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지역이라는 타자와 지역감수성
손남훈 孫南勳
문학평론가.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및 편집주간 역임. 평론집 『루덴스의 언어들』 등이 있음. orpeus97@naver.com
1. ‘지방’이 된 ‘지역’과 지역감수성
지금까지 지역문학에 대한 논의는 수없이 이루어져왔다. ‘지역문학은 문학 저변의 뿌리’라거나 ‘지역문학이야말로 한국문학의 대안’이라는 상찬에서부터 ‘지역문학의 구조적 열악함’을 짚거나 ‘지역문학 작품의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면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지역문학이라는 현상에서 가능성 또는 잠재성을 발견하고 이를 한국문학의 자장 안으로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지역문학을 논의하는 자리에 빠진 것이 하나 있다. 지역문학, 나아가 지역이 어떻게 감각되고 있는지를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역과 중앙, 지방과 서울의 이분법적 구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같은 구분의 유의미 또는 무의미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일반 대중독자에게 지역이란 무엇으로 사유되고 이해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변두리를 의미하는 ‘지방’이라는 말 대신 모든 곳이 포함되는 ‘지역’이라는 말을 쓸 때, 거기에는 서울 중심의 한국문학장이 가진 구조적 폐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신념이 깔려 있다. ‘언어는 권력이자 이데올로기’라는 푸꼬(M. Foucault)의 생각을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이, 그 신념의 보편타당성이 승인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들이 (류)‘지방문학’이 아닌, ‘지역문학’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한 근본 바탕이 된다. 그러나 지역문학을 말하고자 하는 바로 이 지면에서조차 ‘지역’이라는 말은 이제 이전의 ‘지방’과 거의 동의어로 굳어져가는 것만 같다. 지역의 보편성이 그 자체로 통용되기보다는 특정 경향이나 집단의 입장과 시각을 전제하는 것으로 이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 글을 쓰는 지금, 필자에게는 엄습하고 있다.
지역은 말 그대로 지역이다. 지역을 사유하기 위해 반드시 서울 이외의, 이를테면 필자와 같은 부산 지역 평론가가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지역은 서울이나 부산만이 아니라 한반도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든 곳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지역을 말하는 지금 여기에도 지역은 언급되는 동시에 배제되는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대개의 사람들이 지역이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에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문화에서 표상되는 지역민의 모습은 손쉽게 스테레오타입으로 특정 지어지고 때때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지역을 둘러싼 공공정책은 지역민을 배제한 채 희생의 논리를 강요하며 집행과정에서 지역민의 목소리는 묵살되곤 한다. 지역은 주체인 듯 보이지만, 그렇게 타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지역이 모든 지역이자 아무 지역이 되지 못하고 서울 이외의 곳곳, 즉 ‘지방’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고 주변화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진단을 내리지 않고서 지역을 말하고, 지역문학의 발전을 언급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최근 ‘젠더감수성’이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의 자기 목소리가 사회적 의제로 전면화되면서 성차에 기반한 우리 삶의 인식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가운데서 자주 언급되는 용어이다. 지금까지 타자적 존재로 낙인찍혀온 여성들, 성소수자들이 정당한 자기 몫을 주장하는 과정에서도 이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지역이 지역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지역차에 기반한 우리의 인식과 사고방식 또한 변화가 필요한 대상이 아닐까? 다시 말해 젠더감수성에 대응하는 지역감수성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젠더감수성이 성(性)에 대한 서로 간의 이해, 나아가 타자의 타자성을 수용하고자 하는 윤리적 태도와 관련되듯, 지역감수성 또한 지역에 대한 상호 존중과 이해, 지역을 비하하거나 편견을 가지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비롯한다. 지역감수성은 결국 ‘타자로서의 지역’을 전제한다. 문제는 지역이 본래부터 타자가 아니라 타자여야만 했다는 것이다.
지역감수성의 재고가 필요하다는 필자의 말에 바로 공감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지역이 무슨 차별을 당하고 있는가, 페미니즘 문제와 지역이 동일시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질문은 기실 젠더감수성 문제가 처음 제기될 때와 같은 수준이다. 감각되지 않은, 그러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문제시하는 불편함이 전제된 질문인 것이다. 지역의 타자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감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지역을 오직 지역의 문제로만 한정시키고 그것과 분리시키는 감성적 차원의 위계가 선제적으로 작동해온 것이다.
더욱이 현재 한반도는 그 어느때보다 평화무드가 조성되면서 남북통일의 청사진 또한 조금씩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북한을 지역의 관점에서 재고하려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경제논리에 기반해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거나 민족 당위성에 입각하여 상호호혜의 감정적 동일성을 확인하려는 데 집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의 지역과 지역민에 대한 부족한 지역감수성으로 평화통일의 길을 앞당기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통일을 상상하고 사유한다는 것은 지역을 상상하고 사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역감수성은 단지 지역의 복권이라는 당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통일을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와도 관련이 있는 만큼, 긴요하고 시급하게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2. 지역이 없는, ‘지역 영화’들
지역감수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진단은 먼저, 한국의 문화 전반에 지역을 대하는 시각과 태도,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데서 확인된다. 특히 한국 대중문화의 지배적 장르라 할 수 있는 영화에서의 지역감수성 결여, 그에 따른 지역의 타자화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하다.
부산을 대표하는 영화로 많은 이들이 주저없이 꼽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2009)를 예로 들어봐도 마찬가지다. 두 감독 모두 부산 출생으로, 각 영화에서 부산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이유 또한 감독의 전기적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두 영화가 과연 부산을 제대로 묘사했는지는 재고가 필요하다.
먼저 「친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영화는 시종 부산을 배경으로 서사가 진행되고 인물들도 대부분 부산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지배적인 시각, 카메라의 시각과 등치되는 내레이션을 뱉는 인물은 상택(서태화 분) 이다. 영화는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며 조망 가능한 존재로 신뢰할 수 있는 상택의 해석으로 진행되고 있다. 「친구」에서 상택은 서사 해석의 유일하고도 객관성을 담지하는 언술자이고, 그 언술의 신뢰성은 공부를 잘해서 서울의 대학을 나온 인물이라는 설정에 의해 암묵적으로 담보된다. 부산 사람이 감성적이고 폭력적이며 무지하다면 그를 바라보는 해석자, 서울 사람 상택은 이성적이고 관조적이며 지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준석(유오성 분)과 동수(장동건 분)의 의리와 갈등을 서사의 전면에 내세우고 상택을 뒤에 숨김으로써 역설적으로 상택이 행하는 언술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되도록 했다. 마치 회화의 구도가 소실점에 의해 구성되지만 정작 저 자신은 모습을 감추듯 말이다. 영화는 부산 남성의 마초이즘이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가정되고 있는데, 그 이미지는 상택의 진술에 의해 확정된다. 부산성(釜山性)으로 규정된 마초이즘은 서울의 시각에 의해 구성되고 결정되어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산과 부산 사람은 휘발되고 없다.
천만 영화 「해운대」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부산 토박이인 최만식(설경구 분), 강연희(하지원 분) 커플과 서울 사람 김휘(박중훈 분), 이유진(엄정화 분) 커플은 대조적으로 그려졌다. 최만식은 사직 운동장에서 술 마시고 야구 선수들을 향해 욕을 퍼붓는 몰상식한 사람이며 강연희는 아버지를 잃고 억척스럽게 생계를 꾸리는 인물이다. 김휘는 특유의 통찰과 지식을 바탕으로 초대형 쓰나미를 경고하는 ‘예언자’에 가까운 인물이며 이유진은 국제회의 전문가로 활동하는 커리어우먼이다. 영화는 부산/서울을 대비시키면서 전자를 무지하고 촌스러운 인물로 그리는 반면, 후자는 이지적이고 세련된 인물로 그린다. 또한 쓰나미를 경고하는 김휘의 주장을 무시하는 부산 지역 관공서의 작태를 그리고, 쓰나미 이후 살아남은 동네 양아치 오동춘(김인권 분)이 특별한 검증 없이 공훈을 세운 것으로 묘사한다. 지역의 공공서비스가 망가져 있거나 적어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상의 묘사는 부산 기장을 배경으로 한 「보안관」(김형주 연출, 2016)에서도 두드러진다. 과잉 수사로 낙향한 대호(이성민 분)가 행하는 ‘오지랖’은 월권에 가깝지만 지역공동체는 오히려 그를 두둔하기에 바쁘다. 지역공동체에 대한 불신과 편견이 무엇보다 구체적이고 촘촘하게 드러난 영화는 바로 「도가니」(황동혁 연출, 2011)다. 이 영화는 ‘무진’이라는 가상적 공간이 배경이지만,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했기에 누구나 특정 도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도가니」는 특권층이 지닌 부패와 부조리, 커넥션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그들의 ‘변태성’이 힘없는 약자에게 얼마나 거대한 폭력으로 존재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지방’의 교육·치안·종교·사법권력에 대한 ‘중앙’의 불신과 냉소, 더 나아가 공포가 서려 있다. 마치 무진에 자주 끼는 안개처럼, 지방은 제 모습을 온전하고 투명하게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 은밀하고 치밀하게 비도덕적이고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영화는 안개를 걷어내고 실상을 알리려면 지역공동체의 자정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설파한다. 그런 점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강인호(공유 분)는 지역의 공포스러운 이면을 폭로하는 메신저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중앙’의 이성적이고 분석적이며 정의로운 것과, 집단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반이성적이고 무능하며 진실을 은폐하는 ‘지방’의 이미지를 극적으로 대비한다. 똑같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다루지만 「택시운전사」(장훈 연출, 2017)에서는 광주 사람들이 보인 순박함과 의리를 주목하는 반면, 「1987」(장준환 연출, 2017)에서는 진실을 추적하는 서울 사람들의 냉철함을 강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역과 지역민을 재현하는 영화의 태도를 그저 허구라고 치부해버려도 좋은 것일까?
3. 지역감수성의 부재와 지역 정책
지역에 대한 몰감각과 몰이해를 영화와 같은 픽션에서 발견해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실제로 지역감수성의 부재가 현실에서 어떠한 방식의 차별을 발생시키는가를 명시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역의 타자화는 그것을 타자화하는 시선과 타자로 규정되는 대상 사이의 위계적 구조가 전제되어 있다. 여성 문제, 난민 문제, 성소수자 문제, 외국인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 문제, 새터민 문제 등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지역이라는 타자 또한 위협적인 힘을 가졌거나 열등한 존재라는 근거 없는 추정과 그에 따른 배제의 논리가 작동한다. 모든 지역은 평등해야 한다는 논리는 일정한 한계—이를테면 신문의 사설이나 지역 담론, 지역의 커뮤니케이션이나 공공정책 등—안에서만 합법적으로 허용되고 승인된다. 실제로는 허용과 승인을 시혜하는 지역과 수혜의 대상인 지역 사이에 관용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한쪽으로는 지역의 보편성을 말하면서도 다른 쪽에서는 지역 혐오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언사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 예다. 다시 말해 지역감수성의 부재, 위계화된 지역인식 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 형성된 집단적 시각이다. 그것이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대중매체로 표상되어 지역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범주를 설정하며 평가를 내리게 하는 인식틀이 된다. 지역감수성의 부재는 알게 모르게 꾸준히 훈련되고 양성되는 문제인 것이다.
이를테면 정치단체나 언론이 쓰곤 하는 ‘광화문 촛불혁명’이라는 언술은 지역감수성의 부재를 잘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2016년 하반기와 2017년 상반기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혁명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으며 해외 교민 사회의 호응도 매우 컸던, 글로벌한 혁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혁명의 기운을 서울의 ‘광화문’으로 축소시킨다. 물론 이를 일종의 ‘제유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촛불혁명을 특정 공간에만 정위시키는 수사는, 혁명의 지난한 과정은 모든 시민이 똑같이 부담하고 그 공과는 특정 지역 시민으로 한정 짓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은 지역감수성의 부재는 특히나 공공정책 수립이나 집행과 결부될 때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예를 들어 지금도 여전히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밀양 송전탑 건설 문제는 지역을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데서 비롯한 전형적인 현상이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주민을 ‘님비’로 치부하고, 그들에게 ‘할매’라는 칭호를 붙여 무식하고 고집 센 지역민의 이미지를 부여할 때, 결과적으로 지역은 그저 신고리 핵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서울까지 원활하게 공급되기 위해 당연히 희생되어야 할 위치로 전락한다. 거기에는 왜 지역에만 핵발전소가 존재해야 하는지, 핵발전소의 상시적이고 영구적인 위협이 지역민에게 어떠한 문제와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지, 공공정책과 지역사회 간의 쟁점 조율은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해야 하는지 등은 무시된다. 만약 송전탑 건설 문제가 밀양의 ‘촌동네’가 아니라 서울의 시내 한복판에서 발생했더라도 지금처럼 외면당하고 있을까?
박근혜정권 때부터 이어진 경북 성주의 사드 배치 문제, 제주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 문제, 경주 지진으로 다시금 주목하게 된 핵발전소 문제 등도 마찬가지다. 지역을 당연한 희생양이자 볼모로 삼고 지역민의 고통을 무시하며 지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지역감수성의 부재를 보여준다. 여성이, 난민이, 성소수자가, 외국인노동자가, 결혼이주여성이, 새터민이 배제되지 않고 멸시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지역 또한 희생당할 만하거나 희생당해도 괜찮은 장소가 아니다. 그곳엔 터 박고 살고 있는 지역민과 그 지역민이 만든 삶의 두께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를 무시할 때 지역은 해석의 권위를 가진 특권자들의 언술로 재배치된다. 최근 일본 자위대가 제주 해군기지 국제 관함식에서 욱일승천기 게양 문제로 참여를 거부한 사실은 그 예다. 언론은 욱일승천기를 주목하지만 제주 강정 주민에게는 해군기지 그 자체, 국제 관함식 거행 자체가 문제가 된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강정 주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또다른 예를 들자면, 광주 금남로는 민주화의 성지이고 부산 해운대는 여름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라는 이미지 규정은 그곳에 거주하는 지역민이 아니라 그곳을 해석하고 규정하는 권위적인 중앙에 의한 감각의 분배 양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호남 지역민을 특정 음식에 비유하여 혐오하고, 유사한 방식으로 경북 지역민을 비난하는 언술이 공공연히 일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역은 지역민이 아니라 해석적 언술의 권위를 가진 특정한 주체에 의해 발견되고, 발명되며 감각되고 있다.
지역 외부에서 행해지는 그 지역을 규정하는 언술의 지배적인 이미지 구축과 작동 과정에 대해, 지역은 지역감수성을 바탕으로 지역의 이질성, 결정 가능성을 새롭게 창출하고 담론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 문제에 대해 지역 스스로가 과연 나름의 주체적 언술로 실정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고 감각의 전화를 꾀하는 담론들을 생산해내고 있는가?
중앙의 지역감수성 부재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지역에도 지역감수성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지역은 중앙 이상으로 지역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역 안에서도 중심의 역할을 자임하는 지역과 그로부터 배제되는 지역이 또다시 구별되고 위계가 설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낙동강을 취수원으로 해온 부산 수돗물 공급 문제가 그러하다. 지난 몇년간 낙동강 오염으로 인해 수돗물의 질을 담보할 수 없어졌으니, 진주 남강댐과 창녕군 등의 강변여과수를 취수원으로 삼자는 주장은 부산 인근 지역을 부산을 위해 희생시키겠다는 태도로 보인다. 낙동강 변에 우후죽순 들어선 공장에서 나오는 각종 오폐수를 정화하고 시설 이전을 단행하며, 4대강사업으로 망가져버린 낙동강의 생태환경을 복원하여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취수원이 오염되지 않은 다른 지역을 희생시켜 부산 시민의 편익으로 삼겠다는 발상인 셈이다. 부산이라는 중심이, 주변 지역을 또다시 배제하는 배제의 배제, 희생의 희생 구조를 당연한 듯이 제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지역담론은 지역과 중앙의 이분법적인 구도만을 전제해서는 핵심적인 문제제기에 이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지역담론을 제기하면서 지역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거나 폄하해서는 문제의 본질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을 쉽사리 ‘악마화’하는 것도 지역을 사유하는 올바른 전제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비판하고 문제로 삼아야 할 대상은 특정 지역이나 지역민이 아니라 우리 안의 지역감수성이다. 우리의 부족한 지역감수성이 다른 지역과 지역민의 삶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구조를 작동시키는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야 한다. 지역감수성은 일차적으로 자기성찰의 태도와 깊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지역문학의 고사 위기
지역을 지역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 지역을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에 얽매인 감각으로부터 벗어나 감각의 재분배를 실행하는 것, 지역을 폄하하거나 그 가치를 은연중에 절하하지 않는 것, 중앙의 시선을 내면화한 지역 사유의 틀을 재고하는 것, 거기서부터 지역감수성은 싹틀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지역문학은 단순히 ‘지방문학’을 긍정하고자 하는 레토릭이 아니다. 지역문학이야말로 지역의 ‘장소 사랑’을 바탕으로 지역감수성을 함양하는 데 일조하는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지역문학의 옥(玉)과 석(石)을 고르는 비평의 역할과 책임의 막중함도 여기서 언급될 수 있다. 이제 문학비평은 지역감수성을 장착하고 암묵적으로 지역문학을 지역 배제의 논리로 보는 태도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지역의 형상화 방식이 그 장소를 타자화하는 것은 아닌지, 장소의 장소성을 적실하게 구체화하는지 비판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미적 감성이라는 미명하에 장소와 장소성을 말살하는 시대착오적 재현 방식과 그 내적 욕망을 엄밀하게 분석, 규명해내는 감식안이 필요하다. 지역의 모든 작품을 읽겠다는 따분한 근면함이 아니라 모든 작품을 지역문학의 시각으로도 읽겠다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지역과 지역감수성은 그러할 때에야 온전히 발견되고 새롭게 발명될 수 있다.
지역문학은 그 담론적 언술 자체가 가지는 콘텍스트와 상관없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 지역을 형상화하고 향유하는 역동적 활동의 일환이다. 그러나 정작 지역민이 문학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시스템은 지역 안에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니, 오히려 지역문학의 시스템은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문학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지역문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로부터 지역감수성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산을 예로 들어보면, 부산지역 대학 중 한국문학과 관련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과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특히 많은 사립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와 문예창작과가 통폐합되거나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학과 단위로 ‘국어국문학과’가 있던 대학은 본래 일곱곳이었으나 지금은 국립대 두군데밖에 없고, 문예창작과는 두곳이 있었으나 모두 통폐합되어 사라졌다. 다만 국어국문학과에서 이름을 바꾼 한 대학에만 문예창작비평학과가 있다. 지역문학이 지역 대학의 활성화 없이 그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할 때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지방 대학 고사 정책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하는데 현재까지도 아무런 처방전이 제시되지 않았다. 강사법 시행 또한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을 더욱 빠르게 고사시킬 것이다. 이미 관련 대학의 전공 학생 수뿐만 아니라 대학원 진학자의 수도 줄고 있어 앞으로도 문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작품을 창작하는 문학 지망생의 수는 갈수록 적어질 것이다. 지역의 문학활동이 지역 대학 전공자들의 배출과 맥을 같이한다고 본다면, 이러한 상황은 결국 고급독자의 감소와 함께 문학을 둘러싼 제반 환경의 위축과 지역문학의 고사를 불러올 것이 뻔하다.
같은 맥락에서 초중등의 지역문학 교육 미비도 지역문학을 위축시키는 데 한몫을 담당한다. 부산에는 세개의 문학관이 존재하는데, 요산 김정한 문학관, 향파 이주홍 문학관, 김성종 소설가가 사비를 털어 만든 추리문학관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역의 초중고생 대다수가 이들 문학관에 가본 적도 없고, 지역문학인들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실정이다. 심지어 관련 전공자들조차 이들 문학관과 문인들의 행적을 잘 알지 못한다. 이는 초중고 문학 교육에 지역문학에 대한 아무런 자의식이 없다는 데서 비롯한다. 문학은 단지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구체적인 삶의 양식 속에서 그 생명력과 역동성을 생생한 체험으로 다가올 수 있게 한다. 더욱이 지역문학은 단지 그 지역을 표상한 문학에 그치지 않고 그 지역의 장소성과 장소 사랑을 드러내며 지역민의 삶을 구체화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지역문학은 인식론적 문제이자 존재론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역문학 교육의 부재는 지역감수성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문학과 삶을 분리해내어 문학이 고사해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 근본 이유가 될 뿐 아니라 지역을 인식하고 지역에서 살아가는 제반 활동의 의미와 감각을 퇴색시키는 데 일조한다.
5. 지역감수성에 바탕을 둔 지역 문예지 지원 정책의 필요성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역문학은 나름의 자생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역에서 발간되는 문예지의 존재 또한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지역에서 발간되는 문예지 대부분이 독립적으로 운영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결국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문예지 발간이 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기실 문예지를 포함한 문학 영역을 국가에서 지원한다는 것이 그다지 긍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문학이 국가를 비롯한 제반 시스템과 기존 인식틀에 대한 발본적 문제제기를 가하는 데서부터 그 존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 현재의 지원 시스템은 문제제기의 대상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문예지 지원으로 한정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문예지는 국가의 지원 없이 자생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럴 때에야 문예지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역 문예지는 어느 매체든 간에, 수익을 내기 위해 발간한다고 말하는 출판사 관계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매체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는, 다시 말해 발간해야 하는 당위가 있기 때문에 다들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지원’이라는 것이 지역 문예지의 현 상황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즉 지원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지원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문예지의 더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문예지의 특성에 맞는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부산에는 『푸른글터』라는 청소년 문예잡지가 발간되고 있다. 지역 중고생들이 강연, 현장체험 학습, 독서토론 등 여러 활동을 통해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들을 모아 발간하는 잡지다. 따라서 이 잡지는 단순히 매체 발간에 필요한 원고료만 지원된다고 해서 꾸려질 수 없다. 오히려 지원금의 상당 부분은 원고료보다 현장 활동에 필요한 경비로 대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문예지의 성격과 방향성에 부합한다.
또한 『오늘의문예비평』의 경우, 시·소설 등 창작문학은 일절 게재하지 않고 문학을 비롯한 정치·사회·문화 담론과 비평문을 싣는다. 비평 전문지의 특성상, 다른 종합 문예지보다 저변이 넓지 않아 정기구독자 수 또한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들은 부산, 나아가 한국의 비평문화 활성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강연회, 세미나, 대학생 독서 캠프, 토론회 등을 병행해왔다.
문예지는 단지 일년에 몇차례 발간하는 정기간행물에 그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문예지는 하나의 ‘플랫폼’이다. 문예지는 발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문예지를 만드는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게 하고 그 공동체로 하여금 문예지의 정체성과 관련되는 여러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됨으로써 존속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행 문예지 발간 지원사업하의 지원금은 오직 원고료로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문예지라는 플랫폼의 전반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필요하다 해도 단 1원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면서 정작 지원 신청을 할 때에나 교부·결과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는 구독자 수가 얼마나 늘 수 있는지, 늘어났는지를 쓰도록 되어 있다. 문예지 지원사업의 진정한 목표가 문학 저변의 확대에 있다고 한다면, 원고료만을 지원하는 현행 경직된 지원방식에서 벗어나 문예지의 성격이나 체제에 따라 맞춤형으로 지원하도록 유연화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문예지는 지역문학의 발전을 위한 플랫폼으로, 그 지역에서 행해지는 문학 활동의 거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역 문예지의 미래 가치는 곧 그 지역문학의 미래와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지역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지역 문예지 지원정책 수립은 지역문학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최근 천명한 지역 거점 문예지 지원은 지역감수성에 기반한 중요한 사례로 의미가 있지만, 여전히 지역 문예지 개개의 가치와 지향은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내가 뿌리박고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한 자각, 그 장소에 대한 구체성을 형상화하는 문학작품의 존재, 장소 사랑과 장소 나르시시즘의 엄밀한 구분과 같이 그 작품에 드러나는 형상화 방식에 대한 줏대와 잣대의 마련, 이 모든 것이 지역문학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지평을 확장해 지역문학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문학 자체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바탕에 문학이 지역감수성을 감각하게 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지 못한다면 이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지역감수성은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소중한 성찰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곧 마주하게 될 통일의 문제와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지역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다.