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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평등한 세상은 평등한 과정에서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1980년대부터 환경·반핵·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현장운동가다. 특유의 재치 있는 글쓰기로 일부 남성들의 ‘맨스플레인’ 현상을 통렬하게 비판해 전세계적인 공감과 화제를 몰고 왔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남자들은 나를 자꾸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어둠 속의 희망』 『멀고도 가까운』 『걷기의 인문학』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있으며, 구겐하임 문학상, 전미도서비평가상, 래넌 문학상, 마크 린턴 역사상 등을 받았다.

 

백영경(白英瓊)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문화인류학. 주요 논문으로 「지식의 정치와 새로운 인문학: ‘공공’ 연구의 확장을 위하여」 「사회과학적 개념과 실천으로서의 ‘위기’」 등과 공저로 『프랑켄슈타인의 일상』 『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 등이 있다.

 

 

왼쪽부터 백영경, 리베카 솔닛.  ©이영균

왼쪽부터 백영경, 리베카 솔닛. ©이영균

 

 

백영경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The Mother of All Questions, 2017, 창비 2017)의 한국어판 출간을 맞아 서울을 방문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리베카 솔닛(이하 솔닛) 서울에 오게 되어 저도 기쁩니다.

 

백영경 여러 저작이 한국어로 이미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한국에서 당신이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역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Men Explain Things to Me, 2014, 한국어판 창비 2015)와 ‘맨스플레인’(man+explain)이라는 단어를 통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한국어판 출간이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과 맞물리면서, 이 책의 대중적 인기와 페미니즘의 확산은 서로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서 당신에 대한 관심은 우선 페미니즘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솔닛 그럼 거기서 시작하도록 할까요.(웃음)

 

 

페미니즘과 반핵·환경운동 사이에서

 

백영경 당신은 여러가지 흥미로운 활동을 해왔고, 작가 외에도 언론인, 활동가, 역사가 등 다양한 역할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당신이 해온 활동 가운데 얼핏 페미니즘과 관련이 적어 보이는 부분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페미니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솔닛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여기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를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페미니즘을 인권과, 모든 존재의 해방을 추구하는 흐름의 일부로 정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투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여성혐오와 젠더불평등, 그리고 전통적인 역할로부터 여성을 해방함으로써 나아가 인권과, 모든 존재의 해방을 추구하는 투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여성들 사이에는 인종적·계급적 차이가 존재하고 성적 지향의 문제도 있으며 그밖에 다른 이해관계도 있기 때문에, 사실 여성들의 투쟁과 다른 투쟁들이 분리되어 진행된 적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차별은 내가 태어난 이래 자라온 가정에서, 살아온 세상에서, 일하는 과정에서, 사생활의 영역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내게 성차별이란 매우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는 미국 원주민 권리운동과 기후변화방지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만, 페미니즘은 책을 쓰기 이전에도 언제나 내 저술활동의 일부였습니다. 1985년 무렵 한 펑크록 잡지에 첫 페미니스트 기사를 썼지요.

 

백 영 경 (白英瓊)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문화인류학. 주요 논문으로 「지식의 정치와 새로운 인문학: ‘공공’ 연구의 확장을 위하여」 「사회과학적 개념과 실천으로서의 ‘위기’」 등과 공저로 『프랑켄슈타인의 일상』 『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 등이 있다.

백 영 경 (白英瓊)

백영경 그렇군요. 당신의 여러 저서를 보면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반핵운동에도 여전히 관여하고 계신지요?

 

솔닛 여전히 반핵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요즘은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원자력이 기후변화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발언을 할 일은 종종 있습니다. 후세에 기후변화라는 끔찍한 문제를 떠넘기지 않기 위해서 원자력폐기물이라는 또다른 끔찍한 문제를 떠넘길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아무튼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 및 폐기물에 대한 나의 예전 활동, 그리고 그와 연결된 많은 일이 여전히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친구인 카우프먼(L. A. Kauffman)이 최근 미국 좌파의 역사에 대한 책(Direct Action: Protest and the Reinvention of American Radicalism, 2017)을 출간했는데, 거기에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직운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던 계기가 바로 반핵운동이었다는 사실이죠. 1970년대 반핵운동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전면에 등장했고, 퀘이커파나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투쟁방식을 차용함으로써 정치적 조직운동 과정에 새로운 수단을 제공했으며, 새로운 종류의 부드러움과 평등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의 조직운동이 권위주의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들에 의해 지배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외감을 안겼다면 반핵운동을 계기로 조직운동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로, 다시 말해 정치는 스스로 표방하는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변화해가게 되었습니다.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으면 그 과정도 평화적일 필요가 있고, 더 평등한 세상을 만나고 싶다면 그 과정도 평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반핵운동에서 적어도 일부는 단지 핵무기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서로 소통할 것인가, 조직운동과 정치권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고, 그 영향은 그동안 세계 곳곳의 여러 운동을 통해 확인되어왔습니다. 카우프먼은 직접행동에 대한 당시 그러한 움직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데, 바로 그것이 내가 『어둠 속의 희망』(Hope in the Dark, 2004, 한국어 초판 2006, 개정판 2017, 창비)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전술을 만들어낸 바로 그 운동은 1970년대에 씨브룩(Seabrook)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씨브룩 원전은 결국 지어졌으니, 그렇게 보면 “운동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달리 보면 그들이 만들어낸 운동은 수백개의 원자력발전 계획을 폐기시켰으며, 원전과 핵무기, 핵전쟁의 위험을 부각시켰고, 많은 운동의 촉매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많은 운동의 일부가 된 테크닉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직접적으로는 작은 실패를 낳았지만, 간접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막대한 일련의 성공을 만들어낸 셈입니다. 나 역시 그 운동들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만적인 꿈』(Savage Dreams, 1994)에서 다뤘던 그 반핵운동이 나를 네바다 핵실험장으로 인도했습니다. 내가 글 쓰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것도, 미국 원주민운동가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내 삶이 좋은 쪽으로 크게 바뀌었던 것도 바로 그곳에서였지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반핵운동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운동이 내게 무엇을 주었는지는 확실합니다.

리베카 솔닛 (Rebecca Solnit)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1980년대부터 환경·반핵·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현장운동가다. 특유의 재치 있는 글쓰기로 일부 남성들의 ‘맨스플레인’ 현상을 통렬하게 비판해 전세계적인 공감과 화제를 몰고 왔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남자들은 나를 자꾸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어둠 속의 희망』 『멀고도 가까운』 『걷기의 인문학』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있으며, 구겐하임 문학상, 전미도서비평가상, 래넌 문학상, 마크 린턴 역사상 등을 받았다.

리베카 솔닛 (Rebecca Solnit)

 

백영경 최근에는 기후변화방지운동을 활발하게 해오신 것으로 아는데, 이 운동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솔닛 지난 십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해온 것이 사실입니다만, 얼마 전 드디어 국제석유대체기구(Oil Change International)에 이사로 합류하면서 이제는 뭔가 직접적이고 분명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는 많은 환경단체에 기부하고 있는데요, 기후변화는 어디에서나 모든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로 압도적인 사안인데, 현재 큰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해결책이 없다”고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었지만, 그새 혁명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변화 가운데는 더이상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미디어 환경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이러한 사실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습니다만, 에너지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날로 높아지면서 공학적인 해결 방법도 급속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미국,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강대국 가운데 몇 안 되는 나라에 화석연료산업계라는 소수의 세력이 있고, 그들이 나머지 다수 나라로 하여금 빠리 기후변화방지협약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현재 얼마나 강력하게 기후변화에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전지구적 투쟁 중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기후변화의 영향은 각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나며,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열대 및 극지방에서는 더 심각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다른 지역에서 마치 자신들에게는 기후변화의 영향이 크게 미치지 않을 것인 양 구는 게 통할 정도로 기후변화에 대한 체감이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백영경 페미니스트로서 기후변화방지운동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나요?

 

솔닛 기후변화가 여성들을 더 취약하게 만들 거라 우려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들은 이동성은 떨어지는데 책임은 더 지고 있습니다. 기근이나 가뭄으로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게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빈곤 상황에서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화석연료 체계를 일종의 권위주의체제로 볼 수도 있습니다. 소수 남성들과 러시아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가부장제 국가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켜왔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기후변화방지운동이 흥미로운 점은 이 운동이 단지 나쁜 것을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좋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집을 덥히고 불을 밝히는 동력을 분권화한다면, 이를 통해서 현재 몇몇 화석연료 회사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바람과 햇빛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는 미국 부시 행정부를 움직여왔고 현재 트럼프와 러시아 푸틴 정권의 상당 부분 역시 움직이고 있는 파괴적 세력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후변화방지운동은 페미니즘과 직접적이진 않아도 서로 관련이 있습니다. 독특한 종류의 매우 가부장적인 권력을 해체하는 작업에 대한 것이니까요.

 

 

미국의 역사와 전통에 어떻게 접속할 것인가

 

백영경 개인적으로 당신의 저작 중에서 미국 서부의 역사를 다룬 것이나, 도시의 도감화 작업 등 경관에 대한 것을 좋아합니다. 『무한한 도시』(Infinite City: A San Francisco Atlas, 2010)도 흥미로웠습니다. 표면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한 장소에 담긴 여러겹의 의미를 밝혀내는 작업은 우리가 어떤 장소와 관계 맺는 방식을 변화시킨다고 볼 수 있는데요, 도시에 대한 이같은 작업을 하게 된 계기나 거기에 특별히 부여하는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습니까?

 

솔닛 나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상당 부분이 근시안적인 시야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인들은 소득불평등이 덜했고, 건강보험과 교육·주거 비용이 더 저렴했으며, 지금처럼 대규모의 노숙자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역사 지식을 가지는 것 자체가 거의 혁명적인 일이 되리라 생각하는데요,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전망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지난주에 무엇을 이루었느냐, 혹은 작년에 무엇을 이루었느냐는 식으로 본다면 별로 성과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난 50년을 돌아본다면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의 삶에는 젠더와 권력 문제, 다양한 불평등, 가정과 일에 대한 관념 등을 둘러싸고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장소’에 대한 나의 작업은 이러한 장기간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내가 “다른 사랑”(other loves)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기쁨, 어떤 의미에서는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장소란 관심을 기울이고 접속하기만 한다면 부모처럼 친구처럼 연인처럼 상대방을 지지해주고 북돋아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SF소설의 칙칙한 한 장면처럼 온종일 조그만 전화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면 슬퍼져요. 더이상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아요. 쌘프란시스코 인근의 씰리콘밸리 지역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회사와 이어주는 조그만 상자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화는 통신장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동은 주로 자가용으로 하고요. 이런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이나 장소 그 자체로부터 동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장기적인 역사의 전망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지요. 주변 사람들에 대해,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긴 시간의 흐름에 대해, 일종의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존재로서의 장소와 우리는 여러 겹으로,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걷기의 인문학』(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 2000, 한국어 초판 민음사 2003, 개정판 반비 2017)에서 공장 노동자들이 그저 일의 속도를 늦추는 것만으로 파업을 진행했던 경험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글쓰기, 역사학·인류학 공부, 그리고 친구를 사귀고 아이를 기르는 것은 모두 속도를 늦추고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자본주의나 가부장제가 바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일종의 저항임은 분명하며 이러한 저항이 내가 생각하는 내 작업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백영경 진정한 일상의 저항은 시간과 장소에 대해 다른 감각을 기르는 일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솔닛 네,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백영경 걷기와 장소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한 또다른 작가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있는데요. 실제로 많은 독자들이 당신과 소로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당신도 그것을 인정한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만.

 

솔닛 지금 마침 소로의 전기를 읽는 중인데요, 방대한 전기(Laura D. Walls, Henry David Thoreau: A Life)가 올해 미국에서 새로 출간되었습니다. 소로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두 사람은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논픽션 산문을 썼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둘 다 정치적인 동시에 서정적·시적이고 사적인, 그 두가지 면이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영문학 내에서는 시란 정치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정치는 따분하고 추상적이고 의무감에서 하는 것이지 아름다움이나 주체성, 인생경험 등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드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를 그런 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작가라면 그 누구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소로는 노예폐지운동에 참여한, 미국 저항사의 시초를 이루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후 간디와 마틴 루서 킹, 넬슨 만델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시민불복종을 개념화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나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웃음) 그는 반골 기질이 강한 인물이었으며 직접 눈으로 보는 관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를 통해서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도 참여했던 당대의 노예제 폐지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당시 유행하던 사상들은 무엇이었는지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것저것 캐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어요. 걷기에 대한 내용은 물론이고요.

 

백영경 당신이 장소에 부여하는 중요성은 사실 미국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와 분리될 수 없으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일부라는 사고방식에 기반한 것일 텐데요, 당신의 저작들을 보면 미국 원주민들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관심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솔닛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는데 여기는 물론 서부에 해당하지요. 부모는 모두 대도시에서 자란 이민자였고 미국적인 풍경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는 나무를 좋아하셔서 종종 내게 나무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고 도시설계자였던 아버지는 환경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러나 내가 자랄 때 카우보이와 인디언은 모두 과거의 존재들이었습니다.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여기에 나보다 먼저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누가 이런 곳에서 사는 방법을 알았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어렸을 때 원주민들은 주류문화에서 거의 사라진 존재였음에도 나의 지적인 삶과 상상력이 형성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중의 하나가 19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500주년 기념식 무렵 벌어진 원주민운동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는 애초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은 발견이라는 식으로 찬양될 예정이었습니다만, 원주민들이 자신들은 발견된 게 아니라 침략당한 것이라고 말했어요. “500년간의 저항”이라는 구호가 이 운동을 조직하는 데 아주 강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여기에 언제나 존재했고, 침략당했으며,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대항적인 서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문화 속에서 지워져 마치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황야가 텅 비어 있던 것처럼 간주되던 상황에서는, 그저 그들이 여기에 아직 있다는 사실을 외치는 것만으로도 급진적이었습니다. 어쩌다보니 그들이 밀려나서 사라진 것을 나쁜 일이라고 한들 어디까지나 조상들의 잘못일 뿐 우리 자신의 책임은 묻지 않는 상황에서요.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를 목도하는 일의 영향은 대단했습니다. 환경에 대해 다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간과 장소에 대해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 강한 구술전통과 산업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세대 간 관계 그리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진 사람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분리되어 있거나 심지어 대립하는 것이라 믿는 서구문화와는 달리 그것이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출현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핵무기에 반대하던 시절에 쇼쇼니족(Shoshone族) 토지 권리운동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미국정부가 실제로 자신들의 토지를 강탈해가지 못했으며 따라서 토지는 여전히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는 소규모 원주민운동이었습니다. 나는 그 캠페인의 일원이 되어 네바다에서 많은 소와 말을 거느리고 목장을 경영하는 가모장(matriarch) 두 사람과 아주 밀착해서 일했습니다. 그것은 나를 변화시키고 눈뜨게 해준 교육적이고도 멋진 경험이었어요. 이 경험을 거치면서 나는 크게 바뀌었고, 그때까지 살던 서부의 해안가를 떠나서 내륙으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진짜 카우보이와 인디언처럼 가축을 기르며 살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토지 권리를 둘러싼 정치가 있고, 사막과 산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도 광대한 공간…… 가장 가까운 식료품가게가 수백 마일 떨어져 있고 차로 반나절을 달려도 집 한채 볼 수 없는 곳, 내가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그 장소로 옮겨 갔던 것이지요.

 

백영경 지난해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스탠딩록(Standing Rock) 지구에서 일어난 쑤족(Sioux族)의 투쟁에서 보듯이, 미국 원주민들의 투쟁은 현 시점에서 새로운 연대를 위한 중요한 축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솔닛 캐나다에서도 그곳 원주민들은 송유관 건설을 막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캐나다는 엄청난 양의 화석연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둘 수밖에 없는 흥미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트뤼도(J. Trudeau) 총리의 석유정책은 추하기 짝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얼굴도 잘생기고 인권을 중시하며 페미니즘에 대해 좋게 말한다고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캐나다 원주민들은 자신의 주권과 노력으로 특히 역청탄(瀝靑炭)이 아무 데로도 갈 수 없도록 이동을 막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면 아주 놀랍습니다. 자신이 사는 땅에 충실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지킬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현재 우리가 북미 지역에서 보게 되는 환경파괴는 상당 부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일입니다. 그들은 여기가 살 수 없는 땅이 되면 여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데로 가버릴 거예요. 말하자면 이 장소가 어찌 되든 아무 상관 없다는 사람들과, 언제나 여기서 살아왔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며 이 장소가 살 만하고 건강하며 망가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인 것이지요. 언급하신 스탠딩록의 투쟁은 월가 점령운동이나 아랍의 봄처럼 새롭고 급진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고, 우리가 누구일 수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전망을 촉발시켜 새로운 목소리가 터져나올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운동 가운데 하나로 보입니다. 『가디언』(The Guardian)지에 기고하기 위해 나도 그곳에 잠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당시는 분위기가 아주 폭력적이고 가혹해지기 전이기도 했지만, 거기서 사람들이 누리던 기쁨은 정말로 그들을 바꾸어놓을 만한 것이었고 아주 특별했습니다. 북미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인 원주민 집회였다고 해요. 목소리 없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지지와 연대 속에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분위기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그들은 오바마를 설득했고 이기는 분위기였습니다. 트럼프 대신 클린턴이 당선되었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겁니다. 이게 바로 선거에서 드러난 근시안성이기도 한데, 많은 사람들이 힐러리 클린턴의 기후에 대한 공약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떠들어댔지요.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트럼프의 공약보다는 백만배 나은 것이었음에도요. 영어에 ‘완벽함을 좇다가 괜찮은 것을 놓치지 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교도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좌파운동 주변에 나도 오래 있어봤지만, 완벽함은 종종 분노와 파괴로 ‘괜찮은 것’의 적이 되곤 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과 한국, 페미니즘과 정치적 상황

 

백영경 이제 미국과 한국의 현실정치 상황과 페미니즘의 문제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당신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2014년이 미국 페미니즘의 분수령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한국의 경우 페미니즘은 2015년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습니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의 리부트는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시민혁명으로서 시민의 권리를 확장시키는 흐름의 탄생에 이바지했습니다. 반면 미국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에서 패배했고, 그의 패배가 미국에 만연한 여성혐오 때문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세계 모든 곳에서 페미니즘의 득세를 목도하게 됩니다만 각 나라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다른데요,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솔닛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행진이 트럼프 취임 다음날 이루어진 여성들의 행진이었습니다. 정치적 상황이 다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사한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트럼프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면, 의회에 전화를 걸어서 의견을 표명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87%가 여성이라고 합니다. 많은 여성이 운동을 조직하고 있으며, 민주당 당적으로 의회에 진출하고자 후보자로 처음 선거에 나서고 있기도 합니다. 다른 영역을 보아도 민주주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대다수가 여성이라 도대체 남성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성혐오가 선거에 큰 영향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고, 힐러리 클린턴을 비판할 이유도 물론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은 오바마, 조 바이든, 앨 고어 같은 많은 중도파 민주당 후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들이 나선 당시에는 지금 같은 수준의 신경질적이고 광기와 분노 어린 증오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로 남자들이 클린턴에 대해 감정적으로 격하게 반응하면서도 자신은 차분하고 합리적이며, 감정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는데요, 이 모든 것이 선거의 중요한 일부였습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집단적인 광기에 가까웠다고 봅니다. 모두가 자기파괴적인 광란까지 갔고, 근시안적인 군중심리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동안 트럼프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보려고 하지 않은 것 같아요. 클린턴을 증오하기 바빠서 말이지요. 트럼프 지지자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중도파나 좌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거 이후에도 러시아의 개입을 비롯해 선거에 영향을 미쳤던 다른 어떤 영향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결국 트럼프가 선거에서 정당한 방식으로 승리한 것처럼 만들어줌으로써 결국 본질적으로 그를 옹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트럼프가 얼마나 인기 없었고 선거를 빼앗다시피 했는지를 인식하거나 트럼프의 범죄 의혹을 밝혀내는 일보다 힐러리 클린턴이 약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습니다. ‘약하다’(weak)라는 표현 자체가 실은 아주 젠더화된 말인데 그 표현을 계속 썼어요. 여기서 이들 다수 남성에게는 결국 가부장제와 남성정체성, 남성권력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0년, 혹은 100년이 지난 후에 돌아보면 사람들은 ‘왜 그때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을까?’ ‘21세기 마지막 기회의 순간에 왜 더 많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라고 묻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 여성을 너무도 혐오해서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는 것일 겁니다. 클린턴이 완벽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괜찮은 기후정책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오바마에게 그렇게 했듯이 압력을 가해서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를 중단시킬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트럼프는 지금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백영경 트럼프와 클린턴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솔닛 네, 그 차이는 엄청나지요. 하지만 클린턴을 옹호하는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고, 특히 여성들에게는 침묵이 강요되었습니다. 이게 결국 선거를 지배한 여성혐오 정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여성혐오는 객관성을 표방했지만 아주 주관적인 감정일 뿐이었어요. 정말 참고 보기 어려운 해괴한 광경이었습니다. 러시아가 미국의 여러 주에서 선거 시스템을 해킹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해킹으로 선거결과가 바뀌지는 않았다고 발표되었지만, 사실 바뀔 만한 것인지 아닌지 제대로 조사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냥 그럴 거라고 생각할 뿐이에요. 내가 아는 한 선거 과정에서 진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조사한 주정부도 없습니다. 트럼프는 실제 투표수에서 클린턴에게 300여만표 뒤졌습니다.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패자가 그렇게 큰 차이로 앞선 적이 없어요. 트럼프와 그의 선거팀이 푸틴 정권과 여러 방법으로 결탁한 걸로 보인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선거결과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문제라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요. 물론 이 이야기는 많은 좌파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논쟁거리이긴 합니다.

 

백영경 반면 한국인들은 최대 230만명이 평화롭게 집회를 가지고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닛 연인원이 아니라 동시에 230만명이라는 거죠?

 

백영경 네, 맞습니다.

 

솔닛 당신도 촛불집회에 참여했나요? (참관 중인 편집진을 항하여)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요?

 

백영경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참여했습니다.

 

솔닛 모두 다요? 정말 놀랍네요. 대중이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은 수없이 일어났지만, 사실 정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설명할 만한 공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열정에 가득 차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참여의 조건을 길게 나열하지 않고서 거리에 나서게 되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순수한 분노의 표현이 종종 전략적 분석의 힘보다 훨씬 강력하지요.

 

백영경 작년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매주 토요일에 열린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들은 분노도 표출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발한 구호와 창의적인 방식의 비판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족을 동반하고 나온 사람들을 비롯해 시민들은 대체로 서로를 배려하는 성숙한 태도를 보였고요. 단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재미있고 기운 나서 나왔다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A Paradise Built in Hell, 2009, 한국어판 펜타그램 2012)에서 내가 말하려던 것이 바로 그러한 기쁨이었습니다. 그건 우리가 어떤 사회나 공동체에서 행위할 능력, 목소리, 그리고 소속감을 가진 일원이 되기를 얼마나 마음 깊이 원하는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이 재난 이후에도 찾아오고, 심지어 전쟁이나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생겨나는 것을 봅니다. 안전이나 흔히 이야기하는 웰빙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깊은 열망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이러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나 틀은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열망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경이로운 일이지요.

 

백영경 그렇지만 아직도 시민자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멉니다. 오히려 심해지는 여성혐오 문화나 탈핵 문제 등 도처에 과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아랍의 봄을 비롯해서 우리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목도한 성공적인 정치혁명 중에서도 그 성과를 제도화하지 못한 사건이 많이 있는데요. 촛불혁명의 정치적 에너지를 통해 성공적인 개혁을 이루어내기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솔닛 정권을 무너뜨리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그후에 무엇이 오느냐가 진짜 문제지요. 동유럽은 혁명 이후에 곧바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가버렸습니다. 혁명에 성공한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풀어나갈 만큼 대중이 뚜렷한 전망과 규율을 가졌던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그리고 아랍의 봄 역시도 혁명 당시의 이상은 대체로 거창했지만, 조직적 일관성은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그중 일부는 나아진 바가 전혀 없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는데, 내가 즐겨 말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1970년대 중국에서 저우 언라이(周恩來)가 프랑스혁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에서 월가 점령운동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적 언어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혁명이 일어나면 권력에 굶주린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혁명을 타락시키곤 합니다. 결국 처음 가졌던 전망은 사라지고 말지요.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쓰던 시기에 아름다운 글을 읽었는데요, 프랑스혁명이 무엇을 성취했는가? 처음 의도한 목표를 성취하진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절대군주정으로는 결코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대신 평등과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한 이상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며, 거기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혁명뿐 아니라 그후 프랑스에서 차례로 일어난 모든 혁명이 엄밀히 말하면 실패했습니다만, 각각의 혁명은 보통 사람들에게 더 많은 권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내 친구인 환경운동가 칩 워드(Chip Ward)의 표현을 빌리면, 숫자화할 수 있는 것의 압제를 극복할 필요가 있고, 간접적인 결과들과 장기적인, 그리고 에둘러 오는 승리들을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정치적 변화는 그런 식으로 일어나니까요.

 

백영경 희망을 주는 이야기네요. 그런데 사실 한국의 개혁에 큰 걸림돌이 되는 존재 중 한명이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트럼프가 전쟁을 부추기면서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분열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솔닛 트럼프가 세계 곳곳에 끼치고 있는 악영향은 일일이 꼽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막 나가는 것도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필리핀 출신의 동료 기후변화방지 활동가가 “필리핀 대통령은 문제가 많아도 필리핀에만 영향을 끼치는데,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세계 다른 나라에 미칠 영향이 너무 심각하니 잘 생각해달라”고 호소한 적도 있어요.

 

백영경 미국의 선거결과는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니, 미국 시민은 아니어도 우리 역시 투표권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합니다.(웃음)

 

솔닛 영국의 『가디언』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극우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세계인은 많지 않기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 당선 당시에 전세계인에게 투표권을 줬다면 95% 정도의 표를 받았을 거라는 것이지요. 지난 선거에서도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의 극우정권만 트럼프를 선호했다고 생각합니다.

 

백영경 역설적이지만 트럼프 덕분에 미국의 현실에 눈뜨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면에서 계몽적인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바라면서 그의 집권을 잘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일부에서는 박근혜와 마찬가지로 트럼프 역시 임기를 채울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실제로 미국에서도 그의 노골적인 인종주의와 성차별 등에 항의해 시민불복종의 움직임도 보이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닛 미래에 일어날 문제에 대해서 지금같이 불확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이라곤 그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불안정하다는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의 행정부는 스캔들과 해임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정치적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라면 가까이 지내야 할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키면서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습니다. 정보부처와 언론, 군대, 여당, 주정부, 공공영역, 외국 지도자들 등은 대통령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의 네트워크지만, 트럼프는 이들 전체가 자기에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고 있어요. 성품 면에서나 건강 면에서도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정치권력을 사적 이득을 편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속성이 끊임없는 축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이미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 불교식으로 보면 언제나 굶주려 있는 악귀들이 어떤 것에서도 만족하지 못해서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영경 미국에서 트럼프가 득세하게 된 요인에는 미국에 팽배한 반지성주의도 있다고 봅니다. 미국사회에서 공공지식인들은 어떠한 위치에 있습니까? 또 공공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은 어떤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까?

 

솔닛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사실 반지성주의는 언제나 있어왔거든요. 1940년에는 심지어 “아무것도 모른다”, 즉 무지를 당명으로 내건 이민반대운동도 있었으니까요. 당 이름으로도 황당하지만 무지를 공개 선언하다니요. 하지만 최근에 일어나는 현상은 사람들이 무지를 넘어서 언어 자체를 신뢰하지 않게 된 때문으로 보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는 자유시장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폭스(Fox) 티브이와 우파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바로 진실이다’라는 식으로 진화하면서, 현재 비논리의 문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언어는 진실이나 사실, 과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체계이고, 그 체계 속에는 책임성이라는 요소가 빠질 수 없습니다. 누구도 물리 법칙을 자기 식으로 멋대로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자기의 생애사를 마음대로 지어내지도 않고요. 물론 그런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트럼프는 원인이라기보다는 징후로 봐야 합니다. 일종의 반지성주의의 징후이며, 계몽주의적 기획의 파산을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고, 인과관계의 일관성이니 사실관계나 진실을 가늠하게 하는 관성이니 하는 것들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후인 것이지요. 기후변화라는 현상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이는 화석연료산업계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입니다. 극우 이데올로기의 기반은 연관성을 부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들은 빈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뿐 그외에는 원인을 부정합니다. 환경적 진실들도 마찬가지고요. 내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당신 아이들의 건강과 강물 속 물고기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모두 연관되어 있는 일입니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말은 사실에 연결되어 있으며 사실은 사실끼리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허무주의 비슷하게 흐르지요. 결국 이런 상황이 트럼프의 당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오바마의 출생신고서 서류나 출생지 문제에 대해서도 트럼프는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런 정도의 심한 거짓말은 불안정한 어린애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행동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것이 어떤 일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가는 징후의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지난 수십년간 이루어온 긍정적인 변화를 무위로 돌리려는 인종주의적·여성혐오적인 역풍 속에서 증오의 문화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예인 것이지요. 전통적인 공화당원들은 스스로를 교양 있고 제정신인 양 포장하는 데 능한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내놓고 미친 짓을 하고 있습니다. 만천하에 공개적으로요. 이러한 상황은 장기적으로는 흥미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지금 공화당원들이 매우 당황해하는데, 이 정신 나간 트럼프와 계속 손을 잡는 것이 자신을 망칠 수도 있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건강보험 문제만 해도 오바마케어를 중단한 것이 정치적으로 매우 인기 없는 결정이었듯이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자신의 재선이 위태로워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혼란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습니다. 큰 두려움과 함께 얼마간 희망의 여지가 있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통을 통한 연대라는 희망, 그리고 글쓰기

 

백영경 당신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롭고 감동적인 부분은 당신이 고통과 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연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해왔다는 것, 그리고 그 탐색의 방법으로서 바로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당신에게 글쓰기란 어떤 가능성을 감지하고 새로운 세계를 맞아들이는 행위로 보입니다. 또한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미 일어난 참사를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행동했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당신의 작업을 통해서 배운 것 같습니다.

 

솔닛 오래전 나는 환경주의자들이 하는 일이나 우리가 이룬 승리 가운데 많은 부분은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막은 일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멸종되지 않은 종들, 오염되지 않은 물, 훼손되지 않은 산림, 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들 같은 식으로요. 이러한 승리를 기념하는 방법은 이야기로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적 승리같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니, 여기 이 성을 누가 점령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어렵지요. 정치현실을 논하고자 할 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목적은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관점을 열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미국 원주민운동, 페미니즘, 환경주의적 사고처럼 우리의 생각 속에 내재하는 이야기나 은유들을 분석하는 여러 흐름을 통해 나는 낡은 이야기들로부터 벗어나는 작업을 하는 세계의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낡은 이야기들은 그동안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세계를 어떤 식으로 달리 상상할 수 있는지, 어떻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있을지를 제약해왔습니다. 물론 때로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새로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오래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우리에게 도움이 되나, 문제를 더 분명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무엇을 숨기는 이야기인가, 이렇게 끝없이 평가합니다. 결국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오래된 이야기를 해체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야기면 다 좋은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남성우월주의나 인종적 우월주의, 젠더우월주의, 이성애 우월주의 등 우월주의를 담은 이야기들은 파괴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해체하는 작업은 파괴적인 권력이나 제도를 해체하는 것만큼이나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전쟁의 일부이기도 하고요.

나는 일찌감치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느낍니다. 실제 작가가 되었고 지금도 글을 쓰고 있으며 그 글이 세계적으로 읽힌다는 점에서도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까지 내 책이 읽히리라고 상상도 못했지요. 어렸을 때 누가 내게 “너의 페미니스트 책이 한국에서 잘 팔리는 날이 올 거다”라고 말했다면, 전혀 믿지 못했을 거예요.(웃음)

 

백영경 당신은 세계가 너무 빠르고 가볍고 생각 없고 얄팍해지고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세상에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기술은 특권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 세상에서는 읽기·쓰기·생각하기를 실천하는 사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드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 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사람과 아닌 사람의 간극이 매우 커 보이는데요. 작가생활 30년 동안 어떤 변화를 느꼈고, 지금은 어떤 도전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솔닛 다른 많은 사람처럼 나도 인터넷에 휩쓸려 사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트럼프 시대에 이런 불안감이 더 드는 것 같아요. 세상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할 때 과거에는 책을 읽었다면 이제는 인터넷이 일종의 지름길같이 느껴지거든요. 적어도 뉴스에 대해서는요. 나는 인터넷이 매우 두려운 공간이라고 봅니다. 해킹과 멀웨어, 랜섬웨어, 사생활 침해 등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문제도 있고요. 한때 인터넷은 모든 것을 연결해주는 유토피아인 양 이야기되곤 했지만 지금의 인터넷은 디스토피아적인 악몽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가 한 일 역시 온라인 세계의 취약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것도, 국가 정보기관을 해킹하는 것도 너무 쉬운 세상이에요. 불과 20년 전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해보아도, 마치 19세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이루어져서, 책을 읽는 중간에도 방해를 받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뭐 하나를 먹어도 바로바로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잖아요. 현대는 과잉연결된 이상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요즘 세대는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통해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가득 차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독립적인 사고나 비판적인 정신이 불가능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구태의연한 태도 같습니다. 실제로 아랍의 봄이나 월가 점령 당시에 인터넷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된 사례도 많이 있지요. 하지만 사생활 침해와 지나친 광고를 비롯해서 인터넷에는 파괴적인 측면이 많이 있는데, 그런 측면에 대한 규제가 도통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그런가 하면 내가 사는 쌘프란시스코 지역에서는 인터넷 산업이 발전하면서 엄청난 부자들이 새로 등장했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가했지만, 동시에 오래 살던 사람들이 도시에서 밀려나면서, 어느 장소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감도 없고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만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사는 장소와 관계를 맺지도 않고 공을 들이지도 않아요.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죽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씰리콘밸리에서는 새로 이사 온 기술전문직이 옆집에 사는 유색인종을 보고는 침입자로 여겨 총으로 쏴 죽인 사건도 있었고, 백살 난 노인이 퇴거당한 후 사망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씰리콘밸리의 이런 추한 모습은 그들이 지구적으로 벌이고 있는 일과 닮았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큰 부를 누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지역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좀더 이상주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백영경 이러한 상황에서 사생활이 가지는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정치적으로도요.

 

솔닛 그렇습니다. 사생활이라는 것은 연결되지 않고 전기 플러그를 뽑은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제 사생활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은 우리가 사생활을 이미 잃어버렸으며 정부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내부고발자가 되었습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지만 트럼프 당선에는 페이스북이 사용자 정보를 팔아넘긴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영경 그럼 이런 현실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솔닛 페미니스트라면 가부장제를 타도해야죠.(웃음)

 

백영경 요컨대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페미니스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솔닛 미국의 페미니즘은 노예제 폐지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을 인종주의자였다고 비난하기도 하는데요, 물론 페미니스트들 역시 당대의 일반적인 사고를 공유하는 바가 있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인종주의자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적극적으로 인종주의에 반대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기획인 만큼이나 남성을 위한 기획이기도 하며, 다른 종류의 해방과도 분리해서 볼 수 없습니다. 폭력은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파괴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남성들도 여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침묵당해온 것 역시 사실입니다. 결국 페미니즘은 환경주의와 마찬가지로 ‘네가 굶어야 내가 잘살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소외된 객체들이 모여 이룬 자본주의적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분리할 수 없는 체계로 보면서 모두의 안녕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의 일부니까요. 그런 면에서 페미니즘에는 암묵적으로 언제나 연대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50대인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밀고 나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기대가 커요. 그들의 페미니즘은 인종, 계급, 트랜스젠더 문제나 성적 지향의 문제를 함께 제기하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이니까요.

 

백영경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성이란 누구인지를 두고 갈등이 있기도 합니다.

 

솔닛 여성을 정의하는 데 생식기관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인가를 둘러싼 논쟁인가요?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요. 한가지만 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고 봅니다. 내가 젊은 세대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점 하나가 그들은 성적 지향과 마찬가지로 젠더 역시 스펙트럼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젠더가 꼭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경계가 불분명한 넓은 지대가 있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한가지에만 속하지 않기도 합니다. 양성, 양성애자일 수도 있고, 내 조카를 포함해서 트랜스젠더임을 선언하는 사람도 많고요. 지금 이러한 상황이 젠더와 관련해서 뭔가 부적응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많이 존재했는데 이제야 자유롭게 가시화할 수 있게 된 것인지, 또한 이것이 영구적으로 굳어질 새로운 방식인지 아니면 지나가는 시기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 어떤 사람의 성애적 역할이나 정체성, 말하고 옷 입는 방식이 젠더에 전혀 구애받지 않게 될지, 혹은 젠더가 무언가를 규정하되 쇠창살 달린 우리 안에 넣는 것이 아니라 코스튬 파티 같은 것으로 보게 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과거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백영경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작업이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솔닛 일단 작업할 시간이 좀 났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아직 구체적으로 말하기에는 이르지만, 시간이 난다면 『멀고도 가까운』(The Faraway Nearby, 2013, 한국어판 반비 2016)과 같은 성찰적인 작업을 더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계는 위험과 가능성을 가진 큰 변화의 시간을 지나는 중이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공적인 정치 영역에서 해야 할 발언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현재로서는 우리 시대의 위기를 타개할 가능성과 힘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면서, 시사적인 성격의 글, 희망을 포함해서 정치적인 견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들을 더 쓰게 될 것 같습니다.

 

백영경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솔닛 저도 감사합니다.

 

 

* 본 대담은 2017년 8월 25일 창비서교빌딩에서 진행되었다. 영어로 진행된 이 대화의 녹취록은 박예정(컬럼비아대 박사과정)이 작성했으며, 백영경 교수가 우리말로 번역했다. ⓒ Rebecca Solnit·백영경/ⓒ 한국어판 창비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