 호텔방을 나가버리자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래? 나도 네가 무서워’”2)라는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실수를 범한다. 그는 세계 속에서 여전히 한국인(한국남성)의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여행 중의 그의 행보는 한국과 외국과의 해묵은 감정적 관계를 반복·재생산한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소설을 보면 이런 ‘한국’과 ‘세계’ 사이의 대결구도는 새로운 세대에게서 사라진 듯 보인다. 예컨대 손보미(孫寶渼)의 「달콤한 잠—팽 이야기」를 보자. 손보미의 소설은 세계 어디를 가도 동일한 분위기와 동일한 맛을 내는 아메리칸 커피체인점 같은 친근하면서도 낯선 인상을 자아내지만, 「달콤한 잠—팽 이야기」의 서두는 머릿속에 소설의 지도를 분명하게 그리면서 읽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할 만하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마자 팽은 정호가 있는 방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문을 열게!’ (…) 윌리엄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팽은 십대 중반 때 부모님이 사는 보스턴을 떠나 할머니가 있는 런던으로 갔고, 할머니는 그를 윔블던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바로 그 학교에서 팽은 윌리엄을 처음 만났다. (…) 팽이 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 이정호를 만났고 그와 무척 친해지면서 윌리엄, 팽, 정호는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려다니는 사이가 되었다.”3) 작품 속의 서울이란 공간은 글로벌 메트로폴리스로서 뉴욕이나 토오꾜오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대학 친구들이 만난 레스토랑 “더 브라세리”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빠리의 유명한 관광명소들이 일본어 자막을 달고 등장한다. 주인공 ‘팽’의 본명은 “스티븐 길치 킴”이고 그는 한국인 할아버지와 영국인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미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팽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모든 곳에 속할 수 있는 세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조해진과 백수린은 손보미처럼 ‘한국식 단편소설’의 색채를 빼고 영미 번역문학의 색을 입히지는 않지만, 그들 소설은 대체적으로 외국을 대단한 동경이나 두려움 또는 생소함의 대상이 아니라, 한국의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형상화한다. 그렇다고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배수아(裵琇亞) 소설에서처럼 국가정체성과 성정체성을 의도적으로 소거한 무국적적인 인물들로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선택은 한국인, 한국어라는 정체성에 대한 당위적 요청이 있을 때 도발성과 실험성을 얻는다. 자신을 굳이 한국인이라 의식하지 않고, 한국어에 대한 소속감도 소명의식도 별로 없는 세대,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거나 낯설지 않은 세대, 민족의식에 별다른 관심과 열망을 보이지 않는 세대라면 그런 배수아식의 “이방인 놀이”4)는 딱히 신날 것도 스릴있을 것도 없다. 이방인 되기는 이미 일상이 된 것이다. 크게 보면 조해진 소설집 『목요일에 만나요』와 백수린 소설집 『폴링 인 폴』에 실린 몇몇 작품들은 이러한 경향을 같이한다. 그런데 두 작가가 배수아처럼 민족·국가·언어적 정체성에 급진적인 파괴성을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종래의 한국적·민족국가적 프레임에 갇혀 있지도 않으면서 이방인이 된다는 것의 문제, 특히 외국어의 문제에 관심을 보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름의 상실과 획득—이보나와 폴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이름의 변화에서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다. 낯선 환경과 언어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고유한 이름조차 번역과정을 겪는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경험은 이런 이름의 굴절과 변형, 상실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이네는 빠리에 도착한 첫날부터 자기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몸소 체험한다. ‘하인리히’라는 독일 이름은 어느새 프랑스식 ‘앙리’(Henri)로 바뀌어 있었고 그 스스로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랑스인들은 ‘하이네’라는 성도 제대로 불러주지 않아서 그는 결국 ‘Mr. Enri Enn’이라 불렸고 이조차도 나중에는 합쳐져 ‘Enrienne’이 되었다. 그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그는 ‘Mr. Un rien’이라 불리고 있었다.5) 죽을 때까지 고국 독일로 돌아가지 못했던 망명작가 하이네의 경험은 모어에서 뿌리뽑히고 낯선 언어에 자신을 이식해야 하는 이들이 공통으로 겪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낯선 언어와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그들의 이름은 굴절되고 절단되고 수난당한다. 그들은 하이네가 망명지에서 새로 얻은 이름이 말해주듯 ‘아무도 아닌 자’(Un rien)가 된다.
조해진은 이런 이름의 변형과 상실을 예민하게 관찰하는 희귀한 작가다.
요안나의 친구는 클럽에서 ‘파니(Pani)’로 통했다. 6개월마다 이름을 바꾸는 친구를 위해 요안나가 지어준 파니는, ‘들판의 나라’에서는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존칭일 뿐, 하나의 온전한 이름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를 파니라고 부르며 소우 큐트(so cute)라고 외쳐. 파니가 아닌 파니는 피곤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거친 영어 발음으로 내게 얘기하곤 했다.(「이보나와 춤을 추었다」, 『목요일에 만나요』 93면)
「이보나와 춤을 추었다」(이하 「이보나」)에서 폴란드 출신 교환학생이지만 홍대 앞 재즈바에서의 공연이 주업인 미하우와 요안나는 한국에서 마이클과 조안나라 불린다. 러시아에서 온 나이트클럽 웨이트리스 ‘파니’의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 한국인들 아무도 그 본명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가 불법체류자로서 진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의 불안정한 법적 지위는 그의 이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름에 대한 윤리의식은 작가의 전작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를 구성하는 원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서술자 ‘나’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던” 탈북인 로기완의 온전한 이름을 퍼즐처럼 완성하는 이야기이다. 로기완의 고달픈 행적을 쫓아, 그의 시간을 모방하고 그의 삶과 아픔에 공감함으로써 말이다. 그것이 비록 하루 동안의 기아체험처럼 부질없는 몸부림일지라도 ‘나’는 로기완의 삶에서 자신과 연대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죄의식을 발견하고 그 하나의 희망으로 그를 쫓아 브뤼쎌,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향한다. 그러면서 L이라는 고독한 낱글자를 ‘로’로, ‘로’를 다시 ‘로기완’으로 채워 부르며 “살아 있고, 살아야 하며, 결국엔 살아남게 될 하나의 고유한 인생, 절대적인 존재, 숨쉬는 사람”(194면)을 만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제 로기완의 차례임을 말하며 끝난다. “오늘 나는 그에게, 이니셜 K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다.”(같은 면) 이제 로기완이,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와 같은 고통과 속죄의 나날을 보냈던 화자 ‘나’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의 이름을 온전히 불러줄 차례인 것이다. 『로기완을 만났다』에서는 이런 이름 찾기가 희망적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천사들의 도시」(『천사들의 도시』, 민음사 2008)에서는 좌절된다. 이 소설에서 해외 입양의 상처를 안고 사는 ‘너’를 사랑하는 화자 ‘나’는 ‘너’의 본명, 한국 이름을 알고자 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하지만 ‘너’는 삼년 뒤 ‘천사들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엽서를 보내 그사이 낳은 딸의 이름을 ‘나’의 이름 ‘정’을 빌려와 ‘정아’라고 지었음을 알리면서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사랑과 고마움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렇게 낯선 언어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무(無)로 돌아가는 단절의 경험이 꼭 그렇게 폭력적이고 고통스런 것이기만 할까. 한 존재의 정체성이 경계를 넘을 때마다 해체와 구성을 반복한다면 그 존재의 이름이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진짜 이름들로부터 소외되는 경험이 아닐까. 이름의 백지화(白紙化)는 존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이름의 무화는 모국어의 감옥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다. 이런 단절을 적극적으로 전유한 작가가 바로 배수아다. 배수아는 소외, 고립, 고독, 오해를 동반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주창한 바 있다. 그와 같은 급진적인 예찬까지는 아니지만 조해진의 「이보나」와 백수린의 「폴링 인 폴」은 외국어의 생경한 감각을 소외가 아니라 소통의 매체로 사유하려는 색다른 관점을 보인다. 「이보나」에서 ‘낯선 언어’는 구질구질한 생을 버틸 수 있는 환상의 원천이 된다.
오래전, 이보나로 불린 적이 있다. 요트(J), 이(I), 브(W), 오(O), 엔(N), 아(A), 이보나(Jiwona). ‘지원’이 ‘이보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어느 나라에서는 ‘J’가 ‘Y’ 음으로, ‘W’가 ‘V’ 음으로 발음되기에 가능했다. 끝에 ‘A’음을 넣어 이보나를 완성해준 이들은 미하우(Michał)와 요안나(Joanna)였다. (…) 그들에게서 이보나로 불린 순간, 나는 오랫동안 나만이 볼 수 있었던 그녀에게 그 이름을 선물해주기로 결심했었다.(「이보나」 85면)
머나먼 “들판의 나라”로부터 “걸어서 이동한다면 한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87면) 낯선 땅 한국에서 마이클과 조안나로 불리는 미하우와 요안나는 ‘제니’라 불리며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는 ‘나’의 스물한살 시절 유일한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과 언어 교환을 위해 처음 만났다. ‘나’는 그들과 어울리면서 “‘지원’이라는 흔하고 중성적이며 따분한 느낌의 이름”(93면) 대신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독특한 이름 ‘이보나’라 불린다. 이러한 명명을 통해 ‘나’는 고독한 자취방 한켠 느릅나무 책상에서 자란 나 자신의 가련하고 쓰디쓴 상상의 시에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의 주인공이 바로 ‘이보나’다. ‘이보나’는 ‘나’의 비루한 현실, “언어의 테두리 안으로는 안전하게 안착할 수 없는, 내 삶의 궤도를 떠도는 조각난 파편들”에 찔리지 않게 가만히 ‘나’를 보듬어주는, 또다른 ‘나’다. ‘나’의 ‘이보나’는, 당신의 갑갑한 인생을 탓할 길이 없어 ‘그놈들’을 만들어낸 아버지로부터의 내력에, 북유럽 신화의 거인들 그리고 저 낯선 폴란드어가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아무도 들어줄 수 없는 구차한 혼잣말”(99면)에 풍부하고 허황된 어휘를 보태주는 친구들이 바로 미하우와 요안나이다. 그렇다고 ‘나’와 그들 사이에 고독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서울에서의 일시적 체류만큼이나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와 미하우, 요안나는 어디에서도 제자리에 있지 않은(out of place)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점이 미약하게나마 이들 셋의 공동체를 만들어준다. “그들과 나 사이에 완벽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는 없었다. 그 대신 우리는 조금은 어색한 침묵과 불안한 유대감, 마주보는 실재의 시간조차 진짜인지 의심하게 되는 연약한 마음으로 언어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이야기했다.”(88면) 어디에서도 소통되지 못하는 ‘나’의 이야기는 미하우를 만나면서 조금씩 생명을 얻고 자라난다. ‘나’가 그들과 함께 체험하는 서울은 “바다가 없는 이상한 섬”이 되고, 그 안에는 “온몸이 에메랄드 빛으로 물들 것 같은 바닷물”이 넘실대며 그 섬에서 ‘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뚱뚱하고 못난 아이가 아니라 “노란색 샌들을 손에 쥐고 맨발로 유유히 해변을 걷는 나의 이보나”(91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조해진의 소설은 우리의 언어가 감정의 결, 폭, 깊이 이 모든 것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슬픔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다. 「천사들의 도시」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서른두살의 강사 ‘나’와 어릴 적 동양인이라곤 하나도 없는 미네소타의 시골에서 지독히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낸 열아홉의 ‘너’ 사이에 심연처럼 놓여 있는 간극은 단지 한국말이 통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미 언어란 것은 서로의 고독과 상처를 이해하기에 너무 빈약하고 얄팍하다. “하여, 우리 사이의 언어는 인색했을 뿐 아니라 매번 연약했고 무력했다. 아니, 언어란 애초부터 내 의도를 비껴가고 있었다는 걸 나는 너를 만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감정을 꿰뚫는 언어는 없었고 그래서 한순간에만 존재하는 무한대의 감정은 정제되어 다만 몇마디로만 남아 불투명하게, 불완전하게 발화되는 것이리라.”(17면) 따라서 비록 환상일지라도 메마르고 황폐한 현실에서 ‘이보나’ 같은 반짝이는 이름을 얻는다면, 그것을 잊지 않는 편이 좋다. 「이보나」에서 ‘나’는 비록 이보나를 떠나보냈지만, ‘나’가 아버지처럼 시를 끼적였던 것은 오직 이보나로서였으니 말이다. “세상의 지붕 같은 그 손바닥을 나는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천공도 없고 광활한 우주로도 이어지지 않는 그 손바닥에, 마치 하늘에 별들을 새겨넣는 무료한 신처럼, 그리고 나는 천천히 쓰기 시작했다. 느릅나무, 책상, 태초의 여자, 엠블라, 거인들”(「이보나」 103면)
조해진의 소설에서 외국어는 ‘여기’와 ‘저기’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이방인들 간의 중요한 소통의 언어이지만 그것은 모국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고독과 우울을 어루만져주기에는 너무 무력하다. 이에 비해 백수린의 소설은 외국어의 낯섦을 카프카(F. Kafka)의 ‘끝내 열리지 않는 문’ 같은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표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국어가 전달하지 못하는 개인의 유일무이한 감정과 감각을 표현해줄 수 있는 매체로서 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표제작 「폴링 인 폴」을 보자. 서술자 ‘나’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30대 초중반의 여성으로 여섯살이나 어린 재미교포 폴을 사랑하고 있다. 폴은 ‘나’에게 어쩌면 처음부터 ‘먼 그대’일지도 모른다. 폴의 한국 이름 ‘Junchan’이 그의 태생적 혀로는 온전히 발음될 수 없는 것처럼.
준찬. 폴의 부모가 그에게 준 이름에는 외국인이 구분해 발음하기 힘든 음운인 ‘ㅈ’와 ‘ㅊ’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ㅈ’과 ‘ㅊ’ 대신 원순성을 동반한 유성 파찰음 j와 무성 파찰음 ch 그리고 ‘ㅏ’와 ‘ㅐ’의 중간 발음인 ‘a’로 이루어진 폴의 이름을 입속으로 가만히 불러보았다. 내가 온전히 발음할 수 없고, 폴의 부모도 온전히 발음할 수 없을 그 이름, Junchan.(「폴링 인 폴」 87면)
이러한 한국어와 영어의 간극에는 나와 폴의 거리뿐 아니라 폴이 미국에서 부모와 겪었을 소통의 문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간극은 오히려 ‘나’에게 지금까지 결코 알지 못했던 ‘사랑’의 경험을 선사해준다. ‘나’는 서른이 넘도록 “주변의 바닷물이 들고 나듯 연애와 실연을 반복하는 그 오랜 시간 동안”(66면) 누군가에게 사랑다운 사랑의 감정 한번 느껴보지 못하고 남들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폴을 만나고, ‘폴링 인 러브’의 말뜻을 체감하게 된다. ‘fall’,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풍덩 빠지는 경험,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 꼿꼿이 서 있는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경험 말이다. “비가 옵니다. 그래서 우산을 씁니다”(69면)같이 “단정한 문장들의 세계” 속에서 안정되지만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는 “비가 와요. 할 얘기 있고 만나고 싶어요”(70면)라고 연락하는 폴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나’는 비록 이 사랑이 한심한 짝사랑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자기 생에 처음 찾아온 감정을 당당히 긍정하고자 한다. 나는 “한번도 그럴듯하게 명명된 적이 없는 초라한 내 사랑”(86면)에 이름을 붙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이름이 아마도 ‘폴링 인 폴’일 것이다. ‘폴링 인 폴’은 폴의 언어 속에서는 시적 표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F와 P를 모두 ‘피읖’으로 발음할 수밖에 없는 한국어에선 두운이 맞는 시적 표현으로 거듭난다. ‘폴’의 평범한 이름이, 그의 ‘평범한’ 이야기가 낯선 한국어 속에서 고유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언어적 회의(懷疑)와 말 건넴의 윤리
조해진 소설에서 언어는 타인에게 말을 걸고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데 너무도 미약하고 무력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비교하면 백수린의 소설은 상투적이고 진부하게 쓰이는 언어를 문제삼고 있다. 작가는 각 개인의 사적이고 내밀한 경험과 감정, 감각을 전달하는 데 너무나 닳고 닳은 현재의 언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진득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우리는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인 경험의 절박한 진실을 전달/공유할 수 있을까. 「폴링 인 폴」에서 폴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영화감독을 꿈꾸었으나 그걸 발화되는 순간 여느 재미교포 2세의 전형적인 끌리셰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영화감독의 꿈을 포기한다. “교포들의 역사는 narrative적으로 진부하죠.”(81면) 또다른 작품 「거짓말 연습」에서도 서술자 ‘나’는 남편의 외도보다도, 그 상황이 지극히 상투적인 “남편이 바람을 피웠대”라는 세마디로 정리되었을 때 더 깊은 상처를 입는 듯 보인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되었다. 나는 소음 속에서 입을 굳게 닫았다.”(190면)
나의 ‘말’이 ‘말해진 것’ 속에서 폭력적으로 배반당하는 현상은 「감자의 실종」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감자의 실종」은 ‘감자’라는 기표의 실체를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다. ‘나’는 어느날 자신이 ‘감자’라 알고 있던 것을 사람들이 ‘개’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의 언어체계 속에서 ‘감자’와 ‘개’가 강제로 동일한 수직축(paradigma)에 놓이면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혐오와 공포에 시달린다. ‘인간의 가장 충실한 친구’인 ‘감자’를 사람들이 볶아 먹고 삶아 먹다 못해, 피부미용을 위해 으깨서 팩으로 만들고 있었다니! ‘나’는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문제는 타인들의 잔인한 미식 취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감자의 실종」은 늘 똑같고 단조로운 일상에 불만을 가진 한 늙은 남자가 사물들의 이름을 다르게 불러보는 페터 빅셀(Peter Bichsel)의 우화를 연상시킨다. 남자는 침대를 ‘사진’이라 부르고 “나는 피곤해. 사진 속으로 들어갈 테야”6)라고 말해본다. 그러자 지루하기만 했던 일상이 별안간 즐겁고 분주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결국 모든 사물에 자신만의 이름을 지어준 그 남자는 사물의 ‘사회적인’ 이름을 잊어버려 다른 사람과 말을 할 수도 없게 되었고 마침내 말이 필요 없으므로 침묵하게 되었다.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어들 중 내가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단어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감자의 실종」 16면) 빅셀의 우화가 사회적 언어의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어리석은 환상을 풍자한 것이라면, 백수린의 우화는 언어회의에 대한 우의, 또는 영도(零度, le degré zéro)의 글쓰기에 대한 욕망의 우의로 보인다.
왜 하필 ‘감자’라는 단어인가. “그렇게 내가 감자인지 감자가 나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 감자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눈 속으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수없이 많은 노을이 졌다. 배꽃 향기. 마당의 흙냄새. 내 코를 핥는 감자 혀의 축축함. 하루는 너무 길고, 시간은 너무 더디구나.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젠가 어른이 되긴 될까, 의심스러웠다.”(19면) ‘나’는 어릴 적부터 “지극히 평범한 아이”로 “주변에 따라 피부색을 바꾸는 도마뱀처럼 (…)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노력”(20면)함으로써 평범한 생이 주는 안정감을 의식적으로 추구해왔다. 하지만 그 평범하고 안정된 언어는 ‘나’의 사적인 추억과 전혀 조응하지 못하면서 삐거덕댄다. ‘나’는 이런 사적인 추억을 ‘개’란 명칭이 전달해주지 못한다는 불만감에서 무심코 ‘개’를 ‘감자’라 부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의 실어증상은 사회로부터의 소외와 배제를 드러낸다기보다는 ‘나’만의 영도의 말하기를 위한 어떤 단절점으로 보인다. ““아-” 간만에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가 낯설고 기이했다.”(26면) 이런 증상은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성우의 말을 벗어던지고 ‘나’의 말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그리고 그렇게 불완전한 ‘말’로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작가의 욕망을 나타낸다. “나뭇잎이 우수수, 바람에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에게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26면) 시는 언어를 단단하고 고루하게 결박하고 있던 사슬에서 언어를 해방시켜 새로운 감각을 부여한다. 이런 점에서 ‘감자의 실종’은 실종이 아니라 ‘감자’라는 새로운 시어의 획득일 수 있다.
백수린은 작가로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의심해보는 데까르뜨적 방법을 따르는 듯 보인다. 아래의 대목은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며, 그 단어의 뜻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 단어의 이면에 사실 아무것도 없음을 보고 만 작가의 자전적 공포처럼 들린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잠깐 두 손을 움켜쥐어본다. 손끝의 차가움이 느껴지고 나는 내가 손을 마는 만큼, 딱 그만한 크기로 생긴 어둠을 느낀다.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얹는다. (…) 글을 다 마치고 나자 나는 이 글이 나 아닌 누군가에게 완전히 오독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에 다시 한번 휩싸인다. 이 글을 왜 쓰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자꾸만 불쑥불쑥 의식 위로 떠오른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을 생각한다.(「감자의 실종」 29면)
그렇지만 이러한 방법이 소통의 불가능이라는 결론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급진적인 회의라기보다는 조심스럽게 또 주저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언어로 소통을 타진해보고자 하는 작가의식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나의 언어는 당신들에게 온전히 그 뜻을 전달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순간에 나의 말들이 빛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당신들에게 날아갔다. 아니 날아가고 있다.”(30면)
백수린의 독특한 점은 이런 언어적 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통은 소외와 배제의 기제로 작용하는 외국어에서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눈여겨볼 작품이 「거짓말 연습」이다. 이 소설은 외국어로 더듬거리며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편과 이혼할 결심을 하고 프랑스로 유학 온 ‘나’는 리옹으로 짐작되는 소도시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어학원을 다니고 있다. 이곳에서 ‘나’의 시간은 고여 있는 시간이다. 여름이 지나면 이 도시를 떠나게 되어 있다. 자신이 지망한 미술대학에 합격하여 그 도시로 가기를 바라지만, 그 역시 확실하지 않다. 파업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합격통지서는 오지 않는다. “나는 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남아돌았다.”(179면) ‘나’가 머무는 기숙사는 냉장고도 없고 바퀴벌레가 들끓지만 ‘나’는 이곳에서의 고요하고 단조로운 삶이 그런대로 마음에 든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나’가 이곳에서 거짓말을 연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잠시만 머물다 떠날 ‘나’에게 사람들은 “어디서 왔습니까?” “무엇을 공부합니까?” 이상의 사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질문에 교과서에 씌어져 있지 않은 나 자신의 진실을 말해줄 언어능력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무엇과도 깊은 관계를 맺을 생각이”(179면) 없다보니 외국어를 배우다보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거짓말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새로 배운 단어를 활용해”보기 위해서 거짓 대답을 한다. 좋아하는 색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빨강이라고 말해보았다가, 파랑이라고 답하는 식이다.
물론 외국어로 소통하는 일이 고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가 언어 교환을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노령의 르블랑 부인은 귀가 어두운데다가 ‘나’의 서툰 프랑스어 탓에 그들은 “뭐라고? 뭐라고요?”만 공허하게 주고받다가 헤어지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이 언제나 내 안을 둥둥, 떠다녔다.”(188면) 이 소설은 거짓과 진실의 이분법적 구분이 삶 속에서 무의미해지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서술자 ‘나’는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어렵사리 꺼내보지만, 그날이 만우절임을 깨닫는다. 자신이 남편에게 참말을 한 것일까 거짓말을 한 것일까, 자기 자신도 분간할 수 없는 헝클어진 감정의 소요 속에서 ‘나’의 진심이 얼마든지 자신의 말에 의해 공소(空疏)해질 수 있다는 것, 배반당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나’는 외국어공부를 통해 거짓말을 연습하면서 “이 세계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서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것”(196면)을 깨닫는다. 그것은 “거짓말을 내게 처음 가르쳐준”(195면) 엄마의 ‘조기교육’ 덕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생동감 넘치는 거짓말을 하며 매번 삶을 새롭게 긍정하는 엄마의 가르침보다도 외국어로 말하기가 거짓말과 진실의 구분 너머에 있는 말함의 진리를 더욱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여름이 찾아오고 기숙사의 계약기간이 끝날 무렵 유학생들은 방을 빼기 전 남은 음식 재료를 처리하기 위해서 공동의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여기에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만찬이 열린다. 냉장고가 없는 가난한 유학생들의 일용할 양식이 담긴 색색의 비닐봉지를 창마다 하나씩 매달고 서 있는 허름한 외국인 기숙사동은 “초라한 크리스마스트리”(192면)로 바뀐다. 그동안 서로를 본체만체 지나쳤던 낯선 타인들은 공동부엌의 식탁에 둘러앉아 수줍음과 서먹함을 뒤로하고 음식을 나눠먹는다. 서로 다른 색의 장바구니처럼 “가지각색의 피부톤과 머리색을 가진”(194면) 이방인들은 서툰 외국어로 서로의 이름과 출신을 묻고, 서로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다.
우리는 형용사나 부사, 은유나 상징이 제거된 가장 단순한 구조의 문장으로만 의사소통을 했다. 때로 우리는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들을 만들었고 아주 자주, 정반대 의미의 어휘를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대체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상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백 퍼센트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의 말이 온전히 전달된다고 착각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의 대화는 이어졌다. 최소한의 단어들의 나열과 어조의 높낮이, 그리고 손짓과 눈짓만으로도 충분한 말들이 여기, 이 식사 자리에 있었다.(194면)
외국어로 대화한다는 것은 모국어로 대화할 때보다 몇배의 긴장과 집중력을 요한다. 그럼에도 외국어는 자명하게 내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말의 내용보다는 여러 몸짓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눈빛이나 표정, 눈썹의 미묘한 떨림, 제스처, 어조 등이 말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니 그런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싶다는, 상대방과 소통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전달된다면 소통은 가능하다. 그 앞에서 언설의 참과 거짓은 부차적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행위, 그것뿐이었을 것”(195면)이다. 여기에서 레비나스(E. Lévinas)가 말하는 윤리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타자성을 전유하는 언어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말해진 것(dit)’이 아니라 그와는 구분되는 ‘말함 그 자체(dire)’에서 언어의 고유한 의미를 찾는다. ‘말함’은 ‘말해진 것’, 즉 언어의 내용을 하나의 기호체계 내에서 단순히 전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본래적 의미에서 말함은 오히려 ‘~에게 말함(dire à)’, 즉 누군가에게 말 건넴이다. 그러므로 말함은 주체가 처음부터 말이 향하는 타자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다는 극도의 수동성으로 도입된 것이다.7) 레비나스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사소통이란 오해의 위험을, 빗나감의 위험을, 소통 거부의 위험성을 무릅쓰면서 그 말함의 수동성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백수린의 작품에서 이런 말함이 외국어와의 만남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작품에서 ‘말함’은 어떤 작은 기적을 일으킨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이들 간의 순수한 ‘말함’의 소리들은 ‘나’가 그 도시를 떠나기 직전 방문했던 푸르비에르 성당에서 들었던 “성가곡의 가락”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식당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높낮이가 각기 다른 억양과 발음으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한발, 대화 밖으로 떨어져나와 그것을 듣다보니 그들의 대화는 성가곡의 가락처럼 들렸다. 창밖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곡조의 결을 가만가만 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곡조가 익숙해졌을 때, 고요하게 울리는 그 합창곡에 끼어들기 위해서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떼었다.(195면)
이 장면은 근래 읽은 젊은 작가들의 소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뛰어난 미문으로 씌어졌다거나 작가의 개성이 도드라진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마음을 울리는 전환이 있다. 한여름의 기숙사 식당이 마치 ‘완연한 겨울’ 세밑 성탄절의 촛불을 밝힌 듯 온기가 감도는 이 전환, 허름한 기숙사 식당이 스테인드글라스의 영롱한 오색 빛과 은촛대의 은은한 빛이 어른거리는 성당으로 서서히 바뀌는 이 전환, 또 낯선 이방인들이 서툰 외국어로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웅성거림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물줄기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화음”(193면)으로 바뀌는 이 전환, 그 “합창곡에 끼어들기 위해” 입술을 가만히 떼는 그 작은 움직임은 아름답고 성스럽기까지 하다. 현실에 없을 것같이 아름다운 그 순수한 소통의 에너지로 인해 우리의 혀와 입술을 낯설게 움직여보고 싶은 유혹이 든다. “나는 말을 마쳤다. 오랜만에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나는 천천히 관찰했다. 내 말이 가닿았는지 부인은 다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아들었을 리가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웠다.”(191면)
조해진과 백수린의 소설에는 근래 한국소설의 주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소통의 윤리를 종래의 민족적·언어적·영토적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적용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그렇게 적용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발견된다. 그들이 꿈꾸는 소통의 양상은 더 이상 ‘국제적’(internationa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네이션’ 간의 소통이 아니라 그 ‘네이션’의 희미해진 경계 속에 살고 있는 고독한 개인들 간의 소통이다. 그런 소통 속에서 그들은 ‘여기’와 ‘저기’, ‘내국인’과 ‘외국인’,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 존재하던 심적 거리를 새롭게 측정한다. ‘여기’의 내밀한 고독감을 전달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저기’의 ‘낯선 언어’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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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성태 「국경을 넘는 일」, 『국경을 넘는 일』, 창비 2005, 134면.
2) 같은 책 165면.
3) 손보미 「달콤한 잠—팽 이야기」, 『그들에게 린디합을』, 문학동네 2013, 208~9면.
4) 배수아 「동물원에 간다」, 『동물원 킨트』, 이가서 2002.
5) Heinrich Heine, Schriften über Deutschland, Werke, Bd. 4, hg. v. Helmut Schanze, Frankfurt a. M.: Insel Verlag 1968, 558면 참조.
6)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책상은 책상이다』 김광규 옮김, 문장 1996, 40면.
7) Lévinas, Jenseits des Seins oder anders als Sein geschieht, aus dem Französischen übersetzt von Thomas Wiemer, Freiburg/München: Karl Alber 1992, 1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