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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려령 金呂玲
1971년 서울 출생. 소설집 『샹들리에』, 장편소설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가시고백』 『너를 봤어』 『트렁크』 등이 있음.
장편연재 4
일주일
4
유철에 이어 도연도 사과성명을 내고 절필선언을 했다. 이별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 잘못은 인정하되 인연은 이어가겠다는 뜻이었다. 정희는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페이스북에 제 휴대전화 번호를 올렸다. 하도연씨, 나한테 직접 사과하세요. 전화 기다립니다. 정희의 글을 확인한 유철이 책상을 검지로 톡톡 쳤다.
우연히 저녁식사 자리에 동석한 정희였다. 그녀가 마침 대학원 진학을 고심하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만남도 잦아졌다. 주로 정희가 먼저 연락했는데 진로 상담 위주여서 유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정희가 유철의 권유로 대학원을 등록한 모양새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희는 대학원을 중도에 그만두었다. 유철은 연인이 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느 조교수의 끈질긴 구애 때문이었다고. 왜 안 받아줬는데? 너 때문에. 정희는 지적 욕구가 강했고 실력도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 때문에 포기했다는 말이 미안하면서도 듣기에는 좋았다. 결혼 뒤 정희는 자신의 욕망을 유철로 이어갔다. 유철은 그것이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해석에 따라 헌신적 내조일 수도 있고, 능률적으로 일을 공유하는 부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조에도 자중자애가 필요했다. 때로는 기다리고 침묵하고 물러나 있는 것이 더 현명한 내조라는 것을 정희는 알지 못했다. 무엇이든 제 눈으로 보고 제 손이 닿아야 했다. 남들 보기에 행복한 중에 유철이 우울한 이유였다. 너는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녀에게 결혼은 배우자의 모든 것을 관할할 자격을 얻는 행위였다. 유철은 이혼으로 겨우 그녀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정희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도연도 정희가 올린 글을 확인했을 것이다. 피할 성격이 아니었다. 유철은 도연을 믿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도연입니다. 늦었습니다.”
“애 아빠하고 만난 첫날부터 잤다면서요?”
“잤습니다.”
“내 남편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헤어지세요.”
“그렇게는 못합니다.”
곧 정희의 악담이 이어졌다. 도연은 듣기만 했다. 결국 너의 천박한 행동에 나의 남편이 당했다, 식의 진부한 남편 감싸기였다. 왜 아직도 그를 감싸십니까. 우리가 그때 잔 것이 문제입니까, 지금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정희는 오래전에 끝나버린 부부관계를 도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현재의 여자를 과거에 앉혀놓고 그때 잡지 못한 머리채를 지금 잡았다. 과거로 돌아가 그 일주일을 삭제한다면 당신과 그가 여전히 부부겠습니까. 사랑이 원체 이기적이어서 나는 당신과 헤어진 그에게 안도합니다.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 만큼 나도 당신이 싫습니다. 당신이 나를 저주하듯 나도 당신을 저주합니다. 하필 당신이 이 남자의 전처라는 것이 끔찍합니다. 전처의 자격으로 그 일주일을 따지는 것은 받아들이겠으나 이별 요구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불행이 당신의 행복이면 모를까, 타인의 불행을 기원하며 스스로 불행해지지는 마십시오.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더러운 꼴 보기 싫으면 교양있게 처신하세요.”
“끊겠습니다.”
도연이 휴대전화를 옆으로 치우고 노트북을 켰다. 곧 윈도우 바탕화면이 떴다. 도연이 노트북 복구 솔루션을 작동시켰다. 복구 수준 공장 출시 상태. 하드디스크 포맷. 모니터에 경과를 나타내는 막대그래프가 떴다. 당신은 사랑을 교양으로 합니까. 지금의 행동은 당신의 이혼을 기만으로 보이게 합니다. 당신이 내민 이혼서류에 진정성이 없어 보입니다. 나를 핑계로 그와의 인연을 연명하고 싶으십니까. 그것이 당신의 지독한 사랑일지라도 내 눈엔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남자가 당신을 동정하거나 연민한다면 그때는 내가 버리겠습니다. 내 남자도 당신의 남자도 아닌 까닭입니다. 나는 당신을 어르고 달랠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고개 숙일 생각도 없습니다. 이별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사람이 나는 싫습니다. 도연의 노트북이 절반의 포맷을 마쳤다. 부지런히 도연의 개인 자료와 이제껏 해온, 앞으로 할 예정이었던 작업 파일들을 지웠다. 현재가 불행한 과거는 부질없다. 불행한 현재는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도연은 완벽하게 텅 빈 노트북에 새로운 지금을 저장하고 싶었다. 도연이 포맷 경과를 지켜보며 유철에게 전화했다.
“뭐 해요?”
“혼자 놀고 있어요.”
“심심한데 같이 놀아요.”
유철이 집 앞에 도착했을 때에도 포맷은 끝나지 않았다. 도연은 그 상태로 두고 집을 나왔다. 유철이 아파트 정문 옆에서 차에 비상등을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도연이 차에 탔다. 내비게이션 목적지가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 산성 안에 걷기 좋은 길이 있어요. 네에. 유철의 차가 시내를 벗어나 곧 강변도로로 진입했다. 도연이 문에 기대어 차창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보았다. 유철은 마치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듯 곧장 달려왔다. 분명 자신이 정희에게 전화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였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했다. 도연이 차창에 호오 입김을 불었다. 전화했어요. 뭐라고 해요? 헤어지라고요. 뭐라고 했어요? 당장 그러겠다고 했죠. 잘했어요. 유철이 옆으로 팔을 뻗어 도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더니 문득 토닥임을 멈추고 도연아, 하고 불렀다. 이상할 것은 없지만 처음 듣는 호칭이어서 도연이 살짝 놀랐다.
“방금 뭐라고 불렀어요?”
“그렇게 부르면 안 되나?”
“안 될 게 뭐 있어요.”
“나는 깍듯한 도연씨보다 그냥 도연이가 더 좋다. 괜찮지?”
“네. 나도 바꿔야지. 유철아, 강변대로를 경운기처럼 달리면 진로방해다.”
“가스나가 말을 놓는 거하고 구박을 구별 못하네. 니 동생이야?”
하하하. 가스나라니. 도연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도연은 유철이 성품상 반말을 잘 못하는 줄로 알았다. 중저음 목소리에 존댓말이 잘 맞기도 했다. 그 목소리로 도연아, 하는데 그게 또 그렇게 잘 어울렸다. 가스나라고 할 때는 유철이 더 바짝 다가온 느낌이었다. 니는 내가 좋아 죽겠지? 네. 고만 좀 좋아해라. 유철이 도연의 머리를 마구 흩뜨려놓고 기분 좋게 달려갔다. 미안해서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었다. 정희가 도연을 정면에 두고 자신의 불행을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불행의 원인이 도연인 듯 몰아갔다. 이혼은 정희에게도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혼서류로 유철을 확인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남은 감정이 전혀 없는지. 국회의원이었으므로 유철도 사생활을 특히 신경 써야 할 때였다. 그런 염려로 결정을 미루는 유철을 예상했을지도 몰랐다. 정희 나름의 계산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내민 이혼서류였다. 유철도 잠시 고민했었다. 곧 치를 선거가 신경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혼을 미루면 빌미를 남길 수 있었다. 네가 안 했잖아. 네 안위를 위해서. 다시없을 기회였다. 유철은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다만, 네 의사를 존중했으니 너도 나의 사정을 들어줬으면 한다,고 했다. 바로 있을 국정감사 준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준의 신속하고 조용한 이혼. 이혼조정기간 동안 유철이 오피스텔을 얻어 짐을 옮겼다. 그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합의한 내용에 모두 동의하십니까. 네. 법정 판결을 받고 유철이 이혼신고를 마쳤다. 그것으로 드디어 남이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꿈꾼 이혼이었다. 만일 유철이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면 정희는 끝내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꾀에 넘어간 이혼. 정희는 지금 그것을 화풀이 하는 중이었다.
유철이 산성 안 야외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그러고는 곧장 행궁길로 들어섰다. 행궁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주위로 난 길이 좋아서 발 닿는 대로 걸었다. 곳곳에 놓인 조각상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유철은 도연씨를 도연아,로 바꾸더니 곧 더 가까운 애칭으로 연아, 하고 불렀다. 바뀜이 자연스러워 도연도 늘 그렇게 들었던 듯 그러려니 했다. 연아, 여기 괜찮지? 응, 좋네요. 좋게만 지내고 싶은데 덜컥덜컥 일이 터졌다. 도연은 묵묵히 감수했다. 왜냐고 물으면 당신이 예뻐서,라고 했다. 단순한 이유가 오히려 유철을 안심시켰다.
“너는 혜승엄마가 이해되니?”
“나는 나 싫다는 사람 나도 싫고, 다른 여자 보는 남자, 남자로 안 보여요.”
불행했던 결혼과 이혼이 원통한 전처가 있다. 전처는 억울하고 전남편은 다행인 이 기묘한 상황. 도연은 맞지 않는 배우자와 사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인내와 희생과 포기로도 안 되는 것이 사람이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 더한 집들도 그냥 살아. 그 잔인했던 폭언들. 보편화된 불행은 불행이 아닙니까. 남들은 다 견디는 고통을 자신만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으로 몰린 듯했다. 그래도 떠나는 그의 마지막은 근사했다. 나 그만 싫어하고 행복해라. 그의 재혼을 진심으로 축하한 이유다. 유철 부부의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 도연은 알 수 없다. 어쨌든 함께 사는 것이 힘들 때 헤어졌을 것이다. 그랬기에 유철의 합의이혼을 다행으로 여겼다. 어느 쪽의 희생은 있었겠으나 끝내는 이별이라는 결론에 합의를 봤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전처가 합의한 이별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에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던 여자가 있었다. 유철 입장에서는 이스탄불에서 헤어진 여자를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겠으나, 정희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면 억울할 일이었다. 그랬기에 도연도 공식사과와 절필 요구를 받아들였다. 일주일의 댓가였다. 더이상은 안 됐다. 원통함은 알겠으나 분노에도 적정선이 있었다. 그녀가 전남편의 연인관계에 손댈 권한은 없었다. 그러면 분노가 역류한다. 조강지처의 폭로는 모두 참인가. 조강지처는 취하거나 누린 것이 전혀 없는가. 남편의 희생은 없었는가. 지켜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는지.
“아무래도 우리는 놀아야 같이 있을 팔잔가봐.”
“첫 단추를 잘못 끼웠어.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았잖아.”
“누가 먼저 푸는지 내기해볼까요?”
“나는 버티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야.”
“나는 노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에요. 유철씨가 먼저 일한다,에 내 전부를 겁니다.”
“진짜? 좋아, 내가 일 시작하면 니 다 내 거다. 알았지?”
“저기 혹시 박사과정 그만둔 거, 독해력 부족 때문은 아니었어요? 말의 함의를 이해 못하네. 박사 되기에는 좀 달리는 거 같애. 석사는 확실해요? 학력위조 같은데……”
유철이 우뚝 서서 도연을 빤히 보았다. 도연이 슬그머니 유철을 피했다. 저 풀은 이름이 뭐지? 예쁘다. 너 이리 와봐라. 시골 사람들은 이런 거 이름 잘 알죠? 여 와보라고. 어머, 거북이가 있었네? 이 가스나! 도연이 재빨리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
유철과 도연은 햇살이 침대로 쏟아져도 잠에서 깰 줄을 몰랐다. 전날 산성을 다녀온 김에 그와 관련한 영화를 보고, 영화와 관련한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입이 심심해 소맥을 만들어 마셨다. 거기에 야참을 곁들여 배부르고 정신 나갈 때까지 웃고 떠들다 새벽녘에 잠들었다. 햇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둘이 수면 경쟁이라도 하듯 숙면 중이었다. 놀랍게도 잠 많은 도연이 겨우 먼저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서 붕붕 울린 진동 때문이었다. 침대머리와 베개 사이에 유철의 휴대전화가 있었다. 김보좌관한테서 온 전화였다. 여전히 비몽사몽인 도연이 유철을 깨웠다. 전화 왔어요. 꺼지라고 해. 보좌관님. 하아. 유철이 그대로 누워 전화를 받았다.
“예, 보좌관님.”
“혜승엄마 페이스북에 작가님 통화녹음 파일이 올라왔습니다.”
“예에. 살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의원님, 혜승엄마 이대로 둘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안 되는 사람이잖습니까. 그냥 두십시오.”
통화를 마친 유철이 전화기를 베개 뒤로 던졌다.
“이번에는 뭐예요?”
“어제 통화한 거 녹음해서 올렸나보다.”
“그럴 것 같더라.”
도연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햇살을 가렸다. 이제 정희를 좀 알 것 같았다. 권리를 징글맞게 누리는 사람이었다. 당연한 권리도 선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미덕이고 염치다. 은폐한 불륜. 나는 괴롭혀도 돼. 피해자로서 전처의 권리를 여봐란듯이 사용하기에 이보다 좋은 사유가 없었다. 정희는 신이 났다. 코앞의 쾌감으로 옆을 볼 줄 몰랐다. 남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늘은 어떤 새로운 모욕을 줄까. 싫었다. 도연이 이불을 걷어내고 후우 숨을 내쉬었다.
“배고파요.”
“육개장 컵라면 있다.”
유철이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컵라면을 미리 뜯었다. 도연이 담배에 불을 붙여 유철에게 물려주고 저도 하나 피우면서 냉장고를 살폈다. 김치 벌써 다 먹었네. 우리는 거의 그대로 남았는데. 니 밥 잘 챙겨 먹지? 예에. 도연이 작은 밀폐용기를 꺼내 김치통에 남은 김치를 옮겼다. 유철과 도연은 컵라면으로 끼니와 숙취를 해결했다. 유철이 김치를 컵라면에 넣고 잠시 뚜껑을 닫아놓으면 볶음김치 맛이 난다고 해서 도연이 한번 해보았다. 그냥 라면 국물에 담근 김치 맛인데요? 물이 식은 뒤에 넣어서 그래. 다시 해볼까요? 유철이 새 컵라면을 뜯어 자신의 제조법으로 볶음김치 컵라면을 만들었다. 그것을 도연이 먹어보고는 그저 웃기만 했다. 맞지? 볶음김치 맛 나지? 하하하. 웃지만 말고 말해봐라, 나지? 볶음김치도 아니고 김칫국도 아니야. 육개장이 김치라면이 됐어요. 나는 볶음김치 맛 나는데…… 물을 조금 덜 넣을 걸 그랬다. 그럼 짜서 어떻게 먹어요? 어떻게 해도 웃긴 라면이었다. 한참 웃던 도연이 슬슬 식탁을 정리했다. 어제 컴퓨터 작업하다 말고 나왔어요. 유철이 오피스텔을 청소했다. 간밤에 먹다 남은 치킨과 감자튀김이 탁자에 그대로 있었고, 빈 맥주캔과 소주병도 바닥에 아무렇게 놓여 있었다. 도연은 밤새 쌓인 설거지를 했다. 술 취한 중에도 뭘 그렇게 먹었는지 개수대에 설거지거리가 수북했다. 유철이 이불을 훌훌 털어 침대 정리도 마쳤다.
“대충 됐으면 나가자. 바래다줄게.”
유철의 차가 도연의 아파트에 다다랐다. 아파트 정문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도연이 몸을 숙여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정문 옆 표지석에 붉은 스프레이로 휘갈겨 쓴 글귀를 보았다. 하도연과 진유철은 지옥으로! 심한 욕설과 성관계를 묘사한 그림도 함께였다. 유철과 도연이 서둘러 주차하고 표지석 앞으로 갔다. 도연과 유철을 알아본 경비원이 멋쩍게 그들을 맞았다. 인터폰을 해도 받지 않아 한참 기다렸다고. 예에, 하고 도연이 붉은 낙서로 뒤덮인 표지석을 보았다. 끔찍했다. 스스로 만든 지옥인지 세상이 만든 지옥인지 몰랐다. 웅성웅성 키득키득. 표지석 낙서는 이미 다 사진 찍었을 거였다. 그럼에도 몇몇은 도연과 유철을 주인공으로 한 사진을 다시 찍었다. 경비원이 이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녀가 새벽에 낙서하고 도망가는 모습이 정문 CCTV에 찍혔다고 했다. 관리실에서 확인해보라고. 고맙습니다. 가보겠습니다. 도연과 유철이 모인 사람들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굳이 관리실에서 무엇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그랬겠지, 하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집으로 들어온 도연이 그대로 현관 신발장에 등을 기댔다. 힘들어 죽겠네…… 그동안 도연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런 도연이 그제야 심정을 토로했다. 정희의 폭로로 도연이 가장 먼저 잃은 것은 딸 인영이었다. 인영은 말없이 짐을 챙겨 외가로 떠났다. 그 상태로 가끔 유철을 만났다. 그는 애써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그럼에도 미안함이 읽혔다. 뭐가 그렇게 미안해요. 지금 이 사태가 서로에게 미안한 일이면 첫 만남부터 불행한 거였습니다. 그 일주일은 분명 후회 없이 행복했었다. 그랬기에 도연은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감수했다. 그러면서 인영을 기다렸다. 둘의 만남에 후회가 없고 인영을 떠나보낸 것이 아팠지만, 세상이 한목소리로 나무라기에 네, 하고 받아들였다. 인정하고 물러났는데 돌팔매가 시작됐다. 숨 쉴 틈 없을 만큼 연이은 몰매였다. 그리고 오늘 표지석 낙서와 마주했다. 부부라는 절대가치를 훼손한 죄. 가엾은 전처를 대신한 응징이었다. 보기 싫다고 해서 모습도 감췄다. 그런 유철과 도연을 정희가 거듭거듭 꺼냈다. 버리고 나니 아깝습니까. 실수로 버렸는데 그새 누가 가져간 것 같아 분하십니까. 이제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좀더 정확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유철씨, 아직도 나하고 결혼할 마음 있어요?”
“나만 한 애인급 남편도 없을 거다.”
“결혼해요, 우리.”
혼인신고로 도연과 유철이 법적 부부가 되었다. 결혼식 따위는 필요 없었다. 당사자들이 서로를 배우자로 승인하면 그만이었다. 김보좌관이 가까운 기자들에게 이들의 결혼을 알렸다. 결혼 소식은 단신으로 다뤄졌으나 이때부터는 내연녀나 내연남이 아닌 아내와 남편으로 표기됐다. 기사 밑으로 달린 험한 댓글들을 유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사는 동안 정희가 한 어떤 행동들은 표피적 이유에 불과했다. 수업 관여나 답안지에 손을 대는 것 같은. 그런 경우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기에 제지가 가능했다. 문제는 좋은 남편의 처신을 이용한 행동들이었다. 혼자 집에 있는 아내, 임신으로 힘든 아내, 육아와 살림이 고된 아내를 남편이 응당 챙겨야 했다. 결혼 초기의 정희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힘든가보다. 그랬기에 유철도 때때로 동행하며 바깥바람을 쏘이게 했다. 그녀의 우울에는 고의가 섞여 있었으나 애교로 받아들이고 좋게 나아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일은 전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정희는 갈수록 천연덕스럽게 유철과 함께했다. 그의 일에서 떨어진 대신 몸에 붙었다. 학술대회나 포럼은 물론 온갖 경조사나 사사로운 미팅에까지 거침이 없었다. 본 행사장 참석이 어려우면 로비나 차 안에서 기다렸다. 고집스러운 데가 있는 동행이어서 어느 때부터는 유철도 관망하기에 이르렀다.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정희는 자신을 아내라고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유철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괜한 행동으로 아내임을 공공연히 밝혔다. 보잘것없는 강사의 배우자를 누가 신경 쓴다고 저러는가. 자의식 과잉으로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꼴이었다. 유철이 지인들과 대화하는 중에 정희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기도 했다. 그들이 정희를 의식하는 것이 읽혀 몸을 살짝 뺐는데, 그날 귀갓길에 정희가 물었다. 너 내가 창피하니? 물론 동행하는 게 큰 문제는 없는 자리들이었다. 다만 문제는 없으나 빠져주는 것이 더 나은, 그런 지혜가 정희에게는 없었다. 어떤 자리는 그들만의 연대와 소통이 필요한 법이었고, 직접 관계자가 아니면 나누기 어려운 대화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정희는 유철과 자신을 한 몸으로 여겼으므로 직접 관계자로 행세했다. 어디든 당연하게 제자리인 듯 얼굴을 내밀었다. 유철을 통한 한다리 건너 관계자라는 인식이 없었다. 유철의 지인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쟤는 왜 자꾸 오는 거야. 부부잖아. 지네만? 쟤들은 부부라는 것에 과한 의미를 부여한 것 같아. 너무 드러내. 감춰서 드러내는 세련됨이 없어. 누드 수준이야. 사회생활을 부부생활로 하고 있다고. 왜 우리가 쟤네 부부생활을 봐야 하지? 약속이 잡히면 유철 부부를 두고 내기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대부분이 부부동반에 걸었고 거의 맞았다. 쟤들이 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매너는 되게 없다. 그로테스크한 잉꼬부부야. 개인은 없고 부부만 있어. 저 바닥이 워낙 좁아 어떻게든 유철의 귀로 들어왔다. 정희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달갑지 않은 참석자. 이런 말을 무슨 수로 전하나. 앞에서는 더없이 반겨주는 사람들인데. 막을 수도 없었다. 정희에게 부부동반은 겨울이 춥다는 사실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유철도 그녀의 동행에 만족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야 정희가 제멋대로 구는 이상한 아내가 되지 않았다. 유철도 이상한 아내를 둔 남편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서로 좋아하는 잉꼬부부가 나았다. 눈 돌리는 곳마다 있었다. 누구? 아내입니다. 저분이 아까부터 기다리던데. 아내입니다. 아내지옥. 그랬기에 유철은 정희가 아내가 아님을 명확히 한 이 결혼이 더없이 행복했다.
*
유철의 고향으로 유철과 도연이 신혼여행을 왔다. 인구가 매우 적은 지역이었고 외곽에 조용한 숲이 있었다. 숲 앞으로 절경의 절벽이 있어 대개의 사람들은 절벽과 그 아래 계곡을 주로 찾았다. 그나마도 잘 알려지지 않아 휴가철이나 돼야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계곡을 둘러싼 뒤쪽 숲은 더욱 조용했다. 그 숲 안에 방이 몇개 안 되는 작은 펜션이 있었다. 유철이 국회의원 시절 혼자 휴가를 지낸 곳이었다. 간단한 가재도구가 비치돼 있어 일주일쯤은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서울에서 급한 일을 보고 늦게 출발한 바람에 자정 넘어 도착했다. 짐을 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잠이 먼저였다. 도연이 침대에 누웠다. 나 먼저 자요. 그래, 하고 유철이 침대 옆 스탠드를 끄고 저도 누웠다. 그러더니 가만히 말했다. 연아, 자면서 들어라. 그, 사진 있잖아. 거기 호수에서 뽀뽀하다 걸린. 네에. 그게 사실은 내하고 보좌관님하고 짜고 한 거다. 내가 인지도가 좀 부족해가지고. 으음, 스탠드 다시 켜볼래요? 자면서 들어도 돼. 불 좀 켜보라고요. 아니 그게, 우리 만난다고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여보? 응? 그런 걸 왜 결혼하고 불어요. 조속하게 이혼당하고 싶어요? 미리 말했으면 옷이라도 잘 입고 나갔을 거 아니야. 아냐, 자연스럽고 좋았어. 내가 그 사진 지갑에 넣고 다닌다. 몰랐지? 경고하는데, 앞으로는 꼭 상의하세요. 알았죠? 네에. 오늘은 졸려서 봐줍니다. 도연이 눈을 감았다. 무엇을 따지기에는 피곤한 밤이었다.
이른 새벽, 전날의 여독으로 도연이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런 도연을 유철이 깨웠다. 연아, 일어나보자. 왜에. 밥 먹으러 가자. 안 먹어…… 그럼에도 유철이 물러나지 않았다. 이날이 장날이었는데 시장에서 도연에게 꼭 먹이고 싶은 음식이 있었다. 새벽에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었다. 도연이 마지못해 일어났다. 여간해서는 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너무 이른 것이 불만이었지만 이유가 있을 터였다. 도연이 비몽사몽 중에 씻고 입고 억지로 펜션을 나왔다. 그래도 훅 끼친 숲의 공기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좋다. 잘 나왔지? 응. 유철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담배 피우고 갈까? 가면서. 유철의 차가 펜션을 나와 계곡 옆구리를 타고 난 흙길을 서서히 달렸다. 도연이 차창을 활짝 열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에 찬 공기가 섞여 민트처럼 상쾌하게 목으로 넘어갔다. 팔을 차창 밖으로 내밀어 스치는 공기도 느꼈다. 휴가를 맨날 여기서 보낸 거예요? 응. 좋았겠다. 좋았지. 나도 여기 좋아요. 도연이 제가 피우던 담배를 유철에게 물려주었다. 유철의 차가 흙길을 벗어나 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도로 양쪽으로 흰 꽃과 초록 잎이 무성한 예쁜 밭이 있었다. 저게 무슨 밭이에요? 메밀밭. 아아. 도연은 메밀밭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었다. 메밀꽃이 얼핏 안개꽃 같았으나 그것보다는 잎이 풍성하게 푸르렀고 꽃도 더 굵직했다. 힘차게 예뻤다.
“메밀밭 좋나?”
“네.”
“메밀밭 며느리 자격 있네.”
“어머, 저 밭 당신네 밭이에요?”
“아니, 저 앞에 산 보이지? 고 아래에 있다.”
도연이 새삼 새로운 눈으로 메밀밭을 보았다. 농사를 지었구나. 도연은 메밀밭도 처음이지만 메밀 농사는 더욱 낯설었다. 메밀밭은 강원도나 제주도에 많다더라, 정도의 수준이었다. 경남의 메밀밭은 신선하고 새로웠다.
“근데 저거 예쁘다고 막 들어가서 사진 찍으면 안 된다. 저런 밭에는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들어가도 촌스럽다. 뭘 하면 할수록 촌스러워. 하트 뭐 그런 거 있잖아. 밭이 예쁘면 멀찍이서 찍는 게 나아. 밭에는 농부가 들어가야 어울린다.”
밭의 생래가 과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바지런한 관리와 묵묵한 기다림으로 하늘과 함께 수확해내야 했다. 어느 밭이든 농부의 간절한 염원이 서렸다. 좋다고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였다. 도연이 이 고장의 밭에서 느낀 위엄도 그것에 기인한 듯했다. 농부와 하늘이 짓는 밭. 밭 때문인지 가로등도 현저하게 적었다. 밤이면 밤만큼 어둡고 낮이면 낮만큼 밝은,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곳이었다. 도연은 유철의 고향을 제 고향처럼 예뻐하며 가만히 둘러보았다.
유철이 시장 주위를 돌다가 겨우 자리를 찾아 주차했다. 장날답게 북적북적했으나 외지인은 거의 없었다. 인근 지역이라도 볼거리가 많으면 두루두루 찾을 텐데 사정이 고만고만했다. 고장 특색을 살려 잘 정돈된 시장임에도 홍보가 너무 부족했다. 시장 한가운데 네거리에서 식당 골목 쪽으로 첫 가게가 팥칼국숫집이었다. 유철이 그 집 앞에 섰다. 여기예요? 들어가자. 도연과 유철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옆 계산대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저희 왔습니다. 왔나. 유철의 인사에 도연이 급히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노인의 입매가 유철과 무척 닮았다. 유철의 아버지였다. 서울에서 출발하면서 본가에 들를 것은 예상했다. 그래서 얌전한 옷도 준비했는데 본의 아니게 너펄너펄한 치마 차림으로 인사하게 됐다. 메밀밭 며느리에서 순식간에 국숫집 며느리가 된 순간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이제 인사드립니다.”
“멀지? 가 앉아라.”
유철의 아버지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철이 도연을 데리고 안 그래도 좁은 식당에서 가장 구석 자리로 갔다. 도연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아버지가 주방으로 들어갔는데 며느리가 손님처럼 앉아 있어도 되나 싶었다. 계산대도 비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메밀밭은?”
“밭은 저기 있다니까. 여기는 우리 식당.”
메밀밭은 그의 작은아버지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유철의 아버지는 청년 시절부터 이 국숫집을 운영했다. 몇년 전 시장에 아케이드를 설치하면서 점포들도 현대식으로 공사하는 바람에 옛 국숫집의 향취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수세미에 수없이 긁힌 대접이나 그림이 벗겨진 양은쟁반 같은 낡은 주방용품으로 식당의 시간을 어림짐작할 수는 있었다. 얼마 뒤 한 아주머니가 밑반찬과 칼국수를 내왔다. 유철의 안부도 물었다. 우리 의원님 얼굴 좋아지셨네. 각시 잘 얻어서 그렇지요. 도연이 아주머니와 눈인사를 하며 웃었다. 아주머니는 빈 쟁반을 들고 유철의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계산대 앞으로 갔다. 먹어라. 유철의 말에 도연이 팥죽부터 맛보았다. 준비된 설탕을 더 넣지 않아도 달짝지근 맛있었다. 메밀면이 금방 퍼져 팥죽을 잘 쑤는 게 비결인데, 아버지만의 황금비율이 있다고 했다. 도연은 메밀면 팥칼국수를 처음 먹는 거여서 아아, 하며 들었다. 달달한 팥죽과 거친 듯 부드러운 메밀면의 조합이 좋았다. 유철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팥칼국수는 새벽이 가장 맛있다고 했다. 역시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녁때가 가장 맛이 덜하다고. 맛있으면 그만인 도연은 그렇다니까 그저 아아, 하고 들으며 한 대접을 싹 비웠다. 면도 팥죽도 남길 것이 없었다. 잘 먹네? 맛있어요. 한 그릇 더 할래? 아니, 시장에서 다른 것도 사 먹어야죠. 그때쯤 유철의 아버지가 주방에서 나와 다시 계산대 앞에 섰다. 유철과 도연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유철의 아버지가 준비한 식혜를 도연에게 내밀었다. 벌써 해 올라서 덥다. 절차도 형식도 모두 무시하고 나타난 며느리였다. 어쨌든 며느리라니까 국수 한끼 먹여 보내려고 한 것은 아닌지 도연이 잠시 걱정도 했었다. 그러나 식혜를 내주는 모습에서 살짝 안도했다. 미워하지는 않는구나.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찬 바람 불면 온나. 그때 메밀이 좋다.”
“예에.”
유철이 옆에서 딴청 피우며 가만히 웃었다.
“니는 뭐 좋다고 실실 웃고 있노? 국숫값 내라.”
“달아놓을게요.”
유철의 아버지가 손으로 나가라는 시늉을 하고 장부를 살폈다. 유철이 머뭇거리는 도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달달한 칼국수로 배가 든든한 아침이었다. 이날은 유독 맛있었는데 아버지가 설탕 대신 꿀을 넣은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주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유철이 혼자 와도 직접 국수를 말지 않았는데, 이날은 특별히 손수 만들었다.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그만의 표현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연은 시장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온 길을 또 오고 간 길을 또 가면서도 마치 새로운 길을 보는 눈으로 시장을 누볐다. 유철은 그런 도연을 가만히 따라다녔다. 옛날 팥빙수? 먹을래요? 먹자. 하모회가 뭐예요? 갯장어회. 이게 갯장어구나. 어쩐지 미꾸라지가 되게 크다 했네. 이 붉은 건 감자예요, 고구마예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감자예. 감자예요? 한 바구니 주세요. 언제 와도 마음 편한 고향 시장이었다.
도연과 유철은 되도록 차를 쓰지 않았다. 숲 근처를 걸어다녔다. 어느날은 찐 감자를 들고, 어느날은 볶음밥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나왔다. 음식을 들고 나올 때는 숲 안쪽 너럭바위로 가서 먹었다. 제법 큰 바위들 덕에 공터가 생겨 바람도 잘 통했다. 도연은 유철이 나 어렸을 때 저기에서,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았다. 어린 유철이 놀던 숲을 어른 유철과 함께 걷는 것이 좋았다. 유철이 친구들과 이 숲을 자주 찾은 것은 남의 동네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숲 반대편 산자락 아래에 살았는데 자기 동네 뒷동산보다는 남의 동네 계곡과 숲이 더 재미있었다. 이 동네 아이들과 종종 싸움이 붙으면서도 기어이 놀러 온 이유였다. 그것도 초등학교 때까지였다. 유철의 철없는 유년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중학교부터는 인근 도시에서 다녔다. 학교와 하숙집만 오가는 생활이었다. 좁은 방에 틀어박혀 착실하게 공부만 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 사춘기는 없다고, 유철도 어머니에게 대거리한 적이 있다. 대학이 서울에만 있느냐고. 그때 어머니가 유철을 다잡았다. 꼭 서울에 있는 대학 가라. 너만 잘나고 너만 잘살면 돼. 서울 나가면 돌아오지 마. 곱게 자란 여자 만나서 거기서만 살아. 너는 아버지처럼 살지 마. 홀어머니에 동생들이 줄줄이 있는 허름한 국숫집 남자와 결혼한 어머니였다. 국숫집만으로는 생계가 막막해 남의 땅에 농사도 지었다. 살림하며 농사짓고 국숫집을 돌보며 시동생들을 키웠다. 기회가 닿으면 인근 도시로 보내 학업도 이어가게 했다. 유철을 떳떳하게 내보내기 위해 시동생들을 먼저 내보냈다. 그리고 유철이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해에 죽었다. 지독하게 일만 하다 죽었다. 그랬으므로 유철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학업에 전념해야 했고 곱게 자란 여자와 결혼해 잘살아야 했다. 그러나 학업은 박사과정 중에 손을 놓았고 곱게 자란 여자와는 헤어졌다. 묘도 쓰지 말라던 어머니였다. 유골가루는 인근 바다에 뿌렸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고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어머니가 농사지었던 밭을 사들였다. 산자락 아래 메밀밭은 어머니의 생애이고 묘지였다.
유철의 아버지는 사십구재를 마지막으로 아내의 제를 올리지 않았다. 당신도 죽으면 태워서 재는 뒷동산에 뿌리고 제사는 지내지 말라고 했다. 젯밥 먹으러 오는 것도 귀찮고 그리울 이승의 삶도 없을 거라고 했다. 자신을 챙길 수 없는 삶이었다. 가진 게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럼에도 장남을 가장으로 세워놓고 뒷방으로 물러난 어머니와 돌봐야 할 동생들은 너무 많았다. 그 옛날에도 동생 많은 가난한 집 장남과 결혼하겠다는 여자는 흔치 않았다. 자식이 재산이라고 어머니는 자식 많은 것을 자랑으로 삼았지만, 그는 한날 다 같이 죽었으면 할 만큼 힘겨웠다. 그런 자신과 결혼한 아내였다. 옹골찬 아내 덕에 밥상의 찬은 늘었지만 그가 어여뻐하는 아내는 아니었다. 그저 처지에 맞는 배필이었다. 아내의 고생이 미안해 딴눈은 팔지 않았다. 가슴에 그리운 사람 하나 없는 인생이 어디 있나. 유철은 혹여 그런 이유로 어머니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 것인지 그에게 넌지시 묻기도 했었다. 그는 내 사람이 아니면 속만 상하더라,라고 모호하게 대답했다. 밖으로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산 부부여서 부러워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는데, 정작 본인들은 죽어서는 함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유철의 아버지는 유철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했다. 처지 따진 결혼으로 인생이 아플 바에 외롭더라도 홀로 살라고. 살 대고 사는 사람에게 정이 붙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허무하다고. 진취적인 어머니와 낭만적인 아버지의 바람은 이유는 달랐어도 결론이 같았다. 유철이 그에게 정희를 선보인 날 그랬다. 즈그 엄마하고 꼭 닮은 여자를 데리고 왔네. 그날 그는 국수를 말지 않았다. 주방에서 나와 계산대를 지켰다. 헤어질 이유가 없어 평생 산 부부였다. 서로에게 잘못한 것도 없고 잘한 것도 없는. 그는 아내가 있는 집보다 고된 국숫집이 차라리 좋았다. 왜 그렇게 정이 안 가는지 몰랐다. 누구는 늙어 등 긁어줄 때쯤이면 서로 귀한 줄 안다고 하던데, 그의 마음은 아내에게서 더 멀어졌다. 젊어 미운 것이 늙는다고 사라지나. 미운 것에 늙음이 붙어 오히려 더 보기 싫었다. 그런데 죽은 아내와 며느리가 얼마나 닮았던지 국수 뽑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얼굴 생김새는 물론 몸매와 걸음걸이조차 흡사했다. 죽은 아내가 보낸 며느리 같았다. 인연 참 징그럽다. 그렇다고 결혼을 반대하거나 박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이혼 소식에 우려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알았다,고만 했다. 그런 그가 도연을 보고 웃었다. 도연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아들은 당신처럼 살지 않아서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그는 그날 직접 국수를 만들었다.
도연은 너럭바위에 다리를 뻗고 앉는 것을 좋아했다. 햇살에 데워진 바위는 따뜻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정면에 야생 대나무 덤불이 있는데, 어느날은 뜬금없이 유철에게 대마초를 해봤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 숲에 유독 대나무가 많아요. 동네 친구들이랑 몰래 해봤죠?”
“서울 가스나 티내나? 대마초가 대나무 잎인 줄 알았어? 하이고, 어쩐지 자꾸 여길 오더라. 너 저거 노렸나? 뭣 좀 뜯어다가 같이 뻐끔뻐끔 함 해볼라고? 신접살림을 교도소에서 차리려고 했어? 이거는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유철의 말에 도연이 바위를 탕탕 두드리며 웃었다. 하하하!
“가스나가 금단현상이 왔나. 비켜봐라, 내 얼른 가서 찾아볼게.”
도연이 바위에 벌러덩 누웠다. 속이 후련했다. 유철의 입이 그제야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오래전 이스탄불에서부터였다. 네에, 그래요, 그럴게요, 식의 습관적으로 수용하는 그의 어법이 늘 마음에 걸렸다. 아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잘했지만 그 속에 ‘나’는 없었다. 성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방어적일 만큼 지나쳤다. 그를 ◯ ◯ 시에서 다시 만난 뒤에야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국회의원이었다. 자신의 말을 무겁게 책임져야 하는 직업이었다. 꼭 해야 할 말만 하는.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하지만 기계적인. 그렇다 하더라도 의문은 여전했다. 그에게는 털털한 대화라는 것이 없었다. 도연이 막 떠들면 같이 편히 얘기하지 못하고 그저 웃기만 했다. 우리끼리만의 대화를 잃은 사람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편히 내려놓아도 될 상대가 곁에 없었던 듯싶었다. 도연은 유철이 저에게만이라도 마구 지껄이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그의 우울이 덜어질 거였다. 미소로 감춘 우울과 외로움. 도연은 진즉부터 그것을 읽었다. 욕도 괜찮고 비속어도 괜찮았다. 억눌린 내면을 해소하고 감정의 자정작용을 돕는 데에는 실없는 말처럼 좋은 것이 없었다. 어법이나 어순에 맞지 않아도 됐다. 표현이 막막하면 막막한 그대로. 또박또박 정리된 말만이 소통이 아니었다. 모호하지만 느낌으로 전달되는 언어가 때로는 더 유효한 소통이 되기도 했다. 그 순간 어떤 느낌이 친밀하게 공유되는. 유철은 말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자신에 대해서도 툭 터놓는 순간이 올 것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희화화해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다. 우선은 도연 자신을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상대라고 안심시켜야 했다. 입술을 댄 채 사랑한다 말하고 그의 입속으로 제 혀를 넣어주었다. 그의 혀가 자신의 입속에서 마음껏 움직이게 했다. 혀가 닿는 사이만큼 가까운 관계는 없다. 혀는 상대를 가장 강력하게 거부할 수 있으며 가장 내밀하게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이다. 입술보다 더 깊은. 우리끼리라는 강한 연대감. 유철은 서서히 변화했다. 제법 투정도 생겼고 수동적 어법도 점점 능동적으로 달라졌다. 도연은 그의 반말이 그래서 좋았다. 자신을 더 가깝게 끌어당긴 말이었다. 가스나. 별것도 아닌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나. 같이 뻐끔뻐끔 함 해볼라고. 가스나가 금단현상이 왔나. 이 가감 없는 유쾌한 대화. 그가 해냈다. 숲에서 해맑았던 어린 유철도 다시 불러냈다. 어린 유철이 어른 유철을 해방시켰다. 제 안에 아이를 잃은 어른은 노쇠하다. 제 안의 아이를 성장시키지 못한 어른은 미숙하다. 유철은 숲에 머무는 동안 제 안의 아이를 다시 찾았고 한층 성장시켰다. 그런 유철은 놀랄 만큼 청량하게 섹시했다. 그날 밤 도연이 소맥을 많이 마셨다. 좋은 기분에 마셔도 마시는 줄을 몰랐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셔? 한잔 마셨잖아. 뭐 계속 한잔이야. 이거 딱 한잔 먹었어, 못 봤어? 말하는 거 보니까 술 다됐네. 나 아팠어. 어디? 내가 여기 아프다고 했는데 당신이 그냥 갔잖아! 언제? 당신이 이스탄불에서 혼자 막 가가지고 내가 안녕히 가세요, 그랬잖아! 아팠나? 약국도 없고. 발 내봐라. 부었지? 어디서 그랬어? 이스탄불이라고 했어, 안 했어? 학력위조했어…… 아무래도 달려…… 하고 도연이 곯아떨어졌다.
느릿느릿 흐르는 시간을 즐긴 여행이었다.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그저 둘이 있었고 행복했다,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 날에는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유철네 메밀밭에 들렀다. 유철이 작은 밭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무척 넓었다.
“와, 부자였네.”
“이 땅은 팔아도 얼마 안 한다.”
“몰라. 넓으면 장땡이에요. 근사하다.”
유철의 어머니가 이 밭으로 돌봐야 할 시동생 시누이가 일곱이나 됐다. 이들이 훗날 당신 아들 국회의원 되는 데 큰 밑거름이 됐다. 올케, 형수의 노고를 잘 아는 이들이 조카의 선거를 적극 도왔다. 모든 풀뿌리 학연 지연을 동원해서 유철을 ◯ ◯ 시의 아들로 확실하게 밀었다. 유철이 거저 재선에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고된 농사는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조카가 스캔들 때문에 사퇴했어도 누구 하나 험한 말을 하지 않았다. 힘들면 내려온나. 우리가 니들 건사 못하겠나. 유철에게 메밀밭이 특별한 이유였다.
“연아, 이 밭 니 가져라.”
“나는 가만히 있어도 금싸라기가 떨어지는 팔자라던데, 이제 뭐 먹고 사나 했더니 메밀밭이 뚝 떨어지네. 어머님 밭이라면서요?”
“내가 샀어. 내 명의야.”
“빚 하나도 없이 샀어요?”
“좀 얻었지.”
“안 얻은 부분만 줘요.”
“그럼 여 내려와서 농사지을래?”
“그냥 안 가질래요.”
“왜, 좋다며, 부자 함 돼봐라.”
“난 원래 부자 되는 데 관심 없었어요.”
도연이 유철을 무시하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여보! 아까 보니까 관심 많은 것 같던데?”
유철이 킥킥 웃으며 따라 내려왔다.
*
말 많고 탈 많았던 지방선거가 끝났다. 예상대로 여당의 압승이었다. 그간의 사건사고 이슈도 사그라지는 양상이었다. 선거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기사에 유철이 언급되면 악플이 달렸지만 전만 같지 않았다. 유철과 도연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습을 감췄고, 민감한 시기에 나온 정희의 폭로를 여전히 석연찮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사라진 사람들을 끈질기게 언급하는 정희에게 도리어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전남편의 배신이라고는 하나 도연만 물고 늘어지는 인상이 강했다. 잤다면서요? 잤습니다. 정희가 이 통화녹음 파일을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도연은 온갖 욕설로 만신창이가 됐었다. 누가 저년 좀 안 죽이냐,는 글이 올라올 정도였다. 그 무렵 누군가 도연의 아파트 표지석에 붉은 낙서를 하고 인증사진을 올렸다. 정희의 페이스북이 술렁이게 된 계기였다. 왜 하도연네야. 공동주택인데 너무하잖아. 군중심리가 있다지만 대중이 이성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지나친 처사까지 옹호하지는 않았다. 이 사람도 어지간하네. 이미 이혼 결정을 했다면 그때는 진의원이 살림을 차려도 문제없는 거 아닙니까? 고 일주일 가지고 되게 물고 늘어지네. 이럴 거면 왜 이혼했습니까? 이런 글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정희가 페이스북을 닫았다. 얼마 뒤 유철과 도연의 결혼 기사가 떴다. 웨딩사진 한장 없는 기사였다. 혼인신고를 마쳤다고만 처리됐다. 둘의 결혼은 이스탄불의 일주일보다 더 충격이었다. 정희는 만나자마자 잠자리를 갖는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했다. 충동적인 만남은 충동적인 이별로 귀결돼야 했다. 순간 눈멀어 함께했으나 작은 시련이면 곧 헤어질 만남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동안 결혼하지 않은 거라고. 그런데 결혼을 했다. 저 정도 망신이면 벌써 헤어졌어야 했다. 정희는 도연이 이해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제법 이름을 알려 잃을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겁없이 유철을 택했다. 그 남자 눈을 똑바로 봐. 차갑고 냉정하고 비열한 눈동자를. 그의 환한 미소 뒤에는 지독한 인간혐오가 있었다. 혐오를 친절로 바꿔치기해 남을 속였다. 타인을 믿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을 철저하게 감췄다. 그의 언어가 틀에 박힌 이유였다. 표현하는 문장과 단어가 한정됐다. 어떤 경우에도 준비된 말 이상은 하지 않았다. 그의 인간혐오는 아내도 비켜가지 않았다. 작은 실수나 약간의 흐트러진 모습도 용납하지 않았다. 속내를 감추고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남편 행세를 했을 뿐이었다. 아내만 보는 남편. 저런 남편이 좋아 늘 붙어 있는 아내. 남편의 가치는 오르고 아내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남편 일터를 제 놀이터로 아는 아내. 유철은 추락하는 아내를 방치했다.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수록 더 함께 다녔고 더 자주 아내를 언급했다. 설마 거기를 진선생이 가자고 했겠니? 걔가 주제파악 못하고 간 거지. 유철이 정치인이 되고서는 저러한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동행을 철저하게 피했고 그녀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동료 의원들 모임에 잠깐 동행했지만 참석하지도 않는 어머니 제사를 핑계로 곧 자리를 떴다. 어느 의원의 아내가 봉사모임을 만들어 정희에게 연락했지만, 유철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아 참여할 수 없었다. 정희는 이혼으로 그런 그의 체면을 깎아버렸고, 명예를 떨어뜨려 정치판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 고립시키는 것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도연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을 해버렸다. 그런 뒤 전화번호를 바꾸고 사라졌다. 둘의 잠적으로 정희만 홀로 남았다. 관중의 성원도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고요였다. 어디 간 거야. 나와.
정희가 매달릴 사람은 김보좌관밖에 없었다. 그는 이들의 행방을 알고 있을 테고, 모른다 해도 찾자면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입을 다물었다. 만나주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정희가 방송출연을 해서라도 둘의 결혼생활을 방해하겠다는 협박 메시지를 남긴 뒤에야 겨우 전화했다.
“뭐 하자는 겁니까? 모른다고 말했을 텐데요?”
“알고 있는 거 다 알아요. 바뀐 번호라도 알려주세요.”
김보좌관은 유철을 보좌한 몇달 만에 이 부부의 상태를 눈치챘다. 정치판에 쇼윈도우 부부가 더러 있었다. 먼저 알은체는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의 배우자라는 것이 무엇을 하자고 들면 천지가 일거리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들면 가만히 있어도 별탈이 없는 자리였다. 국민들이 배우자의 행방까지 신경 쓰는 일은 드물었다. 지역구 관리 차원으로 봉사활동이나 지역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배우자도 있으나 당시 유철은 비례의원이었다. 김보좌관이 나서서 정희의 일정을 잡을 일이 없었다. 말 많은 여의도에서 잦은 내외동행은 구설수에만 올랐다. 정계진출 욕심인지 퍼스트레이디증후군인지. 특정 장소도 적시의 감각적 동행이 아니면 지지자들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보기 좋은 것도 한두번이다. 배우자가 공적 인물도 아닌데 자꾸 보이면 거슬린다. 의원이 그런 자리를 빌려 공공연히 권력을 실어주는 것만 같다. 대중심리를 간과해서도 안 됐다. 불필요한 배우자 노출은 그의 소유주만 부각돼 무의식적으로 우리들의 ‘그’가 아닌 것으로 분류하게 한다. 주인은 따로 있네. 부부라는 강력한 상징성이 공공의 인물을 개인으로 바꿔버린 탓이다. 대중은 특정인의 배우자가 아니라 우리들의 특별한 ‘그’를 원한다. 대중성을 잃으면 섹시하지 않다. 무덤덤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공사구분 못하는 의원에게 다음을 맡기고 싶지도 않다. 그런 사람이 있었지. 추억의 인사가 되는 건 한순간이다. 유철은 일과 가족을 철저하게 분리했다. 의원 신분으로 나서는 길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공적 자리로 해석했다. 철저하게 그들의 ‘그’로 우뚝 섰다. 가족은 제가 챙길게요. 유철은 지독하고 고집스럽게 가족을 관리했다. 김보좌관이 난처했던 것은 정희의 일정보고 지시였다. 집에서도 유철의 세세한 일정을 꼭 챙겼다. 보고 요구는 점점 심해졌는데 보고서에 누락되거나 변경된 일정이 발견되면 책임을 따져가며 몰아붙였다. 상황에 따른 변경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 김보좌관이 팩스로 보내던 일정보고서를 유철에게 직접 건넸다. 팩스가 잘 안 들어가는데, 사모님께 좀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예에. 그 뒤로 정희의 지시는 더이상 없었다. 정희는 그 일을 뒤늦게 따지기도 여러번이었다. 일은 제가 벌여놓고 그것이 잘못되면 자신을 피해자로 전환했다. 나는 억울해. 정작 억울한 사람을 더 억울하게 만드는 몰염치한 행동이었다.
유철과 도연은 정희에게 손을 든 것이 아니었다. 잠시 물러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정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유철은 정희가 만만하게 볼 인물이 아니었고, 도연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우습게 아는 것은 자신을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유철이 강의하던 시절, 정희는 그와 함께 다니며 국내외 석학들의 강연과 연설을 들었다. 그러면서 어느덧 자신을 그들의 일원으로 여겼다. 유철이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의원 사모님의 권력을 즐겼다. 혜승의 유치원을 비롯한 일상에서 만나는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어쩌다보니 높은 분 사모님이 되었는데 이혼으로도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아이 아빠가 국회의원이었으므로 대접은 여전했다. 이런 정희에게 도연은 일개 작가였다. 그것이 오만한 괴롭힘으로 이어졌다. 유철은 정희의 폭로에 어떤 맞불도 놓지 않았다. 도연과의 만남은 나쁜 아내에 대한 응징이 아니었다. 거기에 그녀가 있었고 사랑했다. 괜한 말로 도연을 누군가의 대체로 만들지 않았다. 정희의 불륜 폭로 또한 그간의 해명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통화내역서만 봐도 둘은 주민들과의 만남 행사 전후에만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나왔다. 정희가 아내의 촉으로 그때를 눈치챘어도 심증이 물증을 이길 수는 없었다. 통화내역서를 근거로 이스탄불에서는 우연히 만났다,는 해명을 밀고 나가도 됐었다. 그러나 유철은 다른 선택을 했다. 정희가 폭탄을 터뜨렸을 때 그대로 맞았다. 떠들썩한 소란에 그 일주일을 던져 산산조각 내버렸다. 맞습니다. 대중이 수군대지 않고 대놓고 떠들게 했다. 이왕 터진 일, 정희가 일주일을 평생의 약점으로 잡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유철은 정희가 폭로로 끝낼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속은 이혼, 무효야. 대중을 일으켜 돌을 던지게 한 이유였다. 전처를 가엾이 여긴 대중이 유철과 도연을 단죄할 때까지. 그런데 두 사람이 모습을 감췄다. 대중이 명령 내릴 당사자들이 사라졌다. 정희만 덩그러니 남았다. 진유철이 왜 그랬을까? 전처도 좀 이상하지 않아? 대중이 사안을 되짚기 시작했다. 정희가 절제하지 못한 모습을 계속 보여준 결과였다.
“혜승엄마, 이제 남 일 그만 신경 쓰고 당신 앞가림이나 하세요. 남이면 남답게 살라고요. 이제 연락하지 마세요. 알겠어요?”
“남 일? 애가 죽어도?”
“설마 그런 일이 생기겠습니까?”
“애 아빠 하기 나름이겠죠.”
“협박입니까?”
“자신이 누군지 잊지 말라는 거예요.”
“끊겠습니다.”
김보좌관이 재빨리 통화를 마치고 녹음을 종료했다. 통화가 길어지면 대화에 군더더기가 붙었다. 그녀의 남은 말을 차단해야 했다.
김보좌관이 통화녹음을 근거로 그녀의 집으로 경찰을 보냈다. 사건은 만들기 나름이었다. 정희는 제 입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저 말의 의미를 선수 쳐 비수로 만들어야 했다. 오래 기다린 기회였다. 아이의 목숨이 위험하다. 가까운 경찰을 통한 까닭에 조치도 빨랐다. 경찰 급파는 좋은 그림이었다. 경찰도 증거를 내민 신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전 국회의원 아내의 난동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인사였다. 가만히 있다가 일이라도 생기면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미리 경찰 몇을 보내 상황을 살피는 것이 나았다. 그녀에게 남은 무기, 혜승. 천륜을 쥐고 있었다. 아이를 떨어뜨려야 했다. 아둔한 사람. 가만히 쥐고만 있어도 평생 위력이 될 수단들을 알량한 객기로 모두 잃게 되었다. 정희는 세상이 동정할 때 멈췄어야 했다. 안타까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곧 그녀에게 닥칠 일들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안하다고 해서 앞길 틀어막고 있는 방해물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경고를 했음에도 버티고 있으니 강제로 끌어낼 수밖에. 당신만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어. 하나 받을 것을 둘로 요구하면 이미 받은 하나마저 빼앗기게 마련이었다. 정희는 그것도 모자라 고개 숙인 자들을 짓밟았다. 대중의 손을 타버려 그들의 동정과 박수에 눈먼 탓이었다. 저를 환호만 하면 선한 제 편이었다. 일부러 부추기는 사악한 환호와 조롱을 가려내지 못했다. 좋지 않은 모습도 좋다고 부추기니 홀린 듯 함부로 행동했다. 벌거벗은 임금님. 뒤에서는 킬킬 대는 것도 모르고 알몸에 왕관을 쓰고 돌아다니는 꼴이었다. 혀를 차고 돌아서는 다른 대중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들은 질투나 악으로 간주했다. 환호가 비난으로 바뀌는 순간, 정희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었다.
*
유철과 도연은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의 한 작은 집에서 여름을 나고 있었다. 단출한 살림으로 현지인인 듯 방랑자인 듯 지냈다. 터키의 여름은 무척 뜨거웠다. 시원한 수박으로 수분을 보충하고 이뇨작용으로 화장실 드나들기를 반복했다. 여보, 당신 아주 어린 수박 본 적 없지? 나 어렸을 때 우리 옆의 군에 수박밭이 많았거든. 애들하고 서리를 갔는데 가보니까 막 나온 애기 수박이 있는 거야. 되게 예쁘다. 내가 그걸 몇개 따와서 창에 걸어놨어. 박처럼 말리면 되는 줄 알았거든. 근데 다 썩어버린 거야, 하하하. 말하는 것에 재미를 붙인 유철이 노상 떠들었다. 그러면 도연이 그의 입술을 꽉 잡았다. 이 수다쟁이, 비즈 엮는 거 안 보여요? 입 좀 다물어요, 입 좀. 그러면 유철이 잠시 딴짓을 하다가 다시 도연 곁에 가만히 앉았다. 근데 여보, 요 머리들은 왜 다 안 묶고 기생충처럼 길게 뺀 거야? 기생충…… 당신, 이리 와! 더위가 너무 힘들면 가까운 파묵칼레로 갔다. 석회층을 타고 흐르는 물이 몸 어디에 좋다고 하는데, 도연과 유철은 그런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인 물에 수영하듯 몸을 담그고 돌아와 달게 잤다. 이때는 한국어·터키어·영어 사전과 본토 소설책을 놓고 둘이 되는대로 번역해가면서 읽었다. 번역이 맞든 틀리든 어쨌든 책장은 한장 한장 넘어갔다. 우리 제대로 읽고 있는 거 맞지? 틀리면 새 소설 하나 쓰는 거죠, 뭐. 벌써 쓰는 것 같다. 어, 개선되다, 였네. 오스만은 작업 환경이 개선되길 원했다. 조금 더, 혹은 이보다 더. 이보다 더, 비교급. 그러던 중에 김보좌관의 전화를 받았다. 혜승엄마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혜승이부터 격리시켰습니다. 아이의 문제가 걸렸다.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유철이 곧장 서울로 떠날 채비를 했다. 도연은 일단 터키에 남기로 했다.
“여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전화할게.”
유철이 호출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유철이 도착할 때까지는 김보좌관이 상황을 지휘했다. 경찰 둘이 정희의 집 앞을 지켰고, 김보좌관은 학교 앞에서 혜승을 챙겼다. 신속한 조치였다. 곳곳에 있는 김보좌관의 정보원들 덕이었다. 그가 흘린 정보로 기자들이 속속 경찰서로 연락했다.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들도 속보로 올라왔다. 진 전 의원 급히 귀국 중. 아이 목숨으로 전남편과 흥정? 최대한 소란을 피워 중대 사안으로 키워야 했다. 전 의원이라지만 유철의 영향력도 남아 있었다. 경찰은 정희에게 경고하고 아이는 보호조치 하겠다고 통보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요?”
“친권자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친권자라니요?”
“아이 아빱니다.”
이혼할 때 유철의 유일한 요구였다. 다른 건 다 원하는 대로 해. 친권만 줘. 내가 외동이라서 그래야 한다. 워낙 보수적인 지역 사람이라 이해되는 측면이 있어서 정희도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넘긴 친권자의 권리를 유철이 이토록 끔찍하게 휘둘렀다. 정희는 난데없는 소동에 속수무책이었다.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차분히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차분히 말할 기력도 없었다. 알았으니까, 나가주세요. 그러고는 소파에 가만히 누웠다. 나는 옛날부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어. 늘 가만히 있었어. 내 남편 옆에, 내 아들 옆에. 두려움과 서러움에 한기가 든 정희가 몸을 웅크렸다.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구나. 정희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전화 한통을 순식간에 난동으로 만들어버리는 저들이 소름 끼쳤다. 대단한 실력행사였다. 정희는 사람들이 왜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과거부터 저들은 늘 가만히 있는 자신을 괴롭혔다.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내 남편 옆에 있는 나를 막아. 당신들은 당신들 일 하란 말이야. 무슨 상관이야? 정희는 유철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제 편이었고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정희가 아는 가장 착한 사람이었다. 그가 변했다. 안 된다는 말을 넘어 안 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너도 별수 없구나. 나쁜 새끼. 세상에 착한 사람은 없다. 상황이 그를 착하거나 악하게 만들 뿐이다. 제 목을 물고 늘어지는 자에게마저 웃음을 보일 수는 없다. 이제 유철은 정희에게 가장 나쁜 사람이 되었다. 그 시간, 김보좌관은 혜승과 함께 도연의 아파트에 있었다. 유철이 지역의 아파트와 잠실의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꼭 필요한 것들만 도연의 아파트로 옮겼다. 돌아와 쉴 곳이 있어야 어디를 다녀도 든든하다는 도연 어머니의 충고에 그녀의 아파트는 정리하지 않았다. 아파트는 어머니가 오며 가며 손봤다. 우편물을 챙기고 빈집에 쌓이는 먼지를 청소했다. 인영의 방을 정리하고 유철의 서재로 꾸몄다. 안방 장롱에는 유철과 도연의 옷을 나란히 걸었다. 침대의 침구도 새것으로 바꿨다. 언젠가는 돌아와 예쁘게 살겠지. 그런 심정이었다. 그 집에 김보좌관과 혜승이 먼저 도착해 유철을 기다렸다.
“여기가 아빠네 집이에요?”
“응. 내일 도착하실 거야.”
야간 비행으로 다음 날 집에 도착한 유철을 혜승이 맞았다. 아빠. 아들, 잘 지냈어? 유철은 혜승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벌써 아홉살이었다. 부모의 난장판 싸움을 모를 리 없었다. 유철은 그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하다. 그리고 엄마가 많이 아픈 것 같다고, 그래서 아빠하고 지내야 한다고 했다. 아줌마도 와? 올 거야. 알았어. 어린 아들의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제가 해야 할 뭔가를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울 아들의 심정은 알겠으나 유철도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정희는 생모의 품위를 잃었다. 과거에는 남편으로 자신을 증명받으려 했고, 이제는 아들로 존재를 증명하려 들었다. 이대로 두면 생모의 권리로 또다른 소란을 피울 것이었다. 너 때문에 희생한 나. 그런 나를 책임져야 할 너. 천연덕스러운 미안함의 강요. 유철은 정희가 헤죽헤죽 웃으며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때문에 자신과 관련한 어떤 것도 그녀에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유철이 혜승의 등하교를 직접 챙겼다. 수업이 끝나면 같이 외식도 하고 시장을 보기도 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혜승이 바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들, 왜 양말이 빨 때마다 한짝씩 사라지냐? 세탁기가 먹었나봐. 뭐 인마? 배고파. 아빠 빨래 널 동안 니가 찾아봐. 뭘? 시켜 먹을 거. 예스! 그동안 김보좌관이 매체를 움직였다. 그의 제보를 바탕으로 정희의 정신 상태를 진단하는 방송도 등장했다. 전문가들의 소견은 대체로 비슷했다. 아이의 안전과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정희의 심각한 이혼후유증을 지적하기도 했다. 방송 중 김보좌관이 제보한 통화녹음 파일도 종종 전파를 탔다. 애가 죽어도? 애 아빠 하기 나름이겠죠. 듣기에 따라 협박 같기도, 절실함 같기도 했는데 진행자들이 협박에 힘을 주니 그렇게 들렸다. 정신 나간 부모 많아. 자식을 소유물로 안다니까. 애 목숨을 거는 엄마가 세상에 어딨어. 진유철 재기 가능할까요? 조금 쉬었다가 나오겠죠. 신기한 게 하도연하고 진유철은 사과성명 말고는 한마디도 안 했다는 겁니다. 전처 혼자 떠든 거예요. 절필한 하도연만 불쌍하게 됐네. 진짜 피해자는 하도연이었어. 정희가 두서없이 아이 목숨을 입에 올린 것이 패착이었다. 터무니없이 처참한 상황이었지만 마냥 두둔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희가 기자에게 심경을 털어놓아봐도 대중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안타까운 심정은 알겠으나 아이를 돌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엄마로 판단했다. 그녀의 감정조절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간 쏟아낸 말이 너무 많았다. 말이 많으면 제 말에 발목 잡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불행했다면서 전남편한테 왜 저렇게 매달리는 거지? 이상한 여자네.
유철은 정희에 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다. 전처분의 이상행동이 과거에도 있었습니까? 현재는 어떤 상태입니까? 치료 중입니까? 유철이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강한 예스,가 되었다. 그가 차마 밝힐 수 없는 어떤 사정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추측했고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오래전 정희의 집착적 동행을 증언한 지인들도 등장했다. 지독한 의부증이나 스토커 수준으로 유철이 아내를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고. 신분을 밝힌 생생한 증언들이어서 파급이 컸다. 그 때문에 유철의 이혼을 다행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정희와는 단 한번 만났다. 혜승의 짐을 챙겨와야 했다. 정희는 의외로 차분하게 유철을 맞았다. 혜승의 짐도 미리 챙겨두었다. 유철이 그것들을 들고 나가려는 순간 물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니? 유철이 잠시 멈칫했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갈게. 그것이 끝이었다. 과연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같은 행동도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거였다. 사람이 싫으면 존재 자체가 이미 잘못이었다. 정희가 싫었던 유철의 눈이 그녀의 모든 것을 잘못으로 인식했다. 학교 앞에 서 있던 정희는 보기 싫었고, 국회 앞에 서 있던 도연은 보기 좋았다. 그러니 뭘? 하고 묻는 정희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너라서 그랬겠지. 미안하다. 이별의 원인은 정희의 잘못이라기보다 정희 본인이었다. 싫다. 그보다 더한 이별 사유는 없었다. 잘못을 밥 먹듯 해도 그녀가 싫지 않았더라면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희를 정리하고 유철이 세상으로 나왔다. 당 지도부와 면담도 가졌다. 의원직은 사퇴했으나 출당 조치는 없었으므로 당원 자격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세상이 동정으로 다시 호명했을 때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미적거리면 잊힌다. 유철은 다음 출마 지역을 제 고향으로 잡았다. 물러난 지역보다 더욱 험지였지만 그의 정치인생이 그랬다. 이제라도 고향으로 내려가 기반을 닦아둬야 했다. 거칠고 지저분한 논란도 대충 정리됐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대중의 몫이었다. 유철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정하고 도연에게 전화했다.
“잘 지내나?”
“여기 벌써 서늘해요. 밖에도 잘 안 나가고, 맨날 자.”
“잘했다. 추운데 나가지 마. 근데 연아, 인제 고향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으음. 혜승이하고 먼저 가 있어요. 늦지 않게 갈게요.”
“올래?”
“아버님이 추울 때 오라고 했잖아요. 내 메밀밭도 있고.”
“맞다. 빈집 골라서 예쁘게 해놓을 테니까 천천히 와라. 필요한 거 있나?”
“햇빛 차단 96% 이상 암막커튼.”
“암실 수준으로 해놓을게. 다른 건?”
“없어요.”
유철이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궂은일을 마무리할 동안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려준 도연이었다. 장수의 아내가 함께 전장에 나가야만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아니다. 장수가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현명한 아내다. 피가 낭자하는 한복판에 아내가 서 있다면 장수는 아내의 목을 먼저 쳐야 한다. 장수의 아내는 적의 집중 표적이며 그녀를 호위하느라 아군의 전력만 손실된다. 비록 막사에서 병사들의 밥을 챙긴다 한들 도움이 되겠는가. 밥을 푸던 병사들이 주걱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위해야 한다. 어리석은 내조를 목도하고도 어화둥둥 내 사랑 손 놓고 있으면 그는 장수의 갑옷을 벗어야 한다. 제 목숨뿐 아니라 아군 전체가 몰살될 수도 있다. 큰일은 미련한 사사로움이 망친다. 도연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싸우러 나가는 유철을 웃음으로 배웅하고 저는 남아 기도했다. 남편을 전쟁터로 내보낸 아내. 떨어져 있어도 같이 싸우고 같이 견디는 것이다. 유철은 아내에게 승전보를 알릴 수 있어서 기뻤다. 이제 자신이 기다릴 차례였다.
*
유철은 몸이 정희를 기억해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어깨에 기댄 머리, 팔을 잡던 손, 허리에 둘렀던 팔. 정희는 사랑받는 아내의 연기를 놀라울 정도로 유철에게 했다. 어떤 행동도 어여쁜 아내. 상상 속 가상의 아내를 때때로 흉내 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울음과 웃음은 그래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유철은 관객이면서 배우였다. 연기하는 아내를 지켜보면서 같이하는 연극. 해봐. 뭐든. 다 받아줄게.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남편이 그의 배역이었다. 나름 노력했다. 자신의 섣부른 청혼으로 한 여자가 남편의 마음에 없는 아내가 되었다. 미안했다. 좋은 남편은 아닐지라도 나쁜 남편이 돼서는 안 됐다. 제 청혼을 책임져야 했다. 살다보면 정들고 사랑도 하겠지. 그러나 사랑은 연민이나 죄책감에서 오지 않았다. 미안함이 부채의식으로 쌓여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웃음이 일그러져 보이고 울음이 청승맞아 보였다. 싫었다. 그녀의 행복한 표정에 가슴만 답답했다. 혹시 넌 정말 행복한 거니? 너라도 행복하니 다행이네. 안도와 체념으로 불안하게 지킨 가정이었다. 정희의 자존심도 있었다. 남편이 사랑하지 않는 아내. 본인도 인정하기 싫었고 누구에게 들킬까 노심초사했다. 그녀의 행동이 과장된 이유였다. 제 발 저려 사랑을 증명하려고 드니 더 쉽게 발각됐다. 다수의 눈은 유철과 정희를 사랑으로 보지 않았다. 인공적인 부부 혹은 병적인 집착. 유철은 자신의 비루한 사랑을 원하는 정희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연극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거기까지였다. 연극과 사랑은 달랐다. 신혼 때는 잠자리도 자주 가졌다. 사랑인 줄 알았고 행복인 줄 알았다. 몸의 밀착만큼 삶도 밀접해졌다. 유철의 일거수일투족이 정희와 붙었다. 아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녀와는 키스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랬다. 입술이 닿는 행위가 없었다. 입을 맞추고 싶지 않은 아내. 손잡거나 안는 것은 그럭저럭 해냈지만 입술은 냉정하게 솔직했다. 사랑이 아니었나보다. 정희의 행동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지? 부부라도 지나친 행동들을 정희는 태연하게 했다. 응당 그래도 되는 사이를 강조하듯 늘 여보, 소리를 붙여서. 그런 아내가 곳곳마다 있었다. 함께 귀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 짧은 여정에조차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지겹고 싫었던 아내. 정희야, 니는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나. 미안하다. 그래도 미안해서 사는 거 이제 못하겠다. 그만 나를 버려라.
정희는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유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그랬기에 사람들이 정희를 모욕할 때조차 그는 분노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과거에도 정희를 대놓고 비아냥댔다. 뭐야, 저 아줌마. 지가 뭐나 되는 줄 아나봐. 진유철 아내님이시잖아. 꼴값 떤다. 소리가 들리는 근접거리에서 들으라고 떠들었다. 당신, 사람들이 나 그렇게 보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런 말이 있기는 했지. 나는 상관없어. 괜찮아. 악착같이 붙어다녔다. 남편이 괜찮다니까 행복한 얼굴로 함께 다녔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그의 편에 섰다. 유철도 어찌할 수 없는 아내. 행동반경이 그의 영역 안이었다. 스토커였어. 우리나라 부부스토커 인정되나? 부부강간은 인정되지. 스토커가 아내가 된 거야. 아내라는 타이틀로 정체를 가렸어. 쟤한테는 무법지대가 됐다고.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계속 진선생을 주시해. 소름 끼쳐. 듣겠다. 들으라고 해. 아니면 와서 따지든가. 결국 정희가 무너졌다. 저들의 무시와 야유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유철은 아내를 외부로부터 가려주지 않았다. 정희를 위해 단 한번이라도 혼자 가겠다고 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희도 못 이기는 척 동행을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밖으로 내던졌다. 그래, 가자. 와. 정희가 사랑받는 아내의 가면을 먼저 벗었다. 거짓이잖아, 너. 유철도 좋은 남편의 가면을 벗었다. 알고 있었잖아. 가면을 벗은 유철은 그 무엇보다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 먼저 가면을 벗은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차라리 거짓의 온도가 진실의 온도보다 뜨거웠다. 그런 그가 여자를 만났다. 함께한 사진조차 거의 없었다. 만남 초기 때의 몇장이 고작이었다. 그녀를 직접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그녀의 상태 그대로 두는, 자신의 개입으로 그녀를 흐리지 않는, 그만의 지독한 사랑이었다.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대했다면 숨 못 쉬게 서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취급과 대접의 차이. 아내니까 아내로 취급했고 부정도 하지 않았다. 예, 아냅니다. 너 그 말 할 때마다 얼마나 슬퍼 보였는지 아니? 나를 소개하는 네 웃음이 그렇게 아픈데 사람들이 몰랐겠니? 그러면서 어쩌면 그렇게 함께 다녔니? 지독하다, 너.
일주일. 내가 끝내줄게. 유철은 이미 사퇴한 뒤였다. 도연만 무너뜨리면 됐다. 계획대로 도연이 절필했다. 둘의 이별만 남았었다. 성공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대중은 내연녀가 아니라 조강지처 편이었다. 그런데 이 내연녀가 생각보다 지독했다. 피해자로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공범을 자처했다. 이혼 직전에 만났다는 사실로 도덕적 잣대에서도 슬며시 비껴났다. 사실상 남이었을 때의 연인. 피해자일 수도 있는 그녀가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동정도 얻었다. 정치인과 소설가. 불륜은 둘에게 치명적인 그물이었다. 그런데 도연이 동정으로 그물을 찢고 나와 유철을 구출하고 방생했다. 가서 죽여. 그 일주일은 둘을 잡는 그물이 아니었다. 예민한 구역에 놓인 지뢰였다. 밟는 사람이 죽는. 유철과 도연은 절대로 밟지 않았다. 일주일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토로했더라면 정서상 괘씸죄로 둘이 죽었을 것이다. 유철과 도연은 그대로 시인하고 그것에서 멀어졌다. 그것을 정희가 겁 없이 밟았다. 징글맞게 물고 늘어지는 전처. 그 자리에 가만히 두었어야 했다. 그것이 둘을 평생 고개 숙인 채 살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정희가 뒤늦게 후회했다. 당신들은 몰라. 우리는 우리밖에 없었어. 우리는 우리만 믿었다고. 앞에서 환영하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당신들 안 믿었어. 너 위선적인 거 그 여자 아직 모르지? 들키면 언제든지 돌아와. 그래도 아는 내가 편할 테니까. 너 힘든 시절에 그래도 옆에 있었던 사람은 나니까.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을 함께 건넜다고 영원을 보장할 수는 없다. 어쨌든 지나왔으니 함께 건넌 고난의 추억으로 치부하기에는 유철이 너무 고단했다. 유철은 그때를 버렸다. 그럼에도 정희는 어쩌면,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함께 살았던 집에서 그와 아들을 기다렸다. (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