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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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金敃廷

1976년 인천 출생. 199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가 있음. blackinana@hanmail.net

 

 

 

제 이름은 야한입니다

작은 사건들 32

 

 

한 시인의 시집이 인쇄되고 있었다

불교방송에서 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에게

고가의 만년필을 선물하는 여승도 있다 했다

한 시인의 시집이 채 다 인쇄되기도 전에

시인보다 앞서 새 시집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는 내가사라는 절입니다

시집 100권 주문합니다

주소 불러드릴게요

경남 밀양시 무안면 내진리 553

제 이름은 야한입니다

받는 사람에

야한 스님, 이렇게 쓰시면 됩니다

 

그로부터 스님과

몇통의 문자메씨지를 주고받았다

밀양 하면 다들 전도연으로 압니다만,

내가사는 여자가 머물기에 참 좋은 절이지요

한번 놀러오라 그리도 말씀하셨으나

여직 스님 떠올리면 야한이니

아직 갈 때가 아닌 듯해 나는 차일피일이다

 

 

 

뛰는 여자 위에 나는 詩

 

 

축지법과 비행술

합정동에 이런 간판을 단 학원이 있다. 3층 VIP 노래연습장 위층이다. 『축지비행술』이란 교재는 꽤 비싸서 26000원. 원장님이 시인이라는 데 앞니 두대 건다.

 

제2회 정순왕후선발대회 왕비 3학년 문유니

풍문여자고등학교를 지나는데 교문 위에 플래카드가 이랬다. 열일곱에 단명한 단종의 아내로 육십여년간 과부로 살았던 정순왕후의 제1조건은 충절과 절개였다. 2009년용 정순왕후는 달랐다. 연기력을 겸비한 용모단정한 자, 왕비역할 수행 가능자, 장기 기능 소유자. 오백여년 전에 죽은 왕이라도 취향은 변하는 게 당연할 터, 내년에도 종로구 문화관광협의회 長님은 말씀하시겠지. 왕비가 되고 싶어? 왕비가 되고 싶으면 연락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모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시집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편집기술론 수업시간이었다. 기말고사 과제로 한 학생이 신 패션트렌드 보고서를 제출했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집이다’라는 제목이었다. 막상 선 자리에 나가보니 아들 하나를 둔 개띠 남자의 인상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계, 계, 계자로 시작되는 단어를 넣어보자는 패러디 놀이 속에 내가 살짝 계모에서 뜸을 들이자 빤히 나를 쳐다보는 학생들이 있었다. 계란이나 계륵에서 멈출 줄 모르는 게 이렇듯 내 꿍꿍이의 전모다.

 

대하도 대하지만 詩도 詩다

상수동 단골 횟집에서였다. 대하가 한철이었다. 프라이팬 위에 소금이 솜이불처럼 두텁게 깔렸고, 쿠킹호일 위에 대하가 놓였다. 어제까지는 그랬다. 오늘도 상수동 단골 횟집이다. 대하는 여전히 한철이다. 프라이팬 위에 소금이 솜이불처럼 두텁게 깔리고, 쿠킹호일 위에 대하가 놓이는데 어제와는 다르게 소금이불 속속들이 메추리알이다. 적절한 간으로 잘잘 구워지는 메추리알을 살살 까먹는 재미, 이를 일컬어 알 먹고 대하 먹고라고 한다면 남은 건 똥 쌀 일 뿐이겠지만 버려지는 소금이 어제보다 덜 짠 소금기라고 한다면 다분히 똥 쌀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서 나는 얇게 저민 마늘을 잔뜩 올려 바싹 구워보는 것이다. 마늘 훈기 쐰 대하구이, 이를테면 메뉴판에 new로 등재될 때의 이야기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