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산문
그 말을 심장에 받아 적듯이
한강 韓江
소설가. 장편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등이 있음.
최근 그 묘지에 다시 간 것은 지난 8월이었다. 거의 3년 만의 방문이었다. 『소년이 온다』의 독일어판 출간을 앞두고, 그곳의 한 방송사가 광주의 구도청과 망월동 묘지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비가 그친 뒤 햇볕이 몹시 뜨겁던 날이었다. 화강암 벽면에 부조로 조각된 항쟁의 군상들 앞에 서서 나는 질문들에 답했다. 묘지 중앙에 있는 커다란 놋쇠 향로 앞에 서서 향을 태우고 묵념을 했다. 오직 이 인터뷰를 위해 베를린에서 광주까지 날아온, 화상을 입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울 만큼 빨갛게 얼굴이 익은 프로듀서 마티아스는 내가 수백기(基)의 무덤들 사이를 걷는 장면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저는 그냥 한권의 책을 쓴 것뿐인데요. 저에게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어요.” 나의 대답에 마티아스도 촬영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그 묘지를 찾아갔을 때 나는 혼자였고, 스무살이었다. 1989년, 아직 군인이 대통령이었던 해, 얼마 전의 그날처럼 햇볕이 뜨겁던 8월이었다. 광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여전히 금기였던 시절이므로, 지금처럼 예산을 들여 잘 정돈해놓은 묘지는 아니었다. 오직 살아남은 자들의 간절함으로 겹겹이 꽃과 사진과 양초들로 둘러싸놓은, 검은 묘석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그 언덕에서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건 물론 무섭도록 뜨겁게 이글거리는 팔월의 남쪽 햇볕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년이 온다』를 출간한 직후, 이 책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렸던 것이냐고 나에게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광주에서 태어났고, 만 아홉살이 되던 겨울 가족과 함께 서울로 떠났으며, 그것이 마침 학살과 항쟁이 일어나기 불과 4개월 전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광주가 나의 삶에 깊은 영향을 드리워왔다는 사실을, 나는 『소년이 온다』를 쓰기 몇해 전에야 뒤늦게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품어왔던 불가능한 숙제와 같은 수수께끼들이,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처럼 내밀하게 광주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광장에서, 신군부의 계엄령에 불복종하며 시위를 벌이던, 맨주먹뿐인 수십만의 시민들을 향해 군인들이 집단 발포를 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총상을 입었으나 목숨을 건져 병원에 실려간 사람들 때문에 병원마다 의료진과 의약품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피가 부족했다. 그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쏟아져나왔다. 헌혈을 하기 위해 병원 앞마다 장사진을 이루며 늘어서 있던 사람들의 사진을 내가 처음 본 것은 열한살 때였다. 그렇게 헌혈을 하고 돌아가다가 총에 맞아 숨진 여고생이 있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나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왜 인간들이 인간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죽였는가? 집에 있었다면 안전했을 사람들은 왜 그 병원들 앞에서 온종일 줄을 서서 자신의 피를 나누려고 했는가? 짧은 시기 평화로운 시민자치를 이루며 고립되었던 광주로 기관총과 탱크로 무장한 군인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절대공동체의 심장부였던 도청에 끝까지 남기를 선택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해될 가능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스물세살의 내가 작품활동을 시작하던 1993년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은 첫번째 해였다. 그러니까 나는 시대의 중압에서 벗어나 인간을 탐색할 자유를 얻게 된 첫 세대의 작가군에 속한다. 이후 1997년 광주가 17년 만에 복권되었고, 망월동에 묻혔던 시신들은 바로 옆에 새로 단장한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나는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시와 단편소설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1998년에 첫 장편소설을 썼다. 어린 시절 간접 경험한 광주는 간헐적인 악몽이나 백일몽으로 나에게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앞으로 소설을 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미 여러 훌륭한 작가들이 광주를 다룬 작품들을 내놓았으니, 거기에 내가 새로운 소설을 보태야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마침내 광주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했던 2012년,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동기는 지극히 내면적인 것이었다. 나의 소설쓰기는 언제나 질문에서 질문으로 이어져왔다. 이 소설에서 다음 소설로, 그리고 그다음 소설로, 근원적이므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질문들을 품고 조금씩 전진해왔다. 그리고 그해에 마침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싶었고, 마침내 9세에 간접 경험한 광주를 나 자신의 내면에서 다시 만났다. 어린 내가 처음으로 맞부딪쳤으며 결코 풀 수 없었던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마침내 이제 글쓰기로써 꿰뚫지 않으면 더이상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을 거라고 느꼈다.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그토록 폭력적이며, 또한 그토록 존엄한가?
이 결심의 이면에는 외적 동기도 있었다. 2009년 서울의 용산에서 있었던, 강제철거에 저항하는 세입자들이 농성 중인 건물 옥상에 과도한 경찰력이 투입돼 다섯명의 시민과 한명의 경찰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광주라고 나는 생각했다.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함께하는 모든 시공간의 보편적인 이름이라고. 광주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무엇이라고.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할 때에는 광주에 대한 자료뿐 아니라 2차세계대전, 신대륙에서의 학살, 보스니아까지 범위를 넓혀갔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의 의미를, 그 실체를 마주 보기 위해.
그리하여 마침내 2012년 겨울, 이십여년 만에 그 묘지에 다시 갔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 묘지에서 걸어나오던 화자가 문득 자신이 심장 언저리에 손을 얹은 채 걷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는 대목이 나온다. 실제로 그 겨울, 그 눈 덮인 묘지를 걸어나오며 나도 모르게 심장에 손을 얹고 있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또는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한 유리나 도자기를 운반하는 것처럼.
그후 글을 쓰는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내면이 흔들리고 찢겨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이 소설이 나를 위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했다. 사실이었다. 이 책은 나를 위해 쓰지 않았다. 다만 나의 감각, 감정, 몸, 삶을 그들에게—살해된 자들, 살아남은 자들, 혈육을 잃은 자들에게—빌려주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느끼는 것, 그들과 함께 경험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아마도 내가 그들을 돕고 있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모두 저버리고 싶을 때마다, 그들이 오히려 나를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 장에서 어린아이였던 동호—이후 열다섯살에, 항쟁의 마지막 날 도청에서 총에 맞아 숨진—가 엄마의 손을 잡고 밝은 쪽으로 이끌고 갔듯이.
소설을 쓰는 동안 그 묘지에 가끔 찾아갔다.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날씨가 맑았다. 향을 피운 뒤 눈을 감고 서 있으면, 온 세상이 눈꺼풀 바깥으로 밝고 찬란한 주황색이었다. 마치 아주 따뜻하고 친근한 수많은 존재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형언할 수 없는 온기 속에서,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그들의 말을 내 심장에 받아 적을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 과연 진실로 가능할지 알 수 없다 해도, 어쨌든 좀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밖에는 길이 없다고. 인간의 참혹에서 존엄으로, 그 아득한 절벽들을 연결하는 허공의 길뿐이라고.
그러니 이 상은 그분들의 것이다. 나는 단지 한권의 책을 썼을 뿐이다. 그들과 함께 느낀 여러분, 함께 있었던 여러분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 이 글은 2017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수상소감문으로, 지난 10월 1일 이탈리아 카프리섬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발표되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