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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인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나

 

 

백낙청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영문학.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최근 저서로 『2013년체제 만들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회화록』(전5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인문학의 새로움 찾기

 

근년 우리나라에는 ‘인문학의 위기’ 담론과 더불어 ‘새로운 인문학’ 또는 ‘인문학의 창신(創新)’을 추구하는 논의가 빈번하다.1) 그런데 인문학의 새로움은 과연 어디서 올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근대 이전의 전통적 인문학이라는 ‘오래된 미래’에서, 다른 한편으로 ‘날로 새로운 현실’에서 온다. 아니, 그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둘의 ‘만남’이 중요한 것은 ‘오래된 미래’가 곧 지속가능한 현재는 아니며,2) 새로운 현실 그 자체가 일정한 지적 기율을 갖춘 ‘학()’을 형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학적 성취는 지적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개인의 마음작용과 인류의 문명 차원에서 일대 전환을 수반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인문학 위기설이 전국적 쟁점이 된 계기는 아마도 2006년 전국 80여개 대학교 인문대학장들에 의한 선언이었을 것이다. 이후 연구비의 증액을 포함하여 정부지원 확대 등의 가시적인 효과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 내 인문학과들의 곤경이 기본적으로 개선되었다고 보는 이는 드물다. 사회 전반에 걸친 취업경쟁 중시 풍토에서인문학이 벤처 기업가에게도 소중하다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발언이 거듭 인용되는 중에도인문학과 졸업생들의 입지는 좁아져왔고, 대학당국의 신자유주의적 경영논리 강화 추세는 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인문학과 교수들 대다수가 현존 인문학이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이나 인식론적 전제를 성찰하기보다 여전히 기존 학문의 분업체제 속에서 자신들의 몫을 늘리거나 지켜내는 일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면에 대학 바깥에서는 ‘인문학 붐’이 거론될 정도로 이런저런 활동이 번성하다. 물론 이들 중에는 기존 인문학의 단순한 대중화, 심지어 속류화상품화의 사례도 흔하다. 더구나 “무엇을 하든 인문학적 바탕이 없으면 괴물이 된다”3)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정부기관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들이 ‘인문’이라는 간판 달기에 뛰어들어 ‘붐’을 가속화하는 상황은 독립성과 비판의식을 생명으로 하는 인문정신에 역행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행태와 별도로 대안인문학, 실천인문학, 현장인문학 등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여러 진지한 활동들은 인문학의 새로움을 찾아가는 작업의 일환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4)

다만 이들의 작업이 새로운 인문학을 정립하는 데에는 아직 못 미치는 것 같다. 예컨대 이수영(李洙榮)의 「연민의 복지를 넘어 인간 존엄의 복지로: 인문학이 바라본 하나의 현장」은 생생한 현장사례일 뿐 아니라 스피노자(B. Spinoza), 니체(F. Nietzsche), 베르그송(H. Bergson), 들뢰즈(G. Deleuze) 같은 ‘전통적인’ 철학 텍스트를 “단순히 교양주의적 인문학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지점”5)에서 새로 읽을 길을 열어준다. 나아가 ‘복지’에 대한 통념이나 기존 정책들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데 이 또한 인문학의 실천성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면모이다. 그러나 인문학의 새로움을 성취하는 문제 자체는 글의 범위 안에 들어 있지 않아 독자들의 숙제로 남은 셈이다.

이 숙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역시 대학이라는 현장과의 소통과 연대를 무시할 수 없다.6) 그 점에서 대학 내부의 움직임으로 ‘21세기 실학으로서의 사회인문학’을 주제로 10개년 연구계획을 수행 중인 연세대 국학연구원의 노력이 돋보인다. 그 일환인 사회인문학총서의 발간사는 “사회인문학(Social Humanities)은 단순히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사회성 회복을 통해 ‘하나의 인문학’, 곧 통합학문으로서의 인문학 본래의 성격을 오늘에 맞게 창의적으로 되살리려는” 노력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고 나는 간행된 성과물조차 일부밖에 접하지 못했지만,7) 공감되는 취지일뿐더러 대학이 지닌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이 부분적으로나마 그런 취지로 동원된다는 점을 높이 사주고 싶다. 그런데 백영서(白永瑞) 사업단장의 거듭된 강조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이 사회과학뿐 아니라 근대학문의 주축에 해당하는 자연과학과도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과제는 천착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총서 책임기획위원들의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머리말 첫 문장도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탐구하고 해법을 제시하려는 지적 노력들”8)을 말할 뿐 ‘자연에 대한 탐구’를 언급하지 않는다.9) 이제까지의 ‘사회인문학’ 연구에서 소홀히된 자연과학과의 만남이 어째서 핵심과제인지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2. 인문학의 ‘오래된 미래’

 

유럽과 동아시아 등의또는 내게 생소하여 거론을 생략하지만 인도, 이슬람권 등 다른 지역의전통시대 인문학을 ‘오래된 미래’라 부르는 것은, 옛날의 인문학이 각기 제 나름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길을 탐구하는 종합적이며 실천적인 학문으로서 인문정신의 실천인 동시에 체계적인 앎이 되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요구에 부응했고, 그런 지혜를 담은 ‘고전’을 남겼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그야말로 전통적인 학습 및 교수 방식에 부합한다. 그러나 전통이 일단 해체 또는 변용된 새로운 현실에서 ‘오래된 미래’를 현재화하려는 시도는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던 시절의 ‘옛것 익히기’와는 다른 차원의 작업이기 마련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오래된 미래’가 ‘현재’가 아니게 된 경위를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 곧 새로운 인문학의 학적 과제이기도 한데, 이는 사회과학적 과제인 동시에 기존 사회과학의 기본전제들을 재검토하는 작업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근대 세계체제, 인문정신, 그리고 한국의 대학」에서 월러스틴의 『지식의 불확실성』10)을 주로 원용했는데, 여기서 그 논의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옛날의 인문학과 성격을 달리하는 근대적 지식체계가 유럽에서 성립한 결정적 요인은 월러스틴의 설명대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탄생이었다. 근대과학의 ‘객관적’ 지식은 자본주의와의 친화성을 과시하면서 지적 권위를 확고히 인정받았던 것이다. “내가 이끌어내는 분명한 결론은 기술혁신이 중심적으로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가 있어야 하며 그 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권력관계의 현실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근대과학은 자본주의의 자식이며 자본주의에 의존해왔다. 과학자들은 실재하는 세계에서 구체적인 개선의 전망(…)을 내놓았(…)기 때문에 사회적 재가와 지지를 얻었다. 과학은 성과를 냈던 것이다.”11)

18세기말 프랑스대혁명이라는 급격하고 대대적인 사회변동 이후에는 그러한 지식을 인간사회에도 적용하려는 시도로 분과화된 사회과학이 성립하게 되었다.12) 실제로 그 전까지는 오늘날 사회과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홉스(T. Hobbes)와 애덤 스미스(Adam Smith), 루쏘( J.-J. Rousseau) 등의 저서가 어느 한 분야로 국한하기 힘든 ‘인문학적’ 성격을 띠었다. 물론 그 흐름은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아주 단절된 것은 아니다.

20세기 중반을 넘기면서는 학문 각 분야의 내부에서 자연과학의 진리를 포함한 ‘객관적 진리’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13)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최종적 위기국면에 접어든 현상의 일환인바, 월러스틴의 책 제목대로 ‘우리가 아는 세계’가 이중적 의미에서, 곧 우리에게 알려진 ‘자본주의 세계’와 우리의 앎을 구성해온 ‘지식 세계’의 동시적 종언을 뜻하는 것이다.14) 이제 인문학의 ‘오래된 미래’를 현재화하는 작업이 새로운 인류문명의 설계에 필수적이 된 것이다.

이 작업에서 동아시아와 유럽의 옛 인문학은 상통하면서도 각기 다른 잠재력을 지닌다. 예컨대 서구 근대의 과학이 자본주의시대 특유의 지식으로 발달된 데에는, 물론 자본주의가 유독 서구에서 먼저 발생한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15) 서양의 전통적 인문학 자체가 ‘객관적’이고 ‘순수한’ 앎의 발달에 유리한 요소를 내장했다는 정신사적 배경도 있다. 따라서 그만큼 근대적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힘든 관성을 지닌 동시에, 서양의 지식세계에서 근대적 지식의 한계를 논증하는예컨대 위의 졸고 「세계시장의 논리와 인문교육의 이념」에서 거론된 하이데거(M. Heidegger)의 사유나 해체론(deconstruction) 또는 ‘복잡성의 과학’(science of complexity) 같은성과가 나올 때에는 남다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동아시아는 자본주의와 과학기술문명의 후발주자로서 근대 세계체제로의 편입과 근대 학문체계의 수용이 시기적으로 늦었을 뿐 아니라 타율적으로 진행된 면도 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전통 인문학의 실천적인 성격이 더욱 강했기 때문이랄 수도 있지만, 강요된 후발주자인 만큼 상당기간에 걸쳐 서구의 학문과 인식론에 대한 예속성을 벗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16) 그러나 21세기에 오면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에서 서양 따라잡기에 어느정도 성공한데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서양 학문의 위기가 심각해짐을 지켜보면서 동아시아 인문학의 ‘오래된 미래’를 현재화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근대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근대를 극복하는 ‘이중과제’17)가 딱히 세계체제의 주변부나 반주변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동아시아에서는 그 과제의 절실함과 더불어 과제의 이행 가능성도 한층 실감이 더해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동아시아 특유의 ‘오래된 미래’가 갖는 의미가 각별하다. 서양의 전통적 인문학과 우열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동아시아인들을 오래 지배해온 ‘유럽적 보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인문학 창신의 담론 자체를 서구 인문학의 언어에 의존하는 습성을 떨쳐버려야 한다. 임형택(林熒澤)이 역설하듯이, “한국에서 지난 20세기 전후는 신구 문명이 교차한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백여년이 경과한 지금 다시 문명적 전환의 시점에 서 있다. 나는 이 시점에서도 문명-인문을 서구적인 개념으로만 인정하고 동양 전래의 개념과는 무관하다고 사고하는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서구중심주의의 근대문명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틀을 어떻게 짜나갈 것인가는 인류사적 과제다. 이 인류사적 과제 앞에서 전통적인 인문 개념을 호출할 필요가 있다.”18)

경제학자 이일영(李日榮)도 ‘혁신가 경제학’의 교육과정을 모색하면서 전통적 개념을 호출한다. 곧, 다양한 혁신가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서술하는 전략으로 ‘문사일체(文史一體)의 방법’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는바, 그 전형적인 사례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든다.19) 그런데 동아시아 전통에서 ‘사’는 넓은 의미의 ‘문’에 포함되므로 ‘문’과 ‘사’를 병치하기보다, 사회과학적 분석에 충실하면서 이를 전통적 인문학의 방식으로 활성화하자는 본래 취지에 부응하여 차라리 ‘문석 일체(文析一體)’를 새로운 인문학의 표어로 삼는 게 어떨까 싶다. 과학적 분석(分析, analysis)이야말로 근대 지식의 생명인데, “‘문화’의 외부에 있는 과학, 어떤 의미에서 문화보다 중요한 과학의 개념”20)이라는 근대 세계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면서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을 지향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을 둘러싼 한국 평단의 논의도 이런 각도에서 정리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근대의 이중과제를 원만히 수행하고 ‘문석 일체’에 부응하는 문학관을 모색하는 작업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그런 정신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작품을 논문 쓰듯이 쓰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문학예술도 근대적 지식을 수렴하는 새로운 인문학에 걸맞은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작가와 주어진 현실의 바람직한 관계가 결코 단순한 사실주의(寫實主義)나 자연주의가 될 수 없음에도, 사실주의와의 끊임없는 혼동을 무릅쓰면서까지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21) 동시에 새로운 인문정신은 근대과학과 서양 전통적 형이상학의 ‘진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 정신에 부응하는 문학과 예술도 ‘리얼리즘’을 포함한 일체의 형이상학적 이념을 넘어선 지혜를 추구하게 마련이고, “지혜가 한층 보편화된 세상의 예술은 아마도 ‘리얼리즘’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말썽 많은 낱말을 더는 부릴 이유가 없게 되기 쉽다”22)라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끝으로 나의 전공분야인 영문학으로 눈을 돌리면, 새로운 인문학은 한편으로는 문학연구에 온갖 새 이론을 동원하여 지식을 생산하는 작업보다는 훌륭한 작품을 꼼꼼히 읽고 깊이 성찰하는 ‘낡은’ 문예비평을 중시하지만, 다른 한편 ‘세상에서 생각되고 말해진 최상의 것을 아는 일’에서 저절로 무슨 답이 나온다는 전통적 인문주의와는 구별된다. 이런 맥락에서 리비스(F. R. Leavis)의 작업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대학교육에서 영문학 공부의 중심성을 역설하고 그러한 공부로 단련된 비평적 능력이 오늘의 ‘기술공학적벤삼적 문명’(technologico-Benthamite civilization)을 이겨내는 데도 필수적이라는 그의 주장이 고루하고 편협한 인문주의에 불과한지, 아니면 새로운 인문학에 부응하는 차원의 ‘온고지신’을 제창한 것인지를 숙고해봄직한 것이다.23)

 

 

3. ‘날로 새로운 현실’과 인문학

 

인문학의 ‘오래된 미래’가 만나야 할 ‘날로 새로운 현실’의 일부가 옛 인문학의 쇠퇴와 변질을 초래한 근대적 지식의 세계임을 앞에서 밝혔다. 이는 곧 자본주의에 관한 철저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현대 기술에 대한 ‘과학기술학적’ 탐구가 새로운 인문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이 자연과학이나 공학기술의 한 분야가 아님은 분명하며,24) 『자본론』을 비롯한 맑스(K. Marx)의 저서가 경제학의 고전인 동시에 철학, 역사학, 사회학, 그리고 혁명전략론까지 망라하는 종합적이고 실천적인 학문, 곧 원래 의미의 인문학이기도 하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아니, 자연과학의 고전으로 유명한 다윈(C. Darwin)의 『종()의 기원』의 경우에도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균열과 이분법이 들어서기 전의 학문적 탐구가 도달할 수 있었던 모범적 차원을 구현했다”25)라는 김명환(金明煥)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

그런데 처음부터 인문정신과의 친화성 또는 긴장관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사회과학이나 다윈 같은 창조적 천재의 업적과 별도로, 토마스 쿤(Thomas Kuhn)이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 부르는 대다수 과학자들의 작업을 새로운 인문학이 어떻게 포용할지는 또다른 문제다. 이것저것 다 포용하는 인문학은 아무도 해낼 수 없는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 아닌가라는 반론이라면 답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새로운 인문학의 요체는 한 사람이 온갖 분과학문을 섭렵해서 종합하자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방식으로 분과화된그런 식으로 분과화될 수밖에 없었던근대적 지식체계의 기본전제를 넘어서는 ‘탈분과학문적 연구’(post-disciplinary studies)로의 전환에 있다. 이러한 새 발상에 입각한 연구가 진행되다보면 현실에서는 각자의 성향과 역량에 따라, 그리고 ‘날로 새로운 현실’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분화와 분야별 심화가 새롭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오히려 기존의 분과학문 체계를 그대로 둔 채 온갖 분야를 ‘통섭’하고 ‘융합’하려는 시도야말로 몇몇 특출한 천재 석학이 아니고는 엄두가 안 나기 쉽다.26)

현실이 과학과 기술의 지속적인 발달을 요구하는 한 그 전문적이고 분과화된 연구를 포용하는 것은 인문학이 ‘날로 새로운 현실’과 만나는 데 필수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어떻게 인문학으로서 만나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사회인문학’에 대해 토로했던 아쉬움과도 직결되는데, 나 자신이 어떤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을 처지는 못 되며 앞으로 이 문제에 더 정통한 분들에 의한 보완과 질정을 기대한다. 어쨌든 인문/사회과학 사이의 장벽보다 훨씬 뚜렷하고 견고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사회와 자연계 사이의 간극에 대해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컨대 라뚜르는 과학이 대상으로 삼는 ‘사실’이라는 것이 일종의 ‘사회들’(societies)이요 ‘사건들’(events)임을 강조하면서 ‘사실문제에서 관심사로’(from matters of fact to matters of concern) 옮겨갈 것을 제안한다.27) ‘사회들’의 개념은 라뚜르 스스로 밝히듯이 그의 독창적인 발상이기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따르드(G. Tarde)나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일찍이 강조했던 것이다. 이는 과학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사실’과 인문학 또는 생활인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주관적인 관념(내지 관심사)’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도전이다. 특히 뒤르껨(É. Durkheim)과 동시대인인 따르드는 사회적 현실도 ‘객관적 사실’임을 강조함으로써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정초하는 데 크게 기여한 뒤르껨의 입장에 정면으로 맞섰다.28) 이렇게 볼 때 사회현실은 물론 자연계의 현상들도 인간적(또는 인문적) 관심사의 일부로 자리매겨진다. 반면에 그러한 관심사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과학적 객관성’을 견지하는 일은 얼마든지 존중될 수 있다. 과학연구와 기술개발을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기술학 등으로 대체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을 억지로 인문학에 포섭하는 대신, 새로운 인문적 실천과 인문학적 탐구라는 큰 틀 안에서다시 말해 과학을 문화의 우위에 두는 과학주의 이데올로기에 얽매임이 없이그 나름의 자율성과 특수한 진실성을 갖고 진행하는 전문화분과화를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지금 이곳의 ‘날로 새로운 현실’과 좀더 직접적으로 만나는 구체적 방안 두가지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앞서 동아시아적 ‘오래된 미래’의 특징을 논했지만, 한국(및 한반도)의 경우에는 또 나름의 특징이 있다. 한반도가 일찍부터 한자문화권의 풍부한 유산을 공유하게 된 것은 중국의 일방적인 영향이기보다 “수용자측의 능동적인 자세와 창조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29)이지만, 중국문명의 압도적 영향으로 주체적인 인문학 발달이 억압된 면도 무시할 수 없다. 예컨대 공동문어와 대중의 일상언어 사이의 괴리는, 공동문어가 표음문자를 사용한데다 사용자들이 대부분 동일한 어족(語族)으로 구성되었던 유럽에서보다 훨씬 심했다. 이 점은 지리적 주변성과 더불어 한반도 인문학의 주체성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었을뿐더러, 길게 볼 때 교양계층의 폭을 제한하고 일반대중과의 간격을 확대함으로써곧 한문이 대중이 못 읽는 글자일 뿐 아니라 전혀 생소한 외국어이기도 했기 때문에학문풍토의 편협성을 심화하기도 했다. 그러한 문제점들이 15세기의 한글 창제와 조선조 말기에 국문 내지 국한문 혼용체가 논설문장으로까지 확대되며 완화되어가던 중에 근대로의 전환이 일본의 식민지지배라는 극단적 타율성을 띠고 이루어졌다. 식민지 치하에서 인문학의 발달이 순조로울 수 없었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게다가 일본의 통치를 벗어난 후에도 분단시대가 지속되면서 인문학적 자산의 절대적 빈곤, 그나마 있는 학문역량의 상호단절과 분산 및 심한 경우 물리적 제거, 남북 양쪽 모두에서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에 대한 학문외적 제약 등 수많은 난관을 겪고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오래된 미래’가 제법 풍성하게 주어진 것은 분명하다. 아니, 점점 하나가 되어가는 세계에서 동아시아 바깥의 ‘오래된 미래’들도 우리가 끌어다 살리기에 따라 얼마든지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날로 새로운 현실’과 만나도록 하느냐인데, 이를 위해서도 세계체제 전반의 현실과 동아시아지역의 현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한국 및 한반도의 현실을 직시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특히 오늘의 한국인(및 한반도 주민)들이 아직도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현실과의 만남이 새로운 인문학의 핵심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단체제론을 오랫동안 주창해온 당사자로서 별로 겸손한 처신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계, 특히 제도권 대학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분단체제연구를 진지한 학문적 작업으로 생각하는 예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한국 인문학의 빈곤 및 현실둔감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상상력을 발동하여(어쩌면 ‘판타지문학’의 영역을 침범하여!) 대학 안에 ‘분단체제연구’라는 교과목이 설정되었다고 가정해보자. 현존 대학편제에서는 굳이 말하자면 사회과학대학에 개설될 성격이겠지만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사회과학 전공자 중에서 담당교수를 찾는 일도 만만찮을 것이다.30) 이 과목에서는 ‘단일한 역사적 사회과학’이라는 새로운 인문학의 다른 이름에 걸맞게, 분단시대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식민지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역사에 대한 강의가 중요한 일부를 이룰 터이고,31) 동시에 해당시기 세계체제의 현실, 특히 한반도 분단이 세계사의 어떤 국면에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분단체제의 성립 및 그 유지 과정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세계체제가 어떻게 작동해왔는지에 대한 수업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분단시대의 문학예술학술기술 등이 분단체제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며 왜곡되었는가에 관한 비평작업도 필요하다. 아니, 실천적 인문학의 일부로서 ‘분단체제연구’는 그 모든 분야에서 분단체제 극복방안에 대한 탐구를 포함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면 어느덧 ‘분단체제연구’가 한 과목 수업으로 끝날 성질이 아니며 여러 분야의 전공자들이 ‘탈분과학문적 연구’를 지향하는 자세로 하나의 ‘협동과정’을 설치해야 할 법하다. 이 협동과정이 ‘분단체제연구대학원대학교’ 같은 특수대학교로 발전하는 광경은 오롯이 판타지문학의 영역에 속할 터인데, 실제로 현존하는 대학과 교육 제도의 근본적 변화 없이 그런 특수대학교를 만드는 것은 분단체제연구의 자멸책이 되기 십상이다. 제도권 안팎을 넘나드는 기동성을 끝까지 유지하며 “기회주의적이고 과외활동적인”(opportunist and extra-curricular)32)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이 오늘의 현실에서는 불가피하다. 다만 ‘날로 새로운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특정한 형태의 종합화가 결과적으로 새로운 전공분야들로의 분화를 수반하는 이치를 짐작게 해주는 예로 ‘판타지’를 구사해본 것뿐이다.

실은 환상문학의 영역을 침범 않고도 강의자나 연구자의 뜻만 있으면 분단체제의 현실에 밀착된 연구를 할 길은 얼마든지 있다. 북한학만 하더라도, 앞서 그 지역학적 성격 때문에 통합학문에 가까울 수 있음을 언급했지만, 관건은 역시 북한을 분단체제의 일부로 파악하느냐는 것이다. 북한을 별도의 국가로 인정하고 연구하는 자세는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태도에 비해 훨씬 학술적이고 상호 체제인정이라는 남북관계발전의 기본요건을 충족하는 데도 근접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분단체제의 부인(또는 망각)으로 가서는 한반도 및 북한 현실의 핵심을 놓치고 만다. 같은 이야기가 남한에도 적용됨은 물론이다. 한국 학계의 주된 관심사는 아무래도 한국사회이기 마련인데많은 교수들의 연구현황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남한사회를 분석의 기본단위로 삼는 연구는 세계체제분석의 원칙에도 어긋나거니와 ‘분단체제 속의 한국’이라는 한국사회 특유의 현실을 지워버리게 된다. 이래서야 적절한 대응책이 나올 수 없으며, ‘세계에 자랑할 한국인의 성취들’과 ‘이게 도대체 나라인가’라는 개탄을 자아내는 사안들이 온통 뒤섞인 특이한 현실을 설명할 이론적 틀을 찾기 힘들다. 나아가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일은 남북한을 모두 한층 정상적인 근대사회로 만듦과 동시에 근대적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사회 체제의 창안에 기여하는 전형적인 ‘이중과제’에 해당한다. 물론 엄격한 사회분석을 요하면서도 ‘문석 일체’로만 파악이 가능한 현실이요 ‘관심사’이기 때문에, 기존의 학문방법에 안주하는 학자들에게는 학문의 대상으로조차 인식되지 않기 십상이다.

한국의 새로운 인문학에서 또 하나의 핵심과제는 한국어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다. 물론 자기 말과 자기네 문학의 탐구는 어느 나라에서나 인문학의 기본에 해당하지만 오늘의 한국에서 그 작업이 유달리 절실하기에, 김성보(金聖甫)의 ‘비판적 한국학’에 빗대어 ‘비판적 한국어학’을 사회인문학의 한 과제로 제의해보고 싶다.

중국문명의 압도적인 영향이 우리 인문학의 발달을 제약한 면을 앞서 언급했지만, 문학만 하더라도 자국어로 된 전통시대의 유산은 예컨대 이웃 일본에 비해서도 현저히 빈곤한 게 사실이다. 게다가 근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의 식민지지배 아래 조선어는 공용어의 지위를 빼앗기고 나중에는 일상생활에서의 사용마저 탄압당함으로써 오래된 발육부전 상태를 치유하지 못했다. 그 결과로 지금도 한자어가 너무 많아 한국어의 변별력과 표현력이 제약받고 있다. 실은 오늘의 한국어에 영어가 범람하는 이유가, 물론 일본 대신에 미국이 지배자로 군림한 문화식민지적 풍토가 크게 작용한 탓이지만,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가 너무 많아서 때로는 영어 같은 외래어를 쓸 때 오히려 알아듣기 쉬워진다는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일부 지식인들마저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여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 운운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문적 교양이 어떤 수준인가를 말해주며 우리말을 제대로 가꾸는 데 얼마나 무관심한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익숙한 소집단의 내부를 벗어나는 소통행위에서 한국어의 변별력은 지적인 내용이 커질수록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글쓰기에서 정확한 의미전달을 위해 한자를 섞어 쓰다보면 한자를 모르는 독자가 소외되기 마련이고, 한글로만 쓸 경우에는 동음이의어는 물론 철자만 같지 장단음의 차이로 소리가 다른 동철이의어(同綴異義語)마저 끼어들어 혼란을 가중시킨다. 반면에 입말의 경우 소리의 길고 짧음과 억양의 차이가 개입함으로써 의미전달을 돕는 대신, 같은 소리라도 형태소를 살려 다르게 표기하는 맞춤법의 장치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혼란스러워지기 일쑤다.33)

아무튼 815 이후 분단된 남쪽에서 영어가 한국어에 행사해온 교란작용은 최근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더욱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밀한 진단을 위해서는 지난날 한국어의 기구한 발달사나 오늘의 세계화 및 그 부작용에 대한 일반론을 넘어 흔들리는 분단체제가 그 최종적 위기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인식, 곧 ‘분단체제연구’에서 비롯되는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34) 또한 분단체제연구가 세계체제의 한 하위체제로서 분단체제를 인지하는 연구여야 하듯이, 한국어의 문제 또한 자본주의 발달의 극대화로 인해 영어 자체도 획일화하고 천박해지는 전지구적 현실의 맥락 속에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러저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탁월하게 구사하고 발전시킨 예술과 학문, 언론의 업적을 검토하는 작업도 수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떻게 한국인의 어문생활이 외국어의 영향에 개방적이면서도 인문학과 인문적 실천에 부합할 수 있을지를 연마하는 인문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추구해봄직한 학적 과제인 동시에 어찌 보면 여타 과제들의 전제조건에 해당한다. “읽고 생각하는 ‘문학비평’의 훈련은 인문정신 실현의 기초”35)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인 주장이 한국의 교육 전반에 걸쳐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인지는, “현행 교육이어문학과들의 연구와 교육을 포함해서이런 ‘상식’을 과연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를 반성해보면 드러나리라 본다.”(같은 면)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명문대학이라는 곳일수록 한국어가 대학의 교육언어로서조차 (서툰) 영어에 밀려나는 웃지 못할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36)

비판적 한국어학도 실천성을 중시하는 인문학인 만큼 그러한 현실을 바로잡을 각종 교육사업도 그 연구과제의 일부가 된다. 예컨대 인문정신이 제대로 실현되는 대학교육을 위해 초중등교육에서부터 한문과 영어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갖춘 유능한 국어교사들이 나서서 ‘한국어 연마’와 ‘문학비평적 훈련’이 몸에 밴 시민을 길러내야 하는 문제도 연구의 대상이다. 여기서 또 한번 판타지문학의 영역으로 진출해보면, 나는 요즘 너도나도 들먹이는 ‘생활영어’ 교육이 전혀 다른 의미로 시행되는 광경을 보고 싶다. 사실 어린이 상대의 조기 영어교육은생활조건상 영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그다지 효율적이 아닐뿐더러 조기교육의 부작용으로 소아신경과 전문의들의 수입만 올려주고 끝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물론 가정이나 초등학교에서의 영어교육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다수 어린이의 경우 초등교육 단계에서는 영어에 대한 기초적 지식을 가르치면서 장차 생활영어를 구사해야 할 처지를 당했을 때 심리적으로 너무 위축되지 않게 해주는 ‘면역력 길러주기’ 정도면 족하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한국인의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영어 단어와 용법들, 그런 의미로 한국인의 ‘생활영어’를 해석하고 해설해줌으로써 한국인으로서 어문생활을 더 잘할 수 있을뿐더러 언어 일반에 대한 통찰을 일찍부터 심어주는 일이다. 물론 비용과 인력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영어’ 교육에 일반 국어수업과 같은 시간수를 배정할 필요는 없으며, ‘생활영어’ 담당교사의 수를 늘려가는 비용도 요즘 조기 영어교육이나 불필요한 암기식 교육에 투입되는 막대한 공적사적 예산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수준일 것이다.

 

 

4. 개인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

 

옛날의 인문학은 실천적 학문으로서 개인적 수행(修行)과 사회적 행동의 양면을 동시에 강조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자의 목표가 그런 것이었고, 서양에서 인간다움(humanitas)을 연마하고 구현한다는 이상도 그랬다. 원시 그리스도교나 초기 불교의 경우는그리고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한 선종(禪宗)의 경우에도학문 자체를 멀리하는 경향이었으나, 서양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흡수한 신학의 전개로, 동아시아에서는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대승불교의 발달 및 선교습합(禪敎習合, 선종과 교종敎宗의 결합) 시도를 통해 인문학의 전통에 다시 근접하며 그 풍부화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동서양의 인문학 전통에는 일정한 편차가 있고 서양철학은 근대적 진리관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는 플라톤 자신이 철학자군주의 교육에서 어릴 때부터 고도의 신체적정신적 훈련을 요구하면서도 인간의 최고 미덕을 초월적인 ‘이데아’에 대한 으로 설정한 데서 드러나지만, 실제로 개인적 수행을 앎의 선행조건으로 삼은 동아시아 등 여타 전통과의 혁명적인 차별화를 이룩한 것은 소크라테스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 자신은 구도자적 면모가 강한 인물이었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어떤 학설을 제시하기보다 끊임없이 묻고 성찰하는 삶을 중시했다.37) 하지만 진리에 대한 그의 헌신 못지않게 준범으로 남은 것은 그의 진리탐구 방법인데, 그는 시중의 아무나 붙들고 대화하고 변증함으로써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음을 실증했다. 이는 『소학(小學)』의 가르침대로 몸가짐과 마음가짐부터 바르게 하는 일을 큰공부 곧 대학(大學)의 전제조건으로 본 유학의 전통이나, 큰스님에게 도를 배우려는 초심자에게 절간의 마당 쓸고 불 때는 일부터 시키기 일쑤였던 불가의 교수법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 수행과 분리되기 시작한 지적 전통이 드디어 근대적 지식체계에서 진미의 절대적 분리를 초래하고 이제 그 지식체계 전체가 위기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20세기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제도의 급속한 개조를 통해 새로운 사회와 인간을 만들어내려던 대대적인 기획이 실패하면서 개인적 수행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사실 이것은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실패인 동시에, 인간이 이성을 사용해서 미신과 인습적 제도를 타파함으로써 행복한 인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 기획의 실패였다. 18세기 유럽의 담론지형에서 보수파가 인간은 원죄를 지닌 존재이므로 인간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은 불가능하다거나 적어도 각 개인의 회심(回心)과 자기완성이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맞서, 진보파는 그런 주장이 불공정한 구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고 개개인의 변화가 사회개조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후자의 주장을 더욱 극단화해서 폭력혁명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해서라도 경제제도를 변혁하는 일이야말로 인간개조의 첩경이라 믿은 것이 소련식 사회주의였다. 물론 이 실험이 실패했다고 해서 사람마다 성자가 된 후에야 사회변혁이 가능하다는 낡은 이데올로기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본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큰공부도 비록 각자의 수신(修身) 공부를 기본으로 삼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네가지를 병진하는 공부였다. 이제 근대의 역사와 근대적 지식의 축적으로 변화된 현실에 걸맞은 새로운 방법으로 그러한 큰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 것이다.

실은 인식의 차원에서도, 다시 말해 인문학이 ‘학’으로 성립하고 기능하기 위해서도 자기수행 내지 마음공부가 필수적이다. 단순한 지식의 축적, 알음알이知解의 축적이 목표라면 분업체계를 정해놓고 각 개인과 분업집단이 지식경쟁을 벌이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일 테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계와 무진장으로 축적되는 지식의 틈바구니에서 그날그날의 인문적 실천에 꼭 필요한 앎을 성취하는 일은 마음공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필요한 것들을 제때에 바로 알아보는 일은 지식의 차원을 넘는 혜안(慧眼)을 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마음공부가 그런 일을 가능케 할까? 인문학의 새로움을 찾는 맥락에서 두어가지 요건을 적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기로 한다.

첫째, 인문으로서의 요건을 충족하려면 알음알이가 온전한 깨달음에 장애가 될 뿐이라는 불교의 전통적 사고방식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근대과학에서의 알음알이 축적 자체는 깨달음과 무관하고 알음알이에 대한 집착이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도 분명하지만, 과학과 알음알이 또한 보살행의 한 방편일 수 있으며 알음알이의 적절한 활용이 곧 지혜의 일부임을 깨치는 마음공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38)

둘째로 인문학의 실천성은 개인적 수행과 사회적 행동을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므로 개인의 수양에 치우친 공부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지공무사(至公無私)하면서도 원만한 심신작용을 목표로 삼는 공부여야 한다. 이는 대승불교의 성불제중(成佛濟衆)에 부합하는 마음공부이며, 유()()()의 종합을 추구하는 한반도 특유의 전통을 이어받은 원불교는 “모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39)을 삼학공부의 마지막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바른 실천의 중요성을 더욱 분명히 한다.

끝으로 ‘마음공부’라는 낱말의 이런저런 오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표현을 쓰는 것은 새로운 인문학과 이를 수반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지혜가 서양의 지적 전통에서 만나기 힘든 독특한 수행과 깨달음을 요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류문명의 건설을 위해 ‘실질적 합리성’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위한 개방적 토론을 진행한다든가 칸트식 ‘규제적 이념’에 따르고자 충실히 노력하는 일들이 모두 필요하지만,40) 일체의 집착과 분별지(分別智)를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에서 오는 도저한 밝음이 주도함으로써만 그러한 학적역사적 전환을 완수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고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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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고의 출발점도 ‘인문학의 새로움’을 그 학기의 큰 주제로 내건 대전인문학포럼의 제100회(2013.11.12) 강연이었다. 당시는 요지문만 배포한 채 부연하는 형식이었고, 이후 요지문을 보완해서 주변 동학들의 논평을 구했다. 본고는 강연 당시의 질의응답과 이후의 개인적 조언들을 참고하여 대대적으로 개고한 결과다. 이 글의 전편(前篇)에 해당하는 「근대 세계체제, 인문정신, 그리고 한국의 대학‘두개의 문화’ 문제를 중심으로」(졸저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창비 2009에 수록) 역시 ‘21세기 인문학의 창신과 대학’이라는 큰 주제를 걸고 열린 2008년 1월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창설 5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움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완한 것이었다.

2) ‘오래된 미래’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유명한 저서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중앙북스 2007; 영어본은 Helena Norberg-Hodge, Ancient Futures: Lessons from Ladakh for a Globalizing World, Sierra Club Books 1991, 2009)에서 따온 것이다. 이 책에 그려진 라다크도 이미 급속한 변화와 전통유실의 과정에 들어섰으며, 다만 그 오래된 생활양식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교훈을 줄 정도로만 유지되고 있었다.

3)박근혜 대통령의 언론사 논설실장 오찬(2013.7.10) 발언. 노재현 칼럼 「인문학 붐인가 거품인가」, 중앙일보 2013.11.1에서 재인용.

4) 나는 그러한 노력의 극히 일부를 알고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서 『창작과비평』 2009년 여름호 특집 ‘이 시대는 어떤 인문학을 요구하는가’에 실린 오창은고봉준임옥희이현우의 글과, 제도권 학자들이면서 대학 바깥의 인문학에도 진지한 관심을 표명한 최원식백영서의 대담 「인문학의/에 길을 묻다」, 그리고 『안과밖』 35호(2013년 하반기)의 소특집 ‘대안인문학의 가능성’에 수록된 이수영권명아정남영의 글 등 참조.

5) 이수영 「연민의 복지를 넘어 인간 존엄의 복지로」, 『안과밖』 35호 110면.

6) 이는 위의 최원식백영서 대담에서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25~29면 등).

7) 백영서 「사회인문학 총서 발간에 부쳐」, 김성보 외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비판적 인문정신의 회복을 위하여』, 한길사 2011, 5면.

8) 같은 책 7면. 백영서는 앞서 인용한 발간사 외에 자신의 논문 「사회인문학의 지평을 열며그 출발점인 공공성의 역사학」에서도 같은 취지를 밝힌다(21면). 한마디 덧붙인다면, 이 논문 중 내가 ‘하나의 인문학’의 실천적(=현재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 “월러스틴이 모든 학문은 과거에 관한 것이고, ‘역사적 사회과학’은 과거시제로 써져야 한다고 한 주장에 대한 비판”(23면)이라고 한 것은 월러스틴과 나의 차이를 과장한 해석이다. 앞의 졸고 「근대 세계체제, 인문정신, 그리고 한국의 대학」에서 나는 “모든 학문이란 과거에 관한 것이다”라는 월러스틴의 발언을 ‘지식의 본질에 관한 획기적인 주장’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그러나 ‘학문’이 아닌 ‘비평’의 경우는 반대임을 주장한 것이 사실이다(앞의 졸저 381~82면). 그러나 이는 월러스틴 자신이 ‘정치와 불가분하게 연결된 단일한 역사학적 사회과학’(a single historical social science integrally linked to politics)을 주장했을 때 학문의 실천적(=현재적) 측면도 인정했음을 감안한 발언이었다(같은 책 368면 주4 참조).

9) 기획위원 중 한사람인 박명림은 아예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융합을 전제로 학문과 사회의 바른 관계 설정 및 동시 발전을 통해 학문의 사회화와 사회의 인문화가 함께 달성되는 (…) 학문과 사회를” 제안한다(「왜, 그리고 무엇이 사회인문학인가: 사회의 인문성 제고, 인문학의 사회성 발양을 향한 융합학문의 모색」, 같은 책 48면).

10)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식의 불확실성』, 유희석 옮김, 창비 2007; 원저 Immanuel Wallerstein, The Uncertainties of Knowledge, Temple University Press 2004.

11) 이매뉴얼 월러스틴 「사회과학과 현대사회: 합리성에 대한 보증의 소멸」,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21세기를 위한 사회과학』, 백승욱 옮김, 창비 2005, 197면; 원저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Social Science for the Twenty-first Centur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 140면(번역은 인용자가 약간 고쳤음). 이런 주장은 『지식의 불확실성』에서 견지되며 후속 저서 『유럽적 보편주의: 권력의 레토릭』(김재오 옮김, 창비 2008; 원저 European Universalism: The Rhetoric of Power, The New Press 2006)에서 부연된다.

12) 이와 관련해서는 이매뉴얼 월러스틴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성백용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4(원저 Unthinking Social Science, 1991), 특히 제1장 참조.

13) 졸저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작과비평사 1994)에 수록된 「세계시장의 논리와 인문교육의 이념」, 제4절 ‘진리 개념에 대한 도전’ 참조.

14)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은 제1부 ‘자본주의 세계’와 제2부 ‘지식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15) 그러한 요인들에 대해서는 Immanuel Wallerstein, “The West, Capitalism, and the Modern World-System,” Review 15, no. 4 (fall 1992): 561~619면 참조.

16) 동아시아 나라들 중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선언하며 가장 앞서, 가장 자발적으로 서구화의 길에 나섰고 조선은 그러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중국은 반 식민지상태로 떨어졌다가 항일전쟁에 승리하고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했지만, 원 톄쥔(溫鐵軍) 『백년의 급진: 중국의 현대를 성찰한다』(김진공 옮김, 돌베개 2013)에 따르면 중국의 공산당정권 수립이나 문화대혁명조차 그 기조는 급진적인 서양 따라잡기와 원시적 자본축적의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17)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창비담론총서 1), 창비 2009 참조. 여기 실린 졸고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는 원래 뉴욕주립 빙엄튼대학 페르낭 브로델 쎈터의 1998년 국제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했고, 이후 영문 원고가 영국의 계간지 Interventions 제2권 1호(통권 4호, 2000)에 “Coloniality in Korea and a South Korean Project for Overcoming Modernity”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18) 임형택 「전통적 인문개념과 문심혜두: 정약용의 공부법」, 『한국학의 동아시아적 지평』, 창비 2014, 415면.

19) 이일영 「‘혁신가 경제학’의 교육과정 모색: 경험과 사례를 중심으로」, 『동향과전망』 90호(2014.2.1), 212~13면.

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유럽적 보편주의』 135면; 원저 77면.

21) 졸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창작과비평사 1985)에 수록한 「리얼리즘에 관하여」의 제2절 ‘리얼리즘과 古典主義’에서 나는 “낭만주의의 소용돌이를 거쳐 나오면서 형성된 리얼리즘 문학의 이념이 어떤 의미로 현대의 진정한 문학적 고전을 창조하는 문학이념으로서의 ‘고전주의’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고전주의’라기보다 ‘리얼리즘’으로 일컬어 마땅한 이유는 또 어떤 것인가?”(370면)라는 물음에 해답을 시도했다.

22) 졸고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1991),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4』, 창비 2006, 412면.

23) 리비스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은 김명환설준규와의 회화 「영문학연구에서 시민사회의 현안까지」(2003, 『백낙청회화록』 제4권, 창비 2007) 중 ‘“한물 간” 리비스의 현재성’(404~407면) 대목에 피력한 바 있다. 리비스가 현대문명을 일컫는 표현에 벤삼(J. Bentham)을 끌어넣는 데 대해서는 한마디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그가 벤삼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그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나 여타 어떤 철학적 학설이라기보다 밀(J. S. Mill)이 주목했던 벤삼의 ‘세목의 방법’(the method of detail: Mill on Bentham and Coleridge, with an introduction by F. R. Leavi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0, 48면), 곧 모든 현실을 그 최소한의 기본단위로 쪼개서 설명하는 환원주의적 방법인데, 리비스는 그것이 모든 것을 세목별 분석의 대상으로 환원하는 현대 기술문명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파악한다. 곧, ‘문석 일체’에서 ‘문’을 떼어버리고 오로지 ‘석(〓쪼갤)’에만 몰두하는 방법론의 주창자로서 벤삼에 주목한 것이다. ‘기술공학적벤삼적 문명’의 현황을 집중적으로 논한 리비스의 저서로는 F. R. Leavis, Nor Shall My Sword: Discourses on Pluralism, Compassion and Social Hope (Chatto & Windus 1972) 참조. 대학교육에서 영문학 공부가 차지하는 중심성에 관해서는 초기의 Education and the Univers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43)에서 말년의 The Living Principle: ‘Englishas a Discipline of Thought (Chatto & Windus 1977)에 이르기까지 일관되다.

24) 실라 재써노프(Sheila Jasanoff) 「테크놀로지, 정치의 공간이자 대상」,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참조.

25) 김명환 「문학의 눈으로 본 다윈의 『종의 기원』: 분과학문의 장벽을 넘어서는 통합적인 학문을 위한 실마리」, 『안과밖』 35호(2013년 하반기) 262면.

26) 천재 여부를 떠나, 과학교육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본질상 전문화분과화될 수밖에 없는 과학연구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도 경청할 만하다(윤태웅 「과학교육과 인문학, 그리고 융합!」, 한겨레 2014.4.1). 물론 이러한 지적이 탈분과학문적 노력에 대한 무관심에서 연유하는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27) Bruno Latour,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 From Matters of Fact to Matters of Concern,” Critical Inquiry 30 (Winter 2004).

28) 화이트헤드 및 따르드에 관한 라뚜르의 논의는 위의 글 외에도 B. Latour, What Is the Style of Matters of Concern? (Van Gorcum 2008) 참조. 월러스틴은 「사회학의 유산, 사회과학의 약속」에서 라뚜르의 ‘우리는 한번도 근대적인 적이 없었다’는 명제를 사회학의 문화에 대한 6대 도전의 하나로 꼽는데(『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342~46면, 원저 241~43면), 라뚜르 이전에 일리야 쁘리고진(Ilya Prigogine)의 ‘복잡성 연구’에서 이미 자연세계와 사회현실이라는 이분법이 부정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리고진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재통합했는데, 인간활동을 다른 물리적 활동의 단순한 변이로 볼 수 있다는 19세기의 가정 위에서가 아니라, 물리적 활동을 창조성과 혁신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전도된 토대 위에서 그렇게 했다.”(334면, 원저 237면)

29) 임형택 「전통적 인문 개념과 문심혜두」, 앞의 책 398면.

30) 정규 학과가 아닌 연구소의 경우라면 현존하는 북한학 또는 통일(평화)학 연구소들처럼 사회과학 교수들과 타분야 교수의 공동참여가 가능하리라 예상된다. 실제로 이런 연구소들의 작업은 어느 분과학문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인문학의 요구에 한층 근접해 있다. 그러나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진 연구는 극히 예외적이다. 인문학 쪽에서 대학원 정규 과목으로 ‘통일인문학’을 먼저 개설한 것은 건국대학교다(2014년). 인문학과 교수들이 주축이 된 점이 한계라면 한계지만, 중요한 것은 분단체제론 같은 탈분과학문적 인식에 도달하느냐 여부일 것이다.

31) 이 점에서 분단체제연구는 김성보가 사회인문학의 중요과제로 제기하는 ‘비판적 한국학’과 통한다(김성보 「비판적 한국학의 탐색」, 『사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더욱이 그는 제3절 ‘분단 이후 한국학의 성찰’에서 나의 분단체제론에 대한 관심도 표명한다(302면). 그러나 분단체제론의 세계적인 지평을 인정하는 것 같지는 않으며, 비판적 한국학을 “세계 보편의 언어로”(같은 면) 옮기는 문제는 아득한 숙제로 밀어놓은 인상이다.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한국 학문의 ‘민족경륜’이 곧 ‘세계경륜’이어야 한다는 점은 임형택, 앞의 책, 마지막 장 「분단체제하의 한국에서 학문하기」에서도 제기된다.

32) 리비스의 표현. 졸고 「근대 세계체제, 인문정신, 그리고 한국의 대학」 ,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395면에 인용.

33) 한글이 표음기능이 뛰어난 문자인 건 분명하지만 소리의 장단은 현행 맞춤법이 변별하지 못한다. 물론 이를 보완하는 방법은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장음 뒤에 [:] 부호를 넣고 그것이 없을 경우 단음으로 간주하는데, 사전처럼 모든 낱말의 장단을 밝히지 않고 꼭 필요할 때만 표시하기로 한다면이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음의 장단에 자신이 없는 사람도 마음 놓고 한글을 쓰기 위해서도 필요하다장음 표시와 단음 표시를 다 정해줘야 할 것이다. 예컨대 눈〔〕과 눈〔〕, 말〔〕과 말〔〕처럼 한자를 써서라도 구별해줄 필요가 있을 경우, 컴퓨터로 쉽게 칠 수 있는 부호 중에 전자는 ~, 후자는 ^를 추가해서 음의 장단을 표시할 수 있다. 한자어 문제는 꼭 필요한 경우에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 생각된다. 이때 한자를 노출시켜 쓰지 않는 것은 외래문자 배제라는 ‘민족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소리 내서 읽고 사전을 찾아볼 수 있게 해준다는 ‘민주주의적’ 입장이다. 이러한 표준 서법을 (획일적 국민국가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경우에 강요하는 대신에, 공문서와 교과서에 국한한다든가 하고 나머지는 개인과 집단의 자율에 맡긴다면 국민적 합의를 이루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34) 분단시대의 장기화로 남북한의 언어적 이질성이 증대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반도 공동언어로서의 한국어에 대한 위협인데, 그에 앞서 남한의 공용어로서 한국어가 겪는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물론 이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35) 졸고 「근대 세계체제, 인문정신, 그리고 한국의 대학」, 앞의 책 387면.

36) 이에 대한 생생한 사례보고와 신랄한 논평으로 김명환 「교육언어로서의 한국어를 홀대하는 한국 대학」, 『창비주간논평』 2014.2.5(http://weekly.changbi.com/799) 참조.

37) 야스퍼스는 그의 ‘준범적 개인들’론에서 소크라테스의 그런 면모를 특히 강조한다. Karl Jaspers, Socrates, Buddha, Confucius, Jesus: The Paradigmatic Individuals, ed. H. Arendt, tr. R. Mannheim, Harvest Book 1957.

38) 지식과 지혜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논의로 졸고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 『민족문학의 새 단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3』, 창작과비평사 1990, 131~33면 및 「다시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제5절 참조.

39) 『정전(正典)』 교의편 제4장 ‘삼학(三學)’ 제3절 ‘작업 취사(作業取捨)’, 『원불교전서』 22판, 원불교출판사 1995, 50면.

40) 막스 베버(Max Weber)의 ‘실질적 합리성’을 재정립할 것을 강조하는 월러스틴의 논의는 『지식의 불확실성』 197~98면(원저 160~62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355면(원저 249면) 등 참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체제와 교환양식의 건설을 위해 칸트의 세계공화국 및 영구평화라는 ‘규제적 이념’의 필요성을 제기한 예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카라따니 코오진) 『세계사의 구조』,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2, 418~34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