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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역사의 그늘 넘어선 서사 미학의 탐색
오창은 吳昶銀
문학평론가. 저서로 『비평의 모험』, 『모욕당한 자들을 위한 사유』, 『절망의 인문학』 등이 있음. longcau@hanmail.net
현기영 玄基榮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제주도 현대사의 비극과 자연 속 인간의 삶을 깊이있게 성찰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소설집 『순이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 『지상에 숟가락 하나』 『누란』, 수필집 『젊은 대지를 위하여』 『바다와 술잔』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만해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기영의 「아스팔트」(1984)는 4·3의 기억을 봉인한 ‘삼십육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 열세살이던 창주의 시선을 중심으로 4·3의 경험이 재구성되어 있다. 입산자들과 경찰 사이에서 혹독한 시절을 견뎌야 했던 새밋드르 마을 주민들의 일상은 위태로웠다. 산사람들에게 끌려가 두달여 동안이나 동굴생활을 감내하기도 했고, 하산한 이후에는 전략촌 건설에 동원되고 토벌대의 등쌀을 받아내야 했다. 그 시절, 무고한 주민의 입장에 서 있던 창주는 지서주임 임씨와 마을이장 강씨가 조작했던 일들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억압 속에서 제대로 진상을 밝힐 기회조차 없이 보이지 않는 대립관계만 형성해왔다. 창주는 이제 모교의 중학교 교감이 되어 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강씨가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에 놀라면서도 의아해한다. ‘삼십육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임종을 앞두고서야 강씨는 그 시절의 진상을 밝히려 하는 것이다.
「아스팔트」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강씨의 임종을 지키려 홀로 걷는 창주가 대면한 ‘아스팔트’이다. 다음과 같이 감각적인 문학적 언어로 아스팔트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부드럽게 뺨을 핥는 감촉, 자정이 넘은 시간 어둠속에 붐비는 이 눈송이들은 필경 사자들의 혼령이리라. 두런두런 뭐라고 저희끼리 속삭이는 소리. 산야 여기저기 풍우에 곱게 닦인 흰 백골과 삭은 고무신들…… 그러나 눈송이들은 아스팔트를 뚫지도 못하고 덮어싸지도 못한다. 눈송이들은 다만 견고한 아스팔트 위에 부딪쳐 허망하게 바스라지고 녹아버릴 뿐이다.
—「아스팔트」, 『아스팔트』(현기영 중단편전집2, 창비 2015) 90면.
창주는 새밋드르를 향하면서 ‘우르르 소소리바람’에 몸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죽은 혼령들의 거처인 솔숲에서 ‘검은 숲의 기억’을 환기했기 때문이다. 4·3에 대한 기억을 봉인하고 있는 것이 아스팔트다. 아스팔트의 불모성은 금기와 억압에 대한 은유이다. 아스팔트 밑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4·3 원혼들의 목소리가 봉인되어 있다. 관광객의 관문인 공항으로부터 아스팔트 관광도로가 제주도 산야 전체로 뻗어 있다. 제주도의 관광명소들과 중산간 마을 곳곳은 학살의 장소였고, 희생자들의 한이 맺혀 있는 원혼의 거처였다.
현기영은 봉인의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기억의 풀씨를 곳곳에 뿌린 작가다. 그는 4·3을 최초로 소설화한 「순이 삼촌」(1978)을 발표한 이래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1979)를 연이어 발표해 4·3의 진상을 세상에 알렸다. 이로 인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소설집이 판매금지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변방세계의 보편성’을 향해 있다. 중심 혹은 주류적 삶에서 비껴 선 채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통해 대안적 세계를 모색해왔다. 그것이 때로는 도시적 삶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기도 하고(「아내와 개오동」 「동냥꾼」 「겨우살이」 「망원동 일기」 등), 은폐된 역사의 진실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순이 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 「잃어버린 시절」 「길」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거룩한 생애」 「목마른 신들」 「쇠와 살」 등). 또는 역사 속 비주류로 취급되어온 ‘반란의 역사와 민중주의의 결합’이라는 성취를 이뤄내기도 했다(장편 『변방의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 현기영은 권력화를 좇는 변방이 아니라, 거부와 저항을 통해 인간주의를 구현하는 ‘탈중심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했다. 그 스스로 ‘변방에서 꾸리는 공동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앞에서 언급한 ‘아스팔트’의 이질성과 ‘변방의 미학’이 중첩되어 있다. 도시에서 살면서도 도시와 동화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고향의 세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형상화하지도 않는다. 대표작인 「순이 삼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제주도와 서울이 공간적으로 충돌하고, 1948년 4·3의 시간과 1978년 근대의 시간이 충돌한다. 그때의 사건에 대한 처절한 목격자 순이 삼촌의 목소리와 가해자인 고모부의 목소리가 공존한다. 4·3을 증언하는 다양한 목소리들 사이에서 소설 속 화자인 ‘나’는 타자이면서 주체이다. 「순이 삼촌」의 문학적 성취는 ‘변방의식’ 즉 ‘타자성’에 주춧돌을 놓았기에 빛나는 성좌처럼 돋보인다. 오로지 피해자의 입장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도 함께 들어야 하는 타자로서 ‘나’의 위치는 호소력이 강하다. ‘나’는 현재 제주도에 살고 있지 않고, 그 시절의 기억에 포박되어 있지도 않다. 역사적 사건으로만 4·3을 알고 있는 후속세대가 그러하듯이 기억은 역사화되어 잊히고 있다. 바로 이러한 ‘타자성’ 때문에 ‘나’를 통해 ‘재구성된 사건의 진상’은 ‘치열한 기억투쟁의 전장’으로 긴장감을 획득한다. 중심은 위계적이다. 변방은 연계적이다. 변방의식을 갖고 있는 작가는 세계를 주변부적이면서 비위계적인 공동체들로 파악한다.
현기영의 문학세계가 그의 등단 40주년을 맞아 중단편전집 3권으로 간행되었다. 지난 5월 6일 오후에 ‘인문까페 창비’에서 대담을 가졌다. 현대사의 현장에서 시대와 대결을 펼쳐온 원로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면에서 깊은 울림이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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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작인 단편 「아버지」는 모더니즘적인 심미적 열정이 돋보인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4·3에 대한 언급이 곳곳에 나옴에도 불구하고, 4·3소설로 의미화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을 주목해보자.
마을은 온통 타버린 잿더미였는데 그 운동장만이 햇볕에 내다 넌 넓은 광목천같이 희게 표백되어 있었다. 잔모래알들이 햇살을 받자마자 낱낱이 수직으로 되쏘아서 해가 번들거리는 중천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이었을까? 뜨겁고 바람기 한점 없는 정오. 고막에 달라붙은 매미 울음소리. 그림자들이 자기가 속해 있는 사물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시간. 그런데 운동장의 넓은 백색은 조용히 유동하며 복판의 흑점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것은 불에 타 죽은 산폭도라고 했다. 미친 짓, 개죽음이라고 했다. 맹목적인 정열이라고 했다. 맹목적으로 타올랐던 끔찍한 불꽃, 그러나 이제 그는 검게 타버린 나뭇등걸처럼 꺼버덩 나둥그러져 있었다. 타버린 숯이었다. 그냥 숯이었다.
—「아버지」, 『순이 삼촌』(현기영 중단편전집1, 창비 2015) 309면.
불타버린 마을에 오로지 한곳만이 흰빛을 유지한다. 잿빛과 대비되는 흰빛의 이미지가 극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거기에 흑점처럼 시신이 놓여 있다. ‘산폭도’라고 불리는 시신은 ‘맹목적인 정열’로 집약된다. 이 작품은 자의식의 언어로 점철된 소년의 내적 발화가 기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소설이다. 당시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은 심사위원은 정명환(鄭明煥) 이호철(李浩哲)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아버지」가 “공회당 앞마당에서 본 산사람의 송장”의 이미지가 강렬하다고 평했다. 심사평에는 또한 “어린 소년의 집념과 상상의 세계를 테에마로 삼”았고 “스타일과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했다. 등단 작품부터 ‘죽어가는 마을’, 제주의 노형리를 등장시킨 것이, 4·3의 소설화라는 현기영의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등단작에는 어떤 문제의식이 투영되어 있었을까?
등단작 「아버지」는 내가 대학 때 영향을 받은 ‘의식의 흐름’기법으로 쓴 작품이에요. 제임스 조이스나 윌리엄 포크너 심리소설 영향을 받고 소년의 의식과 상상의 세계를 펼쳐나간 거죠. 그런데 이 작품이 나중에 보니까 나도 모르게 4·3을 선택한 소설이었더라고요. 토벌대 형을 둔 소년과 한라산 무장대 아버지를 둔 소년의 대결을 다룬 소설이지요. 무장대 아버지를 둔 소년과 토벌대 형을 둔 소년이 조그만 연못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그린 거죠. 최초로 4·3을 배경으로 작품을 썼지만,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으리라는 생각은 안했어요. 이른바 미학적으로 다룬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하얗게 탈색된 운동장의 이미지, 조그만 웅덩이 물, 바위에 서 있는 토벌대 동생, 그 장면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요. 미학적, 심미적으로 접근하려는 의도가 있었지요.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첫 작품이 4·3을 다룬 작품이 되었죠.
그는 1975년 37세에 등단했다. 결코 젊지 않은 나이였다. 현기영은 한 글에서 등단까지의 자신의 문학적 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의 문학적 출발은 순수문학이었다. 나는 문학하기 위해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던 만큼, 내 문학의 모범으로서 서구문학에 경도되어 있었고, 내 소설이 개성적이고 실험적이고 심미적인 발명품이 되기를 원했다. 특히 심리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그런 류의 단편을 네댓편 습작해보기도 했다. 그중 작품이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소설에서의 역사의식」, 『젊은 대지를 위하여』(청사 1989) 100면.
문학을 놓지 않도록 그를 이끈 근원적 힘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1970년대 한국문학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순수문학, 심리소설에 매혹되어 있던 그가 ‘소설과 역사의식’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학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지요. 내 문학을 세련되게 하기 위해 외국문학을 전공했고, 문학만 해서 먹고살 수 없기 때문에 교사를 한 거죠. 영어교사가 시간을 많이 뺏기는 직책이잖아요. 보충수업도 있고, 모의고사를 출제하고 채점하고, 그렇게 하루종일 힘들게 노동하다가 밤에는 피로를 푼다고 술 마시곤 하니까 시간 빨리 가더라구요. 문단에 데뷔 못한 채, 10년 세월이 휘딱 지나가버리데요. 신문에 두번 최종심에 올라가기도 했어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윤흥길(尹興吉)이 당선될 때 들러리 서기도 했어요. 선생이라는 게 글쓸 수 있는 시간이 주말이나 방학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주말작가, 방학작가라는 말이 있지요. 이문구(李文求) 조태일(趙泰一)이 나와 동갑인데, 둘이 다 별세해서 마음이 아프네요. 동년배인 이들보다 10년 늦게 데뷔한 것이죠. 데뷔할 무렵에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서 근무했는데 교사로서 지적인 고민에 좀 시달렸어요. 1972년 시월유신으로 박정희 종신집권체제가 구축되어, 자유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었던 것이죠. 유신은 역사의 퇴행작업이었죠. 그 시대의 젊은 지식인들이 겪은 분노와 갈등을 지금의 젊은이들은 잘 모를 겁니다.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 그 억압의 공포 속에서 짓눌린 자유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겁니다. 그때 김지하(金芝河)가 말했듯이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를 갈구했던 거예요. 유신체제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그 체제를 긍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자책감에 시달렸죠. 펜대를 쥐고 있는 자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 체제를 긍정하는 것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비칠 게 아닙니까. 내가 데뷔할 때가 그런 시기였지요. 내가 동아일보를 통해서 데뷔했는데, 바로 그때 그 신문에 백지광고 사태가 발생했어요.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유신을 거부하면서 파업을 벌이고, 그래서 쫓겨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죠.
동아일보 당선소감은 “당신 이젠 고생문이 활짝 열렸네요”라는 말로 시작한다.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이 했던 말을 서두에 옮긴 말이라고 한다. 이 말로 당선소감을 쓴 이유는, 작품 창작에 매진하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으리라. 그런데 이 말 속에는 4·3항쟁을 소설화하려는 어떤 무의식의 결기가 한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창작과비평』 1978년 가을호에 「순이 삼촌」을 발표하고, 단행본을 간행한 후 군부의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과 감금을 당한 것이 1979년 11월 26일이었다. 이후에 『순이 삼촌』은 금서로 묶이면서 수난이 시작되었다. ‘고생문’이 전혀 다른 의미로 열리면서 현실과 대결하는 고난이 시작된 셈이다. 「순이 삼촌」이 창작되던 시기가 ‘긴급조치 9호’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는 ‘모더니즘 성향의 이른바 순수문학을 하려 했는데, 시대가 나를 리얼리즘 문학으로 이끌었다’고 한탄하는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작가를 역사적 사실로 강하게 끌었던 것일까?
이상한 끌림 같은 것이 나로 하여금 「순이 삼촌」을 쓰게 했어요. 내가 용기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요. 4·3참사의 수많은 원혼들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내 생대가리가 사자의 아가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더라고요. 「순이 삼촌」을 쓰고 작품집 『순이 삼촌』이 나오기 전에 4·3에 대해서만 잇달아 세편 발표했어요. 「순이 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지요. 이제는 ‘그만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시하는 눈길이 느껴졌어요. 그때 데뷔작 「아버지」의 세계인 이른바 순수문학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죠. 1978년 『창비』에 「순이 삼촌」을 발표하니까, 학계와 학생 운동권에서 호응이 있어요. 특히 제주도 출신 운동권 학생들이 오는 거예요. 이미 감옥에 갔다 왔거나 앞으로 감옥에 갈 젊은이들이었는데, 같이 놀았지요. 친목회 형태로 한달에 한번씩 만났어요. 그들 중 나중에 유명해진 후배로 김명식(시인, 평화운동가) 강창일(국회의원) 고희범(전 한겨레신문사장) 문무병(시인, 민속학자) 등이 있죠. 이듬해 4월 3일에는 몰래 4·3위령제도 지냈어요. 위령제를 지낸다는 것 자체가 그때는 몹시 두려운 일이었거든요. 우리끼리 모여서 제사상 차리고, ‘역사의 주인은 민중이다’라고 제상 위에다 큼직하게 써붙이고, 조시와 조사를 낭독했어요. 몇년 후 이 모임은 제주사회문제협의회라는 이름으로 4·3 진상규명을 위한 최초의 조직운동 단체가 되지요. 그해, 그러니까 79년 11월 중순에 『순이 삼촌』이 출간되고, 열흘이 지난 11월 24일에는 ‘YWCA 위장결혼식사건’이라고,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죠. 마침 그날이 친목회 모이는 날이어서 만나서 책도 줄 겸해서 YWCA에서 보기로 했죠. 여섯명이 그 집회에 참가했는데 그중 한명이 붙잡혔어요. 내가 준 『순이 삼촌』을 갖고 있었던 거죠. 4·3이라는 철저한 금기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그 도전에 대한 보복을 어느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게 너무 빨리 닥쳐왔어요. 위장결혼식사건은 토요일에 있었는데, 일요일 지나고 월요일에 내가 근무하던 서울사대부고로 체포하러 온 거예요. 중부경찰서를 통해 남산의 서빙고 보안사로 잡혀갔지요. 체포돼서 사흘간 혹독한 고문을 당했어요. 피멍이 잦아드는 기간이 한 보름 정도인데, 거의 한달간 철창에 가둬놓더군요. 그 고문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내가 4·3의 마지막 희생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단편집 『순이 삼촌』과 『아스팔트』는 도시성과 타자성이 대결하는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도시적 삶에 틈입한 ‘타자성’, 혹은 지식인의 자의식이 근대적 삶과 충돌하는 양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초기작 중 4·3사건을 다룬 「순이 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와 이후 작업한 「잃어버린 시절」 「아스팔트」 「길」 등과 대비되는, 「아내와 개오동」 「동냥꾼」 「겨우살이」 「망원동 일기」도 중요한 작품들이다. 제주 출신으로서 갖는 자의식이 도시적 근대인의 삶과 충돌할 때 고뇌하는 모습이 곳곳에 스며 있다. 실제로 「순이 삼촌」도 ‘서울’이라는 도시공간과 ‘제주도’라는 타자의 공간이 충돌하는 양상으로 읽을 수 있다. 초기 작품 속에 스며 있는 타자의식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개인으로부터 기원한 것일까, 역사적 시간 혹은 공간적 격리로부터 기원한 것일까?
그러한 나의 사고 틀은 체질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도시에 대한 반감, 부적응이라고 할지 하는 것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어요. 나에게 도시라는 것은 곧 서울이고, 서울이 곧 중앙이죠. 지방에도 대도시들이 있지만 서울을 모방한, 뿌리가 허약한 변방처럼 보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뒤 지금까지 계속 서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한번도 섬을 떠나 육지에 상륙한 적이 없다고 생각해요. 몸은 상륙해 있지만 지금 이 나이가 되도록 정신은 상륙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체질이, 유전자가 그렇게 시키는 것 같아요. 제주도 주민 중에는 나와 같은 사고의 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지요. 아까 ‘타자성’이라고 했는데 참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내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집단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제주 주민들은 중앙에 대한 선망과 반감을 동시에 갖고 있어요. 섬사람에게는 대개 배타성이 있어요. 강력한 외세에 대한 방어본능의 표현인 것이죠. ‘우호적인 외세’란 말이 어불성설이듯이, 섬사람에게 중앙 혹은 육지 세력은 약탈하거나 갈취하거나 불이익을 주거나 하는 외세일 따름이죠. 그래서 육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육지것, 육지놈이라고 부르면서 예의 경계를 합니다. 육지나 중앙에서는 섬주민을 멸시하여 섬것, 섬놈이라고 부르지요. 4·3항쟁의 성격을 살펴보면, 물론 정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유일한 것은 아니에요. 단독정부 반대와 통일운동의 의미가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오로지 고귀한 명분만으로 목숨 걸고 봉기하겠어요? 그것은 강요된 저항이었어요. 무자비한 탄압, 무자비한 고문, 고문치사 사건이 잇달아 세건이나 발생했어요. 이런 극악한 상황에서 견디다 못해 일어난 거예요. 봉기선언문에서 그들은 “탄압이면 항쟁이다. 앉아서 죽느니 서서 싸우자”라고 했어요. 그것이 4·3이에요. 무자비한 탄압의 주체는 육지세력이었죠. 충남부대니 충북부대니 전남부대니 전북부대니 철도경찰대니, 모두 육지세력이었어요. 특히 서북청년단의 만행이 악명 높았습니다. 경찰뿐 아니라 군대도 대부분 육지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죠. 나중에 군대가 개입하면서 엄청난 대학살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치 이데올로기 이외에 육지것과 섬것 간의 역사적으로 유구한 갈등이 적극적으로 표현된 사건이 4·3항쟁인 것이죠. 제주도는 한국 내의 타자, 내국식민지였던 거죠.
1970년대 후반에 4·3항쟁을 재현·창작하는 주체로서 현기영의 위치는 문학사적으로 어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일곱살 때 4·3을 겪으면서 고향 마을인 노형리가 잿더미로 화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78년에 「순이 삼촌」을 창작했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기에 기억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사건이었고, 창작하던 당시에는 제주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요컨대 창작주체로서 작가는 어린 시절에 겪었기에 경험적으로도 외곽이고, 공간적으로도 제주 바깥에 있었다. 사건을 재현하는 양상도 발화의 주체이기보다는 증언을 들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내부이면서 바깥인 발화자가 4·3을 형상화한 소설의 뛰어난 성취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금도 「순이 삼촌」을 비롯한 현기영의 4·3항쟁 소설이 의미있는 이유가 이러한 ‘내부적 타자성’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은 4·3사건이 역사화됨으로써, 세대적으로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증언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간접 경험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4·3이다. 현기영의 초기 소설은 역사적 사건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강렬한 이미지의 포착, 상징적 묘사, 집요한 심리탐색이 결합되었기에 문학적 형상화로서 의미가 있었다. 창작주체는 역사의 중심에서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상징적으로 서사화가 가능해야 한다. 역사적 사건은 잊혀질 개연성을 갖고 있기에, 이를 문학적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 상처가 한 작가를 통과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그 사건을 재현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전범이다. 근대적 주체, 모더니즘적 주체인 작가의 위치에서 시대적 맥락을 포괄하는 가운데 증언의 의지를 뛰어넘는 표현의 의지가 공감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내면적 상처’와 ‘역사적 상처’가 만나는 지점에서 작가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역사적 사건에 대면한 모더니스트적 주체는 어떤 방식으로 ‘공감’을 불러올 수 있을까?
문단에 데뷔하고 난 다음에는 유신정권의 가혹함에 ‘이것은 아니다’라는 부정의 제스처를 어설프게나마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역사에 비유해서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소드방놀이」를 썼고, 동아일보에 연작 꽁뜨 ‘심야의 메모’를 실었어요. 그중에 꽁뜨 「어떤 챔피언」이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뻔하다가 그냥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어요. 그 꽁뜨에서 십년 동안 잔혹한 반칙을 사용하여 계속 자리를 지켜온 어떤 챔피언이 역량이 뛰어난 도전자를 이번에도 반칙을 사용하여 넉아웃 시키고 맙니다. 알레고리 수법의 작품이죠.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 “이 시대에 이 챔피언을 이길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는가”였는데, 그러니까 박정희와 김대중의 이야기인 것이죠. 신문사에서는 처음에는 몰랐다가 나중에 알고서는 ‘어쩌자고 이런 것 썼느냐’고 화를 내더군요. 펜대를 쥐었다는 것은 말할 권리, 대중을 향해 발언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것 아닙니까. 작가의 발언이 좋은 데 씌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글을 쓴다는 데는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의무도 있는 것이지요. 문단에 데뷔해서 펜대를 쥐었을 때, 나 자신을 포함한 제주인의 집단적 트라우마의 원인인 4·3의 대참사에 대해서 쓰지 않고서는 문학적으로 단 한발도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았어요. 4·3은 워낙 두려운 소재인지라 서너편만 쓰고 몸을 돌려 순수문학 쪽으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되더라고요. 그러한 리얼리즘의 소재를 제대로 현상화하기 위해서 강한 표현의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안되었죠. 내가 그려내는 희생자들과 나 자신을 동일시해야 했어요. 취재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동일시 현상이 내게 일어나더라고요. 제대로 재현해내겠다는 절실한 마음은 깐깐한 언어의 절약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미학적 효과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해요.
2015년인 올해는 어느덧 4·3항쟁 67년째를 맞았다. 그간 4·3을 둘러싼 논쟁은 잦아들 날이 없었다. 2000년 국회에서 ‘4·3특별법’이 통과되었고, 2003년에는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으며, 2014년에는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역사적 상처에 대한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있다. 문학 쪽에서도 2014년에 제주 출신 어느 소설가가 국가기념일 제정에 이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현기영은 한 인터뷰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씌어진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가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를 언급하면서 ‘재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4·3을 둘러싼 기억과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망각에 대항하는 기억의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 있을까.
4·3을 부정하려는 세력은 아직도 온존하고 있어요. 4·3을 부정·폄하하는 표현을 공개적으로 하는 세력은 얼핏 소수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거대한 저변이 있습니다. 그 세력은 4·3을 부정·왜곡·폄하하면서, 대중이 4·3을 잊기를 원해요. 망각의 정치를 구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각의 정치’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죠. 아우슈비츠 정문에 씌어 있는 표어 문장에 4·3을 대입해보면, ‘4·3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4·3을 잊어버리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죠. 세월호를 넣어도 마찬가지예요. ‘세월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세월호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망각의 정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제2의 기억운동’이 있어요. 이 말은 과떼말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예요. 재기억, 리메모리(re-memory)운동이지요. 대참사를 없었던 것처럼 부정하고 망각하게 만들면, 그런 사태가 되풀이되는 거예요. 재기억은 자꾸자꾸 되새김질하는 행위지요. 문학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기도 하고요.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작품인 『빌러비드』(Beloved)가 재기억을 말하고 있어요. 모리슨은 흑인 여성작가인데요, 지금도 미국사회에서 흑인이 백인과 평등하다고 보지 않잖아요. 평등으로 위장되어 있는 불평등사회죠. 모리슨은 백여년 전 남북전쟁 무렵에 흑인이 당했던 잔혹사를 당장에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재현해냄으로써 지금의 흑백 간 불평등 관계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죠.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이야기는 너무 흔해 빠지고 진부한 이야기 아니에요? 그런데 모리슨은 백여년이 지난 일을 방금 일처럼 재현해내고 있어요. 윌리엄 포크너 수법을 활용해서 말입니다. 재능있는 작가가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쓰느냐에 따라, 오래되고 진부한 소재가 오히려 새로울 수 있는 것이죠.
역사적 기억의 재현은 항상 편파적이다. 분단현실 속에서 4·3을 둘러싼 역사적 접근에서도 입장의 차이가 크다. 현기영은 4·3에 대해 “역사적 기억의 일부만 용납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 “양민 피해자뿐 아니라, 항쟁 패배자의 기억은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항쟁 패배자의 기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기억의 복원이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4·3항쟁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때 목숨을 잃었어요. 통계적으로 제주도 젊은이 절반이 죽었다고 해요.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젊은이들이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남로당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당한 거예요. 수많은 양민이 그 이름으로 학살당했습니다. 해방공간에서 남로당은 한때 남한 민중의 70~80%의 지지를 받고 있던 정당이에요. 그러다 몰락했죠. 남로당은 남에서도 배제·배척당하고, 북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버려진 거죠. 사회적 정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역사에는 여러 단계가 있죠. 어느 단계의 사회적 진실이 다른 단계에서는 배척되고 다른 진실이 성립되고, 또다른 단계에서는 또 그 나름의 진실이 그 사회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해방 공간, 그 초창기 단계에서 남로당의 미덕을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67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우리는 남북 양쪽으로부터 버려진 채 허공에 떠돌고 있는 그 낙백(落魄)의 슬픈 원혼을 큰 아량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기억, 패배자의 기억도 기록하고 보듬어야 한다는 생각인 것이죠.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과 재현의 측면에서 역사소설에 투여한 공력도 만만치 않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방성칠 난(1898)과 이재수 난(1901)을 그린 『변방에 우짖는 새』(1983)와 일제 강점기 ‘잠녀항일투쟁’을 그린 『바람 타는 섬』(1989)은 민중사의 복원, 혹은 제주라는 공간의 역사성을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현기영이 역사소설에 접근한 맥락과 의미, 그리고 제주라는 공간과 ‘구한말’ ‘일제강점기’라는 시간의 만남을 통해 궁극적으로 표현하려던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제주도는 옛날부터 항쟁의 전통이 있었어요. 제주도는 버려진 땅, 예부터 원악도(遠惡島)라고 불렸어요. 유배인의 자손도 많고, 사화(士禍)와 연관된 도망친 자들의 후손도 있고요. 그래서 늘 중앙에 대한 불만이 있는 거예요. 베푼 것 없이 가렴주구(苛斂誅求)의 혹독한 정치가 행해졌는데, 구한말이 되면 항쟁이 자주 일어나요. 그 연장선에서 4·3이 일어난 거예요. 한국에서 제주도는 특이한 존재예요. 제주도를 포함해야 정당한 한국사가 완성됩니다. 구한말에 광무(光武) 연호를 쓰면서 대한제국이 되잖아요. 고종은 황제가 되고요. 당시 조선은 열강의 간섭하에 청국에서 어정쩡하게 떨어져 나오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갖게 되죠. 천주교 초대 조선교구장이었던 프랑스 미뗄 주교가 나뽈레옹 대관식 본따서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해줬어요. 하지만 어떻게 식민지도 없는데 제국이고 황제냐 하면서 사람들이 웃을 것 아니에요. 그러자 장지연(張志淵)이 이에 대해 논설을 발표해요.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쓰기를 ‘충분히 제국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식민지로서 북으로는 여진을 갖고 있고, 남으로는 탐라를 갖고 있다’고 했죠. 100여년 전 이야기예요. 그만큼 중앙에서 탐라를 식민지로 생각한 거예요. 여진은 함경북도고요. 우스갯소리 같은 사례지만, 그만큼 내부의 식민지, 타자로서 제주의 역사가 포함되어야 한국 역사가 완성되는 거죠.
당시 4·3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붉은색 칠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탐구해본 거죠. 백여년 전의 역사로 되돌아가서 이재수 난과 방성칠 난을 공부했지요. 제주도는 대대로 항쟁의 전통이 있었어요. 당할 대로 당하다가 참을 수 없으면 민란의 형태로 억울함을 표출합니다. 4·3봉기는 단지 정치 이데올로기의 표현만이 아니고, 중앙과 변방의 오래된 갈등이 종기처럼 곪았다가 마침내 터진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군부독재 시절, 한국 대학의 국사학과에서는 현대사 다루는 것을 금기시했어요. 한국현대사를 다루면 다치기 쉽다고 했죠.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일부 진보적 사학도들에 의해 현대사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는데, 현대사 연구 자체가 민주화운동의 한 분야가 되다시피했죠. 그것은 왕조사관이 아닌 민중사관에 입각한 역사기술이었어요. 그러한 관점에서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와 『바람 타는 섬』이 씌어졌죠. 이재수 난과 해녀 항일투쟁(1932)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임에도 역사책에 안 나와요. 이 두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쓴 소설입니다. 문학과 사회사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작품이라고 봐야겠죠. 『변방에 우짖는 새』의 경우, 유홍렬(柳洪烈) 교수가 천주교의 입장에서 쓴 『증보 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오는 ‘제주도 신축교난’(이재수 난)을 통해 자료를 접했어요. 당시 제주도에 유배와 있던 김윤식(金允植)의 『속음청사(續陰晴史)』 기록이 큰 도움이 되었죠. 그 당시의 신문 『황성신문』이나 『한성순보』 등도 읽었고요. 『바람 타는 섬』의 경우엔, 그것을 쓰려고 하니까 옛날 ‘가리방’, 프린트 자료 같은 것들이 저절로 나를 찾아 나오더라고요. 동아일보 자료 등을 통해서도 접근했고요. 구술취재도 했지요. 거의 내가 발굴하다시피 한 자료들이죠.
근대사회에서 고통은 육체적인 동시에 ‘내면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근대사회에도 외상(外傷)으로서의 신체적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내상(內傷)으로서의 정신적 고통’이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 장편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는 험난한 시대의 ‘성장’ 혹은 ‘성장통’에 관한 공감 가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에는 먹구슬나무에서 떨어져 ‘땜통’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야기를 비롯해 연주창 수술, 대장간에서 쇠바퀴에 새끼손가락을 크게 다친 이야기 등이 인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사회적 상처로 확장되기도 하고, 역사적 상처로 의미화되기도 한다. ‘고통의 서사화’가 현기영 소설의 중요한 쟁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소설을 통한 ‘공감’ 혹은 소설을 통한 ‘개인적 기억의 역사화’가 갖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어린 시절에 고통이나 몸에 오는 상처 같은 것 많았지요. 매미 잡으러 나무에 올라갔다가 매미가 바로 눈앞에서 확 날아오르는 바람에 놀라서 떨어져 생긴 땜통이 있어요. 그 상처가 부끄러워서 빨리 고등학교 졸업하기를 바랐던 적이 있죠. 자연스럽게 머리를 길러서 가릴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었어요. 이런 것들이 성장과정이죠. 그런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요. 나무에서 떨어지고 난 다음부터 고소공포증이 생겨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무섭고 그래요. 어린 시절에 다이빙대 비슷하게 점점 높아지는 바위들이 물가에 있었어요. 제주도의 용두암 근처에 있는 용연이라는 곳이에요. 여름철에 거기서 초중학생 아이들이 다이빙을 하는 거예요. 고소공포증 이겨내면서 한단계 한단계 높이 올라가는 것, 그런 얘기를 독자들이 재미있어 해요. 고통과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해가는 것, 그런 심리적 억압을 극복하는 것이 성장과정이지요. 어렸을 때는 말을 더듬었어요. 세상에 나가려면 말을 잘해야 하는데, 말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문학을 하게 된 건데요. 4·3의 상처는 나로 하여금 말을 더듬게 하였고, 나아가 4·3문학을 하게 만들었어요. 내 상처 이야기를 확대하면 내가 속한 공동체의 상처 이야기가 되지요. 젊은 작가들이 개인의 상처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물론 문학적으로 그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인간은 개인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존재합니다. 개인의 상처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상처에 대해서도 둔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근래 나온 한강(韓江)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상처를 이야기하는데, 잘 썼어요. 특히 마술적 리얼리즘 방식으로 형상화해낸 유령의 무리는 퍽 감동적이었어요. 토니 모리슨의 소설이나 황석영(黃晳暎)의 『손님』, 가르시아 마르께스(G. G. Marquez)의 소설이 사용한 방식이기도 하죠. 리얼리즘의 반대 개념이 판타지인데, 리얼리즘 소설에 판타지를 잘 섞어 넣으니까 참 좋더라고요. 진정성을 가지고 핍진하게 밀고 나간 그 열정이 뜨겁게 느껴졌어요. 광주항쟁이 지금 소비향락의 천박한 세태에 의해 망각되고, 적대적 세력에 의해 부정되고 폄하되면서 모욕을 받는 일도 생기고 있어요. 지금이야말로 재기억이 필요한 때이지요. 그걸 해내고 있는 것이 『소년이 온다』라고 생각해요.
작품으로 이국 독자들과 만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일 듯하다. 현기영의 작품들은 일본, 미국,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 번역되었다. 또한 직접 각국 독자들과도 만남을 가진 경험이 있다. 특히 일본 독자들과의 만남은 비교적 기회가 많았다. 『순이 삼촌』의 일본어 번역은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金石範)이 직접 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토오꾜오에서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토오꾜오’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가해 김석범을 비롯해 현지 독자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가졌다. 4·3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사건을 받아들이는 일본 독자들의 공통감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번역으로 만나는 현기영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올해 4월에 초청받아 토오꾜오에서 강연을 했어요. 600여명이 모였고, 절반은 교포, 절반은 일본인이라고 하대요. 그분들이 다 청강료를 내고 들어와요. 우리가 본받을 만한 강연문화가 아닙니까? 그들도 태평양전쟁 겪으면서 민중이 국가에 동원되어 사지에 내몰려 수없이 희생되었죠. 4·3 희생자도 일본의 태평양전쟁 희생자도 모두 국가에 의한 희생이죠. 거기서 나는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 민중이 어리석으면 언제든지 국가권력의 희생물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죠. 평화는 전쟁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고 ‘평화가 평화를 낳는다’는 평화사상에 대해 공감하는 것을 느꼈어요. 『순이 삼촌』이 재판(再版) 찍혀 읽히고 있었고, 『지상에 숟가락 하나』도 곧 재판에 들어간다고 해요. 어린 시절, 사춘기 시절 나의 경험이 이국땅의 자기네 경험과 어쩌면 그렇게 비슷하냐고 놀라워하더라고요. 그들과의 환담이 즐거웠어요.
노년의 작가가 갖는 문학적 힘을 증명하기 위해 4·3을 정치적 상황이 아닌 ‘인간에 대한 근본 물음’에 입각해 다루는 작품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년의 양식이 새로운 서사적 결을 형성하리라는 기대가 크다. 작업에 투영할 핵심적 문제의식을 듣고 싶어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역사에서도 각 단계마다 그 나름의 진실, 그 나름의 시대정신이 있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도 유소년, 청장년, 노년 단계가 있고, 매 단계마다 그 나름의 진실과 아름다움, 미덕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처해 있는 노년 단계에도 나름의 진실과 미덕이 있을 거예요. 젊어서 안 보이던 것도 보이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죠. 그래서 나는 이제 내 노년에 걸맞은 소설을 쓰려고 해요. 사실, 준비는 거의 다 돼 있어요. 자료도 모아놓았고 여러번 읽어서 숙지했고 등장인물도 만들어놓은 상태예요. 플롯 만들기가 어려워서 미루다보니 2년이 넘었네요.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처지예요. 곧 쓰기 시작할 겁니다. 해방공간을 당장 벌어지는 현재의 일처럼 되살려보려고 해요. 새로운 국가, 새 세상, 새 사람을 꿈꿨던 그때 젊은이들의 열정을 그리고 싶습니다. 열광 속에서 늘 뛰어다녔던 젊은 그들이 어느 순간 차가운 죽음으로 변해버리는 그 기막힌 상황을 잘 그려내보려고 합니다. 4·3의 3만 영령에게 바치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진혼곡을 만들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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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은 2002년에 나온 산문집에서 ‘불멸과 부패’를 한자리에 놓으며, 문학의 갱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단언컨대 문학은 불멸이다. 과거에 몇번 죽었던 문학은 앞으로도 몇번 더 죽을지 모르나, 또한 그때마다 되살아날 것이다. 다만 내일 살기 위해서 오늘 죽을 뿐이다. 부패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항체(혹은 혁명)가 생기는 법, 인간 역시 부패를 통해서 새로워진다. 그리하여 인간은 불멸이고, 인간이 존재하는 한 문학 역시 존재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진보가 아니라 퇴행임을 일깨워주는 문학, 인간과 상품의 만남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문학, 인간긍정의 문학을 우리는 꿈꾼다.
—「초토의 꿈: 인간 긍정의 문학」, 『바다와 술잔』(화남 2002) 200면.
이 글을 읽고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가 생각났다. 사이드는 예술가의 노년에 대해 독특한 논의를 펼쳤다. 상식적으로는 노년의 삶이 문화적 통합을 지향하리라고 기대한다. 기존 체제에 자신을 맞추려 하고, 사회적 질서에도 순응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사이드의 견해는 달랐다. 베토벤의 예를 들어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안이하게 결합하려 하지 않고,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힘’이야말로 말년의 양식적 특징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관습적인 것의 영토’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망명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예술가의 말년의 양식적 특징이라고 보았다.
현기영은 ‘말년의 양식’과 관련해 ‘문학에는 정년이 없다’고 말하며, ‘세상과 불화하는 자신’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본다고 했다. 그가 앞으로 발표할 작품은 세상과 불화하는 젊은이들의 열정에 대한 장대한 서사일 것으로 보인다. 문학은 변방의 세계를 통해 중심의 과녁을 겨눈다. 그가 작업 중인 서사의 세계가 어떤 ‘말년의 양식’을 펼쳐보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