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 창비에 바란다
더욱 많은 벗들과 함께 걷는 창비가 되길
서울시 노동권익센터 류한승 팀장 인터뷰
류한승 柳漢承
서울시 노동권익센터 기획협력팀장. tehanu@labors.or.kr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jwhyi@naver.com
서울시 노동권익센터 기획협력팀장 류한승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등을 거치며 비정규직운동에 잔뼈가 굵은 활동가다. 나는 대학 입학 후 동아리 술자리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때 그는 학교에서 잘린 뒤 현장에 뛰어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그는 내가 아는 어떤 활동가보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은 사람이기도 하다. 술자리에서 그의 독서담에 매료되어 귀를 기울이던 밤이 여전히 추억처럼 남아 있다. 나는 운동성의 회복과 현장성의 강화를 천명해온 창비가 현장에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와닿을지 자못 궁금했다. 인터뷰 기회가 주어졌을 때 활동가의 목소리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 때문이었다. 이런 기대를 안고 오랜만에 류한승 선배를 만났다.
내가 창비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던 새내기 시절, 그는 자신의 독서이력 첫머리에 자리잡은 창비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나는 자리에 마주 앉은 그에게 다시금 그 이야기들을 풀어달라 요청했다. 그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창비와의 인연을 들려주었다.
제가 돌이 되기 전에 부모님이 이혼하시는 바람에 저는 경북 칠곡에 있는 외가에서 자랐어요. 아주 시골이었죠. 아이를 돌봐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냥 골방에서 책만 읽었어요. 일종의 은둔형 외톨이에다가 활자중독이 겹친 상태였지요. 근데 시골집에는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 우연히 다락방을 뒤져보게 됐어요. 이모들이 대학 때 보던 책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는데 거기서 『창작과비평』(이하 ‘창비’로 통칭)을 처음 발견했어요. 거기 실린 평론이나 논문은 당연히 어려워서 못 읽었지만 소설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아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송영(宋榮)의 「선생과 황태자」(1970년 가을호)와 황석영(黃晳暎)의 「객지」(1971년 봄호). 지금 돌이켜보면 그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한데도 신기하게 가슴에 무언가가 깊이 남았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중학생 때 대전으로 이사 가게 되었는데 거기 지금은 없어진 대운서점에서 황석영의 『장길산』을 반값에 파는 걸 발견했어요. 창비에서 황석영이라는 이름을 봤던지라 냉큼 샀지요. 그후로 100번 가까이 읽은 것 같아요. 거의 모든 장면을 외우다시피…… 그게 제가 기억하는 창비와의 첫 인연이네요. 그때 이후로 서점에 갈 때마다 창비를 들춰보면서 심정적으로 매우 가까이 느꼈던 것 같아요.
대학에 들어와 창비를 읽기 시작했다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매우 일찍부터 창비를 접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과도한 ‘선행학습’의 폐해였을까. 그와 창비의 인연은 행복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더이상 창비를 읽지 않았다고 했다.
창비를 안 보게 된 건 『노동해방문학』(1989~91)을 접하면서부터였을 거예요. 당시 저는 ‘고운’(고등학생 운동권)이었는데, 87년 이후 쏟아져 나온 레닌, 맑스, 스탈린 등의 원전을 읽으면서 관념적이고 급진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었죠. 그때 『노동해방문학』에서 자유주의문학을 비판하는 정남영(鄭男泳)의 글을 읽었는데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닿더라구요. 제가 거기 감명을 받아서 다른 친구들한테도 다른 거 볼 필요 없다, 『노동해방문학』만 보자, 그랬죠. 그리고 그 당시 인문사회과학서점 소식지를 보면 노골적으로 ‘원전을 읽자’ 그러면서 앞서 얘기했던 레닌이나 맑스의 글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때는 사회과학의 시대였고 90년대에도 그런 흐름은 이어지는데 그때 저처럼 한국사회에 대한 이론적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동향과전망』 『경제와사회』 『이론』 같은 계간지를 읽었고 월간지로는 『말』이나 『길』을 읽었죠. 그러면서 창비와는 더욱 멀어졌어요. 문학잡지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순수했기에 급진적이었지만 책에서 얻은 지식만으로 얼마든지 혁명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변모가 독서이력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남한의 독서문화사에서 가장 이채로운 부분임이 분명했다. 창비가 겪어온 역사적 부침 역시 그 독서문화사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서가에 반드시 꽂혀 있을 정도로 각광받다가 이후 급진적 변혁론에 의해 매도되었던 창비는 출판사로서 여러 뛰어난 단행본을 선보이며 당대의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켜왔다. 류한승 역시 창비에서 낸 책에 대한 강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저는 창비에서 나온 책들을 통해 굉장히 많은 걸 얻은 사람이에요.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사람은 당연히 리영희(李泳禧)겠죠. 리영희의 작업은 아주 좁은 수준의 민족주의에 갇혀 있던 제가 처음으로 세계적 차원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어요. 시야가 확장된 거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시집은 정희성(鄭喜成)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였고, 박석무(朴錫武) 선생이 번역한 정약용의 『다산산문선』(1985) 역시 매우 아끼는 책이에요. 월러스틴(I. Wallerstein)도 빼놓을 수 없는데 94년도쯤인가 월러스틴이 대학가를 휩쓸었어요.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전망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요. 저 역시 열심히 읽었죠. 그리고 와다 하루끼(和田春樹)의 『역사로서의 사회주의』(1994)와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 등이 쓴 『몰락 이후』(1994)도 기억나네요. 특히 와다 하루끼의 책을 통해 한국현대사가 갖고 있는 복잡성과 중층성을 심각하게 느꼈어요. 노마 필드(Norma Field)의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1995, 개정판 2014)와 개번 매코맥(Gavan McCormack)의 『일본, 허울뿐인 풍요』(1998)는 리영희 선생의 저작과 함께 제 시야를 동아시아로 확장하는 계기가 된 책이었죠.
그는 이 책들 외에도 이성형(李成炯)의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2001)와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의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2003)를 ‘강추’했다. 지식인으로서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면서도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로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는 것이 추천의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최근에는 창비에서 나온 책을 많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는 월러스틴처럼 누군가를 한국에 소개해서 지식계가 돌려 읽고 그걸 통해 전망을 찾을 수 있는 때는 아닌 것 같아요. 현재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론적 참조점을 찾기도 어렵고요. 더이상 책이나 이론을 통해 그런 걸 좇는 일의 한계를 직감한달까요.
비록 창비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뼈아프게 다가온 대목이기도 했다. 동시에 우리 지식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말이었다. 좋은 책과 이론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우리 삶의 현장과 유리된 이론과 책은 현실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파악을 오히려 가로막는 게 아닐까. 분명 새로운 책과 이론에 매료되던 때가 있었다. 우리의 문제를 단칼에 풀어줄 명쾌한 답과 논리를 갈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가 발 디딘 ‘현장’에 대해 도식적이고 관념적인 접근에 빠질 위험도 커졌다. 우리의 문제를 설명해주고 해결해줄 이론을 밖에서 구하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장에 밀착하는 일, 창비식 표현에 따르면 ‘운동성과 현장성의 회복’일 것이다. 과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일까. 그에게 최근 창비를 일독한 소감을 물었다.
저는 솔직히 재미있게 읽었어요. 잡지가 가져야 할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문학평론은 관심이 없어서 따라 읽기 힘들었지만 소설이나 촌평은 재미있고 유익하게 잘 읽었어요. 논단과 좌담도 흥미로웠고요. 그런데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건 문해력을 갖춘 사오십대 지식계층 아저씨 독자들을 위한 잡지구나. 제가 마흔네살이거든요. 그러니까 저 같은 아저씨들이 보기엔 괜찮아요. 그런데 젊은 층에는 소구력이 많이 떨어질 것 같아요. 예전에 한 계간지가 있었는데 처음에 거기 실린 글들이 너무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편집진이 고민을 했대요. 상큼하고 발랄한 필자를 섭외해서 청탁을 한 거죠. 근데 그 필자들이 잡지를 훑어보고는 ‘아, 여긴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해서 그 딱딱하고 재미없는 스타일로 원고를 써서 보내줬다는 거예요. 창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고 봐요. 어느 필자가 들어와도 기성의 스타일에 대한 눈치를 보는 거죠. 코너도 다양하고 필자도 다양한데 그 다양성에 비해 개성이 잘 살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창비는 정치적·도덕적 정당성과 미학적 성취를 두루 아우르는 ‘창비식 글쓰기’의 지속과 갱신을 도모해왔다. 하지만 류한승의 말을 들으며 이러한 지향이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기 때문에 창비가 변해야 한다거나 창비가 새로운 개성을 모두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근데 이건 비판이라기보다는 숙제인 것 같아요. 가령 민주노총 조합원 평균연령이 지금 사십대 중반 정도거든요. 계속 높아지고 있어요. 제가 계속 주장했던 게 민주노총 내부에 청년위원회를 만드는 일이에요. 최근에 청년사업을 담당하는 부서가 생긴 걸로 알고 있어요. 참여연대도 마찬가지로 청년참여연대를 출범시켰고요. 한국처럼 시공간적으로 압착된 근대화를 경험한 곳에서는 세대 간 역사사회적 코드가 현격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걸 한데 다 담는 건 불가능하죠. 필요하면 새로 만들고, 또 새로 생겨나려는 움직임을 복돋워주면 돼요. 오히려 다 하려고 하는 게 과욕이겠죠. 창비도 처음엔 청년들이 시작했던 거잖아요. 민주노총의 한계에서 청년유니온이 탄생했듯이 이러한 창비의 한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들이 활동할 매체와 공간이 튀어나와야 한다고 봐요.
창비는 창간 50주년을 맞아 ‘젊은 문예지’를 발간하겠노라 약속했다. 거기에는 계간 『창작과비평』이라는 ‘내용형식’으로 온전히 끌어안을 수 없는 새로운 목소리와 문제의식이 존재한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이리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같은 혁신의 움직임은 그것대로 독려하면서 그것과 별개로 기존의 창비를 세대와 계층, 성별에 관계없이 뜻있는 지성 모두에게 소중한 공간으로 다시 다가오게끔 만들려는 노력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창비가 창간 50주년을 맞아 결의한 혁신의 방향에 그러한 노력들 역시 담겨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창비의 노력을 가까운 곁에서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마지막 질문은 창비의 노동 담론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 창비 지면에서 노동현장을 정면으로 다룬 글을 찾아보기 쉽지 않기에, 활동가의 입장에서 아쉽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아쉽고 미흡하단 생각은 들죠. 그런데 이걸 단순히 창비의 한계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더 크게 보면 한국 민주노조운동 역량에 한계가 있는 거죠. 지금 민주노총의 이론적, 정책적 기반이 굉장히 취약해요. 아마 전세계 내셔널센터 중에 민주노총만큼 정책 쪽에 토대도 없고 투자도 안하는 곳이 없을 거예요. 정책연구원에 세명인가 있을 거예요. 노동계에 있는 사람들 다 긁어모아도 40명이 안될 거고요. 민주노조운동을 30년 했는데…… 그러니까 당연히 매체에서 노동 관련 의제를 다루고 싶어도 그런 걸 심도있고 수준있게 풀어낼 자원과 역량이 없는 거죠. 그러면 당장의 싸움은 이길지 몰라도 길게 봐서 진지전을 펼치는 건 굉장히 어렵죠. 그런 점에서 비록 부족하나마 저는 창비가 이제까지 진지전을 위한 세력 결집의 훌륭한 장이 되어왔고 앞으로도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개혁세력이 보수기득권세력에 비해 인적, 물적 토대와 역량이 떨어지는 것은 현재의 지형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노동 분야는 그 정도가 특히 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노동’이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가장 첨예하고도 구체적인 모순이 집적되는 장소임을 생각하면, 더 나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데 있어 결코 쉽게 치부할 수 없는 문제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당위적 주장만으로 사정이 나아지지 않으리란 걸 우리는 잘 안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일종의 ‘진지전’이라고 할 때, 단숨에 전세를 역전할 가능성에 집착하기보다 일상에서 한발자국의 진보를 이루어내려는 노력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새로운 창조와 저항의 거점’을 자임해온 창비가 그 노력과 마음가짐에 결코 소홀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모처럼 창비를 사이에 두고 긴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나 역시 새로운 창비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생각에 골몰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었지만 한가지는 명확했다. 그 길은 창비 홀로 걷는 길이 아니라 나란히 곁에 선 독자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는 것. 그 나란히 설 친구들은 반드시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