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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국의 ‘보수세력’을 진단한다 ③

 

보수적 사회단체, 어떻게 움직이나

 

 

이나미 李娜美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저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한국의 보수와 수구』 『이념과 학살』 등이 있음.

 

정현곤 鄭鉉坤

세교연구소 선임연구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책위원장. 공저 『천안함을 묻는다』가 있음.

 

정환봉 鄭桓奉

『한겨레21』 기자. 2013년 ‘국정원 대선 여론조작 및 정치공작 사건 연속보도’로 한국기자상 대상 수상.

 

후지이 다케시 藤井たけ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저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역서 『번역과 주체』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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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정환봉, 이나미, 정현곤, 후지이 다케시 ©이영균

 

정현곤(사회) 『창작과비평』 50주년 기념 연속기획 ‘한국의 보수세력을 진단한다’의 세번째 주제는 보수 시민운동과 관변단체입니다. 1987년 시민항쟁의 결과로 민주체제가 열린 지 30년이 다 됐는데도 사회가 퇴행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큽니다. 특히 2008년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역진이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 속에서 민주적 거버넌스를 약화시키는 억압적인 지형이 형성됐지요. 한국의 보수가 이러한 억압체제 강화에 한몫을 했습니다. 근래 들어 일각에서 수구세력의 ‘점진 쿠데타’를 경고했을 정도입니다(이남주 「역사쿠데타가 아니라 신종 쿠데타 국면이다」, 『창작과비평』 2015년 겨울호 ‘책머리에’). 4·13총선 이후 그나마 사회를 퇴행으로 몰고 가는 이 구조에 대해 돌아볼 여유가 조금 생긴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이번호 대화에서는 한국사회 보수운동의 역사와 현재에 대해 연구, 취재 활동을 해오신 세분을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려 합니다. 우선 올해 큰 이슈가 되었던 ‘어버이연합’ 문제를 되짚어보는 것에서 시작까 하는데요, 간단한 본인소개와 함께 말씀 청합니다.

 

이 나 미 (李娜美)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저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한국의 보수와 수구』 『이념과 학살』 등이 있음.

이 나 미 (李娜美)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저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한국의 보수와 수구』 『이념과 학살』 등이 있음.

이나미 저는 현재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에서 공화주의의 한국적 기원을 연구하고 있고 또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가 진행하는 ‘한국 시민사회사’ 총서 발간작업에 참여 중인데, 그중 해방 후부터 1960년까지의 한국 시민사회에 대해 연구와 집필을 맡고 있습니다. 거론하신 ‘점진 쿠데타’는 정말 와닿는 표현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정상 상태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과거에 관변단체 등 보수단체가 기승을 부린 것은 대개 이승만(承晩), 박정희(朴正熙) 등 독재정부 시기로서 정당성 면에서 취약한 정부가 집권하고 있을 때였어요. 이것은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잃어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어려울 때 우익단체나 관변단체를 만들어 거기에 의존했음을 의미합니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어버이연합을 지원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이슈가 됐는데, 이 역시 정부가 정당성을 잃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음을 내보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지이 다케시(이하 후지이) 저는 한국현대사를 공부하고 있고 주로 파시스트를 연구했습니다. 이범석(李範奭)을 중심으로 한 족청계(族靑系)를 연구하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은 50년대 중반에 파시즘의 역사적인 흐름이 끊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박정희체제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데, 저는 60년대 이후 관변단체는 파시즘의 흐름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파시즘은 보수주의와는 분명히 다르고 어떻게 보면 혁명적인 성격도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기존 관변단체의 성격과 다른 어버이연합의 등장은 새로운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육칠십년대 관변단체가 이권을 매개로 위로부터 조직된, 말하자면 공식 관변단체였다면, 어버이연합은 아래로부터 생겨난 비공식 관변단체지요. 최근 상황도 저는 점진 쿠데타 국면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보수세력이나 기득권층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누가 이기는 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망가지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박근혜(朴槿惠)라는 인물의 상징적 효과로 겨우 봉합되어 있는 것이지, 이 정권이 끝나면 그들도 어떻게 될지…… 새누리당에도 미래 전망이라는 게 없을 거예요. 그렇게 사회가 망가져가는 조짐 가운데 하나가 어버이연합의 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환봉 저는 국정원 댓글 사건을 중심으로 취재를 해왔고, 최근에도 어버이연합 관련 취재를 했습니다. 보수·관변단체의 역사성보다는 최근 상황에 대해 주로 말씀드리는 게 제 역할일 것 같습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저항해야 할 목표를 잃은 기존 보수집단들이 시민단체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뒤 비슷한 단체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어버이연합도 2006년에 나왔고요. 저는 어버이연합이 겪어온 일련의 과정이,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됐던 보수단체들의 명멸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어떻게 보수운동을 개척하느냐에 따라 보수단체의 미래도 달라질 것 같습니다. 사실 힘이 강력할 때는 치부가 잘 드러나지 않거든요. 어버이연합이 지금 이렇게 사회문제화된 것도 ‘잘나갈 때’는 있을 수 없었던 일들이 쌓인 결과입니다. 그들의 권력을 유지해줬던 정부나 국가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정 현 곤 (鄭鉉坤) 세교연구소 선임연구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책위원장. 공저 『천안함을 묻는다』가 있음.

정 현 곤 (鄭鉉坤) 세교연구소 선임연구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책위원장. 공저 『천안함을 묻는다』가 있음.

정현곤 어버이연합 사태가 새로운 흐름으로 형성되었다가 한계에 직면한 보수운동의 순환주기를 보여준다는 정기자님의 지적은 흥미롭군요. 그들이 아무런 명분 없이도 그렇게 떠들썩하게 무법적이었던 시절이 꽤나 길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간 정치권력뿐 아니라 여러 사회적 권력이 얽힌 일종의 점진적인 쿠테타 시도가 진행되었다는 지적이 나올 법도 합니다. 보수의 롤백(roll back)이랄 수도 있는 그들의 움직임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폈으면 합니다.

 

보수 관변단체가 거리로 나온 배경

 

정 환 봉 (鄭桓奉) 『한겨레21』 기자. 2013년 ‘국정원 대선 여론조작 및 정치공작사건 연속보도’로 한국기자상 대상 수상.

정 환 봉 (鄭桓奉) 『한겨레21』 기자. 2013년 ‘국정원 대선 여론조작 및 정치공작사건 연속보도’로 한국기자상 대상 수상.

정환봉 관변단체는 굳이 싸울 이유도,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도 없던 조직이었습니다. 군부독재 시절만 봐도 정부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반공·발전 이데올로기를 민간 차원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권의 하위 파트너였지요. 특별히 공격 대상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단순히 북한이 나쁘다는 이야기만 계속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던 게 정권이 바뀌어 국민의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자유총연맹(이하 자유총연맹) 같은 곳만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거죠. 2001년에 ‘국민행동본부’라는 단체가 설립됐고, 2003년에는 기독교 조직이 가세한 ‘반핵반김국민협의회’가 꾸려졌습니다. 그뒤 자유주의연대나 여러 뉴라이트 조직도 등장했고요. 반공·발전 이데올로기를 설파해온 구 보수단체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끌어온 뉴라이트, 두 부류의 단체가 권력 공백기에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 진지를 형성한 것입니다. 관변단체와 그외 보수세력이 시민사회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요. 어떻든 국가지원이 아니라 회비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 생겨났다는 게 형식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스팔트 우파’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입니다. 선동가들이 생겨났고, 이명박정부 들어서는 그중 일부가 정치권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국정원이 보수단체에 일정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요, 자유주의진보연합이라는 뉴라이트 보수단체가 내는 신문광고의 문안을 국정원 직원이 만들어줬습니다.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내용 등이었는데, 이런 일이 많았어요. 그렇게 보수단체가 힘을 얻어오다가 최근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고, 대선 여론조작 사건 등이 불거지면서 지원도 상당부분 끊긴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크고 작은 갈등이 보수단체 내부에서 폭발하고 있고요. 김대중·노무현정부 때 태동한 단체들의 몰락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현곤 말씀을 들으니 권력에 대한 ‘종속성’이라는 화두를 제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기존 관변단체는 권력에 종속됐기 때문에 무언가를 기획하거나 스스로의 목적에 따라 움직일 필요가 없었지만,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달라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재정립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뒤로 권력과 새로이 결합하면서 또다시 종속성이 강화됐어요. 그러면서 이제는 시민사회 내에서 스스로의 정체성까지 잃어버리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이죠.

 

이나미 예전에 비해 관변단체에 자발성이라는 요소가 생긴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충성 경쟁을 하는 느낌도 있고요. 생계형 보수운동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자금이 없는 상태에서 온갖 보수단체가 난립하고 있으니까요. 최근 보수단체에는 과거와 다른 면이 몇가지 있어요. 우선 시민단체 흉내를 낸다는 점입니다. 자발성이 높아졌다는 뜻인데요, 모여서 구호도 외치고 피켓도 들죠. 또 하나는 연령대가 높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극우집단을 보면 이승만정부 시기에는 서북청년회나 대한청년단이 대표적이었고, 박정희정부 시기 새마을운동 등에도 주로 청년들이 나섰어요. 지금은 그에 비해 구성원들의 나이가 많죠. 그리고 단체 이름이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등 생활밀착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외부인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도 아닌, 보통 사람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것 같아요. 국가와의 연관성이 적어 보이는 이름이고요.

 

후 지 이 다 케 시 (藤井た けし)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저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역서 『번역과 주체』 등이 있음.

후 지 이 다 케 시 (藤井た けし)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저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역서 『번역과 주체』 등이 있음.

후지이 민주화 이후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게 중요합니다. 새로운 보수운동단체들이 주로 나타난 게 노무현정권 때인데 제가 당시에 뉴라이트에 관심이 많아서 그쪽 모임에 나가보기도 했거든요. 가보면 그들의 위기의식이 대단했어요. 이제 재야세력이 돼버렸다는 데서 받는 상실감이 컸고, 그래서 나름의 반성을 했던 거죠. 그런데 뉴라이트는 기본적으로 엘리트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어버이연합 같은 단체와는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신자유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뉴라이트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집단인 데 반해 어버이연합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가난한 할아버지들은 신자유주의의 희생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뉴라이트의 등장과 어버이연합의 등장 사이에는 시차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가 보수세력 내에서도 양극화를 촉진한 셈이죠. 이제는 ‘보수’라는 말로 그들을 한데 부르는 것 자체가 현실에 안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일본에도 비슷한 현상이 출현했습니다. 2007년 발족한 재특회(在特會,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인데요, 과거 일본 우익은 “천황 만세”를 외치며 군가를 틀어놓고 다닐 뿐이었지만 재특회는 시민운동처럼 나타났어요. 그들은 어버이연합이 그랬던 것처럼 길거리에서 싸우면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과거와는 크게 다른 양상의 보수운동이 아래로부터 등장한 것인데, 일본과 한국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들 운동의 배경에는 신자유주의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붕괴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원래 자기보다 아래에 있어야 할 사람들’ 혹은 ‘사회에서 배제됐어야 할 세력’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것이 일본에서는 재일외국인(으로 간주된 이들)에 대한 공격으로, 한국에서는 좌파나 빨갱이(로 찍힌 사람들)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 것이죠.

 

정현곤 기존에 국가의 보호를 받던 관변단체들이 버림받으면서 일종의 생존전략 차원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후지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관변단체 활동으로 먹고살던 사람들이 간판만 바꿔서 운동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나미 선생님이 연령대가 높다고 지적하신 것과도 관련있을 텐데, 세대의 문제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육칠십년대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소외감이 어버이연합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군사독재 시절에 옳다고 배운 대로 살아왔는데 민주화가 됐다고 몸에 밴 습관을 바로 바꿀 수 있겠어요? 그들은 민주적인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비민주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민주화’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현곤 보수운동이 가장 극적으로 증가한 시점이 2003~2004년입니다. 20033·1절에 안보단체들이 ‘반핵반김자유통일 국민대회’로 결집했어요. 보수 기독교계도 1월부터 금식기도회 같은 행사를 열면서 집결하기 시작했고요. 그러다가 그해 6·25 행사 때 양쪽이 ‘한미동맹 강화’라는 구호로 만났어요. 당시 집회 규모가 10만명을 넘었습니다. 2004년에는 국가보안법이 이슈가 되어 역시 10만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고요. 뉴라이트 운동도 200411월에 자유주의연대를 시작으로 공개운동으로 전환했지요. 이렇듯 이 시기에 이런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나미 그때가 김대중정권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배턴을 이어받은 시점이죠. 역사적으로 보수 담론이 등장한 건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입니다. 김영삼정부 때부터 위기의식을 느낀 일부 보수적 지식인들이 보수 담론을 만들어오다가 김대중정부 말기에 들어서는 활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남북관계의 변화, 특히 남북정상회담이 계기였지요. 한국사회 주류 입장에서는 통일이 되어버리면 체제변화가 일어날 거고 그러면 자기가 누리던 특권을 계속 누릴 수 있을지 불안했던 거죠. 예상과 달리,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북한에 대해 ‘학살’이나 ‘전쟁’ 이미지보다 본능적으로 ‘평등 분배’나 ‘소유권 없음’을 더 떠올립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남북정상회담은 위기로 다가왔는데, 그런 상황에서 정권이 바뀌지 않고 노무현정부가 들어서니 더욱 절망한 거죠.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해인 20033월, 6월, 8월은 엄청났어요. 교회에서 사람을 동원하고 기업에서 돈을 대는 방식이었죠. 삼성이 1억원,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4천만원, 대한상공회의소가 3천만원…… 공식·비공식조직이 다 동원돼서 대규모 보수집회를 지원한 셈입니다.

 

후지이 노무현정부 탄생이 그들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음은 확실한 것 같아요. 보수 입장에서 김대중정부까지는 인정할 수도 있었죠. ‘3김’이라는 말도 있듯이 김대중은 거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노무현은 그들이 보기엔 ‘듣보잡’이에요. 기득권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웠을 거예요.

 

정현곤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2003년에 보수세력이 가졌던 사회 주류로서의 위기의식, 기득권으로서의 위기의식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유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당시에 그들이 ‘반핵반김’이나 한미동맹을 중요한 명분으로 내걸고 나왔다는 거에요. 이것은 200210월에 미국이 제기한 북의 우라늄 핵개발 문제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보수의 뿌리는 역시 안보문제가 아니냐라고 짚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등장한 뉴라이트의 동기와 동력도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후지이 사실 뉴라이트 집결의 가장 큰 이유가 한미동맹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었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길 가던 여중생 두명이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나서 반미의식이 엄청 높아졌잖아요. 당시 여론조사에서 청소년의 70%가 한국 안보를 가장 위협하는 국가로 미국을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오게 됐습니다. 2004년부터는 역사교과서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고 거기서 ‘교과서포럼’이 생겼죠. 뉴라이트가 ‘구 보수’와 완전히 다른 점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바로 민족주의를 부정한다는 입니다. 과거 관변단체들은 민족주의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뉴라이트는 민족주의 때문에 우리가 망한다고 강변했습니다. 중요한 건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지 민족주의가 아니라는 거죠. 민족주의가 반미와 연결되니까 뉴라이트 입장에서는 이걸 막고 싶었던 겁니다. 어떤 사람은 반일민족주의도 문제삼아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반일을 내세우다보면 결국 반미에도 대응할 수 없게 된다는 거겠죠.

 

이나미 2003년도에 그렇게 거세게 보수운동이 일어났지만 사실 별로 성과가 없었습니다.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한 거죠. 새로운 대책이 필요해서 나온 게 뉴라이트입니다. 반공과 안보라는 논리가 진부했기 때문에 이들은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끌어옵니다. 뉴라이트가 2004년에 세운 단체가 앞서도 언급된 자유주의연대였고 또 그 이후에 자유주의 관련 책이 마구 쏟아져 나와요.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를 내세운다는 것인데, 자유주의에는 왕정에 반대했다는 해방의 이미지가 있죠. 사회가 개인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면도 마찬가지고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때부터 민주주의를 포퓰리즘으로 등치시켜 폄하하는 거죠.

 

정환봉 ‘구 보수’와 ‘신 보수’가 종류도 다르고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아예 다른 성격은 아니라고 봐요. 차이에 집중하기보다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대표적으로 대중에 대한 공포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 대중은 우선 더이상 북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민들입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죠. 또 2000년대 초반부터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저항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난 것 역시 주목할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비정규직 투쟁은 과거처럼 조직화된 형태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 말은 역으로 시장이 관리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분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으로 대중이 예상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면서 기득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고 봅니다. 예전 같으면 국가권력에 기댔을 텐데 그러기 어려운 상황이 되니까 고립감을 느꼈고요.

후지이 그래서 그 시점에서 기득권층의 어휘 자체가 많이 달라집니다. 대중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자꾸 언급돼요. 노조에 대해서는 ‘집단이기주의’라는 식으로 공격을 시작했는데, 그전까지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 자체를 크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이죠.

 

‘종북’ 공세, 어디서 왜 시작되었나

 

정현곤 보수세력의 집결이 매우 복합적이군요. 전통적인 문제의식이었던 안보위협을 포함해서 민주주의 진전에 따른 대중의 진출에 대한 공포까지 결합되어 있는데 결국은 사회적 전환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혼란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제 식으로 말하자면 분단체제가 흔들리면서 생겨나는 변화에 대한 수용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혼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어버이연합 사태가 그런 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청와대가 반대집회를 요청했다거나 전경련의 자금이 유입되었다거나 하는 것인데, 어떤 맥락이 있는 건가요?

 

정환봉 보수단체가 시민단체의 모습을 표방하면서 마주한 운명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민단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독립성과 자율성입니다. 사실 2003~2004년 무렵에는 이들이 시민단체로서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그때는 권력에 저항한 시기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에 보수가 연이어 집권함에 따라 저항해야 할 권력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라면서 움직였는데 이제 이렇다 하게 할 일이 없어진 거죠. 그러면서 권력 비판이 아니라 증오로 힘을 규합하게 됩니다. 북한에 대한 증오, 노조에 대한 증오…… 그렇게 역할이 애매해진 보수운동이 다시 생명을 연장한 계기가 있었는데요, 역설적으로 바로 2008년 광우병쇠고기 촛불집회입니다. 이때 모인 인파에 이명박정부도 놀랐고 보수단체도 놀랐어요. 정부는 그걸 가능하게 한 배경에 시민단체가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배후세력론 내지 외부세력론이죠. 정부도 국정원도 그에 대항하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는데요, 그러면서 약화돼가던 보수운동 세력에 할 일이 생긴 것이죠. 2009년 국정원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등장합니다. 당시 원세훈(元世勳) 국정원장이 국·실장을 모아 회의하는 자리에서 ‘젊은 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 방안’이라는, 심리전단이 만든 문서를 극찬했어요. 문서 자체가 공개된 적은 없습니다만 어떤 내용인지 짐작은 충분히 가죠. 젊은 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박근혜정부 들어 국정원의 개입이 점점 드러나고 보수단체에 대한 직접적 지원이 줄어들면서 보수단체 내부의 갈등이 폭발하게 됩니다. 요즘 보수단체들이 과격해졌잖아요. 어디 나가서 싸우고 특정인을 공격하다보면 폭행죄 등으로 기소되기도 하는데, 벌금조차 지원을 못 받아요. 돈 문제가 얽히면서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1억원을 지원받은 보수단체가 자금을 유용했다는 둥 폭로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가지고 있었던 자생력을 보수정권하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겁니다. 정말 비분강개해서 모인다기보다 이해관계로 모이는 사람들이 늘었고, 그에 반해 정치권 진출이나 재정적인 지원 등 이익의 기회는 충분치 않은 상황이 온 거예요. 더욱이 이명박정부 때는 국정원이 광고 문구를 만들어줬을 정도라 말씀드렸는데, 사실상 시민단체의 정책을 국정원이 생산한 셈이잖아요. 대선 여론조작 사건 이후에는 이마저도 쉽지 않아진 것으로 보이고요. 자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정현곤 말씀을 듣고 보니 앞으로 보수단체가 어떤 식으로 가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특히 활동의 지속 가능성을 담지하는 담론의 문제가 중요한데요.

 

정환봉 약자에 대한 혐오는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보수적 담론의 경우 ‘일베’와 보수단체, 보수언론 등을 서로 가로지르면서 유통되고 있어요. 보수단체가 세월호 진상 규명을 멈추라는 집회를 하면 보수언론이 기사를 쓰고, 이 기사가 일베에서 공유되면서 과격한 혐오가 덧붙는 식이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른바 ‘넷우익’이 자생력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생력을 가진 이들이 거리로 나와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늘 있습니다. 세월호특별법과 관련해 유가족 등의 단식이 이어질 때 옆에서 ‘폭식투쟁’을 한 사례가 이미 있었죠. 특정 보수단체가 흥하냐 마냐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이처럼 증오나 적대감을 확대 재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이 동반될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정현곤 혐오의 한 대상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종북’ 문제를 보수 담론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것은 꽤나 기반이 있어 보입니다. 201412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 그 기반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 정당해산의 직접적인 이유가 된 지하혁명조직(RO)의 실체와 내란음모의 경우,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헌재가 먼저 판단을 했죠. 나중에 대법원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사회적으로 확산 종북 혐오 정서를 헌재가 이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원상회복이 안되고 있지요.

 

이나미 보수세력은 일관되게 북한 문제를 들고 일어섭니다. 노인, 청년 할 것 없이요.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이들도 북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경우가 많아요. 보수를 표방한다고 할 때 한국 상황에서 특수하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논리적 보루가 북한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종북’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원래는 ‘빨갱이’가 주로 쓰였죠. 마녀사냥의 대상이었고요. 그다음에 ‘친북’이나 ‘용공’이 등장하고 특히 ‘주사파’라는 용어가 흔히 쓰였어요. 그런데 널리 쓰이던 이 단어가 사라진 계기가 재미있습니다. 1994년 안상운(安相云) 변호사가 서강대 박홍(朴弘) 총장의 주사파 발언을 명예훼손으로 문제삼은 것을 시작으로, 『한국논단』의 주사파 비방보도 법정 싸움, 박홍 총장을 상대로 한 한국통신 노조의 승소 등이 이어졌고, 이후 안변호사 주도로 언론인권센터가 출범(2003)하면서 주사파라는 용어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주사파는 구체적인 용어라 법률적으로 입증되려면 물증이 있어야 했어요. 주체사상 관련 책을 갖고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피소되기 때문에 좀더 모호한 표현인 ‘종북’으로 옮겨갔다고 봐요. ‘친북’은 북한과 잘 지내보자는 긍정적 메시지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잘 안 쓰고요. 반면 종북은 북한을 ‘추종’한다는 면에서 ‘찌질한’ 느낌을 줍니다. 요즘은 미학적인 게 중요한데, 종북이란 말이 아주 후져 보이는 점을 노린 거죠. 그런데 문제는 종북으로 지칭되는 이들이 대개는 진짜 종북주의자라기보다는 이런저런 면에서 사회적 약자 내지 그들 편에 서는 세력이라는 거죠. 예컨대 세월호 유가족과 그 지지자 들이요. 맥락이 좀 다르긴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전근대 백정들의 평등운동인 형평사(衡平社) 운동을 가장 심하게 반대한 계층 중 하나가 놀랍게도 비슷한 하층계급인 기생이었어요. 기생 입장에선 자기 밑에 백정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높아지는 게 싫은 거죠. 현재 보수집단에도 사회 주류가 아닌 일정 정도 소외된 사람이 주를 이루는데 이들은 가난한 사람, 여성, 성소수자 등과 자신을 구별지음으로써 자존감을 지키기 때문에 저들을 더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에서도 근본주의적 극우들은 주로 사회의 주변인입니다. 한국사회의 주변인 중에도 ‘나는 들과는 다르다’라는 마음으로 실제 종북주의자뿐 아니라 자기들 눈에 사회의 온갖 ‘찌질이’로 보이는 사람들을 종북이라 공격하는 경우가 나타난 것이고, 기득권층은 그 심리를 이용하는 거지요.

 

후지이 종북 운운은 이들이 내세울 말이 없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봅니다.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해버리면 그걸로 끝이지 더 적극적으로 뭔가를 제시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국정원이 의도한 프레임은, 과거에 보수라고 불린 이들을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세력’, 진보라고 불린 이들을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만드는 겁니다. 진보보수로 가면 질 거라고 그들도 생각했거든요. 민족주의도 대한민국주의로 바꿨고, 스포츠애국주의도 아주 많이 활용합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가보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게 스포츠 부문이거든요. 축구대표팀이나 김연아를 지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식이지요. 정치적인 게 아니라 정서적 일체감 같은 걸 중요하게 부각는데 그 발판으로 종북이라는 말을 갖다 쓰는 겁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건데, 오히려 그러니까 누구나 종북이 될 수 있죠. 결국 그들이 적극적으로 내세울 게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정환봉 200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 북한은 더이상 위협으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북한이 뭘 해도 주가가 안 떨어지잖아요. 주식시장은 두려움을 재는 척도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제 북한 때문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잘 안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적을 내부에서 찾아냅니다. 내 이익이나 공동체 이익에 반하는 사람 북한에 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공격해요. 북한은 위협이 안되지만 종북세력은 위협이 되니까요. ‘한미동맹은 좋은 건데, 종북이 북한 이익을 위해서 반대한다’ 같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생기는 겁니다. 과거에는 굳이 내부의 적을 만들 필요가 없었어요. 북한이나 간첩이 문제였지 내부를 광범위하게 갈라낼 필요까지는 없었거든요. 오히려 북한에 맞서서 단합해야 한다는 주장만 펼치면 됐습니다. 국가라는 강력한 권력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내부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 조직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보수라는 사람들도 이제 북한정권을 욕하기보다 한국 내 종북세력을 더 강하게 성토합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모든 이들을 종북세력이라는 범주에 넣고요. 바로 우리 주변에 내부의 적이 아주 많다는 공포감을 줌으로써 누군가를 쉽게 적대시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후지이 그런 점에서 종북은 혐오 담론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혐오의 흐름 속에 있는 거죠.

 

정현곤 종북의 효과가 국내적 통치기제가 된다는 지적은 중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 통치기제를 좀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지점은 사라져버려야 하는 언어들이 빨갱이에서 주사파로, 다시 종북으로 이어져온 과정입니다. 본질적으로는 같은 목적을 가진 언어들이 다른 이름으로 재생산된다면 그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이는 곧 공고하게 유지되어온 어떤 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이고 그게 북한과의 적대관계입니다. 이로 말미암은 위협은 팩트입니다. ‘종북’이란 말은 이 위협을 허구화하고 경멸하도록 만들죠. 남북대화같이 위협을 평화적으로 제거하려는 노력은 진지하게 하지 않고 국가안보만 내세우는 세력들이 이를 활용합니다. 화해협력 정책을 적대시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세력을 억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런 효과를 지닌 종북 담론으로 집권세력은 그동안 재미를 톡톡히 보았습니다만 이번 4·13총선에서는 이슈가 되지 못했죠.

 

관변단체의 오랜 역사

 

정현곤 지금까지 민주화 이후 등장한 보수의 흐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 자유총연맹,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등이 주요한 관변단체로 떠오릅니다. 이들 단체의 역사, 그리고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후지이 제가 보기엔 이들이 지금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재향군인회는 사업에 실패해서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고, 자유총연맹도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이나미 몇몇 주요 단체에 대해 말씀드리면, 재향군인회의 전신(前身)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일본인 네트워크입니다. 다시 말해 조선 내 일본인들의 관계망이 재향군인회였죠. 조선인을 감시·탄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 학살에도 동참했어요. 국가의 필요에 의해 위로부터 만들어진 건 이때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후 19516월말 북한의 휴전제의를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하면서 당시 UPI(국제합동통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남한이 25만 병력을 더 창설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국방부가 예비역 장병, 징집대상자, 국민병역 및 보충병역 대상자 등으로 구성된 재향군인회를 조직해요. 일반적으로 외국에서는 재향군인회가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그 목적도 상호부조, 회원 간 친교, 군인과 유가족의 복지 추구 등이에요. 반면 우리나라는 국가가 전시에 모자라는 군인 수를 메우려고 만든 겁니다. 동아일보 1952312일자를 보면 대한민국재향군인회를 “병역법 제8조와 그밖의 제 규칙에 의하여 현역을 제외한 모든 병역의무자를 조직하여 예비역, 후비역, 보충병역, 국민병역, 퇴역장교까지 포함하여 조직”했으며, “재향군인회의 조직이 완성되면 기회 있는 대로 정신훈련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언제나 국토방위 의무를 자각”하도록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로는 주로 반공집회에 참여하는 등 관변단체 활동을 했고 그로 인한 비판여론이 강해서 5·16쿠데타 이후 해체됩니다. 그해 다시 재건되긴 했지만, 이후 문민정부 때까지는 별로 활동을 안하다가 1990년에 당시 야당 당수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향군인회 행사에 참석한 이후로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수백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은 일도 있고 회원이 늘어나기도 했죠. 지금은 자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정부 종속성이 굉장히 강합니다. 자유총연맹의 경우는 1954년 이승만과 장 제스(蔣介石)가 만든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 그 전신으로, 이후 4·19혁명 때 위기를 맞았지만 박정희정부 이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전국조직으로 발전했어요. 재미있는 건 이들이 노무현정부 시절에 대북지원사업에 참여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정체성의 혼란을 느껴 회원의 절반이 빠져나갔다고 해요. 지금도 역시 관변단체 역할을 하는 것 같고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는 박정희정부 때 육성된 단체지요. 새마을운동은 농촌에서 전통적인 지도세력을 몰아내고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준 건데요, 농촌공동체 간의 유대를 끊고 서로 경쟁하게 함으로써 농민들이 국가만 바라보고 충성하게 만드는 게 이 운동의 본질입니다. 이들은 새마을금고까지 있으니 조직과 재정 면에서 아주 강하죠. 그런데 이 단체도 김대중정부 시절에는 통일사업에 참여하고 노무현정부 때는 호주제 폐지운동에 동참합니다. 이들 관변단체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정부의 지원을 받는 관변단체의 속성이죠.

 

정현곤 관변단체의 조직화가 주로 박정희정부 때라면 어떤 계기들이 있었던 걸까요?

 

후지이 오십년대에는 제대군인이나 상이군인이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어요. 깡패처럼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요. 1950년대까지는 비공식 폭력이라는 게 중요했던 시기예요. 정치깡패들의 시대였잖아요. 5·16 이후 이들을 포섭하려는 노력을 통해 국가의 공식 폭력으로 확실하게 통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관변단체라는 방식으로 조직화한 거죠. 조직 자체는 다른 나라라고 없지 않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재향군인회도 여러 나라에 있죠.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그렇게 큰 기능을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재향군인회 같은 경우도 일단 군인을 관리한다는 목적이 가장 컸다고 보이고요. 5·16 직후라고 할 수 있는 19618월에 군사원호청이 설치돼서 상이군인을 비롯한 이들에 대한 취업 알선이라든가 연금을 제대로 준다든가 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런 점에서는 결국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들을 자기 관리하에 두자는 것이 기본 문제의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나미 정부가 정당성을 결여하고 부패해서 관료체계가 제대로 작동을 못할 때 관변보수단체에 더욱 의존한다고 봅니다. 이승만정부의 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요 근래 어버이연합 등이 기승인데 박근혜정부하에서도 측근이나 관료 들의 부정이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관변단체는 사실 이승만정부 때부터 굉장히 극성이었다고 보여요. 이승만정부 때 경찰력이 급성장하는데 그럼에도 저항하는 세력이 자꾸 커지니까 경찰병력을 도와줄 관변·우익단체가 필요했던 거죠. 민족반공연맹과 자유총연맹은 이름만 바뀐 것이지 구성원의 성격은 동일하고요, 또한 서북청년회 등 여러 청년단체가 합해져 대한청년단이 만들어집니다. 얼마 전 한 보수단체가 서북청년단이란 이름을 쓴 것도 당시 극우집단을 계승하겠다는 것인데 매우 위험한 발상이죠.

 

활동상의 변화, 그리고 혐오 정서의 확대

 

정현곤 그러면 87년 민주화 이후로 이들 관변단체의 흐름이 어떻게 변했나요? 새로 조직된 단체들도 포함해서요.

 

정환봉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경로가 많이 달라졌다는 게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변단체에 중요한 게 지역조직입니다. 지역에서 토론과 교육과 설득을 통해 보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활동이 보수가 선거에서 표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해왔으니까요.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바꿔 말하면 그렇게 큰 조직을 운영하지 않아도 권력획득이 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어버이연합 같은 소규모 조직도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면서 어떠한 경향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요. 다만 자본과 인원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인큐베이팅이 필요합니다. 이들을 길러내는 인큐베이터의 역할을 소위 관변단체가 하는 거죠. 예산이나 장소 등을 지원해주는 거예요. 실제로 관변단체인 재향경우회가 어버이연합에 돈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죠. 직접적인 활동은 기동성 있는 소규모 보수단체들이 하면 됩니다. 가령 세월호사건에 대해서 유가족을 비난하거나, 진상규명 조직을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보수단체의 목소리가 “이런 의견도 있다”라는 식으로 미디어에 등장했습니다. 실제로는 소수임에도 비중있는 의견인 것처럼 미디어를 통해 비치는 것이죠. 굳이 돈과 자원을 들여 지역조직을 광범위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여론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기존 관변단체의 입지가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후지이 그 점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을 때에야 관변단체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했지만, 지역 대표가 의미없어진 상황에서는 기존 관변단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죠.

 

정환봉 직접 행동보다는 재향경우회 사례처럼 재정 등을 지원하면서 소규모 보수단체의 ‘기댈 언덕’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역할만 하기에 기존 관변단체들은 이미 너무 비대한 조직이에요. 그래서 최근에는 경제적 이익을 많이 추구합니다. 특정 회사에 투자해 지분을 획득하고 여러 용역사업 등에 참여하죠. 조직을 유지하는 데만도 많은 비용이 드는 상황이니까요. 새로운 집단에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형성시킨 뒤 실제로 행동하는 역할을 넘겨주고 지금 이같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현곤 거대했던 조직이라면 권력 변환에 따라 자체적인 생존전략을 추구했을 법도 한데요.

 

이나미 관변단체의 생존전략이 ‘조용히 실속을 챙기는 것’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미디어에 노출될수록 조사받을 일도 늘어날 테니까요. 변화의 조짐을 역시 2003년부터 엿볼 수 있습니다. 이때 자유총연맹이 삼일절과 6·25에는 보수집회에 참여하고 성명도 발표했는데 8·15부터는 잠잠했어요. 대규모 집회에 나가면서 미디어에 노출되다보니 그사이에 비난을 많이 받았거든요. 특히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면서 기가 많이 꺾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되도록 노출을 피해 조용히 이익사업을 하면서 주변에 자금을 대주는 식으로 바뀐 듯 보여요. 이명박·박근혜정부 때 특히 그런 점이 두드러집니다.

 

정현곤 말씀들을 정리해보면 관변단체들이 민주화라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 많이 약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새로 등장했다는 보수 시민운동의 경우도 순환주기를 거쳐 현재로서는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진단을 한 바가 있는데, 이제 전체적으로 보수 시민운동과 관변단체들에 대해 진단과 전망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나미 제가 수구와 보수를 나누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보수는 계속 변화하며 이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가고, 수구는 과거의 사고와 방식을 고수하다 사라진다고 봐요. 과격파 역시 마찬가지고요. 보수는 이들을 잠시 활용하는 거죠. 보수는 수구와 달리 대세에 편승하면서 장기적으로 자기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합니다. 지속적인 미디어 감시와 통제, 자유시장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 유포, 식민지 역사와 친일파를 미화하는 교과서 편찬 등 자신들의 특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재생산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점진적 쿠데타라고 할 수 있죠.

 

후지이 민주화 이후 노무현정부 때가 기득권층이 가장 불안해했던 시기입니다. 새로운 대안을 만든다며 뉴라이트가 등장했지만 확실한 대안이 되지 못했고요. 그러니 과거의 망령을 불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 상당수가 사실은 박근혜를 찍었다기보다 박정희를 찍은 거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제 보수에는 아무 비전도 없다는 것이 명백한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 더 내세울 거리가 없으니 계속 종북 타령이나 하는 거고요.

 

정환봉 그러나 그간의 흐름이 멈추었다고 해도 그것들이 낳은 효과는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보수단체들이 증오심을 부각하면서 나왔는데, 이게 약자에 대한 증오로 파생되거나 내부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어요. 즉 증오가 새로운 형태의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약자나 노동자에 대한 증오를 기반으로 한 조직들이 결성되고 힘을 얻을 가능성이 여전히 충분합니다. 사회가 안정되지 않는다면 폭력은 사유화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사유화된 보수세력의 폭력이 연합할 가능성도 있고요. 북한문제 같은 경우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텐데 사안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미사일을 쏜다거나 하면 당연히 엄청난 반대가 있겠지만, 지금 같은 도발로는 지속적인 움직임이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보수가 거리에 나온 경험이 있고 조직을 운영해본 경험도 있으니 그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특정 쟁점에 대해 집결할 가능성은 늘 있겠지요. 다만 단체 중심의 형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이나미 서구에서는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보니 그걸 바탕으로 극우정당이 득세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진보보수를 떠나서 조선족, 외국인노동자가 늘어나 일자리를 빼앗긴다든가 하는 등 사회 내에 보이지 않는 공포와 혐오의 정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더 극우적인 정당이 나와서 그런 이슈를 제기하면 사람들이 그쪽으로 뭉칠 가능성이 한국사회에도 있다고 봐요. 북한 이슈보다는 실업자, 혹은 좌절에 빠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외국인 정서의 잠재력이 더 크다는 생각이에요.

 

합리적 ‘보수’운동은 가능한가

 

정현곤 보수라 통칭하면서도 수구나 극우를 연계해 살피는 것은 불가피해 보이는군요. 오늘 대화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가 다룬 보수는 극우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념체계는 아닌 것 같고 실상은 기득권만을 지키기 위한 전선(戰線)기획으로 이니셔티브를 쥐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수구라는 거죠. 허구적 종북 담론이 보수 전반에 통했다고 인정한다면 이것은 수구의 이니셔티브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분단체제의 특성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수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지킨다는 의미이고 거기에는 가치의 문제가 포함되기 마련일 텐데, 말하자면 자유주의라거나 반부패라거나 준법, 나아가 공사의 구분, 희생정신 같은 것들이요.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이런 원래 의미의 보수운동 자체가 없었던 것일까요?

 

후지이 역사적으로 한국의 보수층이라는 이들이 이념적으로 뭉친 게 아니었습니다. 관변단체들 역시 기본적으로 이권단체였고요. 그러니까 우선 ‘보수’라는 범주 자체를 역사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념형으로 설정되는 ‘보수’에 대해 논의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나미 말씀하신 긍정적 의미로서의 보수 이념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보수’를 내걸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보수의 좋은 가치, 신중함이나 균형감을 우리 사회에서는 대개 ‘중도’라고 말하지 않나요? 우리 사회가 워낙 우경화돼 있기 때문에 건전한 보수는 중도를 표방한다고 보입니다.

 

후지이 과거 자유당이나 민주공화당이 전통적 의미의 보수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정통 보수는 지금 더불어민주당까지 이어지는 흐름이지요. 어떻게 보면 전위당처럼 사회를 변혁하겠다고 나선 게 자유당과 공화당의 초기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초기에만 그랬지 집권당으로서 보수화했지만, 그래도 그런 여당도 스스로를 ‘보수’로 표현한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최근 몇십년 동안의 경험만 가지고 ‘보수’나 ‘진보’를 자명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현곤 흥미로운 말씀들이네요. 그렇지만 보수를 부정적 의미만이 함축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중도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합리적 보수라는 말이 또 통용되기도 하거든요. 범시민사회단체연합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300여개 단체의 연합체로 20121월에 출범했는데, ‘헌법질서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의 아우름’을 기치로 세웠지요. ‘시민운동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가치를 주장해온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그룹의 주류와 안보 보수단체들이 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소위 아스팔트 보수와 차별화할 필요를 느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난 총선 때 보니까 ‘좋은 후보’를 선정해서 발표하는 등 정치에 대한 개입도 강화했는데, 소위 진보단체들의 활동체였던 총선넷(2016 총선시민네트워크) 경쟁한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수라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어요. 보수의 미래, 어떻게 진단하세요?

 

 

정환봉 보수 담론도, 보수 이데올로기도, 보수적인 사람들도 당연히 계속 존재하겠지요. 하지만 이 모두가 ‘보수’단체로서 계속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제 생각에 관변단체는 사라지고 이익단체로 남을 것 같습니다. 미국을 보면 총기 관련 단체를 비롯해 보수성향의 다양한 이익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하잖아요. 또한 말씀하신 대로 정책제안자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집단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겁니다. 요컨대 기존처럼 ‘반핵’ ‘반북’ ‘자유민주주의 수호’ ‘헌법정신 수호’ 이런 식으로 뭉뚱그려서는 동력을 찾기가 점점 더 힘들어질 거예요. 물론 온라인 등 외곽에는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보수집단이 계속 존재하겠지만, 지금처럼 뚜렷한 단체 중심의 활동 방식이 지속될지는 의문입니다.

 

이나미 저는 이권을 챙기면서 본인을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숨는 방향과 오히려 과격해지는 두가지 방향 모두를 생각해요. 보수의 장점은 우리 사회의 욕망을 잘 읽어낸다는 점입니다. 또한 변화의 방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본능적으로 잘 압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더 과격해지는 집단과 개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마치 IS(이슬람국가)처럼요. 강남역 살인사건처럼 파편화된 형태로 폭력이 만연해질 수도 있는 거죠. 일베 등의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는 중앙에서 회원들을 통제하기 힘들다는 점과 회원의 익명성이 특징인데, 그로 인해 과격함을 자제시키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묻지 마’ 살해, 여성 혐오, 막연한 증오 등 사회의 위험한 징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또한 보수진보의 경계선에 있거나 그런 것과 무관한 다양한 집단도 나타날 거라 봅니다. 예컨대 최근 이화여대 평생교육단과대 설립 반대를 주도한 ‘이화이언’도 진보보수로 구분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닙니다. 물론 자발적·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집단이고요.

 

후지이 보수운동이라고 부를 만한 조직화가 계속될 것 같지는 않아요. 무언가 익명 형태가 되지 않을까요. 일본 재특회도 마찬가지거든요. 회원이 아님에도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니 대규모 행동을 하지만 실제로 누가 회원인지는 불분명해요. 그런 점에서 ‘단체 없는 운동’이 한국에서도 나타날 것 같습니다.

 

정현곤 오늘 우리는 한국 역사의 왜곡된 이념 지형과 연관된 보수나 관변단체의 모습을 추적해보았는데 결국은 이러한 왜곡이 시민사회 내에 건전한 공론장의 형성이 차단된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좀더 나은 보수, 합리적 보수의 형성을 위해서는 시민사회 공론장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결정적으로 무엇이 필요할까요?

 

정환봉 정부가 투명해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수 내지 관변단체가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원받아왔는데, 이런 게 한국사회의 논의지점을 왜곡시켰다고 봐요. 가령 사드(THAAD) 배치가 얼마나 위험한지, 협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공론장 형성 자체가 불가능한 거죠. 정보가 없으니 합의도 불가능하잖아요. 이를 해결하려면 쟁점이 되는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게 중요합니다.

 

이나미 지금은 국가가 나서서 정보를 왜곡해 사람들 간의 분열을 일으키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선 국가와 미디어가 공정하게 바뀌어 정확한 정보를 일반인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진보든 보수든 평화롭게 잘 살고 싶다는 목표는 같기 때문에 이들의 토론장을 공개적으로 마련하고,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게 하는 일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후지이 정보공개가 물론 중요하지만 토론만이 대안일지는 의문이에요. 토론은 결국 말 잘하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이 이기게 됩니다. 아스팔트 우파를 보면 못 배운 사람이 많은데, 거기에는 배운 놈이 싫다는, 어쩌면 당연한 반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반응을 반지성주의라는 딱지를 붙여서 비판하는 건 쉽지만, 그렇게 할 때 유지되는 것은 엘리트 중심적인, 즉 비민주적인 위계구조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면 토론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나미 심의민주주의에 대한 중요한 반론이지요. 특히 어려운 말로 점잖게 하는 토론에서 우리가 유익한 결과만을 기대할 수는 없겠죠. 그러니 어렵고 추상적인 공론장이 아니라 생활에 밀착된 공론장에서 시작해서 아래로부터의 욕구와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한 지역에 쓰레기수거장을 세우는 문제에 대한 토론이 처음에는 집값 떨어지는 것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환경 문제로 진화하기도 합니다. 님비(Not in my backyard)에서 시작했지만 공익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거지요. 현재 정부가 사드를 성주에 배치하려는 데 대한 토론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정현곤 최근 시민사회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현상이 지역공동체 단위에서 형성되는 소통의 가능성입니다. 지역사회는 관변단체들의 활동무대고 그들의 이니셔티브가 관철되는 공간입니다. 지방자치가 활성화되면서 형성된 대안적 마을운동이 이들 관변단체와 서로 경쟁구도에 있습니다. 올해 행정자치부가 마을기본법이라는 것을 제정하려고 하는데, 지역사회 공동체 단위가 재단을 만들고 이 재단을 지방자치단체와 지방 기업이 지원하면서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한다는 그림이에요. 관변단체의 재조직이라는 정치적 의도가 의심되는 대목이지요. 그래서 초기에 마을기본법이 제안되었을 때는 의혹이 있었습니다만, 소통을 하면서 지역공동체의 성장이라는 점에서 점차 이해가 일치되는 영역을 찾아간 모양이에요. 최근에 들어보니까 정부 측과 마을운동 쪽이 서로 많이 양해를 한 듯합니다. 저는 이런 연결을 이루는 능력이 중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보수를 당겨내잖아요.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진단하듯 한국의 보수 시민운동이 독재권력에의 종속성 속에서 시민사회의 건전한 성장을 방해하고 폭력과 혐오 등을 확산해온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민주정부의 수립, 그리고 남북관계 전환과 맞물려 일종의 반대세력으로 정치적으로 동원된 점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명백하게 87년 민주체제의 퇴행성을 드러낸 현상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합리적 보수의 자기 기반을 위한 노력이 앞으로도 많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은 보수 시민운동이나 관변단체의 현상을 두루 살필 수 있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장시간 토론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2016.8.2.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