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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과 새로운 주체

 

민족문학의 ‘정전 형성’과 미당 퍼즐1

3·1운동 100주년과 문학의 ‘자율성’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묵시록과 계급: 백민석의 폭민과 최진영의 여자들」 「리얼리티 재장전: 다른 민중, 새로운 현실 그리고 ‘한국문학’」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1. 새로운 주인공

 

돌아오는 봄과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100년이라는 상징성도 이 역사적 기념비에 대한 환기력을 높여주지만 그것이 한층 특별해진 이유는 촛불혁명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광장을 빠져나간 뒤에도 촛불대오는 정권교대를 넘은 ‘권력교체’를 통해 남북의 내부개혁은 물론 분단체제, 나아가 세계질서의 재편을 견인하는 동력으로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2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비폭력 평화시위로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한반도 남쪽의 촛불혁명이 어째서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각별하게 만드는 사건인지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문학이라는 자리에 오면 두 사건 사이의 관계는 더 묘연해 보이는 듯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9월 19일 능라도 5·1체조경기장에서 행해진 정전 이후 최초의 남한 대통령 연설을 되짚어보고 싶다.3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비핵화와 전쟁종식, 평화체제 건설에 대한 남북정상의 의지를 육성으로 표명했다는 획기성 말고도 여기에는 눈여겨볼 지점이 하나 더 있다. 2007년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변경한 데서 드러나듯 문학담론에서조차 종적을 감추다시피 한 ‘민족’이 그날의 짧은 연설문에 열차례나 반복 등장한 사실이다. 촛불혁명이 다시 불러낸 ‘민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냉전체제의 시발점이자 마지막 출구인 한반도에서 ‘민족’은 분단체제 변혁의 고리로 언제든 새롭게 환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일단은 언어와 역사를 공유해온 남북의 주민 대다수와 재외동포를 아우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에 새겨진 이데올로기적 요철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평양연설 또한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거나 신화적 민족주의의 소산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없지 않다.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는 대목은 사실관계에 비춰서도 비약일 수 있다. 최근의 예멘 난민사태를 떠올리면 ‘민족’은 ‘아(亞)제국’의 바리케이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 현실과 문맥에 대한 감안 없이 민족이라는 말만 나오면 차별과 배제의 ‘민족주의’나 파시즘적 대중동원을 떠올리는 것도 타성이다. 몇가지가 고려되어야 한다. 평양연설의 ‘민족’은 어디서 누구를 상대로 발화되었는가. “평양시민 여러분”과 촛불시민들이 받은 느낌이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 어느 편에서나 그것은 달라진 세상에 대한 또렷한 실감을 운반하고 있는 말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요컨대 평양연설의 ‘민족’은 세상이 변했다는 감각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분단 또는 분단체제라는 낡은 현실이 남북 주민들의 선택과 실천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하다는 주체적 감각의 회복이야말로 새로운 현실의 핵심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한 평양연설의 핵심은 망설임 없이 쓰인 합성어 ‘민족자주’에 있다. ‘민족’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주인공의 이름이고 ‘자주’는 앞으로 이 주인공들이 만들어나갈 새로운 이야기의 방향이다. 그것은 촛불광장에서 내내 외쳐진 ‘헌법 제1조’를 타고 시간을 거슬러 민족자결(民族自決)의 대세 아래 작성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는 기미독립선언서(1919)의 장중한 첫 문장에 우리를 마주 세운다. 식민과 분단으로 한 세기나 유예된 3·1운동의 비전은 촛불혁명을 통해 자기실현의 어떤 단계를 뒤늦게, 그리고 새롭게 맞이하고 있다.

 

 

2. 3·1운동과 점진혁명

 

3·1운동이 민족해방을 우선순위로 두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선언서는 민족해방 또한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임을 잊지 않음으로써 운동의 목표가 민족해방을 필수요건으로 하되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상회하는 것일 수밖에 없음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아래로부터의 동학농민운동과 위로부터의 갑오개혁으로 1894년 들어 정점에 이르렀던 자주적 근대적응의 동력은 반외세 반봉건의 해방론에서 멈춘 전자의 근시안과 개량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경장내각의 외세 의존적 오류로 결국 봉쇄되고 말았다. 그에 비한다면 “인류행복”의 보편이상과 결합하면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동양평화 그리고 세계평화라는 구체적 매개항을 제시하고 그 불가분의 관계를 명시한 3·1운동은 1차대전 이후 변화된 국제정치적 조건에 대한 순진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1894년’의 실패를 한 단계 넘어선 것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인적구성(천도교계 인사들과 만해 한용운의 존재)이나 민중적 참여의 규모 그리고 시기적 인접성으로 볼 때 ‘1894년’은 3·1운동의 숨은 기반이었지만 전자가 일국적이었던 데 비해 후자가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진전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4

그럼에도 3·1운동은 혁명이 되지 못했다.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여러갈래지만 전망의 자주성을 뒷받침할 자력(自力)의 미비가 요점이다. 일제의 혁명예방 기획이었던 ‘문화통치’가 민중의 폭발에 반응해 교육·문화 운동의 제한적 공간을 연 사실은 알려진 대로다. 신민(臣民)도 노예도 아닌 “자주민”의 꿈은 이 공간에서 민족개조와 실력양성이라는 열쇳말을 징검다리 삼아 점진혁명(漸進革命)의 현실주의로 암행하거나 때로는 혁명을 괄호 친 수양(修養)의 타협주의로 물들어갔다. 실력양성론의 맥락에서 이 구분은 중요하다. 예컨대 전자의 노선을 이끈 도산 안창호와 그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후자의 노선을 대변한 춘원 이광수의 차이는 근원적이다. 도산은 말한다. “왜 우리들은 그같은 목표(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을 육성하는—인용자) 아래 굳게 맹약하여 모였을까요? 오로지 우리 한국의 혁명의 원기를 튼튼히 하여 그 역량을 증진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흥사단은 평범한 수양주의로 이루어진 수양단체가 아니라, 한국 혁명을 중심으로 하고 투사의 자격을 양성코자 하는 혁명훈련 단체입니다.”5 그는 안이한 단계론자가 아니었다. 흥사(興士)의 ‘사’는 비사회주의—반사회주의가 아니라—점진노선을 따르는 근대혁명가의 은유였던 셈이다.6 그에 비해 춘원의 「민족개조론」(1922)은 도산의 점진론에 대한 타협주의적 아류에 불과했다.7

국외 무장투쟁 노선과 러시아혁명의 성공을 계기로 솟아오른 사회주의운동도 3·1운동 이후 본격적인 진용을 갖추었음은 물론인데, 잘 알려진 것처럼 계몽주의시대와 결별한 우리 신문학운동이 근대문학으로서의 면모를 완성한 것 또한 이 시기다.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한용운의 기념비적 전작시집 『님의 침묵』(1926)은 가장 뚜렷한 마디의 하나다. ‘님의 침묵’을 ‘미(美)의 창조’(「이별은 미의 창조」) 로 가로지르는 문학의 정치가 요체였다. 3·1운동은 좌절되었지만 결코 이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획기가 되었고, 그것이 열어 보인 민족자주의 실현과 식민성 극복이 과제로 남아 있는 한 우리 근현대사가 언제나 되돌아가 스스로를 조회할 준거로 생생히 살아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식민성에는 ‘1894년’과 달리—근본적으로는 일맥상통한다 하더라도—자본의 포섭력 강화라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차원의 계기가 추가되어야 한다. 커밍스(B. Cumings)를 경유한 최원식의 정리가 간명하다.

 

식민지 개발은 3·1운동 이후 토착부르조아지를 지배 체제의 하위파트너로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문화통치로 바뀌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요컨대 문화통치의 틈새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자본의 포섭력이 일층 강화되었던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이 ‘막강한 트리오’라고 부른 철도, 간선도로, 그리고 해운” 개발로 조선이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시장 체제와 새로운 형태들의 교환 속으로 끌려들어가”면서 “조선의 전통적인 고립은 깨어졌다. 이제 백두산에는 검은 기차들이 높은 터널들을 통과하여 기적을 울리고 중국으로 달려갔다.” 한국 프로문학의 국제적 동시성은 식민지 조선이 1920년대에 들어서 일본 및 세계 시장의 그물망 속에 더 깊이 얽혀든 점과 연관되는 것이다.8

 

널리 보면 프로문학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국제적 동시성”이라는 차원을 염두에 둘 경우 식민성의 문제는 식민본국에 의한 물리적 지배/예속이라는 좁은 의미를 넘어 “인종/종족차별주의, 관권주의, 성차별주의, 서구중심적인 지식구조 등 다른 형태의 온갖 지배와 배제 행위”를 포함하는 “근대 세계체제의 일부”9로 확장된다. 식민지 해방과 식민성 극복을 구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근대소설사에서 “3·1운동 세대가 생산한 최대의 기념비적 업적”(최원식) 으로 평가받곤 하는 중편 『만세전(萬歲前)』(초판 1924, 개정 1927)의 작가도 1차대전 종전과 빠리강화회의로 ‘세계개조’의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 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미후충비(微嗅衝鼻)하는 구도덕의 질곡으로부터 신시대의 신인을, 완명고루(頑冥固陋)한 노부형(老父兄)으로부터 청년을, 남자로부터 부인을, 구관누습(舊慣陋習)의 연벽(鍊壁)으로 당(撞)□한 가정으로부터 개인을, 노동과잉과 생활난의 견뇌(堅牢)한 철쇄(鐵鏁)로부터 직공을, 자본주(資本主)의 채찍으로부터 노동자를, 전제의 기반(羈絆)으로부터 민중을, 모든 권위로부터 민주 데모크라시(democracy)에 철저히 해방하여야 비로소 세계는 개조되고, 이상의 사회는 건설되며, 인류의 무한한 향상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10

 

자본주의근대를 극복하는 한층 본질적인 해방이 없이는 민족해방이나 ‘세계개조’도 “‘권위’의 교대”(같은 곳) 이상이 되기 어렵다는 점을 통찰한 이 글은 3·1운동 불과 8개월 만인 1919년 11월 26일에 작성되어 이듬해 4월 발표되었다. 이 글에는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개조’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하는 당대 지식사회의 초상이 음각되어 있거니와 간간이 거론되곤 했던 ‘민족대표’의 한계도 어느 정도 실감된다. 어쨌든 세계자본주의의 전경화와 일제의 분리지배 전략이라는 새로운 조건 앞에서 자주역량 또는 혁명역량 확충의 필요성은 3·1운동 이전보다 한층 엄중해지게 되는데, 이때 신문학운동은 그 저수조이자 거의 유일한 지상(地上)의 병참기지로서 위의를 획득하게 된다. 횡보는 후일 그 핵심을 거재유생(居齋儒生)이라는 비유를 들어 요약한 바 있다. “샤벨(sabre—인용자)과 군화로 둘러싼 무단의 표피가 한 꺼풀 벗겨지고 문화정치라는 육피(肉皮)가 허울 좋게 나타났으나 그것은 결국에 모공(毛孔) 하나 없는 가장 강인한 유피(鞣皮)에 쌓인 것이었다. (…) 그러나 세계대전 직후인 만큼 일대 전환기임에는 틀림없었고 소위 ‘민족자결’이라는 구호에 속고 말았을망정 삼일운동의 전개로써 민족의 명맥이 질식상태에서 소생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이 내외의 재생(齋生) 기운을 타고 울연(蔚然)히 머리를 든 것이 신문학운동이었다.”11 재생은 거재유생(居齋儒生)의 준말이다. “성균관이나 사학(四學) 또는 향교의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학문을 닦던 선비를 이르는 말”(같은 곳, 편주 37번)이니 자력양성의 ‘거재’라는 면에서 도산의 ‘사(士)’가 지닌 점진론적 함의를 일정하게 공유한다. 혁명을 괄호 친 실력양성론이나 자력양성을 건너뛴 사회주의혁명론이 걸었던 아픈 실패의 역사를 고려하면 그 안목의 현실주의가 더욱 빛난다. 자력양성과 혁명적 실천은 둘이 아닌 하나의 과제였던 것이다.

 

 

3. 문학의 ‘자율성’과 ‘자치’의 역설

 

‘신문학’은 오늘날의 문학인과 독자들의 실감에도 현전하는 ‘현대문학’의 첫머리에 위치해 있다. 이 시기에 완성된 문학생산 제도와 장르, 작품형태가 우리 문학현장의 지속적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는 본질적으로 절실한 욕구로서 문학한다기보다도 정치적·사회적으로 봉쇄되고 억압된 생명력·생활력의 발로·발산의 분출구를 문학에 구하려는 일종의 유행성적 성격을 띤 것도 사실이었고, 또 이러한 현상은 문학의 정당한 발전과 질의 향상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던 것”(73~ 74면)이라는 염상섭의 회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근대문학의 ‘자율성’ 명제가 여기서 도출된다.

‘문학을 문학으로 만들어주는’ 내재적 원리에 대한 의식은 3·1운동 이전 계몽주의시대에 이미 뚜렷해지지만 그때까지의 문학은 결국 정치로 건너가는 예속절차였다. 담론적 지위에서나 생산된 작품의 성과에 있어 ‘자율성’이 정치성으로부터 독자적 지위—물론 비대칭의 지속 가운데서—를 획득한 것은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이르러서이지만 예의 회고가 암시하듯 처음부터 양자의 실천적 경계는 분명치 않았다. 식민지근대라는 조건이 둘 사이의 미분화를 끊임없이 압박한 것인데, 해방 직후는 물론 미구에 닥쳐올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한층 더 근원적인 수준의 식민성 문제가 “모공 하나 없는 가장 강인한 유피”처럼 민족문학사의 존재조건을 제약해 들어옴으로써 양자의 교착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데 “정치적·사회적으로 봉쇄되고 억압된 생명력·생활력의 발로·발산의 분출구를 문학에 구하려는” 흐름은 ‘한국 현대문학’이 구가해온 긍지의 역설적 기초가 되기도 했다. 자본주의근대가 ‘자율성’에 기초한 문학성과 정치성의 분립을 강제하는 원천이라면 그 분립을 허용치 않는 한반도적 현실의 ‘불행한’ 조건은 오히려 둘 사이의 경합을 통해 근대 비판을 예각화하는 인력으로 작용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문협정통파’의 이른바 반근대주의야말로 하나의 반어다.) 염상섭은 단순한 자율성론자가 아니었다. 예의 발언 또한 식민지 조선의 신문학운동을 일구어온 당사자로서의 긍지 없이는 나올 수 없으며 회고 당시(1948)가 새로운 단계의 민족문학 건설기였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오히려 그가 비판해 마지않은 정치적 억압의 탈출구로서의 문학은 “카무플라주”된 “민족운동·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같은 곳)으로서의 문학이라기보다 춘원 이래 혁명정치를 포기한 수양의 타협주의와 그 지류들에 훨씬 더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결국 정치적 차원에서 제국의 지배를 불가피한 조건으로 승인하는 자치론에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데 “민족을 위한 친일”(이광수)이라는 이율배반은 거기에 둥지를 튼다. 설령 제국의 간섭이 직접지배에 비해 현저히 덜한 자치가 성립 가능했다 하더라도 자본력의 비대칭으로 인한 예속성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으니 후일 식민지근대화론과 은밀히 짝하게 될 식민지 자치론은 애초부터 투항의 합리화 명분이거나 제국의 이해를 대리한 자발적 순응, 아니면 아제국의 몽상이었다. 그것은 역사와 현실이라는 이름의 타율성을 온전히 자기화함으로써 극복하는 중단 없는 고투 대신 그 ‘초월적’ 부인(否認)을 선택한 결과였다.

 

 

4. 다시, 미당 근처

 

왜, 미당인가

‘자율성’의 굴절은 한국문학 정전(正典, canon) 형성의 불안정성을 지속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적지 않은 수의 식민지시대 시인 작가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제말의 전시체제에 영합한 사실과 분단이 낳은 문학사적 결손 그리고 그와 연동된 오랜 이념적 금제가 토대였다. 어쩌면 ‘신세대문학’의 기치 아래 주기적으로 출몰했던 집단적 혁신의 요청들도 이러한 배경과 음으로 양으로 관계 맺고 있는지 모른다. 거기에 남한 국민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 북한 인민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에 편향된 논의를 벗어나자는 의미에서 민족문학론의 시야를 도입한다면 예의 불안정성—역동성의 이면이기도 한—은 더욱 확산될 여지가 있다. 민족문학사 특히 한반도 남쪽에서의 근대문학사 서술이 문학적 과거에 대한 체계적 기술인 동시에 미래를 향한 기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한데, 친일문학은 그 길목에 놓인 예민한 퍼즐의 하나다.

친일문학 전반을 검토할 능력도 여력도 충분치 않은 만큼 미당 서정주에 대한 논의로 일반론의 추상화를 가능한 한 비껴가려 한다. 미당 시세계의 개괄적인 평가 가운데 그의 친일시에 대한 생각을 포함하는 방식이 최선일 것이다. 친일시는 어디까지나 미당 시세계의 일부이지 중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당 문학을 거론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최근 미당문학상 폐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서 엿볼 수 있듯 그의 문학과 삶에 대한 평가는 한국문학의 현재를 비춰주는 하나의 거울로서 의미가 있다. 두번째로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전에 이룬 문학적 성취가 만만치 않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후대의 여러 시인들이 그의 시적 유산을 연속·불연속적으로 계승했다. 시인의 삶과 문학적 성취를 분리해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두고 빚어진 오랜 소요가 여기서 발원한다. 그가 남긴 ‘좋은’ 작품들의 ‘좋은’ 이유에 핵심적으로 간여하는 요소가 ‘문학의(미적) 자율성’이고 보면 미당 문학에 대한 구체적 평가를 경유함으로써 앞에서 거론한 ‘자율성’의 굴절과 ‘정전화’의 불안정성 문제에 관한 실마리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미당 문학에 관한 논의는 어디까지 왔을까. 미당의 ‘대표작’들이 구가하는 ‘정전’적 위상을 일단 수용함으로써 주로 ‘해석’의 축적에 집중하는 흐름을 논외로 하면 김춘식의 정리가 요긴할 것 같다. 그는 비교적 최근에도 미당론12을 썼지만 시각의 기본은 「친일문학에 대한 ‘윤리’와 서정주 연구의 문제점: 식민주의와 친일」(『한국문학연구』 34집, 2008)이라는 십년 전 글에서 이미 요령을 얻은 것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미당의 친일문학과 관련된 시각들을 “오리엔탈리즘에 기초한 동양주의 비판”(김재용)과 “동양의 발견을 통한 국민으로의 길”(오성호), “식민주의 계보학에서 본 서정주의 미학주의에 대한 비판”(박수연) 으로 요약하고, “그러나 이러한 선행연구에 대해서 서정주의 영원성 미학이나 전통주의가 동양주의, 대동아공영권 등에 영향을 받고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형성된 것이며 오히려 서정주의 미학주의적 탐구가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를 잠시 차용한 것일 뿐이라는 손진은의 비판도 주목할 만한 견해”(같은 글 224면) 라고 덧붙이면서 기존 논의들에 의문을 던진다. 요컨대 “미당의 친일문학 작품의 발생원인은 친일의 ‘내면화 논리’보다는 근대적 ‘미학주의의 한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내용 혹은 이념적 가치, 신념’을 괄호로 묶어 중립화한 채 형식미학과 탈역사적 미학에 집중한 결과”(232면) 라고 설명하면서 김재용 등의 ‘내면화된 동양주의로서의 친일’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이러한 관점이 미당의 문학세계 일반을 ‘내면화된 파시즘’의 부산물로 연역하는 시각들을 상대화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당을 정치적·역사적으로 몽매하고 무정견한, 어떤 의미에서는 ‘무구한’ 존재로 가정함으로써 의도와는 달리 그의 문학을 내용 없는 형식주의로 단순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친일 척결론의 삼엄한 법정에서라면 그것이 정상참작 또는 구제 방편일지 모르지만 시인들의 나라에서라면 그는 ‘시 짓는 기술자’, 등 시민으로 강등되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근대적 ‘미학주의’”의 의의를 단순화하는 효과마저 동반한다. 그렇다면 정치적·역사적으로 ‘몽매한’ 시인이 말하는 니체의 운명애와 불교, 신라정신, 민족, 조선백자의 미(美)는 다 무엇이었던 걸까? 미당 연구의 이러한 사상 검증적 비판론과 구제론의 경향이야말로 “그의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그의 추문 속에 숨는 형국”13을 지속시킨 동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2000년대 이후 미당 문학에 대한 학계와 평단의 관심이 크게 늘어나게 된 발단은 미당 자신의 죽음은 물론, 한때 그의 후계를 자처하기도 했던 고은의 논쟁적인 평문 「미당 담론」(『창작과비평』 2001년 여름호)의 등장이었다. 두 선후배 시인의 교유와 결별에 대한 사적 증언인 동시에 미당의 문학과 삶에 대한 진지한 비평적 탐구이기도 했던 이 글은 의미심장한 문제제기들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부친살해의 가십으로만 받아들여진 면이 없지 않다. 때마침 불어닥친 탈민족주의, 탈식민담론의 바람을 타고 비평적 과제로서의 미당 문학은 탈근대 이론에 접목한 사상논쟁 아래 덮여버리고 만 것이다. “미당에 대한 시와 행적의 분리주의를 신비평이론을 강제 적용해서 묵인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의 시 전부를 깡그리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같은 글 305면)는 다짐이 고은의 것만이 아니라 미당의 시와 삶을 하나의 문학적 사실로서 존중하려는 많은 이들의 생각이기도 하다면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여전히 지속적인 다시 읽기, 실제비평의 활성화다.

 

‘급진적’ 순응주의

최근 완간된 『미당 서정주 전집』(은행나무)은 총 20권의 방대한 분량이다. 이 중 시전집에 해당하는 것은 앞의 5권까지인데, 미당 생전에 출간된 단행본 또는 전집·선집 수록시 950편을 수습한 것으로 시인 자신이 수록에서 제외한 많은 작품들이 시인의 생전 의도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빠졌다. 친일시로 잘 알려진 「헌시」(1943) 나 「항공일에」(1943, 일어), 「마쓰이 오장(伍長) 송가」(1944) 같은 작품과 전두환의 56회 생일을 맞아 썼다는 낯 뜨거운 축시 등도 당연히 이 전집에서는 볼 수 없다. 이 다섯권짜리 시전집과 이미 널리 공개된 친일시들을 함께 통독한 첫번째 소감은 그에 대한 옹호와 비판의 공통 근거로 자주 언급될 뿐 아니라 시인 스스로가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전집 4권 235면) 라는 자기변호를 통해 고백한 바 있는 그 순응주의적 면모가 나름대로 독자적—특히 식민지시기의 작품들에서—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종의 치열성이나 ‘진정성’을 동반하고 있어서 눈에 드러나지 않는 무정견 또는 수동적 자기기만을 뜻하는 글자 그대로의 순응과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가령, “그 어디 한 포기 크낙한 꽃그늘/부질없이 푸르른 바람결에 씻기우는 한낱 해골로 놓일지라도 나의 염원은 언제나 끝가는 열락이어야 한다”(「역려」, 『귀촉도』 수록, 전집 1권 107면)는 시적 다짐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그것은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종천’인 하늘 ‘따르기’라기보다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끝가는 열락”의 급진성이기도 한, 하늘 ‘찾기’에 가까운 듯하다.

 

참 이것은 너무 많은 하늘입니다. 내가 달린들 어데를 가겠습니까. 홍포(紅布)와 같이 미치기는 쉬웁습니다. 몇천 년을, 오— 몇천 년을 혼자서 놀고 온 사람들이겠습니까.

 

종보단은 차라리 북이 있었습니다. 이는 멀리도 안 들리는 어쩔 수도 없는 사치입니까. 마지막 부를 이름이 사실은 없었습니다. 어찌하야 자네는 나 보고, 나는 자네 보고 웃어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말하면 하르삔 시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자네’도 ‘나’도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무슨 처음의 복숭아꽃 내음새도 말소리도 병(病)도 아무껏도 없었습니다.

—「만주에서」(1941, 『귀촉도』 수록, 전집 1권 100면)

 

안착14에 대한 갈망과 그 좌절로 인해 거친 호흡을 내뿜고 있는 이 시의 고백체는 두겹이다. ‘하늘’ 아래에서의 무력감의 직정적 토로인 동시에 그 침묵에 대한 맹렬한 항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자화상」, 1939)고 했던 필생의 선언조차 이 시에서는 부정된다. “바로 말하면 하르삔 시와 같은 것”도 “마지막 부를 이름”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 미당 시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이질적(이 시는 뜻밖에 ‘모던’하다)인 듯한 이 작품이 “정치적·사회적으로 봉쇄되고 억압된 생명력·생활력의 발로·발산의 분출구를 문학에 구하려는” 식민지문학의 보편적 동인에 접속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기회를 찾아 떠난 만주라는 구체적 공간과 “하르삔 시” 같은 소재에서 암시되듯 미당 문학의 고질인 무시간적 기초를 일정하게 벗어남으로써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 청춘의 서러운 방황에 실감을 더해준다. 그 점이 이 시를 힘있게 만들어주는 한 요소다. 이 시의 파괴적인 부정은 끝내 역천(逆天)에 이르지 못하지만 『귀촉도』에 함께 수록된 “아— 이 검붉은 징역의 땅 우에/홍수와 같이 몰려오는 혁명은/오랜 하늘의 소망이리라”(「혁명」, 1946)와 같은 요령부득의 자기기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취임에 분명하다.

정처 없는 ‘하늘 찾기’의 갈망이 싱싱하게 살아 있던 전반기의 작품들이 그 이후 방만해진 『질마재 신화』(1975) 같은 후반기 시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잘 알려진 서시 「자화상」이 벌써 그렇지만 맹목적인 혈안(血眼)의 시정이 두드러진 『화사집(花蛇集)』(1941, 전집 1권)에서 시적 단련의 원숙미가 간간히 빛나는 『동천』(1968) 까지가 아마도 미당이 일군 시적 자산의 거의 전부가 아닐까. 일생에 걸쳐 ‘떠돌이’를 자처한 그의 방황도 실은 『자화상』과 『귀촉도(歸蜀途)』의 젊은 미당에 대부분 귀속된다. 『서정주시선』(1956) 에만 와도 벌써 방황을 끝내고 안착한 자의 지루한 달관과 교훈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회자되곤 하는 「무등을 보며」(1954)의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뇌일지라도/우리는 늘 옥돌같이/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라는 안이한 결구는 대표적이다.

예의 ‘하늘 찾기’ 급진성이 향하는 방향은 미당의 실제 삶에서 일정치 않았다. 그것은 상징주의라는 이름의 하늘이기도 하고 신라나 불교, 일제나 이승만정권, 군부독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상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생각해보면 그것은 식민지와 분단으로 점철된 한반도의 독특한 근대에 대한 그 나름의 인식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하늘”은 그 예속으로부터 벗어날 도리 없는 주인의 기표이자 문학과 일제와 군부독재로 자꾸만 얼굴을 바꾸는 근대성 그 자체의 암시였는지도 모른다. 하필 그것이 ‘제국’의 진열장, 만주의 하늘이었다는 점도 거기에 가세한다. 그의 시세계를 가로지르는 근대도시와 전근대적 시골의 비대칭적 긴장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황현산이 『화사집』의 마지막 시 「부활」을 분석하면서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도시에서 고향을 본다는 것뿐만 아니라 도시만이 이런 방식으로 고향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한 것은 중요한 발견이다. 반면에 “미당은 이 시(「부활」 —인용자)에서 근대시의 한 체험을 높은 수준에서 보여주지만, 그러나 그에게서 이런 종류의 체험으로는 실상 마지막 체험”(앞의 글 461~ 62면)이라고 덧붙이는 대신 이 주제를 더 밀고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밤이 깊으면」(1940)도 좋은 예이다. “밤이 깊으면 숙아 너를 생각한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의 종결부를 옮겨본다.

 

숙아!

 

이 밤 속에 밤의 바람벽의 또 밤 속에서

한 마리의 산 귀또리같이 가느다란 육성으로 나를 부르는 것.

충청도에서, 전라도에서, 비 나리는 항구의 어느 내외주점에서,

 

사실은 내 척수신경의 한가운데에서,

씻허연 두 줄의 이빨을 내여놓고 나를 부르는 것.

슬픈 인류의 전신(全身)의 소리로써 나를 부르는 것.

한 개의 종소리같이 전선(電線)같이 끊임없이 부르는 것.

 

뿌랰 뿔류(black blue—인용자)의 바닷물같이, 오히려 찬란헌 만세소리같이,

피같이,

피같이,

 

내 칼끝에 적시여 오는 것

 

숙아, 네 생각을 인제는 끊고

시퍼런 단도의 날을 닦는다.

—「밤이 깊으면」(『귀촉도』, 전집 1권, 103~104면)

 

“목포나 군산 등지 아무 데거나/그런 데 있는 골목, 골목의 수효를,/크다란 건물과 버섯 같은 인가를, 불 켰다 불 끄는 모든 인가를,/주식취인소를, 공사립 금융조합, 성결교당을, 미사의 종소리를, 밀매음굴을,/모여드는 사람들, 사람들을, 사람들을,”에서처럼 술어를 생략한 열거의 쇄도를 통해 도시 또는 근대자본의 무차별적 진군을 섬뜩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의 요체는 고향 또는 “서러운 시굴”(「무제」, 『귀축도』, 전집 1권, 74면)을 상징적으로 대리하는 숙이의 자살과 “슬픈 인류의 전신(全身)의 소리로써 나를 부르는” 고향의 인력을 가차없이 끊어낸 자의 내면 풍경이다. 부정의 과잉은 순응의 ‘급진성’과 만난다. 그의 “서러운 시굴”은 『질마재 신화』가 그렇듯이 자본주의 근대도시의 그림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가 목격하고 체험한 ‘근대’는 「만주에서」나 「밤이 깊으면」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속수무책의 절벽이어서 전근대적 숙명론에 필적하는 무엇처럼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억새풀잎 우거진 준령을 넘어가면

하늘 밑에 길은 어데로나 있느니라

많은 삼등 객차의, 보행객의, 화륜선의 모이는 곳

목포나 군산 등지 아무 데거나

 

여기에도 ‘하늘’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느니라”라는 하향의 술어가 붙어 있다. 이 시 첫 행의 “생각한다”와 마지막 행의 “닦는다”를 제외하면 유일한 술어일 뿐 아니라 예외적 위상을 지닌다. 그것은 ‘하늘’과 “끝끝내는 끌려가야만 하는 그러헌 너의 순서”와 악착같은 등가관계를 맺는다. 그의 순응주의 체질이 급진성을 띠게 된 것은 식민지근대 또는 자본주의근대를 전근대적 숙명론을 통해 전유(專有)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역천을 모르는 그것은 주인 잃은 ‘해방노예’의 설움과 공포, 귀소본능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그의 친일시를 ‘동양주의’ 또는 제국이데올로기의 내면화로 보는 것이나 근대적 미학주의의 귀결로 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지 않다. 동양주의의 내면화로는 미달이고 미학으로는 파탄인 지점에 그의 친일문학이 있으며 그것은 또한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세속적 안착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

 

아무 뉘우침도 없이 스러짐 속에 스러져 가는

네 위엔 한 송이의 꽃이 피리라.

흘린 네 피에 외우지는 소리 있어

우리 늘 항상 그 뒤를 따르리라.

 

—「헌시: 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매일신보』 1943.11.16) 부분

 

이 시의 화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 늘어지는 무갈등의 목소리에는 스러져갈 ‘너’에 대한 슬픔이 없다. 여기서 미학이 증발한다. ‘눈 돌릴 수 없는 정면’의 지배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 돌릴 수 없는 정면’을 자기화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사상도 실종된다. 이 시의 화자는 ‘눈 돌릴 수 없는 정면’ 바로 아래에서 ‘스러져 갈 너’ 위에 군림한다. 여기서 미당의 ‘급진적’ 순응주의는 식민지 자치론과 만나는지도 모른다.

 

 

5. 미당 바깥

 

그럼에도 미당이 탁월한 언어적 재능을 타고난 시인이라는 점은 널리 인정된다. 미당 문학의 영욕이 거기에 다 있다. 『신라초』(1961) 에 실린 「재롱조」(1957, 전집 1권 187면) 이야기로 결론을 대신하려고 한다. 소품이라 인용하기 편리한 점도 있지만 미당 시세계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문을 인용한다.

 

언니 언니 큰언니

깨묵 같은 큰언니

아직은 난 새 밑천이

바닥 아니 났으니

언니 언니 큰언니

삼경 같은 큰언니

눈 그리메서껀 아울러

안아나 한번 드릴까.

 

이 시의 소재는 시집간 큰언니와 시집 안 간 여동생의 해후다. “아직은 난 새 밑천이/바닥 아니 났으니”를 경계로 큰언니와 ‘나’는 갈라진다. “새 밑천”이라는 상스러운 표현도 시골스러운 입말의 리얼리티를 살린다. 그런데 큰언니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하다. 평범하지만 깊고 푸근한 인상으로 제시된 큰언니가 “삼경 같은 큰언니”가 되어 온 것이다. 깊은 밤을 가리키는 옛 시간단위일 뿐인 삼경(三更)이 직유로 등장하는 순간 “큰언니”가 겪고 있을 아픔의 현재성이 한꺼번에 쏟아져들어온다. “삼경”을 이어받고 있는 “눈 그리메”(눈 그림자, 눈 그늘)가 그런 독해에 힘을 싣는다. 4·3조의 주술적 반복도 한몫할 것이다. 그런데 시는 한 단계 더 도약한다. 화자인 ‘나’는 8행짜리 이 시에서 내내 화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마치 “눈 그리메서껀 아울러/안아나 한번 드릴까”에 와 비로소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느껴진다. 큰언니의 사연에 기울어 있던 독자들은 그의 마음 곳곳을 샅샅이 알 리 없는 동생의 무구한 생각과 문득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7, 8행에서 일어난 화자의 전경화로 정연히 진행되던 음률에 약간의 파문이 이는 것도 이 시의 매력이다. 큰언니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지금이 언제 어디인지는 끝내 알 길이 없다. 시인은 알았을까? 화자의 생각도 그저 생각에 그쳤을 뿐 아직 행위로 옮겨진 것은 아니다. 추상적이라는 비판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는 아름답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도처에서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 있음직한 비의(秘義)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삼경”이 그렇게 한 것처럼 언어는 끝내 해명하기 어려운 삶의 심연들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리키곤 한다. 그것은 자주, 아니 대개는 시인의 손을 떠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상업주의의 산물인 광고문구조차 이따금 그 뿌리를 초과하는 아름다움과 위로의 힘을 발한다. 언어의 주술은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문학 안에 그 스스로가 초래한 자립적 질서가 있다는 믿음을 뒷받침해온 근거일지 모른다. 문학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무차별적으로 위로하는 아편인 듯 여기는 감각 또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위험을 견제하는 다른 힘의 존재가 그래서 필요해진다. ‘자율성’은 어떤 형이상학적 전제로부터 연역되어 시작(詩作)의 어느 순간 임하는 주술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부과하는 제약들에 맞서는 싸움 가운데 이따금 성취되는 무엇일 것이다. 앞에서 길게 살펴본 것처럼 타율성을 제대로 통과하지 않은 자율성이 식민성을 낳는다.

남한의 국민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 북한의 인민문학으로서의 조선문학이 아니라 달라진 세상의 감각이 새롭게 불러낸 민족 또는 민족문학의 차원을 상상할 때 미당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도산과 횡보를 따라 문학과 정치도 둘이 아닌 하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미당의 시는 오래 남아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미당의 시가 ‘살아 있던’ 세상은 이제 끝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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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은 한국사회사학회와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학술대회 ‘3·1운동 100년, 한국 사회전환의 시공간 지평’(고려대 백주년기념관, 2018.11.2~3)에서 발표한 「민족문학의 ‘정전체계’와 미당 퍼즐」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2. 19대 대선이 치러지기도 전인 이른 시기에 ‘촛불’의 혁명적 새로움을 간파하고 그 진화경로를 정확히 예측한 글로는 백낙청의 「‘촛불’의 새 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를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잇단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이후의 한반도가 이미 ‘낮은 단계의 남북연합’에 돌입했음을 최근의 글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 촛불혁명시대의 한반도」(『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를 통해 명료하게 분석하기도 했다.
  3. 최초로 평양에서 연설한 남한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4개월 만인 1950년 10월 29일 평양시청 앞에서 5만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평양수복(1950.10.20)을 자축하는 기념연설을 했다.
  4. 3·1운동의 국제적 영향에 대해서는 김학재의 「3·1운동의 한 세기: 20세기의 비전과 한반도 평화」가 상세하다. 그는 3·1운동이 “세계사와 민족사가 결정적으로 조우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며 “동학과 서학이 연합”(신용하)해 정치적·종교적·계급적 차이를 극복한 최초의 민족통합 계기로 평가한다. 앞의 학술대회 자료집 134면 및 143면 참조.
  5. 안창호 「미주에 재류하는 동지 여러분께」(1929.2.8), 『도산안창호전집 1권』(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254면. 박만규 「이광수의 안창호 이해와 그 문제점: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69호, 2018, 283면에서 재인용.
  6. 그는 1926년 7월 8일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점진론이 흔히 자치주의의 유혹에 빠지곤 하는 단계론과 다르며 일종의 중도 좌우합작 노선임을 천명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의 혁명이란 무엇인고? 나는 말하기를 민족혁명이라 하오. 그러면 민족혁명이란 무엇인가? 비민족주의자를 민족주의자 되도록 하자는 것인가? 아니오. (…) 우리가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하여 세울 국체 정체는 무엇으로 할고. 공산주의로 할까? 민주제를 쓸까? 복벽하여 군주국으로 할까? (…)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지금은 그것을 문제 삼아 쟁론할 시기가 아니오.” 「오늘의 우리 혁명」, 『독립신문』(1926.9.3); 『도산안창호전집 6권』(단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793면.
  7. 박만규, 앞의 글 참조.
  8. 최원식 「프로문학과 프로문학 이후」, 『민족문학사연구』 21호, 2002, 21~22면. 인용문에 삽입된 커밍스의 발언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김동노 외 옮김, 창비 2001, 235면 참조.
  9. 백낙청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창비 2009, 30~31면.
  10. 염상섭 「이중해방(二重解放)」, 『삼광』 1920년 4월호; 『염상섭 문장전집 1』, 한기형·이혜령 엮음, 소명출판 2013, 74면. ‘□’ 표기는 판독불능인 글자. 같은 책 ‘일러두기’ 참조.
  11. 염상섭 「3·1 전후와 문학운동」, 『신민일보』 1948.2.29; 『염상섭 문장전집 3』, 한기형·이혜령 엮음, 소명출판 2013, 71면.
  12. 김춘식 「‘신인(神人)’의 운명애에서 속의 체념과 포기까지: 미당 시의 문제적 지점과 현재적 가치에 대한 단상」, 『시작』 2015년 봄호. 미당은 “니체적 호흡”이라는 표현으로 자기 시와 니체의 운명애(amor fati) 개념의 상관성을 설명한 바 있는데, 김춘식은 이 글에서 “(미당 시의—인용자) 체념, 종천순일 등은 니체의 운명애, 의지 등과는 아주 반대되는 양상을 지니고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서로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 둘은 모두 하나의 ‘포즈’이며 ‘태도’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형식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13. 황현산 「서정주 시세계」, 『말과 시간의 깊이』, 문학과지성사 2002, 456면.
  14. 미당의 만주 체험에 대해서는 자전연작시집 『팔할이 바람』(1988)에 수록된 「만주에서」(전집 4권 208~12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