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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촛불의 눈으로 한국문학을 보다

 

데모스의 재구성 그리고 시

 

 

황규관 黃圭官

시인. 시집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산문집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등이 있음. grleaf@hanmail.net

 

 

이중나선으로서의 촛불

 

지난가을에서 올 초봄까지 계속됐던 광장의 촛불은 분명 우리에게 일대 사건이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유일한 기원이 있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촛불의 상류를 향해 비판적 분석을 또는 활달한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현상적으로는 이명박 집권 초기의 광우병 쇠고기 사태를 떠올릴 수도 있으나 거기에도 뭔가 꺼림칙한 점이 있다. 이명박의 등장에는 참여정부의 실패를 핑계삼은 자본주의적 욕망의 전개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간을 거꾸로 돌려 이명박의 등장을 복기할 때 밀려오는 곤혹스러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어느날 갑자기 펼쳐지지 않았다. 거기에도 참담한 과거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명박의 등장과 더불어 한국사회의 비틀린 욕망은 거리낌 없이 대로를 활보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런 욕망이 활개를 치게 되면 사회의 전반적 윤리가 동반 하락한다는 진리(?)를 확인하는 일은 의외로 치명적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최형익 옮김, 비르투 2011)에서 약간의 위트를 섞어 “사람의 힘으로 없앨 수 없는 것은, 설령 손해가 종종 따른다 해도 허용되는 게 상책이다. 사치와 질투, 탐욕, 만취에서 기인하는 악행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용인해야 한다. 그 이유는, 비록 그것이 악덕이긴 하지만, 입법 행위에 의해서 결코 금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376면)라고 말했지만, 자본이 사회와 국가권력을 구성하기까지 하는 자본주의체제에서 자본 위에 올라탄 ‘악덕’의 창궐은 공동체의 물적 토대를 특히 심각하게 파괴한다. 더군다나 한국사회는 IMF구제금융체제 이후 국가와 사회가 그 구성원의 삶을 언제든 방기할 수 있다는 체험을 깊이 내면화해왔다. 그런 토양 위에서 세속적인 욕망들은 도리어 능동적인 힘을 발휘해왔던 것인데 문제는 이 욕망들이 개체의 보존 본능(코나투스)을 넘어 타자의 삶마저 파괴하고, 성찰하는 이성마저 내팽개쳐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촛불항쟁의 심층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는 좀더 생산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지난 촛불 때 벌어졌던 여러 잡음들—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과 투쟁노선의 설왕설래를 이해하는 단초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아가 촛불항쟁의 성격 규정과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의 예상 진로를 유추하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것은 다시 우리에게 과연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역량이 존재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역사가 발화된 언어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에 발화된 언어들을 비롯해 침묵 속에 내재된 무의식의 언어들을 검토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결론적으로 지난 촛불항쟁은 어떤 이중나선 구조로 보이는데, 하나는 이명박·박근혜의 시간을 다시 옛 민주정부(?) 수준으로 되돌려 87년체제를 완성하고자 하는 목소리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87년체제에서 또다른 억압을 발견한 목소리들.

이 이중나선의 존재는 지난겨울의 광장에서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이중나선은 함께 대통령을 탄핵하는 초유의 사건을 만들어냈지만, 이것도 또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허여된 사건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87년체제 안에서 항쟁은 갈무리되었으며 이어진 조기 대선에서 이중나선 중 하나는 체제 안으로 빠르게 휘말려 들어갔다. 하지만 다른 하나, 즉 87년체제에서 억압을 발견한 목소리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변함없이 활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중나선은 DNA구조 같은 과학의 원본과는 다르게 결합되어 있었다. 너무도 쉽게 분리 가능한 느슨한 결합관계로 잠복해 있다가 촛불항쟁으로 가시화되었을 뿐이다. 지난 촛불항쟁에 혁명적 요소가 있었다면 87년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리비도가 출현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중나선의 분리를 촉진한 밑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경제성장이 무엇인지 몸소 경험한 세대와 이들에게 반감을 가진, IMF금융신탁통치체제를 내면화한 세대 사이의 괴리일 가능성이 크다. 돌이켜보면 어느 집권세력이건 경제성장을 강조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참여정부의 실패도 사실 경제성장의 신화를 버리지 못해서, 아니 경제를 성장시켜달라는 사회의 요구를 감당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 아니었던가. 세계 자본주의가 더이상 성장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뉴프런티어가 없으면 경제성장이 불가능한 법인데, 참여정부는 비정규직 양산의 제도화와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등을 경제성장의 뉴프런티어로 삼았고 이 지점에서 이중나선이 발생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시절 문학장에 불었던 미래파 바람은 노동자의 삶을 저당 잡고 경제가 운용되던 참여정부 복판에서였다. 이 진단에는 마땅히 정치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미래파 바람의 사회경제적 바탕에 고도화된 금융자본주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사실 김영삼정부 때부터 시작된 이른바 ‘국제화’가 IMF금융신탁통치를 통해 급격한 변침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IMF금융신탁통치 시절, 그러니까 김대중정부 시절 유행한 광고 카피는 “바이 코리아”와 “부자 되세요”였는데, 이 언어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근면·성실을 강조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시쳇말로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에 참여하라는 유혹이나 다름없었다. 급기야 이런 금융자본 환경은 참여정부에 와서 ‘동북아금융허브’라는 국가정책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금융자본주의의 특징은 모든 사물 관계가 금융 기호와 상동성을 가진 기호들로 대체된다는 사실이다. 금융경제는 실물경제를 압도하며, 고전적인 부의 축적 과정을 조롱거리로 만든다. 그런데 금융자본주의는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그것은 언어와 정보이며, 이 언어와 정보는 그 속도와 효율을 위해 인코딩(encoding)-디코딩(decoding)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과정의 누적과 복잡화를 통해 사회는 인코딩과 디코딩 사이에서 기호로 표상되게 마련이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경제적 무의식이 시의 언어에 아무런 작용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야말로 ‘관념론’적인 발상은 아닐까? (자본주의 근대문명 자체가 그렇지만)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고도화는 사물과 사건의 독특성을 제거하는 특징을 갖는데,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들은 (자본축적과) 인코딩-디코딩 과정에서 걸림돌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물질노동의 대두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환경을 바탕으로 한다. 비물질노동의 대두는 그 짝패로 물질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격하시키는 현상을 동반한다. 참여정부 시절 역대 정권 최대로 노동자가 구속·수감되었고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며 만들어진 비정규직보호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는 데 힘을 보탠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실제적인 삶의 감각을 발생시키던 노동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배제되었으며, 따라서 언어화해야 할 필요가 없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문학이라는 상부구조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노동이라는 하부구조가 눈앞에서 치워졌다고 하면 지나친 걸까.

그렇다고 해서 미래파 바람이 이러한 금융자본주의에 동조하거나 협력하기 위해 불었다는 말은 아니다. 도리어 우리 시에서 언어가 지나치게 기호화되고, 현실을 통해 언어를 갱신하기보다 기존 언어를 통해 언어를 재배치하는 과정에 돌입하게 된 사회적 밑바탕이 금융자본주의의 본격화가 아니었던가, 하는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가 사회경제적 바탕에 전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물음은 다른 맥락이 더 추가되어 검토해야 할 가설이지만, 오늘날 점점 더 심해지는 기호화 경향을 감안하면 마냥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데모스’ 없는 민주주의

 

채효정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삶이 보이는 창』 2017년 여름호)에서 민주주의를 논할 때 언제나 소환되곤 하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놨다.

 

“시민 신분은 토지 소유자와 전사들로 구성된 귀족계급에 제한되었고, 시민 신분에 속하지 않은 신분 집단은 노동을 담당했다. 당시의 지배적 가치는 노동을 단지 동물적 생존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여 시민이 노동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에 반해 여가는 자유와 정치, 예술적 창조와 같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인간 존재의 차원을 구현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이것은 근대 정치학의 어떤 지배적 해석 때문에 만들어진 가설이다. 그럼에도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진리의 테제가 되었지만 말이다.

아테네의 데모스는 분명 노동하는 사람들이고, 데모크라티아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정치’다.(강조인용자) 다만 그들은 ‘적절히’ 노동했다. 귀족으로부터 수탈당하지 않게 되자 여가가 생겼다. 아테네인들은 노동 자체를 비시민적인 활동이라고 보지 않았다.(111면)

 

민주주의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기에 오래된 ‘진리’를 절대적인 척도로 사용하거나 혹은 그 ‘진리’에 당대의 현실을 환원하는 것은 위험을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가 촛불 이후의 ‘새로운 민주주의’를 사유할 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삶의 물적 토대를 소거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말장난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채효정에 의하면, 민주주의(democracy)의 원어로 알려진 ‘민중(demos)의 힘(kratia)’에서 ‘demos’는 “살아갈 수 있는 터전으로서의 삶터를 말한다.” 그러니까 “데모크라티아는 단순히 데모스가 시민권을 갖는 것을 넘어 데모스의 경제, 데모스의 문화, 데모스의 언어, 데모스의 철학, 데모스의 문학, 데모스의 신학(신화)이 귀족들의 그것을 압도하며 지배한다는 뜻이다.”(107면) 그런데 “살아갈 수 있는 터전”만 있으면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레 형성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데모스의 연합이며, 이 연합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운동한다. 맑스가 말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도 그 밑바탕에 자유를 물리적으로 보증해주는 데모스가 없다면 무의미하다. 사실 맑스가 주창했던 것도 데모스의 재구성과 관계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 서면 민주주의가 흔해빠질 정도로 회자되는 만큼씩 위태로워지는 이유를 조금 더 명료하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언론의 자유가 역대 최대로 보장되고 얼마간의 문화적인 르네상스가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토양은 부실해지고 있었다고 유추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합리적이다. 민주적인 정부라고 믿었던 참여정부하에서,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부안 사태나 미군기지 이전을 두고 벌어진 평택 대추리 사태에서 보듯, 민중의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은 공격받았으며, 민중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사라져가는 것만큼 민주주의는 쇠약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끝내 들어선 이명박정부에서 일어난 퇴행은, 아니 이명박정부의 탄생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며 다만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곧 향후 10년을 암시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2009년에 벌어진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옥쇄파업이다. 두 사건은 상당히 장시간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눌렀다. 두 사건에 대한 여러 방식의 문학적 응전이 있었고, 또 기억이 맞는다면, 이른바 ‘정치시 논쟁’은 그 이후의 사태였다. 하지만 문학이, 특히 시가 얼마나 그 두 사건을 얼마나 치열하게 감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혹 문학이라는 ‘데모스’를 내려놓고 개별적인 근대 ‘시민’으로 나선 것은 아니었을까?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에 대해 말하는 이동우의 「막다른 길들」이라는 작품이 2015년 전태일문학상을 통해서 소개되었다. 아직은 신인의 싱싱한 미숙함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촛불의 메아리는 가 닿을 곳이 없다”라는 구절은 마치 우리가 승리의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싶어하는 지난겨울의 ‘촛불’을 예견하는 듯하다.

 

주인 잃은 신발이 멈춘 곳

길의 끝이었다

 

버려진 것들에겐

죽창 같은 겨울바람만 이어져

 

화려한 신차 발표장 뒤편으로 모인

막다른 길들

 

작업화부터 목발까지

순번을 단 신발들

발소리조차 얼어붙어

길바닥에 웅크려 있다

 

굴뚝 위의 외침을 기억하는 안전화

해고 후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운동화

 

대한문 앞 핏빛 향내가 철거된 뒤

꺾인 깃대 끝에 매달려 보낸 밤들

촛불의 메아리는 가 닿을 곳이 없다

 

삭발하고 곡기 끊은 숨탄것들이

걸음, 걸음마다 북소리처럼 운다

 

눈보라 속 맨발로 떠난 주인

그의 부활을 믿지 않는

텅 빈 신발이 혼잣말한다

나라도 던지지 그랬어?

 

남겨진 이름은

불온한 땅을 딛기 거부하며

오체투지로 끊어진 길을 잇는다

—「막다른 길들」(『제23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작품집』, 사회평론 2015) 전문

 

쌍용차 노동자의 해고 사태와 그에 대한 반발로써 벌어진 옥쇄파업, 그리고 그후 이어진 고통스러운 싸움은 사실 우리에게 매우 심각한 사유를 요구했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거래되지 않는 현실을 비난하고 또 백척간두에 몰린 해고노동자들의 상태에 대한 도덕적 연대를 주로 수행한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도 해고노동자들의 비극적 사태는 ‘도덕적’으로 재현되고 있지만, 자기감상에 빠지지 않는 장점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촛불의 메아리는 가 닿을 곳이 없다”라는 구절은 투쟁의 막막함마저 진솔하게 표현함으로써 작품을 살아 있게 한다. 일단 제목부터가 주어진 현실에 대한 솔직한 자기고백을 암시한다. 다만 시인의 어떤 작위가 결구에 배치됨으로써 작품 전체적인 성과를 일부 훼손하고 말았는데, 아마도 시인 자신이 자신의 비통한 파토스를 인지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려 한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 바다.

이동우의 다른 수상작 중 「그날」은 용산참사를 다룬 작품이다. 용산참사를 다룬 작품이 적지는 않은데, 이 작품은 사건에 감정적으로 동일화됨으로써 발생하는 해석의 결핍을 피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도 결국 마지막 결구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동우를 일러 “싱싱한 미숙함”이라고 칭한 것은 이런 점들 때문이다. 참고로 마지막 결구는, “그 젖은 풍경 끌어안으려/나도 빗방울로 어룽진다”인데, 여기서도 “어둠이 삼킨 어둠”에 대한 시인 나름대로의 극복의지가 읽힌다. 하지만 극복‘의지’를 작품에 직접 새김으로써 작품의 깊이를 훼손하는 예는 의외로 흔하다. 도리어 그러한 의지가 작품의 비상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러한 “싱싱한 미숙함”을 품고 뱉어낸 가작(佳作)은 「낙과」라는 작품이다. 이 시는 리얼리티와 환상, 그리고 알레고리가 뒤섞여 상호작용하는 효과를 내고 있는 경우이다. 또 앞의 두 작품에서 보여줬던 의지의 노출로 인한 작위나 감상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런 것들에서 벗어남으로써 작품은 건강을 얻는다. 예컨대 “낙과 하나하나를 거두며 어머니는 아직 배 익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저만치 달아난 절단된 계절, 내년엔 더 많은 배꽃이 필 거다” 같은 구절은 선형적인 구조를 가지긴 했지만, “어머니가 일하는 꿀배 농원”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물고 들어옴으로써 그 싹이 힘차다.

 

3

 

갓 짜낸 배즙을 마시자 아삭, 햇것 베어 무는 소리가 난다. 둥근 씨를 품은 여름이 만삭까지 간직했던 젖내. 배즙을 팔러 나간 어머니는 늦도록 소식이 없다. 길이가 맞지 않는 손가락 모으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한다. 낙과 하나하나를 거두며 어머니는 아직 배 익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저만치 달아난 절단된 계절, 내년엔 더 많은 배꽃이 필 거다.

 

장소성과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은 “햇것 베어 무는 소리” 같은 생기를 불어넣으며 사물의 힘을 되살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감각이란 사실 공명의 다른 이름이다. 흔히 하는 말로 주체와 대상의 표면적인 만남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 감각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체와 대상이 가진 힘이다. 이 힘 없이는 만남도 그리고 감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낙과」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만남과 감각의 영역에서 무엇인가가 피어난다는 점이다.

1절에서는 “손가락 잘린” 산재(産災)와 접붙이기 위해 자른 가지를 겹쳐놓으면서 신생의 기미를 제시한다. 상처의 자리를 비록 “단단히 감은 붕대”가 차지하지만, 현실은 여지없이 새 열매마저 “땅바닥에 나뒹”굴게 하는 “태풍”이다. 하지만 낙과는 “바닥에서도 꿋꿋하게 굴렀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모든 낙과가 그런 것이 아니라 “탱탱한 것들”이 그렇다는 점이다. 즉 힘을 가진 낙과만이 “꿋꿋하게” 살아가며, 비록 “제 모양을 버리”더라도 “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2절의 내용이다. 그리고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3절에서는 “제 모양을 버리고 즙이” 된 것을 마시자 도리어 “아삭, 햇것 베어 무는 소리”를 낸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렇듯 형체가 아니라 낙과 안에서 운동하고 있는 힘인 것이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5)에서 “음악과 마찬가지로 회화도, 즉 예술에서도 형을 발명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힘을 포착하는 것이 문제이다. 바로 그 때문에 어느 예술도 구상적이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힘은 감각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감각이 있기 위해서는 힘이 신체, 즉 파동의 장소 위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하지만 힘이 감각의 조건이라고 해도 실제 느껴지는 것은 힘이 아니다. 감각은 그의 조건인 힘으로부터 출발하여 힘과는 전혀 다른 것을 ‘주기’ 때문이다.”(69면) 여기서 “다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시인-주체의 힘이 “보이지 않는” 사건·사물의 힘을 포착해 작품에 표현한 것을 말한다. 하지만 작품화된 힘은 시인-주체의 힘도 아니고 사건·사물의 힘도 아니다. 작품화된 작품이 전자에 가까울 때 작품은 시인-주체의 주관적인 낙관(落款)에 머물고 후자에 만족할 때는 상투적인 재현이 될 개연성이 있다. 작품화된 힘은 작품 스스로가 사건이 되게 하며, 이는 다시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예는 우리가 뛰어난 작품을 접했을 때 다른 작품을 생산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게 되는 경험 속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즉 들뢰즈가 말하는 “다른 것”은 작품이 생산한 ‘다른 힘’을 가리킨다.

작품이 삶에 작용하는 ‘다른’ 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정식화하기 힘들지만 이동우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것은 일단 시가 자신의 발생 지점을 꽉 물고 놓지 않아야 가능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든 예술은 구체적인 사회적·역사적 조건 속에서 시작된다. 이 명제에 이동우의 작품은 적절하게 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리얼리티를 발견하는 일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힘만이 새로운 리얼리티를 발견하는 일에 용맹하게 뛰어들게 한다. 힘은 실패를 모르고 ‘아니요’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지를 긍정하는 것만이 힘의 속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강조해야 할 것은 시인-주체의 힘이다. 왜냐면, 들뢰즈가 말했듯, “힘이 감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시인-주체가 가진 힘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의 성격을 결정짓는다고 말해도 좋다.

 

 

몸(신체)을 구성하는 리비도의 과잉

 

김선향의 시집 『여자의 정면』(실천문학사 2016)에는 ‘여러’ 여성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사실 ‘담겨 있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점잖다. 차라리 여성의 ‘여러’ 목소리들이 들끓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 목소리들은 기호화되어 있지 않고 문화적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다. 냉소와 조롱이, 절규가, 관능이, 연민이, 기억이, 생동이, 반어가 적나라하게 혼재되어 있는 이 시집은 최근에 발견한 매력적인 시집 중 하나이다.

시인은 이 여성들 모두의 이야기와 목소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데, 웅웅거리는 듯한 여러 목소리들은 마침내 ‘여성’의 목소리로 종합되고 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김선향의 시에는 리비도가 과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넘쳐흐른다는 점이다. 남성의 폭력과 억압에 짓눌려 단말마처럼 흘리는 신음에도 한사코 몸에 대한 갈망과 사랑이 묻어 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도발적인 솔직함 같기도 하고, 정신으로의 도피를 저어하는 능산적(能産的) 무지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는데, 김선향의 자세가 전자라면 ‘강함’인 것이고 후자라면 ‘무구(無垢)’라고 볼 수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에서 연유한 듯한 「물뱀」은 이런저런 목소리들을 (구체들의 복잡성이 빚어낸다는 의미로서) 추상화하고 있는 예이다. 추상화는 추상화인데, “난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아니야/우린 자연의 여자”라는 직접적 진술에서 보듯, 김선향은 구체적 사실의 표면에서 완전히 떠나는 추상화를 허락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드넓은 연못 속에서

황금빛 피부의 여자는

또 다른 여자와 기다랗게 누워

수초에 휘감긴 채 사랑을 나눈다

 

먼 데를 응시하며

불꽃처럼 일렁이는 혀는 되낸다

 

난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아니야

우린 자연의 여자

 

티끌만 한 무게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눈부신 몸뚱아리여!

 

물결이 사납게 출렁이고

여자들은 절정의 순간에

머리 둘 가진 물뱀이 되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다

—「물뱀」 전문

 

물론 김선향은 이 시에 도달하기 전에—이 작품이 시집에 실린 여러 작품들의 최종 지점이란 뜻이 아니다—숱한 중간 지점을 통과해왔다. 앞에서 열거한 다양한 시적 화자들은 결국 개별적인 주체로서의 여성이면서 동시에 섹슈얼리티와 젠더로 각각 범주화되기 이전 혹은 그런 범주화를 거부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김선향의 여성은 한결같이 사회적·역사적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단화를 신고 온종일 마트에서 일하는” 여자(「안녕, 엄마」)이면서 “깡말라서 먹을 것도 없”는 엄마(「엄마를 위한 자장가」)이기도 하고, “군인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진창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이면서 “다윤이의 손가락이라도/금이 간 쇄골이라도/수습”하고 싶은 박은미씨(「박은미 씨」)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또 “한눈을 팔면서도 척척/졸면서도 척척/온종일 생닭을 토막내는 여자”(「생닭집 여자」)이고, “팔뚝의 검푸른 힘줄”을 가진 “흑인 장정들” 쪽으로 욕망이 흐르는 여자(「니제르 강가」)이고, “철거 직전의 빈집에서” “어떻게든 이 겨울을 나야” 하는 여자(「내게 남겨진 것들」)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여성들의 실존과 목소리와 노래를 다 듣고 나서야 시인이 「물뱀」에서 말하는 “난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딸도 아니야/우린 자연의 여자”에 당도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김선향이 생각하는 해방된 여성은 “자연의 여자”이지만 현실은 이런 ‘여자의 정면’을 허락하지 않는다. 언제나 “옆모습만”(「그녀의 정면」) 가지길 바란다. 이는 가부장적 남성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중산층의 (도덕적) 페미니즘이 공유하는 가치이며, 이러한 섹슈얼리티/젠더 억압 기제들에 여성의 얼굴은 고정되어야 있어야 한다. 그것도 “옆모습”으로.

“얼굴”이란 단순히 개인의 인격과만 관계된 것은 아니다. 얼굴이야말로 사회가 부여한 특정 코드(code)에 따라 분할되는 선으로 이루어진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체제가 강제하는 코드에 대한 주체의 응전이 얼굴을 탄생시킨다. 김선향은 지금 강제당한 “옆모습”에 대항하며 ‘여자의 정면’을 시적으로 복원하려 하고 있지만, 아직 그 성과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훼손된 몸(신체)을 연민하지 않고 범람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으나 그 범람이 김선향 자신만의 온전한 스타일을 이루고 있는지는 아직 단언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여자의 정면』이 전선을 최대한 복잡하게 형성해놓고 있는데 ‘옆모습’만 강제하는 현재 사태에 대한 시인 나름의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의 유무, 또는 강도에 따라 앞으로 나타날 양태는 다채로울 수 있다. 과연 김선향은 니체의 말처럼 더 강하게, 그리고 더 깊게, 또 더 아름답게 자신의 욕망을 밀어붙일 수 있을까?

유물론적 발생 원리에 충실한 시는 작품 안에 얼마간이라도 ‘핏자국’을 남긴다. 마치 온몸으로 울면서 태어난 갓난아기처럼 말이다. 그 ‘핏자국’은 시인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인이 지금 서 있는 장소나 혹은 어디를 통과해왔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지의 흔적들을 갖기 마련이다. 오늘날 시의 난해성은 단적으로 이러한 구체적인 장소성을 최대한 지워버리려는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진다. 장소성은 단지 시와 시인의 신원을 드러내는 데 동원되는 소재가 아니다. 그것은 작품에 맥락을 부여하며 맥락들의 종합과 대비를 통해 독특함을 마침내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로서든 부정적인 의미로서든) ‘난해성’은 이 맥락들이 얼마만큼 어떻게 뒤엉키는가에 따라 그 위상이 정해진다. 작품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삶의 양태들을 얼마나 깊이 표현했느냐에 따라 판가름나는데, 여기서 ‘깊이’는 바로 ‘맥락들의 종합과 대비’가 그리는 추상적인 선(線)에 의해 획득된다. 그리고 이 ‘깊이’에의 도달 여부가 ‘좋은 시’와 기술적으로 ‘잘 쓴 시’가 갈라지는 분기점이 된다.

 

 

가난하지만 비겁하지 않게, 거칠지만 조악하지 않게

 

모로 누운 등 뒤에서

껴안는 낯선 바다

밀고 드는 물기둥에서

간지러운 치어 떼와

수초들이 풀려 나왔다

숨죽인 귀로

눈송이처럼 터져 심해로 간 사람과

산란 향한 뱀장어 긴 유영과

검은 해류 지나는 푸른바다거북의 안부가

흘러들었다

금빛 복숭아 들고 돌아오는 저녁처럼

비로소 붉어진 나는

눈 감은 채 젖을 무는 바다

이마를 쓰다듬었다

—「수장水葬」 전문

 

권선희는 최근 시집 『꽃마차는 울며 간다』(애지 2017)에서 구룡포라는 특정 장소에서 펼쳐지는 삶을 생동감 있게 포착해냈다. 권선희는 이 시집에다, 때로는 이웃들의 입말을 그대로 받아쓰는 방식으로, 때로는 시인 특유의 낙관과 해학으로, 또 때로는 시인 자신의 직접적 토로를 통해 ‘핏자국’이 생생한 작품을 여럿 실었다. 권선희가 작품에 남긴 핏자국은 구룡포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막 잡아 올린 물고기의 몸짓을 닮았다. 즉 구체적인 장소성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면서 보편성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당도한 게 아니라 “근접했다”고 말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작품들이 소품이고 형식미에 소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수장水葬」은 『꽃마차는 울며 간다』 전체를 표상하는 시인의 정서(affectus)이며, 구룡포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시인의 태도(attitude)에 가깝다. 위 시에서 말하는 “바다”는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물기둥”과 “치어 떼”와 “수초들”과 “심해로 간 사람”과 “뱀장어 긴 유영”과 “푸른바다거북” 모두의 이름이며, 바다는 이렇게 살아 있는 것과 죽은 존재들로 구성된다. 시적 화자는 다만 그 바다에 “젖”을 물릴 뿐이다. 그리고 “이마를 쓰다듬”는다. 이 작품은 시집 전체의 입구이며, 귀결인 것이다.

그런데 「추석」 「사램이 고래만 같으믄」 「뜨거운 말」 「충분한 슬픔」 「씨바씨바」 「돌림노래」 같은 작품이 없었다면 「수장水葬」이 가능했을까? 여기서 「수장水葬」이 예로 든 작품들보다 더 나은 성과라거나 「수장水葬」을 위해 예로 든 작품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삶의 원시언어인 입말을 그대로 살린 작품들이나 구체적 사건을 시적 직관으로 재해석해 배치한 작품들이 「수장水葬」에 내재된 의미를 밑받침해주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사램이 고래만 같으믄」은 “고랫배 타고 반평생 싸돌았다”는 시적 화자의 진술을 옮겨 적은 경우인데, 고래를 만나 고래를 잡기까지의 모습과 시적 화자와 고래가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나는 정서의 변용이 리듬감 있게 전개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고래 새끼를 통해 “검둥고래만도 몬한” “새끼 내삐리고 소식 읎는 둘째 놈”과 “손주 놈”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내비친다. 이 작품이 갖고 있는 감동의 요소는 “둘째 놈”과 “손주 놈” 때문에 “잠든 볼때기만 조물락 조물락/날밤으로 씨꺼멓게 샜”다는 근친에 대한 시적 화자의 감정 진술이라기보다 고래와 시적 화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서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반들반들하니 시커먼 눔 만나믄 말이재

가슴이 벌컹벌컹 뛰는 기라

금마가 을매나 이쁜지 모르재?

 

내하고 금마하고 똑같이 울렁울렁

지칠 때꺼정 파도 타매 가는데 말이다

금마 옆구리에 몽실하니 새끼가 붙은 기라

우짜겠노 내는 사램이고 지는 괴기니

놓치지 않을라꼬 가기는 간다마는

맴이 억수로 씨는 기라

 

사실 이 부분이 없었다면 이 작품에서 활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빤한 휴머니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한계를 「충분한 슬픔」 「씨바씨바」 「돌림노래」 등에서도 후련히 벗어나는데,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난하지만 비겁하지 않으며, 거칠지만 조악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철없는 낙관에 머물지도 않는다. 도리어 권선희가 포착한 구룡포의 삶들은 바다를 통해 삶의 원시적 활력을 꾸준히 공급받는다. “실마리 아득한 바다”여도 “와락 안고 뒹굴다”(「충분한 슬픔」) 나오기도 하지만, 아무런 출구와 대안이 없을 때도 “니끼미 시발 지랄났다꼬 내가 수그리나/사람 나고 돈 났지 시발 돈 나고 사람 났나”(「돌림노래」) 하고 돌림노래 부르듯이 생명의 숨통을 스스로 터주는 힘을 놓치는 법이 없다.

아직도 민중의 생명력은 죽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장소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사물·사건의 힘을 드러내며 작품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로컬리티(locality)의 문제가 아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시 작품이 가져야 할 물리적 배경에 대한 흔적, 핏자국, 숨가쁨, 원시적 감정 들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것들이 문화적으로 방부 처리되어야 ‘좋은 시’라는 평가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품의 본적지를 문화적으로 처리하는 방부제는 누가 만드는가? 방부제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업자들은 없는 건가? 우리 시는 한동안 이런 ‘가난하고 거친’ 질문을 용납하지 않았고, 도리어 이런 질문들을 바버리즘(barbarism)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는가?

 

 

‘할 수 있는 힘’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물론 ‘가난하고 거친’ 질문이 그것 자체로 승인되고 채택될 때 싹틀 반지성주의는 충분히 경계할 만하다. 김수영은 1964년 4월 시평 「모더니티의 문제」에서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火焰)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육체로서—추구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김수영 전집』, 민음사 2003, 516면) 김수영이 말한 “지성의 화염”은 꼭 “모더니티”의 문제만은 아니다. 또 김수영에게 있어서 “모더니티”는 자본주의 근대 사회에 나타난 다른 리얼리티와 내포가 다르지 않다. “지성의 화염”은 당연히 ‘가난하고 거친’ 질문들에도 필요한 것이다. 실상 생동하는 (가난하고 거친) 리얼리티에 무늬를 상감하는 것에도 “지성의 화염”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생동하는 리얼리티가 작품에서 힘을 뿜으며 어떤 형식을 넘어 범람할 때도 이 “지성의 화염”에 의해 인도되며, 반대로 현실에서 새로운 리얼리티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데에도 “지성의 화염”이 어떠한 임무를 담당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또 “지성의 화염”이, 아감벤이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불과 글』, 윤병언 옮김, 책세상 2016)에서 물었던 ‘창조’의 한 축을 담당하여, ‘할 수 있는 힘’과 변증법적으로 종합될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할 수 있는 힘’은 “작품과 표현을 통해 돌진하는 천재적 기질인 반면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비개인적인 것에 저항하는 개인적인 것으로 머뭇거림, 작품과 표현에 저항하며 표현에 저항의 흔적으로 남기는 성격과 일치한다.” 또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창조의 힘과 그것의 형식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저항의 힘을 통해 힘과 형식을 어떤 식으로든 부각시킨다.”(77면)

‘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가난하고 거친’ 질문의 거세는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괴이쩍은 득세를 가져와 시에 어떤 질환을 남긴다. 장소성과 현실성, 그리고 “지성의 화염”의 공존, 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들이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작품이라는 몸(신체)을 낳는다는 명제는 지난 촛불항쟁을 통해 가져야 할 인식의 전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 전환은 단지 사변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데에 대한 인식 전환 이전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모두에서 밝혔듯이, 그것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사유의 끈을 놓지 않는 치열함 위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단순히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정부의 수립이나 제도적 구비 차원으로 인식하는 한 인식 전환 이전의 인식 전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부단히 운동하는 삶의 구성 이념이라는 것, 우리의 삶은 데모스(‘살아갈 수 있는 터전’)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토대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운용되는지에 대한 뜨거운 물음이 함께할 때 우리는 좀더 진화한 영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등등은 지난 촛불이 시에 가르쳐준 내용이다. 지난 ‘촛불’이 실재하지만 잠재 상태에 있는 것들을 현실화시키는 포이에시스는 아니었는가? 중요한 것은 이런 시적 순간의 빈도를 증식시키고 강도를 한층 더 깊게 하는 일이다. 이럴 때 우리는, 앙상한 정치시나 엘리트주의적인 난해시, 그리고 자기(ego)를 풍월의 대상으로 삼는 서정시의 범람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몸(신체)을 가진 시를 잉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