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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임옥희 『젠더 감정 정치』, 여이연 2016

젠더 무의식, 가부장제의 또다른 이름

 

 

김수연 金秀燕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sooykim@hufs.ac.kr

 

173_537올여름 한국영화의 흥행사를 새로 쓰고 있다는 「부산행」의 성취는 여러가지겠으나 내러티브의 참신성은 아닐 것 같다. 영화의 감동을 책임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요소는 두 아빠(공유와 예비아빠인 마동석 분)의 어린 딸들을 위한 희생이다. 좀비들의 화려한 추격전을 걷어낸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막달의 임산부와 소녀가 손을 잡고 터널 안을 걸어가는 모습은 정희진(鄭喜鎭)이 최근 기고(「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 한겨레 2016.7.30)에서 우리나라 가부장제의 특징으로 꼽은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란 말을 떠오르게 한다. 영미학계에서는 2000년대 들어 거의 쓰이지 않지만, 유교문화의 잔재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에서 (가부장은 사라진 듯 보여도) 가부장제는 여전히 폐기하기 어려운 단어다. 이 시점에서 임옥희의 『젠더 감정 정치』는 “가부장제 대신 젠더 무의식으로 젠더의 감정정치를 설명”(33면)하고자 한다. 젠더 무의식은 “오로지 여성, 혹은 남성으로만 구획하려는 사회에 억압된 타자의 흔적”(34면)으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불안, 분노, 혐오 등의 다양한 정동(情動)으로 표출되며, 가부장제 역시 젠더 무의식화의 한 형태다. 즉 『젠더 감정 정치』는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인 ‘페미포비아’와 비정상·반인륜이 정상이 되어버린 후기 자본주의 속 ‘뉴 노멀’ 시대의 정치와 감정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뿌리깊은 젠더화를 좀더 포괄적이고 치밀하게 살펴보려는 시도다.

수록된 아홉편의 에세이는 저자가 인정하듯 각각 다른 맥락에서 쓰였으나, 주로 여성으로 젠더화되고 정치화되는 정동들에 대해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접근하되 미술과 문학, 신화의 예를 풍성히 차용하여 그 안에 함의된 젠더 무의식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통일성을 지닌다. 1장에서는 ‘신여성’ ‘팜므파탈’ ‘레즈비언 뱀파이어’ ‘귀요미’ ‘된장녀’라는 전형을 젠더 무의식의 측면에서 분석하고, 2장은 여성폭력이라는 난처한 주제로, 폭력을 통해서라도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여성의 경우를 “폭력의 창조성”(98면) 관점에서 분석한다. ‘비체 혹은 호러’라는 제목의 3장은 메두사의 신화적 의미를 크리스떼바( J. Kristeva)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이론을 복습하며 되새긴다. 4장에서는 흔히 여성의 굴종과 연결되어온 마조히즘의 젠더 정치성을 “여성적 주이상스( jouissance)”(131면)에서 새로이 발견해내려 한다. “여성이라는 이름만으로 연대하자는 구호가 공허하게 들리는 시대”(66면)임을 저자가 분명히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유독 “여성(들)은”으로 시작되는 문장이 많다는 점이 페미니즘‘운동’의 지난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준다. 특히 역사적·문화적·신체적 개별성을 간과하는 정신분석학에 관해 천착하다보니 의도치 않았겠으나 남녀 이분법으로 회귀되는 논의가 많은 것이 안타깝다.

5장 「수치의 얼굴」은 지나친 수치심에 가족을 살해한 실직가장의 뉴스로 시작되는데, “그런 수치가 폭력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아래 젠더 무의식이 작동”(164면)해서다. 6장과 7장은 추락과 애도가 어떻게 젠더화되고 정치화되는지, 나아가 어떻게 윤리적으로 재의미화될 수 있는지를 J. M. 쿳시(Coetzee)의 『추락』과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빌러비드』를 통해 설명한다. 현대 영국작가 앤젤러 카터(Angela Carter)의 동화 다시쓰기를 “윤리적 포르노그래피”(179면)로 소개하기도 해 영미문학 전공자에게 특히 흥미로운 장들이다. 다만 여성을 성적·계층적 “하위주체”(217면)로 상정하고 윤리적 타자로 승격시키는 방식은 약간의 업데이트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2000년대 초반 바디우(A. Badiou)와 보드리야르( J. Baudrillard)가 어차피 맞닥뜨릴 수 없어 좌절만을 안겨주는 ‘타자,’ 그 틈에 자본주의에 전용되어 길들여지고 상품화된 ‘타자’의 무용성을 선언한 후 타자의 절대적 권력에 대한 탈신비화가 진행 중이다. 특히 타자와 윤리, 여성 사이에 전제되던 연결고리를 끊고 좀더 구체적이고 개별적이고 양가적인 욕망의 윤리학으로 관심을 돌리자는 소리가 높다. 모순투성이의 불완전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록산 게이(Roxane Gay)의 『나쁜 페미니스트』(노지양 옮김, 사이행성 2016)가 이러한 관심을 보여주는 최근 저서의 예라 하겠다.

흥미롭게도 다음 장에서 현대 여성들의 모순된 욕망이 에바 일루즈(Eva Illouz)의 저작을 중심으로 논의된다. 『젠더 감정 정치』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설득력있는 8장에서 저자는, “한편으로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평등한 존재로 존중받길 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속받고 보호받고 싶은 여성들의 모순된 욕망”(262면)을 페미니즘이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이 장으로 끝났더라면 책의 전반적인 완성도가 더 높지 않았을까. 마지막 9장에서 저자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 설파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갈등보다는 조화, 반발보다는 연민”을 추구하는 것이 “‘뉴 노멀’ 시대에 어울리는 젠더 정치이론”(302면)임을 밝히며 책을 마친다. 법적 정의는 시적 정의에, 사회정의는 사랑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누스바움의 이상화된 문학사랑은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문제없이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그러나 누스바움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서사적 상상력”(297면)과 “사랑”(304면)은, 근래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에서 가장 경계되는 순수예술과 휴머니즘의 공생관계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누스바움의 동물론이 동물연구가들에게 지적당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녀()’와 ‘○○충()’ 씨리즈에서 보듯 여성혐오와 남녀갈등의 언어 창조에 있어서만큼은 필요 이상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문화이론연구소가 지난 20년간 보여준 활발한 학술출판활동의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젠더 감정 정치』 역시 짧은 서평에 담을 수 없는 방대한 인문학 자료를 바탕으로 페미니즘의 이론과 실제, 과거와 현재, 성취와 한계를 종횡무진 풀어낸다. “성차를 생산하면서도 동시에 거부해야 하는 이중구속 상태”(286면)가 페미니즘의 숙명이라면, 페미니즘은 집단으로서의 ‘여성’과 여성이지만 동시에 다른 여러 존재인 개인으로서의 ‘여성’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메우고 벌려가며 21세기에도 투쟁 중이다. 페미니즘의 많은 과거 이론과 업적이 오늘날 시대착오적이라고 조소받지만, 지난 30여년간 우리 사회의 ‘무의식적인’ 성차별을 의식의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한 페미니즘의 노력을 부정할 이는 없다. 페미니즘이 한번도 자기모순이나 내부분열 없이 진행되어온 적 없듯, 임옥희의 저서도 젠더 무의식과 감정의 정치화에 대해 일관된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망망한 무의식의 심연에 돌 하나를 던지기 위해 읽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