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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소연 金素延 시인.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이 있음. catjuice@empas.com
박 준 朴 濬 시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등이 있음. mynameisjoon@hanmail.net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김소연 이번호 문학초점에서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감수성을 발명하고 있는 박준 시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기대가 되는 한편 걱정이 앞섭니다. 오래 알고는 지냈지만 문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로 나누어온 사이라, 정색하고 차분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더군다나 아름답게 말해야 할 것만 같아 더 긴장이 됩니다.
박준 저는 이미 정색을 하고 앉아 있습니다.(웃음) 이런 자리에서 두분을 뵙게 되니 낯설기도 하고 더 반갑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백지연 마침 오늘 다루는 책들의 주요한 화두가 ‘연애’인데요. 박준 시인과 무척 어울리는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웃음) 함께 나눌 대화가 기대됩니다.
유진목 시집 『연애의 책』
김소연 유진목 시인은 등단절차를 거치지 않고 첫 시집인 『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문학과죄송사 2015, 이하 『강릉』)를 독립출판물로 출간했는데요. 『연애의 책』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시집이어서 의미가 깊습니다. 지면에 발표한 작품들을 고르고 모아서 한권의 시집을 꾸리는 통상적인 절차와 다르죠. ‘연애의 책’이라는 제목도 흥미롭게 다가와요. 지금 이 시대에 이렇게 ‘연애’를 전면적으로 내세워서 일관성있게 쓴 것도, 용기나 절박함 아니면 할 수 없는 작업인데요. 시를 읽는 기쁨을 한껏 느끼게 하는 좋은 독서체험이었습니다.
백지연 저도 꾸밈없는 진솔한 시를 만난 느낌이 좋았습니다. 요즘처럼 사랑 이야기가 넘쳐흐르면서도 진지하게 ‘연애’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때가 또 있을까 싶은데요.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혐오와 각종 폭력과 성 추문이 미디어를 장식하는 시대에 순정하고 진심어린 이야기를 만나는 것 자체가 낯설기도 하고 소중하게 다가왔어요.
박준 말씀대로 유진목 시인은 각종 문예지의 청탁 없이, 그리고 문단의 평이나 독자들의 눈에서 비켜서서 오롯이 혼자 한권의 시집 분량을 자유롭게 써왔을 텐데요. 그래서 저는 시의 첫 문장이 시작되고 종결되기까지의 과정이 기존의 젊은 시인들하고는 조금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시를 쓰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겪는 마감과 독촉의 공포도 없을 거고요.(웃음) 반면 무엇을 쓰는 일의 지난함과 외로움은 더 크게 느꼈을 테고요.
백지연 소설로 보면 장편에 해당하는 스토리텔링을 지닌 건데요. 시적 상황들이 서사성을 지니면서 매끄럽게 읽히고, 화자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친절하게 서술하는 방식도 흥미로워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무언가를 아낌없이 내주면서도 자기존중의 균형감각이 있고요. 특히 함께 밥을 차려먹고, 살을 부비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삶 속의 연애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김소연 육체적인 감각을 잘 살릴 뿐 아니라 시의 장면들을 환기하는 이미지가 선명해요. “어느 날은 당신이 불쑥 내 방으로 들어오기도 한다/그냥 오기 뭐해서 귤 한 봉지를 손목에 걸고”(「사랑의 방」) 같은 구절을 보면 이미지가 선연하고요. 사랑하는 사람을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빛나게 드러난 대목입니다. 화자가 아니라 시 속 타자를 이토록 생생하게 제시해놓은 시는 처음이다 싶어집니다. 독자가 시인의 시에 동참이 안될 수가 없는 중요한 덕목이라 여겨져요. 영화 한편을 보는 것보다 더 압도적이었습니다.
박준 저는 유진목 시인이 다루는 작은 이야기들이 좋았어요. 「낮잠」은 별다른 일 하나 없는 상황에서 화자가 낮잠을 자고 여름을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식물의 방」에서는 화분을 키우는 정적인 이미지와 세밀한 일상의 풍경이 쭉 이어지는데요. 유진목 시인은 일상의 작은 장면들을 그러모아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데 참 능한 분 같습니다. 이 시들을 가만히 읽고 있으면,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작은 일들만 끝없이 벌어지다가 끝나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것이 그리 나쁘지 않네,라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어요.
백지연 개방성과 유연성을 지향하는 부드러운 화법 아래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의 현실이 있어요. 시에서 ‘당신’을 대하는 화자의 감정도 복잡합니다. 날을 세우는가 싶으면 어루만지고요. 당신은 매우 무심하고 원망스러운 사람인데, 화자의 유연한 시선 속에서 이해와 연민을 얻게 되죠. 상처입은 사람들에게는 삶이 그렇게 누추하지 않다는 위로를 주고, 떠난 사람들에게는 뭔가 변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준달까요. 남성 독자들이 읽으면서 더 많은 위로를 받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웃음)
김소연 시가 드러내는 기묘한 기다림의 모습 속에 여성상의 익숙한 페르소나가 있죠. 김소월(金素月) 시의 정서도 떠오르고요.
박준 꽃 진 자리에서 떨어진 꽃잎을 하나하나 세고 있는 것 같은, 다소 수동적인 여성화자의 발화방식이 낯익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격렬한 파토스(pathos)가 섞여 있어요. 첫 시집인 『강릉』의 뒷표지에 “나는 너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단 한줄만이 적혀 있어 놀랐어요. 그리고 이번 시집의 첫번째 시 「신체의 방」에는 “나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라는 구절이 나오고요.
김소연 상대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도 사랑의 본질 아닌가요.(웃음)
박준 상대의 손에 죽고 싶어하는 것도 사랑의 본질 같아요.(웃음) 『강릉』과 이번 시집의 관계도 흥미로워요. 첫 시집의 시들을 일부 선별해 이번 시집에 재수록했는데요, 「잠복」과 「낮잠」은 두 시집 모두 1부의 두번째와 세번째 순서에 수록되어 있어요. 반면 『강릉』의 1부 첫번째 시였던 「사랑의 방」은 이번 시집에서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고요. 조금 먼 이야기지만 처음이 곧 끝이 된다는 것. 이것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 같네요.
김소연 유진목 시를 읽어보면 기존의 시들과 오랫동안 소통해온 친근한 지점들이 있어요. 81년생 시인인데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인 70년대에 쓰인 것처럼 재구성한 시들이 있어요. 부모를 페르소나로 자신의 출생 이전의 서사를 에세이처럼 구축했는데요. 유희경(兪熙敬)의 「면목동」이 떠올랐습니다. 나희덕(羅喜德) 시가 가진 포용의 서사도 있고, 김언희(金彦姬) 시의 그로테스크하고 냉정한 시선도 있고요. 이성복(李晟馥)과 박준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어요. 시인들이 즐겨 사용해온 화자들이 유진목 시 안에서 융합되면서 기존의 목소리들과 적절하게 거리를 두기도 하는 지점이 낯익음과 낯설음의 양가성을 모두 지닌 대목 같기도 합니다.
백지연 「동산」과 「동지」에서는 김애란(金愛爛) 소설의 감각적인 화법이 확 느껴졌고요. 그때는 아, 두 작가가 비슷한 세대지, 하고 실감했어요. 아쉬운 건 시들이 익숙하고 매끄러운 만큼 시인 고유의 개성적인 지점들이 잘 다가오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결합된 가족사 이야기나 출생을 그리는 어두운 이미지들이 특이했는데 시집에서 크게 강조되진 않았고요. 『강릉』에 실린 「절도」라는 시를 보면 극적 형태의 서사성을 실험하는 지점도 엿보였는데요. 『연애의 책』에서는 ‘연애’라는 키워드로 집중돼서 그런지 이런 실험적 모습들이 잘 드러나지 않아요.
박준 저는 개별 작품에 주목하기보다는 여러 시들을 연속되는 ‘하나의 이야기’로 읽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저를 포함한 많은 젊은 시인들은 청탁을 받고 발표하는 지면의 축적을 통해 이전의 시와 현재의 시 사이에 생기는 균열을 보게 되는데요. 이와 반대로 유진목의 시는 일정한 대상을 둔 발화를 한결같이 이어나가고 있어요. 작품들의 정서가 자주 겹치기는 하지만 이 덕분에 시 한편 한편을 떠나 한권의 시집을 유기적으로 엮어내고 또 하나의 정돈된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소연 시를 발표하고 나면, 시인은 그 세계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와 부끄러움이 생기죠. 그런데 유진목 시인은 한편씩 한편씩 발표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거울의 방 같은 데서 배부르게 한 세계를 일궈낸 다음에야 자기를 돌아보는 듯합니다. 그 점이 저는 괜스레 부럽기도 했습니다.
박준 덧붙여 한편의 시를 쓰는 일을 투수가 공을 던지는 일에 비유하자면요, 지금까지 직구를 많이 던졌으니 이번에는 변화구를 던져야 하나? 하는 물음을 스스로 갖게 돼요. 물론 이 변화가 자연스러운 경기의 흐름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만약 어떤 작위나 지나친 자기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 아니지요. 새로 던진 변화구가 원래의 직구보다 위력이 떨어지는 것이라면 더욱 좋지 않고요.
백지연 그런데 이제 유진목 시인도 청탁받고, 시를 발표하게 되면 이런저런 반응을 체감하지 않을까요? 원고 마감의 공포도 느낄 거고요.(웃음)
김소연 청탁은 하지 말고 고료만 지급하면 어떨까요?(웃음) 보호구역으로 지정해서.
백지연 자기만의 세계에 틈이 생기고 외부의 비평적 시선이 개입하는 체험도 필요할 듯해요. 자신의 시에 영향을 준 시적 방식이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깊어질 수 있고요.
김소연 독립출판의 형식으로 시작한 이 시인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죠. 기존의 시인들과 같아지든 달라지든 그것도 작품들을 보면서 차차 생각할 일이고요. 그런데 간간이 연애시편 아닌 시들이 있어요. 그런 시가 참 좋더라고요. 「매장」이라든가 「미선나무」 같은 시요.
백지연 그 시들도 좋은데 연애시들의 느낌이 강렬하긴 합니다. 「사랑의 방」은 연애시의 정석 같고, 「동지」는 솔직하고 감각적으로 연애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느낌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어머니 서사의 기원을 엿본 「반송」이 기억에 남아요.
김소연 인터넷 공간에서는 「반송」의 한구절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어요. “엄마는 내가 제일 처음 떠나온 주소입니다”라는 구절이 여러가지 캘리그래피로 옮겨지던데요.(웃음)
박준 유진목 시인의 다음 시집이 정말 궁금해져요. 시집은 50여편의 시를 묶어 펴낸 것이다,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시인 자신의 정서와 세계를 가장 내밀하게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새삼 보여줬으니까요. 앞으로 어떤 창작환경에서 시를 쓸지 또 어떤 매체를 통해 작품을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쓰는 시간들이 시인에게 조금 덜 외로운 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소연 시를 쓰고 살고 있다면 모두가 시인이지 않을까 생각만 해오고 있었는데, 유진목 시인을 발견하고서 더없이 반가웠어요. 만나본 적도 없이 호기심과 애정을 갖게 되어 더 귀한 인연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묘한 호기심도 발동되고요. 앞으로도 시인이 자신의 고유성을 잘 지켜나가면 더 기쁠 것 같습니다.
박승민 시집 『슬픔을 말리다』
박준 박승민(朴勝民)은 첫 시집인 『지붕의 등뼈』(푸른사상 2011)에 이어 이번 시집에서도 현실에 대한 애정과 소외된 노동의 문제, 자연세계에 대한 관심을 꾸준하게 드러내는 시인입니다. 박승민의 시는 삶의 숱한 장면들이 시라는 형식을 통해 발화될 때 생기는 생경함과 섬뜩함을 잘 간직하고 있어요. 삶과 시를 거짓 없이 연결하는 과정에서 드는 시인의 품과 고민, 건강한 긴장감도 잘 느껴지고요. 바로 이러한 지점들 덕분에 기존 서정시들이 갖고 있는 안온함을 넘어설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소연 말씀대로 어떤 경향이나 관습에 갇히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노력한 흔적이 느껴졌어요. 시를 한편 한편 정성을 다해 쓴다는 게 역력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연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적 틀에 대한 긴장감이 약합니다. 인간의 시선을 씌워서 자연에 대하여 발화해요. 그래서 저는 그런 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2부의 시들이 좋습니다. 좋았던 시는 귀퉁이를 접어두는데, 다 읽고 보니까 거의 2부에 쏠려 있네요.
백지연 정돈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퇴락한 농촌 공동체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로 다가왔어요. 저는 1부의 시들도 좋았는데요, 적절한 균형적 거리 속에서 농촌현실의 모습을 서사적으로 실감나게 포착하고 있어요.
김소연 1부의 시들은 어떤 걸 지향해야 한다라는 감각이 표면으로 돌출한 느낌이 많이 났습니다. 2부에서는 그런 의식적 지향이 자연스럽게 풀어지면서 시의 흐름에 시인이 몸을 맡긴 듯했고요. 이렇게 되면 1, 2부가 다 좋은 시네요.(웃음)
박준 시인이 자기 내면을 이야기할 때는 섬세하고 마음 고운 직정(直情)이 잘 드러나요. 반면 타자와 사회를 얘기할 때는 목소리가 바뀌어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투쟁의식과 일말의 패배주의가 동시에 느껴진다고 할까요. 문제는 시인 내면에서 외부 현실로 나아갈 때 생기는 시적 간극을 무엇으로 메우느냐인데요. 이것을 메우는 표현적 측면은 새롭고 능숙하죠. 물론 이 간극을 꼭 메우고 말겠다는 의식적 지향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요.
백지연 의식적인 지향을 관념적으로 드러내는 시적 진술이 여러 대목에 등장하죠. 시집 제목인 ‘슬픔을 말리다’도 일종의 강렬한 선언으로 읽히는데요, 감상적이고 안이한 정서를 벗어나 새로운 태도로 무장하고 이 타락한 자본주의적 세계에 대응하겠다는 결연함이 느껴져요.
김소연 「꽃 지옥」이라는 시를 보면 세월호와 광화문광장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었겠지만 윤리에 사로잡힌 흔적이 날것처럼 드러나 있어요. 어쩔 수 없었겠다 여겨지는 지점에서 저는 오히려 동료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박준 그 시 바로 앞에 있는 「대구경북」에는 경북 출신 시인의 도리가 나와요. 화자는 “연치와 문중의 계보”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알고 자란 대구·경북 시인의 정신적 토양을 거듭 되새겨보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들처럼/되고 싶어 한 죄/아니 그들인 것처럼/착각한 죄”를 괴로워하죠. 이 도리가 한권의 시집을 세련되게는 못하지만 동시에 시인에 대한 어떤 신뢰가 생기는 지점 같아요. 실패하면서도 메우려 하고, 더 가려고 하고, 도리를 지키려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백지연 결과적으로는 시들이 이런 윤리적 지향에 매이지 않을 때 더 활달한 느낌을 주긴 합니다. 「이칠곡 씨의 어버이날」이나 「본의 아니게 씨」는 관찰자의 시선에 크게 구속되지 않는 생생한 목소리들이 살아나고요.
박준 의식적 지향에 함몰되지 않은 시의 맨얼굴을 계속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붕의 등뼈』도 그렇지만 이번 시집 역시 노동을 형상화하는 장면들이 실감을 줍니다. 시인 개인의 노동이든 공동체의 노동이든 목에 힘 주지 않고 노동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뛰어나요. 어쩌면 80년대 노동문학 운동과 담론이 남긴 여파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우리 대부분은 삶 속에서 노동을 하고 있고, 시인들도 노동을 하며 살지만, 정작 시에서 노동을 다루는 것이 뭔가 쉽지 않은 면이 있어요. 노동을 잘 쓰지 못할 거면 아예 쓰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할까요? 물론 현재 우리의 노동이라는 것이 과거의 노동에 비해 더 파편화된 측면도 있겠지만요. 상황이 이렇기에 삶 속에 스며 있는 노동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발화하는 박승민의 시가 더 귀하게 여겨집니다.
백지연 예를 들면 “넘어온 고구마순을 쳐내는 순실이 아버지의 입이 부어 있다”(「푸른 셈법」) 같은 표현은 아주 생동감 넘치지요.
김소연 황희 정승과 관련된 일화를 ‘고구마순’의 감각과 부어 있는 입으로 포착하는 표현력이 확 다가오죠. 그런데 이런 표현의 새로움도 시 전체를 보면 익숙한 주제의식으로 소환되는 아쉬움을 주긴 합니다. 「조기(弔旗)를 피우다」라는 시에 “위선보다는 위악이 더 인간적인 것 같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저는 위선으로 기울지 않으면서 감각을 더 많이 팽배하게 하는 과정을 박승민 시에 더 많이 기대하고 싶어집니다.
백지연 「맨드라미의 포란(抱卵)」이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새까만 씨를 담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입을 쩍 벌리고 마지막으로 “툭, 목을 꺾는” 맨드라미의 생태를 정말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있어요.
김소연 저도 감탄한 표현이 있는데요, 「늪」에서 “뱀이 늪을 떠나지 못하는 개구리를 한 마리씩 물고 농약거품이 마르고 있는 숲으로 허옇게 사라진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땐 마을은 온데간데없고 녹색 물바다가 낯선 손자처럼 우뚝하다”로 이어져요. 놀라웠습니다.
박준 이번 시집은 여러모로 감각적인 표현들이 돋보이는데요. 다만 서사에 능한 시인인데 두번째 시집으로 넘어오면서 서사보다는 수사가 좀 늘어난 거 같아요.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갔으면 하는 시편들이 많은데 매끈한 수사로 시상을 서둘러 마무리하는 경향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하나의 좋은 서사, 그 자체가 강렬한 이미지이자 메시지가 되는 작품들을 박승민 시에서 앞으로도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언희 시집 『보고 싶은 오빠』
박준 사실 제가 김언희의 이번 시집을 담당한 편집자인데요. 책을 만들면서 첫 시집 『트렁크』부터 시인의 시집을 모두 다시 읽었어요. 그래서 애정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제가 하는 이야기가 조금 편향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용서해주세요.(웃음)
백지연 책은 이미 나왔으니, 지금부터는 무슨 이야기든지 솔직하게 하면 되죠.(웃음) 약력을 살펴보니 김언희 시인이 등단한 지도 벌써 28년째가 됩니다.
김소연 『트렁크』 이후 다섯번째 시집입니다. 비교적 천천히 내신 편이죠. 회의와 변덕 없이 이렇게 강렬한 세계를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박준 이전의 시들과 비교해볼 때 에너지가 떨어지지도 않았고 어떤 변곡점 같은 게 있지도 않아요. 일관된 흐름이 존재하죠. 자기복제라는 뜻이 아니라 주제에 대한 관심이 한결같다는 뜻입니다. 만일 나중에 김언희 전집을 낸다면 다 흩어놓아도 시차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놀라워했어요. 한편으로는 얼마나 강력한 메시지이기에 시간도 개입하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백지연 김언희 시인은 출발점에서부터 격렬한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금기와 억압을 깨는 파격의 언어로 환영받기도 했고, 반대로 여성의 육체성을 상품화하는 시의 전략으로 비판받기도 했어요. 찬사와 비판의 양 극단에서 비평이 행해졌는데요. 자기 세계의 반복이라는 비판은 두세번째 시집에서부터도 등장했던 이야기기도 해요.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도 닫힌 문을 향해 커다란 망치를 계속 휘두르는 시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더라고요.
박준 저는 벽이 부서지지 않는다면 망치질을 계속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만큼 김언희 시인이 맞서고 있는 억압적인 세계가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되고요.
김소연 여성이 겪는 억압적 현실이 그만큼 견고하니까 아직도 유효한 발언이 있을 수밖에요. 특히 강남역 사건으로 대표되는 여성혐오와 차별의 현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여성들의 반응 속에서 김언희의 시집을 새롭게 읽게 되는 현재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백지연 처음 페미니즘 이슈가 대중문화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상황에서는 김언희 시의 도발성과 충격이 돋보였던 것 같아요. 지금 김언희 시를 읽는 코드는 좀더 복잡하고 모호해집니다. 여성현실도 그렇지만 각종 차별과 혐오를 포함한 노골적인 감정들이 사회현상으로 다각적으로 스며들어 있는데요. 김언희 시에서 폭력적 구조를 상징화하고 이에 맞서는 방식들 역시 문학적 매개를 짐작하기 어렵게 현실 자체와 그대로 섞여드는 부분들이 있는 거죠. 결과보다는 과정 속에서 자폭하는 김언희 시의 치열한 방식이 때로는 맞서야 할 세계를 너무 명료한 방식으로 전제하고 진행하는 싸움이 되진 않을지 염려도 되는데요.
박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저는 김언희 시의 ‘반복’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에로티시즘이나 포르노그래피적인 코드를 거침없이 담아내고 발화했던 것 자체만으로 초기 김언희 시의 가치가 획득되었다면 이후에는 같은 방식을 반복하며 새로운 의의를 만들어냅니다. 물론 시인의 발화와 저항은 완강한 금기 자체에 어떤 균열도 내지 못하는, 부딪히고 나동그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지만요.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패배의 역사를 통해 금기가 얼마나 크고 견고한 것인지 선연하게 그려내고 있어요. 최근 시들이 성적 금기나 외설의 상상력을 이전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데요, 김언희 시는 그것을 개인 내면의 불온과 파격에 가두지 않고 인간을 억압하는 근본적인 사유구조의 문제로 끌고 오죠. 그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김소연 그런데 첫 시집부터 따라읽은 독자보다는 이번 시집 『보고 싶은 오빠』를 처음 대하는 새로운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저는 그게 알고 싶어집니다.
백지연 하드코어가 문자적 상상력으로 다가오는 생경함이 있을 거 같아요. 음부, 불두덩, 질구 등등 신체의 각 기관을 거론하는 명명도 그렇고 절단된 신체, 죽음과 시체의 이미지가 시 곳곳에 흘러넘치죠. 억압적 세계를 전복한다는 시적 전략이 전면화되어 있는데 그 프레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독자마다 다를 것 같아요.
김소연 예를 들면 표제작인 「보고 싶은 오빠」에서는 “개새끼”였던 한때의 연인을 조롱하면서 “언제 한번 들러, 오빠, 공짜로 넣어줄게”라는 말로 끝을 냅니다.
백지연 은밀히 속삭이는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오빠’가 대변하는 남성세계를 반어적으로 조롱하고 야유하는 대목인데요. 남성 독자에게는 뜨끔하거나 통쾌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게는 그 풍자와 조롱의 방식이 시원한 느낌을 주진 않았습니다. ‘제자의 일생’ 연작도 그랬고요. 명확하게 남성 독자를 겨냥한 시들인데 여성 독자 개인으로 시를 읽을 때 그 아이러니가 불편했습니다. 시인과 같은 풍자의 시선을 공유하기는 어렵고 또 그 대상이 되는 ‘오빠’의 감정도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공백이 생겨나는 것 같았어요.
김소연 우리는 남성 시인들이 여성적 목소리로 발화할 때는 그것을 쉽게 발견하는 반면, 의외로 여성 시인들이 쓰는 남성적 목소리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쓴 시니까 습관처럼 페미니즘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여성시 중에서도 마초적인 페르소나로 발화되는 시들이 더러 있습니다. 김언희 시의 어떤 대목에서 그런 남성의 목소리를 만나면 저는 시가 처음부터 다시 읽히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백지연 말씀하신 ‘남근적 여성’의 발화는 급진적인 페미니즘 문학에서 구사해왔던 전략 중 하나이기도 하고 김언희 시도 의도적으로 선택한 방식이죠. 외국작가 중에서 옐리네크(E. Jelinek)의 소설들도 떠오릅니다. 음란한 상상과 가부장적 폭력의 발상을 고스란히 되돌려줌으로써 거꾸로 이 세계의 구조적 폭력을 일깨우는 거요. 요새는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해 ‘미러링’이라는 말이 많이 부각되는데요. 김언희 시에 독특한 점이 있다면 그 미러링의 방식에 잘 조율된 리듬과 이미지를 장착한다는 점입니다.
박준 함축적인 비유와 상징, 이미지의 엄격한 선택이 김언희 시를 고유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절제된 외설’이라는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는데요, 김언희 시는 폭력적 외설의 방식을 돌려줄 때 단정한 형식을 고집하는 편이에요. 내용적으로는 잔혹하고 파괴적인 이미지들이지만 상당히 절제되어 있고요. 온갖 외설로 가득한 것 같지만 난잡하지 않아요. 시의 운율과 호흡을 장악하고 조율하는 힘도 굉장하죠.
김소연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시의 고삐를 딱 잡고 가는 방식이에요. 대체로 병치의 방식으로 시가 진행됩니다. 그래서 시의 서두를 읽으면 마지막 연을 미리 짐작할 수 있어요. 이렇게 가다보면 시인의 의도와 달리 자칫 소재주의로 읽힐 위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집에서는 끝부분에 놓인 시 「푸른 고백」이 이런 경향에서 이탈하는 드문 작품이었습니다. 자기의 배를 가르는 장면에서 시작해 단두대 아래 놓인 바구니에 도달하는 시적 흐름이 놀라웠어요. 시집을 읽으면서 반복과 배열 때문에 조금 답답했는데 이 시를 읽고는 기립해서 박수치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시인이 기어이 자기 멱살을 잡고 스스로를 처형하는데,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시집이 나왔구나, 싶어졌습니다.
박준 1990년대 이후 상당수의 페미니즘 시들은 남성적 세계의 폭력을 대척점에 두고 폭로의 방식을 취해왔잖아요. 이후에는 상당수가 타자의 감각을 탐구하며 시야를 넓혀가는 것으로 변모했고 또 대지와 모성의 상상력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 몰두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김언희 시는 그런 시들과 달리 폭로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물론 스스로 처형하고 자발적으로 단절하고 도주해서 남성적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최대한 간극을 벌리고 있어요. 간극을 좁혀 합일된 세계를 만드는 해결방식이 아닌 두 세계의 간극을 더 벌리는 단절을 통해 어떤 돌파구를 찾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김소연 그런데 환멸적 현실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도달한 여기에서 결국 발견된 건, 인간이 혀, 생식기, 유방, 항문을 달고 있는 그런 존재라는 거죠. 정말 이런 거 말고 없는 것일까, 우리 신체에. 이런 회의감을 품게 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백지연 말씀대로 인간을 이루는 핵심은 입과 성기와 항문이라는 것이 결론으로 다가와요. 거기서 더 나아가려면 여성과 남성, 인간과 비인간, 성과 속, 삶과 죽음의 경계를 뚫고, 어떤 초월적 경지나 숭고에 대한 탐구로 향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변화의 징후인지 모르겠는데 「4월의 키리에」를 보면 그런 방향성이 느껴져요.
박준 그러고 보면, 여성의 몸이나 훼손된 신체나 혹은 외설적인 비유를 담은 수많은 시어들이 마초남성의 발화 같기도 하고 억압받은 여성의 발화 같기도 하다가, 이제는 무성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더이상 외설스럽게 느껴지지도 않고 이제는 그냥 신체 자체, 혹은 생명 자체에 대한 질문과 시선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요.
김소연 그러면 김언희 시가 너무 건전해지는 거 아니에요?(웃음) 저는 현재의 세계에서 더 많은 계발과 탐구가 있으면 합니다. 성과 육체에 관해서도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존재하니까요.
박준 「지상의 모든 문」을 보면 그런 무궁무진함이 계속 시도되는 것 같긴 합니다. 시 속의 문 이미지는 김언희 시인이 직접 찾아 합성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백지연 재미있네요. 그런데 이 문에 합성된 성기 사진도 그리스 조각상의 이미지 아닌가요. 김언희 시 특유의 단정함이 있어요.(웃음) 저는 「한점 해봐, 언니」 같은 시가 이색적이고 좋았는데요. 사실 김언희 시를 읽고 있으면 억압적인 세계에 홀로 맞서 싸우는 단독자로서의 여성이 떠올라서 고독해져요. 어머니도, 아기도, 여성 화자 자신도 ‘머리 잘린’ 이미지로 등장하고 갈가리 해체되죠. 자기를 부수면서 가부장적 주체, 남근적 주체와의 싸움을 이토록 오래 지속해온 고립된 여성이 시 속에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여성들이 서로를 보고 말을 거는 시가 나올 때 반갑습니다.
김소연 앞으로도 김언희 시는 변함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계속 갈 것 같아요. 궁금한 것은 그의 시집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읽는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어느만큼 유연해질까 하는 것입니다. 김언희라는 용사가 굳이 이렇게까지 쓰며 싸우려 하지 않아도 될 세상이 쉽게 올 것 같지는 않지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의 수가 팽창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더 고양되는 이런 시대에 맞춤하게 등장한 새 시집이라서 저는 지금 이 시대의 독자들 반응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정지돈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
백지연 『내가 싸우듯이』는 정지돈(鄭智敦)의 첫 소설집인데요. 목차에서도 짐작되지만 정지돈 소설은 수많은 ‘각주’를 변형한 독특한 논평적 에세이를 부각하고 있죠. 소설에 등장하는 책이름이 마치 작가의 수집품처럼 전시돼 있어요. 책을 읽고 있으니 애장품을 모아놓은 방에 친구를 불러 구경시켜주며 뿌듯해하는 수집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박준 만약 제가 그 방에 초대된 친구라는 상상을 해보면요. 진열장 어느 구석에 먼지가 있어 살짝 닦아내려고 할 때, 야, 그 먼지 만지지 마. 천년 전 중세 네덜란드 어느 성에 있던 먼지야,라고 소리치는 수집가의 모습이 떠올라요. 우리가 그 말을 들으면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순간적으로는 어떤 경외가 생기잖아요. 정지돈 소설을 읽으면 어떤 경외와 동시에 강한 의구심이 느껴져요.(웃음) 소설집에 나열된 참고문헌을 보면서 이게 진짜야? 하는 생각도 들고요.
김소연 자료에 대한 과시와 경배가 강한 소설인 건 확실한 듯합니다.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흔들면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해체하는 실험을 수행하면서 인물은 왜 해체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등장인물이 한 인간이라기보다는 관념화된 모델 같아서 창백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박준 기본적으로는 ‘책에 따라 살기’, 혹은 ‘예술—삶의 뒤섞임’이라는 주제를 계속 논평하려는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기호들이 거론되고요. 특히 영화적 상상력에 대한 관심은 정지돈 소설에서 어떤 스타일리시함에 대한 추구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앞에서 유진목 시집이 한편의 영화를 직접 만드는 것 같은 구체성을 준다면 정지돈 소설은 영화를 마니아적으로 비평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산출된 느낌을 주죠. 소설에 간간이 등장하는 회화적인 장면들도 오래된 아트필름의 어떤 장면들을 연상시키고요. 인물들의 창백한 느낌도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백지연 사실 이런 글쓰기를 지향할 때 가장 먼저 해체하고 흔들어야 하는 것이 저자의 권위입니다. 그런데 정지돈의 소설은 논평자로서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고 싶은 기대와 욕망이 우위에 있어요. 급진적인 소설의 미래를 지향함에도 관습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이런 지점이에요.
김소연 수집가가 자신의 수집품을 숭배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모으는 자기 자신을 숭배하면 안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정지돈의 소설이 형식적으로는 전위적일지언정 은연중에 드러나는 작가의 태도는 보수적이라는 인상이 생깁니다. 「창백한 말」은 이례적으로 수집가로서의 저자에 대한 공격을 주제로 삼고 있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의 자기 멱살 잡기가 제대로 이루어진, 균형감을 확보한 소설로 다가왔습니다.
박준 「뉴욕에서 온 사나이」에서 등장하는 장의 역할이 좋았어요. 장은 단기적으로 기억을 상실한 주인공에게 뉴욕에서 쓴 단편소설 「말라노체」의 파일을 찾아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는데요. 이후 주인공의 동성 연인인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도 중간중간 개입을 하지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추방을 당했던 쿠바의 시인 레이날도 아레나스(Reinaldo Arenas)의 전기가 소설 속으로 직접 들어오고 또한 거스 밴 쌘트(Gus Van Sant) 감독의 영화 「말라노체」의 정서 위에 서사를 흐르게 하면서도 장이라는 인물을 통해 픽션과 팩트를 통제하고 재배치하고 있어요.
백지연 「창백한 말」에서도 장의 역할이 흥미로워요. 관념적이고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장이라는 인물이 스킨헤드에게 급습당하는 내용인데요, 장의 허무한 죽음은 저자의 죽음으로도 다가왔어요. 온갖 폼을 다 잡고 허무한 척하며 주변 사람에게 시비를 걸다가 한순간에 쓰러지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현실의 습격이고, 소설의 습격이기도 한 거죠. 이 작품을 보면서 정지돈 소설의 각주들이 결국 인상적인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냈구나 싶었어요.
김소연 「창백한 말」이 좋긴 하지만 이 작품은 정지돈의 세계에 한해서는 장점보다는 실수로 다가옵니다. 인물을 설정할 때 「건축이냐 혁명이냐」도 그렇고 「창백한 말」에서도 인물의 멜랑꼴리한 측면이 시대와 어울림이 있게 출발합니다. 그런데 인물들에 감정을 불어넣는 대목보다는 정보와 자료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질주하는 방향이 정지돈 소설다운 거라는 기준이 생긴 탓 같습니다.
백지연 실수라기보다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세계에 맞닥뜨린 결과가 아닐까요. 각종 자료를 빙빙 돌면서 논평도 섞으며 써왔지만 결국 소설의 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현실이 있는 거죠. 저는 이 지점에 정지돈 소설의 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요. 물론 자료의 수집과 배열에 심취한 현재를 보면 이러한 시도를 지속적으로 추구할지는 모르겠어요.
김소연 ‘찾아보기’를 보면 각주가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방대하게 나열된 이름을 그냥 훑어만 보라는 거죠. 작품별로 각주를 모아주어야 독자도 재구성된 경로를 비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텐데, 결국 독자에게 각주의 회로에서 꼼꼼하게 따져 읽는 것을 포기할 것을 권하고, 각주의 방대함에 대한 인상만을 가져가라는 듯해서 즐거움을 빼앗기는 느낌이었습니다.
박준 ‘참고문헌’이 시작되기 전에 “이 목록을 읽는 것만으로 작품을 대신할 수도 있으며 다른 작품을 생각할 수도 있다”(307면)라는 설명이 있어요. 참고문헌마저도 별도의 독자적인 텍스트로 읽어주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김소연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는 산문으로 썼던 글을 약간 고쳐서 수록한 것 같았습니다. 긴 문장이지만 리듬감있는 문체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처음부터 소설로 구상된 건 아니라고 추측해본다면 참고문헌을 찾아서 작품과 연관시켜본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긴 합니다.
백지연 저자의 기원을 지우는 메타픽션의 서술이 여러가지인데요, 정지돈 소설은 풍자나 패러디, 자기모멸이나 야유가 잘 느껴지지 않죠. 그런 면에서 오한기(吳韓基) 소설과도 비교되죠. 오한기 소설은 조롱과 유머를 장착하고 점잖은 것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는데요, 정지돈 소설은 건조하고 청결한 방식의 텍스트 구성을 지향하는 것 같아요. 꼰대 이야기가 나와도 별로 조롱의 어투가 느껴지지 않고요. 모든 발화들을 매끈하게 정리해서 무균실에 집어넣는다고 할까요.
김소연 전에 이세돌 9단하고 알파고가 대전할 때, 인공지능이 문학작품을 쓸 수 있을까, 그런 얘기들을 했잖아요. 이 소설들은 알파고가 능히 쓸 소설 같기도 해서, 혹시 정지돈이 알파고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습니다. 알파고의 알고리즘을 통해 알파고가 쓸 글을 미리 선점해서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웃음)
박준 무수한 정보들 가운데서 특정 기호들에 맞는 것들을 쭉쭉 뽑아내는 능력이 있죠. 그런데 소설에서 모르는 지명과 모르는 인물은 한 열개 정도만 나왔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이 있어요. 저처럼 눈이 어두운 사람은 현학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되거든요. 작가가 기입한 마니아적 코드들을 모두 찾아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많지 않겠지요? 물론 꼭 그것을 모두 찾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김소연 우리가 모르는 건 작품에서도 길게 말하지 않던데요. 예를 들면 잘 알려진 뒤샹(M. Duchamp)이나 벤야민(W. Benjamin) 같은 경우는 논평을 좀더 답니다. 대부분의 책은 이름만 거명되고요.
백지연 길건 짧건 소설에 등장하는 논평들에도 무게의 차이는 없는 듯합니다. 책이름으로 수렴되는 동일한 기호들의 유희에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정지돈 소설을 읽을 때 누구 소설, 누구 평론을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논자도 있는데 참조는 되겠지만 소설 읽기에 그런 매뉴얼이 꼭 필요할까 싶어요.
김소연 지난 대화에서 오한기 소설을 다룰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정지돈 소설도 사실 힙스터들의 세계가 문학으로 들어온 경우로 보여요. 써브컬처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들을 가져와 대중의 취향과 변별하는 것, 그런 자부심을 누리는 태도인데요. 중요한 건 다음 작품이 어떻게 가느냐의 문제죠. 꾸준히 ‘힙’하고 ‘핫’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박준 퇴행도 힙한 게 될 수 있어요. 요즘 유행하는 롱 보드를 늘 타고 다니던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체육사를 차리는 거예요. 이게 어찌 보면 힙스터다운 변모죠. 저는 여러모로 정지돈 소설이 어떻게 나아갈까 궁금한데요.
백지연 다음 책에서는 그 형식을 더 밀어붙여 훨씬 복잡한 메타픽션으로 나아가려나요. 그런데 저는 사실 「창백한 말」의 세계에 자꾸 눈길이 갑니다. 이 작품은 다시 읽어도 끌리고 서정성이 느껴져요.
박준 분명한 것은 정지돈의 다음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는 거예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아마 첫장을 펼치기 전에 인터넷 검색창을 먼저 띄워놓겠지요.(웃음) 정지돈은 우리가 소설이라고 합의해온 전통적 관념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시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벗어남을 더 밀고 나가서 소설이라는 장르, 나아가 이야기라는 형식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기대하고 있어요.
김려령 소설집 『샹들리에』
박준 『샹들리에』는 김려령(金呂玲)의 첫 단편집인데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소설집에는 김려령 소설의 두가지 방향이 다 어우러져 있는 것 같아요. 경쾌한 속도감으로 청소년의 일상적 삶을 포착하는 것과 어둡고 끔찍한 현실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두 세계요. 그런데 청소년과 성인을 각각의 독자로 삼는 두 세계가 서로 단절된 게 아니고 흥미롭게 교류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김소연 김려령의 『완득이』(창비 2008)와 『우아한 거짓말』(창비 2009)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서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동안 장편으로 자신의 역량을 잘 보여준 작가가 단편들을 모아서 낸 이유는 뭘까 하고요. 막상 읽어보니, 인상적인 주제들인데 단편으로 나오면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장력이 상대적으로 헐겁고 스토리의 빠른 전개에 치우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역시 이 작가에게는 장편이 몸의 근육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백지연 대화를 확장하고 장면 전환에 주력하는 서술방식이 단편에서는 드물죠. 저는 사실 이 소설집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청소년의 목소리로 폭력적 현실세계를 가차없이 꿰뚫는 시선이 놀라웠는데요. 그동안 우리 소설들이 사회적 약자 이야기를 많이 해왔는데 청소년들의 목소리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사과의 『미나』(창비 2008)가 그런 분노의 감수성을 담아낸 예로 떠오르는데 역시 관념화된 십대의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고요. 김려령 소설은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소설의 중요한 공백을 포착한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김소연 소설에서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김려령이 자신감이 충만했을 때 할 줄 아는, 김려령만의 묘기인 거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드름」이 재미있었습니다. 아예 자기 장기인 걸로만 끝까지 가본 건데, 한 문장도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여요. 자신의 리얼리티가 어디에 복무되었을 때 소설이 값질 수 있는가를 아는 사려깊은 소설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소설들의 마지막에 어떤 식으로든 화해를 하거나 분명한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 경향은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린이문학, 청소년문학이 지닌 장르적 관습일 수 있겠지만, 단편집에서는 편편마다 이런 결말이 내장되니 더 패턴화된 듯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이왕 단편에 도전했다면 결말의 방식도 회의하고 반격하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박준 강렬한 캐릭터들에 비해 이야기가 너무 짧지 않나 싶은 아쉬움은 있었어요. 요즘 단편과 중편, 중편과 장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지만, 김려령 작가의 호흡은 「이어폰」 같은 중편에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김려령 소설의 대화 부분이 무척 좋은데요, 예를 들면 「그녀」에서는 ‘돼지할머니’가 등장해요. 이때의 ‘돼지’는 구제역으로 키우던 돼지들을 모두 살처분한 후 자살한 할아버지의 비극을 끊임없이 현재화하는 별명이거든요. 가족들에게 엄청난 고통인데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별생각 없이 쓰고 있어요. 소설은 할머니의 손녀와 주인공이 툭탁거리며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이런 언어적 폭력이 얼마나 일상에 널려 있는가를 날카롭게 환기합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표나지 않게 심어놓는 그 대화 장면이 정말 절묘하게 다가왔어요.
백지연 저는 김려령 단편의 결말들이 나름 흥미로웠어요. 분명히 소설의 형식적 엔딩은 이루어졌는데 서사의 시간은 계속되는 느낌이랄까요. 예를 들면 「아는 사람」은 성폭력을 겪은 주인공이 상처입은 몸을 끌고 112에 전화를 걸면서 범인을 신고하는 장면으로 끝나요. “너는 끝났지? 나는 시작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압권입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도덕적 의지와 해결의 암시가 이런 식으로도 새롭게 다가올 수 있구나 놀랐어요. 통상 봐오는 스토리들에서는 화자가 고통스러워하며 더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 같은데 그런 예상을 뒤집으며 현실을 개입시키죠.
박준 「파란 아이」에서도 주인공의 엄마는 먼저 잃은 딸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 선우라고 부릅니다. 그게 싫은 할머니는 아이를 은결이라고 부르고요. 그러다가 성장한 청소년화자, 주인공이 마지막에 한글자씩 딴 이름으로 개명하면서 화해가 이루어지는데요. 진부한 끝맺음 같지만 생각해보면 이렇게 끝나야 다음 단계가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는 사람」에서 “나는 시작이다”라고 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죠. 여러가지 수사를 동원하고 은유적으로 가고 싶기도 할 텐데요. 우직하게 이런 길을 여는 작가의 선택에 한편으로는 깊은 신뢰를 갖게 됩니다.
백지연 사실은 이런 화해 후 주인공들을 기다리는 것은 피폐한 현실 그 자체입니다. 「아는 사람」의 주인공은 신고 이후 그야말로 고통스럽고 거친 싸움을 시작해야 할 거고요. 「이어폰」 역시 아버지와 주인공이 엄마 없이 서로를 보듬고 살아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세계가 펼쳐지죠.
김소연 김려령 소설은 문학의 우아한 장치를 배제하고 문학할 줄 안다라는 신뢰감을 독자들에게 줍니다. 그런데 왜 하필 단편이어야 했을까 싶어지는 겁니다. 「고드름」이나 「아는 사람」도 장편의 이야깃감인데요.
백지연 말씀대로 사회현실과 연동된 묵직한 주제들이라서 좀더 많은 서사의 곁가지와 풍성한 장면들로 확장되면 좋겠어요. 그런 점에서 저도 풍부한 감정의 결을 담고 있는 「이어폰」의 중편 형식이 좋았고요. 그런데 이 소설집에서 독백과 대화의 교차에 주력함으로써 ‘목소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김려령 특유의 서술기법을 부각한 건 새겨볼 만해요. 자세히 보면 단편들도 개별 작품마다 스타일이 달라서 「그녀」와 「미진이」는 극적 사건보다는 섬세한 감정의 흐름과 묘사를 더 강조하고요.
김소연 김려령 소설 이야기가 나왔으니 청소년문학이라는 명명에 대해서도 잠깐 짚어보고 싶어요. 우리 문학에서 청소년문학을 장르화하고 그걸 어떤 식으로든 읽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는데요.
박준 2000년대 후반 이후 청소년문학이라는 명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어요. 외국의 경우에는 여러 장르문학처럼 청소년문학도 오랜 성과가 축적된 편인데요. 십대들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주제들이 문학적 언어로 풀려나오고 소비되면서 어떤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연 거라고 봅니다. 청소년들의 관심사가 학업 스트레스, 연애, 왕따, 폭력, 게임, 스마트폰, 연예인 문제, 이런 건데 기성의 문학이 이런 생생한 목소리들을 못 담아낸 측면이 있죠.
백지연 청소년문학이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소년소녀소설 이런 말은 그전부터 있었지요. 저만 해도 동화 다음에 읽은 게 그런 소설이거든요. 신지식(申智植)의 『감이 익을 무렵』(1958)을 읽고 이건 뭔가 성숙한 세계라고 느끼면서 푹 빠져들었어요.(웃음) 우정, 동경, 첫사랑, 가족갈등, 학교생활 이야기를 적절히 순화해서 녹여놓은 창작물이며 번안소설이 많았죠. 일종의 장르서사들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김소연 그런데 이니시에이션 스토리(initiation story)라는 문학용어가 있는데, 청소년문학이라고 영역을 나누는 이유가 궁금해요. 청소년문학 작가라는 구분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성장서사들을 청소년문학으로 권할 수 있는데, 그와 별개로 전용 작가에 의해 성장소설이 따로 창작되잖아요. 어린이문학도 전용 작가가 따로 있고요. 아동, 청소년, 본격(?) 문학 작가군이 나뉘어 있고 그 벽이 넘나들기 어려울 만치 높은 게 좀 이상하다 여겨집니다.
백지연 어린이문학, 청소년문학의 장르성과 경계성에 대해서는 여러 작가와 비평가들이 오랜 시간 토론하고 쌓아온 연구성과가 있으니 본격적인 논의의 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만 청소년문학의 경우 청소년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 바라본다는 입장이 중요하겠죠. 성장서사 역시 청소년문학의 중요한 플롯이지만, 그 성장의 문턱을 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부차적일 듯해요. 청소년으로서는 십대로서 지내고 있는 지금의 시간이 중요한 거죠. 그런 점에서 성숙의 세계, 교양의 획득을 지향하는 고전적인 성장서사와 겹치면서도 갈라질 것 같고요.
박준 모든 장르서사가 그것을 즐기는 주체의 관심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 같아요. 쓰는 사람이, 책을 사서 권하는 사람이 어른이라 하더라도 아이 입장에서 읽고 싶지 않으면 소용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향유주체와 창작주체가 서로 영향받으며 서사의 새로운 갈래가 생겨나니까요. 김소연 선생님 이야기를 좀더 이어보면 청소년문학이 그 자체에 완강한 규범적 틀을 만들어서 창작의 방향성을 고정하면 좋지 않다는 생각이 저도 들어요. 애초에 혼종적이고 유연한 장르의 특성이 사라질뿐더러 자칫하면 소재주의나 도식적 글쓰기가 되니까요.
김소연 결국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어른이든 ‘문학’에 방점이 찍히는 건데요. 김려령 소설만 해도 청소년문학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지금 단계에서 보면 그 명명에 가두어 읽을 필요가 없거든요.
백지연 김려령과 같은 출발점의 작가로 구병모(具竝模)와 정유정(鄭柚井)이 종종 함께 거론되죠. 이 작가들 역시 장르에 구속받지 않는 다양한 방식으로 문학의 범주를 넓히고 새로운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구병모가 판타지를 통해 기성의 문학과 좀더 무리없이 섞여든다면 정유정은 추리와 스릴러 서사를 표방하며 대중과의 만남을 넓혀왔죠. 그와 비교하면 김려령은 사회적인 문제를 주시하는 정통 사실주의 기법을 새롭게 활용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요.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김금희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
김소연 『너무 한낮의 연애』는 김금희(金錦姬)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인데요. 발표작 연도를 살펴보니 모두 두해 동안 집중적으로 써낸 작품들입니다. 한 작품집 안에도 발표시기에 따라 뚜렷한 변화과정이 보이더라고요. 어떤 계기로 탄력을 받아 이렇게 소설이 달라졌는지 궁금할 정도예요. 시대감각을 형성해가는 대목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박준 시인과 김금희 작가가 비슷한 세대 아닌가요?
박준 저는 정지돈 작가와 동갑이고, 김금희 작가보다는 네살 어려요.(웃음) 꼭 동세대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김금희 소설의 장면마다 많은 공감을 했어요. 좋은 문장들이 쌓여서 좋은 소설을 만든다는 원칙을 새삼스럽게 확인했고요. 어떤 의미망을 향해 소설의 모든 문장이 한 길로 나아가고 있는데 지루함 없이 즐겁게 읽었어요. 꼬지 않고 에둘러가지 않는, 친절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김소연 친절하면서 재미있긴 꽤 어렵죠. 김금희 소설의 매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오래 남는 이야기를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듯합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낚아채어 자기 손으로 빚는 재미를 소설쓰기의 쾌락이라 했을 때, 김금희는 자신의 체취로 이 이야기가 훼손되면 안된다는 겸손함이 앞서는 듯 보입니다. 단지 이 이야기를 잘 건사하기 위해 정성을 들입니다. 그 정성이 불러일으키는 흡입력이 김금희 소설의 가장 큰 힘이라 여겨집니다.
백지연 첫 소설집인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창비 2014)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김금희의 가장 큰 힘은 세태를 다룰 줄 안다는 데 있습니다.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잖아요. 똑같이 다녀온 시장인데 이런 물건은 어디서 골라냈을까, 이런 풍경은 언제 봤을까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처럼 김금희 소설은 사물 하나의 움직임도 따뜻하게, 찬찬히 들여다보고 기억해요. 첫 소설집에서는 그 관찰의 세계가 너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인물들을 누른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인물들이 좀 수다를 떨어줬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소설집에서 그 말문이 확 트인 느낌이에요.
김소연 그런 바람을 「보통의 시절」이 충족시켜주지 않나요?
백지연 네. 「조중균의 세계」랑 「보통의 시절」에서 ‘아, 드디어 시작했구나’ 싶더라고요. 잠긴 빗장을 푼 거죠.
박준 「반월」에도 인상깊은 대목이 있는데요, 주인공의 엄마와 이모가 어린 시절 중풍을 앓던 할머니를 회상하는 장면이에요. 주인공의 엄마는 쉴새없이 눈물이 흐르던 할머니의 한쪽 얼굴만을 기억하고 주인공의 이모는 은근히 웃고 있는 할머니의 반대쪽 얼굴만을 기억합니다. 또한 “이모의 얼굴은 섬을 향할 때는 우는 듯 보였고 바다를 향할 때는 웃는 듯 보였다”(127면)라며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그려내는데요, 삶의 총체성을 아름답게 발견해내는 지점들이었습니다.
김소연 「조중균의 세계」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필경사 바틀비」를 떠올리게 하는데, 멜빌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의 디테일을 살렸어요. 「세실리아」도 익숙한 이야기지만 김금희의 손을 거치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처럼 탄생하는 느낌을 줍니다.
백지연 저는 「세실리아」가 무척 마음에 남습니다. 소설에서 세실리아는 어떤 오해와 폭력 속에서 지워져버린 인물인데, 이 인물을 생생하고 따뜻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가 놀라웠어요. 자의식의 과잉이나 편집증에 사로잡히지 않고, 존중하고 다가서는 친화성의 태도가 인물을 살아 있게 만들어요. 읽으면서 소설 속으로 들어가서 ‘엉겅퀸’으로 불렸던 이 인물과 함께 술을 마셔보고 싶더라고요.
박준 소설집에 서로 다른 경향의 작품이 함께 놓여 있는데요. 「고기」나 「개를 기다리는 일」은 지금 이야기한 작품들과 다른 기이하고 낯선 느낌을 주죠. 김금희 소설은 대체로 과거에 놓인, 혹은 놓였을 법한 예민하고 미세한 기척들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는데 「고기」 같은 작품에서는 그것이 너무 거대한 장치 속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줘요. 「조중균의 세계」나 「보통의 시절」 같은 작품이 자연스럽고 평이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세계에 닿고 있는 것 같아요. 계속 「조중균의 세계」로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김소연 저는 「고기」가 마음에 들던데요. 「고기」는 표제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와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 같아요. 「너무 한낮의 연애」는 좋은 작품이지만 사람들이 이 작품으로만 김금희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할까봐 걱정됩니다. 「고기」 쪽이 독자로서 소설에 기대할 만한 것이 더 풍부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저는 저 멀리서 작은 목소리로나마 “고기, 고기” 막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김금희스러운 문체들로 꽉꽉 채워져서 이런 류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뤄주면 좋겠다 하는 기대감이 있달까요.
백지연 「고기」 계열의 작품들이 첫 소설집과 연결되는데요, 공간 묘사가 촘촘하고 뛰어나죠. 저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에 애착이 가요. 공간을 참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일하는 병원, 성장했던 고아원의 옥수수밭과 아궁이, 옥수동 비탈진 계단, 그리고 그 방 옆의 화장실을 오가는 공간적 이동이 탁월하죠. 벽도 없이 양변기만 놓인 공간에서 가림판을 놓고 별을 보는 세계, 여기에서 김금희의 고유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거죠. 우리 소설사에 인상적인 화장실 장면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로 기억될 만합니다.
김소연 묘사가 상세하면서도 그것을 지루함 없이 굴곡지게 그려내고 살짝살짝 에세이스트의 면모를 가미해가면서 소설을 이끌어가는 걸 보면 호흡을 잘 조절하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느껴져요.
박준 에세이적 특성과 관련해서 소설들을 읽다보면 가끔 화자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어요. 가령 이런 문장이요. “여기서 우리집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먼가. 우리집으로 가서 오늘의 일을 잊기까지는 또 얼마나 멀 것인가.”(「세실리아」 90면)
백지연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구절이 주제처럼 강조되는 부분이 있어요.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42면) 같은 대목은 이렇게 설명적으로 풀지 않아도 될 텐데,라는 생각도 들어요.
김소연 아포리즘이 본래 촌스러움과 세련됨의 경계에 있는 아슬아슬한 방식이죠. 은희경(殷熙耕) 소설도 그런 아포리즘이 잘 사용되는데, 굉장히 씨니컬해서 촌스러울 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금희 소설은 인간에 대해 기본적으로 따뜻하게 껴안고 싶어하는 갈망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감상적으로 치우칠 수도 있거든요. 아포리즘을 조금 덜어내고 소설이 끝나도 좋았을 것 같아요.
박준 인물들이 안고 있는 낭만성이나 트라우마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어떤 세계에서 인물들은 굉장히 억눌리고 어두워 보이고 또 어떤 세계에서는 갑자기 환해져요. 소설의 폭이 넓은 것일 수도 있고 인물들이 갑자기 풀려나오면서 겪는 과정일 수도 있겠는데요. 가끔 김금희 소설의 인물들은 트라우마가 없는 것처럼 다가올 때가 있어요. 어떤 극단의 방법과 동기부여 없이 과거를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그 과거가 상처 없이 끝날 때만 가능할 텐데요. 그래서 가끔씩 이 인물들이 건강하고 낙천적이지만, 조금 답답하고 평면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백지연 「너무 한낮의 연애」가 그런 특성과 연관되네요. 이 소설에서 필용과 양희는 상당한 시간대를 두고 다시 만났는데 나이를 먹지 않은 것 같아요. 과거의 양희와 필용의 연애 장면들이 독특하고 생동감을 준다면 현재의 두 사람은 뭔가 낭만적으로 채색된 느낌이 강합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특히 양희의 캐릭터가 아쉬웠는데요, 늘 이천원만 가지고 다녔던 괴짜 같은 양희의 이야기를 좀더 살려줬으면 어땠을까 싶거든요. 기이하게 스쳐간 양희 아버지의 이야기도 그렇고요. 필용과 양희의 ‘연애’인데 필용의 눈으로만 포착된 양희의 어떤 모습만 극화되는 아쉬움이 남아요.
김소연 일반적으로 과거를 파헤치는 소설들이 사실은 기억의 환부를 발견해내는 데 집중되잖아요. 그런데 김금희 소설은 처음에는 답답하고 피폐한 인물인데 함께 계속 섞여들어가 보면 어느새 매우 정상적이고 건강한 인물인 걸 보여줍니다. 그것으로 치유받아 환대하는 독자도 있을 테고, 그 환부를 제대로 해부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일정하게 보류되는 소설일 수 있어요. 김금희 소설을 향한 상반된 평가가 모두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백지연 저는 김금희의 소설을 읽으면서 후일담의 서사도 드디어 세대교체가 되는구나 싶었어요. 최근 나온 최은영(崔恩榮)의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요. 자학이나 냉소, 강박과 편집증을 거느리지 않고도 자신의 청춘을 돌아볼 수 있구나, 부러움과 감탄이 들더라고요. 아까 박준 시인은 그 억눌림 없음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지만 저한테는 그런 이야기마저도 부럽게 들려요.(웃음) 과거를 돌아볼 때 사람들의 얽힌 관계를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는 소설가의 중요한 자산이지요. 김금희 소설이 그 발판을 잊지 않고 계속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제 두 분께서 이야기를 마무리해줄 시간이 되었네요.
박준 여러 작품을 읽는 동안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오늘 함께 이야기한 분들을 포함한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요. 날로 마음이 가난해지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요즘인데 우리의 문학은 가난하지 않아 위안도 되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두분께 감사드립니다.
김소연 이번에는 제 취향과는 꽤 다른 책이 많아서 버거울 것 같았는데요.(웃음) 어쨌든 끝까지 읽고 나니 한국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유쾌한 낙관이 가능해집니다. 순수하게 독자 입장이 되어서요. 내가 뭘 쓸 건지만 생각하고 살다가 이런 시간을 갖는 게 점점 재미있습니다. 다음에는 진짜 잘할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