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  제16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한연희 韓姸熙

1979년 경기 광명 출생. hanyama@hanmail.net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여름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강, 누군가와 마주 잡은 손의 온기,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서 누운 밤, 쟁반 가득 쌓인 귤껍질들이 말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은 창을 열고 나를 눅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이끼처럼 자꾸 방안에 자라는 냄새들이, 귤 알갱이처럼 똑똑 씹히는 말들이 혓바닥에서 미끄러진다 곰이 그 위에 누워 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곰이, 수박을 우걱우걱 먹어치우던 곰이 나를 쳐다본다 곰에게서 침 범벅의 수박물이 떨어진다 여기가 동물원이 아니라 내 방이라는 것을 알아갈 때쯤, 나는 혼자 남아 8월을 벗어난다

 

그러니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차가운 방바닥에 눕는 것을 좋아한다 피가 나도록 긁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들이 땀띠처럼 늘어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여름을 죽도록 좋아한다

 

햇빛이 끈질기게 커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잎사귀의 뒷면과 그늘 사이를 벌려놓는다 먹다 남긴 수박껍질에 초파리가 꼬인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림자를 내쫓는 중이다 쌓인 빨래더미 위에, 식은 밥그릇 위에 고요가 내려앉는다

 

그러나 의지와 상관없이 종아리에 털들이 자라나는 걸,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는 걸, 화분의 상추들이 맹렬하게 죽어가는 걸 여름은 내내 지켜보고 있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쏟아지는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다

 

 

 

파프리카로 말하기

 

 

도마 위에 파프리카 하나가 놓여 있다

일요일이 건네준 파프리카

이상하게 커다란 파프리카

파프리카를 씹어 먹으며 파프리카 파프리카아프리카

자꾸자꾸 불렀다

뭉툭한 발가락들이 사라질 때까지

새로운 뿔이 생겨날 때까지

이상하고 아름다운 털들이 자라날 때까지 파프리카를 씹었다

달력에 표시한 오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

축하해 축하해 나를 제대로 잊기로 하자

멀리 떠나 집으로 돌아오지 말자

엄마는 고장난 냉장고 슬리퍼는 히스테릭한 강아지

아빠는 죽은 심장의 태엽장치 아기의 혓바닥을 먹은 나는 눈알을 도려낸 천사

새롭다는 기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상한 작용을 만들어

폭주족 천사가 되어 영혼을 마구마구 더럽히자

파프리카는 어디서 태어나서 언제 죽어가는 것일까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일요일들을 견딘 것일까

모래밭을 뒤적이다 얼굴을 든 저 개는 짖어본 적이 있을까

평원을 내달리는 치타를 본 적도 없는 내가

달려나간다

천사의 기도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파프리카를 구하시옵소서

 

 

 

지갑 두고 나왔다

 

 

엄마를 두고 나왔다

집에서 한참을 멀어진 후에야 깨달았다

손안에 들어 있어야 할 엄마 손이 보이질 않았다

봄이 온 것 같았는데 꽃이 보이질 않았고

비가 온 것 같았는데 물웅덩이가 고이질 않았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최대한 느리게 걸으며

엄마와 화분은 얼마나 다른가 하고 생각했다

 

소파에서 식탁으로 침대로 화장실로 화분을 자꾸 옮겨놓았다

시들어버린 엄마를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했지만 화분은 죽고 말았다

 

엄마, 나도 엄마야

엄마가 하기 싫은 엄마야

벤치 같은 데다 흘려놓고 깜빡한 우산처럼 시시해져버린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지갑 속에 넣는 걸 깜빡한 동전들이 가방 속에서 짤랑댔다

걸을 때마다 엄마, 엄마 부르는 것 같아

목이 자꾸 말랐다

 

세탁소에 걸린 셔츠들 사이에서 엄마 원피스를 보았다

슈퍼마켓 앞에서 식료품을 고르는 파마머리 엄마를 보았다

철물점에서 모종삽과 퇴비를 사는 엄마 손가락을 보았다

 

그러나 가방 속을 아무리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생수 한병을 사는 나는, 결코 엄마가 아닌 나는

 

어, 지갑 두고 나왔다

계산대 옆에서 훌쩍 자라난 딸이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엄마는 어디에 가 있는 거야?

 

 

 

자주 틀리는 맞춤법

 

 

일기 속에 오늘을 틀리게 써넣었다. 언니는 자주 모서리에 부딪힌다 나는 현명하다 골목은 흔한 배경이다 옆집 개는 죽는다 똥개야 살지마 언니야 던지지마 휘갈겨 쓴 문장들을 언니는 몰래 훔쳐 읽었다. 그리고 화를 냈다. 낮은 계단에게나, 새는 물컵에게나, 쭈그려 앉은 개에게나. 길 한복판에서 내게. 너는 왜 늘 네 멋대로니?

 

곧 바뀔 거라고 믿은 빨강은 멈췄다. 행인들이 그냥 건너가버렸다. 언니가 틀렸다. 나는 운이 많은 아이니까. 셋만 세면 언니가 다시 돌아올 거니까. 나는 숫자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사거리에서 언니가 뒤돌아봤다. 내가 알고 있던 언니는 없었다. 언니야 괘찬지마 언니야 도라오지마 어떡게 어떻해 멈추지마

 

건너편 간판엔 각종 찌게 팜니다 어름있읍니다 나으 죄를 사하여주십시요 옳바른 행동교정 이상한 글자들이 좋았다. 내 이야기가 비뚤어질수록 좋았다. 아무도 날 교정 못하는 게 좋았다. 정답과 멀어진 내가 좋았다. 틀린 간판은 어디에든 걸려 있고. 언제든 글자를 거꾸로 읽을 수 있으니까. 사라진 언니를 떠올리는 대신 오늘의 날씨를 읽었다.

 

맞춤법은 틀렸어, 기상예보는 틀렸어, 앨리스가 틀렸어, 대통령은 모르지, 언니가 옳았지, 백과사전이 옳았지, 철학자마저 옳았지, 그러니 내가 틀렸어, 뭐가 틀렸는지 몰랐고 아무도 틀리지 않았으니까 옳았어, 틀렸으니까 모르고 모르니까 웃기고, 불가능하게 구름이 툭 떨어져버리고, 꽉 막힌 도로에 싱크홀이 생겼다. 이제 나는 영영 틀린 사람이 되었다.

 

 

 

코 파기의 진수

 

 

어둠은 때론 어둠을 빨아들인다, 그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녀와 나는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사물함을 후비고

먼지를 닦아낸다

 

대걸레로 딱정벌레를 세게 짓눌러버린 일, 그건 좋은 징조다

책가방들을 모아 소각장에 집어넣으니 불길이 치솟는다

 

언제 우리는 악마를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코로 숨을 쉬어야 하니까 정성껏 쓸어놔야지 하는 마음

하루에 수십번씩 코를 풀 때마다 어서 코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사물함이 열릴 때마다 잿더미로 가득 채워놓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들이 사물함에 죽은 새를 넣어둔다

깃털과 발톱들, 피 묻은 팬티와 불길함이 튀어나오자

담임은 사물함을 하나둘 없애버린다

 

서랍 안에 얼마나 많은 반성문을 채워야 이 세계를 떠날 수 있을까

 

그녀는 우아하게 코딱지를 튕기며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홀로 책상에 엎드려 코를 열심히 팠지만

친구들의 무관심 속에서 코피만 쏟아내다니

 

그건 좋지 않은 일이다

 

가끔씩 그녀를 찾으러 콧구멍 안으로 들락날락거린다

왜 모든 사물함은 제대로 된 마음과 연결되지 않는 걸까

재채기를 할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손가락 하나가 콧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악마의 예감이 콧속에서 마구 자라나거나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던 사물함 열쇠가 나온다거나

 

체육복을 벗을 때마다 맨살 냄새를 맡으면

어쩐지 나를 벌리고 그녀가 기어 나올 것만 같다

 

그건 좀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