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작가조명

 

물의 일, 시의 일

 

 

박준 朴濬

시인.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음. mynameisjoon@hanmail.net

 

이시영 李時英

194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만월』 『바람 속으로』 『길은 멀다 친구여』 『이슬 맺힌 노래』 『무늬』 『사이』 『조용한 푸른 하늘』 『은빛 호각』 『바다 호수』 『아르갈의 향기』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호야네 말』 『하동』 등이 있다.

 

 

 

구례와 하동

 

지명(地名)을 도서의 제목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출판계의 오래된 금기 중 하나이다. 지명이 가진 고유성과 보편성이 그 작품의 텍스트를 미리 한정하는 것도 단점이 되겠지만 아마 더 큰 문제는 특정 장소에 대한 정서적 거리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모든 금기는 어떤 바람을 담아내는 것이니, 그 책이 특정한 어딘가에 고여 갇히지 말고, 널리 퍼졌으면 하는 마음도 담겨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책을 만들어오면서 이러한 것들을 모를 리 없는 시인은 지난봄 열네번째 시집이 될 원고를 내게 보여주며 ‘하동’을 제목으로 삼고 싶다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하동(河東)의 의미를 풀어 ‘물의 동쪽’으로 해도 좋을 것 같다 답을 드렸고, 시인은 다시 단호하게 ‘하동’으로 정하고 그게 아니라면 ‘함양’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굳이 지명이라면 고향인 구례도 있을 텐데 시인은 왜 배회하듯 함양과 하동이라는 지명을 꺼내두었을까.

 

“함양(咸陽)은 풀이하자면 볕들의 고향이 되겠지. 아름다운 숲, 상림(上林)도 함양에 있고. 그리고 하동은 말이야, 한번 하동, 하동 발음해봐. 음성학적으로도 아름답지. 낯선 지명이 주는 환기의 정서도 들고. 하동은 물이 죽으러 가는 곳이잖아. 복사꽃 띄우고, 살구꽃 데리고 죽으러 가는 물. 반면에 고향 구례는 마치 내가 죽으러 가야 하는 곳같이 느껴져. 태(胎)를 묻은 곳에 돌아가서 죽음까지 묻기 싫어. 구례라는 어감도 이상하고.”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고향」)이라 하며 정지용이 그랬듯이, 또 “고향 가차운 주막에 들러/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고향 앞에서」)라며 오장환이 그러했듯이, 고향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라 적당히 멀리서 그리워해야 하는 곳이라 시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고향 구례는 삶의 거처인 동시에 이미 숱한 죽음이 드리워진 곳이기 때문이다. 구례 땅을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은 “일꾼들이 주먹으로 수박을 깨뜨려 먹으며 알통을 드러내고 더운 몸을 닦던 곳, 그리고 밤이면 상류에서 씻기며 흘러온 세모래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결무늬 언덕을 만들며 또 낳던 곳”(「섬뜸」, 『은빛 호각』, 창비 2003)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시퍼런 물살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끌고 캄캄한 심연까지 내려갔다간 다시 올라오기를 수십번, 바닥에 닿으려 발을 굴러봐도 팔을 뻗어 헤엄쳐 나오려 해도 소용돌이는 빙글빙글 내 몸을 안고 어지러이 제자리를 맴돌 뿐 아, 이제 죽었구나라고 단념”(「이순의 아침」,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창비 2012)했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번 시집 『하동』에서도 시인이 그려내는 고향은 가계(家系)의 비극적 죽음과 생사의 갈림 위에 놓인 사건이 이어지는 주배경이 된다.

 

그후로도 우리 집안에서 죽어나간 어린애들은 많아 네살 위 명자 누나 두살 위 후식이 형에다 나보다 두살 어린 웅식이도 있는데 모두 다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갓방 문이 활짝 열리고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마당에 삽 끄는 소리. 죽은 아이들은 상봉 당숙의 손에 의해 가래뜸 뒷산 애장터에 묻히곤 했다.

—「명식이 형」 부분

 

피융! 하고 쇳소리를 내며 날아온 총알이 방바닥의 사기그릇을 깨고 농짝에 가 박힌 것은 아주 순식간. 장롱 속에 상체를 밀어넣고 솜옷을 찾던 산사람이 후다닥 뛰쳐나와 “다 이 아새끼 때문”이라며 세살배기 나를 향해 짤깍하고 방아쇠를 뒤로 당기자 어머니가 총부리를 가슴으로 막으며 우리 집 삼대 독자니 제발 자신을 대신 쏘라고 빌었다고 한다. 밖에서 경계를 서던 여성 빨치산과 몇차례 눈짓을 주고받던 산사람은 이윽고 옷 보따리를 들고 급히 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저 장롱짝 솜털 동무들에게 감사하라”고. 직선으로 날아온 총알을 솜들이 안에서 격하게 소용돌이치며 감싸안아버려 나도 살고 산사람도 산 것이다. 그후로 탐스러운 목화 송이를 볼 때마다 나도 몰래 빙그레 웃음이 나오곤 했다.

—「동계작전」 전문

 

내 고향 구례군 산동면은 산수유가 아름다운 곳. 1949년 3월, 전주농림 출신 나의 매형 이상직 서기(21세)는 젊은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고구마가 담긴 밤참 도시락을 들고 산동금융조합 숙직을 서러 갔다. 남원 쪽 뱀사골에 은거 중인 빨치산이 금융조합을 습격한 것은 정확히 밤 11시 48분. 금고 열쇠를 빼앗긴 이상직 서기는 이튿날 오전 조합 마당에서 빨치산 토벌대에 의해 즉결처분되었다.

—「산동 애가」 부분

 

왼쪽부터 이시영, 박준. ⓒ강민구

왼쪽부터 이시영, 박준. ⓒ강민구

 

오늘밤 피아골에 250밀리 폭우가 쏟아진다고 한다

빗점골 이쪽저쪽에 마지막 비명 지르다 묻힌 그날의 젊음들

내일이면 무너진 계곡 아래로 쓸려나와

이 빠진 할아버지들처럼 흐흐 히히 웃고 있겠구나

—「해골들」 전문(『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산동 애가」와 「해골들」에서 드러나듯 구례와 지리산은 이념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인의 유년 시절, 산사람들은 간혹 그의 집에 찾아들었다고 한다. 늦은 밤, 해어진 옷을 입고 낡은 총을 메고 온 산사람들은 당시 시인의 집에서 부엌살이를 하던 정님이 누나가 차려준 솥밥에 전라도 가닥김치를 얹어 먹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정님이 누나의 부모 역시 산으로 올라간 분들이었는데 그 탓에 매번 붉어진 눈으로 산사람들을 바라보던 정님이 누나의 모습을 시인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정님이 누나는 시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정님이」로 재현·변주되기도 한다.

 

 

김지하와 신경림, 김수영과 서정주

 

과거의 신문기사를 검색할 수 있는 포털사이트에서 시인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1967년 5월 15일 경향신문, ‘대한적십자사 주최 전국 학생백일장 장원, 전주 영생고교 3학년 이시영’이라는 짧은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무렵 시인은 『현대문학』을 구독하고 『학원』에 작품을 투고하는 당대의 전형적인 문청이었다. 처음 시 쓰기를 시작한 명확한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은근하게 품고 달궈진 문학적 열망이 백지 앞으로 그를 데려다놓은 듯했다. 그러고는 이듬해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한다. 시인은 그곳에서 오정희, 윤정모, 김형영, 이동화 등의 선배와 송기원, 김종철 등의 동기를 만난다. 당시 서라벌예대에서는 서정주, 김동리, 김구용, 박목월, 김현, 김수영 등의 문인이 강의에 나섰다고 한다. 마치 1960년대 한국문단을 응축해놓은 것처럼. 그해 늦은 가을 시인은 이불짐을 메고 도봉산 기슭의 작은 시골마을로 들어가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이듬해 등단을 한다.

 

도봉산정을 가로지르는 고압 전류의 웅웅거리는 소리, 낮개 짖는 소리, 마른 다듬잇소리, 하모니카 공장의 낮은 단절음 등을 들으며 우리는 무엇인가를 쓰고, 생각하고, 쓰고 버리고 했다. 신춘문예가 무슨 고시인 줄 알고, 신춘문예가 무슨 등용인 줄 알고, 아니 고시도 아니고 등용도 아닌 것이 못내 섭섭하고 섭섭해서 온종일 쓰고 버리고, 버리는 것이 안타까워 또 썼다.

—「나의 데뷔 시절」 부분(『곧 수풀은 베어지리라』, 한양출판 1995)

 

이시영 시인의 시집에는 늘 한결같은 배열법이 존재한다. 가장 최근에 쓴 작품을 시집의 맨 처음에 두고 작품을 쓴 시간을 역순으로 펼쳐놓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인 특유의 작품 배열법은 열네번째 시집이 된 『하동』은 물론이고 첫 시집 『만월(滿月)』(창작과비평사 1976)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월(滿月)』은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라는 1976년작 「서시(序詩)」가 첫 페이지에 있고 “오 난해한 내 믿음의 곡괭이가/보이느냐/묻힌 모든 나의 어리석음을/물주전자에 끓이는 단 하루의 모호(模糊)를/캐어내는 소리”라 하는 1969년작 「채탄(採炭)」으로 끝이 난다. 작품과 작품 사이에 창작의 시간을 불러와 앉혀놓는 배열법은 시인의 문학적 변모를 추적하는 일을 용이하게 해준다.

1970년 초반 발표된 작품들의 공통점을 하나 꼽자면 언어의 변주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때로는 이것이 강의 상류처럼 거칠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시기 발표된 그의 작품을 평하며 신경림 시인은 “한 시인이 성장하고 있는 어느 일면을 강렬하게 보게 되어 기쁘다. 다만 강경한 단어가 강경한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경향신문 1974.4.13.)라고 했고 황동규 시인은 “절제가 약해지면 강한 언어일수록 힘이 약해진다. 이 사실만 체득한다면 진정한 시인 하나를 새로 갖는 기쁨을 우리가 누리게 될 것”(동아일보 1973.12.10.)이라 했다. 그러다 1970년 중반 무렵부터 시인의 시는 큰 변화를 겪는 듯하다. 여느 소설보다 더 길고 기구한 서사를 짧은 시 안에 녹여내는, 이른바 ‘이야기 시’가 시작(詩作)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야기라는 몸을 가지게 된 시인의 작품들. 이를 통해 비애와 주제는 명확해지는 반면 언어는 한층 유순해진다. 깊은 골짜기를 지나 처음으로 평야를 만난 물처럼.

 

 

“당시 서라벌예대의 문학적 분위기라고 하는 것은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이 혼종되어 있는 듯했어. 미당의 영향으로 전통적이고 순응적인 서정시가 좋은 시라 여겨지기도 했고. 현실을 시에 쓰는 것은 거론되지도 않았지. 오히려 현실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은 시라고 여겨졌어. 학교에서 배우는 문학과의 갈등이 심했지. ‘이야기 시’ 형식이든 아니든 본격적으로 시로 현실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김지하의 「오적」을 읽은 후였어. 1970년 5월 당시 신민당 기관지였던 『민주전선』에 「오적」의 일부가 실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국동 신민당사에 가서 받아보았지. 그러고는 전문이 실린 『사상계』도 보았고. 문학으로 이런 것을 말할 수 있구나 하는 큰 충격을 받았어. 이어서 읽은 「비어」도 대단했지. 이후 월간문학사에서 300부 한정판으로 나온 신경림 시인의 『농무』를 읽고서는 또 한번 크게 놀랐고. 1971년에는 곡성 출신의 조태일 시인을 만났어. 당시 『월간문학』 편집장을 하고 있던 이문구 선생이 소개해주었지. 당시만 해도 가장 젊고 유망한 시인이 조태일이었어. 특히 김수영이 ‘체취의 시인’이라며 월평 등을 통해 많이 칭찬했지. 그쯤 신구문화사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창비 염무웅 선생 앞으로 내가 쓴 십여편의 시가 전해졌는데 몇편을 추리고 고쳐서 『창작과비평』 1971년 가을호에 발표했지.”

 

서울역에서 밤 11시 30분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장장 열한시간을 달려야 도착했다는 시인의 고향역 구례구. 섬진강이 빚어낸 진한 안개에 남도의 붉은 흙이 뿜어내는 냄새가 진동하던 곳. 전라선은 시인과 고향, 도시와 농촌, 자본주의와 농업의 해체를 연결하는 실질적 통로이자 시인이 써내려가는 작품에 이야기와 마름 없는 리얼리티를 전하는 문학적 선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전라선의 역사 인근에는 약속이나 한 듯 측백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심겨 있었고 그 옆에는 옷 보따리를 든 어린 여성들이 어머니와 눈물로 헤어지는 장면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편물 공장이나 가발 공장으로, 혹은 어느 집의 식모로, 또다른 곳으로 가게 될 여성들. 이후에는 도시의 하층 노동자가 되기 위해 농촌의 남성들이 이농을 했고 그러다 온 가족이 트럭을 타고 창신동이나 정릉 혹은 봉천, 월계같이 언덕에 지어진 무허가 판자로 들어가는 형태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회변동을 아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시인은 카프 시인들을 읽었고 백석과 이용악과 오장환을 필사했다. 김지하나 신경림의 시가 하늘에서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계보의 강한 흡인력 아래 등장한 인과도 발견했다. 물론 시인 스스로에게 내재된 민중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작품으로 끌어올린 것도 모두 이 시기 본격적으로 이뤄진 일이다. 이후 1980년부터 시인은 ‘창비시선’의 편집장으로 수많은 시인을 발굴하고 그들의 시집을 편집하는 일을 맡게 된다.

 

“시를 보는 안목을 갖게 된 것. 혹은 내 안에 혹독한 비평가를 들이게 된 것은 모두 김수영 시인의 영향이라 생각해. 어디 시인이 시만 쓴다고 시인인가. 시를 보는 눈이 있어야 시인이지. 김수영은 하이데거가 설명한 예술론을 더 또렷하게 구현해냈지. 김수영은 좋은 시를 정의하며 ‘사상이 새로운 언어의 작용을 거쳐 자유를 행사한 경우’라거나 ‘침묵의 한걸음 앞의 시’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어. ‘죽음의 음악이 울린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라고도 했지. 반면 난해시처럼 꾸며 쓰는 시들 앞에서는 ‘언어의 대한 고통 이전에 그 이전의 고통이 모자라다’라며 혹평을 했어. 그뿐만 아니라 삶과 마음의 밑바닥에서 자연스럽게 끌어올려내지 않은 참여시들도 배격했지. 김수영식 비평의 미덕은 어떤 이론이나 사상보다는 작품의 구체적 텍스트에서 시작한다는 데 있어. 『사상계』나 일간지에 월평을 많이 쓰곤 했는데 매달 육칠십편의 시를 읽으며 그야말로 작품과 정면대결을 벌였지. 자신이 세운 비평적 입장을 증명하기 위해 작품을 동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 사실 서라벌예대 1학년 때 김수영의 수업을 몇번 청강한 적이 있었어. 그때 4학년들이 듣는 ‘영미시비평’ 수업을 김수영이 하고 있었거든. 밤새 술을 마시고 온 것처럼 안색이 피곤해 보이고 늘 신경이 날카로웠어. 내가 쓴 시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돌아온 것은 야단 맞는 일이었지. 내게 영어 공부나 하라고 했어. 윌리엄 블레이크의 「호랑이」(The Tyger)를 원어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 그런 세계적인 호흡의 시를 충분히 인식하는 일이 먼저고 시는 그후에 써도 좋다는 거야. 당시에는 그 말이 서운했는데 막상 지금은 그게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겠어. 이십년 넘게 창비시선과 함께 지내오면서 조금 후회가 되는 것은 지나치게 진영논리를 앞세우고 고수하지는 않았나 하는 거야. 감각이냐 현실이냐의 문제보다는 작품다운 작품이냐가 선행되었어야 하는 건데. 창비시선의 향후 과제 역시 노동이나 현실의 가치를 의식적으로 담아내는 일보다는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실다운 작품을 발굴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김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시인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눈은 반짝였다. 하지만 내가 미당에 관해 물었을 때는 시인은 다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시인의 한 포즈’만 목격했을 뿐 배운 것이 없다고 했다. 1974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에는 이시영 시인의 이름이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당시 광화문 비각 뒤 의사회관(현재 교보빌딩)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선언 후 그가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의사회관에는 문협(문인협회)의 사무실이 있었고 당시 미당은 문협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이후 몇차례 미당이 비밀스럽게 시인을 불렀을 때에도 한번 응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2000년 12월 25일, 미당의 빈소에서 시인은 대학 시절의 스승을 마지막으로 만난다. 어쩌면 시인은 우리 문학사에서 미당을 거부한 첫 세대이고 곰곰 살펴보면 이 거부는 반드시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온 것만은 아니었다.

 

졸업을 하고 나서는 선생을 통 뵙지 못했다. 그 흔한 설날 세배 때도 우리는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아니다. 나이를 먹고 철이 들어버려서일까? 아니다. 우리 앞에 밀어닥친 고단한 세월의 바람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시인 수업, 작가 수업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시인 수업이야말로 외롭고 고통스런 싸움이어야 했다. 우리들의 시인 수업이야말로 스승 서정주가 우리에게 물려준 일체의 문학적·정신적 작업을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서정주 시대가 아닌 바로 우리 시대가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 차가운 물음에 정직하게 자기 몸을 던져야 하는 행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스승 서정주」 부분(『곧 수풀은 베어지리라』)

 

1980년 후반부터 시인은 짧은 형태의 단시를 즐겨 쓰기 시작한다. 이것은 당시 시단의 주류로 자리 잡은 민중서사적 경향의 작품들로부터 스스로 멀어지고자 했던 시인의 비평적 의식이 개척한 길이자 창작이라는 행위 끝에 지복(至福)을 누리는 일이기도 했다. 죽음과 고통의 변주가 아닌 생명과 기쁨의 변주. 단정하고 간결한 시인의 호흡은 최근 시인의 SNS에서조차 잘 드러난다. 그의 한쪽 눈은 여전히 정치사회적 이슈에 고정되어 있고 다른 한쪽 눈은 발표되고 있는 작품과 발간된 시집들을 살피고 있다. 김수영이 그랬듯 맹렬하게 읽고 부지런히 시평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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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문학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일단 읽어야지. 읽고 나서 이야기해야지. 최근에는 황정은의 소설과 김사과의 산문을 즐겁게 읽었고 백은선과 임솔아의 시도 놀란 마음으로 보았어. 읽기라는 행위가 특정 취향이나 세대에 갇혀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문학은 다소 사그라들고 있는 것 같아. 우리 문학의 르네상스를 꼽자면 백석과 이용악 그리고 이태준이 있던 1930년대, 그리고 신경림과 김지하 황석영이 주도했던 1970년대를 들 수 있을 것 같아. 문학 그 자체로도 힘이 있었고 그 힘이 사회문화적 에너지로 곧바로 전환되던 때니까. 반면 최근의 문학은 개별 작품의 성패를 떠나 문단 내부의 소문과 한담쯤으로만 머무는 면도 있는 것 같아. 이문구 선생이나 조태일 시인이 살아 있었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그리고 그들은 어떤 만년작을 써냈을까. 많이 아쉬워. 그들은 1980년 광주가 만든 마음의 울분을 잘 풀어내지 못한 탓인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어. 다른 이야기지만 고은 시인을 대하는 문단의 태도도 아쉬워. 고은의 문학은 창조적 실감을 바탕으로 현재도 꾸준히 진화하고 있어. 그런데 문단에서는 고은의 현재를 잘 주목하지 않아. 그분을 서둘러 원로로 혹은 명사로 여기는 일에만 급급하지.”

 

인터뷰를 끝내며 나는 시인께 짧은 질문을 드렸고 역시 짧게 답해주시길 부탁드렸다. “삶의 어느 순간, 시는 삶의 전부로 느껴지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가장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 시의 존재가 가장 절실하셨을까요?” 하고 물었을 때 시인은 “시를 못 쓸 때 시가 가장 절실하지”라 했고 “문학은 왜 시대처럼 정반합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걸까요?” 하는 질문에는 “시대가 문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라고 답했다.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관습적으로 시집을 내지 않겠다고 공언하셨는데 앞으로 어떤 시의 계획이 있으십니까?”라는 마지막 질문에는 “앞으로 어떤 것을 쓸지는 시가 정해주겠지. 시하고도 오래 살다보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어”라 웃으며 말했다.

 

시인과 함께 하동에 가고 싶다. 하동에는 잠시만 머물고 구례로 넘어가자고 조르고도 싶다. 구례의 짙은 산색과 시인의 눈빛을 번갈아 살피다가, 남원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는 인월, 그곳에 있는 한 어탕국수 집으로 시인을 모셔가고 싶다. 내가 간혹 들르는 인월의 그 어탕국수 집에는 그 옆을 흐르는 맑은 물에서 잡은 붕어를 배추 시래기와 함께 진하게 끓여낸다. 음식의 맛도 그만이지만 정작 내가 시인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그곳에서 부모의 일을 돕는 한 소년이다. “시래기 다 떨어졌다” 하는 부모의 말을 들으면 매번 “아 지겨워” 하고 신경질을 내며 뛰쳐나가면서도 어느새 자신의 키만큼 시래기를 높이 쌓은 손수레를 끌고 우다다다 강변을 뛰어오곤 하는 장면도 함께. 분명 시인은 그 장면을 좋은 시 한편으로 바꾸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의 일과 함께하듯 섬진강도 자신의 일을 계속할 것이다. 죽으러 죽으러 가는 일. 아니 새로 살러 가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