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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성중 金成重
소설가. 소설집 『개그맨』 『국경시장』이 있음. hippieshow@naver.com
박소란 朴笑蘭
시인.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이 있음. noisepark510@hanmail.net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과 정치’에 대한 단상」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등이 있음. jwhyi@naver.com
박소란 안녕하세요. 겨울호 문학초점 좌담에는 김성중 소설가를 모셨습니다. 지난 계절부터 함께한 한영인 평론가와 저, 이렇게 세 사람이 모두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큼 한층 다양한 견해를 주고받을 수 있을 듯해 기대됩니다.
김성중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 초대받고, 우선 한 계절에 나온 신작을 우수수 읽을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한편으로 동료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에 두려움이 일었는데, ‘독자의 입장’에서 좌담에 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왔습니다.
한영인 저 역시 이번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폭넓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박사랑 『스크류바』(창비)
박소란 다양한 주제를 통해 현 세태를 꼬집고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박사랑의 첫 작품집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작가의 선명한 세계관이 좋았어요. 가령 “불빛은 환했지만 오히려 더 어두워 보였다. (…) 그들은 모두 서로를 외면한 채 제각기 흔들리고 있었다”(「이야기 속으로」 123면) 같은 진술이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는데, 이를 통해 작가가 현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의 현실과 그것을 견디는 일반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아낸 부분들이 인상적으로 읽혔습니다. “회사에 도착해서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걸레를 빠는 것이었다”(「어제의 콘스탄체」 137면)라거나 아이를 잃어버리고 패닉 상태에 빠져 동분서주하는 ‘나’의 휴대폰으로 “무담보 무서류 대출 아이러브론입니다!”(「스크류바」 62면) 같은 ‘기계음’의 전화가 걸려오는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는데요. 매 작품마다 삶의 고단이 사실적으로 배어 있고 그것을 토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작품에 대한 실물감과 함께 작가에 대한 신뢰를 갖게 했습니다.
김성중 소설집을 덮고 난 첫번째 느낌은 발랄하고 산뜻하다는 것입니다. 선이 활달한 크로키같이 무리하지 않고 쓱쓱 앞으로 나가는 느낌이 좋았어요. 작가도 즐겁게 썼을 것 같아요. 읽다보니 세가지 정도 다른 결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첫번째는 모성 이야기를 어둡고 강렬하게 풀어낸 「스크류바」 「하우스」 「울음터」고, 두번째는 유머를 섞어 밝지만 고단한 젊은 세태의 감수성을 짚어낸 「#권태_이상」 「높이에의 강요」 「어제의 콘스탄체」 같은 작품이에요. 세번째는 「바람의 책」이나 「이야기 속으로」같이 메타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이죠. 이렇게 다른 컬러와 리듬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채로운 느낌이 들었고, 첫 소설집답게 작가가 여러 글쓰기를 시도하며 자신의 인장을 찾아가는 궤적이 엿보였습니다.
한영인 저는 읽으면서 ‘문청’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어요. 제가 생각하는 ‘문청’은 문학의 논리로 세계의 실상을 이해하려 드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에요. 그때 세계를 바라보는 틀이 되는 문학은 타락하고 비속한 현실의 세계와 구별되는 순수한 낭만의 공간이죠. 문학의 세계와 실제 현실의 대립구도는—이는 순수와 타락의 이분법이기도 할 텐데— 사실 여러편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가령 「#권태_이상」에 달린 각주들은 모두 국문과 전공수업에서 읽었을 법한 책들이잖아요. 반대로 그걸 추억하는 자신은 지금 의지, 희망, 생각 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책 한권 읽지 살고 있죠. 이건 「높이에의 강요」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요. 문학이 하던 걸 연극이 대신하지만 순수했던 시절과 타락한 현재의 대비는 여기서도 역력합니다. 값싼 삼겹살과 일등급 한우의 구도로 말이죠.
「#권태_이상」은 제목에 이상을 내세웠지만 실은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와 강력한 상호텍스트성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뭐 가지고 갈래?”라는 매앵의 말에 “책, 기타, 카메라”(23면)라고 대답하는데 「아담이 눈뜰 때」에서는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세가지가 타자기, 턴테이블, 뭉크 화집이라고 나오죠. 나의 책, 기타, 카메라와 아담의 타자기, 턴테이블, 뭉크 화집은 모두 타락한 현실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저항의 표지인데 박사랑의 소설 속에서는 이미 그 저항이 무력화된 이후의 풍경을 담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곤궁하고 권태로운 것이겠죠.
박소란 박사랑의 인물들은 대체로 무력해요. 이 시끄럽고 재빠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낡은 책”(「바람의 책」)이자 “의지할 데가 없이 그저 막다른 길에 서 있는 존재”(「울음터」 191면)들이죠. “떠나지도, 비를 피하지도, 목을 매지도 못한 채 그냥 그곳에 멈춰 서 있”(「높이에의 강요」 58면)을 뿐인 이들은 그러나 결론부에 이르러 때때로 어떤 견딤의 힘을 발휘할 때가 있는데요. 가령, 「어제의 콘스탄체」에서 “내일 만나자고요”(152면) 하는 부분이나 「울음터」의 “아무도 울지 않”는데 “주저앉아 울어버렸다”(202면)는 구절이요. 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도약하는 순간이 뭉클함을 주기도 했어요.
한영인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높이에의 강요」인데요, 현재 청년들이 대면하고 있는 한국적 ‘입사 의식’을 잘 포착해서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입사(入社)는 일차적으로 성인의 통과의례를 뜻하는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이지만 동시에 ‘조인 어 컴퍼니’(join a company)이기도 하죠. 실제로 요즘은 취업이 가장 중요한 입사 의식 아닐까요? 서류, 자기소개서, 압박 면접, 경쟁 프레젠테이션 등의 관문을 거치면서 주체를 회사형 인간 혹은 자기계발형 인간으로 주조해가잖아요. 작품 속에서 주인공도 이때 럭키의 이야기를 자기 것인 양 훔쳐 쓰면서 세상의 논리에 무릎 꿇게 되는 장면이 나오죠. 근데 흥미로운 건 이러한 ‘입사’가 좌절된다는 거예요. 여성과의 섹스는 전통적으로 남성적 입사 의식의 한 예로 통용되는데 작품의 결말에선 고고와의 섹스에 실패하죠. “아직은 안 돼”(57면)라는 거절의 말과 함께요. 여기서 주인공의 ‘입사’ 역시 실패하리란 예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유예와 좌절은 사실 전통적인 남성 서사를 구성해온 것이기도 하죠. 박사랑의 소설이 어딘가 낯익은 구석이 있다고 느끼는 건 바로 그런 점 때문 같아요.
김성중 적자생존 모드에 놓인 청년들의 피로감 같은 것이 진하게 느껴지는데요. 그런 고단함은 당연히 도피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잖아요. 「어제의 콘스탄체」에서는 전생으로 가서 일종의 ‘캐릭터 놀이’와 비슷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모차르트가 나오고 갈릴레이가 나오는데, 살짝 유치할 수도 있는 소재를 천연덕스럽게 잘 썼더라고요. 다만 이런 도피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유통기한이 길지 않죠. 박사랑 소설은 현실의 핍진함을 덤덤하게 그려놓고, 그로부터 해방되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는 메타적이고 알레고리화되는 경향이 있죠. 이것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언젠가 이 알레고리라는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컨대 「울음터」에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빌려온 “아, 참 좋은 울음터다. 한바탕 울어볼 만하구나”(191면)라는 문장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은 인용을 빼고서도 충분히 굳건하거든요.
한영인 말씀하신 관념성과 연결될 수도 있는데, 학교 다닐 때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쓴 소설은 아니라고 할 때 이 소설집에 달린 각주들은 한편으로 작가의 경험이 협소함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순수했던 과거를 구성하는 텍스트들로 기능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무매개적으로 낭만화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어요.
김성중 국문과 전공서적이라기보다 국어교과서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교과서적인 풍경을 현실의 젊은 남녀 위에 띄워놓은 것이지요. 이것은 ‘다시 읽기’보다 지금 이 시간의 풍경 속에 이상이나 김승옥의 작품을 띄워놓고 덧대어 읽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태_이상」에서 스포츠카를 몰고 시골 할머니 집에 온 ‘나’는 이상의 수필을 떠올리는데 결국 끝에 이르러서 “이상은 다르지 않을 내일에 오들오들 떨었지만 나는 내일이 달라질까 오들오들 떨었다”(31면)는 문장을 향해 달려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번짐’이 어떻게 현실로 다시 환원될 것인가, 어떻게 인물에게 작용하는가 하는 지점에서 머뭇거리게 됩니다. 관념적이고 일시적인 환기구 이상이 될 수 있을까 싶거든요. 물론 그 환기구에서 새롭게 불어오는 공기도 있겠지만요.
박소란 말씀하신 것처럼 박사랑은 책, 특히 고전 텍스트를 통해 현실을 되비추고 과거와 비교했을 때 오늘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한편 책이라는 장치는 일상에 지친 이들이 기묘하고 환상적인 사건으로 빠져드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도 활용되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람의 책」 「이야기 속으로」 「어제의 콘스탄체」 「사자의 침대」 「히어로 열전」 등 다수 작품이 유사한 스토리라인을 취한 듯해요. 작품들이 일정 부분 패턴화되어 있다는 인상이 들어요. 때로는 메시지를 너무 쉽게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러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보신각종은 새해를 알리는 종인데, 하필 그것을 부수었다는 건 희망 없는 새해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었다”(「히어로 열전」 242면)나 “아내의 시체를 팔아넘기고 목을 맨 사내와 딸의 일기를 태운 남자가 겹쳐 보였다”(「이야기 속으로」 127면)는 다소 직접적이고 과한 해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영인 한권을 모아놓고 보면 주제 면에서 독창적이거나 새롭지는 않아요. 「하우스」 같은 건 너무 일반적인 느낌도 있고요. 그럼에도 읽으면서 마음이 움직이는 건 소설가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나름의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는 작가의 태도 때문 같습니다. 「이야기 속으로」에서 주인공이 같이 여관에 가달라고 말하는 남자를 뿌리치지 못한 이유도 남자가 자신에게 “왠지 당신은 소설가이지 않습니까?”(127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인데, 전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본분이랄까 사회적 자리랄까 하는 것이 드러나죠.
김성중 첫번째 책이니까 자기 세계의 가두리를 이런 식으로 탐색해봤다면 두번째 책에서는 이 장신구들을 떼어내고도 충분히 비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크류바」 같은 작품은 감탄하며 읽었는데,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나옵니다. 애를 잃어버렸으니 정신이며 감각이 얼마나 곤두서 있겠어요. 그렇게 곤두선 감각과 지각 속에서 자신의 억압과 마주하는 장면이 강렬합니다. 스타벅스에 가서 허겁지겁 얼음물을 들이켠 다음 “이대로 자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미쳤나보다 (…)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스타벅스에 앉아 자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다니”(64면)라며 자책한다거나, 아이를 임신하던 날 모텔 카운터에 서 있던 소녀의 하얀 셔츠에 스크류바가 똑 한방울 떨어지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 등등이 아주 생생합니다. 미친 듯이 아이를 찾으러 다니면서 한편으로 계속 스크류바 생각이 떠나지 않는 주인공의 심리가 흥미롭죠. 스크류바의 빨간색, 천진하기도 하고 노골적이기도 한 그 붉은 동그라미가 소설을 장악하고 완전히 무의식에 초점을 맞춘 전개인데 몰입도도 높고 설득력도 있지요. 이런 작품을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현 『그 개와 같은 말』(현대문학)
한영인 「고두」를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임현의 첫 소설집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통독한 뒤 제가 느낀 임현 소설의 특징은 “아주 사소한 문제”(「무언가의 끝」)에 강박적일 만큼 집요하게 집착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질리는 느낌을 받기까지 했어요. 그런 사소한 문제로부터 시작해 현실과 삶의 태도 일반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내는 서사적인 힘이 있어요. 그럼에도 저는 이러한 작가의 태도를 ‘윤리성’이라는 말로 추어올려야 할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입니다.
김성중 대체로 질문을 품고 있는 형식으로 건축되었더라고요. 작가가 주인공이라는 슈트를 입고 어려운 질문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합니다. 일인칭 독백체로 쓰인 소설이 많은데, 일단 독자는 작중인물로부터 질문 한 다발을 받았으니 부지불식간에 대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에요. 흥미롭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그 때문에 몰입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요. 저는 ‘윤리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윤리를 가지고 실험한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화학실험실에서는 실험재료가 분자나 원소겠지요.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물이 된다는 되는 식으로요. 그런데 ‘윤리실험실’의 재료는 인간, 혹은 인간성이기 때문에 읽는 순간 긴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45%에 악의 15%를 결합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질투 10%에 선망 27%가 섞였는데 왜 200%이상의 괴물이 나오는 것일까, 이런 식의 종잡을 수 없는 결과물이 도출됩니다.
박소란 임현 소설의 근저에는 어떤 순결한 ‘심리적 결벽’ 같은 게 있는데 그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그 결벽이 죄책감 혹은 책임감 같은 윤리를 종용하고, 인물 내면의 깊숙한 지점을 꿰찌르는 것 같아요. 매 작품이 그래요.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은 「가능한 세계」인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우리는 자주 먼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런 날에는 집에 돌아와 깊이 잠들 수 있었다. (…) 그리고 언제부턴가 우리는 멀리 가지 않고도 잠들었다. 늦잠을 잔 날에는 아빠에게 몹시 미안해졌다. 배가 고플 때도 그랬다. (…) 그런 기분으로 막 잠이 들려 할 때, 행복하다는 걸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게 참을 수 없이 부끄럽고 미안해서 다시 슬퍼지기”(26~27면)로 했다고 말하는 부분이 자기결백을 내장한 임현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요. 임현은 아마도 스스로를 매우 괴롭히는 사람인 듯한데, 그런 작가적 면모가 굉장히 믿음직스러웠어요.
한영인 「엿보는 손」을 보면 유머가 있어요. 이러한 유머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는 멜랑콜리거든요. 프로이트가 우울과 멜랑콜리를 구분하면서, 우울과 다른 멜랑콜리의 특징이 과도한 자기비난과 자기처벌에 대한 망상이라고 했어요. 제가 아까 임현 소설의 반성과 성찰의 태도가 윤리적이라는 평가를 유보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자기처벌로까지 나아가는 멜랑콜리와 건강한 윤리적 태도는, 늘 정확하게 구별되는 건 아닐지라도 경우에 따라 구별하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거기에 있어」가 그런 멜랑콜리적 성격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남자가 당하는 폭력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그야말로 자기처벌과 자기비난의 망상이 외화된 것에 불과합니다.
김성중 저는 말이 현란한 소피스트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인물들이 전부 자기 논리를 가지고 있죠. 그런데 소피스트에게는 진실보다 논리가 중요하죠. 그래서 미끄러운 혀로 궤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듣고 있으면 그럴듯한데 석연찮은 찜찜함이 남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진실을 말하는 소크라테스 못지않게 소피스트도 필요합니다. 다만 자기변호가 워낙 능란하다 보니 가해자 논리 옹호라는 오해까지 나온 것 같습니다.
한영인 ‘역사의 종언’ 이후의 인간을 ‘동물’과 ‘속물’로 구분해 파악하는 것이 지난 역사철학의 임무였다면, 그 ‘동물’과 ‘속물’의 내면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것은 이후 예술의 주된 관심 영역이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이후 많은 작품들이 이른바 ‘속물’들의 내면을 그려내기 위해 애써왔는데 임현의 「고두」가 그 연장선에 서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고두」의 장점과 위태로운 점은 ‘속물’의 내면을 너무나 핍진하게 그려내다보니 작가가 선 자리와 작품 속 인물의 자리가 종종 겹친다는 데서 발생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작가가 인물을 합리화한다는 오해도 받은 걸로 아는데 저는 그런 오해엔 동의하지 않지만 왜 그런 오해가 나타났는지는 알 것 같아요. “우리가 이렇게나 닮았다”(121면) “나라고 뭐 달랐겠니”(60면) 같은 진술이 결국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스스로를 그런 종류의 인물과 다르지 않게 여기고 있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죠.
김성중 저는 좀 다른 생각인데, ‘인간은 거기서 거기야’라고 말하는 커다란 목소리가 있다면 임현은 거기에서 유일자인 나를 분리해내는 것 같아요. 동시에 그 논리에 저항하는 반대편 목소리들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범죄자들의 일반 논리에는 세상을 인격화하는 오류가 있어요. ‘사회는 나쁜 것이다. 그 나쁜 사회에 내가 나쁜 짓 좀 더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라는 식이죠. 그런데 정작 그들이 괴롭히는 건 ‘사회’가 아니라 ‘약자’죠. 세계에는 강자와 개새끼만 있는 게 아니라 약자가 있어요. 「고두」에 나오는, 세번 뺨 맞는 연주처럼요. 폭력의 비겁성은 결국 이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겉으로는 ‘사회의 응징’을 외치지만 결국 약자에게 가해진다는 것. 인물들도 이런 모순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반성하지 않겠어. 내가 뭘 잘못했어. 세상만사가 다 그런데’라는 식이죠.
박소란 「고두」에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이 소설은 일정 부분 반어적인 맥락을 살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표면적으로는 가해자인 ‘나’의 논리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 이면에 하나의 논리와 그 논리에 저항하는 또다른 논리가 팽팽히 맞선다고 봐요. 시종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한 목소리로 내뱉는 화자의 발화와 “나라고 뭐 달랐겠니” 속에 깃든 자기혐오, “‘너는 네 부모에게 미안하지도 않니?’/차마 너에게 하지 못할 훈계들을 늘어놓았다”로 표출되는 행동들을 보면 그 감정선이 결코 단순하지는 않거든요. 그 근저에는 씻을 수 없는 근원적 죄책감이 있고, 그것은 참회나 용서와도 어느 정도 맥이 닿지 않을까 싶어요.
김성중 참회라고 보긴 힘들 것 같아요. 용서를 구하는 형태조차도 변명이고, 변명을 하고 싶어서 용서를 구하는 거니까요. 마지막 말은 자승자박의 체념조로 들립니다.
박소란 임현의 인물은 기본적으로 선과 악, 두가지를 동시에 내재하고 있고 그것이 한 사람 안에서도 다양한 각도로 부딪쳐요. 사실 어떤 사람을 선이나 악으로 단정할 수는 없잖아요. 세계도 그만큼 다층적이고. “선한 사람이 가진 무지 같은 것”이나 “자비를 베푸는 자가 갖는 그 우월한 감정”(35면)을 이야기하면서 임현은 우리 안의 모순과 허위, 또 그것들로 가득 찬 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요. 하나의 인물에 대해, 사건에 대해 독자가 어떤 결정에 이르려 했을 때 그것을 과감히 전복시키기도 하고요. 어떤 섣부른 판단도, 단죄도 하지 않고 옳음과 그름의 싸움을 과정으로 파악하려 해요. 이런 일련의 작업은 인물과 사건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나아가 그것을 사유와 성찰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현 소설의 묘미는 서사가 아니라 그에 얽힌 인물의 심리를 추적하고 사건의 본질을 가늠하는 과정 자체에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거예요.
한영인 소설 속에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서로 뜨겁게 만나지 못한다는 점도 특징 같아요. ‘절교’의 과정도 화끈하게 싸우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속으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서 멀어질 뿐이죠. 끝없이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데 그 이상함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아요. 그저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그 사람의 감각이 중요하게 떠오르죠. 그러다보니 어딘가 의뭉스럽기도 해요. 이 의뭉스러움이야말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기본적인 시선 아닐까요.
김성중 감히 누가 누구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기본 입장 같아요. 「엿보는 손」의 주인공 최종화는 자서전 대필 전력이 있습니다. 남의 인생을 책 속 인물로 가공한 것인데, 표절로 범벅이 된 자서전에 빠진 유제호의 아버지가 ‘책 속 인물’처럼 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소설의 끝부분에 이르면 최종화는 유제호가 쓰는 소설 속 인물처럼 변해버립니다. 즉 자기 행동의 처벌을 받는 것이죠. 마지막 장면의 ‘너’가 누구냐에 따라 결말이 자유롭게 전환됩니다. ‘너’는 유제호일 수도,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 임현일 수도,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 바로 자신일 수도 있으니까요. “책장에서 가장 손을 많이 탄 한 권을 꺼내 마지막 장을 펼쳐보면”(88면) 같은 문장은 책 속의 최종화가 종이에서 뛰쳐나와 독자한테 ‘당신 책장을 지금 한번 봐라’라고 일갈하는 것처럼 보여요. 함부로 남의 인생을 읽어대며 안다고 생각하는 독자 바로 너! 이런 식으로요.
박소란 결국은 모든 게 ‘불가능한 세계’라는 것. 인정하기는 힘들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진실 같아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폭넓고 추상적이기 때문인지, 임현의 소설은 전통적인 서술구조를 띠지 않아요. 시간순의 차분한 전개를 거부하고 1, 2, 3 혹은 1일, 2일, 3일 같은 식으로 챕터를 나눠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갑니다. 저는 결과적으로 이같은 방식 또한 긴장감과 함께 풍부한 정서적 울림을 부여하는 임현 소설의 주요한 특징 같아요.
김혜진 『딸에 대하여』(민음사)
김성중 『딸에 대하여』는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의 이야기로, 잘 읽히고 묵직한 울림이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문제를 똑바로 마주 보는 힘, 그 직선의 힘이 돋보이는 수작입니다. 그럼에도 다소 도식적인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첫째는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가 모든 상황을 조망하는 표면이 매끈한 거울 같다는 것. 둘째는 그린과 레인이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것. 요철도 좀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딸 커플은 엄마 입장에서 성정체성 빼면 나무랄 데 없잖아요. 레인이 여자만 아니라면 바람직한 ‘사윗감’인 거죠.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제외하고 독자적인 개성이 좀더 부여됐으면 싶었습니다.
박소란 화자가 엄마로 설정된 것은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 같아요. 엄마는 딸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 말하자면 “언제나 적당한 만큼의 예의와 배려를 보일 수 있는”(61면) 타인과는 반대 지점에 위치한 존재니까 딸의 일을 곧 자신의 일로 끌어안고 처절하게 사유하죠. 그렇지만 그 바탕에는 아무래도 이해와 연민이 깔려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곧장 사회적·경제적 문제와 얽힌 걱정과 우려로 환원돼요. 결혼이라는 제도 없이 내 딸이 제대로 된 삶을 지탱할 수 있을까, 같은. 덕분에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짚어내죠. 그러나 한편 동성애에 대한 세간의 인식, 다층적인 감정의 문제를 세밀하게 담아내기는 힘들지 않았나 싶어요. 어쩌면 의도적일 수도 있지만 작품 속에서는 지나치게 축소돼 있는 것 같습니다.
한영인 저는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가 생각났어요.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서사처럼,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식이 두렵지만 남편에게 학대당한 기억이나 계급적이고 여성적인 상처를 통해 각성하게 되는 거죠.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차용해서 말하자면, 저는 이 작품이 일종의 여성주의리얼리즘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 사회주의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소련의 관제 이데올로기다, 도식적이다 이런 비판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거기서 최상의 작품은 분명한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이 작품도 좋은 여성주의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딸에 대한 이해에 도식적으로 가닿기보다 그 과정에서의 내적 갈등을 핍진하게 그려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딸을 이해하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견디기 위해 싸우는 거죠. 저는 그래서 레즈비언인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면 어떨까 궁금하더라고요.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딸의 투쟁’과 이런 딸을 보고 견디는 ‘엄마의 투쟁’이 각각 어떻게 읽힐지를요. 근데 이 소설에서는 두가지가 병치되잖아요. 어디에 가중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런 게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엄마는 사실 온갖 사회적 편견의 발화자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 발화가 임현의 「고두」에 나오는 윤리 선생의 발언처럼 어떤 타당성을 갖게끔 느껴지죠.
김성중 한가지 투쟁이 더 있죠. 노인 요양보호사인 엄마가 젠을 데려오기 위한 투쟁. 엄마를 변화시킨 건 딸의 투쟁이 아니라 젠이라는 존재 같아요. 딸이 처한 부당함에 눈뜨는 계기가 젠이 처한 부당함과 맞물려 있거든요. 저는 이 젠이라는 인물이 작동하는 방식이 좋았어요. 가장 무력한 존재가 가장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니까요. 엄마는 ‘우리 딸이 너무 많이 배웠기 때문에 퀴어가 돼서 대학에서 잘렸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자꾸 딸에게 하잖아요. 엄마 입장에서는 딸을 보호하려다보니 세상의 온갖 상식의 말, 달리 말해 편견의 말을 딸에게 퍼붓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젠이라는 절대적 약자가 그 행동에 변화를 주는 거예요. 엄마가 ‘너희가 자식을 낳을 수 있느냐’고 비난했는데, 소설의 말미에는 젠을 집에 데려와서 일시적 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말하자면 젠이 돌봐줘야 할 유사 자식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엄마에게 ‘견디는 힘’이 생겨난 것 아닌가 싶어요. 지나친 확대해석일까요.
박소란 이 작품의 결말을 두고 낙관이냐 혹은 비관이냐 하는 식의 방향을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다만 결말에 이르는 과정, 인물의 변화를 주시해야 할 텐데. 여기서 진정성이 느껴지죠. “그러니까 이건 세상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 일이다”(131면) “이 모든 일들이 아주 멀리 있는 일이 아니고 내가 그 모든 일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185면)이라고 인식하기까지 시시각각 동요하고 나아가는 ‘나’의 감정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저 그런 세상 일’을 ‘나의 일’로 받아안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텐데,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결말이 아니라 바로 그 과정 자체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도 ‘나’는 고작 “견뎌낼 수 있을까. (…)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197면)라고 말할 뿐이에요. 이것 자체가 과장 없는 진실인 거죠. 저는 『딸에 대하여』가 서사나 인과성에 집착하거나 개연성 있는 에피소드로 포장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얼핏 기승전결의 뚜렷한 상황 진척이 없기 때문에 지루하게 읽힐지도 모르지만 대신 ‘현재’를 아주 성실히 파고들어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작동하게 합니다. 인물과 상황이 서로 갈등, 투쟁하며 아주 서서히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어떤 희망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로써 끈질기게 밀고 나가요. 섣부른 결과를 도출해내려 하는 대신 현재를 끝까지 놓지 않죠.
한영인 근데 퀴어라는 소재를 떠나서 이 딸은 정말 문제적이지 않나요.(웃음) 물론 이와 같은 인물의 복합적인 설정이 이 소설의 커다란 매력이라고 생각하지만요.
박소란 그렇긴 하죠.(웃음) 한편으로, 저는 이 작품을 퀴어나 페미니즘의 관점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장 집중해야 할 부분은 엄마인 화자의 심리 변화라고 보거든요. 타인의 이야기를 곧 나의 이야기로 받아안는 과정 말입니다. 이는 어떤 정치 의제를 떠나, 스스로를 ‘경계인’의 틀 안에 가두고 모든 것을 다만 ‘세상 일’로 규정한 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도 닿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득 평범한 듯 보이는 이 제목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와요. 먼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딸에 대한 이야기, 그것이 곧 나의 이야기라는 의미일 테니까요.
한영인 엄마가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30면)고 하잖아요. 세상의 논리에 대해, 노인요양소 내부의 질서에 대해, 강사를 해고하는 대학의 결정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가 투쟁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바꿀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관계가 바뀌리라는 희망도 보이는 것 같아요.
김성중 여성주의리얼리즘의 어떤 ‘전형’을 찾고 싶으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은 어느 정도 전형화된 면이 있으니까요. 동시에 그 이유도 짐작됩니다. 엄마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상황들은 부차적으로 처리하고, 엄마가 생각할 수 있는 자장을 최대치로 올리죠.
한영인 엄마가 모든 걸 조망한다는 점에 불만들이 있으신 것 같은데, 사실 대부분의 어머니는 이 정도는 꿰뚫고 있지 않나요?(웃음) 저는 시위를 비난하는 아주머니에게 “저 사람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겠죠” 하고 대꾸하고서도 집에 와서 딸을 구박하는 모습처럼, 이런 어머니가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어요.
박소란 엄마가 사건 전체를 잘 파악하고 있어서라기보다,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감정선을 작동시켜서가 아닐까 싶어요. 엄마의 내적 변화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엄마가 지금보다 더 경계인이 되었으면 좋았을 거예요. 더 갈등하고 더 튀어나가고 더 망가질 수도 있었겠죠.
한영인 레즈비언이나 페미니스트가 아닌 비혼주의자가 노년의 삶에 대한 공포를 토로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소설이 지닌 갈등의 구조 속에는 그같은 현실적인 공포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독자들이 계속 엄마가 딸에 대해 지니는 감정에 공감하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이라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면 바로 그 지점 때문인 것 같아요.
김성중 엄마는 세상을 대리해서 질문을 던지니까요. 저도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계기는 늘 엄마였어요. ‘돈이 있으면 좋겠다, 인정받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늘 엄마를 떠올리면서 시작돼요. 모성이 보수적 질문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 다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질문자가 스스로 질문을 전환하는 과정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
박소란 이제 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김경후 시인의 세번째 시집인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은 전작에서와 같이 부재와 상실의 세계를 독특한 필치로 그려냅니다. 시집 도처에 ‘죽음’이 널려 있어요. 그럼에도 저는 이 시집을 생명과 사랑의 노래로 읽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막에서도 죽지 않는 ‘오르간파이프선인장’ 같달까요. 끊임없이 “많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화자는 죽음을 마치 종교처럼 숙원하는 것 같은데요. 그 근저에는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와 사랑에의 희구가 가득하다는 것이 매우 독특합니다. “먹고 마시고 뒤틀리는 일/또는 너로 나는 죽어버리는 일” 그것 자체가 “너를 사랑하는 일”(「카니발식 사랑」)인 것이죠. “나는 많이 죽고 싶다, 봄이 그렇듯, 벌거벗은 나무에 핀 벚꽃과 배꽃이 그렇듯”(「불새처럼」) 말입니다. 죽음, 그러니까 완전한 사랑을 향해 날아가는 불새의 생명력 같은 것이 김경후 시의 매력 아닐까 싶어요.
김성중 완전히 압도되어 읽었습니다. 첫면부터 33면까지는 ‘책장이 무겁다, 넘기기 힘들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으로 시작하는 「입술」은 읽자마자 노트에 옮겨 적었어요. 「불새처럼」도 좋았는데 “소금과 술로밖에 쓸 수 없는 시” “너무 많이 죽어, 늘 증발해버리는 시” 같은 구절은 종이를 납덩이처럼 무겁게 만듭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김경후 시에 나오는 죽음은 ‘무(無)’ ‘허공’ ‘절대’가 아니라 굉장히 역동적인 하나의 ‘상태’ 같아요. 죽음은 진행형이고, 그래서 도리어 생명력 넘치는 어떤 장을 열어버리고 그때 발생하는 침묵도 큰 소리를 내죠. 여러 가능성이 열리는 새로운 지대 같아요. 제가 예전에 남미를 여행하다 모레노 빙하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빙하 앞에 섰을 때와 유사한 감정을 이 시집에서 받았습니다. 빙하 앞에서 「입술」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영인 저는 이 시집이 사랑에 실패한 자가 던져놓은 침묵의 소리처럼 읽혔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오래전 황지우의 인상 깊은 후회가 제출된 바 있죠.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뼈아픈 후회」,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라고 했던. 이런 인식이 김경후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덕분에 내 가슴속 폐허/잘 살아 있지/가슴의 주인공들과 사건은 사라져도/폐허는 펄펄 살아 있지”(「폼페이벌레」), 이렇게 가슴속이 폐허가 된 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마음을 맞댄 합일에 실패한 까닭입니다. “우린 서로의 개기월식일 뿐”이며 “올봄 겹벚꽃/한번도 피지 않고 진다”(「겹」). 이렇게 나와 너가 겹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또한 시집의 처음부터 선연히 보여주는데요, 「입술」에서 ‘나’는 “나의 입술만을 사랑하”고 “네가 아니라/네게 가는 나의 말들만 사랑”하며, 이어지는 「절벽아파트」에는 “바벨탑보다 높은 내/안의 외벽”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결국 스스로에게 갇혀 있던 시간들이 타자와의 진정한 사랑을 좌절시켰고 그 결과 화자는 절벽에 선 듯한 까마득한 마음이 든 건 아닐까 싶었어요. “위태로운 내가 위선적으로/나만을 위로하는 일/그게 너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쓴 「카니발식 사랑」은 그런 측면을 가장 직선적으로 보여주는 시 같습니다.
박소란 김경후 시의 고독은 오래 묵은 것 특유의 깊이가 있습니다. 자신 안에 완고한 ‘절벽’을 쌓아올릴 만큼. 시집 속 자주 등장하는 ‘절벽’이라는 시어나 「절벽아파트」 연작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왜 하필 절벽일까.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곳, 화자는 어쩌면 그곳에 매달린 상태 같아요. “추락조차 떨어지지 못하는”(「절벽아파트: 입구」) 형국이죠. 그러면서 “46억년 전부터 나는 노래를 잃”었다면서도 지금을 절벽에 “음표를 적어 넣는 순간”(「절벽아파트: 지금」)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놀랍잖아요. 고독으로 점철된, 소통 불능의 폐허가 된 내면을 갖고서도 정서적 불안정의 나락으로 빠지지 않고 이토록 안간힘을 발산한다는 것이요.
한영인 말씀하신 절벽에 대한 첨예한 감각이 선연히 살아 있는 시가 「차마고도」인 것 같아요. “침묵도 비밀도 없이/말할 것 없이 깎아지른 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때 침묵도 비밀도 아닌 것은 “차마 하지 못한 말”이잖아요. 그 이유는 그 말이 결코 상대에게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일 텐데, 어떤 면에서는 차마 하지 못한 그 말들을 편편이 적어 내려간 것이 이번 시집의 시편들이 아닐까 합니다.
김성중 시에서 흔히 쓰이는 ‘침묵’ ‘폐허’ 같은 소재를 천착해왔는데 징징거림이 없고 의지적이에요. ‘나비’ ‘날개’ ‘벽돌’ ‘절벽’같이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은 힘이 넘치고 일견 화려하기도 합니다. 사이즈가 크고 스펙터클하다고 할까요. 너무 오랫동안 죽어왔지만, 그사이 이만큼 커져버린 세계와 대적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유를 통과한 끝에 나오는 지적인 깨달음이 격렬한 감정으로 전이되는 장면을 보는 듯했어요.
박소란 김경후가 사용하는 시어들은 사실 그 자체로 새롭지는 않아요. 익숙한 시어들이 작품 속에서 특별하게 환원되는 것일 텐데, 이는 시인 특유의 내밀성 덕분일 거예요. 표제작에서는 사막을 사는 납빛 가시를 만드는 ‘오르간파이프선인장’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이라는 환유적 이미지로 기능하게 합니다. “오르간파이프선인장의 소릴 들었다네,/ 안개 덮인 사평로에서였지”라는 구절에서는 현실의 공간과 환상의 공간이 뒤섞여 길항하면서 새로운 사막의 이미지를 빚어내기도 하죠.
김성중 두가지 감각이 중첩될 때가 많죠.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발생하며 감각을 이루는. 사막에서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요. 이건 ‘소리’라기보다 풍경에서 오는 ‘진동’ 같았어요. 피아노를 쳤을 때 타격의 순간이 지나면 뒤따르는 웅, 하는 울림 같다고나 할까요.
권선희 『꽃마차는 울며 간다』(애지)
한영인 권선희의 두번째 시집인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요즘의 경향과는 다른 민중시의 전통에 닿아 있는 것 같아요. 개인의 내면이나 고독이나 자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세계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중의 주변에 위치한 것 같아요. 시인이 거주하는 구룡포는 지역적으로도 주변인데, 그 안에서도 ‘뱃사람’ ‘자살한 노름꾼’ ‘말 못하는 해녀’ ‘농부’ 등의 인간군상이 나와요. 그들의 이야기는 슬프고 애잔하지만 슬픔에 빠지지 않게 하는 위트와 힘이 있습니다. 민중시의 전통에서 이야기되는 민중에 대한 낙관적인 힘이나 전망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노을」은 결국 도박하다가 손목 긋고 죽었다는 내용이잖아요. “시원하게 그었다/생의 카드깡” 같은 표현은 놀라웠습니다. 쉽게 동정하거나 아니면 타인의 삶을 함부로 빌려 자기탐닉적 성찰로 빠지지 않는 냉철함이 있어요.
김성중 이 시집 안에 여러 인물들의 삶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제가 소설가라서 그런지 이 인물들의 앞과 뒤가 너무 궁금했습니다. 「노을」에 나오는 노름꾼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복자 언니」는 이후 어떻게 힘겨운 삶을 이어나갈까. 시집을 탈탈 털어낸 다음 시집에 들어가기 전과 들어갔다 나온 후의 인물의 삶을 주르륵 늘어놓고 싶어졌어요. 그만큼 생생함이 돋보이는 시편들이었습니다. 또한 말하려고 쓴 시가 아니라 들으려고 쓴 시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육성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그걸 섬기는 마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구성진 가락이 나오는가 하면, 신파 같은 시도 있고 동시 같은 시도 있죠. 읽어나가면서 시인의 자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를 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쓸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박소란 시인이 삶의 터전으로 직접 들어가 ‘이야기’ 형식으로 삶을 담아내거나 때로는 생동감 있는 방언 그대로를 ‘받아쓰기’도 하는데요. 이런 화자의 위치가 매우 특별하다는 인상이에요. 섣부른 개입이나 단정 없이 풍경, 사람,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려는 태도가 돋보였습니다. 보는 자, 듣는 자, 말하는 자로서 자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를 확고히 지키는데, 이같은 거리감 확보가 시를 고루하지 않게 하는 것 같아요. 한편, 저는 포항 구룡포를 주 무대로 한다는 점에서 권선희의 시가 얼핏 지금 ‘나’의 이야기와는 무관한 ‘그들’, 뱃사람들의 이야기라 오해받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었어요. 구룡포라는 공간은 전통적인 어촌이 아니라 도시의 변두리에 가까운, 전통과 현대가 묘하게 어우러진 공간입니다.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우리의 고단한 일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죠. “횟집 차렸다가 삽시간에 쫄딱 말아 먹고 갈치배 타는 이 씨”(「해파리는요」)나 “산전수전 다 지나온 노부부”(「꽃마차는 울며 간다」) 등에게서 일반적 삶의 비애를 엿볼 수 있어요. 저는 권선희의 시가 이렇듯 계속해서 현재성을 잃지 않으면서 우리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풀어내면 좋겠어요.
한영인 「사램이 고래만 같으믄」을 제일 재미있게 읽었는데 사투리가 생생해요. 고랫배 타는 선원의 입으로 고래를 잡을 때의 마음을 노래한 시인데, 읽다보면 “자기 새끼는 새끼를 버린 거죠” “고래새끼만도 못한 내 손주놈이 가여벼가꼬” 같은 말이 애틋합니다. 이런 시들은 지역에서 길어올린 명편이라고 생각해요. 「뜨거운 말」에 나오는 시골 노인의 로맨틱함도 좋았어요. “이 상노무 새끼야”라는 말과 함께 터져나오는 감각적인 충격이 있었습니다. 「돌림노래」 같은 시는 정말 웃기잖아요. 남자로 보이는 화자가 술 마시고 한탄하는 내용이 시가 되었는데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하는 건 클리셰잖아요. 이런 클리셰를 생동감 있게 구현해내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숙희 이야기」를 봐도 “한 마리 비둘기”를 통해 여성이 살아온 기구한 삶이나 모성을 윤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흐르는 삶 자체를 스쳐가며 보는 거죠. 이런 태도가 가진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꼭 좋게만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골방블루스」를 보면 항구의 뱃사람의 삶이 부각되는 데 반해 신참 다방 레지의 삶은 조명받지 못하잖아요. 레지를 ‘끼고 노는’ 질펀한 풍경이 정겹게 나오는데, 이런 장면은 요새 읽기엔 불편하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성중 그런데 흘러흘러 살아온 여러 종류의 다른 주인공도 있으니까요. 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많지만 소설이 아닌 시의 그릇에 담겨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또 시적인 것과 시의 경계가 어디일까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시처럼 안 보이다가 갑자기 시로 확 발생하는, 부상하는 순간을 발견했어요. 어른들 말씀에는 ‘예화’가 많잖아요. 한바탕 쭉 들려주고 돌연 급습하는 말로 할 말을 똥겨주는 식이죠. 아까 언급하신 “이 상노무 새끼야”하는 대목처럼요. 「복자 언니」에서도 굽이굽이 복자언니의 인생이 나오다가 “복자 언니의 복은 어디서 불어나고 있을까” 하는 대목처럼 뒤통수를 탁 치는 듯한 순간이 나옵니다. 쉬워 보이면서도 쉽지 않은 듯하고, 이런 맛은 시에서만 나오는 것이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한영인 삶에 대한 간절함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잖아요. 「부적」 같은 시를 보면 대량생산된 그 부적을 갖기 위한 간절함이 있어요. 이런 식으로 독특한 인식이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건 아니지만, 삶에 대한 마음이 진솔하게 전달되는 시편들이 좋았어요.
박소란 권선희의 시는 언뜻 문학적인 장치와는 무관하게 현실과 경험의 구체성만으로 어떤 절실함을 호소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시를 직조하는 구성적 스킬이 아주 탁월해요. 특히 언어를 절제하고 행간의 여백을 적절히 확보함으로써 시적 울림을 지연하고 또 증폭시킵니다. 언어와 침묵을 효과적으로 버무려내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저는 「소낙비」나 「숙주」 같은 시를 수작으로 꼽고 싶어요.
김성중 「소낙비」에서는 “개가 죽었을 뿐이다”라는 말로 눌러놓은 마음이 강한 여백이 되죠. 시에서 하지 않은 말이 가장 강한 말이 됩니다.
박소란 네. 모조리 말해버리는 대신 침묵으로 남겨두는 것, 그런 미덕이 풍성한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것으로도 시의 새로움은 개진될 수 있다고 했던가요. 익숙한 풍경 속에서 기존에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성질이나 모습을 포착하고, 또 그것을 긴장감 있게 풀어내는 권선희의 작업은 우리 시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수진 『사랑은 우르르 꿀꿀』(문학과지성사)
김성중 장수진의 시집은 조금 어려웠어요. 그럼에도 활기가 느껴졌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채로도 좋게 다가오는 시가 있고, 계속 별로인 시가 있는데 확실히 전자 쪽이었어요. 낯선 언어에 혀를 대보는 감각 같았어요. 인위적인 세계 속에 ‘개’ ‘혜영이’ ‘은주’ ‘찰스’ ‘제니’ 이런 신경증적인 캐릭터, 혹은 캐리커처들이 흥미로웠어요. 그 가운데를 시인이 활기차게 유영하는 느낌이 들어요. 모조로 만들어놓은 세계와, 그 안을 분열적으로 돌아다니는 주체가 빚어내는 활기죠.
한영인 활기라고 하셨는데, 저는 광기에 가까운 에너지를 느꼈어요. 그 광기는 예술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사유할 때 터져나오는 것 같습니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먹은 밥을 먹고 또 먹”는 것이 현실의 세계이자 치안의 논리라면 예술과 혁명은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처럼 자신의 위치를 전도시킴으로써 기존에 부여받은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겠죠. 하지만 전망은 밝지 않습니다. 신과 악마가 바뀌어봤자 “쉰내가 풀풀 나는 어둠”(「극야(極夜)」)은 계속될 뿐인 것처럼 “자본주의”는 우리를 슬프고 우울하게 만들고(「백색 숲의 골초들」) 노동은 사물화된 “예술”의 밖으로 내몰리죠(「사랑, 셋」 「봉지 언니의 스피드」). 예술 역시 이미 자본에 포섭된 측면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혁명에 실패한 친구들과 나는 흑백 화면 속에 있었다”(「마담의 뿔」) 같은 구절에서 느껴지듯이, 혁명이 실패하고 예술 역시 현실을 구성하는 안온한 일부분으로 고착되었을 때 가능한 전복의 에너지는 광기로부터 수급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 밤에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찢어버리는 년”(「서울의 혜영이들」) “왠지 냄비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데 (…) 라면 먹다 미치면 안 되겠지”(「어느 날 여탕에서 문득」) “고매한 미치광이, 신과 대결하는 소녀”(「마담의 뿔」) 같은 시구에서 어쩌면 시인이 꿈꾸는 이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술가들」에서는 “예술 때문이다/내가 미친 건”이라고 나오는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담론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미쳐버림으로써 현실을 뛰어넘는 에너지를 획득하는 거죠.
박소란 저는 독특한 감수성과 그것을 노출하는 방식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는데요. 체계적인 의미 구조를 잡기는 힘들지만, 장수진의 시는 분명 자기분열적인 언어 실험과는 다른 궤도에 있습니다. 환유에 기반한 독백적 발화에 가깝다 해야 할까요. 그럼에도 감정은 쉽사리 노출되지 않습니다. 시에서 화자의 내면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진술은 찾아보기 힘들죠. 대신 어떤 경쾌함을 가장한 듯 드러내 보입니다. 시집 제목 ‘사랑은 우르르 꿀꿀’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는데요. “‘개고기처럼 해 개고기/공주님처럼 하지 말고’”(「돌이킬 수 없는」)의 우스꽝스러운 대화나 “꽃이 웃었다/싸구려 쇠끼들……”(「여자 햄릿」)의 독백, “그 방의 공장장은 오늘/공인지 장인지, 장님인지 장인인지”(「개그맨」)의 말장난에서 그런 가장된 경쾌함이 잘 나타납니다. “나, 5층에서 할머니를 향해 흑백의 개를 집어 던진다//여든셋이랬나, 고생하셨어요//자타살 협동조합”(「봉지 언니의 스피드」) 같은 상황의 여러 시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샥특샥특” “뒤이 뚱” “퉁” 같은 엉뚱한 의성어·의태어들이 수시로 등장해 경쾌함을 가중시켜요. 그러고 나서 어떤 지점에 이르면 묘하게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요. 경쾌함 끝에 만져지는 물컹함이 있는 겁니다. 그런 시들을 저는 반복해서 읽게 됐어요. 「돌이킬 수 없는」이나 「인서트」 같은 시예요. “그렇게 외로운 고기가 된다 (…) 다리 뜯긴 한 대접 개처럼 물속에 누워”나 “새는 창피하다. 부러진 목과 이런 죽음이” 같은 구문들은 정말 좋았어요.
한영인 제가 재미있게 읽은 시는 「자양3동 미네소타」였어요. 시인이 현실에 크게 기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뭘까 물었을 때 이 시가 답을 해주지 않나 싶었거든요. “어른들만 가는 곳”인 미네소타에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출입합니다. 어른의 세계답게 흥미진진한 곳이죠. 하지만 그곳은 없어지고 그때부터 화자는 사는 게 시시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해요. 더이상 모험도 신비도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 현실의 반영이나 현실에 충실하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따분한 일이 되죠. 장수진의 시가 지니는 연극적인 특성은 물론 시인이 연극배우라는 점에 힘입기도 했겠지만 연극이야말로 ‘미네소타’를 무대 위에 다시 올려 다시 사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박소란 다수 시편에서 인물들이 갈등하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과정이 연극이라는 장치, 즉 무대 위 대사나 지문(지문을 연상케 하는 문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무대란 얼마든지 재편할 수 있는 세계죠. 시인의 냉소적인 시선을 거쳐 탄생된 이 기이한 무대에서 시인이 목격한 현실은 왜곡되고, 일의 순서는 자주 헝클어집니다. 한 사건 속 다른 시간, 다른 시선을 부여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환유에 기반한 독백과 무대라는 장치가 더해지면서 시의 난해성은 가중되는데, 오랜 독해 후에 해체된 의미망이 느리게 재구성되는 식입니다. 다소간의 인내력을 요하죠. 그렇지만 이는 대체로 매혹적입니다. 모호함이 때로 생각의 풍요를 가져다주듯이. 물론 발화나 행위가 시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보다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대목도 없지 않았지만요.
김성중 결국 빠져들어 읽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지금은 마녀의 수프처럼 기괴한 여러 요소가 부글부글 끓고 있죠. 「서울의 혜영이들」과 「자양3동 미네소타」는 특히 연달아 읽으니까 좋았어요. 「여자 햄릿」에서 글자 크기를 달리한 것도 재미있었고요. 육성이 많이 나오는 것도 장수진 시의 특징 같아요. 구호도 나오고 선배들의 말도 나와요. 유화를 한참 그리다가 그 위에 사진을 오려 붙이고 꼴라주를 한달까요. 하지만 모든 면에 고립되어 있으니 자기 골방으로 가버릴 우려도 있겠지요. 장점과 위태로운 점이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것 같아요. 무대를 만들기도 하고, 그 무대에서 연기를 하기도 하고, 내려와 관객이 되기도 하면서 종횡무진하는데,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혼자 중얼거리는 흰소리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요. 지금은 전류가 흐릅니다. 방전되지 않으면서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박소란 장수진의 시는 고립되어 있다기보다, 그 스스로 관념적이면서 동시에 실재적인 무언가를 추구하는 듯 보여요. 실재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의 접점을 찾아 자기만의 방식으로 버무리려는 의도가 느껴집니다. 난해한 시편들 속을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 우리 시대 삶의 면면과 사회의 다양한 모순점들을 드러내고 있어요. 「당신은 운 것 같아」나 「2016년 여름, 연우소극장」처럼요. 한편의 시집에 이렇게 많은 인간군상이 나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서울의 혜영이들」만 해도 우리 주변을 살아가는 여러 혜영이들이 등장하잖아요. 「은주의 외출」에서는 젠더 문제도 다루고 있죠. 정치·노동·젠더같이 첨예한 사안을 이야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요. 엄정성에 대한 일탈로 보자면 아주 새롭습니다. 아울러 ‘인민’ ‘자본’ ‘자본주의’ ‘빨갱이’ ‘삐라’ ‘교련복’ ‘광주민중항쟁’ ‘전두환’ 같은 정치적인 시어들에 대해서도 경계심이나 두려움이 없어요. 이들 시어와 함께 전혀 이질적인 단어를 병치해 이상한 흔들림을 일으켜요. 새로운 감각을 유발하는 이런 지점이 좋았어요. 물론 이런 방식이 늘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닐 수도 있어요. 이를 테면 “문 앞에 쌓인 밥집의 삐라/자본주의 빨갱이는 오토바이를 탄다”(「자본주의 빨갱이는 오토바이를 탄다」)는 등의 강렬한 발화가 감각적 차원을 넘어 깊은 사유의 영역으로 뻗어간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어요.
김성중 세계에 대한 반응이 나오는데, ‘그래서 그다음은?’이라고 또다시 묻게 되는 거죠. 그럼에도 성·정치·경제의 전선에서 외부세계와 마주할 때 나오는 특유의 반응 같은 것이 있어요. 저는 「마담의 뿔」도 좋았는데, 여기에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나는 당신이 버린 구두를 신기 위해 수챗구멍 속에서 태어난 하녀”라는 구절이 있죠. 그런데 감각적인 반응 혹은 경련 그 이상을 상정하며 읽기는 쉽지 않았어요.
한영인 반응이라는 말도 오해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요. 즉자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요. 모든 시가 사실 세계에 대한 나름의 반응이에요. 시인이 나름대로 세계를 해석하고 재조직해서 풀어낸다고 느꼈어요. 제가 그걸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게 시인이 즉자적인 반응을 정리하지 않은 채 흩뿌려놓아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내적 논리나 세계관이 저와는 잘 접속이 안 되는 느낌이에요.
김성중 말씀을 듣다보니 반응조차 입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세계를 감각하고 해석해야 반응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어찌 보면 반응조차 일차적인 재조직이 들어간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한영인 이렇게 조직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말을 갖고 오는 방식은 비슷할지 몰라도 배치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누가 누구의 말인지 모르게 어긋나고 섞이면 그 안에 있는 대화들이 현실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이탈한 자리를 재배치해 지시하는 거죠. 기존의 현실을 반영하거나 현실을 지시하는 것에 관심이 없고 그걸 시시하게 여길 수도 있겠어요. 저는 내면의 분열을 어떻게 조직할지, 자신과 세계가 겪는 모순이나 긴장을 어떻게 노래할지 나름의 방식을 찾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박소란 한꺼번에 여러 책을 읽고 또 그것에 어떤 평을 섞어 이야기한다는 것은 역시 고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각 작품집이 지닌 특장을 좀더 섬세한 언어로 소개해내지 못한 것 같아 회의도 드네요. 두분은 어떠셨나요?
한영인 이제 막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순간에 끝이 나버린 듯해 아쉽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눌 수 있다는 점에 오늘 읽은 작품들의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김성중 ‘어휴, 나는 제대로 쓰지 못하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다니……’가 솔직한 속마음입니다.(웃음) 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독자의 입장에서 책들을 통과했고, 두분과의 대화에서 골똘히 생각할 점을 따로 메모해 갑니다. 제 책상으로 돌아가서 이 괴로운 쾌락을 마저 곱씹어야 할 것 같습니다.(2017.10.24.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